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나 스스로 존재 하는 자, 완전한 자, 진리의 주인된 불멸의 신(神)이 오랜 만에 지구를 방문하고 있다고 한다.(이런 내용의 소설이 발표되어 있다고 한다.) 그를 만나기 위해 군중들이 운집하였던 것이다. 신은 인간과 대화하였던 것이다. 그 중에 한 등장인물이 그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겹게 따라붙으며 "삶의 의미가 뭐에요?" 하고 신에게 거듭 질문하여서 신을 짜증나게 하기도 하였던 거다. 권커니 어리석은 질문을 던져서 신을 짜증나게 하지는 말라. 그러지 않는 것이 좋다. 그대 신과의 유익한 대화를 원한다면 말이다. 생각하라. 신의 입장에서 인간과의 대화는 짜증나는 일일 수 있다. 우리는 신에게 좋은 질문을 던지는데 실패하기 때문이다. 이런 대화를 상상해 본다. “지구는 언제 멸망하는가요?” “먼 훗날에.” “당신은 왜 왔습니까?” “볼 일이 있어서 왔지.” “잘 계셨소?” “응.” “다음주 로또 1등 당첨번호는?” “떽! 혼 날래?” “당신은 남자인가요?” “아냐.” “안녕하세요?” “오냐!” “당신은 우리들과 뭐가 다르오?” “왜 너와 나의 다른 점에 관심을 가지는 거지?” “우리는 결국 모두 죽는가요?” “죽음이 두려운가?” "인간을 왜 만들었나요? " “그건 내가 너희들에게 던지는 질문이야.” 우리 신에게 좋은 질문을 던지기는 어렵다. 우리는 신에게 무엇을 질문할 수 있을까? 어쩌면 애초에 인간들은 별로 궁금한 것이 없었던 것 아닌가? 인간들은 도리어 신의 입을 틀어막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지나 않을까. 물론 인간들은 많은 질문들을 던질 수 있다. 그러나 ‘닐 도널드 월시’의 ‘신과 나눈 이야기’는 100프로 인간의 입장에서 기술된 것이다. 신(神)이 비록 인내심이 있다고는 하나 그 따위 대화에 관심이 있을 리 없다. “낙태를 허용해야 하나요?” “혼전순결은 중요한가요?” “황우석 교수의 배아복제는 어떤가요?” “정당한 전쟁은 어떤 건가요?” “십일조를 안내도 되나요?” 이 따위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야 한다면 신의 입장에서 짜증나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인간은 궁금증을 풀기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답변을 들으려 하는 것이다. 그들은 질문하기 전에 미리 정답을 정해놓고 있다.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화를 내고 만다. "죄의식 없이 섹스를 즐겨도 되나요?" “자위 행위는 나쁜건가요?” ‘월시’류의 이런 따위 맹추같은 질문을 던져댄다면 신은 인간에게 굴밤을 멕여주고 싶을 것이다. 사실이지 이런 질문에는 아무리 잘된 대답을 해준다 해도 곧 인간들에 의해 잘못 해석되고 잘못 받아들여지기 십상이다. 인간이 신과 대화하고자 한다면 신의 관심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신의 고민을 고민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무엇인가? 진정한 소통은 체험의 공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체험의 공유가 없다면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학습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 ‘월시’의 신과 나눈 이야기는 신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삶을 학습하기가 되겠다. 정녕 신은 그런 수준의 대화를 원하지 않는다. 닐 도널드 월시는 하나의 테크닉을 발견하고 있다. 일정한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그것은 곤란한 질문들의 핵심을 교묘하게 비켜가면서 질문자가 미리 정해놓은 원하는 답을 던져주는 것이다. 신이 원하는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든 자신의 체험에 기초해서 대화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다. 신의 체험이 창조라면 신은 창조하는 직업을 가진 자들과 대화하고 싶을 것이다. 이천년 전에 한 목수가 신과 대화했다면 아마도 그의 직업이 목수였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세계를 건축한 자와 집을 한 채 건축한 자의 만남이 되겠다. 그렇다면 약간의 대화가 통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신은 인간에게 이미 질문을 던져놓고 있다. 각자의 삶은 신의 질문에 대한 각자의 답안지를 완성해 가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인생에 있어서 그러하다. 잘 사느냐 혹은 못 사느냐 보다 그 답안을 끝성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렇지 않은가? 신은 세상을 창조했고 인간은 신의 창조를 재현한다. 신은 세계를 건축했고 인간은 자기 몫의 사랑을 건축한다. 그 사랑의 체험, 창조의 체험을 공유하는 크기 만큼만 소통은 가능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