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학..틈새시장을 노린다>
집적도로 말하면 진리 1에, 철학 10, 과학 100, 사회 1000, 생활 10000이다. 이는 복잡도의 기하급증을 의미한다. 위로 갈수록 단순명료해지고 아래로 갈수록 복잡해진다.
진리는 하나뿐인 자연에 근거하므로 1이고, 철학은 인류문명의 흐름에 기초하므로 10이고, 과학은 나라마다 다양하므로 100이고, 사회는 그 나라안에 다양하게 존재하므로 1000이고 생활은 개개인이므로 1만의 수치에 비유된다.
과학은 이 기하급증의 한가운데 있다. 거기서 생활 쪽으로 가면 다양하고 풍부해지는 대신 수준이 떨어지고 진리 쪽으로 가면 단순명쾌해지는 대신 수준이 올라간다.
앞으로 가는 이를 선비라 하고 뒤로 가는 이를 잡인이라 한다.
[쌍벽을 이루는 땡초와 푼수. ]
[갈수록 인간이 되어가는 법장.]
좋도다. 저자거리의 아Q와 소don처럼 횡설수설 언어폭력을 남발하더니 그새 철을 섭취하였는지 제법 법어가 막 나오도다.
나는 경허와 만해를 좋아한다. 둘 다 정통의 승려는 아니다.
경허는 말년에 난주선생으로 이름을 바꾸고 삼수갑산에 은거하여 제자를 가르치며 불교를 떠났다. 만해는 승려라기보다는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지도자이다.
종교의 작은 그릇에 두 스승의 커다란 정신을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종교는 백용성 따위의 중으로 만족하는 작은 인간들이 가져가라.
불교를 떠나 사회에 한발을 내밀었던 시대의 풍운아들에게 법장은 왜 그리 군말이 많느뇨? 왜 포용하지 못하느뇨? 왜 껴안지 못하느뇨? 다 불교의 재산이고 민족정신의 자산인데.
절에서 염불하는 이를 스님이라 하고 저자거리나 상가집이나 아무데나 가서 염불하는 자를 땡초라 한다. 법장이여, 적을 만들려거든 누구를 비판하려거든 지금 살아있는 누군가를 비판하라.
과거의 인물은 누구나 미화되는 것이다. 김유신은 당나라 끌어들인 나쁜 편이고 연개소문이 옳다거나 혹 반대로 연개소문이 나쁘다거나 이런식으로 속좁은 해석을 하지마라.
누구나 영웅이다. 이순신과 원균, 김유신과 연개소문은 일본에서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평하듯이 어느 쪽도 폄하되어서 안된다. 세월이 더 흐르면 나 또한 박정희를 사면하리라.
지금은 김대중 O, 박정희 X, 요렇게 되어있지만 100년 후의 역사는 양자를 쌍벽 혹은 맞수 혹은 라이벌, 양웅, 이런식으로 기록할 것이다. 누구를 욕하든 누워서 침뱉기이기 때문이다.
법장, 그대의 가슴엔 사랑이 없다. 그대의 마음엔 자비가 없다. 오직 그대보다 한발이라도 위에있는 이를 끌어내리려고 달려들어 빤쭈벗기가미 매달리는 꼴불견을 연출하고 있음이다.
부처님도 그 당시엔 혁명아고 이단아고 반역자였다. 역사가 평가하는 것이다. 진리가 평가하는 것이다. 더 기다리지 못하는가?
[구름의 푼수짓]
남녀는 같은데 사회가 여성에게 이래라 저래라 해서 여자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보봐르다. 그렇다면 왼손잡이도 사회가 이래라 저래라 해서 왼손잡이가 되었느나뇨?
동물원의 호랑이는 운동을 안해도 근육이 산같고 우리 속의 돼지는 초식만 해도 살이 찐다. 지나친 환경결정론은 잘못이다. 근래의 학설은 점점 유전요인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를테면 동성애자가 되는 것은 유전요인에 의해 선천적으로 성적 타입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여성동무 일반의 푼수짓도 선천적이라는 결론이다.
모라가 하는 말은 들어보면 좋은 말이 많은데 같은 여성동무들이 잃어주기엔 슬프지 않겠는가? 누워서 침뱉기다. 그 글을 여자가 썼기 때문에 여성들이 먼저 부끄러워 할 것이다.
법장이 하는 말도 좋은 말이 많은데 불교신도가 들어주기엔 부끄럽지 않겠는가? 기독교도들이 법장의 글을 읽고 [음 중들은 어디가도 구제불능이군 맨날 저들끼리 쌈박질하고]
푼수란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보는 습관이다. 나는 이것이 환경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유전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고 말한다. 에헤헴, 에헴, 어흐흠, 켐, 고오얀~! 껄껄, 동창이 밝았는데 머슴놈은 상기아니 일었느나뇨뇨?
♤
[김대중 잘하고 있는가?] 이 물음은 동시에 [워드방 통신족 잘하고 있는가?]의 물음에 대응한다. 워드방은 여론을 나타낸다. 비교의 척도다. 여론보다 잘하면 위험하고 딱 여론만큼 하면 된다. 그런데 여론이 잘못하고 있다. 워드방 요즘 잘못하고 있다.
현문님, 어준님, 익스님, 보테님, 프로님, 시몬님, 하자님 등이 주도하는 워드방은 솔직히 실망스럽다. 중요한 문제로 제기했어야 할 강기훈 유서대필의 진실을 부각시키지 못했다.
철저히 짚고넘어갔어야 할 조선일보 문제도 그냥 넘어갔으며 양심수문제에 대해 흐리멍텅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고 북풍문제에 대해서는 토론실도 개설하지 못하고 있다.
오로지 김대중에 대한 조회수제일주의의 아부성 글만 판을 치고 있다. 문제를 제기함은 없고 여론에 편승함만 있다. 워드방 정신차려야 한다.
김대중의 오른쪽에 재벌과 기득권층이 버티고 있다면 그 왼쪽에 언론과 통신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볼짝시면 한겨레 홀로 왼쪽에 있고 모두들 오른쪽에 몰려있다.
통신족은 왼쪽에 서야 한다. 그곳에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변화해야 하며 그 변화는 세계수준이어야 한다. 우리의 정서와 의식과 윤리의 척도를 스웨덴 노르웨이 스위스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더 용기있게 말해야 한다.
물론 그들 서구 열국의 윤리가 절대선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먼저 그들을 추월하고 난 다음 인류문명의 방향타를 동아시아의 정서 쪽으로 끌고 오는 것이다. 그들보다 뒤져선 불능이다. 우리 이제 진실을 말하자. 또 김대중을 말하자.
[김대중 잘못하고 있다.]
취임직후 해야할 일은 비전과 전망을 제시하고 민족의 힘을 결집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은 노회하고 침착한 경륜이지 원대한 비전과 철학이 아니다.
IMF 현실에서 노옹의 경륜은 오히려 덕일수도 있다. 허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또 젊은이다운 비젼이다. 김영삼이 취임 초 한국병 치유, 신한국 창조, 세계화 등의 치기발랄한 비젼을 제시했을 때 나는 코웃음 쳤지만 인기는 올라갔다.
혹자는 김영삼의 취임초 인기절정과 김대중의 인기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엄청난 착각이다. 정반대다. 김대중은 얻을수 있는 인기를 못 얻고 있다. 오히려 죽쑤고 있다.
지금의 인사실패, 북풍혼란, 총리인준실패는 인기없다. 허나 오히려 잘하고 있다. 김영삼의 인기가 당돌한 호언장담의 언어 끝에서 나온 것이라면 김대중의 인기는 IMF해결 등 실무에서이다.
김영삼이 입에 발린 선전위주의 승부사라면 김대중은 행동위주의 해결사이다. 그는 실제로 문제를 해결한다. 그런 면에서 김대중의 정치대응은 노회하고 침착하며 잘하고 있다. 난 그게 불만이다.
만약 김대중이 참신한 인사로 동업에게 100점을 맞았다면 그건 진짜로 잘못한 일이 된다. 인사에 참신은 독이다. 참신한 인사란 인물좋고 평판좋고 일안하는 자다. 입으로 한몫, 얼굴로 한몫, 말로만 정승, 광나는 일은 앞장, 궂은 일은 복지부동.
김대중 지나치게 잘하고 있다. 그 잘함은 IMF 해결에 좋다. 그러나 우리에게 말거리를 안준다. 현재를 안돈함이 있을 뿐 미래를 열어감이 없다. 좌파들에게도 일거리를 챙겨주라.
김대중은 [국민의 정부] 이름만 지어놓고 아직 성격규정도 못하고 있다. 이는 참모를 쓰지 않기 때문이다. 새정권이 출범하면 전두환 때의 허삼수, 노태우 때의 박철언, 김영삼 때의 김현철 등 아부쟁이들이 허황된 구호들로 나팔수 노릇을 한데 비해 지금 그 나팔수가 없다. 김대중은 너무 선전을 안한다.
나팔을 불어야 한다. 비전을 제시하고 전망을 펼쳐보이며 장미빛 꿈을 심어주어야 한다. [민주주의와 경제의 동시발전] 이 얼마나 소박한가? 만약 아부 할줄 아는 참모가 있다면 틀림없이 [21세기 세계를 주도할 한국적 성공모델]로 포장해내었을 것이다.
나는 불만이다. 선전도 김영삼 같은 자가 하면 [헛되이 나팔을 불어댐]이 되지만 할줄 아는 자가 하면 다르다. 김대중은 좌 쪽의 엘리뜨를 발굴하여 참모를 보강해야 한다.
실무의 해결도 중요하지만 100년 앞을 내다보는 참모도 필요한 것이다. 보통은 아이디어 풍부한 참모가 헛된 소리로 나라를 말아먹는다. 그러나 그 잘못은 참모가 멍청해서가 아니라 주장이 용병하지 못해서다.
정치스타일은 두가지다. 총애하는 젊은 신하를 등용하여 인기위주의 정치를 하는 것(조광조를 등용한 중종)과 노련한 중신들을 활용하여 실무적으로 가는 것(중신들을 활용한 세종)이다.
보통 전자는 실패하지만 남음이 있고 후자는 성공하지만 남는거 없다. 중종의 개혁은 실패하였으나 조선왕조 500년의 철학적 기초를 닦았고 세종의 치적은 성공하였으나 역사의 진보와 상관없다.
진정한 영웅은 양쪽에 균형을 찾을줄 아는 이다. 김대중은 너무 후자에 치우쳐 있다. 김대중은 좌쪽의 엘리트를 고용하여 더 나팔을 불어야 한다. 그의 철학을 선전하고 야심을 펴보여야 한다.
♤¸ ¸중이당가요? 난 중삼인디~!
♤¸ ¸법장(法杖)이라굽쇼? 난 계도(戒刀)인디~!
♤¸ ¸재미없다구요? 내도 별 재미는 없는디.
♤¸ ¸우야든동 재미를 함 살리보입시다그려.
재미없는 책임이 꼭 이쪽에만 있는거 같지는 않으니 깐두루
가설라무네 그라이까네 거시기 머시기 차말로.
♤¸ ¸그렇구나. 법장님이 [민중불교]라는 화두를 들고 나왔
구나. 횡설수설 이판사판 자가당착 오리무중
완죤히 [이또이가튼소리하구인네] 인줄로만 알았더니
제법 법어가 다 나오는구먼. 좋소이다. (이또이님께는 미안)
♤¸ ¸법장님을 즐겁게 해드릴 의무가 /열사/에 있는 것은 아니네. 다만 법장님이 흥미를 끌 주제를 던지지 못하였을 뿐.
♤¸ ¸이제야 법장님이 [민중불교]라고 제법 화두씩이나
들고나온줄 알겠다. 그런데 그게 화두가 되나?
♤¸ ¸나는 호국불교나 민중불교나 해방신학이나 회교원리주 의나 다 정치색의 오염으로 보고 인정 안한다.
♤¸ ¸종교가 현실에 초연할 이유도 없지마는
현실에 개입하는 방법에 있어서 종교 자체를 수단으로 할 때
그 순간부터 종교의 타락이 시작된다.
※ ※ ※
말했듯이 인간의 인식에는
[1. 진리 2. 철학 3. 순수과학 4. 응용과학 5. 문화일반]
의 다섯가지 범주가 있다.
1의 진리와 2의 철학은 제1철학 내지 형이상학이요
3,4,5번은 제2철학 내지 형이하학이다.
나의 이러한 분류법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런 식의 학문구분은
플라톤 때부터 있어온 것이다.
왜 이러한 구분이 필요한가 하면
위에서 순서가 앞선 부분이 그 아래를 종속시키기 때문이다.
즉 하위그룹인 문화나 과학에서의 성과가 그 상위단계인 진리나 철학 범주의 다른 결론에 위해 충분히 뒤집어지기 때문이다.
[위는 아래를 뒤집을수 있지만 아래는 위를 뒤집을수 없다. ]
그래서 필요한 것이 사상체계이다.
사상은 진리, 철학, 과학, 문화를 일체화시킨 개념이다.
고로 사상은 그 어떠한 사상이든 진리로부터 출발한다.
이 점 다윈의 진화론이라던가 혹 정신분석학이라던가
혹 정신과학의 여러 삿된 주장이 만들어놓는
폐해들에 비견된다.
예를 들면 다윈의 주장은 위 전개에서 순수과학에 해당한다.
그 위와 그 아래가 없다.
즉 진화론은 사상이 아니라 과학인 것이다.
고로 다윈의 진화론을 응용한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잘못이다.
마찬가지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응용하는 마광수의 성해방 론은 잘못이다. 동시에 기(氣)를 함부로 해석하려드는 정신과학 의 삿된 태도들도 잘못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어떠한 주장이 갖추어진 사상일 때는
그것을 해석하여 그 하위분야인 응용과학 내지 문화일반에
적용함이 타당하나 사상이 아닌 순수한 과학성과일 때는
해석도 적용도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 오류가 마르크스주의이다.
그런데 종교는 진리로부터 출발하므로 사상이다.
종교는 어떠한 종교든 진리로부터 출발하여 문화일반에
개입한다. 그러할 권리가 종교에 있다.
문제는 종교의 해석 내지 변용이 이러한 사상의 원칙에 어긋난 다는 점이다.
종교가 현실에 개입할 때는 그 진리의 이름으로 개입하지
그 아래인 과학이나 교리로 개입하여서 아니된다.
호국불교나 민중불교나 혹 해방신학이나 회교원리주의나
마찬가지 맨 먼저 진리가 희생된다.
무제 때 선비 원고생(轅固生)은 말하였다.
[바야흐로 학문의 길은 어지럽혀지고 속설이 크게 유행하고 있소. 이대로 가면 진정한 학문의 전통은 마침내 사설(邪說) 때문에 사라지고 말 것이오. 곡학아세하여 세상의 속물들에게 아부하여서는 아니되오.]
이것이 사상이다.
생명은 과연 진화하였나?
종의 특성을 결정하는 것은 유전인자이므로
화석은 진화의 정황증거일 뿐 직접증거로는 볼수없다.
진화의 개념은 종이
어떤 종류의 외부간섭도 없이 내부의 어떤 힘에 의해
더 발달된 다른 종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화석이 주목을 끌던 시점은
유전정보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화석이 곧 진화의 증거로 채택되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나
유전정보가 종의 핵심임이 규명된 이상
화석은 증거능력이 없다.
화석이 증명하는 것은
1억년 전 혹은 10억년 전에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 종이
지구상에 존재했었으며 그 종들은 지금의 생명들보다 더 원시적 인 종이었다는 것 뿐이다.
그러한 변화가 진화이냐 아니냐의 가름은
그 변화가 종의 내부요인에 의해 일어났느냐 아니냐에
달려있다. 이를테면 외계인이 종을 지구로 가져왔다든가 하면 그것은 진화가 아니다. 그런 예외적인 경우는 얼마든지 가설을 세울수 있다.
거지같은 북풍소동.
작금의 거지같은 북풍소동을 보고 느끼는 것이 있어야 한다.
과연 안보니 반공이니 하는 거룩한 이름들이
그만한 가치를 가졌을까?
권영해와 그 일당의 김정일과 연계한 공작행위는
열명의 간첩, 100명의 좌익사범보다 더 유해하다고 본다.
깐수나 고영복 같은 간첩 몇 명이
북한에 무슨 대단한 정보를 제공하겠으며
사노맹 백태웅 등이 암약하여 국익을 저해해보았자
겨우 우리내부의 경각심만 키워주었지 북한에 실익은 없다.
그러나 권영해의 대북공작은
북한의 고위간부 십수명을 총살형에 처하게 하므로서
김정일의 이를 갈게하고 그의 정권을 더욱 공고하게 하며
그 결과 우리는 경수로 비용을 더물어야 하고
북한에 강냉이 쌀 다갖다 바쳐야 한다.
안기부가 대북공작에 승전보를 울릴수록
손해보는 것은 이나라 백성이다.
이제 정신을 차려야 한다.
안보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
우리가 좌익사범을 처벌하고 간첩을 색출할수록
그 비용은 증가하며 경제성장 민주발전에 주력할수록 그 비용은
줄어든다.
모름지기 정보라는 것은
그 정보를 확보하고 있으므로서 적의 행동반경을 축소시킨다는데 의미가 있지 비밀공작을 수행하여 적을 파괴, 교란시키므로서
적에게 패배를 안겨준다는데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비밀전쟁은 적으로 하여금 우리 내부를 더욱 공격하게
하기 때문이다.
술이 새나가는 헌 나무통의 누수를 막는데 드는 비용이
차라리 새 오크통을 하나 더 엮는데 드는 비용보다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름지기 정보전쟁은 낡은 건물에 방수작업 같이
되어선 안된다. 그 사이에 새건물을 두어채 더 짓고 그리로 이사가는게 현명하다.
박노해 등의 사면주장은
누수가 되는 낡은 건물은 내버려 두고 차라리 새집을 짓자는 주장이며 사면반대는 100년 지난 낡은 건물의 방수작업을 위해 구들장을 뜯자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재야의 양심수 사면 주장에 국민회의가 귀기울여
석탄일 사면건의를 하자 썩은 언론들이 일제히 반대주장을
내놓았다. 그걸 보고 천리안 워드방이 암말 안하는데
느끼는건 천리안 질이 많이 떨어졌다는 거다.
♠
좋은 안보와 나쁜 안보.
허생이 돈벌기는 쉽다.
제주도에 가서 갓, 망건 엮는 말총을 독점해버리면 된다.
정보시장에도 그러한 길목, 혹은 병목이 존재한다.
그 핵심을 장악하는 것이 정보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이다.
우리는 간첩을 색출하고 좌익사범을 잡음으로서
그 길목을 지키려 한다. 그럴수록 더욱 그 길목이 핵심적인 경혈이 된다. 어리석기 짝이 없다.
허생과 경쟁해서는 겨우 말총값을 올려놓을 뿐이다.
우리는 현명해져야만 한다.
현명한 방법은 시장규모를 키워놓는 것이다.
시장이 커져버리면 길목의 수가 증가하고 길목이 수시로 변하며
하나의 길목이 전체시장 판도를 좌우할수 없게 된다.
이때가 허생이 망하는 시점이다.
옛날에 이나라는 소수 경상도 엘리뜨가 좌우하고 있었다.
간첩이 그 엘리뜨그룹으로 뛰어들어 그들과 인맥을 맺어놓으면
길목을 장악한 셈이 된다. 군부의 엘리뜨는 하나회다.
거기에 간첩이 뛰어들 경우를 생각해보라.
경제성장과 민주발전은 그 엘리뜨그룹을 없애버리므로서
병목을 없이하고 간첩을 활약하지 못하게 한다.
이나라의 정보를 극소수의 서울대인맥과 경북고인맥이 장악하고 있을 때 간첩이 활약하기 쉽다. 그곳이 길목이고 병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권교체의 지금 간첩들은 그동안 구축해온 인맥이
쓸모없게 되었다. 더 이상 서울대인맥 경북고인맥이 정보흐름의
길목이 아니게 될것이기 때문이다.
정권교체는 간첩 100명을 잡는것보다 더 좋은 안보이다.
우리는 안기부가 와해되었다고 걱정하지만 실은 북한의 간첩망이 무너진 것이다. 간첩이 침투한다면 안기부부터 침투할것이 뻔한 것 아닌가? 대표적인 간첩이 권영해로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진실을 말하자.
모든 것이 허구였다는 것을 고백하자.
양심수의 사면은 이나라의 정보시장에서 그 길목과 병목을
제거하므로서 간첩의 활약을 무익하게 한다.
동독은 서독에 수만명의 간첩을 심어두었지만
아무 얻은 것이 없다.
정보의 효용가치는 그 정보가 차단되고 왜곡되고 그 사회가 경직되는 정도에 비례한다. 독재의 정도와 간첩의 가치는 비례하는 것이다. 민주국가에 간첩은 얻을 것이 없다.
♠
세상에는 네가지의 근원적 힘이 존재한다.
[중력, 강력, 약력, 전자기력]들인데 나는 이것이 잘못된 분류이며 여기에 하나나 둘이 더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강력과 약력은 같은 종류의 힘이어서
전기에너지와 자기에너지를 하나의 전자기력으로 보듯이
같은 걸로 분류해야 되는게 아닌가 한다.
풍력, 인력, 척력, 구심력, 압력 많지만 허튼 구분이고
적합한 분류법이 필요하다. 물질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다섯가지 양상을 가지므로 이에 따라 다섯가지의 에너지가 있다.
분류기준은 집적정도이다.
집적은 곧 압축이다. 하나의 공간에 많이 들어간 정도를 말한다.
우선 량/에서 자연의 물리력이 있다.
미는 힘, 타격의 힘, 마찰력, 폭발력, 압력 들이다.
이들 에너지의 특징은 직접 이용할수 있되 저장, 보관, 운반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노출되어 있으며 가만히 두면 흩어 없어져 버린다.
우리는 이 에너지들의 운동방향을 전환시켜 이용하거나 차단 할수 있을 뿐이다. 이들은 가장 낮은 단계로 존재하므로 하나의 범주로 통일하여 [제 1의 에너지]라고 부를 수 있다.
다음이 운동/에서 열, 연소, 빛 등 화학에너지이다. 석유, 석탄의 연소, 각종 화학반응, 빛, 열, 들은 어딘가에 가두어져 있다가 물리반응에 의하여 촉발된다. 문이 열리면 쏟아져 나와 제 1의 에너지로 변한다.
우리는 이를 차단, 혹은 촉발하여 에너지 형태를 변경시키므로서 이용, 저장, 보관, 운반할수 있다. 이를 하나의 범주로 묶어 [제 2의 에너지]라 부를 수 있다.
다음 힘/에서 전기와 자석의 전자기력이다. 전자기력은 화학에너지보다 더 안정된 형태로 존재하며 가두어져 있고 문을 열어 이를 꺼집어내었을 때 열, 빛, 등 화학에너지로 변한다.
우리는 전자기기를 이용하여 전자기력을 1차 제 2에너지로 변환시키고 재차 이것을 제 1에너지로 변환시켜 이용한다. 전자기력을 그대로 이용할 수는 없다.
전기곤로에 의해 코일이 달구어져 열을 내는 화학반응은 제 2에너지로의 변환이며 열에 의해 음식이 조리되는 것은 제 1에너지로의 변환이다. 전자기력을 우리는 제 3의 에너지라 부를 수 있다.
다음이 입자/에서 강력과 약력 등 소립자 사이에 존재하는 핵력이다. 유도전류의 방법으로 강력과 약력들에서 전자기력을 유도해낼수 있다.
에너지는 본래 소립자들 사이에 존재하는데 그 일부가 튀어나가 전기나 열 또는 물리효과로 변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핵발전이다. 그러나 핵발전은 핵력을 그대로 이용하는게 아니라 더 낮은 형태인 제 3의 에너지로 또 제 2의 에너지로 변화시켜서 최종 제 1에너지 상태에서 이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힘을 [제 4의 에너지]라 부를 수 있다.
마지막 질/에서 [제 5의 에너지]는 공간에너지이다. 이는 아직 규명되지 않았지만 만약 규명되면 1차 제 4의 에너지인 핵력으로 변하고 다시 이것을 전기로, 열로, 물리력으로 변화시켜 사용하는 것이지 제 5의 에너지를 곧 이용할 수는 없다.
※ ※ ※
에너지를 [전자기력, 강력, 약력, 중력]의 넷으로 구분하는 것은 모호하며 적합하지 않은 방법이다.
개념의 혼란이 있을수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물질의 다섯가지 전개양상 [질, 입자, 힘, 운동, 량]에서 세 번째인 [힘] 만이 에너지이며 따라서 전자기력만 순수한 에너지이다.
제 1에너지는 곧 량이며, 제 2에너지는 운동이고, 제 3에너지는 힘(에너지)이며 제 4에너지는 입자이고 제 5에너지는 질이다. 우리가 운동에너지라고 말할 때 실은 운동에서 량으로의 변환이다. 즉 제 2에너지가 제 1에너지로 변환하는 것을 우리는 운동에너지라 말하는 것이다. 이를 [제 2 에너지변환]이라 이름할수 있다.
[여기서 나는 에너지와 에너지변환을 구분한다.]
에너지가 물질존재의 집적도에 따른 구조적 불안정성을 의미한다면 에너지변환은 특정의 집적도를 가진 에너지상태에서 더 낮은(안정된, 엔트로피가 높은) 에너지 상태로 변화하는 것이다.
위치에너지는 [제 4 에너지 변환]이다. 내연기관이 폭발하여 피스톤을 밀어내는 것은 [제 3 에너지변환]으로서 일종의 전기반응으로 3에너지가 2에너지로 변환하는 것이며 바퀴가 지면을 밀어내는 것은 2에너지가 1에너지로 변환하는 것이다.
우리가 운동에너지라고 말하는 것은 엄밀한 과학용어가 못된다. [제 2에너지변환]이라고 해야 학명이 된다.
에너지는 최종적으로 물리반응을 보여야 비로소 에너지이며 화학반응(예를 들면 연소燃燒)은 그 자체로 에너지가 아니며 그 화학반응의 결과 생성된 열이나 빛이 재차 물리적 효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에너지이다.
전기(전기에너지)가 곤로의 코일을 가열하고(제3에너지 변환), 그 열이 전도되어 냄비의 고기를 익히고(제2에너지 변환), 고기의 세포벽이 파괴되어야(제1에너지변환) 에너지인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항상 동시에 일어나므로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에너지라고 착각하지만 실은 한가지(물리효과), 두가지(운동에너지), 세가지(전기에너지), 네가지(핵에너지), 다섯가지(공간에너지) 에너지 변환이 동시에 그러면서 순서대로 일어난다.
※ ※ ※
압력, 폭발력, 팽창력, 마찰력 들은 [제 1 에너지변환]에 해당한다. 제 1에너지인 물리력이 물리효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모두 미는 힘이며 단 하나의 방향으로만 일한다. 고로 방향성 자체가 존재하지 아니한다.
인력, 척력, 원심력, 구심력 등은 [제 2 에너지 변환]에 해당한다. 제 2에너지인 화학에너지가 제 1에너지인 물리에너지로 변하는 것이다. 제 2에너지 변환은 열의 전도(고온-> 저온) 빛의 복사(어둠-> 밝음) 처럼 일정한 방향성을 두고 일방통행한다.
○ 제 1 에너지(물리력) ▶ 제 1 에너지 변환(물리효과)
→ 에너지의 소모(무방향)
○ 제 2 에너지(화학에너지) ▶ 제 2 에너지 변환(운동에너지) → 에너지작용(일방향)
○ 제 3 에너지(전기에너지) ▶ 제 3 에너지 변환(일반에너지)
→ 에너지 발생(쌍방향의 장)
○ 제 4 에너지(핵에너지) ▶ 제 4 에너지 변환(위치에너지)
→ 에너지 보존
○ 제 5 에너지(중력에너지) ▶ 제 5 에너지 변환(공간에너지)
→에너지원
풀이하면 제2에너지인 화학에너지(열, 빛, 이온)가 제1에너지(압력, 폭발력)로 변환할 때 그 변화하는 성질을 우리는 운동에너지라 부르는 것이다.
자석이나 전기의 힘은 제3에너지이다. 우리는 전기나 자석의 힘을 곧 이용할수 있는 것으로 믿지만 모든 전자기력은 그 동력의 발생과정에서 반드시 분자단위의 구조변화를 유발한다.
건전지에서는 가시적인 화학적변화(이온의 이동)를 관찰할수 있다. 구동모터의 회전에서 전하의 건너뜀 자체가 화학에너지이다. 열의 전도, 전기(이온)의 전도, 빛의 복사가 다 화학에너지이다.
태양 내부에서 진행되는 수소핵융합은 제4에너지인 핵에너지이며 핵에너지가 빛과 열을 내는 것은 전기에너지다. 즉 행융합이 바로 빛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전기반응의 과정을 거쳐 빛으로 변하여 지구로 복사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의 의미는 지향성의 파악이다.
○ 제1에너지인 물리력은 항상 일방적이다. 미는 힘은 있되 당기는 힘은 없다. 1에너지에서 모든 힘은 압력의 형태로 존재한다.
○ 2에너지에서 모든 힘은 일정한 방향성이 존재한다. 즉 극성을 가지는 것이다. 빛에도 이온에도 자기에도 플러스와 마이너스, 구심과 원심, 인력과 척력의 방향성이 존재한다.
○ 3에너지에서 모든 힘은 인력과 척력의 양방향을 동시에 가진다. 즉 자기장, 중력장의 장을 가지는 것이다. 2에너지의 운동에너지는 인력이든 원심력이든 장이 없다. 장은 대립된 방향의 두가지 힘을 동시에 가지는 것이다.
○ 4에너지에서 힘은 고유한 질량을 가진다. 1,2,3에너지는 단순한 전달경로에 불과하므로 질량의 절대적 증가, 감소가 없다. 4에너지에서 에너지작용은 실질적인 증가, 감소를 나타낸다.
물질존재는 집적도에 따른 고유한 질서를 가지며 그 질서의 변화가 시, 공간의 변화일 때 5에너지이며 이는 곧 태초의 천지창조, 빅뱅이다.
변화가 소립자 단위에서 일어날 때 4에너지이며, 이온 단위에서 일어날 때 3에너지이며, 분자단위에서 일어날 때 2에너지이며, 물체단위에서 일어날 때 1에너지이다.
즉 어떤 물질이 있을 때 그 물질은 곧 제 1의 에너지이면서 동시에 제 2의 에너지이고 또 3,4,5,의 에너지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아무런 도구없이 곧 관찰되는 제 1의 에너지가 1일 때 한 차원 높여서 2의 에너지이면 에너지량은 그 100여 배, 제 3의 에너지이면 그 100배의 100배 비례로 증가하여 제 5의 에너지일 때 가늠할수 없는 엄청난 에너지가 된다.
즉 1키로그램의 돌멩이가 가진 무게의 에너지(제 1에너지)를 1로 볼 때 그 돌멩이형태를 파괴했을 때의 열은 대략 그 100배, 그 열원이 되는 전자기력을 순수하게 에너지화하면 그 100의 100배 비례로 늘어나 1키로그램을 순수하게 에너지화시켜 질량을 0으로 만들면 에너지는 원자폭탄이 내는 에너지는 비교도 안되게 가늠할수 없을 정도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법칙 제 2에너지를 제 1에너지로 전환할 수는 있으나 제 1에너지를 제 2에너지로 전환할수 없다. 엔트로피의 법칙이 작용하여 높은 단계의 에너지를 낮은 단계의 에너지로 변화시킬수는 있어도 그 역은 없다.
제 1 에너지 - 인간이 직접 이용할수 있는 모든 에너지 형태.
제 2 에너지 - 제1에너지로 변화시킬수 있는 에너지 형태. (열)
제 3 에너지 - 제2에너지로 변화시킬수 있는 형태(전자기력)
제 4 에너지 - 제3에너지로 변화시킬수 있는 형태(원자력)
제 5 에너지 - 제4에너지로 변화시킬수 있는 형태(공간에너지)
물질은 그 자체로 곧 에너지다. 그러나 제 5의 에너지 형태로 존재한다. 이것이 강력한 힘을 받아 붕괴될 때 제 4의 에너지 곧 핵력으로 변하며 전기나 자기는 이 핵력의 일부 자투리 부분을 떼어내어 쓰는 것이다.
원자폭탄이 폭발하면 소립자들의 극히 일부가 전기로 변하며 그 전기의 일부가 열로 변하며 그 열의 일부가 건물을 파괴시키고 생물을 살상한다. 즉 높은 단계의 에너지가 곧 우리의 눈에 보이는 물리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낮은 단계의 에너지로 변하며 더욱 낮아지고 낮아져서 최후에 물리반응을 낳는 것이다.
제 5의 에너지는 빅뱅 순간에 우주를 창조한 근원의 힘이며 태초 이후 4,3,2,1의 에너지로 변한 적은 있어도 거꾸로 제 1에너지인 물리력이 2,3,4,5의 에너지로 변한적은 없다.
왜냐하면 제 5의 에너지는 물리공간 그 자체이므로 만약 엔트로피를 거슬러 에너지가 높은 단계로 이동하면 우주공간이 축소되어야 하는데 우주는 지속적으로 팽창해왔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제 1에너지로 변환된 상태에서만 인간이 이용할수 있으며 그 이상의 단계는 직접 이용할수 없다. 인간이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은 제 2, 제3의 단계를 제 1의 단계로 하향시키는 것이다. 우주공간 안에서의 모든 변화는 이 에너지의 하향안정화이다.
에너지는 2단계에서 1단계로 변화하는 과정에서만 이용되므로 최후에는 모두 이용할수 없게 된다. 우리가 이용하는 모든 에너지는 제 1의 에너지이다. 제 5의 혹은 4의 에너지는 곧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낮은 단계로 떨어뜨린 후 이용하는 것이다.
인생론 - 어떻게 살것인가?
스승으로서의 삶 - 지성의 삶, 극진한 삶, 본보기가 되는 삶
구도자로서의 삶 - 자유로운 삶, 추구하는 삶, 도전적 삶.
답은 이렇게 나와 있다.
모름지기 삶은 똑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젊었을 때는 구도자로서의 삶의 자세를 가질 것이며
나이들어서는 스승으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바른 삶이다.
나는 노야(老爺)가 아니다.
나는 인생의 구도자이다.
내게 중요한 것은 도전과 모험, 체험하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위한 자유이다.
나의 목적은 신과 대화함이며
나의 삶은 신에게 내 인생의 의미를 질문하는 방식이다.
그것이 나의 구도이다.
그대가 구도(求道)하지 않더라도
환경이 그대를 일깨워 구하게 만들 것이다.
그대가 스승이 되고자 아니하더라도 누군가가 그대를 모방하므르서 그대에게는 피할수 없는 스승의 역이 주어진다.
혹 그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도전도 싫고 모험도 싫고 자유도 싫다.]
그러한 자기부인은 곧 인격성의 부인, 존엄의 부인으로 이어져서 인간이 아니게 된다. 죽음이다.
생물학적으로 죽지 아니하더라도
정신이 죽으면 곧 죽은 것이다.
인간은 왜 구도하는가?
부끄러움을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문화이며 당신에게로 옮아와서는 지성이 된다.
[인생은 문화로부터 출발한다. ]
50억이 사는 별에는 50억의 삶이 있고
그 하나하나 가치없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사회적 평가는 별도이다.
가치있는 삶이 있고 무가치한 삶이 있다.
타인에게 유익한 영향을 끼치는 삶은 가치있으며
유해한 영향을 끼치는 삶은 가치없다. 이것이 사회적 평가이다.
우리는 서로 영향을 미치며 영향 받는다.
그것을 문화라고 부른다. 삶의 가치는 다만 문화의 가치이다.
나라마다 고유한 문화가 있다.
각각의 문화는 각각의 고유한 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개별적 문화들은 통합되어 인류문화를 이루며
거기엔 우월한 문화와 열등한 문화가 있다.
주류문화가 있고 변방문화가 있다.
인디언 문화가 아프리카 문화보다 우월하다는 근거는 없다.
그러나 인류문화는 서구문명이 주류문화이며
인디언문화나 아프리카 문화는 변방문화다.
주류문화는 변방문화에 문화적 주제를 제공하고
변방문화는 주류문화에 문화적 소재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양자는 교감한다.
변방문화는 언제나 소재를 제공할 뿐이다.
한국문화는 세계문화에 소재를 제공하고 주제를 제공받는다.
그것이 문화의 열등함이다. 한국문화는 열등하다.
그 부끄러움을 앎으로부터 문화적 자각은 시작된다.
페미니즘이나 환경주의는
세계문화가 한국문화에 주제를 제공한 것이다.
사물놀이나 영화 씨받이는 한국문화가 세계문화에
소재를 제공한 것이다.
이것은 불평등한 것이며 종속적인 것이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 라고 말한다면
한국적 소재라는 반찬을
세계보편적 주제의 그릇에 담아내는 격이다.
반찬은 1회용으로 소비되고 그릇은 재활용된다.
소재(반찬)를 제공하는 쪽은 손해보고 주제(그릇)을 제공하는
쪽이 이득을 본다. 그것이 문화적 일방통행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득보고 사는 것이다.
소재를 제공하는 약자의 거래를 하지 말고 주제를 제공하는
강자의 거래를 트자는 것이다.
1회용에 불과한 반찬을 제공하는 억울한 장사를 하지 말고
두고두고 이용해 먹는 그릇을 제공하는
남는 장사를 하자는 것이다.
한국영화는 늘 소재를 제공하려 하므로
소재고갈의 한계를 만난다.
헐리우드 영화는 늘 주제를 제공하므로
소재는 남의 나라에서 자꾸만 훔쳐온다.
그들은 결코 바닥나지 않는다.
인생도 이와 같은 것.
삶은 사회와 거래를 트는 것이며
소재를 제공하는 자는 종속되고 이용당하며
주제를 제공하는 자는 재활용하고 이용해먹는다.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활과 인생]
나는 지금 왜 밥을 먹는가? 행복을 위해서다.
나는 지금 왜 음악을 듣는가? 행복하기 위해서다.
행복은 밥을 먹는 이유, 음악을 듣는 이유 등
개별적 행위의 이유가 될지언정 삶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행복은 생활(生活)의 이유가 될지언정
인생(人生)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인생은 개별적 행위들을 통합한 전체개념이다.
왜 사는가?
문화란 무엇인가?
이토이님이 문화를 [기록된 자료]라고 하시는데 뜬금없다. 기록된 자료는 [문화재]가 아닐깝쇼?
문화란 생활양식이죠. 인간생활을 사회개념으로 파악한게 문화, 곧 한 개인의 삶을 생활이라고 한다면 전체 사회를 한 생명으로 보아 그 사회의 삶을 문화라고 하는 거.
문화의 문(文)은 정보(情報)를 의미하고 화(化)는 사회화(社會化)를 의미한다. 정보화인 동시에 사회화인데 즉 개별적 존재인 인간들이 정보를 공유함으로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삶의 양식을 가지게 되는 거. (문화 = 정보를 통한 사회화)
고로 문화란 사회적 성격을 가져야만 한다, 정보여야만 한다는 두가지 근간을 가진다. 사회다수를 포함할수록 고급문화이고 주류문화가 되며 반사회적일수록 비주류의 변방문화가 된다.
정보이므로 고급정보일수록 고급문화이고 저급한 정보는 하위문화가 된다. 이것이 본질, 문화는 차별성, 다양성, 개성에서 출발하여끝없이 사회통합과 고급화를 지향하는 성질을 가진다.
한국문화의 후진성은 첫재 한국이 생산하는 정보가 고급정보가 아니다. 둘째 사회통합적이지 않다. 즉 외국인을 포용하지 못한다는 거. 정보는 유통성(호환성)과 차별성을 근간으로 하는데 전자는 주제고 후자는 소재. 유통성이 곧 사회성.
문화는 정보이므로 문화는 정신문화다. 용기문화니 규범문화니 하는 구분은 문화보다는 문명(文明)이 타당한 거. 문명은 하드웨어문화는 소프트웨어, 용기는 하드이므로 용기문화는 좀 어색하다.
문화의 성질은 끝없이 서로 차별화하면서 동시에 일반화하는 것그 과정이 고급화이다. 먼저 서로 다른 측면을 발굴하고 거기서 공통된 성질을 나눠가지려면 고급화해야만 가능하다는 것.
문화창조 문화발전 문화공유
다양성과 개성에서 === 고급화 ===> 보편성 일반성
라디오를 하나 만들었는데 그 디자인이나 음질에서 다양할 수가 있으나 고급화하려면 디자인과 음질을 고급화하면 결국은 같아져버린다. 즉 모든 라디오가 비슷해지는 거죠.
자동차도 마찬가지, 오만가지 자동차가 있지만 최고급 자동차는 어느나라를 막론하고 비슷하다. 음식도 가장 맛있는게 중국음식이니까 고급을 추구하다보면 결국은 다 중국요리를 먹어야 된다.
문화는 사회화되어야 하고 이것이 발전, 사회화는 모든 사람의 입맛에 맞추는 것, 모든 사람의 입맛에 맞는 것은 중국요리, 결국 가장 고급한 것을 추구할수 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모든 사람의 입맛에 맞기 때문이죠.
문화는 정보이므로 차별화되어야 한다. (다양성, 특수성 존중)
문화는 사회화이므로 호환되어야 한다. (보편성, 일반성 추구)
문화는 차별성 => 호환성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고급화된다.
이것이 문화발전의 1사이클입니다. 문화는 또 다른 어느곳에서 차별성을 발굴하고 그것이 소재가 되며 고급화해가는 과정에서 인류모두가 공유하게 되죠.
제가 논하려는 것은 그 고급화 과정입니다. 그래서 심미안이 필요한 것, 저급과 고급을 단박에 알아낼수 있는 것이 심미안. 심미안을 가진 이가 지성, 스스로 보석이 되는 것.
[작은 인생 아름답게 살기]
약간 김이 빠졌지만 뭐 지성(知性)이니 문화(文化)니 심미안(審美眼)이니 하며 하려던 말은 이런 것이었다.
[[[ 삶을 화가의 그림이나 가수의 노래처럼 하나의 작품으로 보아 예술에서 미(美)를 구하듯 삶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자. ]]]
행복한 삶이 곧 아름다운 삶은 아니다. 해피엔딩이어야 영화가 아니듯이. 비극에도 미(美)는 있다. 예뻐야만 그림이 아니고 많이 팔려야만 문학이 아니고 작품성이 평가되고 예술성이 평가되듯이 인생에 있어서도 깊이가 평가되어야 하리라.
인생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본다면 인생의 작품성은 곧 지성의 측면이 아니겠는가? 심미안으로 발견되리니.
미학 - 인생에서도 근접도, 완성도, 균형도, 속도, 정확도의 미학적 가치는 평가되어야 하리라.
근접도 - 신에게 얼마나 다가갔는가?
신을 믿는다면 신, 신을 부정한다면
환경, 역사, 자연, 존엄이 곧 신일테지
완성도 - 자기자신의 삶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
지향과 지양, 생의 목표점. 의식, 추구하는 바.
이념적 태도. 인생의 제목.
균형도 - 자아(自我)와 타자 사이에서 공정하였나?
자신과 타인, 이웃과 사회, 도덕과 권력,
정신과 물질 사이에서 균형추구.
속도 - 삶에서 게으르지 않았나?
비관, 냉소, 도피, 회피는 인생의 태만이다.
사랑, 낙관, 참여, 긍정, 책임은 인생의 부지런함.
정확도 - 삶에서 무엇을 획득하였나?
입증될만한 가시적 성과, 성공, 승리, 출세, 행복.
그리하여 그대의 삶에 얻어낸 행복과 성공이 있다면 그것은 미학적 정확도라 할 것이다. 정확도란 그림으로 치면 예쁘게 그린 것이다.
또 그대의 삶에 낙관 긍정 도전 참여 사랑이 가득하다면 미학적 속도의 획득이다. 속도는 그림으로 치면 [곱다]라고 표현될 부드러움의 질감이다.
더하여 갖추일 것이 편벽되지 않는 중용(中庸)이다. 미학적 균형도는 다른 말로 앙상블이다. 그림으로 치면 구도가 맞는 것이다.
완성도는 인생의 주제이다. 제목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대의 삶은 무엇을 추구함인가? 그림으로 치면 주제(제목)를 구현함이다. 내용이 맹탕이 아닌 메시지가 있는 그림의 성공이 완성.
근접도는 근원으로의 회귀이다. 삶이란 무엇인가? 신화 대화하는 내 나름의 방식이다. 나의 삶은 신과 소통하는 나의 언어, 그것이 전부, 신과 통했다면 1초를 살아도 성공이요 통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살아도 벌레의 생태일 뿐이다.
예쁘게 살기와 곱게 살기, 멋있게 살기.
예쁘다 - 눈 코 혀 귀로 지각되는 것의 미(美) = 수동적 감각
곱다 - 운동, 움직임, 질감으로 접촉되는 것의 미 = 능동적 감각
멋있다 - 의미있는 것, 판단되는 것, 생각하게 하는 것, = 지적 유혹의 미(美)
박살이님이 박살을 내버리는 구먼 .
부가가치세 논쟁이랍시고 하는거 보이
참말로 어이가 없구만..기냥 사전 찾아보머 되는거 갖고
몇장씩이나 논문들을 쓰고 안자서 차말로 ...아이구 두야...무식한 엉아가 간단히 한마디로 가르쳐 주께.
부가가치세란 소비세로서 최종소비자가 소비한 만큼 세금을 내는 것인데 세금내기 싫으면 소비를 안하면 되니까 민주적인 세금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여. (나는 거의 부가세를 안냄...소비를 안하고 사니까..에헴~!)
근데 의료행위나 법률서비스 같은 것은 소비가 아닝께로 부가세를 내머 안돼재요. 통신요금 전화요금에도 부가세가 나오는데 이건 모순이여.
여그는 소비가 아닝께로 세금을 붙여서 안되는데 정치하는 자슥들이 한푼이라도 더받아묵을라고 세금을 매기는 거여. 의사가 부가세를 내면 결국은 환자가 내게 되는 것이여. 그만큼 치료비에 부가되니까. 환자가 왜 세금을 내여? 소비한 것이 아닌데.
부가세개념은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를 위한 비용조달인데 사회간접자본을 이용한 쪽이 세금을 내는 것이여. 그러니께로 소비하는 것이 간접적으로 사회간접자본을 이용했으니께로 세금을 더내서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하시라 이거지 모.
쉬운 것을 왜 어렵게 설명할라 그라까이?
구름이 맹키로 게나 고동이나 다 택시하면 범죄만연, 도로정체 등 감당못하는 일이 생기재요. 그러니까 택시영업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가용영업자가 합법적으로 불법영업을 하게되는 것이여. 통제방법이 없으니까루.
즉 전업 택시기사가 아니라 출퇴근시간에 한두시간 반짝영업하는 부업택시기사가 출퇴근시간에 총출동해서 도로를 꽉 막아분다카이. 그라머 안돼재요.
택시기사 시험을 엄청 어렵게 해서 기초외국어(영, 일, 불어) 필수, 도로관계법 숙지, 관광안내원 급의 관광지식, 들을 테스트 해야 된다니까루.
예를 들어 경주에서 택시영업을 할라치면 경주의 모든 문화재에 대한 전문가급의 지식을 가지구 있어서 손님에게 관광안내를 해줘야 한다 이거지.
조만간 택시기사 시험이 엄청 어려워지는 날이 올거구만.
♠
쪼삣한 아이씨보다 더 쪼삣한 오반 아이씨~!
사전도 잘 찾아보고 요모조모 부스럼도 잘 찍어내는군여.
그라머 누가 똑똑하다 캅니꺼? 귀엽다 카재 ^ ^;
나는 옛날부터 3반이나 4반과 친하고 5반 애들과는 안친했지만
정권도 바뀌고 했으니까 뭐 좋소이다 그려.
어렵게 사전찾고 그라지 말고 쉽게 가입시더,
여그는 농사꾼 농장이라 사전이고 뭐고 엄써여.
경운기하고 거름하고 그런게 전부여. 소비가 어떻고 용역이
어떻고 그칸다고 누가 먹티난다 캅니꺼?
치사빤쭉이라 그카재.
말트집 하지말고 본질을 시비해 보쇼.
개똥도 약에 쓰면 약이지만 그런 약을 팔면 돌팔이라고.
상대가 어떠한 의미로 그 언어를 사용하는지에 대한
헤아림이 없다면 초딩이재요.
또한 오반님을 위하여는
정조 때 이문원 대감의 절구 한꼭지를 던져부림.
알각달각 등남산
승지참판 영감래
언문진서 섯거작
시비자는 황견자
야밤새벽 또접속
게나고동 열사래
한글영문 섯거작
시비자는 손오반
엄밀하게 말하면 의사나 변호사에게도 부가세를 내게 하고
대신으로 가계(가정)도 하나의 법인처럼 취급하여
병원비나 법률서비스비용은 부가세환급을 받아야 한다.
병원비는 공장에서 원자재를 구매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계에 일일이 회계사를 둘 수도 없거니와
가계지출의 상당액이 교육비 등 일종의 재투자이므로
세금공제 해택을 받아야 하는데 그거 다 계산하다가는 나라가
거덜나겠다.
가계소비는 모두 최종소비로 보고
부가세환급이 안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니까 병원비 같은 것은 빼주는거 아인감?
부가세엔 부가세의 논리가 있는데 그 논리자체가 현실적
실현불가능의 모순을 가지고 있어서 과세근거를 챙길수 없는
거래가 많으므로 융통성을 두는 것이재요.
♠
부가세 논쟁에 부쳐.
[소득있는 곳에 과세있다]
하여 세금은 소득에 대해 누진적으로 부과하는 것이고 그것이 사회정의이며 조세형평이고 빈부차를 줄이는 옳은 것이라는 관념이 고전적인 조세철학이다.
이것은 잘못이다. 가치는 노동에 의하여 창출되고 부자는 노동하지 않으므로 소득이 없다. 고로 부자의 소득은 허가된 약탈이나 착취이고 부자의 소득세액 증가에 비례하여 그 약탈과 착취의 정도도 비례하므로 이는 눈가림에 불과하다.
거꾸로 생각하자. 오히려 가난한 자가 세금을 내고 부자는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이 정의일수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의문이다.
소유와 자본과 이윤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라는 낡은 관념은 폐기 내지 수정되어야 한다. 이제 임대와 보장과 소비의 개념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발전이다.
예를 들면 연 1억원의 수입을 올리는 국회의원이 5000만원의 세금을 내고 연 1000만원의 수입을 올리는 노동자가 100만원의 세금을 낼 때 국회의원은 노동자보다 50배나 많은 세금을 낸 것이니 그만큼 사회정의가 실현되고 빈부격차가 줄었는가?
국회의원의 모든 수입은 노동자의 세금에서 나온 것이므로 따지면 국회의원은 한푼의 세금도 안낸 것이다. 이것이 소득세의 허구다. 이것은 극단적인 예이고 문제는 이러한 모순이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는 것이다.
의사나 변호사 재벌, 자영업자, 관리 등 사회에서 주도적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이 예의 국회의원이나 마찬가지로 남의 돈으로 세금을 낸다고 볼수있다.
정주영이 아무리 많은 세금을 내어보았자 결국은 그의 회사 노동자와 그의 상품을 소비한 소비자가 낸것이지 정주영이 낸 것은 아니다. 눈가리고 아웅일 뿐 정주영은 한푼의 세금도 내지 않았다.
역사가 생긴 이후로 부자가 세금을 낸 적은 없다. 납세의 순위는 도적의 순위일 뿐이다. 굳이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소득에 세금을 부과한다는 것은 허구다. 모든 세금은 궁극적으로 소비에 부과되어야 한다. 정주영의 재산이 국가재산의 9할을 넘더라도 그가 소비하지 않는다면 국가에 유익하다.
부가세의 도입은 박정희의 유일한 업적으로 쳐줄만 하다. 물론 생필품이나 사치품 할것없이 일률의 세금을 매기는 것은 잘못이다.
생필품의 부가세율은 더 낮추어져야 한다. 생필품은 궁극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생존에 투자되는 것이므로 최소한의 측면에서 그것은 소비가 아닌 투자다.
수출원자재는 관세가 면제된다. 소비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로 관세도 일종의 소비세다. 부자의 자산상속은 곧 소비로 연결될 위험이 높다. 고로 상속세도 소비냐 투자냐의 측면을 고려하여 조정되어야 한다. 경마장의 배당금은 거의 소비로 연결된다. 고로 마권세도 일종의 소비세다.
모든 세금은 소득이 아닌 소비 앞에 그물치듯 쳐져야 한다. 소비로 연결되지 않는 소득은 제한없이 용인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소득세를 곧 폐지하자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영업행위 내에서도 개인간에 소득은 큰 차이를 보일수 있기 때문이다. 길목을 차지하고 큰 수익을 올리는 이와 변두리의 구멍가게는 수익이 다르므로 그 동일업종 내에서의 형평을 위해 소득세 외에 뚜렷한 보전방법이 없는 경우도 있다.
자동차세나 휘발유세 특수소비세 방위세 교육세 등 소비에 따라 부과되는 세금은 소비세가 아닌 듯 하지만 알고보면 소비세다. 주세나 담배세도 그렇다.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세금은 소비를 쫓아간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유태의 율법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하였고
공자 때의 예기(禮記)에 복수(復讐)에 대한 예법이 있어서
[아비의 원수는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 )이니 반드시
죽여야 하고 형제의 원수는 무기를 가지고 다니다가 당장에
죽여야 하고 친구의 원수도 또한 죽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알수 있는 것은 고전적인 형식주의 법률개념이다.
법률 뿐 아니라 예를 들면 [소유권은 신성불가침의 권리]라고 믿는다거나 시장원리 곧 보이지 않는 손을 자본주의의 절대적인 근거로 주장한다거나 하는 식이 모두 고전적인 형식주의다.
망부석에 곤장 500대를 멕인다거나 혹은 왕실의 소나무를 해친 죄로 송충이에게 300년 징역형을 선고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코란이냐 칼이냐] 식의 이거 아니면 저거, 너죽고 나살기,
사회가 발전하므로 하나의 어떤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근거를
버리고 합리적으로 또 다양하게 변해가는 것이다.
가까운 예로 [경영권은 사용자의 고유권한으로서 노동자의 경영참여는 말도 안된다] 하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특정한 한가지 가치의 절대적인 고수가 아닌 다양한 가치, 다양한 잣대,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하기로 바뀌는 것이 사회발전이다.
세익스피어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서 가슴살을 요구하는 샤일록처럼 전혀 융통성없이 자구(字句)에 매달리는 것이 그렇다.
뭐든 신성불가침이라거나 고유권한이라거나 절대적이다고 우긴다거나 하는 어거지들은 모두 고전적 형식주의다.
김종필 총리서리의 위헌문제를 두고 한나라당의 주장도 전후사정의 고려없는 문리해석의 억지를 보이고 있다. 한나라당은 샤일록이다.
법률해석이든 혹은 각종사회제도이든 민형사사건의 판례이든 그 모든 가치판단에서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라] 하는 식의 극단적 견해들은 보수적인 혹은 고전적인 형식주의 논리로 치부되고 융통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경향으로 바뀌며 그것이 진보주의 시각이고 역사발전 방향과도 일치한다.
여기서 살펴야 하는 것은 그런 고전적 형식주의 논리가 [논리를 위한 논리]라는 것이다.
원시사회로 돌아가서 생각하자. 법률제도가 애초에 없을 때 모든 판단의 근거는 쌍무적 관계로부터 출발한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 대표적이다.
악법도 법이고 계약은 아무리 무리한 계약이라도 무조건 지켜야 하며 내것은 내것이고 네것은 네것이며 하는 이러한 관념들에는 [사회]라는 개념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사회계약은 쌍무계약 즉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직거래가 아니다. 사회계약은 신뢰이며 믿음이며 보장이다.
내 물소가죽을 네게 주고 네 곰가죽을 내가 가지는 쌍무계약이 아니라 너와 나 모두를 위해 물소가죽과 곰가죽을 공동창고에 보관하는 것이 진정한 사회계약이다.
원시사회에서 모두가 적이다. 고로 사회계약은 적과의 계약으로 축구시합의 룰과도 같아서 융통성이 있을수 없다. 현대사회에서 모두가 적이 아니다. 사회계약은 친선 골프시합의 룰과 같아서 각자의 협의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
논리를 위한 논리가 아닌 인간을 위한 논리여야 한다. 계약을 위한 계약이 아닌 인간을 위한 계약이어야 한다.
봉건사회에서 계급제도 아래 신음하는 농노가 귀족에게 대항할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법률이다. 언론도 없고 소비자고발센터도 없고 할 때 귀족은 농노의 반역으로부터 귀족계급을 보호하기 위해 가끔씩 희생양을 농노에게 먹이로 제공할 필요를 느껴 사회계약을 신성불가침의 쌍무계약으로 만들어두는 것이다.
논리를 위한 논리, 형식주의 논리는 적어도 쌍무관계에서 철저중립이다. 그러므로 일견 귀족과 농노 사이에서 공정한 듯 보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므로 오히려 일단 숫적우세를 점한 민중의 여론의 위세로부터 철저히 귀족을 편드는 것이다.
법률제도에 엄정중립이 아닌 동정의 여지가 있고, 인정과 눈물과 사랑이 있으면 법이 여론을 따라가고 여론은 다수를 따라가고 민중이 다수이므로 법이 피지배계급을 편들게 되기 때문에 그들은 민중을 기만하기 위해 법제도를 엄정중립의 쌍무계약으로 만들어 놓아 외견상 공정하지만 사실은 철저히 귀족편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과연 공정한가? 아랍사회에서 실제로 부자나 가난뱅이나 이 원리는 공정하게 적용된다. 부자가 가난뱅이의 눈을 뽑으면 가난뱅이가 부자 눈알을 뺄 권리가 있다.
적어도 재판장인 왕은 그렇게 판결한다. 그러나 정말로 그렇게 될까? 부자가 가난뱅이의 눈알을 뽑을 일은 날마다 생기고 가난뱅이가 부자눈알을 뽑을 일은 아무래도 안생긴다. 속임수다.
자본주의 그 자체는 본래 속임수가 아닌데 그 논리는 모두 속임수임을 알아야 한다. 자본주의는 자연발생의 사실일 뿐 계약도 규칙도 뭣도 아니다. 모두 인간에 달려있지 형식에 달려있지 않다.
아으 인생이란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
철웅선사가 20년을 장좌불와 용맹정진 하다가 하산하였다 한다.
옛날 중국에선 고목선(枯木禪)이라 하여 40년 30년을 장좌불와 하기도 하였다 한다.
이 양반이 수행을 그만두고 이제 막 하산하는데
뭐 몇 개국어에 능통하고 산중에 앉았어도 모르는게 없고
미담이 많은데 좋다.
좋은건 좋은데 뭐 종필이 하고 친하고
디제이 하고는 안친했는데 요새 종필이 땜에 다시보고
이회창 이인제를 만나고 어쩌고 하는 폼새를 보아하니
[아니다]
아이다. 이 양반도 아니다.
20년공부 도로아미타불이다.
네 중은 다시 절로 돌아가 영영 아니나오는 것이 좋겠다.
20년 달인 약에 뭐가 남았는고? 입이 헤깝으면 인간이 헤깝은 것. 이 뭣고? 세치 혓바닥의 조화로 우물에서 잉어를 낚으려는 자다. 어찌 쓸쓸하지 않겠는가?
그대는 신을 믿는가?
진리를 믿는가? 역사를 믿는가? 이성을 믿는가?
진보를 믿는가? 인간을 믿는가? 사랑을 믿는가? 믿음을 믿는가?
나는 무엇을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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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똘이에게 사탕 두 개를 준다. 이때 옆집 순돌이가 찾아온다.
엄마는 말한다.
[똘똘아 네 사탕은 두 개잖아. 한 개는 순돌이를 주려므나~!]
[안돼. 이건 내건데 왜 줘? 가. 순돌이 너거집에 가]
사탕을 나눠주지 않으려는 똘똘이에게 엄마는 어떠한 수사로
똘똘이를 납득시킬수 있을것인가?
[착하지. 우리 똘똘이. 착한 어린이는 나눠가지는 거야.]
내 어릴 때 이 착하다는 말에 잘도 넘어갔다.
이건 정곡을 찌른거다. 그러나 요새 아이들은 약아서 이런 말에
잘 안넘어간다.
[네가 순돌이에게 줘야 나중 순돌이도 네게 주는거야]
사탕 한 개 정도는 뭐 이런 말로 넘길수 있지만 좀 더 중요한 물건이면 설득이 안된다. 요즘 애들이란 영악해서리.
소유권 개념이 미숙한 어린이들은 책상에서 금을 넘어오면 칼로 자른다든가 하는 식으로 극단적인 쌍무계약을 맹신하는 경우가 많다. 국민학교 3학년 때 급우 중의 한명이 친구들에게 10원씩 빌려주고 하루 10원씩 이자를 받다가 선생님께 들켜 무지 맞은 일이 있다. 이자율 하루 100퍼센트.
소박한 어린이들은 어려서 그렇다 치고
어른이 다되어서까지 이런 식의 유치찬란한 어거지논리를 맹신 하는 경우를 의외로 많이 본다. 이회창의 법대로론도 일종의 그 연장선 상에 있다.
어린이를 설득하는 방법의 하나로 공동의 적을 설정하는 경우가 있다. 똘똘이와 순돌이가 서로 적대적인 남남이 아닌 한편이 될 수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너희는 같은 친구잖아. 옆동네 땡칠이네와는 다른.]
똘똘이는 이 말에 현혹된다. 그렇다. 순돌이는 우리편, 땡칠이는 나쁜 편. 옆동네 땡칠이파를 이기기 위해 우리는 단결해야지 암 만. 좋아 이 사탕 너 먹어.
어렸을 때 내가 배운 것이 이것이다. 그렇다 [무찌르자 공산당 단결하자 대한민국.] [일본을 극복하고 미국의 콧대를 꺽어놓고]
문제는 이것이 이나라 국민들의 일반적 수준이고 이 워드방의 수준이라는 것이다.
[깨침이 필요하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다. ]
그 편가르기 수준이 국가 수준에 까지는 잘가는데 그 선을 넘지 못한다. 어딘가에 공동의 적을 설정해주지 않으면 단결이 안된 다. 한국이 단결하기 위해 맨날 일본과 축구시합을 하랴?
우리는 왜 깨달아야 하는가?
적은 네 마음에 있다. 바깥에서 적을 찾지말라.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깨부수라. 반공, 극일, 반미가 아닌 진리와 이성과 믿음 과 사랑의 편에 서라.
[만약 인간이 고독한 존재임을 스스로 자각하게 된다면 그 어떤 경계(설정된 공동의 적)도 깨어진다.]
[죽음, 공허(空虛), 적멸(寂滅)에 이르기까지 네 친구로 할수 있 어야 스스로 인격적 완성에 이르리라.]
철웅선사의 허튼소리를 듣고
우물에서 잉어를 낚으려는 자란 생각이 들다.
김종필, 김대중, 이회창 하는 소리가 그의 경계다.
그 또한 공동의 적을 설정하기 위하여 세속과의 연결고리를 찾 았든 거다.
깨침은 그 경계를 깨부수는 것이다. 자재를 얻고 인생을 덜다.
집적도로 말하면 진리 1에, 철학 10, 과학 100, 사회 1000, 생활 10000이다. 이는 복잡도의 기하급증을 의미한다. 위로 갈수록 단순명료해지고 아래로 갈수록 복잡해진다.
진리는 하나뿐인 자연에 근거하므로 1이고, 철학은 인류문명의 흐름에 기초하므로 10이고, 과학은 나라마다 다양하므로 100이고, 사회는 그 나라안에 다양하게 존재하므로 1000이고 생활은 개개인이므로 1만의 수치에 비유된다.
과학은 이 기하급증의 한가운데 있다. 거기서 생활 쪽으로 가면 다양하고 풍부해지는 대신 수준이 떨어지고 진리 쪽으로 가면 단순명쾌해지는 대신 수준이 올라간다.
앞으로 가는 이를 선비라 하고 뒤로 가는 이를 잡인이라 한다.
[쌍벽을 이루는 땡초와 푼수. ]
[갈수록 인간이 되어가는 법장.]
좋도다. 저자거리의 아Q와 소don처럼 횡설수설 언어폭력을 남발하더니 그새 철을 섭취하였는지 제법 법어가 막 나오도다.
나는 경허와 만해를 좋아한다. 둘 다 정통의 승려는 아니다.
경허는 말년에 난주선생으로 이름을 바꾸고 삼수갑산에 은거하여 제자를 가르치며 불교를 떠났다. 만해는 승려라기보다는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지도자이다.
종교의 작은 그릇에 두 스승의 커다란 정신을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종교는 백용성 따위의 중으로 만족하는 작은 인간들이 가져가라.
불교를 떠나 사회에 한발을 내밀었던 시대의 풍운아들에게 법장은 왜 그리 군말이 많느뇨? 왜 포용하지 못하느뇨? 왜 껴안지 못하느뇨? 다 불교의 재산이고 민족정신의 자산인데.
절에서 염불하는 이를 스님이라 하고 저자거리나 상가집이나 아무데나 가서 염불하는 자를 땡초라 한다. 법장이여, 적을 만들려거든 누구를 비판하려거든 지금 살아있는 누군가를 비판하라.
과거의 인물은 누구나 미화되는 것이다. 김유신은 당나라 끌어들인 나쁜 편이고 연개소문이 옳다거나 혹 반대로 연개소문이 나쁘다거나 이런식으로 속좁은 해석을 하지마라.
누구나 영웅이다. 이순신과 원균, 김유신과 연개소문은 일본에서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평하듯이 어느 쪽도 폄하되어서 안된다. 세월이 더 흐르면 나 또한 박정희를 사면하리라.
지금은 김대중 O, 박정희 X, 요렇게 되어있지만 100년 후의 역사는 양자를 쌍벽 혹은 맞수 혹은 라이벌, 양웅, 이런식으로 기록할 것이다. 누구를 욕하든 누워서 침뱉기이기 때문이다.
법장, 그대의 가슴엔 사랑이 없다. 그대의 마음엔 자비가 없다. 오직 그대보다 한발이라도 위에있는 이를 끌어내리려고 달려들어 빤쭈벗기가미 매달리는 꼴불견을 연출하고 있음이다.
부처님도 그 당시엔 혁명아고 이단아고 반역자였다. 역사가 평가하는 것이다. 진리가 평가하는 것이다. 더 기다리지 못하는가?
[구름의 푼수짓]
남녀는 같은데 사회가 여성에게 이래라 저래라 해서 여자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보봐르다. 그렇다면 왼손잡이도 사회가 이래라 저래라 해서 왼손잡이가 되었느나뇨?
동물원의 호랑이는 운동을 안해도 근육이 산같고 우리 속의 돼지는 초식만 해도 살이 찐다. 지나친 환경결정론은 잘못이다. 근래의 학설은 점점 유전요인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를테면 동성애자가 되는 것은 유전요인에 의해 선천적으로 성적 타입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여성동무 일반의 푼수짓도 선천적이라는 결론이다.
모라가 하는 말은 들어보면 좋은 말이 많은데 같은 여성동무들이 잃어주기엔 슬프지 않겠는가? 누워서 침뱉기다. 그 글을 여자가 썼기 때문에 여성들이 먼저 부끄러워 할 것이다.
법장이 하는 말도 좋은 말이 많은데 불교신도가 들어주기엔 부끄럽지 않겠는가? 기독교도들이 법장의 글을 읽고 [음 중들은 어디가도 구제불능이군 맨날 저들끼리 쌈박질하고]
푼수란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보는 습관이다. 나는 이것이 환경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유전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고 말한다. 에헤헴, 에헴, 어흐흠, 켐, 고오얀~! 껄껄, 동창이 밝았는데 머슴놈은 상기아니 일었느나뇨뇨?
♤
[김대중 잘하고 있는가?] 이 물음은 동시에 [워드방 통신족 잘하고 있는가?]의 물음에 대응한다. 워드방은 여론을 나타낸다. 비교의 척도다. 여론보다 잘하면 위험하고 딱 여론만큼 하면 된다. 그런데 여론이 잘못하고 있다. 워드방 요즘 잘못하고 있다.
현문님, 어준님, 익스님, 보테님, 프로님, 시몬님, 하자님 등이 주도하는 워드방은 솔직히 실망스럽다. 중요한 문제로 제기했어야 할 강기훈 유서대필의 진실을 부각시키지 못했다.
철저히 짚고넘어갔어야 할 조선일보 문제도 그냥 넘어갔으며 양심수문제에 대해 흐리멍텅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고 북풍문제에 대해서는 토론실도 개설하지 못하고 있다.
오로지 김대중에 대한 조회수제일주의의 아부성 글만 판을 치고 있다. 문제를 제기함은 없고 여론에 편승함만 있다. 워드방 정신차려야 한다.
김대중의 오른쪽에 재벌과 기득권층이 버티고 있다면 그 왼쪽에 언론과 통신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볼짝시면 한겨레 홀로 왼쪽에 있고 모두들 오른쪽에 몰려있다.
통신족은 왼쪽에 서야 한다. 그곳에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변화해야 하며 그 변화는 세계수준이어야 한다. 우리의 정서와 의식과 윤리의 척도를 스웨덴 노르웨이 스위스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더 용기있게 말해야 한다.
물론 그들 서구 열국의 윤리가 절대선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먼저 그들을 추월하고 난 다음 인류문명의 방향타를 동아시아의 정서 쪽으로 끌고 오는 것이다. 그들보다 뒤져선 불능이다. 우리 이제 진실을 말하자. 또 김대중을 말하자.
[김대중 잘못하고 있다.]
취임직후 해야할 일은 비전과 전망을 제시하고 민족의 힘을 결집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은 노회하고 침착한 경륜이지 원대한 비전과 철학이 아니다.
IMF 현실에서 노옹의 경륜은 오히려 덕일수도 있다. 허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또 젊은이다운 비젼이다. 김영삼이 취임 초 한국병 치유, 신한국 창조, 세계화 등의 치기발랄한 비젼을 제시했을 때 나는 코웃음 쳤지만 인기는 올라갔다.
혹자는 김영삼의 취임초 인기절정과 김대중의 인기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엄청난 착각이다. 정반대다. 김대중은 얻을수 있는 인기를 못 얻고 있다. 오히려 죽쑤고 있다.
지금의 인사실패, 북풍혼란, 총리인준실패는 인기없다. 허나 오히려 잘하고 있다. 김영삼의 인기가 당돌한 호언장담의 언어 끝에서 나온 것이라면 김대중의 인기는 IMF해결 등 실무에서이다.
김영삼이 입에 발린 선전위주의 승부사라면 김대중은 행동위주의 해결사이다. 그는 실제로 문제를 해결한다. 그런 면에서 김대중의 정치대응은 노회하고 침착하며 잘하고 있다. 난 그게 불만이다.
만약 김대중이 참신한 인사로 동업에게 100점을 맞았다면 그건 진짜로 잘못한 일이 된다. 인사에 참신은 독이다. 참신한 인사란 인물좋고 평판좋고 일안하는 자다. 입으로 한몫, 얼굴로 한몫, 말로만 정승, 광나는 일은 앞장, 궂은 일은 복지부동.
김대중 지나치게 잘하고 있다. 그 잘함은 IMF 해결에 좋다. 그러나 우리에게 말거리를 안준다. 현재를 안돈함이 있을 뿐 미래를 열어감이 없다. 좌파들에게도 일거리를 챙겨주라.
김대중은 [국민의 정부] 이름만 지어놓고 아직 성격규정도 못하고 있다. 이는 참모를 쓰지 않기 때문이다. 새정권이 출범하면 전두환 때의 허삼수, 노태우 때의 박철언, 김영삼 때의 김현철 등 아부쟁이들이 허황된 구호들로 나팔수 노릇을 한데 비해 지금 그 나팔수가 없다. 김대중은 너무 선전을 안한다.
나팔을 불어야 한다. 비전을 제시하고 전망을 펼쳐보이며 장미빛 꿈을 심어주어야 한다. [민주주의와 경제의 동시발전] 이 얼마나 소박한가? 만약 아부 할줄 아는 참모가 있다면 틀림없이 [21세기 세계를 주도할 한국적 성공모델]로 포장해내었을 것이다.
나는 불만이다. 선전도 김영삼 같은 자가 하면 [헛되이 나팔을 불어댐]이 되지만 할줄 아는 자가 하면 다르다. 김대중은 좌 쪽의 엘리뜨를 발굴하여 참모를 보강해야 한다.
실무의 해결도 중요하지만 100년 앞을 내다보는 참모도 필요한 것이다. 보통은 아이디어 풍부한 참모가 헛된 소리로 나라를 말아먹는다. 그러나 그 잘못은 참모가 멍청해서가 아니라 주장이 용병하지 못해서다.
정치스타일은 두가지다. 총애하는 젊은 신하를 등용하여 인기위주의 정치를 하는 것(조광조를 등용한 중종)과 노련한 중신들을 활용하여 실무적으로 가는 것(중신들을 활용한 세종)이다.
보통 전자는 실패하지만 남음이 있고 후자는 성공하지만 남는거 없다. 중종의 개혁은 실패하였으나 조선왕조 500년의 철학적 기초를 닦았고 세종의 치적은 성공하였으나 역사의 진보와 상관없다.
진정한 영웅은 양쪽에 균형을 찾을줄 아는 이다. 김대중은 너무 후자에 치우쳐 있다. 김대중은 좌쪽의 엘리트를 고용하여 더 나팔을 불어야 한다. 그의 철학을 선전하고 야심을 펴보여야 한다.
♤¸ ¸중이당가요? 난 중삼인디~!
♤¸ ¸법장(法杖)이라굽쇼? 난 계도(戒刀)인디~!
♤¸ ¸재미없다구요? 내도 별 재미는 없는디.
♤¸ ¸우야든동 재미를 함 살리보입시다그려.
재미없는 책임이 꼭 이쪽에만 있는거 같지는 않으니 깐두루
가설라무네 그라이까네 거시기 머시기 차말로.
♤¸ ¸그렇구나. 법장님이 [민중불교]라는 화두를 들고 나왔
구나. 횡설수설 이판사판 자가당착 오리무중
완죤히 [이또이가튼소리하구인네] 인줄로만 알았더니
제법 법어가 다 나오는구먼. 좋소이다. (이또이님께는 미안)
♤¸ ¸법장님을 즐겁게 해드릴 의무가 /열사/에 있는 것은 아니네. 다만 법장님이 흥미를 끌 주제를 던지지 못하였을 뿐.
♤¸ ¸이제야 법장님이 [민중불교]라고 제법 화두씩이나
들고나온줄 알겠다. 그런데 그게 화두가 되나?
♤¸ ¸나는 호국불교나 민중불교나 해방신학이나 회교원리주 의나 다 정치색의 오염으로 보고 인정 안한다.
♤¸ ¸종교가 현실에 초연할 이유도 없지마는
현실에 개입하는 방법에 있어서 종교 자체를 수단으로 할 때
그 순간부터 종교의 타락이 시작된다.
※ ※ ※
말했듯이 인간의 인식에는
[1. 진리 2. 철학 3. 순수과학 4. 응용과학 5. 문화일반]
의 다섯가지 범주가 있다.
1의 진리와 2의 철학은 제1철학 내지 형이상학이요
3,4,5번은 제2철학 내지 형이하학이다.
나의 이러한 분류법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런 식의 학문구분은
플라톤 때부터 있어온 것이다.
왜 이러한 구분이 필요한가 하면
위에서 순서가 앞선 부분이 그 아래를 종속시키기 때문이다.
즉 하위그룹인 문화나 과학에서의 성과가 그 상위단계인 진리나 철학 범주의 다른 결론에 위해 충분히 뒤집어지기 때문이다.
[위는 아래를 뒤집을수 있지만 아래는 위를 뒤집을수 없다. ]
그래서 필요한 것이 사상체계이다.
사상은 진리, 철학, 과학, 문화를 일체화시킨 개념이다.
고로 사상은 그 어떠한 사상이든 진리로부터 출발한다.
이 점 다윈의 진화론이라던가 혹 정신분석학이라던가
혹 정신과학의 여러 삿된 주장이 만들어놓는
폐해들에 비견된다.
예를 들면 다윈의 주장은 위 전개에서 순수과학에 해당한다.
그 위와 그 아래가 없다.
즉 진화론은 사상이 아니라 과학인 것이다.
고로 다윈의 진화론을 응용한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잘못이다.
마찬가지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응용하는 마광수의 성해방 론은 잘못이다. 동시에 기(氣)를 함부로 해석하려드는 정신과학 의 삿된 태도들도 잘못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어떠한 주장이 갖추어진 사상일 때는
그것을 해석하여 그 하위분야인 응용과학 내지 문화일반에
적용함이 타당하나 사상이 아닌 순수한 과학성과일 때는
해석도 적용도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 오류가 마르크스주의이다.
그런데 종교는 진리로부터 출발하므로 사상이다.
종교는 어떠한 종교든 진리로부터 출발하여 문화일반에
개입한다. 그러할 권리가 종교에 있다.
문제는 종교의 해석 내지 변용이 이러한 사상의 원칙에 어긋난 다는 점이다.
종교가 현실에 개입할 때는 그 진리의 이름으로 개입하지
그 아래인 과학이나 교리로 개입하여서 아니된다.
호국불교나 민중불교나 혹 해방신학이나 회교원리주의나
마찬가지 맨 먼저 진리가 희생된다.
무제 때 선비 원고생(轅固生)은 말하였다.
[바야흐로 학문의 길은 어지럽혀지고 속설이 크게 유행하고 있소. 이대로 가면 진정한 학문의 전통은 마침내 사설(邪說) 때문에 사라지고 말 것이오. 곡학아세하여 세상의 속물들에게 아부하여서는 아니되오.]
이것이 사상이다.
생명은 과연 진화하였나?
종의 특성을 결정하는 것은 유전인자이므로
화석은 진화의 정황증거일 뿐 직접증거로는 볼수없다.
진화의 개념은 종이
어떤 종류의 외부간섭도 없이 내부의 어떤 힘에 의해
더 발달된 다른 종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화석이 주목을 끌던 시점은
유전정보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화석이 곧 진화의 증거로 채택되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나
유전정보가 종의 핵심임이 규명된 이상
화석은 증거능력이 없다.
화석이 증명하는 것은
1억년 전 혹은 10억년 전에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 종이
지구상에 존재했었으며 그 종들은 지금의 생명들보다 더 원시적 인 종이었다는 것 뿐이다.
그러한 변화가 진화이냐 아니냐의 가름은
그 변화가 종의 내부요인에 의해 일어났느냐 아니냐에
달려있다. 이를테면 외계인이 종을 지구로 가져왔다든가 하면 그것은 진화가 아니다. 그런 예외적인 경우는 얼마든지 가설을 세울수 있다.
거지같은 북풍소동.
작금의 거지같은 북풍소동을 보고 느끼는 것이 있어야 한다.
과연 안보니 반공이니 하는 거룩한 이름들이
그만한 가치를 가졌을까?
권영해와 그 일당의 김정일과 연계한 공작행위는
열명의 간첩, 100명의 좌익사범보다 더 유해하다고 본다.
깐수나 고영복 같은 간첩 몇 명이
북한에 무슨 대단한 정보를 제공하겠으며
사노맹 백태웅 등이 암약하여 국익을 저해해보았자
겨우 우리내부의 경각심만 키워주었지 북한에 실익은 없다.
그러나 권영해의 대북공작은
북한의 고위간부 십수명을 총살형에 처하게 하므로서
김정일의 이를 갈게하고 그의 정권을 더욱 공고하게 하며
그 결과 우리는 경수로 비용을 더물어야 하고
북한에 강냉이 쌀 다갖다 바쳐야 한다.
안기부가 대북공작에 승전보를 울릴수록
손해보는 것은 이나라 백성이다.
이제 정신을 차려야 한다.
안보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
우리가 좌익사범을 처벌하고 간첩을 색출할수록
그 비용은 증가하며 경제성장 민주발전에 주력할수록 그 비용은
줄어든다.
모름지기 정보라는 것은
그 정보를 확보하고 있으므로서 적의 행동반경을 축소시킨다는데 의미가 있지 비밀공작을 수행하여 적을 파괴, 교란시키므로서
적에게 패배를 안겨준다는데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비밀전쟁은 적으로 하여금 우리 내부를 더욱 공격하게
하기 때문이다.
술이 새나가는 헌 나무통의 누수를 막는데 드는 비용이
차라리 새 오크통을 하나 더 엮는데 드는 비용보다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름지기 정보전쟁은 낡은 건물에 방수작업 같이
되어선 안된다. 그 사이에 새건물을 두어채 더 짓고 그리로 이사가는게 현명하다.
박노해 등의 사면주장은
누수가 되는 낡은 건물은 내버려 두고 차라리 새집을 짓자는 주장이며 사면반대는 100년 지난 낡은 건물의 방수작업을 위해 구들장을 뜯자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재야의 양심수 사면 주장에 국민회의가 귀기울여
석탄일 사면건의를 하자 썩은 언론들이 일제히 반대주장을
내놓았다. 그걸 보고 천리안 워드방이 암말 안하는데
느끼는건 천리안 질이 많이 떨어졌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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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안보와 나쁜 안보.
허생이 돈벌기는 쉽다.
제주도에 가서 갓, 망건 엮는 말총을 독점해버리면 된다.
정보시장에도 그러한 길목, 혹은 병목이 존재한다.
그 핵심을 장악하는 것이 정보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이다.
우리는 간첩을 색출하고 좌익사범을 잡음으로서
그 길목을 지키려 한다. 그럴수록 더욱 그 길목이 핵심적인 경혈이 된다. 어리석기 짝이 없다.
허생과 경쟁해서는 겨우 말총값을 올려놓을 뿐이다.
우리는 현명해져야만 한다.
현명한 방법은 시장규모를 키워놓는 것이다.
시장이 커져버리면 길목의 수가 증가하고 길목이 수시로 변하며
하나의 길목이 전체시장 판도를 좌우할수 없게 된다.
이때가 허생이 망하는 시점이다.
옛날에 이나라는 소수 경상도 엘리뜨가 좌우하고 있었다.
간첩이 그 엘리뜨그룹으로 뛰어들어 그들과 인맥을 맺어놓으면
길목을 장악한 셈이 된다. 군부의 엘리뜨는 하나회다.
거기에 간첩이 뛰어들 경우를 생각해보라.
경제성장과 민주발전은 그 엘리뜨그룹을 없애버리므로서
병목을 없이하고 간첩을 활약하지 못하게 한다.
이나라의 정보를 극소수의 서울대인맥과 경북고인맥이 장악하고 있을 때 간첩이 활약하기 쉽다. 그곳이 길목이고 병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권교체의 지금 간첩들은 그동안 구축해온 인맥이
쓸모없게 되었다. 더 이상 서울대인맥 경북고인맥이 정보흐름의
길목이 아니게 될것이기 때문이다.
정권교체는 간첩 100명을 잡는것보다 더 좋은 안보이다.
우리는 안기부가 와해되었다고 걱정하지만 실은 북한의 간첩망이 무너진 것이다. 간첩이 침투한다면 안기부부터 침투할것이 뻔한 것 아닌가? 대표적인 간첩이 권영해로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진실을 말하자.
모든 것이 허구였다는 것을 고백하자.
양심수의 사면은 이나라의 정보시장에서 그 길목과 병목을
제거하므로서 간첩의 활약을 무익하게 한다.
동독은 서독에 수만명의 간첩을 심어두었지만
아무 얻은 것이 없다.
정보의 효용가치는 그 정보가 차단되고 왜곡되고 그 사회가 경직되는 정도에 비례한다. 독재의 정도와 간첩의 가치는 비례하는 것이다. 민주국가에 간첩은 얻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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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네가지의 근원적 힘이 존재한다.
[중력, 강력, 약력, 전자기력]들인데 나는 이것이 잘못된 분류이며 여기에 하나나 둘이 더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강력과 약력은 같은 종류의 힘이어서
전기에너지와 자기에너지를 하나의 전자기력으로 보듯이
같은 걸로 분류해야 되는게 아닌가 한다.
풍력, 인력, 척력, 구심력, 압력 많지만 허튼 구분이고
적합한 분류법이 필요하다. 물질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다섯가지 양상을 가지므로 이에 따라 다섯가지의 에너지가 있다.
분류기준은 집적정도이다.
집적은 곧 압축이다. 하나의 공간에 많이 들어간 정도를 말한다.
우선 량/에서 자연의 물리력이 있다.
미는 힘, 타격의 힘, 마찰력, 폭발력, 압력 들이다.
이들 에너지의 특징은 직접 이용할수 있되 저장, 보관, 운반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노출되어 있으며 가만히 두면 흩어 없어져 버린다.
우리는 이 에너지들의 운동방향을 전환시켜 이용하거나 차단 할수 있을 뿐이다. 이들은 가장 낮은 단계로 존재하므로 하나의 범주로 통일하여 [제 1의 에너지]라고 부를 수 있다.
다음이 운동/에서 열, 연소, 빛 등 화학에너지이다. 석유, 석탄의 연소, 각종 화학반응, 빛, 열, 들은 어딘가에 가두어져 있다가 물리반응에 의하여 촉발된다. 문이 열리면 쏟아져 나와 제 1의 에너지로 변한다.
우리는 이를 차단, 혹은 촉발하여 에너지 형태를 변경시키므로서 이용, 저장, 보관, 운반할수 있다. 이를 하나의 범주로 묶어 [제 2의 에너지]라 부를 수 있다.
다음 힘/에서 전기와 자석의 전자기력이다. 전자기력은 화학에너지보다 더 안정된 형태로 존재하며 가두어져 있고 문을 열어 이를 꺼집어내었을 때 열, 빛, 등 화학에너지로 변한다.
우리는 전자기기를 이용하여 전자기력을 1차 제 2에너지로 변환시키고 재차 이것을 제 1에너지로 변환시켜 이용한다. 전자기력을 그대로 이용할 수는 없다.
전기곤로에 의해 코일이 달구어져 열을 내는 화학반응은 제 2에너지로의 변환이며 열에 의해 음식이 조리되는 것은 제 1에너지로의 변환이다. 전자기력을 우리는 제 3의 에너지라 부를 수 있다.
다음이 입자/에서 강력과 약력 등 소립자 사이에 존재하는 핵력이다. 유도전류의 방법으로 강력과 약력들에서 전자기력을 유도해낼수 있다.
에너지는 본래 소립자들 사이에 존재하는데 그 일부가 튀어나가 전기나 열 또는 물리효과로 변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핵발전이다. 그러나 핵발전은 핵력을 그대로 이용하는게 아니라 더 낮은 형태인 제 3의 에너지로 또 제 2의 에너지로 변화시켜서 최종 제 1에너지 상태에서 이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힘을 [제 4의 에너지]라 부를 수 있다.
마지막 질/에서 [제 5의 에너지]는 공간에너지이다. 이는 아직 규명되지 않았지만 만약 규명되면 1차 제 4의 에너지인 핵력으로 변하고 다시 이것을 전기로, 열로, 물리력으로 변화시켜 사용하는 것이지 제 5의 에너지를 곧 이용할 수는 없다.
※ ※ ※
에너지를 [전자기력, 강력, 약력, 중력]의 넷으로 구분하는 것은 모호하며 적합하지 않은 방법이다.
개념의 혼란이 있을수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물질의 다섯가지 전개양상 [질, 입자, 힘, 운동, 량]에서 세 번째인 [힘] 만이 에너지이며 따라서 전자기력만 순수한 에너지이다.
제 1에너지는 곧 량이며, 제 2에너지는 운동이고, 제 3에너지는 힘(에너지)이며 제 4에너지는 입자이고 제 5에너지는 질이다. 우리가 운동에너지라고 말할 때 실은 운동에서 량으로의 변환이다. 즉 제 2에너지가 제 1에너지로 변환하는 것을 우리는 운동에너지라 말하는 것이다. 이를 [제 2 에너지변환]이라 이름할수 있다.
[여기서 나는 에너지와 에너지변환을 구분한다.]
에너지가 물질존재의 집적도에 따른 구조적 불안정성을 의미한다면 에너지변환은 특정의 집적도를 가진 에너지상태에서 더 낮은(안정된, 엔트로피가 높은) 에너지 상태로 변화하는 것이다.
위치에너지는 [제 4 에너지 변환]이다. 내연기관이 폭발하여 피스톤을 밀어내는 것은 [제 3 에너지변환]으로서 일종의 전기반응으로 3에너지가 2에너지로 변환하는 것이며 바퀴가 지면을 밀어내는 것은 2에너지가 1에너지로 변환하는 것이다.
우리가 운동에너지라고 말하는 것은 엄밀한 과학용어가 못된다. [제 2에너지변환]이라고 해야 학명이 된다.
에너지는 최종적으로 물리반응을 보여야 비로소 에너지이며 화학반응(예를 들면 연소燃燒)은 그 자체로 에너지가 아니며 그 화학반응의 결과 생성된 열이나 빛이 재차 물리적 효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에너지이다.
전기(전기에너지)가 곤로의 코일을 가열하고(제3에너지 변환), 그 열이 전도되어 냄비의 고기를 익히고(제2에너지 변환), 고기의 세포벽이 파괴되어야(제1에너지변환) 에너지인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항상 동시에 일어나므로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에너지라고 착각하지만 실은 한가지(물리효과), 두가지(운동에너지), 세가지(전기에너지), 네가지(핵에너지), 다섯가지(공간에너지) 에너지 변환이 동시에 그러면서 순서대로 일어난다.
※ ※ ※
압력, 폭발력, 팽창력, 마찰력 들은 [제 1 에너지변환]에 해당한다. 제 1에너지인 물리력이 물리효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모두 미는 힘이며 단 하나의 방향으로만 일한다. 고로 방향성 자체가 존재하지 아니한다.
인력, 척력, 원심력, 구심력 등은 [제 2 에너지 변환]에 해당한다. 제 2에너지인 화학에너지가 제 1에너지인 물리에너지로 변하는 것이다. 제 2에너지 변환은 열의 전도(고온-> 저온) 빛의 복사(어둠-> 밝음) 처럼 일정한 방향성을 두고 일방통행한다.
○ 제 1 에너지(물리력) ▶ 제 1 에너지 변환(물리효과)
→ 에너지의 소모(무방향)
○ 제 2 에너지(화학에너지) ▶ 제 2 에너지 변환(운동에너지) → 에너지작용(일방향)
○ 제 3 에너지(전기에너지) ▶ 제 3 에너지 변환(일반에너지)
→ 에너지 발생(쌍방향의 장)
○ 제 4 에너지(핵에너지) ▶ 제 4 에너지 변환(위치에너지)
→ 에너지 보존
○ 제 5 에너지(중력에너지) ▶ 제 5 에너지 변환(공간에너지)
→에너지원
풀이하면 제2에너지인 화학에너지(열, 빛, 이온)가 제1에너지(압력, 폭발력)로 변환할 때 그 변화하는 성질을 우리는 운동에너지라 부르는 것이다.
자석이나 전기의 힘은 제3에너지이다. 우리는 전기나 자석의 힘을 곧 이용할수 있는 것으로 믿지만 모든 전자기력은 그 동력의 발생과정에서 반드시 분자단위의 구조변화를 유발한다.
건전지에서는 가시적인 화학적변화(이온의 이동)를 관찰할수 있다. 구동모터의 회전에서 전하의 건너뜀 자체가 화학에너지이다. 열의 전도, 전기(이온)의 전도, 빛의 복사가 다 화학에너지이다.
태양 내부에서 진행되는 수소핵융합은 제4에너지인 핵에너지이며 핵에너지가 빛과 열을 내는 것은 전기에너지다. 즉 행융합이 바로 빛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전기반응의 과정을 거쳐 빛으로 변하여 지구로 복사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의 의미는 지향성의 파악이다.
○ 제1에너지인 물리력은 항상 일방적이다. 미는 힘은 있되 당기는 힘은 없다. 1에너지에서 모든 힘은 압력의 형태로 존재한다.
○ 2에너지에서 모든 힘은 일정한 방향성이 존재한다. 즉 극성을 가지는 것이다. 빛에도 이온에도 자기에도 플러스와 마이너스, 구심과 원심, 인력과 척력의 방향성이 존재한다.
○ 3에너지에서 모든 힘은 인력과 척력의 양방향을 동시에 가진다. 즉 자기장, 중력장의 장을 가지는 것이다. 2에너지의 운동에너지는 인력이든 원심력이든 장이 없다. 장은 대립된 방향의 두가지 힘을 동시에 가지는 것이다.
○ 4에너지에서 힘은 고유한 질량을 가진다. 1,2,3에너지는 단순한 전달경로에 불과하므로 질량의 절대적 증가, 감소가 없다. 4에너지에서 에너지작용은 실질적인 증가, 감소를 나타낸다.
물질존재는 집적도에 따른 고유한 질서를 가지며 그 질서의 변화가 시, 공간의 변화일 때 5에너지이며 이는 곧 태초의 천지창조, 빅뱅이다.
변화가 소립자 단위에서 일어날 때 4에너지이며, 이온 단위에서 일어날 때 3에너지이며, 분자단위에서 일어날 때 2에너지이며, 물체단위에서 일어날 때 1에너지이다.
즉 어떤 물질이 있을 때 그 물질은 곧 제 1의 에너지이면서 동시에 제 2의 에너지이고 또 3,4,5,의 에너지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아무런 도구없이 곧 관찰되는 제 1의 에너지가 1일 때 한 차원 높여서 2의 에너지이면 에너지량은 그 100여 배, 제 3의 에너지이면 그 100배의 100배 비례로 증가하여 제 5의 에너지일 때 가늠할수 없는 엄청난 에너지가 된다.
즉 1키로그램의 돌멩이가 가진 무게의 에너지(제 1에너지)를 1로 볼 때 그 돌멩이형태를 파괴했을 때의 열은 대략 그 100배, 그 열원이 되는 전자기력을 순수하게 에너지화하면 그 100의 100배 비례로 늘어나 1키로그램을 순수하게 에너지화시켜 질량을 0으로 만들면 에너지는 원자폭탄이 내는 에너지는 비교도 안되게 가늠할수 없을 정도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법칙 제 2에너지를 제 1에너지로 전환할 수는 있으나 제 1에너지를 제 2에너지로 전환할수 없다. 엔트로피의 법칙이 작용하여 높은 단계의 에너지를 낮은 단계의 에너지로 변화시킬수는 있어도 그 역은 없다.
제 1 에너지 - 인간이 직접 이용할수 있는 모든 에너지 형태.
제 2 에너지 - 제1에너지로 변화시킬수 있는 에너지 형태. (열)
제 3 에너지 - 제2에너지로 변화시킬수 있는 형태(전자기력)
제 4 에너지 - 제3에너지로 변화시킬수 있는 형태(원자력)
제 5 에너지 - 제4에너지로 변화시킬수 있는 형태(공간에너지)
물질은 그 자체로 곧 에너지다. 그러나 제 5의 에너지 형태로 존재한다. 이것이 강력한 힘을 받아 붕괴될 때 제 4의 에너지 곧 핵력으로 변하며 전기나 자기는 이 핵력의 일부 자투리 부분을 떼어내어 쓰는 것이다.
원자폭탄이 폭발하면 소립자들의 극히 일부가 전기로 변하며 그 전기의 일부가 열로 변하며 그 열의 일부가 건물을 파괴시키고 생물을 살상한다. 즉 높은 단계의 에너지가 곧 우리의 눈에 보이는 물리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낮은 단계의 에너지로 변하며 더욱 낮아지고 낮아져서 최후에 물리반응을 낳는 것이다.
제 5의 에너지는 빅뱅 순간에 우주를 창조한 근원의 힘이며 태초 이후 4,3,2,1의 에너지로 변한 적은 있어도 거꾸로 제 1에너지인 물리력이 2,3,4,5의 에너지로 변한적은 없다.
왜냐하면 제 5의 에너지는 물리공간 그 자체이므로 만약 엔트로피를 거슬러 에너지가 높은 단계로 이동하면 우주공간이 축소되어야 하는데 우주는 지속적으로 팽창해왔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제 1에너지로 변환된 상태에서만 인간이 이용할수 있으며 그 이상의 단계는 직접 이용할수 없다. 인간이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은 제 2, 제3의 단계를 제 1의 단계로 하향시키는 것이다. 우주공간 안에서의 모든 변화는 이 에너지의 하향안정화이다.
에너지는 2단계에서 1단계로 변화하는 과정에서만 이용되므로 최후에는 모두 이용할수 없게 된다. 우리가 이용하는 모든 에너지는 제 1의 에너지이다. 제 5의 혹은 4의 에너지는 곧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낮은 단계로 떨어뜨린 후 이용하는 것이다.
인생론 - 어떻게 살것인가?
스승으로서의 삶 - 지성의 삶, 극진한 삶, 본보기가 되는 삶
구도자로서의 삶 - 자유로운 삶, 추구하는 삶, 도전적 삶.
답은 이렇게 나와 있다.
모름지기 삶은 똑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젊었을 때는 구도자로서의 삶의 자세를 가질 것이며
나이들어서는 스승으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바른 삶이다.
나는 노야(老爺)가 아니다.
나는 인생의 구도자이다.
내게 중요한 것은 도전과 모험, 체험하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위한 자유이다.
나의 목적은 신과 대화함이며
나의 삶은 신에게 내 인생의 의미를 질문하는 방식이다.
그것이 나의 구도이다.
그대가 구도(求道)하지 않더라도
환경이 그대를 일깨워 구하게 만들 것이다.
그대가 스승이 되고자 아니하더라도 누군가가 그대를 모방하므르서 그대에게는 피할수 없는 스승의 역이 주어진다.
혹 그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도전도 싫고 모험도 싫고 자유도 싫다.]
그러한 자기부인은 곧 인격성의 부인, 존엄의 부인으로 이어져서 인간이 아니게 된다. 죽음이다.
생물학적으로 죽지 아니하더라도
정신이 죽으면 곧 죽은 것이다.
인간은 왜 구도하는가?
부끄러움을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문화이며 당신에게로 옮아와서는 지성이 된다.
[인생은 문화로부터 출발한다. ]
50억이 사는 별에는 50억의 삶이 있고
그 하나하나 가치없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사회적 평가는 별도이다.
가치있는 삶이 있고 무가치한 삶이 있다.
타인에게 유익한 영향을 끼치는 삶은 가치있으며
유해한 영향을 끼치는 삶은 가치없다. 이것이 사회적 평가이다.
우리는 서로 영향을 미치며 영향 받는다.
그것을 문화라고 부른다. 삶의 가치는 다만 문화의 가치이다.
나라마다 고유한 문화가 있다.
각각의 문화는 각각의 고유한 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개별적 문화들은 통합되어 인류문화를 이루며
거기엔 우월한 문화와 열등한 문화가 있다.
주류문화가 있고 변방문화가 있다.
인디언 문화가 아프리카 문화보다 우월하다는 근거는 없다.
그러나 인류문화는 서구문명이 주류문화이며
인디언문화나 아프리카 문화는 변방문화다.
주류문화는 변방문화에 문화적 주제를 제공하고
변방문화는 주류문화에 문화적 소재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양자는 교감한다.
변방문화는 언제나 소재를 제공할 뿐이다.
한국문화는 세계문화에 소재를 제공하고 주제를 제공받는다.
그것이 문화의 열등함이다. 한국문화는 열등하다.
그 부끄러움을 앎으로부터 문화적 자각은 시작된다.
페미니즘이나 환경주의는
세계문화가 한국문화에 주제를 제공한 것이다.
사물놀이나 영화 씨받이는 한국문화가 세계문화에
소재를 제공한 것이다.
이것은 불평등한 것이며 종속적인 것이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 라고 말한다면
한국적 소재라는 반찬을
세계보편적 주제의 그릇에 담아내는 격이다.
반찬은 1회용으로 소비되고 그릇은 재활용된다.
소재(반찬)를 제공하는 쪽은 손해보고 주제(그릇)을 제공하는
쪽이 이득을 본다. 그것이 문화적 일방통행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득보고 사는 것이다.
소재를 제공하는 약자의 거래를 하지 말고 주제를 제공하는
강자의 거래를 트자는 것이다.
1회용에 불과한 반찬을 제공하는 억울한 장사를 하지 말고
두고두고 이용해 먹는 그릇을 제공하는
남는 장사를 하자는 것이다.
한국영화는 늘 소재를 제공하려 하므로
소재고갈의 한계를 만난다.
헐리우드 영화는 늘 주제를 제공하므로
소재는 남의 나라에서 자꾸만 훔쳐온다.
그들은 결코 바닥나지 않는다.
인생도 이와 같은 것.
삶은 사회와 거래를 트는 것이며
소재를 제공하는 자는 종속되고 이용당하며
주제를 제공하는 자는 재활용하고 이용해먹는다.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활과 인생]
나는 지금 왜 밥을 먹는가? 행복을 위해서다.
나는 지금 왜 음악을 듣는가? 행복하기 위해서다.
행복은 밥을 먹는 이유, 음악을 듣는 이유 등
개별적 행위의 이유가 될지언정 삶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행복은 생활(生活)의 이유가 될지언정
인생(人生)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인생은 개별적 행위들을 통합한 전체개념이다.
왜 사는가?
문화란 무엇인가?
이토이님이 문화를 [기록된 자료]라고 하시는데 뜬금없다. 기록된 자료는 [문화재]가 아닐깝쇼?
문화란 생활양식이죠. 인간생활을 사회개념으로 파악한게 문화, 곧 한 개인의 삶을 생활이라고 한다면 전체 사회를 한 생명으로 보아 그 사회의 삶을 문화라고 하는 거.
문화의 문(文)은 정보(情報)를 의미하고 화(化)는 사회화(社會化)를 의미한다. 정보화인 동시에 사회화인데 즉 개별적 존재인 인간들이 정보를 공유함으로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삶의 양식을 가지게 되는 거. (문화 = 정보를 통한 사회화)
고로 문화란 사회적 성격을 가져야만 한다, 정보여야만 한다는 두가지 근간을 가진다. 사회다수를 포함할수록 고급문화이고 주류문화가 되며 반사회적일수록 비주류의 변방문화가 된다.
정보이므로 고급정보일수록 고급문화이고 저급한 정보는 하위문화가 된다. 이것이 본질, 문화는 차별성, 다양성, 개성에서 출발하여끝없이 사회통합과 고급화를 지향하는 성질을 가진다.
한국문화의 후진성은 첫재 한국이 생산하는 정보가 고급정보가 아니다. 둘째 사회통합적이지 않다. 즉 외국인을 포용하지 못한다는 거. 정보는 유통성(호환성)과 차별성을 근간으로 하는데 전자는 주제고 후자는 소재. 유통성이 곧 사회성.
문화는 정보이므로 문화는 정신문화다. 용기문화니 규범문화니 하는 구분은 문화보다는 문명(文明)이 타당한 거. 문명은 하드웨어문화는 소프트웨어, 용기는 하드이므로 용기문화는 좀 어색하다.
문화의 성질은 끝없이 서로 차별화하면서 동시에 일반화하는 것그 과정이 고급화이다. 먼저 서로 다른 측면을 발굴하고 거기서 공통된 성질을 나눠가지려면 고급화해야만 가능하다는 것.
문화창조 문화발전 문화공유
다양성과 개성에서 === 고급화 ===> 보편성 일반성
라디오를 하나 만들었는데 그 디자인이나 음질에서 다양할 수가 있으나 고급화하려면 디자인과 음질을 고급화하면 결국은 같아져버린다. 즉 모든 라디오가 비슷해지는 거죠.
자동차도 마찬가지, 오만가지 자동차가 있지만 최고급 자동차는 어느나라를 막론하고 비슷하다. 음식도 가장 맛있는게 중국음식이니까 고급을 추구하다보면 결국은 다 중국요리를 먹어야 된다.
문화는 사회화되어야 하고 이것이 발전, 사회화는 모든 사람의 입맛에 맞추는 것, 모든 사람의 입맛에 맞는 것은 중국요리, 결국 가장 고급한 것을 추구할수 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모든 사람의 입맛에 맞기 때문이죠.
문화는 정보이므로 차별화되어야 한다. (다양성, 특수성 존중)
문화는 사회화이므로 호환되어야 한다. (보편성, 일반성 추구)
문화는 차별성 => 호환성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고급화된다.
이것이 문화발전의 1사이클입니다. 문화는 또 다른 어느곳에서 차별성을 발굴하고 그것이 소재가 되며 고급화해가는 과정에서 인류모두가 공유하게 되죠.
제가 논하려는 것은 그 고급화 과정입니다. 그래서 심미안이 필요한 것, 저급과 고급을 단박에 알아낼수 있는 것이 심미안. 심미안을 가진 이가 지성, 스스로 보석이 되는 것.
[작은 인생 아름답게 살기]
약간 김이 빠졌지만 뭐 지성(知性)이니 문화(文化)니 심미안(審美眼)이니 하며 하려던 말은 이런 것이었다.
[[[ 삶을 화가의 그림이나 가수의 노래처럼 하나의 작품으로 보아 예술에서 미(美)를 구하듯 삶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자. ]]]
행복한 삶이 곧 아름다운 삶은 아니다. 해피엔딩이어야 영화가 아니듯이. 비극에도 미(美)는 있다. 예뻐야만 그림이 아니고 많이 팔려야만 문학이 아니고 작품성이 평가되고 예술성이 평가되듯이 인생에 있어서도 깊이가 평가되어야 하리라.
인생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본다면 인생의 작품성은 곧 지성의 측면이 아니겠는가? 심미안으로 발견되리니.
미학 - 인생에서도 근접도, 완성도, 균형도, 속도, 정확도의 미학적 가치는 평가되어야 하리라.
근접도 - 신에게 얼마나 다가갔는가?
신을 믿는다면 신, 신을 부정한다면
환경, 역사, 자연, 존엄이 곧 신일테지
완성도 - 자기자신의 삶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
지향과 지양, 생의 목표점. 의식, 추구하는 바.
이념적 태도. 인생의 제목.
균형도 - 자아(自我)와 타자 사이에서 공정하였나?
자신과 타인, 이웃과 사회, 도덕과 권력,
정신과 물질 사이에서 균형추구.
속도 - 삶에서 게으르지 않았나?
비관, 냉소, 도피, 회피는 인생의 태만이다.
사랑, 낙관, 참여, 긍정, 책임은 인생의 부지런함.
정확도 - 삶에서 무엇을 획득하였나?
입증될만한 가시적 성과, 성공, 승리, 출세, 행복.
그리하여 그대의 삶에 얻어낸 행복과 성공이 있다면 그것은 미학적 정확도라 할 것이다. 정확도란 그림으로 치면 예쁘게 그린 것이다.
또 그대의 삶에 낙관 긍정 도전 참여 사랑이 가득하다면 미학적 속도의 획득이다. 속도는 그림으로 치면 [곱다]라고 표현될 부드러움의 질감이다.
더하여 갖추일 것이 편벽되지 않는 중용(中庸)이다. 미학적 균형도는 다른 말로 앙상블이다. 그림으로 치면 구도가 맞는 것이다.
완성도는 인생의 주제이다. 제목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대의 삶은 무엇을 추구함인가? 그림으로 치면 주제(제목)를 구현함이다. 내용이 맹탕이 아닌 메시지가 있는 그림의 성공이 완성.
근접도는 근원으로의 회귀이다. 삶이란 무엇인가? 신화 대화하는 내 나름의 방식이다. 나의 삶은 신과 소통하는 나의 언어, 그것이 전부, 신과 통했다면 1초를 살아도 성공이요 통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살아도 벌레의 생태일 뿐이다.
예쁘게 살기와 곱게 살기, 멋있게 살기.
예쁘다 - 눈 코 혀 귀로 지각되는 것의 미(美) = 수동적 감각
곱다 - 운동, 움직임, 질감으로 접촉되는 것의 미 = 능동적 감각
멋있다 - 의미있는 것, 판단되는 것, 생각하게 하는 것, = 지적 유혹의 미(美)
박살이님이 박살을 내버리는 구먼 .
부가가치세 논쟁이랍시고 하는거 보이
참말로 어이가 없구만..기냥 사전 찾아보머 되는거 갖고
몇장씩이나 논문들을 쓰고 안자서 차말로 ...아이구 두야...무식한 엉아가 간단히 한마디로 가르쳐 주께.
부가가치세란 소비세로서 최종소비자가 소비한 만큼 세금을 내는 것인데 세금내기 싫으면 소비를 안하면 되니까 민주적인 세금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여. (나는 거의 부가세를 안냄...소비를 안하고 사니까..에헴~!)
근데 의료행위나 법률서비스 같은 것은 소비가 아닝께로 부가세를 내머 안돼재요. 통신요금 전화요금에도 부가세가 나오는데 이건 모순이여.
여그는 소비가 아닝께로 세금을 붙여서 안되는데 정치하는 자슥들이 한푼이라도 더받아묵을라고 세금을 매기는 거여. 의사가 부가세를 내면 결국은 환자가 내게 되는 것이여. 그만큼 치료비에 부가되니까. 환자가 왜 세금을 내여? 소비한 것이 아닌데.
부가세개념은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를 위한 비용조달인데 사회간접자본을 이용한 쪽이 세금을 내는 것이여. 그러니께로 소비하는 것이 간접적으로 사회간접자본을 이용했으니께로 세금을 더내서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하시라 이거지 모.
쉬운 것을 왜 어렵게 설명할라 그라까이?
구름이 맹키로 게나 고동이나 다 택시하면 범죄만연, 도로정체 등 감당못하는 일이 생기재요. 그러니까 택시영업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가용영업자가 합법적으로 불법영업을 하게되는 것이여. 통제방법이 없으니까루.
즉 전업 택시기사가 아니라 출퇴근시간에 한두시간 반짝영업하는 부업택시기사가 출퇴근시간에 총출동해서 도로를 꽉 막아분다카이. 그라머 안돼재요.
택시기사 시험을 엄청 어렵게 해서 기초외국어(영, 일, 불어) 필수, 도로관계법 숙지, 관광안내원 급의 관광지식, 들을 테스트 해야 된다니까루.
예를 들어 경주에서 택시영업을 할라치면 경주의 모든 문화재에 대한 전문가급의 지식을 가지구 있어서 손님에게 관광안내를 해줘야 한다 이거지.
조만간 택시기사 시험이 엄청 어려워지는 날이 올거구만.
♠
쪼삣한 아이씨보다 더 쪼삣한 오반 아이씨~!
사전도 잘 찾아보고 요모조모 부스럼도 잘 찍어내는군여.
그라머 누가 똑똑하다 캅니꺼? 귀엽다 카재 ^ ^;
나는 옛날부터 3반이나 4반과 친하고 5반 애들과는 안친했지만
정권도 바뀌고 했으니까 뭐 좋소이다 그려.
어렵게 사전찾고 그라지 말고 쉽게 가입시더,
여그는 농사꾼 농장이라 사전이고 뭐고 엄써여.
경운기하고 거름하고 그런게 전부여. 소비가 어떻고 용역이
어떻고 그칸다고 누가 먹티난다 캅니꺼?
치사빤쭉이라 그카재.
말트집 하지말고 본질을 시비해 보쇼.
개똥도 약에 쓰면 약이지만 그런 약을 팔면 돌팔이라고.
상대가 어떠한 의미로 그 언어를 사용하는지에 대한
헤아림이 없다면 초딩이재요.
또한 오반님을 위하여는
정조 때 이문원 대감의 절구 한꼭지를 던져부림.
알각달각 등남산
승지참판 영감래
언문진서 섯거작
시비자는 황견자
야밤새벽 또접속
게나고동 열사래
한글영문 섯거작
시비자는 손오반
엄밀하게 말하면 의사나 변호사에게도 부가세를 내게 하고
대신으로 가계(가정)도 하나의 법인처럼 취급하여
병원비나 법률서비스비용은 부가세환급을 받아야 한다.
병원비는 공장에서 원자재를 구매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계에 일일이 회계사를 둘 수도 없거니와
가계지출의 상당액이 교육비 등 일종의 재투자이므로
세금공제 해택을 받아야 하는데 그거 다 계산하다가는 나라가
거덜나겠다.
가계소비는 모두 최종소비로 보고
부가세환급이 안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니까 병원비 같은 것은 빼주는거 아인감?
부가세엔 부가세의 논리가 있는데 그 논리자체가 현실적
실현불가능의 모순을 가지고 있어서 과세근거를 챙길수 없는
거래가 많으므로 융통성을 두는 것이재요.
♠
부가세 논쟁에 부쳐.
[소득있는 곳에 과세있다]
하여 세금은 소득에 대해 누진적으로 부과하는 것이고 그것이 사회정의이며 조세형평이고 빈부차를 줄이는 옳은 것이라는 관념이 고전적인 조세철학이다.
이것은 잘못이다. 가치는 노동에 의하여 창출되고 부자는 노동하지 않으므로 소득이 없다. 고로 부자의 소득은 허가된 약탈이나 착취이고 부자의 소득세액 증가에 비례하여 그 약탈과 착취의 정도도 비례하므로 이는 눈가림에 불과하다.
거꾸로 생각하자. 오히려 가난한 자가 세금을 내고 부자는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이 정의일수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의문이다.
소유와 자본과 이윤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라는 낡은 관념은 폐기 내지 수정되어야 한다. 이제 임대와 보장과 소비의 개념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발전이다.
예를 들면 연 1억원의 수입을 올리는 국회의원이 5000만원의 세금을 내고 연 1000만원의 수입을 올리는 노동자가 100만원의 세금을 낼 때 국회의원은 노동자보다 50배나 많은 세금을 낸 것이니 그만큼 사회정의가 실현되고 빈부격차가 줄었는가?
국회의원의 모든 수입은 노동자의 세금에서 나온 것이므로 따지면 국회의원은 한푼의 세금도 안낸 것이다. 이것이 소득세의 허구다. 이것은 극단적인 예이고 문제는 이러한 모순이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는 것이다.
의사나 변호사 재벌, 자영업자, 관리 등 사회에서 주도적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이 예의 국회의원이나 마찬가지로 남의 돈으로 세금을 낸다고 볼수있다.
정주영이 아무리 많은 세금을 내어보았자 결국은 그의 회사 노동자와 그의 상품을 소비한 소비자가 낸것이지 정주영이 낸 것은 아니다. 눈가리고 아웅일 뿐 정주영은 한푼의 세금도 내지 않았다.
역사가 생긴 이후로 부자가 세금을 낸 적은 없다. 납세의 순위는 도적의 순위일 뿐이다. 굳이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소득에 세금을 부과한다는 것은 허구다. 모든 세금은 궁극적으로 소비에 부과되어야 한다. 정주영의 재산이 국가재산의 9할을 넘더라도 그가 소비하지 않는다면 국가에 유익하다.
부가세의 도입은 박정희의 유일한 업적으로 쳐줄만 하다. 물론 생필품이나 사치품 할것없이 일률의 세금을 매기는 것은 잘못이다.
생필품의 부가세율은 더 낮추어져야 한다. 생필품은 궁극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생존에 투자되는 것이므로 최소한의 측면에서 그것은 소비가 아닌 투자다.
수출원자재는 관세가 면제된다. 소비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로 관세도 일종의 소비세다. 부자의 자산상속은 곧 소비로 연결될 위험이 높다. 고로 상속세도 소비냐 투자냐의 측면을 고려하여 조정되어야 한다. 경마장의 배당금은 거의 소비로 연결된다. 고로 마권세도 일종의 소비세다.
모든 세금은 소득이 아닌 소비 앞에 그물치듯 쳐져야 한다. 소비로 연결되지 않는 소득은 제한없이 용인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소득세를 곧 폐지하자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영업행위 내에서도 개인간에 소득은 큰 차이를 보일수 있기 때문이다. 길목을 차지하고 큰 수익을 올리는 이와 변두리의 구멍가게는 수익이 다르므로 그 동일업종 내에서의 형평을 위해 소득세 외에 뚜렷한 보전방법이 없는 경우도 있다.
자동차세나 휘발유세 특수소비세 방위세 교육세 등 소비에 따라 부과되는 세금은 소비세가 아닌 듯 하지만 알고보면 소비세다. 주세나 담배세도 그렇다.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세금은 소비를 쫓아간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유태의 율법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하였고
공자 때의 예기(禮記)에 복수(復讐)에 대한 예법이 있어서
[아비의 원수는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 )이니 반드시
죽여야 하고 형제의 원수는 무기를 가지고 다니다가 당장에
죽여야 하고 친구의 원수도 또한 죽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알수 있는 것은 고전적인 형식주의 법률개념이다.
법률 뿐 아니라 예를 들면 [소유권은 신성불가침의 권리]라고 믿는다거나 시장원리 곧 보이지 않는 손을 자본주의의 절대적인 근거로 주장한다거나 하는 식이 모두 고전적인 형식주의다.
망부석에 곤장 500대를 멕인다거나 혹은 왕실의 소나무를 해친 죄로 송충이에게 300년 징역형을 선고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코란이냐 칼이냐] 식의 이거 아니면 저거, 너죽고 나살기,
사회가 발전하므로 하나의 어떤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근거를
버리고 합리적으로 또 다양하게 변해가는 것이다.
가까운 예로 [경영권은 사용자의 고유권한으로서 노동자의 경영참여는 말도 안된다] 하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특정한 한가지 가치의 절대적인 고수가 아닌 다양한 가치, 다양한 잣대,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하기로 바뀌는 것이 사회발전이다.
세익스피어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서 가슴살을 요구하는 샤일록처럼 전혀 융통성없이 자구(字句)에 매달리는 것이 그렇다.
뭐든 신성불가침이라거나 고유권한이라거나 절대적이다고 우긴다거나 하는 어거지들은 모두 고전적 형식주의다.
김종필 총리서리의 위헌문제를 두고 한나라당의 주장도 전후사정의 고려없는 문리해석의 억지를 보이고 있다. 한나라당은 샤일록이다.
법률해석이든 혹은 각종사회제도이든 민형사사건의 판례이든 그 모든 가치판단에서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라] 하는 식의 극단적 견해들은 보수적인 혹은 고전적인 형식주의 논리로 치부되고 융통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경향으로 바뀌며 그것이 진보주의 시각이고 역사발전 방향과도 일치한다.
여기서 살펴야 하는 것은 그런 고전적 형식주의 논리가 [논리를 위한 논리]라는 것이다.
원시사회로 돌아가서 생각하자. 법률제도가 애초에 없을 때 모든 판단의 근거는 쌍무적 관계로부터 출발한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 대표적이다.
악법도 법이고 계약은 아무리 무리한 계약이라도 무조건 지켜야 하며 내것은 내것이고 네것은 네것이며 하는 이러한 관념들에는 [사회]라는 개념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사회계약은 쌍무계약 즉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직거래가 아니다. 사회계약은 신뢰이며 믿음이며 보장이다.
내 물소가죽을 네게 주고 네 곰가죽을 내가 가지는 쌍무계약이 아니라 너와 나 모두를 위해 물소가죽과 곰가죽을 공동창고에 보관하는 것이 진정한 사회계약이다.
원시사회에서 모두가 적이다. 고로 사회계약은 적과의 계약으로 축구시합의 룰과도 같아서 융통성이 있을수 없다. 현대사회에서 모두가 적이 아니다. 사회계약은 친선 골프시합의 룰과 같아서 각자의 협의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
논리를 위한 논리가 아닌 인간을 위한 논리여야 한다. 계약을 위한 계약이 아닌 인간을 위한 계약이어야 한다.
봉건사회에서 계급제도 아래 신음하는 농노가 귀족에게 대항할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법률이다. 언론도 없고 소비자고발센터도 없고 할 때 귀족은 농노의 반역으로부터 귀족계급을 보호하기 위해 가끔씩 희생양을 농노에게 먹이로 제공할 필요를 느껴 사회계약을 신성불가침의 쌍무계약으로 만들어두는 것이다.
논리를 위한 논리, 형식주의 논리는 적어도 쌍무관계에서 철저중립이다. 그러므로 일견 귀족과 농노 사이에서 공정한 듯 보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므로 오히려 일단 숫적우세를 점한 민중의 여론의 위세로부터 철저히 귀족을 편드는 것이다.
법률제도에 엄정중립이 아닌 동정의 여지가 있고, 인정과 눈물과 사랑이 있으면 법이 여론을 따라가고 여론은 다수를 따라가고 민중이 다수이므로 법이 피지배계급을 편들게 되기 때문에 그들은 민중을 기만하기 위해 법제도를 엄정중립의 쌍무계약으로 만들어 놓아 외견상 공정하지만 사실은 철저히 귀족편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과연 공정한가? 아랍사회에서 실제로 부자나 가난뱅이나 이 원리는 공정하게 적용된다. 부자가 가난뱅이의 눈을 뽑으면 가난뱅이가 부자 눈알을 뺄 권리가 있다.
적어도 재판장인 왕은 그렇게 판결한다. 그러나 정말로 그렇게 될까? 부자가 가난뱅이의 눈알을 뽑을 일은 날마다 생기고 가난뱅이가 부자눈알을 뽑을 일은 아무래도 안생긴다. 속임수다.
자본주의 그 자체는 본래 속임수가 아닌데 그 논리는 모두 속임수임을 알아야 한다. 자본주의는 자연발생의 사실일 뿐 계약도 규칙도 뭣도 아니다. 모두 인간에 달려있지 형식에 달려있지 않다.
아으 인생이란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
철웅선사가 20년을 장좌불와 용맹정진 하다가 하산하였다 한다.
옛날 중국에선 고목선(枯木禪)이라 하여 40년 30년을 장좌불와 하기도 하였다 한다.
이 양반이 수행을 그만두고 이제 막 하산하는데
뭐 몇 개국어에 능통하고 산중에 앉았어도 모르는게 없고
미담이 많은데 좋다.
좋은건 좋은데 뭐 종필이 하고 친하고
디제이 하고는 안친했는데 요새 종필이 땜에 다시보고
이회창 이인제를 만나고 어쩌고 하는 폼새를 보아하니
[아니다]
아이다. 이 양반도 아니다.
20년공부 도로아미타불이다.
네 중은 다시 절로 돌아가 영영 아니나오는 것이 좋겠다.
20년 달인 약에 뭐가 남았는고? 입이 헤깝으면 인간이 헤깝은 것. 이 뭣고? 세치 혓바닥의 조화로 우물에서 잉어를 낚으려는 자다. 어찌 쓸쓸하지 않겠는가?
그대는 신을 믿는가?
진리를 믿는가? 역사를 믿는가? 이성을 믿는가?
진보를 믿는가? 인간을 믿는가? 사랑을 믿는가? 믿음을 믿는가?
나는 무엇을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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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똘이에게 사탕 두 개를 준다. 이때 옆집 순돌이가 찾아온다.
엄마는 말한다.
[똘똘아 네 사탕은 두 개잖아. 한 개는 순돌이를 주려므나~!]
[안돼. 이건 내건데 왜 줘? 가. 순돌이 너거집에 가]
사탕을 나눠주지 않으려는 똘똘이에게 엄마는 어떠한 수사로
똘똘이를 납득시킬수 있을것인가?
[착하지. 우리 똘똘이. 착한 어린이는 나눠가지는 거야.]
내 어릴 때 이 착하다는 말에 잘도 넘어갔다.
이건 정곡을 찌른거다. 그러나 요새 아이들은 약아서 이런 말에
잘 안넘어간다.
[네가 순돌이에게 줘야 나중 순돌이도 네게 주는거야]
사탕 한 개 정도는 뭐 이런 말로 넘길수 있지만 좀 더 중요한 물건이면 설득이 안된다. 요즘 애들이란 영악해서리.
소유권 개념이 미숙한 어린이들은 책상에서 금을 넘어오면 칼로 자른다든가 하는 식으로 극단적인 쌍무계약을 맹신하는 경우가 많다. 국민학교 3학년 때 급우 중의 한명이 친구들에게 10원씩 빌려주고 하루 10원씩 이자를 받다가 선생님께 들켜 무지 맞은 일이 있다. 이자율 하루 100퍼센트.
소박한 어린이들은 어려서 그렇다 치고
어른이 다되어서까지 이런 식의 유치찬란한 어거지논리를 맹신 하는 경우를 의외로 많이 본다. 이회창의 법대로론도 일종의 그 연장선 상에 있다.
어린이를 설득하는 방법의 하나로 공동의 적을 설정하는 경우가 있다. 똘똘이와 순돌이가 서로 적대적인 남남이 아닌 한편이 될 수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너희는 같은 친구잖아. 옆동네 땡칠이네와는 다른.]
똘똘이는 이 말에 현혹된다. 그렇다. 순돌이는 우리편, 땡칠이는 나쁜 편. 옆동네 땡칠이파를 이기기 위해 우리는 단결해야지 암 만. 좋아 이 사탕 너 먹어.
어렸을 때 내가 배운 것이 이것이다. 그렇다 [무찌르자 공산당 단결하자 대한민국.] [일본을 극복하고 미국의 콧대를 꺽어놓고]
문제는 이것이 이나라 국민들의 일반적 수준이고 이 워드방의 수준이라는 것이다.
[깨침이 필요하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다. ]
그 편가르기 수준이 국가 수준에 까지는 잘가는데 그 선을 넘지 못한다. 어딘가에 공동의 적을 설정해주지 않으면 단결이 안된 다. 한국이 단결하기 위해 맨날 일본과 축구시합을 하랴?
우리는 왜 깨달아야 하는가?
적은 네 마음에 있다. 바깥에서 적을 찾지말라.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깨부수라. 반공, 극일, 반미가 아닌 진리와 이성과 믿음 과 사랑의 편에 서라.
[만약 인간이 고독한 존재임을 스스로 자각하게 된다면 그 어떤 경계(설정된 공동의 적)도 깨어진다.]
[죽음, 공허(空虛), 적멸(寂滅)에 이르기까지 네 친구로 할수 있 어야 스스로 인격적 완성에 이르리라.]
철웅선사의 허튼소리를 듣고
우물에서 잉어를 낚으려는 자란 생각이 들다.
김종필, 김대중, 이회창 하는 소리가 그의 경계다.
그 또한 공동의 적을 설정하기 위하여 세속과의 연결고리를 찾 았든 거다.
깨침은 그 경계를 깨부수는 것이다. 자재를 얻고 인생을 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