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아(自我)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자. 문제는 이 단어를 각자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자아가 있는가 혹은 없는가’ 하는 단순한 논의는 위험하다. 각자 다른 의미로 ‘번역’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자아’라는 말은 흔히 말하는 ‘철 들었다’는 표현에서의 철이다.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나와는 다른 의미로 ‘자아’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 아기들은 자아가 없거나 미성숙하다. 한 마디로 ‘철이 없다’는 거다. 예컨대 말을 하더라도 꼭 타인에게 시비를 거는 형태로만 논리를 전개하는 인간은 자아가 미성숙한 인간이다. 철이 들었다는 것은 자기 책임으로 말할 수 있다는 거다.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에 있어서 그러하다. 어느 순간 이렇게 된다. 보통은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이렇게 태도가 바뀐다. 한나라당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세상에는 많은 위험이 존재하며 누군가가 나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며, 나는 힘을 키워서 이들로부터 나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는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이들은 아직 철이 들지 않은 것이다.(물론 철도 철 나름이겠으나.) 철이 들었다는 것은? 당신이 ‘지구라는 별의 관리자’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렇게 보는 인간이 지구상에서 몇이나 될까? 더욱 신(神)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이 있기나 할까? 각설하고.. 아기들은 자아가 없다시피 하다. 즉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이런 점은 엄마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 드러난다. 엄마가 시야에 없으면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주체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컨대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들은 학교에 다녀오면 그날 있었던 일을 전부 엄마에게 시시콜콜 이야기 해야지만 직성이 풀리는데, 이는 아직 자아가 미성숙한 것이다.(주위의 초등학생을 관찰해 보라.) 당신의 유년을 돌이켜 보라. 어느 시점에서 자신이 학교에서 겪은 일을 엄마나 친구들에게 시시콜콜 이야기하기를 그만두기로 결정하는 날이 분명히 있다. 그것이 의미부여의 형태인 것이다. 즉 의사결정은 ‘의미’를 따라가는 것이며 그 의미부여의 주체가 나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철 들지 않은 것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으면? 쉽게 거짓말을 하거나 반사회적 인간이 될 확률이 높다. 자아가 미숙한 유년기에는 판단의 기준이 내가 아니라 엄마인데 그 기준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즉 자아의 순조로운 성숙에 엄마 혹은 가족의 존재는 필요하다. 어느 시점에서 이런 문제가 해결되는데 그 시점이 철 드는 시점이다. 물론 상당수의 인간들은 할아버지가 되어도 철들지 않고 있다. 부분적으로는 철들었겠지만 전체적으로는 철들지 않은 것이다. 자아는 성숙하는 것이다. 그러한 자아의 성숙은 자신에게 어떤 동기부여를 할때 일관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personality란 다분히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즉 어떤 것을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것은 본인이 인위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며 한번 결정하면 다른 모든 판단들을 그에 연동시켜서 결정하는 것이다. 예컨대 쥐를 싫어한다.>쥐는 검다>흑인도 검다>흑인도 싫어한다.. 이렇게 점점 논리가 확대되는 것이다. 나중에 학교에서 학습한 결과로 흑인을 싫어하는 것은 편견이며 이는 잘못된 태도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해도 그 일생을 두고 축적해온 연쇄적인 고리 전체를 바꾸는 작업은 너무나 힘들기 때문에 계속 흑인을 싫어하기로 결정해 버리는 것이다. 흑인을 싫어하기를 그만두면 쥐를 싫어하기도 그만두어야 한다는 논리가 있는 것이며 이건 자신의 인생 전체를 완전히 뒤집는 행동이 된다. 즉 가치관을 바꾸는 일이 되는 것이다. 솔직히 힘들다. 자아의 성숙이란 최초에 쥐를 싫어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러한 결정을 쥐가 했느냐 아니면 내가 했느냐이다. 조금 철이 들면 그러한 결정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쥐가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쥐가 나를 조종하는 것이다. “나는 쥐를 싫어하는 인간이다. 이것이 나의 personality다.” <- 그러나 그러한 결정은 당신이 내린 것이 아니라 사실은 쥐가 내린 것이다. 즉 쥐가 당신이라는 인간을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쥐에게 조종이나 당하는 그런 인간인가? 이런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따져보면 자신이 좋아하는 혹은 싫어하는 즉 personality의 대부분이 자기 자신이 주체적으로 형성한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 우연적으로 결정된 내용 혹은 그러한 결정에 무의식적으로 연동시켜 판단한 사실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고 personality를 자신의 의지로 바꿔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철이 드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아는 점차 성숙해 간다. 나와 나 아닌 것, 내가 결정한 것과 환경에 의해 강요당한 것을 명확하게 구분해 가는 것이다. 즉 나를 형성하고 있는 대부분이 나의 환경이 무의식적으로 강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하나하나 깨부수어 가는 것이다. 프로이드-라깡에 이르는 학계 일각의 ‘자아가 없다’는 논의는 말하자면 환경결정론이다. 즉 인간이 주체적으로 쥐를 싫어하기로 혹은 싫어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쥐를 보고 놀라면 트라우마를 당하여 싫어하게 된다는 식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원천부정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무언가를 보고 심리적인 데미지를 입어서 트라우마에 걸린다는 건데, 이 말은 한나라당 인간들에게는 들어맞는 말이다. 그들은 세뇌된 인간이고, 길들여진 인간이며, 환경에 지배당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즉 프로이드 이후 라깡에 이르기까지 자아를 부정하는 학계의 흐름은 한나라당 인간들, 자아가 미성숙한 인간들, 머저리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일 뿐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닌 것이다. 한나라당의 그들은 원래 철이 안들었기 때문에 자아가 없는 것이다. 당신의 personality는 당신이 자유의지로 결정한 것인가 아니면 당신이 그러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인가? 당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혹은 미녀이기 때문에, 혹은 남성이기 때문에, 혹은 부자이기 때문에, 혹은 가난하기 때문에, 혹은 키가 작기 때문에, 혹은 키가 크기 때문에 당신의 personality가 그렇게 규정되었다면 당신은 철이 없는 인간이고 자아가 없는 인간이다. 여기까지는 낮은 차원의 논의가 된다. 깨달음은 자아를 버리는 것이라는 관점이 있는데 이런 표현은 오해를 낳기 쉽다. 자아를 비운다면 혹은 마음을 비운다면 그곳을 대체하는 것은? 당연히 진리다. 진리는 신의 완전성을 의미한다. 여기서 검토되어야 할 점은 ‘있다’ 혹은 ‘없다’라는 것이 무엇인가이다. 보통 있다고 하면 만져지는 것, 느껴지는 것, 딱딱한 것을 말하는데 그 만져짐, 느껴짐, 딱딱함은 생화학적 전기신호에 불과한 것이다. 한낱 신체감관에 전달되는 전기신호 따위로 존재와 무를 구분한다는건 말이 안 된다. 그 전기신호의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 양파껍질 까듯 벗겨 보면 결국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있다’는 것은? 그것은 ‘의미있다’는 것이다. ‘의미있다’는 것은?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치있다’는 것은? 신의 완전성으로부터 유도된 것이다. 즉 존재란 최초의 완전성으로부터 연역적으로 전개된 것이다. 남발되고 있는 옛 선지식들의 무(無), 비(非), 공(空), 불(不), 멸(滅), 허(虛)들은 이러한 본질을 논리적으로 규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쉬운 말을 어렵게 돌려하는 것이며 체험한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자아가 있는가의 여부는 자아가 ‘의미’있는가로 판정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