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의 형식
소설가 장정일씨가 음란성이 있는 소설작품을 발표했다면 우리는 그 내용에 대해 [옳다 그르다]의 진위판단을 할 수 없다. 그것은 과학이나 철학이 아니므로 진위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다만 [심하다. 심하지 않다]의 사적인 소감을 발표할수 있을 뿐이다.
진위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3차정보의 분석영역에 들지 못한다는 뜻이다. 정보들은 그 집적정도에서 3차정보의 분석에서 진위판단되고 4차정보의 종합에서 독립하고 5차정보의 응용에서 자기복제로 기능한다. 곧 정보가 정보를 생산한다.
사상의 형식은 사상으로 하여금 기능하게 하는 것이다. 곧 주의를 이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1차정보나 2차정보를 4차정보나 5차정보로 비약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응용되고 그 응용이 곧 창의로서 인간의 자기발전에 유효하게 기능하기 때문이다.
마광수씨가 텔레비젼에 출연하거나 신문의 칼럼을 통해 발표한 글들중 일부는 문학의 범주가 아니다. 그는 대학교수의 신분으로 그 신분을 특별히 강조하여 문학이 아닌 과학, 내지 철학의 입장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마광수는 대학교수의 학자적 신분을 강조하였다. [옳다, 그르다]의 관점에서 객관적 평가를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객관적판단을 할수 없다. 사상의 형식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리 : 사상형식은 자기복제를 나타내는 두 개의 (=)를 갖추어 3단논법으로 검증하게 함이다]
사상의 형식은 [옳다, 그르다]의 진위판단을 할수 있는 객관적 형식이며 거기엔 반드시 차별화된 두 개의 (=)를 필요로 한다. 자기복제를 나타내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삼단논법으로 검증할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 예술의 범주가 아닌 과학, 철학의 담론이려면 반드시 사상의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주관을 객관화시켜 타인으로 하여금 진위판단을 할 수 있는 형태로 기술하여 주장해야 한다.
많은 정치적 주장들이 사상의 형식을 갖추지 아니한 채 [소신]이라는 이름으로 함부로 주장되고 있다. 정치는 혼자만의 놀이가 아니다. 사회공간에서 공유되고 조정되어야 한다. 필요한 것은 주관적 소신의 고집이 아니라 객관적 검증가능한 원칙이다.
[정리 : 정치적 소신은 검증불가능한 주관적 고집일 뿐이다]
서구유럽 선진국 정당들의 정치적 주장들은 좌파 혹은 우파 이데올로기의 이념에 기초하여 복잡하고 짜임새있는 사상체계로부터 유도된 전술이므로 객관적인 비평이 가능하지만 우리나라 정치가들이 불쑥 던지는 정치적 화두들은 도무지 비평할 수가 없다.
화두의 형식으로 불쑥 내밀어지는 정치적 소신의 주장들은 정치의 본질인 대화와 타협을 통한 조율을 할수 없다는 점에서 그들은 방식은 정치하는 것이 아니라 도박하는 것이다.
소설가 이문열은 문학과 철학의 경계점에서 모호한 화법으로 양자의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자신의 사사로운 주관을 마치 이념적 사상토대에 기초한 발언처럼 포장하므로서 다중들에게 잘못된 고정관념을 유포하고 있다. 불쑥 던져지는 [화두]들은 비판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무책임하다.
고정관념이 고정관념이 되는 것은 비판과 검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의 언어들은 이미지, 느낌, 연상, 뉘앙스, 유추의 무기로 함부로 편견을 유포하면서 결코 책임지지 아니한다.
이문열의 주장은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들은 철학이 아니고 사상이 아니고 이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토대가 빈곤하기 때문에 비판할수 없다. 이문열이 그른 것은 그의 주장이 그르기 때문이 아니라 말하는 방식이 그릇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느낌들과 이미지들과 기분들을, 정치적인 양념으로 반죽하여, 문학의 방식으로 포장하여 불쑥 던져버린다. 즉 그 내부에 자기복제를 나타내는 두 개의 (=)를 담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이문열의 주장을 하나의 화두로 받아들여 논란하다가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흐지부지 해버린다. 남는 것은 불쾌감 뿐이다.
사상의 체계
사상은 생각 思, 생각할 想이다. 생각 하나는 논거(思)가 되고, 생각 둘은 진술(想)이 된다. 진술은 논거로부터 자기복제된 것이다. 사상은 논거와 진술의 형식을 갖춘 생각의 형태라는 점에서 망상, 느낌, 이미지, 연상, 유추, 감상, 이미지, 소감따위와 구분된다.
사상은 적어도 기능과 체계를 가진 생각들의 집합형태이며 적절하게 상대를 찾아 그 기능을 발휘하는 시간적 과정이다.
사상의 기능은 최초 근거로부터 유도하여 동기에 의해 유발되고 목적에서 주어지며 방버에서 마련되고 결실에서 얻어지는 하나의 실현과정이다. 정보가 정보를 자기복제하여 정보를 대량생산한다.
<사상의 자기복제기능>
이념 1. 근거의 응용-유도되는가? 이다 아니다의 판단..........정보가 정보를 자기복제
↑ 2. 동기의 종합-유발되는가? 있다 없다의 판단.............독립된 정보로 기능
3. 목적의 분석-찾아지는가? 같다 다르다의 판단 .........3단논법의 진위판단
↓ 4. 방법의 수용-마련되는가? 속하다 배제되다의 판단.....변화과정을 서술
주의 5. 결실의 지각-얻어지는가? 맞다 틀리다의 판단..........정확한 묘사
사상의 기능은 예의 근거, 동기, 목적, 방법, 결실에서 유도되고, 유발되고, 찾아지고, 마련되고, 얻어져서, 실익을 제공하는 과정이며 이러한 기능적 실익이 없다면 그건 사상이 아니다.
<사상체계의 전개에서 하부구조로의 이행>
진 --≫ 위
1. 이다 --≫ 아니다 (아니면 있다) 배중률
2. 있다 --≫ 없다 (없으면 같다) 동일률
3. 같다 --≫ 다르다 (다르면 속한다) 모순률
4. 속한다 --≫ 배제되다 (배제되면 맞다) 인과율
5. 맞다 --≫ 틀리다. (틀리면 폐기된다) 한정률
1의 [근거의 응용, 이다 아니다의 판단, 정보가 정보를 자기복제]은 인간이 올곧은 인식으로 하여 스스로 정보를 생산하는 창의적 지적활동을 의미한다.
정보가 정보를 자기복제하는 것이다. 하나의 대상에 대한 인식을 다른 대상에 적용하므로서 하나를 앎으로 해서 열을 알게 되는 것이다.
[정리 : 정보의 자기복제란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안다는 것이다]
2의 [동기의 종합, 있다 없다의 판단, 독립된 정보로 기능]은 하나의 대상에 대한 인식이 다른 대상의 인식에 영향을 미침을 말한다. 두개의 상호대립되는 정보가 있을 때 이것이 맞으면 저것은 틀리게 되는 경우이다.
[정리 : 정보의 독립이란 하나의 정보가 다른 정보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3의 [목적의 분석, 같다 다르다의 판단, 3단논법의 진위판단]은 하나의 대상에 대한 인식 안에서 내부기능이 성립하는가의 판단이다. 즉 대상과 일치하는지는 제외하고 내부모순이 없는가, 곧 어법적으로 말이 되는가이다.
[정리 : 정보의 진위판단은 내부논리가 작동하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4의 [방법의 수용, 속하다 배제되다의 판단, 변화과정을 서술]은 변화를 서술하는지의 판단이다. 내부에서 정보가 정보로서의 의미 곧 최소한의 나타냄이 있는 것이다. 시간성을 포함하는 뜻을 가진다.
[정리 : 정보는 반드시 그 내부에서 어떠한 변화를 담아내어야 한다]
5의 [결실의 지각, 맞다 틀리다의 판단, 정확한 묘사]는 묘사의 영역한정이다. 내부에서 기능하여 그 역할이 끝나야 한다. 즉 정보가 뚜렷한 경계없이 확대해석되거나 동시에 여러 가지를 의미해서는 정보일수 없는 것이다.
[정리 : 정보는 정확하게 영역이 한정되어 거기서 끝나야 한다]
사상체계의 연속적인 전개
사상체계의 전개는 하나의 정보가 그 진위판단에서 다만 긍정되고 부정되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판단에 영향을 미쳐서 상부구조에서 하부구조로 이행하면서 연속적인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판단이 판단을 낳으면서 자기복제하여 하나의 판단이 다른 판단을 대량생산한다. 곧 정보 내부에서 응용되고, 종합되고, 분석되고, 수용되고, 지각되게 하는 것이다.
[판 단]
↙ ↘
1. 이다 아니다 --≫ 진(사과이다)
↙ ↘ 위(사과 아니다)
2. 있다 없다 --≫ 진(사과가 아니면 무엇인지 몰라도 반드시 그것은 있다)
↙ ↘ 위(그것은 없다)
3. 같다 다르다 --≫ 진(그것이 없어도 같은 종류의 것이므로 같다)
↙ ↘ 위(그것과도 다르다)
4. 속한다 배제된다 --≫ 진(다르다면 그에 종속되는 것이다)
↙ ↘ 위(속하지 않으면 정확히 분리된다)
5. 맞다 틀리다 --≫ 진(여기까지 정확하다)
위(전적으로 틀린 정보이다)
위 정보체계의 연속적인 이행과정에서 판단 제 1의 5차정보가 [이다 아니다]의 여부판단을 했을때 만약 아니라는 부정판단이 성립하면 곧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판단 제 2의 4차정보에서 [있다 없다]의 유무판단으로 이행한다. 이런 식의 연속적인 판단이 1차정보까지 5회 반복되어 일어난다.
[정보의 자기복제 진행]
♠ 판단 1 --≫ 배중률
서로 다른 두 개의 정보를 하나로 맞춰보아 일치하는지에 따라 [이다 아니다]를 판단한다.
♠ 판단 2 --≫ 동일률
판단 1에서 [사과가 아니다]의 부정판단이 성립하면 그 정보는 곧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판단 2로 하향하여 [그 사과 아닌 무엇(복숭아)이 있다]의 유무판단을 하게된다. 만약 아무것도 없다면 아니다라고 말할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다는 말은 최소한 그것이 있다는 전제하에 성립하기 때문이다.
♠ 판단 3 --≫ 모순률
판단 2에서 [실은 복숭아가 있지도 않다]고 부정판단이 성립하면 이 정보는 곧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판단 3으로 하향해서 [복숭아는 없지만 복숭아와 같다(복숭아통조림)]의 가부판단을 하게 된다. 있다는 말은 실체가 있다는 뜻이지만 실체가 없이 관계로 있는 같다도 넓은 의미에서 있다에 포함된다.
♠ 판단 4 --≫ 인과율
판단 3에서 [실은 복숭아같지도 않다]고 부정판단이 성립하면 또한 이 정보는 폐기되지 않고 판단 4로 하향해서 [복숭아 같은 것도 아니지만 복숭아에 속한다(복숭아 그림)]의 소속판단을 하게 된다. 같다는 말은 똑같다는 뜻이지만, 같지 않아도 연관되어 있는 것들은 넓은 의미에서 같다에 포함된다.
♠ 판단 5 --≫ 한정률
판단 4에서 [실은 복숭아에 속하지 않는다]고 부정판단이 성립하면 또한 곧 정보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판단 5에서 [복숭아와 전혀 무관하다는 것은 분명하다]의 한정판단을 하게 된다. 여기서도 부정되면 이 정보는 전혀 무가치한 정보, 곧 정보가 아닌 것이 된다. 맞다의 단계에서는 집합의 의미가 없어져서 최후의 원소로 기능하므로 [넓은 의미]나 [포함]이 일어나지 않아 맞지 않으면 곧 폐기된다.
[정리 : 사상체계의 의미는 하나의 판단이 부정되더라도 폐기되지 않고 다른 판단에 이용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하나의 정보가 어느 단계에서 부정되더라도 곧 페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판단이 다른 판단에 영향을 미쳐서 지속적으로 유효하게 사용된다는 것이다.
있다와 없다.
"집주인이 외출중이면 그 집주인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집주인이 외출중인 집은 주인없는 집인가? 주인있는 집인가?"
존재는 그 자체로서 복잡한 집적구조를 가지므로 단순히 [있다, 없다]의 판단으로는 존재의 양상을 여실하게 나타낼수 없다. 열가지 있음들이 있다.
범주 긍정(진) 부정(위)
1. 배경... 공 이다 ≪―≫ 허 아니다
2. 실체... 존 있다 ≪―≫ 무 없다
3. 연관... 재 같다 ≪―≫ 부재 다르다
4. 이행... 사 속하다 ≪―≫ 비 배제되다
5. 귀결... 상 맞다 ≪―≫ 멸 틀리다
있음은 그 존재의 전개과정에서 여러가지 양상을 드러낸다.
1의 배경범주에서 배경까지 갖추어 있는 것이 공의 [이다]이며 배경(근거)없이 있는 것이 허의 [아니다]이다.
가공의 존재인 귀신은 있기는 있으나 그 근거가 되는 영역이 없으므로 허의 존재이다. 즉 참존재는 아닌(아니다) 것이다.
2의 실체범주에서 실체가 있는 존재는 존의 [있다]이며 실체가 없으면 무의 [없다]이다.
이순신장군은 있으나 옛날에 있었고 지금은 실체가 없으므로 없다.
3의 연관범주에서 관계가 있는 존재는 재의 [같다]이며 관계가 없으면 [다르다]이다.
이순신장군이 아닌 이순신장군의 그림 또는 이순신장군의 배역을 맡은 배우도 이순신장군같으므로 그걸로 이순신장군이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관계로 있는 것도 넓은 범위에서 있다에 포함된다.
4의 이행범주에서 이행과정에 속하여 있는 존재는 사의 [속하다]이며 변화에 속하지 않으면 [배제되다]이다. [속하다]라는 말은 움직이고 있는 것, 변화과정 중인 것, 또는 변한 것을 나타낸다.
이순신장군에 대한 생각이나 이순신 장군의 마음이나 이순신 장군의 지시나 이런 것들은 속하여 있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그림은 이순신장군이 아니라도 이순신장군의 실재, 그 전체를 나타내므로 [같다]에 해당되지만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는 직접 이순신장군을 나타내지 않으므로 [같다]가 아닌 [속하다]이다.
5의 귀결범주에서 귀결이 맞는 존재는 상의 [맞다]이며 맞지 않으면 [틀리다]이다. [틀리다]는 일체의 관계가 없는 전혀 엉뚱한 것이다. 곧 정보로서의 효용가치가 전혀 없는 것이다.
원균장군의 그림은 이순신장군이 맞지않다. 이 경우 [틀리다]이다. 틀린 정보는 전혀 의미가 없다. 정보가 아니다.
[정리 : 여러개의 있음들은 변화를 설명하기 위하여 있다]
[이다], [있다], [같다], [속하다]들은 집합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내부에 여러 가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맞다]는 최후의 원소여서 더 이상 쪼갤수 없다. 즉 내부에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틀리다]는 멸의 없음, 전혀 없음이다.
정보들은 집합구조를 가지고 있다. 분자 안에 원자가 있고, 원자 안에 소립자가 있듯이, [이다]속에 [있다]가 있고, [있다] 속에 [같다]가 있고, [같다] 속에 [속하다]가 있고, [속하다] 속에 [맞다]가 있어, 상부구조에서 부정되어도 하부구조에서 긍정될수 있으므로 그 정보의 가치는 유효하게 기능한다.
그러나 틀린 정보는 완전히 폐기되어야 한다. [틀리다]는 그 내부에 하부구조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집이 없어도 집에 대한 소유권이 있다면 집이 있는 것이다. 단지 그 집에 입주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 소유권을 행사해야 실제로 있는 것이지 소유권이 있어도 소유권을 행사하지 못하면 실은 없는 것이다.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이렇게 어중간한 것들이 있다.
어중간한 중간의 있음 곧 반존재들은 변화를 나타내기 위해서 있다. 이순신장군은 없지만 이순신장군과 연관된 것들은 있다. 그러면 이순신은 지금도 있는 것이다.
사상체계의 유효성
정보의 집적성은 상부구조가 하부구조를 통일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큰 정보들이 집합이 되고 작은 정보들이 그 큰 정보의 원소가 되어 역동적으로 기능한다.
세상은 변화하며 변화는 큰 정보에서 그 집합구조가 깨어지는 형태로 나타난다. 집합이 깨어져도 원소들은 살아 있으므로 정보는 여전히 쓸모 있다.
사상체계의 전개는 인간의 대상에 대한 인식에도 이러한 성질을 부여하여 하나의 생각이 사실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생겨도 그 인식은 여전히 유효함을 말한다.
마르크스의 혁명이론이 잘못된 것임이 밝혀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가 만들어놓은 언어로 그가 만들어놓은 방법론으로 사회를 연구한다.
시대가 변하였으므로 학문도 변한다. 상부구조에서 마르크스의 이론이 사실과 일치하지 않아도 하부구조에서 여전히 유효성을 가지고 마르크스의 이론들은 이 사회의 발달에 기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상이기 때문이다.
[정리 : 사상체계는 부분적으로 잘못된 인식도 유효하게 이용되는 성질을 낳는다]
사상체계가 없으면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즉시 용도폐기되지만 사상체계를 갖추면 사실과 일부 일치하지 않아도 여전히 유효하게 이용된다. 그러므로 이념이 필요하다.
이념이란 사상가의 말이 일부 오류가 있더라도 여전히 세상은 그 사상가가 주장한 그 방향으로 굴러가는 성질을 말한다.
마르크스의 말은 상당히 잘못된 주장이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가 말한 진보의 방향으로 굴러간다. 그러한 성질을 이념이라 한다. 그 이념의 유효성을 유지시키는 근거가 사상체계다. 체계를 갖추지 않은 마광수, 이문열식 주장은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즉시 용도폐기되지만 체계를 갖춘 주장은 사실과 일치하지 않아도 기능적으로 유효하다.
대표적인 예로 종교를 들수 있다. 불교, 기독교 등 대표적인 종교들은 그 주장에서 과학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은 점이 무수히 발견되지만 사상체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현실세계에서 기능한다.
사상체계의 형성
인식이 사상체계를 가져야 하는 것은 하나의 판단으로부터 다른 판단을 연속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서이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알게 되는 것이다.
만약 사상체계를 가지지 않는다면 하나의 판단으로부터 다른 판단을 유도하지 못하므로서 부정되는 판단은 모두 쓸모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정보를 머리속에 집어넣고 살아야 한다.
사상체계를 가지면 갑자기 시야가 넓어져서 보이지 않던 것이 보여지고, 모르던 것이 저절로 알게 되고,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한꺼번에 이해된다. 그러므로 많은 정보를 두뇌에 입력시킬 이유가 없다.
[정리 : 사상체계의 형성은 그 자체로 깨달음이다]
정보는 다른 정보에 영향을 미친다. 정보가 정보를 지배하고 정보가 정보를 관리한다. 이것이 시스템이며 시스템인식이 곧 사상체계이다.
정보는 스스로 자기복제하여 정보들을 대량생산한다. 이렇게 생산된 자정보들을 지배하며 우리로 하여금 정보의 효율적인 이용을 도와준다.
또한 역으로 많은 개별정보들이 뭉쳐서, 하나의 근원적인 판단으로 귀납되므로서 근본인식을 가능케 하며 그러한 정보의 결집상태를 수용하므로서, 세상의 모든 사실들에 대해 명쾌한 대응을 할수있게 되는 것이다.
시스템의 기본구조는 집적도 1에서 구성요소 5의 [근거 동기 목적 방법 결실]이다. 이들이 이어져서 하나의 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사상의 검증은 이 시스템의 진위에 대한 판단이며 그 판단은 이 사상체계의 전개가 자기복제에 의한 연속성의 획득에 기인하느냐의 여부이다.
[정리 : 사상체계의 뼈대는 집적도 1 에서 구성요소 5의 [근거 동기 목적 방법 결실]이다]
먼저 근거가 주어지고 그 근거가 자기복제하여 동기를 낳고, 동기가 자기복제하여 목적을, 목적이 밥법을, 방법이 결실을 낳는 순서대로 자기복제가 진행된다.
[사상체계의 전개에서 집적도 1]
대응요소 2 --+-- 공간변수 ―≫ 인간
+-- 시간변수 ―≫ 대상
구성요소 5 ―≫ 근거 동기 목적 방법 결실
※공간변수인 인간의 인식(학문)과 시간변수인 대상(학문목적)이 만나 자기복제하여 구성요소 5를 이끌어낸다.
우리가 사상으로 하여 얻는 것은 결실에서의 실익이다. 그 실익이 궁극적은 차원에서 어디에서 얻어오는가? 근거에서 얻어온다. 근거로부터 배달하는 수단이 자기복제이다.
사상은 무언가 명백히 얻어오는 것이다. 얻어온다면 이쪽에서 생기는 것 만큼 어딘가에 손실이 있어야 한다.
자동차에 비유하면 최초에 근거가 되는 손실은 동력원에서이다. 동력원에서 손실이 일어나는 것만큼 결실에서 실익이 얻어진다. 곧 동력발생이다. 자동차는 그 동력전달의 매개가 된다. 곧 자기복제의 시스템이다.
사상체계 자동차의 동력전달체계
근거 (손실) ―≫ 동력원
동기 ↑ 동력발생
목적 (과정) 동력제어
방법 ↓ 동력전달
결실 (실익) ―≫ 동력효과
생각이 사상체계를 가진다는 것은 근거를 제시하고 실익으로 증명한다는 것이다. 실익이 증명되지 않고 근거가 불투명한 편견, 고정관념, 소신, 망상, 허구들과 충분히 구분된다. 실익을 남긴다는 것은 기능한다는 것이다.
사상은 그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들이 일정한 체계를 가지고 결집하여 명백히 유효한 기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사상체계의 좋은 점은 이 과정에서 상당한 부분적인 오류를 내포하더라도 이 시스템 자체는 유효하게 기능한다는 점이다. 종교가 그렇다. 과학과 충돌하여 오류가 증명되어도 시스템은 여전히 쓸모있다.
사상의 태동
노자가 무위자연을 주장할 때 우리는 이렇게 되물을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어떠한 실익이 주어진단 말인가?] 실효성이 없으면 사상이 아니다.
갈릴레이가 말했다. [지구는 돈다] 그래서 어떠한 이익이 있다는 말인가? 이는 학문적 인식일 뿐 사상은 아니다.
사상은 학문적 인식의 성과를 결집하여 인간에게 배달하고 실익을 제시한다. 그 이익이 어디서 훔쳐온 것이 아니고, 허위가 아니며, 어디서 얻어온 것인지 그 명석한 근거를 제시할 때 우리는 사상이라 부른다.
사상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상이 우리에게 실제적인 이익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누구든 인생에 주어진 시간마큼 살아가면서 그 생에 그만큼 채워넣어야 한다. 어디에선가 얻어와서 얻어온 만큼 채워넣는다. 그 얻어올 데가 있어야 한다. 근거이다.
사상은 그 얻어올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학문에는 힘이 없지만 사상에는 힘이 있다.
[사상의 예]
체계 불교사상 기독교사상 학문
1. 근거는 ? 윤회설 창조론 존재론
2. 동기는 ? 고 원죄설 인식론
3. 목적은 ? 해탈 구원 정신론
4. 방법론 ? 깨달음 믿음소망사랑 방법론
5. 결실은 ? 극락행 천국행 문명론
불교사상은 분명히 극락행의 실익을 약속하고 있고 기독교사상은 명백히 천국행의 실익을 제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수미는 일관해야 한다. 그 결실의 실익이 시스템 기능에서 유도된 것이 확실하다면 곧 자기복제의 원리에 충실하다면 그 사상은 옳다.
기독교라면 그 실제적인 이익은 궁극적으로 신의 창조에 기초하고 있다. 원죄설과 구원론과 믿음은 중간단계로서 그 창조로부터 얻어와서 천국으로 배달하는 중간체계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상들이 참으로 옳은지의 여부는 학문이 증명한다. 자동차라면 에너지원은 개솔린이고 그 결실은 운반이다. 기독교라면 그 에너지원은 창조이고 결실은 천국행이다. 양자가 수미일관하여 자기복제로 정확히 배달되는가? 아니면 중간에서 어긋나는가의 여부로 우리는 진위를 판단할수 있다.
어떠한 주장이나 견해는 반드시 이러한 사상의 체계를 갖추어 있어야 한다. 사상체계를 갖출 경우 그 전개과정에서 일부 오류가 있어도 이념적 유효성을 가지기 때문에 쓸모있다.
정치가는 정치사상을 가져야 하고 교육가는 교육사상을 가져야 한다. 문학가는 문학사상을 가져야 하고 사업가는 경영사상을 가져야 한다.
정치가의 사상은 정치의 궁극적 근거를 어디에서 얻어오고 어떠한 결실을 제공하며 그 중간단계에서 자기복제로의 배달경로는 어떠한 것인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경영가의 사상은 그 경영이익이 근본 어디에서 생겨나고 결국 어디로 배달되는지의 자기복제 경로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체계 자동차 정치사상 경영사상
1. 근거는 ? 동력원 권리 자원
2. 동기는 ? 동력제어 권리행사 자본
3. 목적은 ? 동력발생 민주주의 시장
4. 방법론 ? 동력전달 정치행위 경영
5. 결실은 ? 동력효과 권력행사 이윤
수미일관이어야 자기복제이다. 온데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동차의 동력원은 개솔린이며 이는 자연에서 얻어온 것이다. 자동차가 동력을 발생시켜 운행했을 때 그 최초에 얻어온 에너지는 결국 자연으로 되돌아간다. 에너지는 자연의 일부인 개솔린에서 뒷바퀴의 구동을 통해 아스팔트의 지면을 접촉하여 결국 땅으로 전달되어버리는 것이다.
정치 또한 마찬가지다. 정치는 개인의 권리에서 사회적 권력을 도출시키는 것이며 최초에 개인들의 권리에 근거하고 그 권리를 민주주의 방식으로 결집하여 권력행사를 통해 그 권리의 주인인 개인들에게 되돌려 준다. 권력은 권리의 주인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경영 또한 마찬가지다. 최초에 자원(지정학적 자원, 매장자원, 인적자원, 기술자원, 문화자원)으로부터 얻어와서 자본에서 결집하고, 시장에서 교환하고 경영에서 진행하여 최후로 이윤으로 남기며 그 남은 이윤은 최초에 온 곳으로 되돌아간다. 즉 경영의 이익은 반드시 최초의 근거인 자원에 재투자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경영의 이윤은 지정학적 자원인 인프라와 매장자원인 석유도입, 인적자원인 노동자, 기술자원인 기술개발, 문화자원인 소비로 재투자되게 되어 있다. 반드시 이 다섯가지 자원을 쫓아가며 그 바깥으로 새는 일은 결단코 없다. 만약 샌다면 이윤이 아니라 손실이며 경영의 실패인 것이다.
사상의 형식
샤르트르의 실존주의는 과연 사상인가?
사상이려면 상부구조인 이념과 하부구조인 주의가 하나의 연속된 체계로 아귀를 맞추어 정립해야 한다. 그러나 샤르트르의 실존주의에는 그 상부구조인 이념에서 근거가 불분명하고 그 하부구조인 주의에서 결실의 실익이 또한 불투명하다.
도대체 어디에서 에너지의 손실이 있고 그 손실을 어떻게 보상받는다는 말인가?
체계 유교사상 마르크스사상 학문
1. 근거는 ? 음양오행론 유물론 존재론 ≪― 에너지 손실
2. 동기는 ? 중용 변증법 인식론
3. 목적은 ? 사단칠정론 소외이론 정신론
4. 방법론 ? 교육 혁명론 방법론
5. 결실은 ? 유교이상국가 공산주의이상국가 문명론 ≪― 에너지 획득
샤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위 유교사상이나 마르크스주의사상과 비교해서 그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가 취약하다. 최초에 에너지의 손실이 일어나는 근거가 없고 또 마지막에 얻어지는 이익도 없다.
유교라면 유교주의 이상국가의 이익은 최초 음양오행의 조화에 기인한다. 음양오행이 스스로 조화하여 인간에게 에너지를 제공하여주므로, 인간이 그 음양의 에너지를 받아들여 최종적으로 유교주의 이상국가를 건설하게 되며 중용개념이나 사단칠정론이나 맹자의 교육사상은 그 에너지가 거쳐가는, 또 배달하는 중간단계들이다.
[정리 ; 사상은 상부구조에서 손실된 에너지를 하부구조로 배달하는 연결체계이다]
마르크스주의라면 최초 에너지의 손실은 유물론에서 물질운동의 자연손실에 근거한다. 그 손실된 에너지를 획득하여 공산주의 이상국가를 만들게 되며, 혁명은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유효한 방법으로 제시되고, 소외는 그 에너지가 가장 긴급히 필요한 곳을 가리키며, 변증법은 에너지를 자연에서 인간으로 이전하는 구실이 된다.
샤르트르의 실존주의는 그 상부구조에서 명확한 것이 없고, 마르크스주의에 정도껏 기대면서 하부구조에서 어떠한 이익이 남는지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념이 없다. 이것만으로는 독립적인 하나의 사상이 못된다.
샤르트르의 실존개념은 위 사상체계에서 정신론의 목적에 해당한다. 인간의 존재목적에 대한 하나의 인식방식이다. 여기엔 마르크스의 소외이론을 상당히 수정보완한 정도의 의미가 있다.
이렇게 독립적 사상이 아닌 주장들은 그 체계의 빈곤으로 하여 내놓고 반박할수 없으므로 일시적으로 지지를 얻지만 현실에서 별반 실익의 용도가 없다. 체계가 없으므로 기능하지 못하는 것이다.
[정리 : 사상체계가 갖춰지지 않은 인식은 현실에서 기능하지 못한다]
마르크스사상은 사상체계를 갖추어 있으므로 우리는 논리적으로 반박해낼수 있다. 비판하자. 과연 유물론이 옳은가? 과연 변증법이 옳은가? 과연 혁명은 가장 효율적인 방식의 에너지 사용이 되는가?
실인 즉 그렇지 않다. 학문에서 보면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잘못된 존재론이며, 변증법은 불완전한 인식론이며, 소외이론은 부분적으로 결함이 있는 정신론이며, 혁명은 에너지의 낭비가 되는 효율적이지 못한 방법론이 되고, 마르크스의 이상국가는 인간의 입맛에 맞지 않는 문명론이므로 실익이 없다.
우리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비판할수 있다. 체계가 있으므로 그 체계의 기능이 유효하게 작동하는지의 여부를 살펴 비판할수 있다. 작동하지 않는 체계라면 잘못된 사상이다.그러나 실존주의를 비판할수 없다.
[정리 : 자기복제의 사상체계가 갖추어져 있다면 비판과 검증이 가능하다]
사상체계가 없는 생각은 비판할 수 없다. 자기복제를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삼단논법을 적용할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치명적인 것은 이렇게 비판불가능한 것은 쓸모 또한 없다는 것이다.
샤르트르의 문학적 접근은 새로운 주장이라기 보다는 있는 생각에 그럴듯한 이름을 하나 붙여내어 근사한 유행어로 만들어낸 일에 지나지 않는다.
마광수나 이문열의 학문이 못되는 학문, 사상이 못되는 주장들은 사상이 아니다. 체계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복제의 구조를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상부구조에서 어디서 에너지 손실을 유발시킨다는 말인지 하부구조에서 어떻게 에너지 획득이 일어난다는 말인지 설명이 없다. 이념에 기초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상과 정치
영국의 토니 블레어 수상이나 프랑스 조스팽 총리의 정치적 주장들은 좌파적 이념에 기초한 발언이다. 개인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공당의 전통적 정치노선에 입각한 정책이다. 그러므로 비판할수 있다.
과연 토니 블레어의 정책은 영국 좌파들의 오래 논의된 정치사상과 일치하는가? 과연 좌파 이데올로기의 그 기본정신으로부터 자기복제된 생각인가? 우리는 삼단논법으로 추적하여 이러한 점을 검증해 낼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회창씨나 조순씨가 불쑥 던지는 정치적 화두들은 사상체계와 상관없이 개인의 주관적 소신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비판과 검증이 불가능하다. 정치가 아니다. 도박이다.
[정리 : 객관적 사상체계에 기초하면 정치이고 주관적 소신에 기초하면 도박이다]
정치와 도박을 가름하는 것은 사상체계의 체계에 기초한 정치가 상부구조에서 부정되더라도 하부구조에서 긍정될수 있으므로 여전히 유효한데 비해, 도박의 경우 부정되면 개인의 실패로 끝날 뿐 더 이상 써먹을 데가 없다는 점이다.
영국 좌파의 한번 실패한 정책은 비판하고 오류수정하여 그 다음 선거에 전략 전술로 이용될수 있다. 그러나 한국 정치인의 소신 주장은 한번 실패했을 때 한 개인의 정치적 몰락으로 끝나버린다. 그리하여 실패는 반복된다.
사상체계는 모든 실패한 전략과 전술로부터 효용가치를 찾아낼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 정치적 주장이 개인적 관점이 아닌 이론적 체계로부터 유도된 책략이므로 오류시정의 객관적 자료로 되어 새로운 정책제시의 방향타로 기능한다.
[정리 : 사상체계 없는 개인적 소신은 검증불가능성으로 하여 실패를 반복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상하지 않으면 안된다. 실패마저도 다음번 도전에 충분히 이용될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좌파든 우파든 [옳으냐 그르냐]보다 사상체계를 가지느냐 안가지느냐가 더 중요하다.
체계없는 소신은 개인의 주관이므로 실패가 반면선생으로 이용되지 않고 그냥 무가치한 정보로 버려진다. 사상체계를 갖춘 정치는 그 사회의 공유된 체험이므로 그 자체로서 사회적 약속이 되어 실패한 정치마저도 다음번 도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한다.
비판할수 없는 실패는 폐기될 뿐이다. 비판할수 있는 실패는 그 실패한 체험의 공유가 그 자체로서 사회적 신뢰를 생산하여 하나의 사회적 약속이 되고 신사적 룰이 된다.
좌파의 진보적 주장들은 뚜렷한 이데올로기로부터 유도된 사상이므로 부단히 실패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정치를 진보의 방향으로 이끌고 나가는 힘이 있다. 그러나 우파의 보수주의는 단지 좌파의 무모한 실험이 실패할 때를 기다려 반박할수 있을 뿐이다.
우파의 보수는 좌파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을 뿐 결코 스스로 정책을 생산해내지 못한다. 좌파는 거듭 실험하고 우파는 그 실험들에서 잘못된 것들을 솎아내는 기능을 가진다. 우파는 근본적으로 좌파에 비해 이데올로기가 빈곤하기 때문이다.
좌파가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이끌고 가는 동인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는 것은 그 사상체계의 상당한 결함에도 불구하고, 출발점으로서의 사상체계 그 자체의 이념적 기본정신을 결코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사상의 발달
역사에서 오래 살아남은 사상들로는 기독교 사상과 유교사상, 불교사상, 마르크스주의 사상 들을 들수가 있다. 이들 살아남은 사상들의 특징은 조악하나마 그래도 제법 이념에서 주의까지 연결되는 사상체계를 갖추어 있다는 점이다.
유교의 경우 최초 공자와 맹자들에 의해 주장될 당시 하부구조에 치우쳐 있었다. 즉 방법론에서 교육의 방법과 문명론에서 유교이상국가의 결실을 강조하되 근거가 되는 존재론과 인식론이 빈약했다.
초창기 유교는 에너지 획득은 있는데 에너지 손실이 없었던 것이다. 흔히 실용주의라고 말해진다. 잃는데가 없는데 생기는 것이 있다면 설득력은 약하다. 이 밥이 어디서 나온 밥인지 몰라도 일단은 먹고보자는 실용주의적 생각은 뒷탈이 걱정되는 것이다.
당, 송시절 유교와 불교가 대결했을 때 불교의 승리는 이같은 측면에서 이해된다. 불교는 존재론(윤회사상)과 인식론(해탈), 정신론(일체개고)이 제법 갖추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유교주의의 반격은 성리학의 형태로 나타난다.
성리학은 유교주의가 현실정치를 강조하느라 상당히 무시하였던 음양오행사상과 주역사상을 존재론의 관점에서 새로이 발굴하고 인식론에서 중용사상을, 정신론에서 사단칠정론을 주장하므로서 취약한 상부구조를 대폭 보강한 것이다.
성리학에서 유교주의는 1차적으로 그 사상체계의 형식적 완성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퇴계학의 사단칠정론에서 정신론이 보강되었고, 명에서는 양명학에서 정신론이 보강되었다. 이러한 유교주의의 사상적 발달은 6~7세기 불교와의 이념투쟁에서 패배한데 다른 체계적 반격노력의 결실이었다.
[정리 : 사상체계는 역사과정에서 점진적으로 보강된다]
여기서 드러나는 점은 체계있는 사상은 부분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역사과정에서 점진적으로 보완되고 시정되어 발달할수 있다는 것이다. 즉 상당한 생명력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가 사상을 가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한번 획득한 정보가 오류임이 증명되었을 시에 완전히 용도폐기 되지 않고 오류시정을 통한 생명성의 지속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사상은 그 상당한 오류에도 불구하고 학문과의 지속적 교감을 통해 스스로 자신을 변혁하면서 끈질기게 살아남아 인류역사의 발달에 기여한다.
갈릴레이가 [지구는 돈다]고 폭로해 버려도 기독교는 살아남았다. 기독교사상의 상부구조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하는 인식론적 기본입장의 이념성이 매우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과학이 상당히 발달해도 과학은 사상이 아니기 때문에 [생육하고 번성하라]하는 식으로 인간의 이 우주에 대한 기본적 태도를 대리로 설정해 줄수는 없는 것이다.
[정리 : 과학은 침묵하고 사상은 발언한다]
학문은 그저 존재의 사실을 밝혀낼 뿐 구체적으로 인간의 입장에서 안내하지 않는다. 물이 거기 있다는 것은 학문이 밝혀내지만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로 가서 그 물을 마셔야 한다는 생각은 사상으로부터 얻는 것이다.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갈증하게 하고 마침내 그리로 가서 그 물을 마시게 한다. 좋은 사상은 맞는 과학보다 낫다. 과학이 좁은데 비해 사상은 넓기 때문이다. 과학이 틀리면 곧 폐기되는데 비하여 사상은 폐기되하더라도 그 기둥줄기는 남겨두기 때문이다.
과학은 검증된 사실만 말하지만 사상은 필요하다면 곧 발언하기 때문이다. 설사 검증되지 않았더라도 이념에서의 기본적인 신뢰는 유효하다.
인간과 사상
사상을 가져야 한다. 사상체계가 서야 상부구조에서 원칙과 견지의 기본전략을 세울수 있고 하부구조에서 세부전술의 무궁한 변화와 유연한 임기응변을 능히 해낼수 있다.
사상이 없으면 검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술이 전략을 침범하고 임기응변이 무질서를 초래할 때 이를 바로잡을 수가 없다. 사상체계가 충분히 통제되는 변화를 가능케 한다. 변화할수 있어야 이길 수 있고 그 변화를 제어할수 있어야 획득할수 있다.
사상체계는 그 검증가능성으로 하여 언제든지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올수 있게 하기 때문에 화려한 임기응변과 분망한 전술구사에도 본바탕을 잃지 않게 한다. 거기에서 유연성이 얻어지는 것이다.
[정리 : 검증가능한 사상체계는 유연한 변화에도 길을 잃지 않게 한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서도 이러한 사상체계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원칙과 견지, 출발점과 귀결점을 부단히 확인하므로서 끊임없는 변화에도 일관성을 유지할수 있고 경직되지 않은 자유로운 태도를 가지고도 길을 잃지 않을수 있다.
자유로움은 인간으로 하여금 위험에 빠지게 하지만 사상체계는 언제든지 원래의 위치로 돌아올수 있게 한다. 사상이야 말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힘이다.
[인생의 사상체계]
1. 내 인생의 근거는 ? [환경].. 출발점 원칙 전략 일관성 ≪-- 상부구조
2. 내 인생의 동기는 ? [개성]
3. 내 인생의 목적은 ? [선,악]
4. 내 인생의 방법는 ? [생활]
5. 내 인생의 귀결은 ? [행복].. 귀결점 변화 전술 유연성 ≪-- 하부구조
1. 내 인생의 근거는 나를 있게 하는 모든 것이다. 가족이나 국가, 세계, 자연, 우주, 신들 또는 이들의 공통점 내지 이들을 통일한 전체개념으로서의 환경과 역사시간에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그 환경의 모든 소산들이 근거가 될 수 있다.
2. 내 인생의 동기는 이 근거의 보편성에서 차별화되는 나만의 특수성으로서의 나다움이다. 나만의 체험, 내만의 특성, 나만의 방식이 동기가 된다. 나와 세상이 다르기 때문에 나의 존재의의가 찾아진다.
3. 목적은 근거에서의 보편성과 동기에서의 특수성, 이 양자 사이의 간격을 사회에 투사한 것이다. 개인의 특수성을 사회의 보편성 안에 구현하기로서의 선을 지향하는 목적을 가지므로서 근거로서의 세계와 고립된 나와의 간격을 메울수 있다.
4. 방법은 시간 상의 진행에서 목적의 실현과정이다. 과정에서 타 영향으로부터의 무수한 침해와 간섭이 있고 그 간섭들로 하여 무수한 선택의 길이 주어진다. 이 중 목적에 이르기까지의 가장 빠른 길이 유효한 방법이 된다.
5. 결실은 이미 목적을 달성한 후 최후에 나로부터 벗어나 나가 배제된 상태에서 남는 것이다. 나를 떠나서 나로하여 달라진 모든 것이 그 결실이 된다. 올바른 길로 왔다면 가장 많이 남을 일이다.
사상체계는 이 근거, 동기, 목적, 방법, 결실의 전개에서 자기복제이다. 곧 최초에 근거가 모든 판단의 출발점이 되고, 동기는 그 근거 안에서의 동기이며, 족적은 그 동기 안에서의 목적이고, 방법은 그 목적 안에서의 방법이며, 결실은 그 방법 안에서의 결실이다.
[정리 : 사상체계에서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한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이 있다. 이러한 의제가 참이려면 수단(방법)은 목적 안에서의 수단이어야 한다. 이 말이 잘못 쓰여질 때 수단이 목적을 벗어나서도 정당화된다는 의미로 왜곡될수 있다.
목적과 수단을 분리하여 별개의 두 판단으로 했을 때 곧 수단이 목적의 한정을 벗어났을 때 곧 자기복제의 시스템을 파괴했을 때 목적은 유효성을 상실한다. 곧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하지 못한다. 더 이상은 목적이 아니다. 그러나 자기복제의 시스템이 기능할 때 곧 수단이 목적의 한정 안에서 작동할 때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그러므로 사상 안에서 인간은 자유롭다.
사상체계는 하부구조를 상부구조에 종속시키므로서 상부구조 안에서 하부구조의 자유로움을 생산한다. 하부구조는 상부구조에 의해 자기복제 되었으므로 결코 한정을 넘어설 수 없다.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침해하지 않는 한 얼마든지 융통성과 탄력성을 발휘할수 있다. 곧 우리는 모든 실천에 있어서 그 행동 하나하나가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정리 : 자기복제의 시스템 기능 안에서 인간은 무한히 자유롭다]
자기복제에서 상부구조는 공간을 한정하고 하부구조는 시간을 한정한다. 그러므로 자기복제 안에서 모로가도 서울로 가게 된다. 단지 더 빨리 가던가 더 늦게 가던가를 선택할수 잇을 뿐 방향을 바꿀 수는 없다. 방법은 단지 그 지시된 방향 안에서 가장 빠른 길을 찾을 뿐이다.
자기복제의 시스템기능이 작동하는 한 모든 실천은 선이다. 어떠한 선택도 어떠한 행동도 제재되지 않는다. 우리는 행동 하나하나가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필요가 없다. 단지 상부구조를 침해하는지의 여부만 판단하면 된다.
인생의 사상체계는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 지침이 올바른 나침반을 가진 사람은 어느 길로 가든 결코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자유롭다.
사상가의 태도
사상체계의 자기복제 시스템구조는 하부구조에서 상부구조로 비약할수록 점점 더 단순화되는 성질을 가진다. 자기복제의 양적전개가 질적비약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세상 모든 문제는 근원적인 단계에서 이원론으로 귀결된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 되고 흑 아니면 백이 된다. 선 아니면 악이 되고 [이다] 아니면 [아니다]가 된다.
상부구조 1. 배경.. 공 이다 ≪―≫ 허 아니다 [<-- 근원에서 이원성]
2. 실체.. 존 있다 ≪―≫ 무 없다
3. 연관.. 재 같다 ≪―≫ 부재 다르다
4. 이행.. 사 속하다 ≪―≫ 비 배제되다
하부구조 5. 귀결.. 상 맞다 ≪―≫ 멸 틀리다
※ 집적도 1 의 자기복제 출발점에서 [이다, 아니다]의 여부판단 만이 남는다.
사상가의 태도는 세상의 복잡 다단함에도 불구하고 그 근원에서 신뢰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변화는 무상하게 일어나고 비극은 태연하게 진행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믿을수 있어야 한다.
세계는 최종적으로 공간과 시간, 방향과 순서의 두 변수가 자기복제하여 지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변화들은 자기복제의 순서와 방향을 거슬러 되짚으면 마지막에는 근원에서 집적도 1 의 대응요소 2로 귀결된다.
신은 있거나 아니면 없다. 외계인은 있거나 아니면 없다. 둘 중에 하나이므로 우리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동전의 앞면이거나 아니면 뒷면인 것이다. 여기서 제 3의 선택은 없다.
우리가 혼돈에 빠져 판단을 못하고 망설이게 되는 것은 근원에서 결론을 내리지 아니하고 진행중인 변화의 과정에서 끼어들어, 달리는 차 안에서 함부로 내리려 하듯 중간에서 결론을 내리려 하기 때문이다.
신은 있는가? 없는가? 사상의 전개에서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단계는 [있다, 없다]가 아니라 [이다, 아니다]의 단계이다. [있다, 없다]도 [이다, 아니다]에 포함된다.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아니한다면 신이 존재하지 않아도 이 세상이 돌아가도록 최초에 그 자기복제의 에너지를 손실당한 그 무엇인가가 반드시 존재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신이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최종적으로 그것이 [신인가, 아닌가?]의 문제이다.
신이 있든지 없든지 그 의미는 같다. [이다, 아니다]의 궁극개념은 그 근원적 존재가 [인간에게 친절한 존재인가, 불친절한 존재인가]의 문제일 뿐이다.
[정리 : 신이 있다면 인간에게 친절한 존재로서의 있음이고, 없다면 불친절한 존재로의 아님이다. 어느 쪽이든 자기복제를 부인할 수는 없다]
신이 [있다]는 개념은 신[이다]의 [이다]를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그 궁극적 존재가 인간의 삶에 깊숙히 개입한다는 즉, 인간에게 친절한 존재라는 뜻이다.
[신이 없다]는 말은 근원의 존재가 인간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즉, 인간에게 불친절한 존재이라는 뜻이 된다.
신이 있다해도 인간과 무관한 즉, 인간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신일수 없기 때문이다. 즉 신이 [아니다]인 것이다.
해석하면 결국 신의 의미는 [인간의 자연존재가 최초에 신의 자기복제로 부터 비롯하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이다.
[신이 있다]는 말은 자기복제로부터 비롯한다는 뜻이며 [신이 없다]는 뜻은 복제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복제 된 존재라면 인간의 실천은 신이 한정하는 자기복제의 시스템 영역에서 단 한발짝도 바깥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신이 인간의 삶에 깊숙하게 개입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
[정리 : 신이 없다고 말하면서 스스로 신이 되어 버린 사람이 있다]
[신이 있다]면 인간의 삶은 그 테두리에서 자기복제의 영역범위에 한정되고 그 영역 안에서 자유롭다. [신이 없다]면 인간이 신을 대체한다. 인간은 영역이 없고 신의 고독을 대신으로 감당한다.
사상가의 태도는 근원에서 낙관할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어느쪽으로 결론이 나든 의미는 동일하다. 신이 있으면 그 영역 안에서 인간은 자유롭고, 신이 없으면 인간이 곧 신이다. 어느쪽이든 시스템 기능 자체는 유효하다.
최종적인 낙관은 시스템 기능 그 자체에 대한 신뢰이다. 근원에서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고 그밖에 제 3의 선택이 배중률에 의해 배제된다.
유쾌한 낙관주의
모든 사상은 낙관주의와 비관주의의 양 측면을 공유한다. 이 둘 중 하나로만은 사상이 사상으로 기능할수 없다.
낙관적이라는 것은 문제와 자신과의 위상관계에서 자신이 주도적으로 상부구조의 역할을 맡는다는 것이며 비관적이라는 것은 하부구조에서 초라한 종속변수가 됨을 말한다.
바둑이라면 포석단계에 두어져서 무궁한 변화의 수를 낳는 돌은 낙관적인 기대치를 가지며 사석작전으로 버려지는 돌은 비관적인 기대치를 갖는다. 더 이상의 역할과 기능이 없다면 초라한 것이다.
낙관할수 있다는 것은 기대할수 있다는 것 희망이 있다는 것, 결론을 내리고 평가하기에는 이르다는 것, 아직도 많은 수들이 뒤를 잇는다는 것이다.
사상은 시스템을 가지며 낙관은 그 시템에서 엔진의 역할을 가지고 비관은 그 시스템에서 마지막 배기가스의 역할을 가진다. 낙관의 엔진 뒤에는 기어와 바퀴축이 이어지고 바퀴자국의 비관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시스템 있는 모든 사상은 낙관과 비관의 양측면을 가지지만 낙관이 비관보다 더 클때 기능하며 비관이 낙관보다 클 때 기능이 정지하여 사망한다. 상부구조가 더 기능할 때 유효하고 하부구조가 더 기능할 때 효용은 수명을 다한다.
[정리 : 사상은 상부구조가 기능할 때 낙관하고 하부구조가 기능할 때 비관한다]
기독교 사상이라면 창세기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이념적 지침은 유쾌한 낙관이 되나 신약에서 [종말이 임하였도다]는 주의의 방편은 비관이 된다. 전체적으로 어느쪽으로 더 기우느냐에 따라 낙관과 비관이 판명된다.
사상들은 그 실천에서 과학적 성과들과 마찰한다. 초기에 낙관주의였던 모든 사상이 과학과 충돌하여 점차 비관주의로 바뀌어지고 비관이 우세하게 될 때가 효용의 정지시점이다.
마르크스주의 초창기에 마르크스주의는 미래에 대한 유쾌한 낙관이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할수록, 경제가 발달할수록, 혁명비용은 커지고 상대적으로 기대이익은 줄어든다.
가난한 미개사회에서 혁명비용은 적게들고 기대이익은 매우 크지만 발달된 문명사회에서 혁명비용은 갈수록 커지고 기대이익은 상대적으로 감소한다. 갈수록 비관론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즈음 사상의 수명은 종료한다.
[정리 : 혁명의 낙관은 혁명비용과 기대이익 사이에 균형점에서 결정된다]
점장이의 예언은 유쾌한 낙관으로 출발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비관이 되어간다. 최초에 사건은 추상적이고 모호한 형태로 존재하므로 점장이의 예언은 그 자체로 그 모호성을 해결하는 하나의 정보로 기능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사건은 분명한 윤곽을 드러내고, 예언은 그 윤곽을 드러낸 구체적인 사실에 대응하지 못하므로 기능이 정지하는 것이다.
[점장이의 비관론]
[손님의 질문] [♠ 점장이의 답변] [※ 적중률]
1. 투자할 것인가? 말것인가? (찬, 반) ♠ 투자하라. ※ 1/2
2. 어느 업종에 투자할 것인가? (식료, 기계, 전자, 유통) ♠ 전자 ※ 약 1/4
3. 누구에게 투자할 것인가? (김, 이, 박, 정, 조, 최, 오, 주씨) ♠ 박씨 ※ 약 1/8
4. 얼마를 투자해야 할 것인가? (100만원~1억원) ♠ 1000만원 ※ 약 1/20
5. 얼마를 벌수 있을 것인가? (0~10억원) ♠ 2억원 ※ 1/100
사건은 자기복제를 진행하며 진행할수록 복잡해지고 구체화된다. 구체화될수록 경우의 수가 늘어나므로 점괘의 적중 확률은 떨어진다. 그러므로 예언가는 동일사건에 대해서는 많이 예언할수록 적중률이 떨어지는 낭패를 겪는 것이다.
현명한 점장이는 사건이 구체화 될 수록 부정적인 예언을 한다. 만약 낙관적인 예언을 해서 [투자하라]고 했다가는 두 번째 질문 [어디에 얼마를 투자할까?]를 당하게 되고 세 번째, 네 번째 질문으로 갈수록 적중률이 떨어지는 구체적인 질문을 당하게 된다.
점장이가 적중률을 지지하기 위해서는 비관적인 예언을 계속 해야만 한다. 잘될 것이라고 했다가는 어떻게 잘되는지 설명해야 하지만 안될 것이라고 했을때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정리 : 플러스 알파를 포착하지 못하는 미래예측은 비관으로 흐를 수 밖에 없다]
사상체계는 근거에서 동기로, 목적으로, 방법으로, 결실로 이행하는 각 단계 마다 한번씩 기능의 변화를 가진다. 이때 대응대상이 변화하는데 그 기능의 변화가 곧 플러스 알파이다. 미래예측의 실패는 이 기능의 변화로서의 플러스 알파 추적에 실패하는 것이고 이 경우 자연히 비관주의가 된다.
마르크스의 비관주의
사상은 시간 상에서 전개하면서 구체화될수록 비관론이 되어가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또한 출발점에서의 기본적 원칙은 유쾌한 낙관에서 유효하나 하부구조에서 구체화되어서는 세월이 흐를수록, 사회가 발달할수록 비관론이 된다.
공산주의가 처음 생겼을 때 유쾌한 낙관주의였다.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를 발달시켜야 한다는 책임을 맡았을 때 예측의 적중률을 높이기 위해서 비관주의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모든 사태를 비관적으로 보고 불길한 예언만 하는 족집게 접장이의 전철을 밟게 된 것이다.
마르크스는 최초의 낙관주의를 [공상론적 사회주의]라 부르고 자신의 비관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라 불렀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그래도 상당한 낙관적 전망이 있었다.
[정리 : 마르크스는 실패했으나 공상론적 사회주의의 유쾌한 낙관은 유효하다]
레닌이 혁명을 시작했을 때 더욱 구체화해야 하는 문제에 부닥쳤다. 레닌의 비관은 마르크스의 [혁명은 영국과 같이 산업화가 발달한 나라에서 가능하다]는 생각을 폐기했다. 혁명이 자본주의 산업화의 자체모순에 의하여 저절로 된다는 낙관적 전망을 포기하고 음모에 의해 인위적으로만 가능하다는 쪽으로 바꾼 것이다.
트로츠키가 레닌을 계승하여 열강의 간섭과 맞섰을 때 더욱 비관적이 되어 [영구혁명론]을 내어놓았고 모택동은 더욱 비관적이 되어 [문화혁명]을 내놓았고 김일성은 더욱 비관적이 되어 [쌀은 사회주의다]까지 갔다. 갈수록 현실을 부정적, 회의적으로 보고 인위적 개입의 폭을 넓혀 간다. 거기서 마르크스주의의 수명은 정지한다.
[마르크스주의의 비관론]
1. 공상론적 사회주의...............미래사회는 저절로 공산주의 유토피아가 된다.
2.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자본주의는 자체모순에 의해 저절로 붕괴하여 공산주의 가 된다.
3. 레닌의 폭력혁명론..............자본가들의 반동이 집요하므로 인위적 음모에 의한 노 동자 폭동으로 혁명할수 밖에 없다.
4.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혁명은 저절로 되지 않으므로 전 세계를 혁명할때까지 전쟁해야 한다.
5. 모택동의 문화혁명론...........계급혁명만으로 되지 않고 정신혁명까지 해야 한다.
공산주의는 최초의 유쾌한 낙관 [저절로 된다]에서 마르크스의 [노동자가 단결하면 저절로 된다]로, 레닌의 [상당한 유혈전쟁으로 어렵게 된다]로, 트로츠키의 [전 세계를 상대로 무한정 싸워야 된다]로, 모택동의 [계급혁명만으로 부족하다]로, 단계적으로 그 비관의 강도를 높여왔음을 알수 있다.
이런 식으로 비관의 강도를 높여가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 낙관보다 비관의 비중이 커져버린다. 그때가 사상의 수명이 종료되는 시점이다.
[정리 : 낙관은 저절로 되는 영역이 상대적으로 크다는 말이고 비관은 인위적 노력이 개입할 여지가 더 크다는 뜻이다]
최초 공상론적 공산주의 단계에서는 이 세상은 어차피 저절로 공산주의가 될 것으로 예측했으므로 굳이 이 사회를 비관적으로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구체화 했을 때 아무래도 저절로는 안될 것 같으므로 무리한 인위적 폭력혁명을 정당화 하기 위해서 현실을 더욱 나쁘게 말해야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저절로 안되는 정도는 커지고 그럴수록 무리한 방법을 써야하며 그 무리한 방법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현실을 더더욱 나쁜 것으로 선전해야 했다.
공산주의는 갈수록 비관적이 되어 무리한 방법을 쓰며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현실을 더욱 나쁜 상황이라고 주장한다.
낙관에서 비관으로 사상이 변질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최초에 공산주의가 생겼을 당시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공산주의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낙관의 플러스 알파
일부 사이비 종교들에서 극도의 비관주의를 발견할수 있다. 신도의 재산을 갈취하기 위해서는 무리한 현실도피를 주장해야하고 그 현실도피를 정당화하기 위해 현실을 나쁘게 말하는 강도를 높여간다. 그럴수록 사이비의 수명은 짧아진다.
기성종교들이 그 비과학성에도 불구하고 긴 수명을 유지하는 것은 상부구조의 이념에 기초하고 하부구조를 개방하는 유쾌한 낙관주의 때문이다. 즉 그 종교의 기능을 하부구조의 [천국행 티켓]이 아닌 상부구조의 [생육과 번성] 에 두기 때문이다.
기성종교들은 그 유쾌한 낙관적 전망을 유지하기 위해 종교의 기능을 방법과 결실의 실익을 강조하는 하부구조보다는 인생의 근거와 동기를 찾아보는 상부구조에 두므로서 여전히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생산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 : 유쾌한 낙관은 플러스 알파의 활약을 믿고 출발점에 서서 바라보는 것이다]
공상과학소설에서도 그러한 성질을 발견할수 있다. 최초의 공상은 [멋진 신세계]하는 식으로 미래에 대한 긍정적 낙관이 있었다. 그러나 소설가들은 곧 눈치채었다. 환경오염과 핵전쟁으로 인류가 멸망하는 비관적 설정을 하지 않고는 1000장의 원고지를 메꾸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미래를 긍정적으로 그리려면 미래에 대한 예측능력이 매우 뛰어나야 하지만 인류가 멸망했다고 설정해버리면 그러한 예측의 부담 그 골치아픈 숙제가 없어져 버린다.
비관주의야 말로 모든 틀린 예측과 잘못된 사상, 사이비종교의 명백한 증거이다. 비관하는 것은 플러스 알파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플러스 알파는 기능의 변화이다. 기능은 사상체계의 전개에서 근거, 동기, 목적, 방법, 결실 각 단계에서 1회씩 변화한다.
[범주] [기능] [낙관] [비관] [기능의 수] [적중률]
1. 배경 유도기능 이다 ― 아니다 2 1/2
2. 실체 대응기능 있다 ― 없다 10 1/10
3. 연관 의속기능 같다 ― 다르다 50 1/50
4. 이행 인과기능 속하다 ― 배제되다 250 1/250
5. 귀결 표상기능 맞다 ― 틀리다 1250 1/1250
※ 플러스 알파가 되는 [기능의 경우의 수]는 집적도 증가의 각
단계에서 5배증하고, 점장이의 예측 적중률은 그만큼 떨어진다.
[사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서 1의 유도기능이나 2의 대응기능일 때 곧 우리 인생에 그 삶의 근거와 동기를 주는 역할을 가질 때 사상은 유쾌한 낙관이 된다. 그러나 하부구조에서 구체적인 이익을 주려할 때 낙관을 유지하기는 힘들어진다.
공산주의사회는 지정학적 이동, 물리적 이동, 사람의 이동, 시장의 이동, 정보의 이동 등 사회를 유지하는 이동들에서 그 이동비용이 그 이동으로 인한 기대이익보다 상대적으로 작아졌을 때 곧 이동이 쉬워졌을 때, 이동을 독점하기 위해 설치했던 차단벽들을 없애버린 사회이다.
통신에서 적은 회선에 가입자가 폭주하면 접속이 어려워지므로 가입자수를 제한하려 한다. 반대로 회선을 늘려버리면 접속이 쉬워지므로 가입자 제한이 필요없다.
문명이 발달하면 저절로 그런 사회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전히 낙관할수 있어야 한다. 모든 비관적 전망을 잠재울 플러스 알파들이 나타난다.
플러스 알파는 기능의 변화이다. 즉 어떤 것이 쓸모없어졌을 때 곧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용도로 계속 사용되는 것이다.
기계가 농부의 작업을 대신하면 농부는 실업자가 된다. 이때 농부는 곧 용도폐기되어 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계생산 노동자가 되어 새로운 기능을 가지게 된다. 정보화사회는 일거리를 줄여서 실업자를 양산할 것으로 예견되었으나 실은 반대로 실업자를 줄이는데 성공했다.
전화, 휴대폰이 등장하면 통화로 간단히 일을 처리할수 있으므로 일일이 직접 찾아갈 필요가 없어진다. 그만큼 일이 줄어들어 실업자가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때 플러스 알파가 등장한다. 실업자 수는 오히려 줄어든다.
전화나 휴대폰은 사람들 간에 만날 기회를 더욱 늘려서 더 많은 일들을 생산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연락의 어려움으로 포기되었던 많은 일들이 새로이 추진되는 것이다.
[정리 : 플러스 알파는 기능의 자기복제 5배증이다]
사상체계는 각 단계를 이행하면서 기능을 자기복제하고 한 단계가 복제될 때마다 경우의 수는 그만큼 늘어나므로 그 수만큼 플러스 알파는 증가한다. 그러므로 점점 더 낙관적이 된다. 한가지 단계를 넘어설 때마다 새로이 기능이 부여되는 것이다.
기능의 자기복제의 플러스 알파를 모르는 사람이 미래를 예측하면 반드시 비관적인 예측을 하게 된다. 경제학에서 [수확체감의 법칙]이 여기에 해당된다. 하나의 상품은 하나의 기능을 가진다는 고정관념을 버리면 기능의 창조를 통하여 [수확체증의 법칙]을 실현할수 있다.
[정리 : 기능의 자기복제는 각 단계에서 다시 유도, 대응, 의속, 인과, 표상하여 5배증으로 수확체증을 실현한다]
항공기, 무기등 장치산업과 컴퓨터, 인터넷 등 많이 생산할수록 오히려 생산성과 수요, 수익이 늘어나는 현상이 여기서 설명된다. 즉 충분히 기능이 부여되지 않은 상품의 경우 끝없이 새로운 기능이 생겨나므로 많이 생산할수록, 덤핑을 칠수록 수요가 늘어나서 더 이익을 보게된다.
휴대폰의 경우 상대방이 휴대폰을 가지고 있으면 그 상대방에게 전화하기 위하여 자기도 휴대폰을 사게 된다. 이는 기능의 창조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에게 공짜로 휴대폰을 주어버리면 휴대폰이 더 많이 팔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 시장에서의 휴대폰, 시티폰 판매경쟁에서 이 점을 관찰할수 있다. 상대방에게 휴대폰이 없으면 전화할 일이 없어져서 휴대폰을 구입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조건 대량생산 해서 공짜로 나눠줘버리면 오히려 더 많이 팔리는 것이다. 곧 기능의 자기복제로서의 플러스 알파이다.
진정한 낙관주의자
모든 사상은 현실을 비관적으로 보고 낙관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그 방법을 하부구조에서 찾으므로 해서 더욱 비관적으로 변해 간다. 그리하여 비관이 낙관보다 커졌을 때 사상은 사망한다.
사상은 구체적인 현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존재하지만 오늘의 문제가 오늘에서 해결되지 아니하고 현실의 문제가 현실에서 해결되지 아니한다.
이 차원에서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한 차원 더 높은 데서 찾고, 또 더 높은 차원으로 비약하기를 거듭하여, 마침내 가장 궁극적인 차원, 근원적인 차원까지 올라가서 거기서 가장 낙관적인 희망을 발견하고 그 상향구조의 스스템을 의식에 구축해두므로서, 개인차원에서 또 현재시점에서,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전체인류의 차원에서 또 과거와 미래까지를 통일한 열린 시점에서 포용해내는 것이다.
모든 비관적인 생각들은 현재시점에서 비관적이고 개인차원에서 비관적이다. 자기복제가 더없이 진행되어 말초적인 차원에 있으므로 비관적이다. 근원으로 돌아가면 단순해진다. 그리고 포용한다. 그러므로 낙관해도 좋다.
낙관하려면 근거에서 기능을 찾아야 한다. 오늘 한 그릇의 밥을 구하는 수단으로 사상을 찾지 말것이며 내일 미처 다가오지 않는 날들에 대한 믿음으로 찾아야 한다.
[정리 : 사상한다는 것은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는 것이다]
사상한다는 것은 투자한다는 것이다. 투자는 미래를 위한 투자이다. 오늘의 투자가 오늘의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다. 지금 먹고 있는 이 사과가 어제 심은 사과임을 알기 때문이다.
사상은 지극히 현실주의다. 바로 오늘 이순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는 사상한다. 그러면서도 가장 멀리 보고 가장 긴 호흡으로 백년 후를 위하여 투자하는 것이 사상이다. 가장 멀리보는 것이 가장 현실적일수 있는 것은 오늘 우리의 소득이 또한 옛 조상이 투자한 그 결실임을 알기 때문이다.
[정리 : 가장 멀리 보고 가장 먼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것이 오늘 이순간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얻는 이득은 손에 쥔 한 알의 사과가 아니다. 조상이 심어둔 사과나무에서 수확하며, 동시에 후손을 위해 한 그루를 심어두는 그 연속적인 자기복제의 체계를 기능하게 하는 것, 그 기능을 신뢰할수 있으므로 안전해질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익이기 때문이다.
사상은 현실주의다. 가장 멀리 내다보므로 하여 더욱 현실적이다. 믿음이야 말로 얻을수 있는 가장 큰 수확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것들을 기능하게 한다.
♠
소설가 장정일씨가 음란성이 있는 소설작품을 발표했다면 우리는 그 내용에 대해 [옳다 그르다]의 진위판단을 할 수 없다. 그것은 과학이나 철학이 아니므로 진위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다만 [심하다. 심하지 않다]의 사적인 소감을 발표할수 있을 뿐이다.
진위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3차정보의 분석영역에 들지 못한다는 뜻이다. 정보들은 그 집적정도에서 3차정보의 분석에서 진위판단되고 4차정보의 종합에서 독립하고 5차정보의 응용에서 자기복제로 기능한다. 곧 정보가 정보를 생산한다.
사상의 형식은 사상으로 하여금 기능하게 하는 것이다. 곧 주의를 이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1차정보나 2차정보를 4차정보나 5차정보로 비약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응용되고 그 응용이 곧 창의로서 인간의 자기발전에 유효하게 기능하기 때문이다.
마광수씨가 텔레비젼에 출연하거나 신문의 칼럼을 통해 발표한 글들중 일부는 문학의 범주가 아니다. 그는 대학교수의 신분으로 그 신분을 특별히 강조하여 문학이 아닌 과학, 내지 철학의 입장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마광수는 대학교수의 학자적 신분을 강조하였다. [옳다, 그르다]의 관점에서 객관적 평가를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객관적판단을 할수 없다. 사상의 형식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리 : 사상형식은 자기복제를 나타내는 두 개의 (=)를 갖추어 3단논법으로 검증하게 함이다]
사상의 형식은 [옳다, 그르다]의 진위판단을 할수 있는 객관적 형식이며 거기엔 반드시 차별화된 두 개의 (=)를 필요로 한다. 자기복제를 나타내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삼단논법으로 검증할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 예술의 범주가 아닌 과학, 철학의 담론이려면 반드시 사상의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주관을 객관화시켜 타인으로 하여금 진위판단을 할 수 있는 형태로 기술하여 주장해야 한다.
많은 정치적 주장들이 사상의 형식을 갖추지 아니한 채 [소신]이라는 이름으로 함부로 주장되고 있다. 정치는 혼자만의 놀이가 아니다. 사회공간에서 공유되고 조정되어야 한다. 필요한 것은 주관적 소신의 고집이 아니라 객관적 검증가능한 원칙이다.
[정리 : 정치적 소신은 검증불가능한 주관적 고집일 뿐이다]
서구유럽 선진국 정당들의 정치적 주장들은 좌파 혹은 우파 이데올로기의 이념에 기초하여 복잡하고 짜임새있는 사상체계로부터 유도된 전술이므로 객관적인 비평이 가능하지만 우리나라 정치가들이 불쑥 던지는 정치적 화두들은 도무지 비평할 수가 없다.
화두의 형식으로 불쑥 내밀어지는 정치적 소신의 주장들은 정치의 본질인 대화와 타협을 통한 조율을 할수 없다는 점에서 그들은 방식은 정치하는 것이 아니라 도박하는 것이다.
소설가 이문열은 문학과 철학의 경계점에서 모호한 화법으로 양자의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자신의 사사로운 주관을 마치 이념적 사상토대에 기초한 발언처럼 포장하므로서 다중들에게 잘못된 고정관념을 유포하고 있다. 불쑥 던져지는 [화두]들은 비판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무책임하다.
고정관념이 고정관념이 되는 것은 비판과 검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의 언어들은 이미지, 느낌, 연상, 뉘앙스, 유추의 무기로 함부로 편견을 유포하면서 결코 책임지지 아니한다.
이문열의 주장은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들은 철학이 아니고 사상이 아니고 이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토대가 빈곤하기 때문에 비판할수 없다. 이문열이 그른 것은 그의 주장이 그르기 때문이 아니라 말하는 방식이 그릇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느낌들과 이미지들과 기분들을, 정치적인 양념으로 반죽하여, 문학의 방식으로 포장하여 불쑥 던져버린다. 즉 그 내부에 자기복제를 나타내는 두 개의 (=)를 담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이문열의 주장을 하나의 화두로 받아들여 논란하다가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흐지부지 해버린다. 남는 것은 불쾌감 뿐이다.
사상의 체계
사상은 생각 思, 생각할 想이다. 생각 하나는 논거(思)가 되고, 생각 둘은 진술(想)이 된다. 진술은 논거로부터 자기복제된 것이다. 사상은 논거와 진술의 형식을 갖춘 생각의 형태라는 점에서 망상, 느낌, 이미지, 연상, 유추, 감상, 이미지, 소감따위와 구분된다.
사상은 적어도 기능과 체계를 가진 생각들의 집합형태이며 적절하게 상대를 찾아 그 기능을 발휘하는 시간적 과정이다.
사상의 기능은 최초 근거로부터 유도하여 동기에 의해 유발되고 목적에서 주어지며 방버에서 마련되고 결실에서 얻어지는 하나의 실현과정이다. 정보가 정보를 자기복제하여 정보를 대량생산한다.
<사상의 자기복제기능>
이념 1. 근거의 응용-유도되는가? 이다 아니다의 판단..........정보가 정보를 자기복제
↑ 2. 동기의 종합-유발되는가? 있다 없다의 판단.............독립된 정보로 기능
3. 목적의 분석-찾아지는가? 같다 다르다의 판단 .........3단논법의 진위판단
↓ 4. 방법의 수용-마련되는가? 속하다 배제되다의 판단.....변화과정을 서술
주의 5. 결실의 지각-얻어지는가? 맞다 틀리다의 판단..........정확한 묘사
사상의 기능은 예의 근거, 동기, 목적, 방법, 결실에서 유도되고, 유발되고, 찾아지고, 마련되고, 얻어져서, 실익을 제공하는 과정이며 이러한 기능적 실익이 없다면 그건 사상이 아니다.
<사상체계의 전개에서 하부구조로의 이행>
진 --≫ 위
1. 이다 --≫ 아니다 (아니면 있다) 배중률
2. 있다 --≫ 없다 (없으면 같다) 동일률
3. 같다 --≫ 다르다 (다르면 속한다) 모순률
4. 속한다 --≫ 배제되다 (배제되면 맞다) 인과율
5. 맞다 --≫ 틀리다. (틀리면 폐기된다) 한정률
1의 [근거의 응용, 이다 아니다의 판단, 정보가 정보를 자기복제]은 인간이 올곧은 인식으로 하여 스스로 정보를 생산하는 창의적 지적활동을 의미한다.
정보가 정보를 자기복제하는 것이다. 하나의 대상에 대한 인식을 다른 대상에 적용하므로서 하나를 앎으로 해서 열을 알게 되는 것이다.
[정리 : 정보의 자기복제란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안다는 것이다]
2의 [동기의 종합, 있다 없다의 판단, 독립된 정보로 기능]은 하나의 대상에 대한 인식이 다른 대상의 인식에 영향을 미침을 말한다. 두개의 상호대립되는 정보가 있을 때 이것이 맞으면 저것은 틀리게 되는 경우이다.
[정리 : 정보의 독립이란 하나의 정보가 다른 정보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3의 [목적의 분석, 같다 다르다의 판단, 3단논법의 진위판단]은 하나의 대상에 대한 인식 안에서 내부기능이 성립하는가의 판단이다. 즉 대상과 일치하는지는 제외하고 내부모순이 없는가, 곧 어법적으로 말이 되는가이다.
[정리 : 정보의 진위판단은 내부논리가 작동하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4의 [방법의 수용, 속하다 배제되다의 판단, 변화과정을 서술]은 변화를 서술하는지의 판단이다. 내부에서 정보가 정보로서의 의미 곧 최소한의 나타냄이 있는 것이다. 시간성을 포함하는 뜻을 가진다.
[정리 : 정보는 반드시 그 내부에서 어떠한 변화를 담아내어야 한다]
5의 [결실의 지각, 맞다 틀리다의 판단, 정확한 묘사]는 묘사의 영역한정이다. 내부에서 기능하여 그 역할이 끝나야 한다. 즉 정보가 뚜렷한 경계없이 확대해석되거나 동시에 여러 가지를 의미해서는 정보일수 없는 것이다.
[정리 : 정보는 정확하게 영역이 한정되어 거기서 끝나야 한다]
사상체계의 연속적인 전개
사상체계의 전개는 하나의 정보가 그 진위판단에서 다만 긍정되고 부정되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판단에 영향을 미쳐서 상부구조에서 하부구조로 이행하면서 연속적인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판단이 판단을 낳으면서 자기복제하여 하나의 판단이 다른 판단을 대량생산한다. 곧 정보 내부에서 응용되고, 종합되고, 분석되고, 수용되고, 지각되게 하는 것이다.
[판 단]
↙ ↘
1. 이다 아니다 --≫ 진(사과이다)
↙ ↘ 위(사과 아니다)
2. 있다 없다 --≫ 진(사과가 아니면 무엇인지 몰라도 반드시 그것은 있다)
↙ ↘ 위(그것은 없다)
3. 같다 다르다 --≫ 진(그것이 없어도 같은 종류의 것이므로 같다)
↙ ↘ 위(그것과도 다르다)
4. 속한다 배제된다 --≫ 진(다르다면 그에 종속되는 것이다)
↙ ↘ 위(속하지 않으면 정확히 분리된다)
5. 맞다 틀리다 --≫ 진(여기까지 정확하다)
위(전적으로 틀린 정보이다)
위 정보체계의 연속적인 이행과정에서 판단 제 1의 5차정보가 [이다 아니다]의 여부판단을 했을때 만약 아니라는 부정판단이 성립하면 곧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판단 제 2의 4차정보에서 [있다 없다]의 유무판단으로 이행한다. 이런 식의 연속적인 판단이 1차정보까지 5회 반복되어 일어난다.
[정보의 자기복제 진행]
♠ 판단 1 --≫ 배중률
서로 다른 두 개의 정보를 하나로 맞춰보아 일치하는지에 따라 [이다 아니다]를 판단한다.
♠ 판단 2 --≫ 동일률
판단 1에서 [사과가 아니다]의 부정판단이 성립하면 그 정보는 곧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판단 2로 하향하여 [그 사과 아닌 무엇(복숭아)이 있다]의 유무판단을 하게된다. 만약 아무것도 없다면 아니다라고 말할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다는 말은 최소한 그것이 있다는 전제하에 성립하기 때문이다.
♠ 판단 3 --≫ 모순률
판단 2에서 [실은 복숭아가 있지도 않다]고 부정판단이 성립하면 이 정보는 곧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판단 3으로 하향해서 [복숭아는 없지만 복숭아와 같다(복숭아통조림)]의 가부판단을 하게 된다. 있다는 말은 실체가 있다는 뜻이지만 실체가 없이 관계로 있는 같다도 넓은 의미에서 있다에 포함된다.
♠ 판단 4 --≫ 인과율
판단 3에서 [실은 복숭아같지도 않다]고 부정판단이 성립하면 또한 이 정보는 폐기되지 않고 판단 4로 하향해서 [복숭아 같은 것도 아니지만 복숭아에 속한다(복숭아 그림)]의 소속판단을 하게 된다. 같다는 말은 똑같다는 뜻이지만, 같지 않아도 연관되어 있는 것들은 넓은 의미에서 같다에 포함된다.
♠ 판단 5 --≫ 한정률
판단 4에서 [실은 복숭아에 속하지 않는다]고 부정판단이 성립하면 또한 곧 정보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판단 5에서 [복숭아와 전혀 무관하다는 것은 분명하다]의 한정판단을 하게 된다. 여기서도 부정되면 이 정보는 전혀 무가치한 정보, 곧 정보가 아닌 것이 된다. 맞다의 단계에서는 집합의 의미가 없어져서 최후의 원소로 기능하므로 [넓은 의미]나 [포함]이 일어나지 않아 맞지 않으면 곧 폐기된다.
[정리 : 사상체계의 의미는 하나의 판단이 부정되더라도 폐기되지 않고 다른 판단에 이용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하나의 정보가 어느 단계에서 부정되더라도 곧 페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판단이 다른 판단에 영향을 미쳐서 지속적으로 유효하게 사용된다는 것이다.
있다와 없다.
"집주인이 외출중이면 그 집주인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집주인이 외출중인 집은 주인없는 집인가? 주인있는 집인가?"
존재는 그 자체로서 복잡한 집적구조를 가지므로 단순히 [있다, 없다]의 판단으로는 존재의 양상을 여실하게 나타낼수 없다. 열가지 있음들이 있다.
범주 긍정(진) 부정(위)
1. 배경... 공 이다 ≪―≫ 허 아니다
2. 실체... 존 있다 ≪―≫ 무 없다
3. 연관... 재 같다 ≪―≫ 부재 다르다
4. 이행... 사 속하다 ≪―≫ 비 배제되다
5. 귀결... 상 맞다 ≪―≫ 멸 틀리다
있음은 그 존재의 전개과정에서 여러가지 양상을 드러낸다.
1의 배경범주에서 배경까지 갖추어 있는 것이 공의 [이다]이며 배경(근거)없이 있는 것이 허의 [아니다]이다.
가공의 존재인 귀신은 있기는 있으나 그 근거가 되는 영역이 없으므로 허의 존재이다. 즉 참존재는 아닌(아니다) 것이다.
2의 실체범주에서 실체가 있는 존재는 존의 [있다]이며 실체가 없으면 무의 [없다]이다.
이순신장군은 있으나 옛날에 있었고 지금은 실체가 없으므로 없다.
3의 연관범주에서 관계가 있는 존재는 재의 [같다]이며 관계가 없으면 [다르다]이다.
이순신장군이 아닌 이순신장군의 그림 또는 이순신장군의 배역을 맡은 배우도 이순신장군같으므로 그걸로 이순신장군이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관계로 있는 것도 넓은 범위에서 있다에 포함된다.
4의 이행범주에서 이행과정에 속하여 있는 존재는 사의 [속하다]이며 변화에 속하지 않으면 [배제되다]이다. [속하다]라는 말은 움직이고 있는 것, 변화과정 중인 것, 또는 변한 것을 나타낸다.
이순신장군에 대한 생각이나 이순신 장군의 마음이나 이순신 장군의 지시나 이런 것들은 속하여 있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그림은 이순신장군이 아니라도 이순신장군의 실재, 그 전체를 나타내므로 [같다]에 해당되지만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는 직접 이순신장군을 나타내지 않으므로 [같다]가 아닌 [속하다]이다.
5의 귀결범주에서 귀결이 맞는 존재는 상의 [맞다]이며 맞지 않으면 [틀리다]이다. [틀리다]는 일체의 관계가 없는 전혀 엉뚱한 것이다. 곧 정보로서의 효용가치가 전혀 없는 것이다.
원균장군의 그림은 이순신장군이 맞지않다. 이 경우 [틀리다]이다. 틀린 정보는 전혀 의미가 없다. 정보가 아니다.
[정리 : 여러개의 있음들은 변화를 설명하기 위하여 있다]
[이다], [있다], [같다], [속하다]들은 집합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내부에 여러 가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맞다]는 최후의 원소여서 더 이상 쪼갤수 없다. 즉 내부에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틀리다]는 멸의 없음, 전혀 없음이다.
정보들은 집합구조를 가지고 있다. 분자 안에 원자가 있고, 원자 안에 소립자가 있듯이, [이다]속에 [있다]가 있고, [있다] 속에 [같다]가 있고, [같다] 속에 [속하다]가 있고, [속하다] 속에 [맞다]가 있어, 상부구조에서 부정되어도 하부구조에서 긍정될수 있으므로 그 정보의 가치는 유효하게 기능한다.
그러나 틀린 정보는 완전히 폐기되어야 한다. [틀리다]는 그 내부에 하부구조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집이 없어도 집에 대한 소유권이 있다면 집이 있는 것이다. 단지 그 집에 입주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 소유권을 행사해야 실제로 있는 것이지 소유권이 있어도 소유권을 행사하지 못하면 실은 없는 것이다.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이렇게 어중간한 것들이 있다.
어중간한 중간의 있음 곧 반존재들은 변화를 나타내기 위해서 있다. 이순신장군은 없지만 이순신장군과 연관된 것들은 있다. 그러면 이순신은 지금도 있는 것이다.
사상체계의 유효성
정보의 집적성은 상부구조가 하부구조를 통일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큰 정보들이 집합이 되고 작은 정보들이 그 큰 정보의 원소가 되어 역동적으로 기능한다.
세상은 변화하며 변화는 큰 정보에서 그 집합구조가 깨어지는 형태로 나타난다. 집합이 깨어져도 원소들은 살아 있으므로 정보는 여전히 쓸모 있다.
사상체계의 전개는 인간의 대상에 대한 인식에도 이러한 성질을 부여하여 하나의 생각이 사실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생겨도 그 인식은 여전히 유효함을 말한다.
마르크스의 혁명이론이 잘못된 것임이 밝혀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가 만들어놓은 언어로 그가 만들어놓은 방법론으로 사회를 연구한다.
시대가 변하였으므로 학문도 변한다. 상부구조에서 마르크스의 이론이 사실과 일치하지 않아도 하부구조에서 여전히 유효성을 가지고 마르크스의 이론들은 이 사회의 발달에 기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상이기 때문이다.
[정리 : 사상체계는 부분적으로 잘못된 인식도 유효하게 이용되는 성질을 낳는다]
사상체계가 없으면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즉시 용도폐기되지만 사상체계를 갖추면 사실과 일부 일치하지 않아도 여전히 유효하게 이용된다. 그러므로 이념이 필요하다.
이념이란 사상가의 말이 일부 오류가 있더라도 여전히 세상은 그 사상가가 주장한 그 방향으로 굴러가는 성질을 말한다.
마르크스의 말은 상당히 잘못된 주장이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가 말한 진보의 방향으로 굴러간다. 그러한 성질을 이념이라 한다. 그 이념의 유효성을 유지시키는 근거가 사상체계다. 체계를 갖추지 않은 마광수, 이문열식 주장은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즉시 용도폐기되지만 체계를 갖춘 주장은 사실과 일치하지 않아도 기능적으로 유효하다.
대표적인 예로 종교를 들수 있다. 불교, 기독교 등 대표적인 종교들은 그 주장에서 과학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은 점이 무수히 발견되지만 사상체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현실세계에서 기능한다.
사상체계의 형성
인식이 사상체계를 가져야 하는 것은 하나의 판단으로부터 다른 판단을 연속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서이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알게 되는 것이다.
만약 사상체계를 가지지 않는다면 하나의 판단으로부터 다른 판단을 유도하지 못하므로서 부정되는 판단은 모두 쓸모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정보를 머리속에 집어넣고 살아야 한다.
사상체계를 가지면 갑자기 시야가 넓어져서 보이지 않던 것이 보여지고, 모르던 것이 저절로 알게 되고,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한꺼번에 이해된다. 그러므로 많은 정보를 두뇌에 입력시킬 이유가 없다.
[정리 : 사상체계의 형성은 그 자체로 깨달음이다]
정보는 다른 정보에 영향을 미친다. 정보가 정보를 지배하고 정보가 정보를 관리한다. 이것이 시스템이며 시스템인식이 곧 사상체계이다.
정보는 스스로 자기복제하여 정보들을 대량생산한다. 이렇게 생산된 자정보들을 지배하며 우리로 하여금 정보의 효율적인 이용을 도와준다.
또한 역으로 많은 개별정보들이 뭉쳐서, 하나의 근원적인 판단으로 귀납되므로서 근본인식을 가능케 하며 그러한 정보의 결집상태를 수용하므로서, 세상의 모든 사실들에 대해 명쾌한 대응을 할수있게 되는 것이다.
시스템의 기본구조는 집적도 1에서 구성요소 5의 [근거 동기 목적 방법 결실]이다. 이들이 이어져서 하나의 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사상의 검증은 이 시스템의 진위에 대한 판단이며 그 판단은 이 사상체계의 전개가 자기복제에 의한 연속성의 획득에 기인하느냐의 여부이다.
[정리 : 사상체계의 뼈대는 집적도 1 에서 구성요소 5의 [근거 동기 목적 방법 결실]이다]
먼저 근거가 주어지고 그 근거가 자기복제하여 동기를 낳고, 동기가 자기복제하여 목적을, 목적이 밥법을, 방법이 결실을 낳는 순서대로 자기복제가 진행된다.
[사상체계의 전개에서 집적도 1]
대응요소 2 --+-- 공간변수 ―≫ 인간
+-- 시간변수 ―≫ 대상
구성요소 5 ―≫ 근거 동기 목적 방법 결실
※공간변수인 인간의 인식(학문)과 시간변수인 대상(학문목적)이 만나 자기복제하여 구성요소 5를 이끌어낸다.
우리가 사상으로 하여 얻는 것은 결실에서의 실익이다. 그 실익이 궁극적은 차원에서 어디에서 얻어오는가? 근거에서 얻어온다. 근거로부터 배달하는 수단이 자기복제이다.
사상은 무언가 명백히 얻어오는 것이다. 얻어온다면 이쪽에서 생기는 것 만큼 어딘가에 손실이 있어야 한다.
자동차에 비유하면 최초에 근거가 되는 손실은 동력원에서이다. 동력원에서 손실이 일어나는 것만큼 결실에서 실익이 얻어진다. 곧 동력발생이다. 자동차는 그 동력전달의 매개가 된다. 곧 자기복제의 시스템이다.
사상체계 자동차의 동력전달체계
근거 (손실) ―≫ 동력원
동기 ↑ 동력발생
목적 (과정) 동력제어
방법 ↓ 동력전달
결실 (실익) ―≫ 동력효과
생각이 사상체계를 가진다는 것은 근거를 제시하고 실익으로 증명한다는 것이다. 실익이 증명되지 않고 근거가 불투명한 편견, 고정관념, 소신, 망상, 허구들과 충분히 구분된다. 실익을 남긴다는 것은 기능한다는 것이다.
사상은 그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들이 일정한 체계를 가지고 결집하여 명백히 유효한 기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사상체계의 좋은 점은 이 과정에서 상당한 부분적인 오류를 내포하더라도 이 시스템 자체는 유효하게 기능한다는 점이다. 종교가 그렇다. 과학과 충돌하여 오류가 증명되어도 시스템은 여전히 쓸모있다.
사상의 태동
노자가 무위자연을 주장할 때 우리는 이렇게 되물을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어떠한 실익이 주어진단 말인가?] 실효성이 없으면 사상이 아니다.
갈릴레이가 말했다. [지구는 돈다] 그래서 어떠한 이익이 있다는 말인가? 이는 학문적 인식일 뿐 사상은 아니다.
사상은 학문적 인식의 성과를 결집하여 인간에게 배달하고 실익을 제시한다. 그 이익이 어디서 훔쳐온 것이 아니고, 허위가 아니며, 어디서 얻어온 것인지 그 명석한 근거를 제시할 때 우리는 사상이라 부른다.
사상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상이 우리에게 실제적인 이익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누구든 인생에 주어진 시간마큼 살아가면서 그 생에 그만큼 채워넣어야 한다. 어디에선가 얻어와서 얻어온 만큼 채워넣는다. 그 얻어올 데가 있어야 한다. 근거이다.
사상은 그 얻어올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학문에는 힘이 없지만 사상에는 힘이 있다.
[사상의 예]
체계 불교사상 기독교사상 학문
1. 근거는 ? 윤회설 창조론 존재론
2. 동기는 ? 고 원죄설 인식론
3. 목적은 ? 해탈 구원 정신론
4. 방법론 ? 깨달음 믿음소망사랑 방법론
5. 결실은 ? 극락행 천국행 문명론
불교사상은 분명히 극락행의 실익을 약속하고 있고 기독교사상은 명백히 천국행의 실익을 제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수미는 일관해야 한다. 그 결실의 실익이 시스템 기능에서 유도된 것이 확실하다면 곧 자기복제의 원리에 충실하다면 그 사상은 옳다.
기독교라면 그 실제적인 이익은 궁극적으로 신의 창조에 기초하고 있다. 원죄설과 구원론과 믿음은 중간단계로서 그 창조로부터 얻어와서 천국으로 배달하는 중간체계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상들이 참으로 옳은지의 여부는 학문이 증명한다. 자동차라면 에너지원은 개솔린이고 그 결실은 운반이다. 기독교라면 그 에너지원은 창조이고 결실은 천국행이다. 양자가 수미일관하여 자기복제로 정확히 배달되는가? 아니면 중간에서 어긋나는가의 여부로 우리는 진위를 판단할수 있다.
어떠한 주장이나 견해는 반드시 이러한 사상의 체계를 갖추어 있어야 한다. 사상체계를 갖출 경우 그 전개과정에서 일부 오류가 있어도 이념적 유효성을 가지기 때문에 쓸모있다.
정치가는 정치사상을 가져야 하고 교육가는 교육사상을 가져야 한다. 문학가는 문학사상을 가져야 하고 사업가는 경영사상을 가져야 한다.
정치가의 사상은 정치의 궁극적 근거를 어디에서 얻어오고 어떠한 결실을 제공하며 그 중간단계에서 자기복제로의 배달경로는 어떠한 것인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경영가의 사상은 그 경영이익이 근본 어디에서 생겨나고 결국 어디로 배달되는지의 자기복제 경로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체계 자동차 정치사상 경영사상
1. 근거는 ? 동력원 권리 자원
2. 동기는 ? 동력제어 권리행사 자본
3. 목적은 ? 동력발생 민주주의 시장
4. 방법론 ? 동력전달 정치행위 경영
5. 결실은 ? 동력효과 권력행사 이윤
수미일관이어야 자기복제이다. 온데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동차의 동력원은 개솔린이며 이는 자연에서 얻어온 것이다. 자동차가 동력을 발생시켜 운행했을 때 그 최초에 얻어온 에너지는 결국 자연으로 되돌아간다. 에너지는 자연의 일부인 개솔린에서 뒷바퀴의 구동을 통해 아스팔트의 지면을 접촉하여 결국 땅으로 전달되어버리는 것이다.
정치 또한 마찬가지다. 정치는 개인의 권리에서 사회적 권력을 도출시키는 것이며 최초에 개인들의 권리에 근거하고 그 권리를 민주주의 방식으로 결집하여 권력행사를 통해 그 권리의 주인인 개인들에게 되돌려 준다. 권력은 권리의 주인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경영 또한 마찬가지다. 최초에 자원(지정학적 자원, 매장자원, 인적자원, 기술자원, 문화자원)으로부터 얻어와서 자본에서 결집하고, 시장에서 교환하고 경영에서 진행하여 최후로 이윤으로 남기며 그 남은 이윤은 최초에 온 곳으로 되돌아간다. 즉 경영의 이익은 반드시 최초의 근거인 자원에 재투자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경영의 이윤은 지정학적 자원인 인프라와 매장자원인 석유도입, 인적자원인 노동자, 기술자원인 기술개발, 문화자원인 소비로 재투자되게 되어 있다. 반드시 이 다섯가지 자원을 쫓아가며 그 바깥으로 새는 일은 결단코 없다. 만약 샌다면 이윤이 아니라 손실이며 경영의 실패인 것이다.
사상의 형식
샤르트르의 실존주의는 과연 사상인가?
사상이려면 상부구조인 이념과 하부구조인 주의가 하나의 연속된 체계로 아귀를 맞추어 정립해야 한다. 그러나 샤르트르의 실존주의에는 그 상부구조인 이념에서 근거가 불분명하고 그 하부구조인 주의에서 결실의 실익이 또한 불투명하다.
도대체 어디에서 에너지의 손실이 있고 그 손실을 어떻게 보상받는다는 말인가?
체계 유교사상 마르크스사상 학문
1. 근거는 ? 음양오행론 유물론 존재론 ≪― 에너지 손실
2. 동기는 ? 중용 변증법 인식론
3. 목적은 ? 사단칠정론 소외이론 정신론
4. 방법론 ? 교육 혁명론 방법론
5. 결실은 ? 유교이상국가 공산주의이상국가 문명론 ≪― 에너지 획득
샤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위 유교사상이나 마르크스주의사상과 비교해서 그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가 취약하다. 최초에 에너지의 손실이 일어나는 근거가 없고 또 마지막에 얻어지는 이익도 없다.
유교라면 유교주의 이상국가의 이익은 최초 음양오행의 조화에 기인한다. 음양오행이 스스로 조화하여 인간에게 에너지를 제공하여주므로, 인간이 그 음양의 에너지를 받아들여 최종적으로 유교주의 이상국가를 건설하게 되며 중용개념이나 사단칠정론이나 맹자의 교육사상은 그 에너지가 거쳐가는, 또 배달하는 중간단계들이다.
[정리 ; 사상은 상부구조에서 손실된 에너지를 하부구조로 배달하는 연결체계이다]
마르크스주의라면 최초 에너지의 손실은 유물론에서 물질운동의 자연손실에 근거한다. 그 손실된 에너지를 획득하여 공산주의 이상국가를 만들게 되며, 혁명은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유효한 방법으로 제시되고, 소외는 그 에너지가 가장 긴급히 필요한 곳을 가리키며, 변증법은 에너지를 자연에서 인간으로 이전하는 구실이 된다.
샤르트르의 실존주의는 그 상부구조에서 명확한 것이 없고, 마르크스주의에 정도껏 기대면서 하부구조에서 어떠한 이익이 남는지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념이 없다. 이것만으로는 독립적인 하나의 사상이 못된다.
샤르트르의 실존개념은 위 사상체계에서 정신론의 목적에 해당한다. 인간의 존재목적에 대한 하나의 인식방식이다. 여기엔 마르크스의 소외이론을 상당히 수정보완한 정도의 의미가 있다.
이렇게 독립적 사상이 아닌 주장들은 그 체계의 빈곤으로 하여 내놓고 반박할수 없으므로 일시적으로 지지를 얻지만 현실에서 별반 실익의 용도가 없다. 체계가 없으므로 기능하지 못하는 것이다.
[정리 : 사상체계가 갖춰지지 않은 인식은 현실에서 기능하지 못한다]
마르크스사상은 사상체계를 갖추어 있으므로 우리는 논리적으로 반박해낼수 있다. 비판하자. 과연 유물론이 옳은가? 과연 변증법이 옳은가? 과연 혁명은 가장 효율적인 방식의 에너지 사용이 되는가?
실인 즉 그렇지 않다. 학문에서 보면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잘못된 존재론이며, 변증법은 불완전한 인식론이며, 소외이론은 부분적으로 결함이 있는 정신론이며, 혁명은 에너지의 낭비가 되는 효율적이지 못한 방법론이 되고, 마르크스의 이상국가는 인간의 입맛에 맞지 않는 문명론이므로 실익이 없다.
우리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비판할수 있다. 체계가 있으므로 그 체계의 기능이 유효하게 작동하는지의 여부를 살펴 비판할수 있다. 작동하지 않는 체계라면 잘못된 사상이다.그러나 실존주의를 비판할수 없다.
[정리 : 자기복제의 사상체계가 갖추어져 있다면 비판과 검증이 가능하다]
사상체계가 없는 생각은 비판할 수 없다. 자기복제를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삼단논법을 적용할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치명적인 것은 이렇게 비판불가능한 것은 쓸모 또한 없다는 것이다.
샤르트르의 문학적 접근은 새로운 주장이라기 보다는 있는 생각에 그럴듯한 이름을 하나 붙여내어 근사한 유행어로 만들어낸 일에 지나지 않는다.
마광수나 이문열의 학문이 못되는 학문, 사상이 못되는 주장들은 사상이 아니다. 체계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복제의 구조를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상부구조에서 어디서 에너지 손실을 유발시킨다는 말인지 하부구조에서 어떻게 에너지 획득이 일어난다는 말인지 설명이 없다. 이념에 기초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상과 정치
영국의 토니 블레어 수상이나 프랑스 조스팽 총리의 정치적 주장들은 좌파적 이념에 기초한 발언이다. 개인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공당의 전통적 정치노선에 입각한 정책이다. 그러므로 비판할수 있다.
과연 토니 블레어의 정책은 영국 좌파들의 오래 논의된 정치사상과 일치하는가? 과연 좌파 이데올로기의 그 기본정신으로부터 자기복제된 생각인가? 우리는 삼단논법으로 추적하여 이러한 점을 검증해 낼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회창씨나 조순씨가 불쑥 던지는 정치적 화두들은 사상체계와 상관없이 개인의 주관적 소신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비판과 검증이 불가능하다. 정치가 아니다. 도박이다.
[정리 : 객관적 사상체계에 기초하면 정치이고 주관적 소신에 기초하면 도박이다]
정치와 도박을 가름하는 것은 사상체계의 체계에 기초한 정치가 상부구조에서 부정되더라도 하부구조에서 긍정될수 있으므로 여전히 유효한데 비해, 도박의 경우 부정되면 개인의 실패로 끝날 뿐 더 이상 써먹을 데가 없다는 점이다.
영국 좌파의 한번 실패한 정책은 비판하고 오류수정하여 그 다음 선거에 전략 전술로 이용될수 있다. 그러나 한국 정치인의 소신 주장은 한번 실패했을 때 한 개인의 정치적 몰락으로 끝나버린다. 그리하여 실패는 반복된다.
사상체계는 모든 실패한 전략과 전술로부터 효용가치를 찾아낼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 정치적 주장이 개인적 관점이 아닌 이론적 체계로부터 유도된 책략이므로 오류시정의 객관적 자료로 되어 새로운 정책제시의 방향타로 기능한다.
[정리 : 사상체계 없는 개인적 소신은 검증불가능성으로 하여 실패를 반복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상하지 않으면 안된다. 실패마저도 다음번 도전에 충분히 이용될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좌파든 우파든 [옳으냐 그르냐]보다 사상체계를 가지느냐 안가지느냐가 더 중요하다.
체계없는 소신은 개인의 주관이므로 실패가 반면선생으로 이용되지 않고 그냥 무가치한 정보로 버려진다. 사상체계를 갖춘 정치는 그 사회의 공유된 체험이므로 그 자체로서 사회적 약속이 되어 실패한 정치마저도 다음번 도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한다.
비판할수 없는 실패는 폐기될 뿐이다. 비판할수 있는 실패는 그 실패한 체험의 공유가 그 자체로서 사회적 신뢰를 생산하여 하나의 사회적 약속이 되고 신사적 룰이 된다.
좌파의 진보적 주장들은 뚜렷한 이데올로기로부터 유도된 사상이므로 부단히 실패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정치를 진보의 방향으로 이끌고 나가는 힘이 있다. 그러나 우파의 보수주의는 단지 좌파의 무모한 실험이 실패할 때를 기다려 반박할수 있을 뿐이다.
우파의 보수는 좌파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을 뿐 결코 스스로 정책을 생산해내지 못한다. 좌파는 거듭 실험하고 우파는 그 실험들에서 잘못된 것들을 솎아내는 기능을 가진다. 우파는 근본적으로 좌파에 비해 이데올로기가 빈곤하기 때문이다.
좌파가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이끌고 가는 동인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는 것은 그 사상체계의 상당한 결함에도 불구하고, 출발점으로서의 사상체계 그 자체의 이념적 기본정신을 결코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사상의 발달
역사에서 오래 살아남은 사상들로는 기독교 사상과 유교사상, 불교사상, 마르크스주의 사상 들을 들수가 있다. 이들 살아남은 사상들의 특징은 조악하나마 그래도 제법 이념에서 주의까지 연결되는 사상체계를 갖추어 있다는 점이다.
유교의 경우 최초 공자와 맹자들에 의해 주장될 당시 하부구조에 치우쳐 있었다. 즉 방법론에서 교육의 방법과 문명론에서 유교이상국가의 결실을 강조하되 근거가 되는 존재론과 인식론이 빈약했다.
초창기 유교는 에너지 획득은 있는데 에너지 손실이 없었던 것이다. 흔히 실용주의라고 말해진다. 잃는데가 없는데 생기는 것이 있다면 설득력은 약하다. 이 밥이 어디서 나온 밥인지 몰라도 일단은 먹고보자는 실용주의적 생각은 뒷탈이 걱정되는 것이다.
당, 송시절 유교와 불교가 대결했을 때 불교의 승리는 이같은 측면에서 이해된다. 불교는 존재론(윤회사상)과 인식론(해탈), 정신론(일체개고)이 제법 갖추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유교주의의 반격은 성리학의 형태로 나타난다.
성리학은 유교주의가 현실정치를 강조하느라 상당히 무시하였던 음양오행사상과 주역사상을 존재론의 관점에서 새로이 발굴하고 인식론에서 중용사상을, 정신론에서 사단칠정론을 주장하므로서 취약한 상부구조를 대폭 보강한 것이다.
성리학에서 유교주의는 1차적으로 그 사상체계의 형식적 완성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퇴계학의 사단칠정론에서 정신론이 보강되었고, 명에서는 양명학에서 정신론이 보강되었다. 이러한 유교주의의 사상적 발달은 6~7세기 불교와의 이념투쟁에서 패배한데 다른 체계적 반격노력의 결실이었다.
[정리 : 사상체계는 역사과정에서 점진적으로 보강된다]
여기서 드러나는 점은 체계있는 사상은 부분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역사과정에서 점진적으로 보완되고 시정되어 발달할수 있다는 것이다. 즉 상당한 생명력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가 사상을 가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한번 획득한 정보가 오류임이 증명되었을 시에 완전히 용도폐기 되지 않고 오류시정을 통한 생명성의 지속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사상은 그 상당한 오류에도 불구하고 학문과의 지속적 교감을 통해 스스로 자신을 변혁하면서 끈질기게 살아남아 인류역사의 발달에 기여한다.
갈릴레이가 [지구는 돈다]고 폭로해 버려도 기독교는 살아남았다. 기독교사상의 상부구조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하는 인식론적 기본입장의 이념성이 매우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과학이 상당히 발달해도 과학은 사상이 아니기 때문에 [생육하고 번성하라]하는 식으로 인간의 이 우주에 대한 기본적 태도를 대리로 설정해 줄수는 없는 것이다.
[정리 : 과학은 침묵하고 사상은 발언한다]
학문은 그저 존재의 사실을 밝혀낼 뿐 구체적으로 인간의 입장에서 안내하지 않는다. 물이 거기 있다는 것은 학문이 밝혀내지만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로 가서 그 물을 마셔야 한다는 생각은 사상으로부터 얻는 것이다.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갈증하게 하고 마침내 그리로 가서 그 물을 마시게 한다. 좋은 사상은 맞는 과학보다 낫다. 과학이 좁은데 비해 사상은 넓기 때문이다. 과학이 틀리면 곧 폐기되는데 비하여 사상은 폐기되하더라도 그 기둥줄기는 남겨두기 때문이다.
과학은 검증된 사실만 말하지만 사상은 필요하다면 곧 발언하기 때문이다. 설사 검증되지 않았더라도 이념에서의 기본적인 신뢰는 유효하다.
인간과 사상
사상을 가져야 한다. 사상체계가 서야 상부구조에서 원칙과 견지의 기본전략을 세울수 있고 하부구조에서 세부전술의 무궁한 변화와 유연한 임기응변을 능히 해낼수 있다.
사상이 없으면 검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술이 전략을 침범하고 임기응변이 무질서를 초래할 때 이를 바로잡을 수가 없다. 사상체계가 충분히 통제되는 변화를 가능케 한다. 변화할수 있어야 이길 수 있고 그 변화를 제어할수 있어야 획득할수 있다.
사상체계는 그 검증가능성으로 하여 언제든지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올수 있게 하기 때문에 화려한 임기응변과 분망한 전술구사에도 본바탕을 잃지 않게 한다. 거기에서 유연성이 얻어지는 것이다.
[정리 : 검증가능한 사상체계는 유연한 변화에도 길을 잃지 않게 한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서도 이러한 사상체계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원칙과 견지, 출발점과 귀결점을 부단히 확인하므로서 끊임없는 변화에도 일관성을 유지할수 있고 경직되지 않은 자유로운 태도를 가지고도 길을 잃지 않을수 있다.
자유로움은 인간으로 하여금 위험에 빠지게 하지만 사상체계는 언제든지 원래의 위치로 돌아올수 있게 한다. 사상이야 말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힘이다.
[인생의 사상체계]
1. 내 인생의 근거는 ? [환경].. 출발점 원칙 전략 일관성 ≪-- 상부구조
2. 내 인생의 동기는 ? [개성]
3. 내 인생의 목적은 ? [선,악]
4. 내 인생의 방법는 ? [생활]
5. 내 인생의 귀결은 ? [행복].. 귀결점 변화 전술 유연성 ≪-- 하부구조
1. 내 인생의 근거는 나를 있게 하는 모든 것이다. 가족이나 국가, 세계, 자연, 우주, 신들 또는 이들의 공통점 내지 이들을 통일한 전체개념으로서의 환경과 역사시간에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그 환경의 모든 소산들이 근거가 될 수 있다.
2. 내 인생의 동기는 이 근거의 보편성에서 차별화되는 나만의 특수성으로서의 나다움이다. 나만의 체험, 내만의 특성, 나만의 방식이 동기가 된다. 나와 세상이 다르기 때문에 나의 존재의의가 찾아진다.
3. 목적은 근거에서의 보편성과 동기에서의 특수성, 이 양자 사이의 간격을 사회에 투사한 것이다. 개인의 특수성을 사회의 보편성 안에 구현하기로서의 선을 지향하는 목적을 가지므로서 근거로서의 세계와 고립된 나와의 간격을 메울수 있다.
4. 방법은 시간 상의 진행에서 목적의 실현과정이다. 과정에서 타 영향으로부터의 무수한 침해와 간섭이 있고 그 간섭들로 하여 무수한 선택의 길이 주어진다. 이 중 목적에 이르기까지의 가장 빠른 길이 유효한 방법이 된다.
5. 결실은 이미 목적을 달성한 후 최후에 나로부터 벗어나 나가 배제된 상태에서 남는 것이다. 나를 떠나서 나로하여 달라진 모든 것이 그 결실이 된다. 올바른 길로 왔다면 가장 많이 남을 일이다.
사상체계는 이 근거, 동기, 목적, 방법, 결실의 전개에서 자기복제이다. 곧 최초에 근거가 모든 판단의 출발점이 되고, 동기는 그 근거 안에서의 동기이며, 족적은 그 동기 안에서의 목적이고, 방법은 그 목적 안에서의 방법이며, 결실은 그 방법 안에서의 결실이다.
[정리 : 사상체계에서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한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이 있다. 이러한 의제가 참이려면 수단(방법)은 목적 안에서의 수단이어야 한다. 이 말이 잘못 쓰여질 때 수단이 목적을 벗어나서도 정당화된다는 의미로 왜곡될수 있다.
목적과 수단을 분리하여 별개의 두 판단으로 했을 때 곧 수단이 목적의 한정을 벗어났을 때 곧 자기복제의 시스템을 파괴했을 때 목적은 유효성을 상실한다. 곧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하지 못한다. 더 이상은 목적이 아니다. 그러나 자기복제의 시스템이 기능할 때 곧 수단이 목적의 한정 안에서 작동할 때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그러므로 사상 안에서 인간은 자유롭다.
사상체계는 하부구조를 상부구조에 종속시키므로서 상부구조 안에서 하부구조의 자유로움을 생산한다. 하부구조는 상부구조에 의해 자기복제 되었으므로 결코 한정을 넘어설 수 없다.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침해하지 않는 한 얼마든지 융통성과 탄력성을 발휘할수 있다. 곧 우리는 모든 실천에 있어서 그 행동 하나하나가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정리 : 자기복제의 시스템 기능 안에서 인간은 무한히 자유롭다]
자기복제에서 상부구조는 공간을 한정하고 하부구조는 시간을 한정한다. 그러므로 자기복제 안에서 모로가도 서울로 가게 된다. 단지 더 빨리 가던가 더 늦게 가던가를 선택할수 잇을 뿐 방향을 바꿀 수는 없다. 방법은 단지 그 지시된 방향 안에서 가장 빠른 길을 찾을 뿐이다.
자기복제의 시스템기능이 작동하는 한 모든 실천은 선이다. 어떠한 선택도 어떠한 행동도 제재되지 않는다. 우리는 행동 하나하나가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필요가 없다. 단지 상부구조를 침해하는지의 여부만 판단하면 된다.
인생의 사상체계는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 지침이 올바른 나침반을 가진 사람은 어느 길로 가든 결코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자유롭다.
사상가의 태도
사상체계의 자기복제 시스템구조는 하부구조에서 상부구조로 비약할수록 점점 더 단순화되는 성질을 가진다. 자기복제의 양적전개가 질적비약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세상 모든 문제는 근원적인 단계에서 이원론으로 귀결된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 되고 흑 아니면 백이 된다. 선 아니면 악이 되고 [이다] 아니면 [아니다]가 된다.
상부구조 1. 배경.. 공 이다 ≪―≫ 허 아니다 [<-- 근원에서 이원성]
2. 실체.. 존 있다 ≪―≫ 무 없다
3. 연관.. 재 같다 ≪―≫ 부재 다르다
4. 이행.. 사 속하다 ≪―≫ 비 배제되다
하부구조 5. 귀결.. 상 맞다 ≪―≫ 멸 틀리다
※ 집적도 1 의 자기복제 출발점에서 [이다, 아니다]의 여부판단 만이 남는다.
사상가의 태도는 세상의 복잡 다단함에도 불구하고 그 근원에서 신뢰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변화는 무상하게 일어나고 비극은 태연하게 진행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믿을수 있어야 한다.
세계는 최종적으로 공간과 시간, 방향과 순서의 두 변수가 자기복제하여 지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변화들은 자기복제의 순서와 방향을 거슬러 되짚으면 마지막에는 근원에서 집적도 1 의 대응요소 2로 귀결된다.
신은 있거나 아니면 없다. 외계인은 있거나 아니면 없다. 둘 중에 하나이므로 우리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동전의 앞면이거나 아니면 뒷면인 것이다. 여기서 제 3의 선택은 없다.
우리가 혼돈에 빠져 판단을 못하고 망설이게 되는 것은 근원에서 결론을 내리지 아니하고 진행중인 변화의 과정에서 끼어들어, 달리는 차 안에서 함부로 내리려 하듯 중간에서 결론을 내리려 하기 때문이다.
신은 있는가? 없는가? 사상의 전개에서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단계는 [있다, 없다]가 아니라 [이다, 아니다]의 단계이다. [있다, 없다]도 [이다, 아니다]에 포함된다.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아니한다면 신이 존재하지 않아도 이 세상이 돌아가도록 최초에 그 자기복제의 에너지를 손실당한 그 무엇인가가 반드시 존재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신이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최종적으로 그것이 [신인가, 아닌가?]의 문제이다.
신이 있든지 없든지 그 의미는 같다. [이다, 아니다]의 궁극개념은 그 근원적 존재가 [인간에게 친절한 존재인가, 불친절한 존재인가]의 문제일 뿐이다.
[정리 : 신이 있다면 인간에게 친절한 존재로서의 있음이고, 없다면 불친절한 존재로의 아님이다. 어느 쪽이든 자기복제를 부인할 수는 없다]
신이 [있다]는 개념은 신[이다]의 [이다]를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그 궁극적 존재가 인간의 삶에 깊숙히 개입한다는 즉, 인간에게 친절한 존재라는 뜻이다.
[신이 없다]는 말은 근원의 존재가 인간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즉, 인간에게 불친절한 존재이라는 뜻이 된다.
신이 있다해도 인간과 무관한 즉, 인간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신일수 없기 때문이다. 즉 신이 [아니다]인 것이다.
해석하면 결국 신의 의미는 [인간의 자연존재가 최초에 신의 자기복제로 부터 비롯하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이다.
[신이 있다]는 말은 자기복제로부터 비롯한다는 뜻이며 [신이 없다]는 뜻은 복제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복제 된 존재라면 인간의 실천은 신이 한정하는 자기복제의 시스템 영역에서 단 한발짝도 바깥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신이 인간의 삶에 깊숙하게 개입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
[정리 : 신이 없다고 말하면서 스스로 신이 되어 버린 사람이 있다]
[신이 있다]면 인간의 삶은 그 테두리에서 자기복제의 영역범위에 한정되고 그 영역 안에서 자유롭다. [신이 없다]면 인간이 신을 대체한다. 인간은 영역이 없고 신의 고독을 대신으로 감당한다.
사상가의 태도는 근원에서 낙관할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어느쪽으로 결론이 나든 의미는 동일하다. 신이 있으면 그 영역 안에서 인간은 자유롭고, 신이 없으면 인간이 곧 신이다. 어느쪽이든 시스템 기능 자체는 유효하다.
최종적인 낙관은 시스템 기능 그 자체에 대한 신뢰이다. 근원에서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고 그밖에 제 3의 선택이 배중률에 의해 배제된다.
유쾌한 낙관주의
모든 사상은 낙관주의와 비관주의의 양 측면을 공유한다. 이 둘 중 하나로만은 사상이 사상으로 기능할수 없다.
낙관적이라는 것은 문제와 자신과의 위상관계에서 자신이 주도적으로 상부구조의 역할을 맡는다는 것이며 비관적이라는 것은 하부구조에서 초라한 종속변수가 됨을 말한다.
바둑이라면 포석단계에 두어져서 무궁한 변화의 수를 낳는 돌은 낙관적인 기대치를 가지며 사석작전으로 버려지는 돌은 비관적인 기대치를 갖는다. 더 이상의 역할과 기능이 없다면 초라한 것이다.
낙관할수 있다는 것은 기대할수 있다는 것 희망이 있다는 것, 결론을 내리고 평가하기에는 이르다는 것, 아직도 많은 수들이 뒤를 잇는다는 것이다.
사상은 시스템을 가지며 낙관은 그 시템에서 엔진의 역할을 가지고 비관은 그 시스템에서 마지막 배기가스의 역할을 가진다. 낙관의 엔진 뒤에는 기어와 바퀴축이 이어지고 바퀴자국의 비관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시스템 있는 모든 사상은 낙관과 비관의 양측면을 가지지만 낙관이 비관보다 더 클때 기능하며 비관이 낙관보다 클 때 기능이 정지하여 사망한다. 상부구조가 더 기능할 때 유효하고 하부구조가 더 기능할 때 효용은 수명을 다한다.
[정리 : 사상은 상부구조가 기능할 때 낙관하고 하부구조가 기능할 때 비관한다]
기독교 사상이라면 창세기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이념적 지침은 유쾌한 낙관이 되나 신약에서 [종말이 임하였도다]는 주의의 방편은 비관이 된다. 전체적으로 어느쪽으로 더 기우느냐에 따라 낙관과 비관이 판명된다.
사상들은 그 실천에서 과학적 성과들과 마찰한다. 초기에 낙관주의였던 모든 사상이 과학과 충돌하여 점차 비관주의로 바뀌어지고 비관이 우세하게 될 때가 효용의 정지시점이다.
마르크스주의 초창기에 마르크스주의는 미래에 대한 유쾌한 낙관이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할수록, 경제가 발달할수록, 혁명비용은 커지고 상대적으로 기대이익은 줄어든다.
가난한 미개사회에서 혁명비용은 적게들고 기대이익은 매우 크지만 발달된 문명사회에서 혁명비용은 갈수록 커지고 기대이익은 상대적으로 감소한다. 갈수록 비관론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즈음 사상의 수명은 종료한다.
[정리 : 혁명의 낙관은 혁명비용과 기대이익 사이에 균형점에서 결정된다]
점장이의 예언은 유쾌한 낙관으로 출발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비관이 되어간다. 최초에 사건은 추상적이고 모호한 형태로 존재하므로 점장이의 예언은 그 자체로 그 모호성을 해결하는 하나의 정보로 기능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사건은 분명한 윤곽을 드러내고, 예언은 그 윤곽을 드러낸 구체적인 사실에 대응하지 못하므로 기능이 정지하는 것이다.
[점장이의 비관론]
[손님의 질문] [♠ 점장이의 답변] [※ 적중률]
1. 투자할 것인가? 말것인가? (찬, 반) ♠ 투자하라. ※ 1/2
2. 어느 업종에 투자할 것인가? (식료, 기계, 전자, 유통) ♠ 전자 ※ 약 1/4
3. 누구에게 투자할 것인가? (김, 이, 박, 정, 조, 최, 오, 주씨) ♠ 박씨 ※ 약 1/8
4. 얼마를 투자해야 할 것인가? (100만원~1억원) ♠ 1000만원 ※ 약 1/20
5. 얼마를 벌수 있을 것인가? (0~10억원) ♠ 2억원 ※ 1/100
사건은 자기복제를 진행하며 진행할수록 복잡해지고 구체화된다. 구체화될수록 경우의 수가 늘어나므로 점괘의 적중 확률은 떨어진다. 그러므로 예언가는 동일사건에 대해서는 많이 예언할수록 적중률이 떨어지는 낭패를 겪는 것이다.
현명한 점장이는 사건이 구체화 될 수록 부정적인 예언을 한다. 만약 낙관적인 예언을 해서 [투자하라]고 했다가는 두 번째 질문 [어디에 얼마를 투자할까?]를 당하게 되고 세 번째, 네 번째 질문으로 갈수록 적중률이 떨어지는 구체적인 질문을 당하게 된다.
점장이가 적중률을 지지하기 위해서는 비관적인 예언을 계속 해야만 한다. 잘될 것이라고 했다가는 어떻게 잘되는지 설명해야 하지만 안될 것이라고 했을때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정리 : 플러스 알파를 포착하지 못하는 미래예측은 비관으로 흐를 수 밖에 없다]
사상체계는 근거에서 동기로, 목적으로, 방법으로, 결실로 이행하는 각 단계 마다 한번씩 기능의 변화를 가진다. 이때 대응대상이 변화하는데 그 기능의 변화가 곧 플러스 알파이다. 미래예측의 실패는 이 기능의 변화로서의 플러스 알파 추적에 실패하는 것이고 이 경우 자연히 비관주의가 된다.
마르크스의 비관주의
사상은 시간 상에서 전개하면서 구체화될수록 비관론이 되어가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또한 출발점에서의 기본적 원칙은 유쾌한 낙관에서 유효하나 하부구조에서 구체화되어서는 세월이 흐를수록, 사회가 발달할수록 비관론이 된다.
공산주의가 처음 생겼을 때 유쾌한 낙관주의였다.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를 발달시켜야 한다는 책임을 맡았을 때 예측의 적중률을 높이기 위해서 비관주의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모든 사태를 비관적으로 보고 불길한 예언만 하는 족집게 접장이의 전철을 밟게 된 것이다.
마르크스는 최초의 낙관주의를 [공상론적 사회주의]라 부르고 자신의 비관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라 불렀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그래도 상당한 낙관적 전망이 있었다.
[정리 : 마르크스는 실패했으나 공상론적 사회주의의 유쾌한 낙관은 유효하다]
레닌이 혁명을 시작했을 때 더욱 구체화해야 하는 문제에 부닥쳤다. 레닌의 비관은 마르크스의 [혁명은 영국과 같이 산업화가 발달한 나라에서 가능하다]는 생각을 폐기했다. 혁명이 자본주의 산업화의 자체모순에 의하여 저절로 된다는 낙관적 전망을 포기하고 음모에 의해 인위적으로만 가능하다는 쪽으로 바꾼 것이다.
트로츠키가 레닌을 계승하여 열강의 간섭과 맞섰을 때 더욱 비관적이 되어 [영구혁명론]을 내어놓았고 모택동은 더욱 비관적이 되어 [문화혁명]을 내놓았고 김일성은 더욱 비관적이 되어 [쌀은 사회주의다]까지 갔다. 갈수록 현실을 부정적, 회의적으로 보고 인위적 개입의 폭을 넓혀 간다. 거기서 마르크스주의의 수명은 정지한다.
[마르크스주의의 비관론]
1. 공상론적 사회주의...............미래사회는 저절로 공산주의 유토피아가 된다.
2.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자본주의는 자체모순에 의해 저절로 붕괴하여 공산주의 가 된다.
3. 레닌의 폭력혁명론..............자본가들의 반동이 집요하므로 인위적 음모에 의한 노 동자 폭동으로 혁명할수 밖에 없다.
4.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혁명은 저절로 되지 않으므로 전 세계를 혁명할때까지 전쟁해야 한다.
5. 모택동의 문화혁명론...........계급혁명만으로 되지 않고 정신혁명까지 해야 한다.
공산주의는 최초의 유쾌한 낙관 [저절로 된다]에서 마르크스의 [노동자가 단결하면 저절로 된다]로, 레닌의 [상당한 유혈전쟁으로 어렵게 된다]로, 트로츠키의 [전 세계를 상대로 무한정 싸워야 된다]로, 모택동의 [계급혁명만으로 부족하다]로, 단계적으로 그 비관의 강도를 높여왔음을 알수 있다.
이런 식으로 비관의 강도를 높여가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 낙관보다 비관의 비중이 커져버린다. 그때가 사상의 수명이 종료되는 시점이다.
[정리 : 낙관은 저절로 되는 영역이 상대적으로 크다는 말이고 비관은 인위적 노력이 개입할 여지가 더 크다는 뜻이다]
최초 공상론적 공산주의 단계에서는 이 세상은 어차피 저절로 공산주의가 될 것으로 예측했으므로 굳이 이 사회를 비관적으로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구체화 했을 때 아무래도 저절로는 안될 것 같으므로 무리한 인위적 폭력혁명을 정당화 하기 위해서 현실을 더욱 나쁘게 말해야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저절로 안되는 정도는 커지고 그럴수록 무리한 방법을 써야하며 그 무리한 방법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현실을 더더욱 나쁜 것으로 선전해야 했다.
공산주의는 갈수록 비관적이 되어 무리한 방법을 쓰며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현실을 더욱 나쁜 상황이라고 주장한다.
낙관에서 비관으로 사상이 변질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최초에 공산주의가 생겼을 당시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공산주의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낙관의 플러스 알파
일부 사이비 종교들에서 극도의 비관주의를 발견할수 있다. 신도의 재산을 갈취하기 위해서는 무리한 현실도피를 주장해야하고 그 현실도피를 정당화하기 위해 현실을 나쁘게 말하는 강도를 높여간다. 그럴수록 사이비의 수명은 짧아진다.
기성종교들이 그 비과학성에도 불구하고 긴 수명을 유지하는 것은 상부구조의 이념에 기초하고 하부구조를 개방하는 유쾌한 낙관주의 때문이다. 즉 그 종교의 기능을 하부구조의 [천국행 티켓]이 아닌 상부구조의 [생육과 번성] 에 두기 때문이다.
기성종교들은 그 유쾌한 낙관적 전망을 유지하기 위해 종교의 기능을 방법과 결실의 실익을 강조하는 하부구조보다는 인생의 근거와 동기를 찾아보는 상부구조에 두므로서 여전히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생산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 : 유쾌한 낙관은 플러스 알파의 활약을 믿고 출발점에 서서 바라보는 것이다]
공상과학소설에서도 그러한 성질을 발견할수 있다. 최초의 공상은 [멋진 신세계]하는 식으로 미래에 대한 긍정적 낙관이 있었다. 그러나 소설가들은 곧 눈치채었다. 환경오염과 핵전쟁으로 인류가 멸망하는 비관적 설정을 하지 않고는 1000장의 원고지를 메꾸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미래를 긍정적으로 그리려면 미래에 대한 예측능력이 매우 뛰어나야 하지만 인류가 멸망했다고 설정해버리면 그러한 예측의 부담 그 골치아픈 숙제가 없어져 버린다.
비관주의야 말로 모든 틀린 예측과 잘못된 사상, 사이비종교의 명백한 증거이다. 비관하는 것은 플러스 알파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플러스 알파는 기능의 변화이다. 기능은 사상체계의 전개에서 근거, 동기, 목적, 방법, 결실 각 단계에서 1회씩 변화한다.
[범주] [기능] [낙관] [비관] [기능의 수] [적중률]
1. 배경 유도기능 이다 ― 아니다 2 1/2
2. 실체 대응기능 있다 ― 없다 10 1/10
3. 연관 의속기능 같다 ― 다르다 50 1/50
4. 이행 인과기능 속하다 ― 배제되다 250 1/250
5. 귀결 표상기능 맞다 ― 틀리다 1250 1/1250
※ 플러스 알파가 되는 [기능의 경우의 수]는 집적도 증가의 각
단계에서 5배증하고, 점장이의 예측 적중률은 그만큼 떨어진다.
[사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서 1의 유도기능이나 2의 대응기능일 때 곧 우리 인생에 그 삶의 근거와 동기를 주는 역할을 가질 때 사상은 유쾌한 낙관이 된다. 그러나 하부구조에서 구체적인 이익을 주려할 때 낙관을 유지하기는 힘들어진다.
공산주의사회는 지정학적 이동, 물리적 이동, 사람의 이동, 시장의 이동, 정보의 이동 등 사회를 유지하는 이동들에서 그 이동비용이 그 이동으로 인한 기대이익보다 상대적으로 작아졌을 때 곧 이동이 쉬워졌을 때, 이동을 독점하기 위해 설치했던 차단벽들을 없애버린 사회이다.
통신에서 적은 회선에 가입자가 폭주하면 접속이 어려워지므로 가입자수를 제한하려 한다. 반대로 회선을 늘려버리면 접속이 쉬워지므로 가입자 제한이 필요없다.
문명이 발달하면 저절로 그런 사회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전히 낙관할수 있어야 한다. 모든 비관적 전망을 잠재울 플러스 알파들이 나타난다.
플러스 알파는 기능의 변화이다. 즉 어떤 것이 쓸모없어졌을 때 곧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용도로 계속 사용되는 것이다.
기계가 농부의 작업을 대신하면 농부는 실업자가 된다. 이때 농부는 곧 용도폐기되어 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계생산 노동자가 되어 새로운 기능을 가지게 된다. 정보화사회는 일거리를 줄여서 실업자를 양산할 것으로 예견되었으나 실은 반대로 실업자를 줄이는데 성공했다.
전화, 휴대폰이 등장하면 통화로 간단히 일을 처리할수 있으므로 일일이 직접 찾아갈 필요가 없어진다. 그만큼 일이 줄어들어 실업자가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때 플러스 알파가 등장한다. 실업자 수는 오히려 줄어든다.
전화나 휴대폰은 사람들 간에 만날 기회를 더욱 늘려서 더 많은 일들을 생산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연락의 어려움으로 포기되었던 많은 일들이 새로이 추진되는 것이다.
[정리 : 플러스 알파는 기능의 자기복제 5배증이다]
사상체계는 각 단계를 이행하면서 기능을 자기복제하고 한 단계가 복제될 때마다 경우의 수는 그만큼 늘어나므로 그 수만큼 플러스 알파는 증가한다. 그러므로 점점 더 낙관적이 된다. 한가지 단계를 넘어설 때마다 새로이 기능이 부여되는 것이다.
기능의 자기복제의 플러스 알파를 모르는 사람이 미래를 예측하면 반드시 비관적인 예측을 하게 된다. 경제학에서 [수확체감의 법칙]이 여기에 해당된다. 하나의 상품은 하나의 기능을 가진다는 고정관념을 버리면 기능의 창조를 통하여 [수확체증의 법칙]을 실현할수 있다.
[정리 : 기능의 자기복제는 각 단계에서 다시 유도, 대응, 의속, 인과, 표상하여 5배증으로 수확체증을 실현한다]
항공기, 무기등 장치산업과 컴퓨터, 인터넷 등 많이 생산할수록 오히려 생산성과 수요, 수익이 늘어나는 현상이 여기서 설명된다. 즉 충분히 기능이 부여되지 않은 상품의 경우 끝없이 새로운 기능이 생겨나므로 많이 생산할수록, 덤핑을 칠수록 수요가 늘어나서 더 이익을 보게된다.
휴대폰의 경우 상대방이 휴대폰을 가지고 있으면 그 상대방에게 전화하기 위하여 자기도 휴대폰을 사게 된다. 이는 기능의 창조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에게 공짜로 휴대폰을 주어버리면 휴대폰이 더 많이 팔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 시장에서의 휴대폰, 시티폰 판매경쟁에서 이 점을 관찰할수 있다. 상대방에게 휴대폰이 없으면 전화할 일이 없어져서 휴대폰을 구입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조건 대량생산 해서 공짜로 나눠줘버리면 오히려 더 많이 팔리는 것이다. 곧 기능의 자기복제로서의 플러스 알파이다.
진정한 낙관주의자
모든 사상은 현실을 비관적으로 보고 낙관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그 방법을 하부구조에서 찾으므로 해서 더욱 비관적으로 변해 간다. 그리하여 비관이 낙관보다 커졌을 때 사상은 사망한다.
사상은 구체적인 현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존재하지만 오늘의 문제가 오늘에서 해결되지 아니하고 현실의 문제가 현실에서 해결되지 아니한다.
이 차원에서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한 차원 더 높은 데서 찾고, 또 더 높은 차원으로 비약하기를 거듭하여, 마침내 가장 궁극적인 차원, 근원적인 차원까지 올라가서 거기서 가장 낙관적인 희망을 발견하고 그 상향구조의 스스템을 의식에 구축해두므로서, 개인차원에서 또 현재시점에서,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전체인류의 차원에서 또 과거와 미래까지를 통일한 열린 시점에서 포용해내는 것이다.
모든 비관적인 생각들은 현재시점에서 비관적이고 개인차원에서 비관적이다. 자기복제가 더없이 진행되어 말초적인 차원에 있으므로 비관적이다. 근원으로 돌아가면 단순해진다. 그리고 포용한다. 그러므로 낙관해도 좋다.
낙관하려면 근거에서 기능을 찾아야 한다. 오늘 한 그릇의 밥을 구하는 수단으로 사상을 찾지 말것이며 내일 미처 다가오지 않는 날들에 대한 믿음으로 찾아야 한다.
[정리 : 사상한다는 것은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는 것이다]
사상한다는 것은 투자한다는 것이다. 투자는 미래를 위한 투자이다. 오늘의 투자가 오늘의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다. 지금 먹고 있는 이 사과가 어제 심은 사과임을 알기 때문이다.
사상은 지극히 현실주의다. 바로 오늘 이순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는 사상한다. 그러면서도 가장 멀리 보고 가장 긴 호흡으로 백년 후를 위하여 투자하는 것이 사상이다. 가장 멀리보는 것이 가장 현실적일수 있는 것은 오늘 우리의 소득이 또한 옛 조상이 투자한 그 결실임을 알기 때문이다.
[정리 : 가장 멀리 보고 가장 먼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것이 오늘 이순간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얻는 이득은 손에 쥔 한 알의 사과가 아니다. 조상이 심어둔 사과나무에서 수확하며, 동시에 후손을 위해 한 그루를 심어두는 그 연속적인 자기복제의 체계를 기능하게 하는 것, 그 기능을 신뢰할수 있으므로 안전해질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익이기 때문이다.
사상은 현실주의다. 가장 멀리 내다보므로 하여 더욱 현실적이다. 믿음이야 말로 얻을수 있는 가장 큰 수확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것들을 기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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