사랑한다는 것은 신의 창조를 인간이 재현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낳는 것이다. 낳기 위하여 만나야 한다. 만나기 위하여 자신을 상승시켜야 한다. 만남을 통하여 상대방도 상승되어야 한다. 그 방법으로 신의 창조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이고 나머지는 이를 위한 연습게임이다. 사랑한다고 믿지만 사랑을 위한 연습게임에 불과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가치를 드높이지 못한다면. 완전은 낳음의 완전이다. 완전한 소통, 완전한 만남, 완전한 사랑은 낳음이 있는 소통, 낳음이 있는 만남, 낳음이 있는 사랑을 말함이다. 낳음은 창조다. 즉 무언가를 맹그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안에서 그러한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으로 임무를 다하고 만다. 아무것도 맹글지 못한 채. 재현한다는 것은 돌려준다는 의미다. 깨달음은 사회로 돌려질 때 의미가 있다. 성직자는 삶의 모범으로 하여 돌려준다. 예술가는 자연의 완전성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돌려준다. 문인들은 창작으로 돌려준다. 깨달은 이는 사랑으로 돌려준다. 오늘날에 있어서 성직자들은 충분히 돌려주고 있지 않다. 그들은 목사나 스님들이다. 예전에는 학자와 성직자가 구분되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에서 학자도 역시 성직자여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돌려주고 있지 않다. 그들은 낳음의 능력을 잃어버렸다. 왜 타락했는가? 세분화 되었기 때문이다. 즉 초기조건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1사이클의 전체과정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술자가 되어 버렸다. 철학자들만이 초기조건을 기억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절에서 비구나 비구니가 아니라 처사나 보살이 되어버렸다. 성직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초기조건을 재현하는 성직자는 초기에 있었다. 더 이상 육조 혜능은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철학자가 아니라 과학자가 되어버렸다. 낳지 못하는 예술가. 낳지 못하는 창작자. 낳지 못하는 성직자. 낳지 못하는 깨달음은 의미없다. 사랑을, 미를, 완전을, 진리를, 낳아야 한다. 낳되 강단에서 혹은 교단에서 하부구조로 종속되지 말고 독립하여 자유의 영역에서 1사이클을 완성시켜야 한다. 강단에서 혹은 교단에서 그 하부구조로 기능하며 처사나 보살이 되어버린 성직자. 기술자가 되어버린 철학자. 더 이상 낳지 못하는 예술가들. 영감을 잃어버린 자들. 생식능력을 잃어버린 자들..! 그건 실패이고 비참이다. 극복해야 한다. 사랑은 미학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