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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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2806 vote 0 2008.12.30 (22:58:45)

 

다시 동쪽을 보라

만유의 아르케 중 하나로 원자 개념을 들 수 있다. 원자론은 요소환원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부분을 결합하면 전체가 되고 전체를 해체하면 부분이 된다는 발상이 요소환원주의다. 전체와 부분이 서로 환원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건축과도 비슷하다. 건물을 허물면 벽돌이 남고 벽돌을 쌓으면 건물이 된다. 건물과 벽돌은 서로 환원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 논리로는 부분을 설명할 수 있을 뿐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다.

지상에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것은 지구에 중력이 있기 때문이다. 우주공간에 벽돌로 건축할 수 있을까? 지상에서는 중력이 벽돌을 모아 주지만 중력이 없는 우주 공간에서 벽돌은 허공에 흩어져 버리고 만다.

원자 개념은 한계가 있다. 부분을 설명할 뿐 전체과정을 설명할 수 없다. 만유를 하나의 논리로 일관되게 설명할 수 없다. 뉴턴의 결정론과 기계론적 세계관으로 흐르는 오류를 범하고 만다.

서구정신의 일대비약은 뉴턴의 운동과 에너지 개념에 의해서 얻어졌다. 고전역학의 성립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서구정신의 실패는 대부분 원자개념, 기계적 사고, 결정론적 사고 때문에 일어났다. 무엇인가?

창세기의 건축적 발상이 실패의 원인이다. 하느님의 천지창조 과정은 목수의 건축과정과 비슷하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창세기는 일을 시작할 뿐 완결하지 않는다. 탈레스의 물 1원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탈레스의 물과 가깝고 노자의 무위에 가까운 것은? 딱딱한 알갱이로서의 원자가 아니라 무른 운동과 에너지다. 뉴턴이 운동과 에너지를 파악한 단계에서 서구정신은 일대비약을 이루었다. 비로소 근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서구의 근대는 뉴턴의 운동과 에너지로 얻은 성과를 제 손으로 폐기하고 다시 건축의 개념, 원자의 개념, 딱딱한 기계론과 결정론으로 되돌아가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 탈레스의 물 1원론.. 노자의 유(柔), 뉴턴의 운동, 에너지 개념과 닿아있다. 하나의 논리로 일관하여 전부 설명할 수 있다.

● 데모크리토스와 레우키포스의 원자론.. 뉴턴의 기계, 결정론으로 발전한다. 부분을 설명할 뿐 전체를 설명할 수 없다.

기계론, 결정론적 사고는 근대과학의 성과를 구시대의 낡은 신념과 억지로 결합하고 있다. 창세기의 건축적 발상이 요소환원주의에의 집착을 낳게 했다. 시스템에 집착하는 마르크스주의 오류가 그러하다.

중세의 천문학자들이 종교적 신념에 따라 그들이 발견한 천문학적 성과들을 천동설과 결합하기 위해 복잡한 이론을 고안해낸 사실과 유사하다. 새로운 발견을 낡은 신념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물질 알갱이는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다. 건축의 벽돌은 눈으로 볼 수도 있고 손으로 만질 수도 있다. 순수추상으로 전개되어야 할 과학을 사람의 눈에 보이는 형태로 변조하기 위해 작위를 개입시킨 것이다.

논리학과 수학은 눈으로 볼 수 없다. 연역추론은 순수추상이므로 사람의 눈으로 볼 이유가 없다. 반면 귀납추론은 경험과 관찰에 의존한다. 귀납은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세계이다.

논리학과 수학에 기반을 둔 서구의 근대과학이 에너지와 운동 개념을 도입한 이후 자연과학에서 획기적인 발달을 이루었으나 사회과학은 요소환원주의와 원자론에 발목이 잡혀 인문정신의 암흑시대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이론물리학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의 발전에 힘입어 뉴턴의 결정론을 극복하고 있다. 그러나 인문학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로 대표되는 기계, 결정론적 사고에 붙잡혀 있다. 이것은 슬픈 희극이다.

동양정신이 서구를 추월하는 이유는 우리의 인문주의는 적어도 원자론, 기계론, 결정론에 발목이 잡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서구에 원자가 있다면 동양의 불교에 심(心)이 있다. 만약 심을 희로애락의 감정으로 보았다면 잘못 이해한 것이다. 심은 특히 선종에서 강조한다. 금강경의 공(空)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심은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추상의 세계이다. 심은 중심(中心)을 낳고 핵심(核心)을 이룬다. 변재(邊材)가 아닌 심재(心材)의 의미다. 국가의 심은 서울이다. 서울은 사통팔달한다. 소통(疏通)한다. 소통하여 널리 공명한다.

무엇인가? 서구의 원자보다 동양의 심이 더 탈레스의 물에 가깝다. 원자는 쌓여서 물질을 이루고 심은 소통하여 네트워크를 이룬다. 원자론은 건축이론이다. 건축은 지구의 중력을 빌린다. 중력이 중심(重心)을 이룬다.

중력이 없는 건축은 실패한다. 중력이 없다면 약간의 바람에도 종이처럼 날아가 버릴 것이다. 심이 없는 원자론은 실패한다. 역으로 원자론의 한계가 심(心)에 의해 극복되는 것이다. 심이 원자론을 보완한다.

두 가지 뉴턴이 있다. 서구 진보주의사상의 교착은 뉴턴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때문이다. 뉴턴의 성과들이 뉴턴의 결정론, 기계론, 원자론을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뉴턴이 뉴턴을 죽였다.

에너지와 원자는 이론적으로 충돌한다. 이상하게도 서구에서 에너지 개념은 원자론을 보조하는 하위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지나친 창세기적 사고에의 집착이 서구인의 창발성을 저해한 까닭이다.

인도인들은 불교를 버리고 힌두교로 되돌아갔다. 리그베다의 강렬한 원시성에 매료된 탓이다. 중국인들이 유교를 버리고 원시의 도교로 되돌아간 것과 같다. 서구인의 창세기 집착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퇴행하고 있다.

필자의 구조론은 원자론을 대체한다. 구조는 관절의 구조다. 관절은 둘 사이의 접촉점이다. 접촉점은 정보를 가진다. 정보는 극에 대한 정보다. 세상은 딱딱한 알갱이가 아니라 부드러운 두 극 사이의 대칭으로 되어 있다.

뉴턴의 운동, 에너지 개념은 오히려 노자의 유(柔), 장자의 혼돈, 탈레스의 물에 가깝다. 이러한 창발성의 전통에 기초한 아이디어가 동양정신에 있어서의 만유의 아르케라 할 기(氣)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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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주의는 본래 이기이원론으로 출발했으나 한국에서는 율곡, 화담, 혜강을 거치면서 기(氣) 일원론으로 통일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理)가 코스모스라면 기(氣)는 카오스다. 이가 아폴론이라면 기는 디오니소스다.

서구정신이 아폴론에 가깝고 동양정신이 디오니소스에 가까운 이유는 서구정신이 딱딱한 원자론에서 아이디어를 빌리는 데 반해 동양정신이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기(氣) 개념에서 아이디어를 구하기 때문이다.

원자는 수학적으로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그러나 기는 해체되지 않는다. 기는 맥박을 낳고 호흡을 낳고 리듬을 낳는다. 그 방법으로 널리 소통한다. 원자가 분해와 조립이라면 기는 소통과 공명이다.

서구 학문이 건축과 같다면 동양의 학문은 정원을 가꾸는 일과 같다. 건물은 안으로 쌓아올려 축적되고 정원은 밖으로 드나들어 소통한다. 서구의 원자는 내부에 고착되어 있고 동양의 기는 밖으로 드나든다.

원자가 분습법이라면 기는 전습법이다. 전습법이 더 너른 시야를 제공한다. 분습법은 내부를 조직하고 전습법은 외연을 확대한다. 안에 갇힌 원자보다 밖으로 드나드는 기가 더 많은 영감을 던져준다.

원자는 공간의 구조에 한정된 개념이지만 기 개념은 시공간을 통일하고 있다. 원자는 변화를 부정하지만 기는 변화를 긍정한다. 원자가 정해진 궤도를 달리는 기차라면 기는 자유자재로 나아가는 자동차와 같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는 서로 견제하며 변증법적인 발전을 이루어야 한다. 서구는 아폴론을 강조했고 동양은 디오니소스를 강조했다. 아폴론은 진(眞)으로 규명되고 디오니소스는 미(美)로 응용된다.

그러므로 서구의 아폴론이 앞선다. 앞서가며 길을 연다. 그리고 지금 마침내 그 동양과 서양이 만났다. 아폴론이 없었던 그동안의 디오니소스는 힘을 쓰지 못했지만 이미 아폴론을 얻은 지금 디오니소스는 막강하다.

무엇인가? 호흡과 리듬, 타이밍과 밸런스를 강조하는 동양적 사고는 서구의 논리학과 수학에 의해 뒷받침 되지 않을 때 공허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만 반대로 논리학과 수학을 얻었을 때 인식의 비약을 가능케 한다.

문제는 서구가 동양의 디오니소스적 사유를 학습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현재로서는 서구가 동양을 앞서 있기 때문이다. 앞서가는 이가 뒤처진 이를 학습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문명은 핵과 배후지를 가진다. 중심부의 핵은 지배하려 하고 주변부의 배후지는 이탈하려 한다. 그러므로 문명은 약동한다. 문명은 결코 한 자리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새로운 배후지를 찾아 끊임없이 이동한다.

서구문명과 동양문명이 만났을 때 1라운드는 서구가 이기는 게임이었지만 2라운드는 동양이 이기는 게임이다. 거대한 역전이 일어난다. 우리가 더 많은 창발성의 원천 소스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우리는 창세기를, 출애굽을, 원자론을, 탈레스의 물 1원론을, 플라톤의 이데아를, 뉴턴의 고전역학을 학습하지 못했다. 그 결과로 서구와의 대결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건 어제까지의 이야기다.

서구와 동양을 합친 인류 전체의 지구촌 문명으로 보았을 때 동양이 더 많은 아이템을 확보하고 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우리도 알고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아직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

서구의 학자 중에도 논어를 번역하고 도덕경을 풀이하고 금강경을 주석하는 이가 있지만 그 정수를 알아채는 사람은 없다. 동양정신의 참된 정수는 기(氣) 일원론에 있다. 기(氣)를 모르고는 동양정신을 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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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개념은 일정부분 유효하지만 이는 겉보기일 뿐 존재의 본질은 아니다. 그것은 건축과 비슷하다. 자재를 모아서 집을 짓는다. 여기에는 최적화 개념이 사용된다. 조금의 낭비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이와 이가 맞물려서 꽉 짜인 시스템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천만의 말씀. 신이 창조한 우주와 생명은 최대한의 낭비를 일삼고 있다. 우주는 터무니없이 크고 원자는 터무니없이 작다.

모든 것이 너무나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이다. 신이 창조한 존재의 톱니바퀴들은 전혀 맞물려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는 잘도 작동한다. 이에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하나의 기지국은 수천, 수만의 휴대폰이 보내오는 신호를 동시에 처리한다. 하나의 인공위성은 수천, 수만의 위성안테나를 동시에 장악한다. 그러고도 여전히 빈자리가 잔뜩 남아있다. 너무나 낭비적이다.

하나의 눈동자는 전후좌우 사방에서 보내오는 수천, 수만의 빛 신호를 동시에 처리한다. 높은 산 정상에서 보라. 산과 계곡에서 보내오는 온갖 빛 신호들이 하나의 눈동자 조리개 안에서 전부 처리되고 있다.

인간의 눈동자가 1초라는 짧은 시간에 많은 정보를 처리함은 인공위성이 수천, 수만의 가정용 접시안테나를 동시에 통제함과 같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태양은 지구의 무수한 생명체에 동시에 에너지를 공급한다.

그런데 그 태양에너지의 99.9퍼센트는 광막한 우주공간에서 허비된다. 무엇인가? 존재의 톱니바퀴들은 뉴턴의 결정론과 다르게 전혀 톱니가 맞물려 있지 않은 것이다. 결정론은 틀렸다. 기계론은 오류다.

서구의 시스템적 사고에 중독된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을 불편해 한다. 톱니가 맞물리지 않으면 기계는 작동할 수 없다. 뭔가 잘못되지 않았나 하고 불안해한다. 그러나 동양의 심(心)을 터득한 사람은 놀라지 않는다.

우리가 지상에서 건축할 수 있는 이유는 톱니처럼 맞물려 부분과 전체가 호환되기 때문이 아니라 내부에 심(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심의 원리를 이용하면 우주공간에도 건축할 수 있다.

심(心)은 곧 핵(核)이다. 지구에서는 중력이다. 공간에서는 밀도 차다. 운동에서는 구심력과 원심력이다. 하나의 기지국이 수천, 수만의 휴대폰이 보내오는 신호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이유는 심이 있기 때문이다.

눈사람을 만들려면 손의 체온으로 눈을 녹였다가 다시 얼려 단단한 심을 만들어야 한다. 심을 만들지 않으면 눈은 뭉쳐지지 않는다. 돌아가는 팽이가 중심을 잃지 않는 이유도 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 심은 무게중심, 운동의 중심, 힘의 중심이다. 구심력과 원심력의 심이다. 일에서는 핵심역량이다. 도로에서는 교통의 중심, 사회에서는 의사소통의 중심이다. 그것은 네트워크다. 신의 우주는 건축이 아니라 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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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몸에 바이러스가 침투한다. 옛 사람들의 생각은 이렇다. 혈관에서 백혈구가 돌아다니다가 바이러스를 체포하여 바이러스가 가진 정보를 읽어낸다. 바이러스의 정체가 파악되면 공격을 개시한다.

그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인체의 항원항체 반응은 그리 정교하지 않다. 인체는 무식한 방법을 쓴다. 인체는 바이러스의 정보를 읽어내기 위하여 많은 효소를 사용한다.

효소들 중 하나가 우연히 바이러스와 반응한다. 이때 울림과 떨림이 전파된다. 심(心)의 원리에 의해서 전체가 한꺼번에 공명한다. 인체는 일제히 그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효소의 대량생산에 들어간다.

여기서 게임이 벌어진다. 바이러스가 증식하는 속도와 인체가 항체를 생산하는 속도 간의 경쟁이다. 이 경쟁에서 바이러스가 승리하면 인체는 병을 앓게 되고 항체가 승리하면 바이러스를 퇴치한다.

이는 바이러스의 활성도와 인체의 컨디션에 따라 상대적으로 결정되는바 매우 불확정적이다. 이는 꽉 짜인 기계론 원리에 맞지 않다. 문제는 인체가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방법이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매우 무식하고 자원을 낭비하는 것이며 우연한 행운에 기대는 것이다. 이는 무모하고 엉뚱하다. 한편으로 위험하기도 하다. 그러나 신은 이 방법으로 우주를 창조했고 자연은 이 방법으로 자연스럽다.

원자론에 기반을 둔 건축적 아이템들은 쓸모가 없다. 실제로 자연은 다른 방법을 쓰기 때문이다. 노자가 갈파한 대로 시스템에 최적화된 강(剛)의 톱니바퀴가 패배하고 넓은 공간에 전파처럼 뿌려지는 유(柔)의 물량작전이 먹힌다.

유(柔)가 강(剛)을 이긴다. 인체가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과정이야말로 유가 강을 이기는 과정이다. 인체의 세포들은 이러한 울림과 떨림의 방법을 쓴다. 21세기에 인류는 이 방법을 깨우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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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상에 만유의 아르케가 기(氣) 하나 뿐은 아니다. 이(理), 음양(陰陽), 오행(五行), 도(道)가 있다. 역(易)을 강조하는 주역의 비중이 크다. 점을 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지만 그 아이디어들은 기특한 데가 있다.

역(易)은 변화다. 세상을 기본적으로 고착이 아니라 변화로 본다는 것은 현대사회에도 보편적 울림이 있다. 맹자의 역성혁명(易姓革命)과도 닿아있다. 자연에서 계절이 바뀌듯이 인간에서 정치도 바뀌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理)는 닫힌계 개념과 유사하다. 곧 에너지 장(場)과 같다. 음양은 그 장 안에서 이(理)의 전개다. 에너지의 작용과 반작용이 맞섬이다. 이로부터 연역하여 역학적 질서와 미학적 가치로 수용될 수 있다.

오행(五行)은 원자론과 발상법이 유사하다. 그러나 그 전개에 있어서는 기(氣)의 성질 곧 유체의 성질을 반영하고 있다. 상생과 상극의 조화는 유체에서 특히 잘 관찰되는 현상이다.

유교는 사회에 질서를 부여할 목적으로 착상되었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과 전쟁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분명한 동기가 있다. 애초부터 임금과 신하,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로 차별할 목적을 가지고 출발한 것이다.

그러므로 유교는 본질이 이원론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역학의 질서를 높이고 미학의 가치를 낮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기일원론으로 통일되고 있다. 기일원론은 처음부터 유교의 차별주의를 타파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중인계급과 서얼출신이 특히 남인을 반대하고 노론을 추종하여 숙종이래 노론의 장기집권을 도운 것은 율곡의 학맥을 계승한 노론이 퇴계의 이원론을 계승한 남인에 비해 계급 간의 소통에 관대했기 때문이다.

● 이원론 발상 - 차별과 질서 : 카오스와 코스모스, 음과 양, 하늘과 땅

● 일원론 발상 - 소통과 가치 : 유교의 기(氣), 불교의 심(心), 도교의 도(道)

서구의 원자론은 건축 개념이다. 그 건축물은 아파트와 같아서 처마가 없다. 마루도 없고 마당도 없다. 지나가는 길손을 위한 여유공간이 없다.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빼곡하게 맞물려 있다. 딱딱하게 죽어 있다.

동양의 기(氣)는 소통 개념이다. 손님과 소통하기 위해 처마를 두고 마루를 두고 마당을 넓힌다. 이(理)의 담장을 두르고 심(心)의 정자를 지으며 도(道)의 대문을 열어 손님을 맞는다. 그래서 활기가 있고 생기가 있다.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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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일로 되어 있다. 일은 시작과 끝이 있다. 원인으로 시작하고 결과로 끝난다. 질서로 시작하여 가치로 끝난다. 계몽으로 시작하여 소통으로 끝난다. 두보로 시작하여 이백으로 끝난다. 이렇듯 내적인 자체 완결성을 가진다.

일로 보아야 한다. 일로 보면 모순과 대립을 일으키는 갈등요소로 알려졌던 것들이 실은 우선순위 판단으로 해소되는 문제였음을 깨닫게 된다. 양자의 갈등은 밸런스의 원리에 의해 변증법적으로 해소된다.

질서와 가치

코스모스와 카오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순수학문과 응용학문

역학과 미학

원형과 변형

인위와 무위

강(剛)과 유(柔)

공자의 이상과 노자의 이상

두보와 이백

주류와 비주류

메인스트림과 아웃사이더

도시민과 부족민

스파르타와 아테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클래식과 팝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북종화와 남종화

교종불교와 선종불교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점오점수와 돈오돈수

시점(視點)과 관점(觀點)

계몽과 소통

중심부와 주변부

기계와 생명

에너지와 기(氣)

경쟁의 논리와 축제의 논리

문제해결의 논리와 동기부여의 논리

집단의 힘과 개인의 멋

서구정신과 동양사상

전자는 서구적이고 후자는 동양적이다. 전자는 소스개발에 사용되고 후자는 응용소프트웨어에 사용된다. 전자가 먼저 길을 열고 후자가 나중에 완성한다. 서구가 먼저 일어나고 동양이 최종적으로 해결한다.

양자가 변증법적 대결을 이룰 때 학문은 발전한다. 둘 중의 어느 한 쪽에 치우칠 때 학문은 침체를 면치 못한다. 서구의 강(剛)에 동양적 유(柔)가 뒤따를 때 르네상스의 부활, 뉴턴의 비약이 있었다.

자연학은 에너지에 의존하므로 강(剛)이고 인문학은 깨달음에 의존하므로 유(柔)다. 그러나 서구의 진보주의가 원자론의 강(剛)에 집착한 결과 이 시대에 인문정신에 위기가 왔다. 깨달음이 없는 인문학은 허무하다.

양자는 충돌하지 않는다. 전부 한 줄에 꿰어진다. 하나의 일은 질서로 시작되고 가치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지금 21세기가 요청하는 것은 이 시대 양식의 완성이다. 질서의 시대를 끝막고 가치의 시대를 열어젖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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