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은 변화에 대한 설명이다.
객관규칙1 - 모든 것은 변한다. (제행무상)
주관규칙2 - 굳은 것의 변화는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객관규칙3 - 부드러운 것은 굳은 것에 의속된다.
주관규칙4 - 부드러운 것의 변화는 서서히 진행된다.
객관규칙5 -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다. (제법무아)
세상은 변화하지만 거기에는 변하지 않는 규칙이 있다.
유리창은 순간적으로 깨어진다. (규칙2)
물은 서서히 흐른다(규칙4)
바퀴의 운동은 피스톤의 운동에 속한다. (규칙3)
오반을 위한 역설의 변증법.
내가 오단계 변증법을 설파하는 것은
이것이 꽤나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 배워두면 통밥의 고수가 되어부러.
난 평균이상으로 통밥(직관력)이 발달한 사람이여.
그러나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개발한 거이 아니고 오랜 동안의 수련 끝에
도달한 것이지.
통밥이란 오래 생각 안해보고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느낌대로 찍어버리는
데도 결국 들어맞더라는 것이여.
이를테면 인천방송의 박찬호 야구중계사건 하나만 봐도
천리안에 반대가 90프로 찬성이 10프로이었는데
결국 문화부에서 수입추천을 해부리자나. 더 있어봐 여론이 어떻게 갈것인지.
사태의 본질을 순간적으로 꿰뚫어야 한다 말이시.
근데 말가지고 따지면 강경파가 이기기 때문에 여론대로 따라가면
뭐든 반대반대반대 이래 되거든.
여론이 옳은게 있고 여론이 그른게 있다 말이시.
그려서 이 오단계 변증논리를 통달하면 여론이 우예 돌아갈지
뚜르르 꿰게 된다 말이시.
지극한 것은 소박한 것과 통하는 법이어서 진리는 최종단계에서
지극히 단순한 평범과 자연으로 돌아가는 거지. 요는 그 중간에서 몇번의
반전을 일으킬 것인가. 정동과 반동은 2회씩 찾아오고 정동으로 끝나지.
고로 단순한게 결국은 이기는 거야.
예를 들면 운전연습을 할 때
후진으로 차고에 집어넣는데 핸들을 어느쪽으로 꺽어야 할까를
암 생각없이 저절로 손가는대로 꺽어버리면 그게 정답인데
생각을 하고 이쪽일까 저쪽일까 궁리를 하면 꼭 거꾸로 되거든.
본능적 감각, 자기 직관을 믿어야 한다는 말이시.
또 그걸 훈련을 통해 개발하면 보약인거라.
오반의 말하는 것을 보아하면 아직 자기직관을 안믿어.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 말이시. 그려서 자기자신을 테스트 하는거야.
오반이 열사를 깬다는 말은 열사더러 오반을 깨어봐라는 말이시.
타인을 통해 자신을 검증해보겠다는 생각이여.
열사가 오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오반이 열사를 시험해야 오반이
원하는 고수가 된 거이지. 고수하수 하는 말은 열받으라고 하는 말이니 오해
는 말더라고. 열을 받어야 라면을 끓이든 호떡을 부치든 하는 법잉께로.
그려서 결국은 이 직관이라는 것을 발달시켜야 하는 거인데
이게 무지 쉽다는 것이지 내말은.
어떤 상대방의 주장이 있는데 이걸 어이 깰 것인가?
내가 반박하면 그쪽에서도 반박하고 둘은 평행선을 달리게 되거든.
이 다람쥐 쳇바퀴를 어이 깰것인가?
방법은 하나뿐 상대를 반박하면서 동시에 포용하는 거이지.
갑- 나는 사과를 좋아한다. (주관) 을- 나는 바나나를 좋아한다. (주관)
둘의 주관은 서로 다르지만 둘 다 과일을 좋아한다는 것은 하나의 객관.
과일의 성질은 인공적이지 않고 천연적인데 있지. 고로 사과가 바나나보다
더 천연적임을 강조하면 갑이 이기지. (시중의 바나나는 퍼런 것을
수입해 와서 전기나 가스 카바이트로 구운 것임)
그런데 상대를 포용하기 위해서는 범위가 커야 하거든.
상대방이 들고나오는 논리보다 더 큰 논리를 들고 나오면 이기는 거지.
(맛이 달다 <- 작은 논리 천연식품이다 <- 큰 논리)
공간은 넓게, 시간은 길게 보면 무조건 이겨. 근데 첨부터 너무 넓고 길어서도
애초에 논쟁이 안되고 오직 상대방보다 길고 넓으면 되여.
이제 연습문제를 풀어보세.
한국과 일본의 축구실력이 대등할 때 누가 이길까?
한국 일본
체력 95 ○ × 체력 90
개인기 80 △ △ 개인기 80
조직력 80 × ○ 조직력 90
경기경험 작전능력 95 ○ × 경기경험 작전능력 90
자 이럴 때 어느 팀이 이기겠어?
이걸 순간적으로 알아맞힐수 있다면 직관력이 발달한 경우야.
근데 변증논리를 터득하면 이걸 눈감고도 간파할수 있어.
점장이의 직관력도 실은 이런걸 연습해서 된 거지.
개인기는 같고 일본은 조직력에서 앞서고 한국은 체력과 경험 및
코칭스태프의 작전능력에서 앞서지. 전체점수는 똑같고.
결론을 말하면 1차전은 한국승리 2차전은 일본승리 3차전은 한국승리야.
작은 경기서는 일본이 우세, 큰 게임에서는 한국이 우세지.
왜 이런 결론이 나오는가?
좁은 부분과 넓은 부분, 특수상황과 보편상황으로 구분이 가능한데.
좁은 부분은 부분전술, 넓은 부분은 전체적 전략.
특수상황은 돌발적인 변수. 보편상황은 객관적으로 파악가능한 상수.
여기서 체력은 좁은 부분이자 보편상황, 경기 당일의 컨디션에 좌우되는
정신력은 넓은 부분이자 특수상황이지. 개인기와 조직력은 좁은 부분이자
보편상황이나 상대적으로 조직력이 더 넓은 부분이 되고
경기경험은 넓은 부분이자 특수상황,
코칭스태프능력은 넓은 부분이자 보편상황이여.
어떤 법칙이 적용되는가 하면 1, 선 좁은부분 후 넓은부분
2. 선 특수상황 후 보편상황
3. 선 부분 후 상황
뭐냐하면 1차전은 체력과 개인기에서 승부가 나고
2차전은 조직력과 정신력에서 승부가 나고
3차전은 경기경험과 코칭스태프능력에서 승부가 난다는 것이여.
장기전이나 작은 경기는 체력과 개인기 정신력에서 승부가 나고
단기전이나 큰 경기는 조직력 경기경험 코칭스태프능력이 좌우혀.
이것을 조합해보면 한국은 1차전에서 2대1로 근소하게 이기고
2차전에서 2대0으로 대패하고 3차전에서 2대1로 근소하게 이긴다 말여.
전쟁이 장기화될지 금방 끝날지에 따라 전력을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가가 드러난다 말여. 단기전에선 힘으로 때우지만
길어지면 조직력이고 더 길어지면 작전능력이여.
손자가 위나라에 식객으로 있을 때 주인의 전차경주에 감독하여
자기 약한 말과 상대 강한말과 붙이는 전법으로 주인이 돈을 딴 수법이여.
물론 이게 시합마다 똑맞아 떨어지는 것이야 아이겠지만
대체로 추세는 간파가 가능하다 말여.
5변증논리에 대입하여 5차전까지 간다고 봐서
1차전 (자연요인)객관적으로 전력(개인기)이 강한 쪽이 이긴다. (기아승)
2차전 (개인요인)주관적으로 정신력이 강한 쪽이 이긴다. (현대승)
3차전 (사회요인)객관적으로 조직력(팀웍)이 강한 쪽이 이긴다. (기아승리)
4차전 (사회변동)주관적으로 경기경험이 노련한 쪽이 이긴다. (현대승리)
5차전 (수미일관)객관적으로 코칭스태프능력이 강한 쪽이 이긴다. (기아승)
물론 실제로 이렇게 안된 것은 중간에 변동요인이 생긴 탓이지만 눈여겨
봐야 할 것은 대체로 1차전에서 이긴 쪽이 5차전에서도 이긴다는 것이여.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가 하면 주관적 요소(정신력 경기경험)는 1회용이고
객관적 요소(개인기, 조직력, 작전능력)은 영구용이기 때문이지.
이창호와 유창혁이 서로 잘모르는 상태에서 바둑을 두면 누가 이길까?
1차전에서는 이창호 승
2차전에서는 유창혁 승
3차전에서는 이창호 승이지.
1차전에서는 서로 잘모르므로 전투가 어울어지지 않아
실리에 밝은 쪽이 이긴다구. 바둑은 집싸움이니까.
2차전에서는 어느 정도 파악되었으므로 전투가 어울어져 전투력이
강한 쪽이 이기지. 3차전에서는 이창호가 전투를 기피하므로 수계산이
빠른 쪽이 이겨.
이러한 원리는 하나의 시합 안에서두 적용이 되고
장기레이스에도 적용이 되지
초반에 강한가. 중반에 강한가. 뒷심이 좋은가이지.
초반에 강한 팀 OB, 쌍방울
중반에 강한 팀 빙그레 삼성
막판에 강한 팀 해태 LG
이게 절대적일리야 없지만 이걸루 주가예측 프로그램이나
승부예측이나 뭐든 예측하는데는 도움이 되어여.
신이 낸 시험문제
신은 인간에게 두 개의 주머니를 내려주었다.
왼쪽주머니에는 백만원을 넣어두었고
오른쪽주머니에는 1억원을 넣어두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 인간은 이 두 개의 주머니 중 하나나 혹은 두 개라도 취할수 있다.
주머니를 열지 않은 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며
왼쪽 주머니를 연 자는 백만원을 얻고
오른쪽 주머니를 연 자는 1억원을 얻는다.
두 개의 주머니를 다 연자는 왼쪽주머니의 백만원을 얻겠으나
그때 오른쪽주머니는 비어있다.
나는 너희 인간들이 어느쪽 주머니를 열지 이미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신은 인간들에게 주머니를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과연 신은 인간들이 어느쪽주머니를 열지 이미 다 알고 있을까?
신을 불신하는 자들은 당연히 두 개의 주머니를 다열어본다.
왼쪽주머니의 백만원만 챙겨간다.
신을 믿는 자들은 오른쪽주머니만 연다.
그들은 1억원을 얻는다.
당신이 이미 오른쪽주머니를 열었는데 비어있다.
당신은 이제 왼쪽주머니를 열려한다.
신은 그것을 알고있었기 때문에 오른쪽주머니를 비워둔 것이다.
황당 무지로소이다.
변증은 변화에 대한 설명이다.
객관규칙1 - 모든 것은 변한다. (제행무상)
주관규칙2 - 굳은 것의 변화는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객관규칙3 - 부드러운 것은 굳은 것에 의속된다.
주관규칙4 - 부드러운 것의 변화는 서서히 진행된다.
객관규칙5 -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다. (제법무아)
세상은 변화하지만 거기에는 변하지 않는 규칙이 있다.
유리창은 순간적으로 깨어진다. (규칙2)
물은 서서히 흐른다(규칙4)
바퀴의 운동은 피스톤의 운동에 속한다. (규칙3)
♠ 학문의 도
삿된 소리가 난무하는다.
진정한 학문의 도를 설파하지 않을수 없다.
내가 말하면 농담으로 알아듣는 고로 왕수인의 말을 인용하는다.
[편벽되거나 번쇄하거나 비루하거나 교활하거나 거짓되거나 간사한
형용들이란 어떠한 것인가? ]
1. 겉으로 인의를 표방하되 속으로 사욕을 추구한다.
2. 말을 꾸며대어 시속에 아부한다.
3. 진실하지 않은 행동으로 뭇사람의 칭송을 구한다.
4. 타인의 좋은 점을 덮어버림으로서 자기를 과시한다.
5. 타인의 사욕을 들추어냄으로서 정직한 체 한다.
6. 길길이 뛰며 상대를 이기려고 하면서 의를 쫒는다고 말한다.
7. 음흉하게 상대를 거꾸러뜨리려 하면서 악을 미워해서라고 말한다.
8.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시기하면서 시비에 공정하다고 말한다.
9. 마음껏 욕심을 부리면서 저는 좋은거나 추한거나 같이 대한다고 말한다.
진정한 것은 무엇인가?
여기부터는 누구의 말이 아니라 파파락의 말이다. 진정한 것은
애써 구하지 않아도 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언어의 칼, 투쟁의 창,
속임수의 방패가 필요하지 않다.
1. 보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보인다.
그것은 관(觀)이다.
2. 자유로우려 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유롭다.
그것은 자재(自在)이다.
3. 아름다우려 하지 않아도 스스로 아름답다.
그것은 미학(美學)이다.
4. 행하려 하지 않아도 절로 행해진다.
그것은 도(道)다.
5. 통하려 하지 않아도 절로 통한다.
그것은 달(達)이다.
이는 깨달음의 단계이다.
첫 번째의 관은 세상을 보는 자기만의 안목, 곧 주관을 획득함을 말한다.
오반이 표현대로 하면 黨派性의 획득이다.
관을 획득하면 보이지 않던 것이 마구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인간이 오반처럼 말이 많아진다.
아무나 잡고 시비하는 거다.
두 번째의 자재는 입지(立志)이다.
이는 뜻을 세우므로서 세속의 억압으로부터 구애됨이 없어지는 것이다.
오반의 말로 하면 의식화(意識化)이다.
자유는 의식에서 나온다. 유머와 여유 해학과 기지도 의식에서 나온다.
뜻을 세운자만이 시류의 억압으로부터 한걸음 물러서 한가로울수 있다.
세 번째의 미학은 중용(中庸)이다.
중용은 만남이다. 만남은 세상과의 만남, 사회와의 만남, 자연과의 만남이다.
홀로 고립되어서는 아름다움이 없다. 머물러 있는 자 추해진다.
사회로의 나아감이며 변혁과 진보에의 가담함이다. 개인과 개인이 만나고
사람과 자연이 만남에서 중용을 이룰 때 미가 획득되는 것이다.
나아가서 세상과 만나라. 분노할 것에 분노하고 기뻐할 것에 기뻐하라.
그것이 아름답다.
네 번째의 도는 실천이다. 실천은 사회적 실천이다.
역사적 실천이며 세계에의 실천이며 문명에의 실천이며 진보의 실천이다.
도는 천하의 공변된 도이다. 가만히 눌러앉은 자에게는 도가 없다.
공변된다는 것은 보편성을 이름이다. 한 개인에게서 이룬 것이 그 공변됨으로
하여 천하에 널리 통하므로 바야흐로 역사를 만드는 것이 도다.
다섯 번 째의 달은 진리에의 달이다.
드러나지 않은 진리를 드러나게 하는 것, 진리의 공변됨을 증명해 보이는 것,
그것이 학문의 지극한 경계이다.
진리는 본래 있는 것, 늘어남도 없고 줄어듬도 없다.
인간은 역사의 방법으로 문명의 방법으로 진보의 방법으로
감추어진 진리를 드러나보이게 한다. 그에 이름이 달이다.
무엇이 필요한가?
[道人은 이제 구하는 자이며 達人은 이미 구한 자다. ]
눈을 떠서(관) 세상을 보라. 보이는가? 관점을 획득하지 않으면 눈뜬 장님이다.
보일락 말락 하는 인간이 안타까워하여 말(是非)이 많은 법,
이미 보이는 이는 관심이 자재에 가 있으므로 구태여 시비하지 않는다.
이미 보이거든 언어를 접고 뜻을 세우라.
뜻이 세워지면 자재(自在)하여 자유롭다. 날개를 퍼득거리며 날아오르려
하는 이는 미처 뜻을 세우지 못한 자이다.
뜻이 섰거든 세상과 만나라. 중용으로서만이 만날 수 있고 편벽되어서는
만날 수 없다. 중용으로 만나면 아름답고 편벽된 채 억지로 만나면 추하다.
사회와 만났거든 실천하라. 도로서만이 실천할수 있고 천하의 공변된
도가 아니어든 실천하려 해도 실천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비로소 통하거든 진리에 달한 것이며 통하지 않거든
도가 아니다. 원점으로 돌아가라.
이미 깨달은 후에 저절로 통하는 것이 順理이다.
미처 깨닫지 못하였으면서 깨달은 척 꾸미어 아름답게 보이려 하고
실천하는 척 적을 만들며, 통하는 척 막히며
남의 싸움을 따라하는 흉내내기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이 無理이다.
그대의 언어에 시비가 많은 것은 관하지 못한 까닭이고
그대의 나아감에 자유가 없는 것은 뜻을 세우지 못한 까닭이고
그대의 꾸밈에 아름다움이 없는 것은 진정으로 만나지 않기 때문이고
그대가 행함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공변됨이 없는 까닭이고
그대가 이미 이루었는데도 통하지 않는 것은
미처 진리에 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잘못된 생각들은
사람들이 수학과 논리학을 등한시 하는데 기인한다.
같은 것을 다르다 하고, 다른 것을 같다 하고
앞을 뒤라 하고, 뒤를 앞이라 하는데 잘못이 있다.
동양이 서양에 뒤진 것은 오로지 수학과 논리학을 등한히 했기 때문이다.
전후좌우를 분간하는 방향감각을 찾아야 사리를 분별할 수 있다.
하여 화담선생의 몇마디를 들려주겠다.
[人惑以我治數學 我非由數學而悟 盖不可不知耳 理之縱橫錯綜 在數字]
수학과 논리학이 학문의 으뜸이란 것은 우리 조상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공리공론이 아닌 것은 과학이다. 그 과학은 수학과 논리학에서 나왔다.
과학 이전에도 실질을 숭상하는 학파들이 있었으나 연금술에 지나지 않았다.
천번 실험하고 만번 분석해도 연금술에는 답이 안나온다.
조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게시판에서도 공리공론을 배척하고 실질을 숭상한다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연금술에 가까운 황당한 주장이 많다.
실은 실마리부터 감아야 감기고, 실꼬리부터 풀어야 풀린다.
중간에서 이리저리 잡아당겨 엉켜버리면 풀수도 감을수도 없다.
학문도 이와같아서 만학의 으뜸은 논리학과 수학이다.
논리학이 앞을 터고 수학이 뒤를 챙기며 과학이 열매가 된다.
연금술시대를 종식하고 과학의 시대를 연 사람은 뉴튼이고
뉴튼은 수학자였다. 논리학은 수학과 뗄레야 뗄수 없다.
자동차가 가니까 바퀴가 구르고 바퀴가 구르니까 자동차가 간다.
그러나 자동차가 먼저다. 바퀴가 자동차를 굴려가는 일은 결단코 없다.
닭과 달걀의 패러독스는 순환논리의 오류라고 하는 것으로
논리학의 가장 기초적인 문제이다. 어떤 문제든 선후를 결정하지 못하면
문제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인과율에 따라 A가 B의 원인이면서 동시에 B가 A의 원인일수 없다.
하나가 원인이면 반드시 하나는 결과이며
그렇지 않다면 둘은 상관없는 별개의 사건이다.
또 이것을 진화론과 연결하여 돌연변이가 어떻고 하는 생각도
무식하기 짝이없는 소리다.
논리학상 어떤 종이 중간에 다른 종으로 변한다면 그 두 종은 하나의
종으로 치므로 돌연변이든 우주방사선이든 의미없다.
예를 들어 누에가 변태하여 나방이 된다. 누에는 누에고 나방은 나방인가?
기어 다니는 누에와 날아 다니는 나방은 별개의 종처럼 보이지만 하나다.
지렁이의 일종인 누에가 새의 일종인 나방으로 변종한 것은 아니다.
이는 논리규칙으로 중간에 일어난 변화는 중간에 일어난 변화작용을
수용할 근거를 애초부터 가지고 있었던 이유로 무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멀쩡한 자동차가 있었는데 중간에 고장났다.
운행하지 못하므로 이제부터 자동차가 아니고 고철이다.
그러면 그 자동차는 고철인가?
니니페님께.
긴 편지 고맙습니다만 어떤 답변을 드려야 할지 고민되는군요.
저는 언제나 혼자노는 사람이라 어떤 단체나 조직에 가입할줄 모릅니다.
그리 해 본적도 없구요.
통신에서 뭐 조직적인 어떤 것을 추구하는 것은
내가 그것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옳으므로 남들더러 그리 하라는 것일 뿐입니다.
배미숙님 사건 때 뭐 주장하고 나선 것은
GD21님을 의식해서였는데 GD님이 바쁘다고 안하신대서 포기한거죠.
지디님이 제법 유명작가래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나보다 해서요.
뭔가를 하려면 구심점이 될만한 인물이 필요한데 그 사람이
정력적으로 나서줄 사람이어야 하지요. 알아야 할 것은 그 어떤 모임이든
단체든 결국은 사람 위주로 간다는 것입니다.
대의 명분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지요.
차라리 적은 숫자로 조촐하게 하더라도 핵심이 될 사람이 필요하지요.
먼저 사람을 찾아놓고 다음에 대의를 밝히고 명분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때 주장한 것도 이미 사람이 모였기 때문이지 다른거 없습니다.
그때 저는 시골로 이사를 오느라 한동안 통신을 안해서
어찌된지 몰랐는데 흐지부지 되었나보군요.
여하튼 모든 문제는 사람의 문제이고
사람 중심으로 해야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근데 당혹스런 것은 만화입니다.
저도 한때 만화방에서 몇 달을 살아본 적이 없는 바 아니나
십여년 전 일이고 요즘이야 여유가 없습니다. 시삽이 그렇게 많아서
무엇을 한다는 건지 만화에 무슨 정치적인 단체가 필요한지
황당스러울 뿐입니다.
열사에 [예쁜심바] 아이디를 쓰는 분이 만화 영화평론 시나리오 등에
제법 재능을 가지고 있는 걸로 아는데 아마 조만간 작가로 등단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외에도 그림에 관심을 가진 분이 몇분 있기는 한데
제가 워낙 사람 사귀기 싫어해서 면식을 트지 못하고 있는 중이죠.
그럼 지켜보겠습니다.
제가 뭔가 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고 응원은 해드리죠.
그럼 추진하시는 일 잘되시기를 바라며.
해공님의 오류에 대해.
논리- 수학과 실험- 관찰을 대등한 비교대상으로 보는 것은 넌센스다.
모든 실험에는 가설이 필요한데 그 가설은
논리- 수학의 분야이기 때문이다.
실험을 하기 위해서 요행을 바라고 문득 아무러나 실험하다가 우연히
발견하는 것이 연금술 내지 동양의학이고
과학은 사전에 충분한 논리적 검토 아래 타당한 가설을 세운 다음 충분한
수학적 계산으로 방법론을 정립한 후에 비로소 실험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시간적 순서 [선가설, 후실험을 통한 증명]이 성립한다.
요는 여기서 가설이 먼저이며 가설은 논리-수학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실험은 가설의 증명일 뿐이다.
때문에 설사 실험으로 증명이 안되더라도 가설은 그 자체로서
매우 유효한 학문적 성과이다. 예) 돌턴의 원자가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이렇듯 설사 실험으로 증명되지 않더라도 유의미한 가치를 지닐 때
[논리적으로 타당한 가설]이라 할수 있으며 논리적 오류가 없는
타당한 가설은 실험의 성패와 상관없이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증거로서
학문적 의의를 가지므로 그 또한 과학의 일부가 된다.
왜 가설이 중요한가 하면 하나의 가설은 다른 분야에 충분히
응용되기 때문이다. 과학자가 특정한 방법으로 어떤 성과를 얻어내었다면
이를 응용하며 비슷한 방법으로 무수한 다른 성과를 얻어낼수 있다.
즉 어떤 사람이 석유에서 비닐을 합성해 내었다면 이를 응용하여
다른 종류의 플라스틱이나 나일론이나 FRP나 폴리에스테르나 가능한 것이다.
과학의 99프로는 가설에서 결판나고 실험은 그 증명일 뿐이다.
가설과 증명(실험)을 분리해서는 안되고 과학의 방법론은
[가설(연역법) + 실험(귀납법)] 의 통일이며 가설이 먼저고 증명은 나중이다.
수년전 화학적인 방법으로 저온핵융합이 성공했대서 세계가
떠들썩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택도없는 소리라고 당당히 지적했다.
과연 택도없는 소리임이 나중 증명되었다.
핵융합은 물리학의 분야이지 화학의 분야가 아니다.
논리학을 모르면 이런 멍청한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또 몇 년전
화성에서 생명체가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나는 이 때도 택도없는
소리라고 분명히 말했다. 과연 그것은 낭설임이 밝혀졌다.
비슷한 주장으로 UFO나 타임머신에 대해서도 굳이 실험할 필요없이
논리적으로 증명할수 있음을 주장했다. 이는 영구기관을 실험으로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과학의 9할은 논리의 영역이다.
혹자는 과학자들의 위대한 발견에 철학자나 논리학자들이 틀렸다고
시비한 것에 대해 무슨 대단한 일인 것처럼 반대근거로 내세우는데 가소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모든 철학자 논리학자가 아닌 어떤 철학자 어떤
논리학자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도 생각이 서로 다른데 철학자라고 생각이 같을리 있는가?
요는 과학은 가설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가설이 논리학없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닭과 달걀의 문제에 한마디 첨언한다면 어느날 생식가능한 닭이 돌연
변해버리는 일은 결단코 없다.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다. 마찬가지로
달걀이 어느날 변해버리는 일은 없다.
그러한 사고는 일종의 자연발생설로서 밀가루를 헝겊으로 덮어두면
쥐가 생긴다는 공상과 비슷하다. 그런 일은 없다.
종의 특성은 수정시점에 결정되는 것이다. 단성생식을 하면 종은 불변하며
양성생식의 경우 유전정보의 차이에 의해 새로운 종이 나올 가능성이
가설로는 가능할 뿐이다.
가장 의미있는 가설은 말과 당나귀 사이에 노새가 나오듯
닭 아닌 서로 다른 두 종(예를 들면 칠면조와 꿩)의 결합에서 칠면조도
꿩도 아닌 닭이 나온 걸로 보아야 한다. 이런 일은 물론 관찰되지 않지만
가설로서는 충분히 유의미하다.
왜냐하면 지금 지구상의 모든 종은 생태학 측면에서 유전적 안정성을
확보하고 있는데 비해 새로운 종이 처음 출현할 때는 유전적 안정성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종이 명백히 갈라지지 않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
유전적 안정성이란 호랑이와 사자의 공동조상으로 부터 호랑이와 사자가
갈라져 나올 때 공동조상은 유전적 결함(돌연변이 등의 원인)으로
일시적으로 다양한 아종을 생산하는데 (이 경우 그 종은 매우 단명한다)
거기서 갈라져나온 자손들이 비슷한 자손끼리 결합하여 안정된 종으로
되어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예로 아프리카에는 얼룩말도 당나귀도 아닌 이상한 종이 있었는데
19세기 후반에 멸종되었다. 지금은 박제만 남아있다. 근래 일부 과학자들이
두 종류 이상의 얼룩말을 특별한 방법으로 선택교배하여 그 사라진 종을
대생할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치타는 세계적으로 1종 1속 밖에 없으므로 유전적으로 지극히 안정된
종이어서 잡종이 없다. 개는 아종이 다양하고 늑대 등과 유전관계가
불명하므로 상대적으로 유전적 불안정성이 크다.
마지막으로 고장난 자동차에 대하여 말하면 고장난 자동차는 분명히
자동차다. 그럼 고장난 자동차는 언제 고철이 되는가?
자동차가 고철이 되려면 두 개이상의 고장난 자동차가 모여야 한다.
즉 폐차장으로 가야하는 것이다. 자동차는 독립된 개체를 의미하는
단수개념이고 고철은 [고철들]을 의미하는 복수개념이다.
자동차냐 고철이냐의 구분은 외부의 간섭에 대해 독립적으로 반응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이다.
만약 그대가 과학가가 되려면 먼저 논리학과 수학에 정통하게 하라.
관찰을 통해 의문을 끌어내고 그로부터 가설을 만들어내며
그것이 과학의 90프로다.
가설은 아무러나 만드는게 아니고 일정한 방법론이 존재한다.
[제 목] 자연 과학의 두 축: 실험의 중요성..
───────────────────────────────────────
서양의 근대 자연 과학은 어디에서 출발했는가.. - 이후 과학=자연과학의 뜻으
로 쓴다.
서양의 근대 과학은 그리이스 학문의 재발견인 르네상스에 많은 신세를 졌다.
즉 그리이스의 논리학과 수학이 재발굴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근대과학
이 생겨날 순 없었다. 근대 과학이 태동하기 위해선 그와 대등한, 그리고 때로는
그보다 우월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또다른 중심축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실험
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근대 과학의 중요한 기초 제공자였다. 그러나 실험을 등한시
한 그에게는 오류가 없을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남자의 이빨
의 수는 여자의 이빨 수보다 많다",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를 떨어뜨리면 무
거운 물체가 먼저 떨어진다" 등등의 학설을 제창했다. 실험은 노예들이나 하는 것
이라는 그리이스의 논리학적 수학적 편견(^^?)이 작용한 것이다. 이 오류가 명백
해 수정된 것은 바로 실험을 통해서 였다. 물론 그 실험 결과는 또 새로운 논리학
과 수학의 태동을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과학에서 논리학과 수학의 축과 실험 관찰의 축 중 어느 축이 더 우월하다고 하
긴 힘들다. 어느 쪽이 우선이라고 보다는 두 축 자체가 고정불변한 실체라고 하기
도 힘들다는 점이 중요하다. 실험 관찰의 결과는 논리학적, 수학적으로 해석의 검
토를 받고 관찰을 잘못 해석한 것이 아닌가 점검해보는 과정을 거치고, 논리학적
수학적 분야는 실험 관찰에 의해 기존 논리학이나 수학으로 풀리지 않는 부분이
나올 때 새로운 논리학과 수학으로 다시 정비된다. 요컨대 현존하는 논리나 수학
체계가 100%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다는 점이다-물론 현존하는 논리 수학 체계는
연금술적인 논리보다는 과학적으로 훨씬 완벽에 가까운 것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기존의 논리학이나 수학 체계에 부합되지 않는 새로운 실험적 관찰적 사실
이 나오면 기존의 논리학이나 수학 체계는 변형 발전되기도 한다. 새로운 과학 이
론이 나오면 기존의 논리학자와 수학자들이 논리적으로 말도 안되는 거라고 떠들
어대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러면 과학자들은 싱긋이 웃으며 그 떠들썩한 논리들
중에 과학적으로 별 의미 없는 것은 버리고 유효할 수 있는 것만 취한다. 뉴튼이
만유인력과 운동 법칙을 발표할 때도 그랬고, 아인쉬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표할
때도 그랬다.
기원전에 그리이스의 제논은 "아킬레스를 거북이보다 100m 뒤에 세우고 달리기
시합을 시키면 아킬레스는 영원히 거북이를 추월할 수 없다."고 했다. 거북이의
속도는 아킬레스의 1/10이라고 했을 때 아킬레스가 100m를 달리는 동안 거북이는
10m 간다-즉 거북이는 아킬레스보다 10m 앞서 있다. 아킬레스가 다시 10m가는 동
안 거북이는 1m간다 - 즉 거북이는 아직도 아킬레스보다 앞 서 있다. 이런 식으로
거북이와 아킬레스의 차이는 10cm, 1cm, 1mm, 0.1mm로 줄어들 수는 있어도 아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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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는 영원히 거북이를 앞지를 수 없다는 논리이다- 당시 그리이스 사람들은 더 이
상 쪼갤 수 없는 단위 시간이라는 것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 논리에 반박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도 달리기 시합을 해보면 아무리 봐도 아킬레스
는 거북이를 앞지른다. 당대의 그리이스적인 논리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는 골
때리는 현상이지요^^;;
사실 이것이 어느 정도로나마 과학적으로 해결이 된 것은 바로 수학에 극한 개
념이 도입되면서 부터이다.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격차는 점점 작아져서 마침내 0
이 되고 어느 지점부터는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추월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보는 것
이 극한의 개념이다. 이 극한의 개념에서 뉴튼과 라이프니쯔의 미적분학이 나왔
다. 뉴튼의 만유인력의 법칙이나 역학적 운동 법칙의 발견은 과학상의 새로운 발
견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수학의 발견이기도 했다. 물론 이렇게 극한 개념으로 해
결했다 하더라도 엄격한 논리학을 주장하는 사람들 일각에게는 "여전히 그 문제는
엉터리로 해결한 것이다, 극한 개념은 사기다" 라는 주장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면 과학자들은 싱긋 웃고 다음 단계의 관심사로 넘어갈 것이다 - 예컨대
"이상한데.. 왜 빛을 속도를 넘어갈 수 없지? 절대 공간, 절대 시간의 논리 자체
가 좀 이상한 거 아냐?"하면서^^
닭이 먼저다 달걀이 먼저다를 논리학적으로 해결한 것이 논리학적으로 유효할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1. 닭이 먼저다 = 어느날 생식 가능한 어른 닭 비슷한 것이 있다가 갑자기 생식
가능한 어른 닭으로 변했다. 이후 그 닭의 후손들이 지금의 닭이 되었다.
2. 달걀이 먼저다 = 어느날 닭 비슷한 것이 알들을 낳았는데, 그 알들에서 지금
의 어른 닭과 같은 생물들이 나왔다. 이후 그 어른 닭과 같은 생물들의 후손들이
지금의 닭이다.
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남고, 그 해석 가능성을 떠나서도 이런 사건
의 가능성이 있을 때..
1. 어느날 닭은 아니지만 생식 가능한 어른 닭 비슷한 것이 있다가 갑자기 생식
가능한 어른 닭으로 변했다. 이후 그 닭의 후손들이 지금의 닭이 되었다.
2. 어느날 닭은 아니지만 닭 비슷한 것이 알들을 낳았는데, 그 알들에서 지금의
어른 닭과 같은 생물들이 나왔다. 이후 그 어른 닭과 같은 생물들의 후손들이 지
금의 닭이다.
1,2의 가능성 있는 사건 중에 어느 사건이 더 일어날 가능성이 많은 지를 검토
하는 것은 과학적으로-아마도 특히 생물학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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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가 운행하지 못하고 고장났으면 그것은 "고장난 자동차"다. 과학적으로
그리고 기술공학적으로 볼 때는 "제대로 굴러가는 자동차"와 "고장난 자동차"의
차이를 탐구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본다^^
오반이는 공부 더하고 와야 되겠다.
여전히 동화책에 나오는대로 뉴튼이 사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다고 믿느냐?
그것은 어떤 전기작가가 지어낸 개풀 뜯어먹는 소리다. 아그야.
밑에 해공님 글 읽어보면 알겠지만 오반은 공부 더해야 된다.
하늘천 따지부터 다시 배와라.
중요한게 뭐이고 중요하지 않은게 뭐인지 해임이 가르쳐 줄게.
이건 진짜로 중요한 이바구다 귀씻고 들어라.
[무슨 일을 진행하다가 장벽에 부닥쳤을 경우 뒤돌아가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이때 어디까지 후퇴할것인가? ]
부산서 진주를 가는데 잘못가서 삼천포로 빠져버렸다.
오반은 부산까지 되돌아가서 다시 출발할 넘이다. 그라이 일이 안되는기라.
마산 고성 지나 사천까지는 잘온기라.
중요하다는 것은 오류발견시 후퇴하한선 위치인기라.
중요하지 않은 것은 사정없이 폐기해버리고 중요한 데서 다시 출발하는기라.
집을 짓는다치자 집이 잘못되었으면 헐어내고 다시지어야 하는데
설계도까지 폐기하면 안되는기라. 설계는 하자없어 시공잘못이야.
여기서 설계와 시공은 엄격히 구분되지. 잘못된 집을 때려부시는데 2층만
부수고 1층은 놔두었다가 다시지으면 집이 되겠남? 부술 때는 1층까지
확실하게 부숴야 하는기라. 그러나 설계도는 하자없응께로 놔둬야 혀. 알간.
이렇듯 무슨 일을 하다가 시행착오를 반복할 때 다시 시작해야 하는 지점과
폐기해야 하는 지점은 완죤히 구분된다 말여. 테레비는 고장나면 완죤히
부수지마는 컴퓨터는 고장나면 고부분만 바꾸는기야.
컴퓨터 본체 - 체인지 업이 가능하구만 옳거니 중요하다.
모니터 - 고장나면 깨부셔. 업그레이드 안돼여. 안중요혀.
마우스 자판 - 깨부셔. 안중요혀.
프린터- 깨부셔. 안중요혀.
업그레이드가 가능한게 중요한 거여 알간?
이는 정치 제도 철학 사상에도 마찬가지여. 민주주의, 자본주의는 고장나면
업그레이드 해서 다시 쓰지만 공산주의는 고장나면 수리가 안되는거야.
혀서 민주주의는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안망하고 공산주의는
조용하다가 한방에 가는거야.
오반은 논리학을 안배웠응께로 이걸 모리는거야.
천지를 분간을 못하여. 컴퓨터 고장나면 본체는 때려부수고 모니터
업그레이드 하러 짊어지고 갈넘이여. 그게 아이라 카이.
세상 무엇이든 마디가 있어. 무슨 일이 잘못되면 얼렁뚱땅 다시 하면 안돼.
실패했을 때는 철저히 파괴하고 원점서 다시 시작혀야 해.
도공이 도자기를 만들다가 실패하면 주물러서 다시 하든? 박살을 내부리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 근데 오반은 녹로까지 부수고 가마까지 부순당께로.
오반은 국민학교서부터 중요한 거이 무엇인지 안중요한거이 무엇인지
배웠을 거야. 그러나 그게 무슨 말인지는 한번도 생각해 본적 없재?
철학을 배와야 혀.
철학은 분명히 정답을 가르쳐 주지.
시행착오가 발생하면 원점에서 다시 출발해야지 그 자리서 뭉기적대면 안돼.
과학에서 가설이 실험보다 중요한 거야.
실험이 잘못되면 다시 실험하지는 거지 안되면 또하고. 한 십만번은 실험을
혀야 혀. 그래도 안되면 가설까지 틀린거지. 오반은 한번 실험해보고
안되면 가설까지 폐기할 넘여. 뭐가 중요한지를 모르니께롱.
가설은 틀린 가설이라도 함부로 폐기 안혀. 이 가설은 틀린 가설이니
잘보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하시오 하고 학계에 발표를
하는기야. 그러니 중요하재.
인간이 말여. 세상을 안다니 철이 든다니 하는 것은 말여.
이 중요한게 뭔지 안중요한게 뭔지를 안다는 거여. 그거 알면 철든거여.
그러이 무슨 일을 착수할 때는 항상 이 작업이 실패하면 어디까지 부술지를
생각해놓고 있어야 하는기야.
그때 깨부수지 말아야 할 것은 특별히
기억하고 기록하고 표시해두어야 하는거이니 중요한기야.
수학-논리학은 매우 중요한 거이고 가설이 그 다음이고 실험은
한번 실패한 실험 두 번 할거없어. 중요안혀. 실험은 백만번도 다시할수
있는거고 가설은 결코 놓치면 안돼여.
형제여~! 그대는 인생에 있어 실패할 때 혹 장애를 만날 때
어디까지 후퇴할지를 항상 의식하고 사는가? 그거이 안되니까 함부로
자살한다거나 자해한다거나 고민과 방황에서 헤매이는 거라.
자기인생의 1차저지선, 2차방어선, 3차전략거점을 알고 있는자에겐
두려움도 슬픔도 없어, 당차게 나아갈수 있는거야.
그대가 두려워하고 뭉기적대는 것은 바로 그것을 모르기 때문이야.
자기인격(자존심)을 최후로 한 자는 한번 실패에 죽고
진리에 대한 믿음을 최후로 한 자는 결코 죽지 않는 법.
어떤 일이든 반드시 선후가 있고
여기서 앞서는 것이 뒤지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이건 절대의 진리이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시행착오가 발견될 때 폐기하고
중요한 것은 결코 폐기하지 않는다.
인생은 초딩학교 운동회 때의 달리기 시합이다.
출발점에선 나란히 선다. 평등한 것이다.
결승점에선 일렬로 선다. 평등하지 않다.
출발점이 먼저고 결승점이 나중이다.
고로 출발점의 평등이 결승점의 불평등보다 더 주요하다.
그러므로 올림픽의 제전에는 참가하는데 의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개막식 식장에서는 평등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결승점의 일렬에서 가장 먼저 들어온 선수가 가장 중요하다.
가장 나중 들어온 선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1등한 선수는 다음
경기에도 참가하지만 꼴찌한 선수는 그것이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가지의 논의
A- 하나의 경주에서 출발점과 결승점
B- 결승점에서 1등과 꼴등.
A에서는 출발점의 평등이 중요하고 결승점의 불평등은 중요하지 않다.
출발이 먼저고 결승은 나중이기 때문이다.
B에서는 1등이 중요하고 꼴찌는 중요하지 않다.
1등이 먼저고 꼴등은 나중이기 때문이다.
결론 A나 B나 항상 먼저가 중요하고 나중은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논리학을 안배운 사람들은 혼돈을 겪게 된다.
이 두가지 별개의 사건을 하나로 섞어서 관찰하면 뭐 출발이 중요하다가
끝이 중요하다가 뒤죽박죽이 되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므로 그들 논리를 모르는 사람은 1등이나 꼴등이나 다 중요하다고
말해버린다. 천만의 말씀 1등이 중요하지 꼴등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사건은 전혀 별개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 가장 먼저 해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것을 해야만 다른 것을 할수있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잘못이면 폐기되는 수가 있지만 가장 먼저 한 것은 결코
폐기되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결과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하나의 사건의 결과는 다른 사건의 시작이 되므로
그 시작부분에서 결과가 중요한 것이지
결과가 늦게 나왔기 때문에 그 늦음에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언제나 1초라도 더 앞서고 더 빠른 것이 절대로 중요하며
이는 절대진리이다.
형제여. 부디 말하노니 인생에서 결과를 기대하지 말라.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허나 또한
어떤 일의 결과는 다른 모든 일의 시작이 된다는 점을 잊지 말라.
인생의 결과는 죽음 -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 - 죽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삶이 중요한 것이다.
철학이 없었을 때는 과학도 없었다.
철학이 과학을 만들어내고 과학이 문명을 만들어내었다.
철학이 먼저고 과학은 나중이고 문명은 더욱 나중이다.
왜 문명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것은 결과다. 결과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원인은 정신이며 그것은 철학이다.
인간은 문명(결과)을 만들어내었지만 이건 결국 버릴거다.
정신(원인)은 최후까지 남는다.
논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구분하기 위해서다.
어떤 결실은 뒤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으로의 앞인 것이다.
해공님의 진화론에 대해서.
저는 진화에 대해 전혀 다른 종류의 가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우 복잡한 이론이므로 통신게시판에 설명하기 어렵지만 말한다면
[화살과 표적] 이론이라고 명명해도 괜찮은 건데
진화의 핵심은 유전정보의 진화이고 그 유전정보에는 화살 역할을 하는
유전정보와 타켓 역할을 하는 유정정보가 있다고 봅니다.
진화는 점진적으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점에서 일제히 일어난다고
보는데 그 시점이 화살이 타켓을 때린 시점이라 할수 있지요.
사람에게 눈썹이 있고 가마도 있고 소에게도 개에게도 있습니다.
뭐냐하면 서로 다른 종들이 나뭇가지처럼 서로 다른 경로를 거쳐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별개의 종들은 동일한 유전정보 타켓을
가지고 있는데 어느 시점에서 화살 유전정보가 활동을 개시하여
표적을 향해 쏘아지면 (쏜다는 표현이 적당) 서로 다른 종에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포유류 종은 사람처럼 속눈썹 유전정보를
가지고 있는데 화살이 그 유전정보의 어느 부위를 맞히는가에 따라
종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모든 원시적인 종은 그 다음 진화단계를 예비하고 있습니다.
즉 유인원은 사람으로 진화할 유전적 소인을 이미 가지고 있는거지요.
그 화살 유전인자가 표적을 맞히는 방식에 따라
사람, 고릴라, 침팬지 등으로 동시에 다양하게 진화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이론대로면 사람은 원숭이보다 더 진화한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원숭이가 사람의 조상인 것도 아니지요.
화살이 타켓의 어느부분을 때리는가에 따라 유전적 불안정성이 커지는 경우
여러개의 잃어비런 고리를 가지고 유전적 안정성을 확보할 때까지
계속 진화하고 반대로 유전적 안정성을 확보할 때는 진화를 멈추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과 고릴라와 침판지와 오랑우탄은 동일한 공동조상에서
화살유전인자의 공격을 받아 동시에 진화한 것입니다.
이는 골프에서 타구가 어떤 골프클럽을 쓰는가에 따라 비거리가 긴 경우와
짧은 경우가 있는 것과 같아서 인간은 유전적불안정성에 의해 멀리 날아간
경우이고 고릴라나 침판지는 유전적안정성에 의해 조금 날아간 경우지요.
두 개의 주사위를 던지는데(공동조상)
두 주사위 숫자의 합이 짝수가 되어야 합니다(유전적 안정성)
짝수가 안나오면 나올때가지 계속 던지는데
몇번을 던지든 그 나온 숫자를 모두 더합니다.
그래서 한번 던졌는데 6과 4가 나와서 합이 10인 경우가 침판지.
처음 5와 2가 나와 홀수이므로 다시 던져 2와 3이 나와 총합이
12인 경우가 고릴라.
하필이면 홀수가 계속 나와서 거듭거듭 7번이나 던져 총합이 100이
되어버린 것이 인간.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 경우 침판지나 고릴라는
인간의 조상이 아니지요.
화살이론의 핵심은 진화를 결정하는 특수 유전자가 존재하며 돌연변이의
이유로 유전적불안정성을 가진 종이 있으면 유전적 안정성을 확보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타켓을 때려 진화가 일어나고 안정성을 획득하면
멈추는 것입니다.
타켓을 때릴 때까지 쏘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종(특히 식물)은 자가수정을
기피하는데 이는 유전적안정성을 획득하기 위한 걸로 봐야겠지요..
진화론은 처음부터 다시 연구되어야 할것입니다.
단성생식의 경우 그 화살유전자가 없다고 보지요.
화살과 타켓이 구분되지 않거나.
단성생식의 경우 자연적 진화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모든 종의 본질적은 특성은 자기제어가 된다는 것인데 단성생식이
무한진화를 개시하면 제어가 안되므로 어떤 괴물이 나올지 알수없습니다.
생태계는 존재가 불가능하게 되지요. (단일 종의 지구정복)
화살유전자의 존재는 유전정보 내에 통제가능한 수단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유전적 안정성을 확보할 때까지 진화하며 유전적안정성이 없는 종은
생존경쟁에 의해 자연도태되는 것이 아니라 몽고병이나 혈우병 환자가
살아남을 확률이 적은 것처럼 자연사멸하게 된다고 봅니다.
대부분의 잃어버린 고리들은 생존경쟁에서 도태된 것이 아니라
유전적불안정성에 의해 후손을 남기지 못해 자연사멸한 것입니다.
잃어버린 고리들이 경쟁에 의해 죽는다면 경쟁이 매우 치열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적절한 제어가 안되어 대부분의 종이 죽기 때문입니다.
전부 죽거나 전부 살거나죠. (단일 종의 생태계 독점)
유전적안정성을 확보한 종은 결코 안죽습니다. 경쟁력이 없으면 희소가치
덕분으로 천적이 없어져서 더 살기쉽게 되지요. 생존경쟁에 뒤지는 토끼가
줄면 늑대도 줄고 늑대가 줄면 다시 토끼가 늘어나는 식으로 경쟁력없는
종도 잘안죽습니다.
[지구 최초의 종은 단성생식을 했다. 이때 진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 시점에서 특별한 변이에 의해 화살유전자가 생겨나고 동시에
양성생식이 시작되어 비약적인 진화가 일어났다. 진화한 종에서도 가끔 변이에
의해 퇴보가 일어나 단성생식을 하는 종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 종으로부터의
진화는 없다]
이런 가설.
그런데 전 창조론자거든요. 기독교적 창조론은 아니고 창조적진화론자라고
해야 맞지요. 전 무신론자가 아니므로 최초의 진화를 유발한 화살유전자는
신의 개입에 의해서만 설명될수 있다고 봅니다.
[화살유전자(진화를 유발하는 진화담당유전자)는 잠복해 있다가 돌연변이에
의해 유전적 불안정성이 생겨나면 일제히 활동을 개시하여 잠깐 동안에
수많은 종을 양산한다. 유전적안정성이 확보되면 화살유전자는 활동을 멈추고
다시 잠복에 들어간다]
[공룡의 멸종 또한 멸종유전인자가 활동을 개시하여 유전적 자살를 한
것으로도 볼수 있다. 인간의 수명도 수명조절 유전인자가 수명을 한정하는
것이지 그냥 늙어죽는 것은 아니다. 인간세포의 복제회수는 지정되어 있다.]
사막의 생물들은 비가 오지 않으면 활동을 멈추고 가사상태에서 몇 년이고
비를 기다린다. 인간의 유전정보에도 대기방사선이나 공해물질 등
외기요인에 반응하는 부분이 있어 일제히 무정자증을 일으켜 인류가
어느날 멸종할지도 모른다. [지구생태계의 자기보호 프로그램 가동]
스카이콩콩님을 위한 논리게임.
논리가 중요한(중요하다는 건 순서상 1번이라는 의미.) 것은
우리가 판단할수 없다고 말하는 모든 문제를 실상 정확하게 판단해낼수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모든/ 절대]가 들어가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논리가 아니다.
논리란 [어중간, 적당히, 대충, 보통] 이런 말을 사망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1+1= 2 <- 절대로 2임. 반드시 2임. 모든 경우 2임. 고로 논리임.
한 대 맞은데 + 한데 더맞으니 = 존나이 아픔 <- 절대로? ???? 논리아님.
과정이나 결과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1번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히 그렇다. 과정은 1번이 아니다.
무엇이 중요한가?
우리는 흔히 말하기를 시작/도 과정/도 마지막/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깨부셔야 할 고정관념이다. 보자.
결실을 획득하는 농사법 - 원시사회의 채집경제.
과정에 집중하는 농사법 - 조선시대식 노동집약적 영농.
시작에 중점을 두는 농사법 - 현대식 대규모 시설영농.
미국 농사는 파종만 하면 끝이다. 그런데 거기에 돈든다.
트랙터 비료 농약 엄청나다. 그러나 일단 심어만 놓으면 대지가 알아서
키워준다. 원시시대 삼한시대의 영농은 반대다. 심지도 않고 산천을
헤매고 다니며 수확만 한다.
제초제- 파종 전에 뿌린다.(시작에 에너지 투입)
김매기- 풀이 자라면 뽑는다.(과정에 에너지 투입)
컴퓨터도 보자.
시작만 클릭하면 저절로 되는 빠빠라기 컴퓨터는 윈도95.
중간에 열심히 노가다를 해야 하는 스카이콩콩 컴퓨터는 MS도스(?).
끝부분까지 하나하나 명령어를 입력해야 하는 포트란 베이직시대의
컴퓨터는 원시컴퓨터.
컴퓨터가 발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과정이 생략된다는 것이다. 시작이 다다.
이것이 이 세상의 참된 이치다.
이러한 이치를 터득한 자는 가히 깨달은 자라 할 수 있다.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작과 과정과 결과]의 부분으로 되어있는데
어떤 것이든 그것이 발전한다는 것은 결과가 과정 속으로 압축되어 들어가고
과정이 시작 속으로 압축되어 들어가는 과정이다. (사라지지는 않는다)
조선시대의 밥하기.
시작- 쌀을 앉힌다. 과정- 장작불을 땐다. 결과- 뜸을 들인다.
현대식 밥하기.
시작- (밥짓기는 전기밥솥으로) 과정- (보온은 보온밥통으로)
첨단식 밥하기
시작- 쌀앉히기만 하면 보온까지 알아서 다해줘요. 끝. (전자동 전기밥솥)
여기서 깨우쳐야 할 것은 시작은 결코 생략할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문명이 아무리 발달되어도 마찬가지다.
100년 후에라도 천년 후에라도 시작은 같다.
어떤 것이 발전한다는 것은 과정과 결과가 압축되어 시작 속으로 들어와
원스톱서비스가 된다는 것이다.
예를들면 몇 달전 테레비젼에 떠든 공압식자동차- 시작(밧데리)은 가만 두고
과정만 개발했다. 그 결과 돈낭비 시간낭비 머저리짓. 깨달은 이는 무슨 일을
착수하든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판단가능하다.
발명이든 개량이든 발전이든 그것은 결과를 과정 속으로 말아넣고
과정을 시작속으로 압축해 넣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터득하면 발명을 열배로 많이 할수 있다.
자동차의 발명.
시작- [시동]을 건다. 과정- 엔진이 작동한다. 결과-바퀴가 구른다.
신라시대자동차 (인력거)
시작- 수레를 잡는다. 과정- 수레를 민다. 결과 -[바퀴]를 열심히 굴린다.
근세 18세기 자동차 (자전거)
시작-자전거를 탄다. 과정- [페달]을 밟는다. 결과- 바퀴가 구른다.
여기서 드러난 바
진보라는 것은 (그 어떤 종류의 진보이든) 결과(바퀴굴리기)에 인력을
투자하던 것을, 과정(페달밟기)에 노가다를 투입하는 것으로
또 시작(시동걸기)에 힘을 들이는 걸로
인간의 에너지 투입부분이 점점 앞으로 당겨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법칙은 절대진리이며 예외는 없다]
우리가 통신에서 진보를 부르짖는 것은 또 역사의 발전이라는 것은,
문명의 발달이란 것은 간단히 말하여 인간의 에너지 투입부분을
말초적인 부분에서 그 알대가리 부분으로 당겨보자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그 출발점은 머리다. 모든 인간행위는 머리에서 시작하여
가슴을 통과하여 손발로 끝난다. 문명의 발전 역사의 진보란 머리에서
해결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진보니 발전이니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핵심을 모른다.
왜 발전하지 않으면 안되는지 왜 민주주의를 해야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이치를 깨우쳐야 한다. 발명을 할 때 그냥 머리를 맹렬히 굴린다고 되는게
아니고 [어떻게 꽁무니를 과정 속으로 집어넣고 과정을 대가리 속으로
집어넣지?] 이렇게 접근하면 금방 답이 나온다.
다시 논리로 돌아가자.
물론 운전(시작)도 엔진(과정)도 결과(바퀴)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건 논리가 아니다. 논리로 풀어보면 바퀴를 엔진에 종속시키므로서
인간은 바퀴에서 손뗀다. 엔진을 운전에 종속시키므로서 인간은 엔진에도
손뗀다. 그러나 아무리 발전해도 운전 안해도 되는 자동차는 없다.
물론 운전도 그 자체로 하나의 과정으로 보고 압축하여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최초의 시작(그것은 자동차에 올라타는 일이다)도 안하고
자동차를 이용하는 방법은 절대로 없다. 이건 절대진리다.
11호 자가용(건강한 두다리)는 일종의 바퀴다. 자전거의 페달은 일종의
엔진이다. 뒷부분은 앞부분에 집어넣을수 있으나 앞부분은
뒷부분에 집어넣을수 없다. (또한 절대진리다)
앞부분을 뒷부분에 집어넣은 자동차 -> 무한동력 원동기.
인생을 말한다면
깨달음이야 말로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생활은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은 결과라 할 수 있다.
깨닫지 못하므로 생활이 분주하고 생활이 안되는 자가 죽음이 두려운 것.
죽음에 에너지를 투입하는자(쓰지도 않고 벌기만 하는 자)
과정에 에너지를 투입하는 자(열심히 소비하며 사는 생활인들)
시작에 에너지를 투입하는 자(깨달은 자)
나는 언제나 시작할 뿐이다.
과정은 시작 속에 다 들어있고 죽음은 삶 속에 다 들어있다.
깨닫는다는 것은 죽음(결과)을 삶(과정) 속으로 압축해 넣고
삶을 깨달음 속으로 압축해 넣는다는 것이다.
고로 깨달은 자에게는 삶(생활)이 없고 삶이 없으므로 죽음도 없다.
전쟁무기의 발전
총]- 시작(발사)만 잘하면 과정(총알의 비행)과 결과(적의 사망)
에 대한 에너지투입은 생략되어도 좋다.
창]- 과정(칼의 휘두름)만 잘하면 적이 알아서 사망한다.
돌]- 죽을 때 까지 패야된다. 적이 반드시 죽는다는 보장은 없다.
과정의 단계들이 존재하며 진보는 결과를 과정에, 과정을 시작에
압축해 넣으므로 과정을 단축하는 것이다. 거꾸로 과정을 결과에 시작을
과정에 압축해넣는 방법은 절대로 없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바느질이나 재봉틀이나 바늘에 실을 끼우는
시작을 생략하지는 못한다.
죽음이 중요한 자는 죽음을 삶에 압축해 넣는데 실패한 이들이요
삶이 중요한 자는 삶을 깨달음에 압축해넣는데 실패한 이들이다.
무엇이든 압축된다. 그러나 순서를 거스르고는 절대로 안된다.
그대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좋은 스피커를 백만원 주고
샀다. 그대 이렇게 말한다. [음악을 듣는데는 무조건 소리만 잘나면 되는기야]
과연 그럴까? 스피커는 결과를 보장한다.
근데 그 스피커가 소리가 삑삑 하고 잘안나는 이유는?
과정의 역할을 하는 전축이 고물이기 때문이다. 이때 나는 이렇게 말한다.
[돈 버렸다.]
과정이 중요함을 깨달은 그대가 200만원을 주고 전축을 샀다.
그러면 소리가 잘나는가? 안돼안돼~! 시작이 잘못되면 다 소용없어.
좋은 노래를 불러줄 가수가 없잖아. 그게 시작인거지. 아무리 전축에 고급
스피커라도 가수가 좋은 노래 불러주지 않으면 소용없어.
모로 가서는 서울을 갈수없다.
이러한 이치를 아는 이는 쓸데없이 머리 굴린다고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이 없게 된다.
♧♥
오반아 그렇게 수업시간이 기둘려지냐?
껄껄껄. 그려 맞아부리. 오반은 논리를 배워야 혀.
그려야 시비분별을 알게되고 시비분별을 알아야 시비분별을 떠나게 되는 것이여.
가르쳐 주지 이건 중요하니 밑줄 쫙에 암송해.
[중요하다는 것은 1 대 1로 비교된 상태에서의 상대적 중요성이다.
비교된 것은 절대로 평형이 아니다. 평형일 때 둘은 하나로 통합되어 보다 큰
다른 전체에 의속하므로 개별자로서의 독립적인 기능을 상실한다. ]
이런 원리에 의해 시작도 과정도 끝도 다 중요하면 어느쪽도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된다. 논리는 반드시/ 절대/ 모든의 영역이다.
오반아 종이를 꺼내어 긴 선을 그려보거라.
거기에 처음 점을 찍는데가 시작이다. 그 시작에서 계속 전개하면 과정이 된다.
그런데 뭐가 이상하지 않아?
벌써 이상한 느낌이 들지? 뭐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그런 생각이 바로 직관력이야~! 그런 느낌이 들면 그 느낌이 맞는거야.
자 오반군은 선을 그렸는가? 점을 그렸는가?
오반군은 처음 시작에서 점을 그렸어~! 근데 선으로 변해부렀어.
여기에서 패러독스의 발견. 자 뭔가 머리에 전기가 번쩍하고 불이 켜지지?
선의 시작은 점인데 그것이 시작이기 위해서는 점이 전개되어야 한다.
점이 전개되면 선이 되어버린다. 즉 선이 점을 담보한다는 것이야.
그렇다면 선을 담보하는 것은? 그것은 면이지.
면을 담보하는 것은? 입체이지.
입체를 담보하는 것은? 공간이지.
아 뭔가 전기가 오는 것 같았는데 다시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고?
엉아가 정리해주께 새겨들어. 지금부터는 논리야. 장난이 아니라구.
논리에서는 항상 절대/ 모든/ 반드시가 들어가야 혀. 적당히는 엄써. 따져보자구.
오반은 최초 점을 시작했지 선을 시작하지 않았다.
점을 전개하므로 선이 되었다.
여기서 점의 관점과 선의 관점.
점의 관점에서는 점의 시작과 점의 전개가 있었다.
선의 관점에서는 선의 시작만 있고 선의 전개는 없었다. 왜?
선을 전개하면 이미 면이 되거든.
그렇다면 오반군은 선을 전개하지 못한 셈이 되네?
왜냐하면 선을 전개하면 면이 되는데 오반군은 선을 그린거지
면을 그린거이 아니니까. 자 이제 정리가 되었지?
다시 머리에 불이 들어왔나? 반짝반짝?
논리는 아이큐가 뒷받침이 안되면 진도를 못따라가여.
선의 관점과 면의 관점.
오반의 선은 점의 시작과 점의 전개인데 점은 길이가 없응께로
오반이 길게 그은 선은 여러개의 점(점의 집합)인 거야 그리고 거기엔
시작만 반복되고 과정은 없어. 왜냐구? 점은 길이가 없으니까.
오반이 길게 그은 선을 하나로 통합하면 그건 선의 시작이지 선의 과정은 없어.
선의 과정이 있으려면 면이 되어야 하거든.
자 오반군 다시 볼펜을 들어.
선 밑에다 선을 하나 더긋구 또하나 더 그어라구.
이제 면이 되었지? 그렇다면 그게 선의 과정인거야~! 그렇지?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입체의 시작이 되는 거지.
점의 시작은 점
점의 과정은 선. 이를 합치면 선의 시작.
선의 과정은 면. 이를 합치면 입체의 시작.
입체의 과정은 공간. 공간의 과정은 없어. 끝.
이를 다시 하나로 통합하면 모든 종류의 기하학적 도형(점, 선, 면, 입체, 공간)
은 공간의 시작일 뿐 그 과정(전개)은 없다. 왜?
압축되어 공간 속으로 다 들어갔으니까.
점의 과정은 압축되어 선의 시작속으로 들어가고
선의 과정은 압축되어 면의 시작속으로 들어가고
면의 과정은 압축되어 입체의 시작 속으로 들어가고
입체의 과정은 압축되어 공간의 시작 속으로 들어간다.
모두 압축되어 들어가 버린다. 그리하여 최대의 관점. 공간차원에서 보면
언제나 시작 뿐이고 과정은 없다. 과정은 어디로 갔나요?
압축되어 자기 몸 속으로 들어갔어요. 알갔어여?
손가락은 압축되어 손으로 들어가고 손은 압축되어 팔로 들어가고
팔은 압축되어 몸으로 들어가네여. 언제나 시작만 있고 과정은 없네여.
자 이제 오반군은 서울로 간다.
한걸음을 떼면 시작이다. 두걸음을 떼면 과정이다. 근데 걸음은 한걸음이 걸음이지롱.
즉 시작 + 시작인 게롱. 오반은 두 번 시작한거지. 과정이 되려면 이걸 합쳐야지.
걸음에 걸음을 합치면 걸음걸이가 되지.
걸음 오반의 두 걸음은 걸음걸이의 시작인가? 과정인가?
걸음걸이는 복수개념이므로 두걸음은 당연히 시작이지.
자 본래로 돌아가보자. 오반은 시작 + 과정을 했는데 다시 시작이 되었잖은가?
우리의 인생은 이와 같아여.
언제나 시작 뿐이지 과정은 없어. 삶은 이미 죽음을 통일하고
태어남은 이미 삶을 통일하거든. 그것을 깨달은 자 삶과 죽음을 초월한다네.
시계를 보자.
1초는 시작이지. 2초는 과정이지.
1초 + 2초는 1분의 시작이지.
1분 + 2분은 1시간의 시작이지.
1시간 + 2시간은 하루의 시작이지.
하루 + 이틀은 일년의 시작이지.
1년 + 2년은 평생의 시작이지.
평생 + 두평생은 엄찌.
그러니 오반은 평생 시작밖에 못하는거야.
과정은 언제나 시작 속으로 압축되어 들어갈 뿐이야.
하느님이 세상을 맹글 때에는 수학을 이용해 맹글었거덩.
수학은 반드시/ 항상/ 절대로/ 꼭/ 모든/ 의 법칙이 지배하거덩.
그러므로 수학에는 과정이 엄써.
1은 있는데 2는 없다구.
만약 2가 생기면 그 2는 다시 압축하여 더 큰 1로 만들어버리지.
1+1=2 -> 1분의 2.
이는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지. 과정은 중복이여. 그러니 압축되지.
말하자면 1,1,1,1,1,1,1,1,1,1 이렇게 표시하면 이게 과정인데 압축하여
10 하나로 땡, 끝이여.
수는 언제나 1이어야 한다. 그 어떠한 수든 하나의 자리로 표현될수 있어야 한다.
만약 하나의 자리로 표현할수 없다면 그것은 수식이 되지. 이를 테면 {□ + 1}
수식은 또 하나의 수식이야.
하나의 수식으로 표현할수 없다면 등식을 쓰지. 등식은 하나의 등식이여.
하나의 등식으로 표현할수 없다면 방정식이 되지. 방정식은 하나의 방정식이야.
하나의 방정식으로 표현할수 없다면 이때는 함수식이 되지.
하나의 함수로 표현할수 없는 것은? 없어. 그기서 끝. 더없다구.
거기가 수학의 극한이여.
우리는 언어를 뒤죽박죽으로 쓰지.
네말도 맞고 내말도 맞고 다맞다면 다틀렸다는 거지.
다 중요한 것은 다 중요하지 않은거지.
논리는 좀 복잡하긴 하지만 이 세상을 [어중간, 과정, 현재진행, 적당히, 대충, ]
이 아닌 0과 1로 표현하는 방법이야.
0은 없는 거구 1은 있는 거구 그 중간과정은 없어.
0은 절대로 0이구 1은 모든 1이지.
진리를 믿어야 혀. 좀 복잡해서 그렇지.
이 세상 모든 법칙을 우리는 명백히 규명할수 있어.
법칙 : 모든 존재는 51 대 49의 불균형이며 그 불균형부분만큼 운동이 개입한다.
만약 존재가 균형을 취하여 50 대 50이 될 때 운동은 정지하고
운동이 정지하면 기능을 상실하고 기능을 상실하면 독립성이 사라지고
독립성이 사라지면 더 큰 다른것에 자기존재를 의속시키며 그때 개별자의
성질은 없어진다. 개별자는 보편자 속으로 다운.
저울의 한쪽은 항상 기울어져야 한다. 만약 좌우대칭이 완벽해서 평형이 될 때
존재는 소멸하고 다른 것에 의탁한다.
돌고 있는 팽이는 원심력과 구심력이 51: 49로 불균형이다.
모자라는 부분은 팽이의 운동이 카바한다. 원심력과 구심력이 같아질 때
팽이는 운동을 정지한다. 더 이상 팽이는 팽이가 아니다.
독립할수 없으므로 쓰러지고 지구의 일부분이 된다.
고로 어떤 것이 개별자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불균형하다는 것이며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운동한다는 것이며 만약 완벽한 평형을 이룰 때 블랙홀의 특이점 속으로
아웃되어버린다. 즉 절대 空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존재를 성립시키는 기본값은 51(플러스 우주)과 49(마이너스 우주)의
간격 2이며 그 크기가 우주의 크기를 담보한다. 우주의 호흡은 그 간격을 메꾸려는
운동이다. 그 2의 정확한 크기를 알아내면 우주의 전부를 파악할수 있다.
쇠귀에 목탁을 두르리면 뭐하냐마는.
♠
선은 과연 점의 집합인가?
점을 모아놓으면 여러개의 점이 되거나 큰 점이 되지 어찌 선이 되남?
논리영역에서는 정확하게 정의를 해야 하는 것이라~!
논리학이 아니면 그냥 대충 점으로 보이면 점이구 글치만.
엄밀하지 않고서는 [대충 어림짐작 적당히 우물쭈물]은 논리가 아니거덩.
자 한권의 책이 있어.
이걸 찢으면 어떻게 찢던지 상관없이 여러면의 페이지로 분할이 되어.
거꾸로 여러 면을 이어붙이면 책이 되남?
아건 아녀~! 면이 책이 되려면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제책을 해야 되는데
그 방법은 동양에서는 채륜이 종이를 발명한 이후고
서양에서는 카이사르가 개발하여 주장했지.
선을 분할하면 어떻게 분할하던 점이 되어.
그러나 점을 아무렇게나 집합하면 선이 안되여.
이게 대충 어림짐작으로 아는 것 하고 제대로 아는 것 하고 차이지.
그려서 논리가 필요한 것이여 알간모르간?
자 종이 위에 점을 하나 찍자.
그 위에다 점을 하나 더 찍어보자. 천번을 찍어도 그냥 점이야.
한번 찍으면 1점이고 백번 찍으면 백점이야 고마찍어,
[점 + 점 = 점] [점 + 점 + 점 + 점 = 점]
[ 1 × 1 = 1 ] [ 1×1×1×1×1×1 = 1 ]
본래 점이라는 것은 그냥 점이 아니고 [마주치는 점]인 것이야.
점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위상공간에 구형의 두 물체를 두고
이를 충돌시켰을 때 부딪히는 점이 점인 것이야.
즉 점은 그냥 점이 아니라 대칭점인 것이지.
이걸 2차원 평면 위에서 이해하려면 좌표를 그려야 해.
X축과 Y축이 마주치는 점이 점이지.
고로 점은 그냥 점이 아니고 항상 대칭점이거나 균형점, 꼭지점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야.
점은 그냥 점이 아니라 어떤 지점인 것이지.
거기엔 명백한 기능이 있고 역할이 있어, 점의 역할은 쉽게 말하자면
무게중심이지. 지구중력의 중심점. 자동차 바퀴축의 중심점.
어떤 힘의 전달이 있을 경우 그 힘에는 반드시 대항하는 힘이 존재해.
구심력과 원심력, 인력과 척력, 인장력과 팽창력. 압력과 저항력.
플러스와 마이너스인 이 두 개의 힘은 반드시 하나의 점으로 집결되지.
고로 어떤 힘의 작용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점으로부터 출발혀.
이를테면 유리창이 깨어지던가 종이가 찢어지던가 공이 펑크가 나던가
하나의 점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예외는 없어.
모든 운동의 작용은 점으로 부터만 유발되고 예외는 없다.
<-알아두면 보약이 되는 절대진리
내 길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오반 한사람을 위해서가 아니지.
말싸움에서 이겨보려는 것도 아니고.
이런 이야기 어디 다른데서 들을수 없어.
서점에 책이나 뒤진다고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여.
이건 논리이기 때문이야 배워서 남주남?
자 머리 식혀가면서 생각해 보자. 내 이바구의 포인트는
[점의 집합은 선]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거꾸로 [선을 분할하여 점]
정확한 인식에 도달하자는 거.
이게 뭔소리인가 하면
위상공간의 분할 -> 입체, 입체의 분할-> 면, 면의 분할-> 선,
선의 분할-> 점. 이렇게 가는 것은 맞는데 그 반대는 아니라는 것이여.
수학시간에 필요조건 충분조건 배왔으면 알아듣것지?
왜 모든 것은 시작일 뿐 과정은 없는가?
모든 운동 및 작용은 위상공간>입체>면>선>점의 한 방향으로만 진행하는데
관점을 위 전개에서 앞서는 위상공간에서 보면 시작이고
입체에서 보면 과정이고 면에서 보면 끝이고 하는 식으로 진행이
되더란 말쌈이야.
그러니 면에서 보면 시작, 선에서 보면 과정, 점에서 보면 끝.
또한 입체에서 보면 시작, 면에서 보면 과정, 점에서 보면 끝.
뭐든 점에서 끝난다구. 이게 우주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운동 및 작용의
보편적인 법칙이며 절대로 맞는 절대진리야 알아두면 보약이지.
그럼 오반의 헷갈리는 이바구는 뭔가?
그건 [이중기준의 오류]라는 것으로 두 개 이상의 관측점을 가지고 있거덩.
요상한 선을 쭉 그어놓고 여기까지는 35초고 우짜고.
논리란 그러면 안돼여. 규칙위반이여. 긍거엄써,
현대와 기아가 농구를 해서 현대가 이겼지.
오반의 판정 -- 많이 넣은 쪽이 이긴걸로 하면 현대 승리
적게 넣은 쪽이 이긴걸로 하면 기아 승리, 고로 둘다 승자요 패자임.
종이 위에 점을 찍는다 선을 긋는다는 오반의 관점이야 즉 주관이지.
이미 오반의 관측사실이 사태에 개입했어, 오반은 제 3자야.
사실에서 손떼, 뒤로 물러나서 관측만 하란 말여.
점이나 선은 위상공간 안에서 그 기하학적 내부논리로 규정되는 것이지
인간이 점을 찍으면 점이고 선을 그으면 선인감? 아니지라. 그건 아녀.
모든 판단의 절대적인 근거는 자연계 내부에 존재하는 원리이며
힘과 힘의 작용으로만 드러나지. 그 힘의 전달경로를 따지는 것이여.
야구장에서 투수와 타자의 대응에서 힘의 질서는 공간형태,
타자의 타격자세에서 힘의 질서는 입체형태,
공과 방망이가 맞는 순간 힘의 질서는 면의 형태.
공이 날아가는 과정에서 힘의 질서는 선의 형태,
공의 낙하지점에서 힘의 질서는 점의 형태.
즉 위상공간 안에 분산되어 있는 힘이 입체로 면으로 선으로 점으로
점점 범위가 좁아져서 운동 혹은 작용이 유발되는 것이여.
중요한 것은 점이든 선이든 면이든 모두 질서라는 것이여,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정의를 내릴 수가 있지.
점/ 선/ 면/ 입체/ 공간/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다섯가지 양상의
보편적인 질서이다. 여기에서 더하거나 뺄수는 없다.
공간은 질서도가 0인 상태(엔트로피가 가장 낮은 최대의 무질서)
(엔트로피를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최대의 무질서는 동시에 최대의
양호한 질서상태이다. )
엔트로피를 중가시켜 질서도를 높이면 차례대로 입체>면>선>점에
이르고 더 이상의 질서는 없다.
말했지. 점은 대칭점, 균형점, 꼭지점이라고.
자 넓은 교실 (20평) 안에 열명의 아이(힘)들이 뛰놀고 있다.
근데 교실 맨 뒤쪽에서부터 길다란 판자로 막은 뒤 밀어붙이면 힘들은
자연히 입구쪽으로 몰리지. 이때 힘들은 매우 무질서하게 뛰놀므로
아이들이 몰려드는 방향은 사방에서 한 점을 향해 집결하지.
이때 힘의 방향은 최대의 질서도를 가진다구. 즉 힘이 한방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전후좌우상하 모든 방향에서 한 점을 향해
몰리는 것이야. 가장 질서있다는 것은 그걸 말하는 것이야.
이해가 안되남? 오반이 짧게 말하는데 내가 길게 말하는게 아녀.
오반의 헛소리에 대해선 딱 한마디 -> [이중기준의 오류]
질서와 무질서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배워야 혀.
60명의 학생이 담임선생님을 일제히 보는 것은 질서 무질서?
한명의 담임선생님이 60명의 학생을 보는 것은 질서 무질서?
위상공간(60명의 학생)은 자기 내부의 배열에서는 최대의 질서이면서
힘의 대응에 있어서는 최대의 무질서를 가진다. 점(담임선생님)은
자기 내부의 배열에 있어서는 최대의 무질서이면서 힘의 대응에
있어서는 최대의 질서를 가진다.
모든 힘의 작용은 위상공간에서 비롯되어 입체>면>선>의 압축과정을 거쳐
점에서 촉발된다. 압축과정은 엔트로피의 증가를 의미한다.
그런 고로 우리는 점을 이렇게 정의 할수 있어,
[점은 위상공간 안에서 내적 양상으로는 최소의 질서상태이며
외계와의 상호대응에 있어서는 최대의 질서상태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그 질서는 무엇인가? 위치이지. 점은 위치를 나타내는 거야.
여기서부터 질서를 하나씩 추가하여 가는데.
위치 + 순서(앞과 뒤)은 선.
위치 + 순서 + 방향(좌,우)는 면.
위치 + 순서 + 방향 + 크기(안과 밖)은 입체,
위치 + 순서 + 방향 + 크기 + 위상(중심과 주변)은 공간.
간단히 점은 최소의 질서상태를 나타내는 것이여.
그러나 외계와의 대응에 있어서(운동작용)는 최대의 질서이지.
그럼 이러한 이바구는 다 뭘로 정리가 되는가?
시작(최대의 질서상태=공간)
끝(최소의 질서상태=점)
모든 운동 작용은 [공간=>점]의 한 방향으로만 이행한다.
힘의 작용은 시작에서 유발되고 끝에서는 끝나므로 끝부분에서는
힘의 작용이 없다. 고로 중요성도 없다.
고로 모든 작용은 [시작->끝]의 한 방향으로만 이행한다.
과정은 무엇인가? 과정은 그 중간인 공간과 점 사이의 입체, 면, 선이지.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구.
파파라=> [시작만 있고 끝은 없다. ] 다른 말로 [시작은 1이며 끝은 0이다]
다른 말로 [우리의 눈에 비친 이 세상은 아날로그 형태로 존재하지만
거기엔 이미 인간의 주관이 개입했고 존재의 사실 영역은 디지털 형태로
존재하며 디지털 세계는 1과 0뿐이 없고 1은 시작 0은 끝 과정은 없다.]
논리란 아날로그 세계를 디지털 세계로 전환한 것이다.
모든 아날로그는 디지털로 전환가능하다. 아날로그는 두 개이상의 사건을
뒤죽박죽으로 섞어 보는 흐리멍텅한 관점이요 디지털은 복잡(중복)을
제거하여 순수하게 만들어둔 엄밀한 세계이다.
논리의 세계에선 오반처럼 34초의 관점, 35초의 관점, 36초의 관점들이
배제된다. 배중률에 의거해서 중간이 없기 때문이다.
우주는 오직 1과 0으로만 설명된다.
우리는 우주를 너무나 어렵게 이해한다.
우주는 질서이며 질서는 다섯가지 밖에 없다.
그것을 최종단계에서 1과 0으로 압축가능하며 0은 없는 것이므로
생략가능하고 결국 1 하나뿐이 없다.
우주는 복잡으로 되어 있는데 복은 중복된 0이고 잡은 섞인 1이다.
0을 제거하고 1을 찾아내면 우주는 곧 이해된다.
논리의 영역에서 보면 엄청 어려운 것도 너무나 쉽게 이해된다.
1과 0밖에 없으니까.
도처에 1이 숨어있다. 대칭점 1, 꼭지점 1, 균형점 1, 중심점 1, 소실점 1,
1을 찾아내는 것이 곧 깨달음이다.
1 안에 우주가 몽땅 들어 있다.
논리란 무엇인가?
오반을 위해 한마디 더한다면 교과서적 지식은 여그서 안통한다는 것.
대충 아는 것, 대충 들어맞춰 본 야그들은 논리게임에선 반칙이 되어.
사실 논리란 것은 무지 쉬운 것인데 사람들이 핵심을 몰라서 모르거덩.
논리란 간단히 말하면 1이라 할수 있다.
왜 1인가 하면 중복된 것을 제하고 잡된 것을 분리하면 남는 것이 1이다.
우리가 쓰는 십진기수법도 편하긴 하지만 비논리적인거다.
숫자가 10 단위로 꺽어지는 것은 인간이 지어낸 거지 자연엔 긍거없다.
자연에선 모든 수가 1이다.
논리란 그 1이 될 때까지 제하고 분리하는 거다.
구조물을 설치하는데 위험하다 싶어 버팀목을 하나 고이고
불안해서 하나 더 고이면 넘 복잡하다. 애초부터 튼튼한 걸로 하나만 고여도
될 것을 가느다란 버팀목 두 개면 번거롭잖은가?
애초에 벽을 더 두껍게 해서 버팀목 없이 해도 되자나.
그러면 이번엔 기둥이 무너지는뎁쇼?
얼씨구 허면 애초에 기둥을 더 큰걸로 해야되자나.
기초가 작아서 기둥을 더 큰걸로는 못하는뎁쇼?
그렇다면 애초에 기초(주춧돌)를 더 큰걸로 했어야 자나.
터다지기를 덜해서 기초를 큰걸로 못하는뎁쇼?.
그렇다면 애초부터 터를 제대로 다져야 하자나.
지반이 모래땅이라서 안되는 뎁쇼?.
어휴~! 누가 모래땅에 집지으래?
작은 버팀목 하나 번거롭다고 집을 다시 지으랴?
잉간들은 터를 잘못 골라서 번거롭게 살지만 자연은 긍거없다.
무식하다. 인간처럼 형편 봐가면서 적당히 알아서 하는게 아이다.
위에 쓸데없이 긴 이야기를 나열한 것은 뭐든 원인을 따지면 어딘가
자꾸 딴데로 샌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최초에 터를 잘 골라야지 건물이 되든 뭐가 되든 최적화를
지향할 수가 있다. 자연에서는 항상 가장 빠른 길로만 간다.
최단거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번거로운 일은 하지 않는다.
즉 인간이 집을 지을 때는 뭐
[아따 땅값비싼데 모래땅에라도 대충 집짓고 살지 뭐.
지반이 약하니까 2층만 짓지 뭐, 번거롭더라도 버팀목을 여러개 대지 뭐. ]
인간은 경비를 계산하므로 돈이 되는데로 형편맞춰 살지만
자연은 1억이 들던 100억이 들던 신경안쓴다. 자연에선 남아도는게
에너지니까.
이를테면 지진이 나는데 [에흠 이번에 고베를 때릴라 카니 힘이 딸리고
시카고를 함 때려봐?] 이런거 없다. 그들은 경비가 얼마들던 신경안쓴다.
존냥 무식한 거이 자연이다.
화산이 폭발하는데 [도꾜를 함 뚫어봐? 아냐 거기 뚫었다간 존냥 욕먹어.
홋카이도나 한번 뚫자구~! 으잉~! ] 긍거없다. 그들은 가깝기만 하면
아무데나 뚫어제친다.
돈많은 재벌회장이다.
회장실 근처에 지저분한 것이 쪼까 눈에 밟히는데
청소원 불러 치울라니 번거롭다. 청소원은 총무과 담당인데 과장을 부르랴?
이사를 부르랴? 엥이 안되가서 외부용역업체에 전화해. 즉 돈많기 때문에
경비가 얼마들던 그들 편한데로 하는 것이다.
편하다는 것은 번거롭지 않다는 것, 에너지가 얼마가 들던 중간에 거쳐가는
단계의 회수만 적으면 그들로서는 만족이다.
중간에 거쳐가는 단계를 줄일려 하는 것. 이것이 자연의 보편적인 성질이다.
위에서 우리가 알아낸 것은 중간에 작은 버팀목 하나 줄일려다가
집터를 딴데로 옮기게 생겼다는 것. 단계를 줄일려면 애초부터 줄여야지
중간에 적당히는 안통한다는 것. 뭐든 끝까지 가봐야 한다는 것.
논리의 세계도 이와 같아서 한가지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원인을 찾고 그 원인의 원인의 원인의 원인의 원인의 원인의 ->
가는데꺼정 가봐야 한다.
그럼 그 최후에 뭐가 남는가? 1이 남는다.
자연에선 번거로운거 취하지 않는다. 뭐든 1이다.
한 개의 집터에 하나의 주춧돌, 하나의 기둥, 하나의 벽, 하나의 지붕.
그게 산이고 강이고 바다다. 자연은 늘 그런식으로 최단거리를 지향한다.
그들은 에너지를 절약하지 않기 때문이다.
논리란 그 1 찾아내기다.
객관규칙1 - 모든 것은 변한다. (제행무상)
주관규칙2 - 굳은 것의 변화는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객관규칙3 - 부드러운 것은 굳은 것에 의속된다.
주관규칙4 - 부드러운 것의 변화는 서서히 진행된다.
객관규칙5 -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다. (제법무아)
세상은 변화하지만 거기에는 변하지 않는 규칙이 있다.
유리창은 순간적으로 깨어진다. (규칙2)
물은 서서히 흐른다(규칙4)
바퀴의 운동은 피스톤의 운동에 속한다. (규칙3)
오반을 위한 역설의 변증법.
내가 오단계 변증법을 설파하는 것은
이것이 꽤나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 배워두면 통밥의 고수가 되어부러.
난 평균이상으로 통밥(직관력)이 발달한 사람이여.
그러나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개발한 거이 아니고 오랜 동안의 수련 끝에
도달한 것이지.
통밥이란 오래 생각 안해보고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느낌대로 찍어버리는
데도 결국 들어맞더라는 것이여.
이를테면 인천방송의 박찬호 야구중계사건 하나만 봐도
천리안에 반대가 90프로 찬성이 10프로이었는데
결국 문화부에서 수입추천을 해부리자나. 더 있어봐 여론이 어떻게 갈것인지.
사태의 본질을 순간적으로 꿰뚫어야 한다 말이시.
근데 말가지고 따지면 강경파가 이기기 때문에 여론대로 따라가면
뭐든 반대반대반대 이래 되거든.
여론이 옳은게 있고 여론이 그른게 있다 말이시.
그려서 이 오단계 변증논리를 통달하면 여론이 우예 돌아갈지
뚜르르 꿰게 된다 말이시.
지극한 것은 소박한 것과 통하는 법이어서 진리는 최종단계에서
지극히 단순한 평범과 자연으로 돌아가는 거지. 요는 그 중간에서 몇번의
반전을 일으킬 것인가. 정동과 반동은 2회씩 찾아오고 정동으로 끝나지.
고로 단순한게 결국은 이기는 거야.
예를 들면 운전연습을 할 때
후진으로 차고에 집어넣는데 핸들을 어느쪽으로 꺽어야 할까를
암 생각없이 저절로 손가는대로 꺽어버리면 그게 정답인데
생각을 하고 이쪽일까 저쪽일까 궁리를 하면 꼭 거꾸로 되거든.
본능적 감각, 자기 직관을 믿어야 한다는 말이시.
또 그걸 훈련을 통해 개발하면 보약인거라.
오반의 말하는 것을 보아하면 아직 자기직관을 안믿어.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 말이시. 그려서 자기자신을 테스트 하는거야.
오반이 열사를 깬다는 말은 열사더러 오반을 깨어봐라는 말이시.
타인을 통해 자신을 검증해보겠다는 생각이여.
열사가 오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오반이 열사를 시험해야 오반이
원하는 고수가 된 거이지. 고수하수 하는 말은 열받으라고 하는 말이니 오해
는 말더라고. 열을 받어야 라면을 끓이든 호떡을 부치든 하는 법잉께로.
그려서 결국은 이 직관이라는 것을 발달시켜야 하는 거인데
이게 무지 쉽다는 것이지 내말은.
어떤 상대방의 주장이 있는데 이걸 어이 깰 것인가?
내가 반박하면 그쪽에서도 반박하고 둘은 평행선을 달리게 되거든.
이 다람쥐 쳇바퀴를 어이 깰것인가?
방법은 하나뿐 상대를 반박하면서 동시에 포용하는 거이지.
갑- 나는 사과를 좋아한다. (주관) 을- 나는 바나나를 좋아한다. (주관)
둘의 주관은 서로 다르지만 둘 다 과일을 좋아한다는 것은 하나의 객관.
과일의 성질은 인공적이지 않고 천연적인데 있지. 고로 사과가 바나나보다
더 천연적임을 강조하면 갑이 이기지. (시중의 바나나는 퍼런 것을
수입해 와서 전기나 가스 카바이트로 구운 것임)
그런데 상대를 포용하기 위해서는 범위가 커야 하거든.
상대방이 들고나오는 논리보다 더 큰 논리를 들고 나오면 이기는 거지.
(맛이 달다 <- 작은 논리 천연식품이다 <- 큰 논리)
공간은 넓게, 시간은 길게 보면 무조건 이겨. 근데 첨부터 너무 넓고 길어서도
애초에 논쟁이 안되고 오직 상대방보다 길고 넓으면 되여.
이제 연습문제를 풀어보세.
한국과 일본의 축구실력이 대등할 때 누가 이길까?
한국 일본
체력 95 ○ × 체력 90
개인기 80 △ △ 개인기 80
조직력 80 × ○ 조직력 90
경기경험 작전능력 95 ○ × 경기경험 작전능력 90
자 이럴 때 어느 팀이 이기겠어?
이걸 순간적으로 알아맞힐수 있다면 직관력이 발달한 경우야.
근데 변증논리를 터득하면 이걸 눈감고도 간파할수 있어.
점장이의 직관력도 실은 이런걸 연습해서 된 거지.
개인기는 같고 일본은 조직력에서 앞서고 한국은 체력과 경험 및
코칭스태프의 작전능력에서 앞서지. 전체점수는 똑같고.
결론을 말하면 1차전은 한국승리 2차전은 일본승리 3차전은 한국승리야.
작은 경기서는 일본이 우세, 큰 게임에서는 한국이 우세지.
왜 이런 결론이 나오는가?
좁은 부분과 넓은 부분, 특수상황과 보편상황으로 구분이 가능한데.
좁은 부분은 부분전술, 넓은 부분은 전체적 전략.
특수상황은 돌발적인 변수. 보편상황은 객관적으로 파악가능한 상수.
여기서 체력은 좁은 부분이자 보편상황, 경기 당일의 컨디션에 좌우되는
정신력은 넓은 부분이자 특수상황이지. 개인기와 조직력은 좁은 부분이자
보편상황이나 상대적으로 조직력이 더 넓은 부분이 되고
경기경험은 넓은 부분이자 특수상황,
코칭스태프능력은 넓은 부분이자 보편상황이여.
어떤 법칙이 적용되는가 하면 1, 선 좁은부분 후 넓은부분
2. 선 특수상황 후 보편상황
3. 선 부분 후 상황
뭐냐하면 1차전은 체력과 개인기에서 승부가 나고
2차전은 조직력과 정신력에서 승부가 나고
3차전은 경기경험과 코칭스태프능력에서 승부가 난다는 것이여.
장기전이나 작은 경기는 체력과 개인기 정신력에서 승부가 나고
단기전이나 큰 경기는 조직력 경기경험 코칭스태프능력이 좌우혀.
이것을 조합해보면 한국은 1차전에서 2대1로 근소하게 이기고
2차전에서 2대0으로 대패하고 3차전에서 2대1로 근소하게 이긴다 말여.
전쟁이 장기화될지 금방 끝날지에 따라 전력을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가가 드러난다 말여. 단기전에선 힘으로 때우지만
길어지면 조직력이고 더 길어지면 작전능력이여.
손자가 위나라에 식객으로 있을 때 주인의 전차경주에 감독하여
자기 약한 말과 상대 강한말과 붙이는 전법으로 주인이 돈을 딴 수법이여.
물론 이게 시합마다 똑맞아 떨어지는 것이야 아이겠지만
대체로 추세는 간파가 가능하다 말여.
5변증논리에 대입하여 5차전까지 간다고 봐서
1차전 (자연요인)객관적으로 전력(개인기)이 강한 쪽이 이긴다. (기아승)
2차전 (개인요인)주관적으로 정신력이 강한 쪽이 이긴다. (현대승)
3차전 (사회요인)객관적으로 조직력(팀웍)이 강한 쪽이 이긴다. (기아승리)
4차전 (사회변동)주관적으로 경기경험이 노련한 쪽이 이긴다. (현대승리)
5차전 (수미일관)객관적으로 코칭스태프능력이 강한 쪽이 이긴다. (기아승)
물론 실제로 이렇게 안된 것은 중간에 변동요인이 생긴 탓이지만 눈여겨
봐야 할 것은 대체로 1차전에서 이긴 쪽이 5차전에서도 이긴다는 것이여.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가 하면 주관적 요소(정신력 경기경험)는 1회용이고
객관적 요소(개인기, 조직력, 작전능력)은 영구용이기 때문이지.
이창호와 유창혁이 서로 잘모르는 상태에서 바둑을 두면 누가 이길까?
1차전에서는 이창호 승
2차전에서는 유창혁 승
3차전에서는 이창호 승이지.
1차전에서는 서로 잘모르므로 전투가 어울어지지 않아
실리에 밝은 쪽이 이긴다구. 바둑은 집싸움이니까.
2차전에서는 어느 정도 파악되었으므로 전투가 어울어져 전투력이
강한 쪽이 이기지. 3차전에서는 이창호가 전투를 기피하므로 수계산이
빠른 쪽이 이겨.
이러한 원리는 하나의 시합 안에서두 적용이 되고
장기레이스에도 적용이 되지
초반에 강한가. 중반에 강한가. 뒷심이 좋은가이지.
초반에 강한 팀 OB, 쌍방울
중반에 강한 팀 빙그레 삼성
막판에 강한 팀 해태 LG
이게 절대적일리야 없지만 이걸루 주가예측 프로그램이나
승부예측이나 뭐든 예측하는데는 도움이 되어여.
신이 낸 시험문제
신은 인간에게 두 개의 주머니를 내려주었다.
왼쪽주머니에는 백만원을 넣어두었고
오른쪽주머니에는 1억원을 넣어두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 인간은 이 두 개의 주머니 중 하나나 혹은 두 개라도 취할수 있다.
주머니를 열지 않은 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며
왼쪽 주머니를 연 자는 백만원을 얻고
오른쪽 주머니를 연 자는 1억원을 얻는다.
두 개의 주머니를 다 연자는 왼쪽주머니의 백만원을 얻겠으나
그때 오른쪽주머니는 비어있다.
나는 너희 인간들이 어느쪽 주머니를 열지 이미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신은 인간들에게 주머니를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과연 신은 인간들이 어느쪽주머니를 열지 이미 다 알고 있을까?
신을 불신하는 자들은 당연히 두 개의 주머니를 다열어본다.
왼쪽주머니의 백만원만 챙겨간다.
신을 믿는 자들은 오른쪽주머니만 연다.
그들은 1억원을 얻는다.
당신이 이미 오른쪽주머니를 열었는데 비어있다.
당신은 이제 왼쪽주머니를 열려한다.
신은 그것을 알고있었기 때문에 오른쪽주머니를 비워둔 것이다.
황당 무지로소이다.
변증은 변화에 대한 설명이다.
객관규칙1 - 모든 것은 변한다. (제행무상)
주관규칙2 - 굳은 것의 변화는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객관규칙3 - 부드러운 것은 굳은 것에 의속된다.
주관규칙4 - 부드러운 것의 변화는 서서히 진행된다.
객관규칙5 -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다. (제법무아)
세상은 변화하지만 거기에는 변하지 않는 규칙이 있다.
유리창은 순간적으로 깨어진다. (규칙2)
물은 서서히 흐른다(규칙4)
바퀴의 운동은 피스톤의 운동에 속한다. (규칙3)
♠ 학문의 도
삿된 소리가 난무하는다.
진정한 학문의 도를 설파하지 않을수 없다.
내가 말하면 농담으로 알아듣는 고로 왕수인의 말을 인용하는다.
[편벽되거나 번쇄하거나 비루하거나 교활하거나 거짓되거나 간사한
형용들이란 어떠한 것인가? ]
1. 겉으로 인의를 표방하되 속으로 사욕을 추구한다.
2. 말을 꾸며대어 시속에 아부한다.
3. 진실하지 않은 행동으로 뭇사람의 칭송을 구한다.
4. 타인의 좋은 점을 덮어버림으로서 자기를 과시한다.
5. 타인의 사욕을 들추어냄으로서 정직한 체 한다.
6. 길길이 뛰며 상대를 이기려고 하면서 의를 쫒는다고 말한다.
7. 음흉하게 상대를 거꾸러뜨리려 하면서 악을 미워해서라고 말한다.
8.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시기하면서 시비에 공정하다고 말한다.
9. 마음껏 욕심을 부리면서 저는 좋은거나 추한거나 같이 대한다고 말한다.
진정한 것은 무엇인가?
여기부터는 누구의 말이 아니라 파파락의 말이다. 진정한 것은
애써 구하지 않아도 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언어의 칼, 투쟁의 창,
속임수의 방패가 필요하지 않다.
1. 보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보인다.
그것은 관(觀)이다.
2. 자유로우려 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유롭다.
그것은 자재(自在)이다.
3. 아름다우려 하지 않아도 스스로 아름답다.
그것은 미학(美學)이다.
4. 행하려 하지 않아도 절로 행해진다.
그것은 도(道)다.
5. 통하려 하지 않아도 절로 통한다.
그것은 달(達)이다.
이는 깨달음의 단계이다.
첫 번째의 관은 세상을 보는 자기만의 안목, 곧 주관을 획득함을 말한다.
오반이 표현대로 하면 黨派性의 획득이다.
관을 획득하면 보이지 않던 것이 마구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인간이 오반처럼 말이 많아진다.
아무나 잡고 시비하는 거다.
두 번째의 자재는 입지(立志)이다.
이는 뜻을 세우므로서 세속의 억압으로부터 구애됨이 없어지는 것이다.
오반의 말로 하면 의식화(意識化)이다.
자유는 의식에서 나온다. 유머와 여유 해학과 기지도 의식에서 나온다.
뜻을 세운자만이 시류의 억압으로부터 한걸음 물러서 한가로울수 있다.
세 번째의 미학은 중용(中庸)이다.
중용은 만남이다. 만남은 세상과의 만남, 사회와의 만남, 자연과의 만남이다.
홀로 고립되어서는 아름다움이 없다. 머물러 있는 자 추해진다.
사회로의 나아감이며 변혁과 진보에의 가담함이다. 개인과 개인이 만나고
사람과 자연이 만남에서 중용을 이룰 때 미가 획득되는 것이다.
나아가서 세상과 만나라. 분노할 것에 분노하고 기뻐할 것에 기뻐하라.
그것이 아름답다.
네 번째의 도는 실천이다. 실천은 사회적 실천이다.
역사적 실천이며 세계에의 실천이며 문명에의 실천이며 진보의 실천이다.
도는 천하의 공변된 도이다. 가만히 눌러앉은 자에게는 도가 없다.
공변된다는 것은 보편성을 이름이다. 한 개인에게서 이룬 것이 그 공변됨으로
하여 천하에 널리 통하므로 바야흐로 역사를 만드는 것이 도다.
다섯 번 째의 달은 진리에의 달이다.
드러나지 않은 진리를 드러나게 하는 것, 진리의 공변됨을 증명해 보이는 것,
그것이 학문의 지극한 경계이다.
진리는 본래 있는 것, 늘어남도 없고 줄어듬도 없다.
인간은 역사의 방법으로 문명의 방법으로 진보의 방법으로
감추어진 진리를 드러나보이게 한다. 그에 이름이 달이다.
무엇이 필요한가?
[道人은 이제 구하는 자이며 達人은 이미 구한 자다. ]
눈을 떠서(관) 세상을 보라. 보이는가? 관점을 획득하지 않으면 눈뜬 장님이다.
보일락 말락 하는 인간이 안타까워하여 말(是非)이 많은 법,
이미 보이는 이는 관심이 자재에 가 있으므로 구태여 시비하지 않는다.
이미 보이거든 언어를 접고 뜻을 세우라.
뜻이 세워지면 자재(自在)하여 자유롭다. 날개를 퍼득거리며 날아오르려
하는 이는 미처 뜻을 세우지 못한 자이다.
뜻이 섰거든 세상과 만나라. 중용으로서만이 만날 수 있고 편벽되어서는
만날 수 없다. 중용으로 만나면 아름답고 편벽된 채 억지로 만나면 추하다.
사회와 만났거든 실천하라. 도로서만이 실천할수 있고 천하의 공변된
도가 아니어든 실천하려 해도 실천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비로소 통하거든 진리에 달한 것이며 통하지 않거든
도가 아니다. 원점으로 돌아가라.
이미 깨달은 후에 저절로 통하는 것이 順理이다.
미처 깨닫지 못하였으면서 깨달은 척 꾸미어 아름답게 보이려 하고
실천하는 척 적을 만들며, 통하는 척 막히며
남의 싸움을 따라하는 흉내내기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이 無理이다.
그대의 언어에 시비가 많은 것은 관하지 못한 까닭이고
그대의 나아감에 자유가 없는 것은 뜻을 세우지 못한 까닭이고
그대의 꾸밈에 아름다움이 없는 것은 진정으로 만나지 않기 때문이고
그대가 행함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공변됨이 없는 까닭이고
그대가 이미 이루었는데도 통하지 않는 것은
미처 진리에 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잘못된 생각들은
사람들이 수학과 논리학을 등한시 하는데 기인한다.
같은 것을 다르다 하고, 다른 것을 같다 하고
앞을 뒤라 하고, 뒤를 앞이라 하는데 잘못이 있다.
동양이 서양에 뒤진 것은 오로지 수학과 논리학을 등한히 했기 때문이다.
전후좌우를 분간하는 방향감각을 찾아야 사리를 분별할 수 있다.
하여 화담선생의 몇마디를 들려주겠다.
[人惑以我治數學 我非由數學而悟 盖不可不知耳 理之縱橫錯綜 在數字]
수학과 논리학이 학문의 으뜸이란 것은 우리 조상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공리공론이 아닌 것은 과학이다. 그 과학은 수학과 논리학에서 나왔다.
과학 이전에도 실질을 숭상하는 학파들이 있었으나 연금술에 지나지 않았다.
천번 실험하고 만번 분석해도 연금술에는 답이 안나온다.
조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게시판에서도 공리공론을 배척하고 실질을 숭상한다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연금술에 가까운 황당한 주장이 많다.
실은 실마리부터 감아야 감기고, 실꼬리부터 풀어야 풀린다.
중간에서 이리저리 잡아당겨 엉켜버리면 풀수도 감을수도 없다.
학문도 이와같아서 만학의 으뜸은 논리학과 수학이다.
논리학이 앞을 터고 수학이 뒤를 챙기며 과학이 열매가 된다.
연금술시대를 종식하고 과학의 시대를 연 사람은 뉴튼이고
뉴튼은 수학자였다. 논리학은 수학과 뗄레야 뗄수 없다.
자동차가 가니까 바퀴가 구르고 바퀴가 구르니까 자동차가 간다.
그러나 자동차가 먼저다. 바퀴가 자동차를 굴려가는 일은 결단코 없다.
닭과 달걀의 패러독스는 순환논리의 오류라고 하는 것으로
논리학의 가장 기초적인 문제이다. 어떤 문제든 선후를 결정하지 못하면
문제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인과율에 따라 A가 B의 원인이면서 동시에 B가 A의 원인일수 없다.
하나가 원인이면 반드시 하나는 결과이며
그렇지 않다면 둘은 상관없는 별개의 사건이다.
또 이것을 진화론과 연결하여 돌연변이가 어떻고 하는 생각도
무식하기 짝이없는 소리다.
논리학상 어떤 종이 중간에 다른 종으로 변한다면 그 두 종은 하나의
종으로 치므로 돌연변이든 우주방사선이든 의미없다.
예를 들어 누에가 변태하여 나방이 된다. 누에는 누에고 나방은 나방인가?
기어 다니는 누에와 날아 다니는 나방은 별개의 종처럼 보이지만 하나다.
지렁이의 일종인 누에가 새의 일종인 나방으로 변종한 것은 아니다.
이는 논리규칙으로 중간에 일어난 변화는 중간에 일어난 변화작용을
수용할 근거를 애초부터 가지고 있었던 이유로 무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멀쩡한 자동차가 있었는데 중간에 고장났다.
운행하지 못하므로 이제부터 자동차가 아니고 고철이다.
그러면 그 자동차는 고철인가?
니니페님께.
긴 편지 고맙습니다만 어떤 답변을 드려야 할지 고민되는군요.
저는 언제나 혼자노는 사람이라 어떤 단체나 조직에 가입할줄 모릅니다.
그리 해 본적도 없구요.
통신에서 뭐 조직적인 어떤 것을 추구하는 것은
내가 그것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옳으므로 남들더러 그리 하라는 것일 뿐입니다.
배미숙님 사건 때 뭐 주장하고 나선 것은
GD21님을 의식해서였는데 GD님이 바쁘다고 안하신대서 포기한거죠.
지디님이 제법 유명작가래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나보다 해서요.
뭔가를 하려면 구심점이 될만한 인물이 필요한데 그 사람이
정력적으로 나서줄 사람이어야 하지요. 알아야 할 것은 그 어떤 모임이든
단체든 결국은 사람 위주로 간다는 것입니다.
대의 명분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지요.
차라리 적은 숫자로 조촐하게 하더라도 핵심이 될 사람이 필요하지요.
먼저 사람을 찾아놓고 다음에 대의를 밝히고 명분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때 주장한 것도 이미 사람이 모였기 때문이지 다른거 없습니다.
그때 저는 시골로 이사를 오느라 한동안 통신을 안해서
어찌된지 몰랐는데 흐지부지 되었나보군요.
여하튼 모든 문제는 사람의 문제이고
사람 중심으로 해야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근데 당혹스런 것은 만화입니다.
저도 한때 만화방에서 몇 달을 살아본 적이 없는 바 아니나
십여년 전 일이고 요즘이야 여유가 없습니다. 시삽이 그렇게 많아서
무엇을 한다는 건지 만화에 무슨 정치적인 단체가 필요한지
황당스러울 뿐입니다.
열사에 [예쁜심바] 아이디를 쓰는 분이 만화 영화평론 시나리오 등에
제법 재능을 가지고 있는 걸로 아는데 아마 조만간 작가로 등단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외에도 그림에 관심을 가진 분이 몇분 있기는 한데
제가 워낙 사람 사귀기 싫어해서 면식을 트지 못하고 있는 중이죠.
그럼 지켜보겠습니다.
제가 뭔가 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고 응원은 해드리죠.
그럼 추진하시는 일 잘되시기를 바라며.
해공님의 오류에 대해.
논리- 수학과 실험- 관찰을 대등한 비교대상으로 보는 것은 넌센스다.
모든 실험에는 가설이 필요한데 그 가설은
논리- 수학의 분야이기 때문이다.
실험을 하기 위해서 요행을 바라고 문득 아무러나 실험하다가 우연히
발견하는 것이 연금술 내지 동양의학이고
과학은 사전에 충분한 논리적 검토 아래 타당한 가설을 세운 다음 충분한
수학적 계산으로 방법론을 정립한 후에 비로소 실험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시간적 순서 [선가설, 후실험을 통한 증명]이 성립한다.
요는 여기서 가설이 먼저이며 가설은 논리-수학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실험은 가설의 증명일 뿐이다.
때문에 설사 실험으로 증명이 안되더라도 가설은 그 자체로서
매우 유효한 학문적 성과이다. 예) 돌턴의 원자가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이렇듯 설사 실험으로 증명되지 않더라도 유의미한 가치를 지닐 때
[논리적으로 타당한 가설]이라 할수 있으며 논리적 오류가 없는
타당한 가설은 실험의 성패와 상관없이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증거로서
학문적 의의를 가지므로 그 또한 과학의 일부가 된다.
왜 가설이 중요한가 하면 하나의 가설은 다른 분야에 충분히
응용되기 때문이다. 과학자가 특정한 방법으로 어떤 성과를 얻어내었다면
이를 응용하며 비슷한 방법으로 무수한 다른 성과를 얻어낼수 있다.
즉 어떤 사람이 석유에서 비닐을 합성해 내었다면 이를 응용하여
다른 종류의 플라스틱이나 나일론이나 FRP나 폴리에스테르나 가능한 것이다.
과학의 99프로는 가설에서 결판나고 실험은 그 증명일 뿐이다.
가설과 증명(실험)을 분리해서는 안되고 과학의 방법론은
[가설(연역법) + 실험(귀납법)] 의 통일이며 가설이 먼저고 증명은 나중이다.
수년전 화학적인 방법으로 저온핵융합이 성공했대서 세계가
떠들썩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택도없는 소리라고 당당히 지적했다.
과연 택도없는 소리임이 나중 증명되었다.
핵융합은 물리학의 분야이지 화학의 분야가 아니다.
논리학을 모르면 이런 멍청한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또 몇 년전
화성에서 생명체가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나는 이 때도 택도없는
소리라고 분명히 말했다. 과연 그것은 낭설임이 밝혀졌다.
비슷한 주장으로 UFO나 타임머신에 대해서도 굳이 실험할 필요없이
논리적으로 증명할수 있음을 주장했다. 이는 영구기관을 실험으로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과학의 9할은 논리의 영역이다.
혹자는 과학자들의 위대한 발견에 철학자나 논리학자들이 틀렸다고
시비한 것에 대해 무슨 대단한 일인 것처럼 반대근거로 내세우는데 가소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모든 철학자 논리학자가 아닌 어떤 철학자 어떤
논리학자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도 생각이 서로 다른데 철학자라고 생각이 같을리 있는가?
요는 과학은 가설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가설이 논리학없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닭과 달걀의 문제에 한마디 첨언한다면 어느날 생식가능한 닭이 돌연
변해버리는 일은 결단코 없다.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다. 마찬가지로
달걀이 어느날 변해버리는 일은 없다.
그러한 사고는 일종의 자연발생설로서 밀가루를 헝겊으로 덮어두면
쥐가 생긴다는 공상과 비슷하다. 그런 일은 없다.
종의 특성은 수정시점에 결정되는 것이다. 단성생식을 하면 종은 불변하며
양성생식의 경우 유전정보의 차이에 의해 새로운 종이 나올 가능성이
가설로는 가능할 뿐이다.
가장 의미있는 가설은 말과 당나귀 사이에 노새가 나오듯
닭 아닌 서로 다른 두 종(예를 들면 칠면조와 꿩)의 결합에서 칠면조도
꿩도 아닌 닭이 나온 걸로 보아야 한다. 이런 일은 물론 관찰되지 않지만
가설로서는 충분히 유의미하다.
왜냐하면 지금 지구상의 모든 종은 생태학 측면에서 유전적 안정성을
확보하고 있는데 비해 새로운 종이 처음 출현할 때는 유전적 안정성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종이 명백히 갈라지지 않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
유전적 안정성이란 호랑이와 사자의 공동조상으로 부터 호랑이와 사자가
갈라져 나올 때 공동조상은 유전적 결함(돌연변이 등의 원인)으로
일시적으로 다양한 아종을 생산하는데 (이 경우 그 종은 매우 단명한다)
거기서 갈라져나온 자손들이 비슷한 자손끼리 결합하여 안정된 종으로
되어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예로 아프리카에는 얼룩말도 당나귀도 아닌 이상한 종이 있었는데
19세기 후반에 멸종되었다. 지금은 박제만 남아있다. 근래 일부 과학자들이
두 종류 이상의 얼룩말을 특별한 방법으로 선택교배하여 그 사라진 종을
대생할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치타는 세계적으로 1종 1속 밖에 없으므로 유전적으로 지극히 안정된
종이어서 잡종이 없다. 개는 아종이 다양하고 늑대 등과 유전관계가
불명하므로 상대적으로 유전적 불안정성이 크다.
마지막으로 고장난 자동차에 대하여 말하면 고장난 자동차는 분명히
자동차다. 그럼 고장난 자동차는 언제 고철이 되는가?
자동차가 고철이 되려면 두 개이상의 고장난 자동차가 모여야 한다.
즉 폐차장으로 가야하는 것이다. 자동차는 독립된 개체를 의미하는
단수개념이고 고철은 [고철들]을 의미하는 복수개념이다.
자동차냐 고철이냐의 구분은 외부의 간섭에 대해 독립적으로 반응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이다.
만약 그대가 과학가가 되려면 먼저 논리학과 수학에 정통하게 하라.
관찰을 통해 의문을 끌어내고 그로부터 가설을 만들어내며
그것이 과학의 90프로다.
가설은 아무러나 만드는게 아니고 일정한 방법론이 존재한다.
[제 목] 자연 과학의 두 축: 실험의 중요성..
───────────────────────────────────────
서양의 근대 자연 과학은 어디에서 출발했는가.. - 이후 과학=자연과학의 뜻으
로 쓴다.
서양의 근대 과학은 그리이스 학문의 재발견인 르네상스에 많은 신세를 졌다.
즉 그리이스의 논리학과 수학이 재발굴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근대과학
이 생겨날 순 없었다. 근대 과학이 태동하기 위해선 그와 대등한, 그리고 때로는
그보다 우월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또다른 중심축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실험
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근대 과학의 중요한 기초 제공자였다. 그러나 실험을 등한시
한 그에게는 오류가 없을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남자의 이빨
의 수는 여자의 이빨 수보다 많다",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를 떨어뜨리면 무
거운 물체가 먼저 떨어진다" 등등의 학설을 제창했다. 실험은 노예들이나 하는 것
이라는 그리이스의 논리학적 수학적 편견(^^?)이 작용한 것이다. 이 오류가 명백
해 수정된 것은 바로 실험을 통해서 였다. 물론 그 실험 결과는 또 새로운 논리학
과 수학의 태동을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과학에서 논리학과 수학의 축과 실험 관찰의 축 중 어느 축이 더 우월하다고 하
긴 힘들다. 어느 쪽이 우선이라고 보다는 두 축 자체가 고정불변한 실체라고 하기
도 힘들다는 점이 중요하다. 실험 관찰의 결과는 논리학적, 수학적으로 해석의 검
토를 받고 관찰을 잘못 해석한 것이 아닌가 점검해보는 과정을 거치고, 논리학적
수학적 분야는 실험 관찰에 의해 기존 논리학이나 수학으로 풀리지 않는 부분이
나올 때 새로운 논리학과 수학으로 다시 정비된다. 요컨대 현존하는 논리나 수학
체계가 100%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다는 점이다-물론 현존하는 논리 수학 체계는
연금술적인 논리보다는 과학적으로 훨씬 완벽에 가까운 것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기존의 논리학이나 수학 체계에 부합되지 않는 새로운 실험적 관찰적 사실
이 나오면 기존의 논리학이나 수학 체계는 변형 발전되기도 한다. 새로운 과학 이
론이 나오면 기존의 논리학자와 수학자들이 논리적으로 말도 안되는 거라고 떠들
어대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러면 과학자들은 싱긋이 웃으며 그 떠들썩한 논리들
중에 과학적으로 별 의미 없는 것은 버리고 유효할 수 있는 것만 취한다. 뉴튼이
만유인력과 운동 법칙을 발표할 때도 그랬고, 아인쉬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표할
때도 그랬다.
기원전에 그리이스의 제논은 "아킬레스를 거북이보다 100m 뒤에 세우고 달리기
시합을 시키면 아킬레스는 영원히 거북이를 추월할 수 없다."고 했다. 거북이의
속도는 아킬레스의 1/10이라고 했을 때 아킬레스가 100m를 달리는 동안 거북이는
10m 간다-즉 거북이는 아킬레스보다 10m 앞서 있다. 아킬레스가 다시 10m가는 동
안 거북이는 1m간다 - 즉 거북이는 아직도 아킬레스보다 앞 서 있다. 이런 식으로
거북이와 아킬레스의 차이는 10cm, 1cm, 1mm, 0.1mm로 줄어들 수는 있어도 아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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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는 영원히 거북이를 앞지를 수 없다는 논리이다- 당시 그리이스 사람들은 더 이
상 쪼갤 수 없는 단위 시간이라는 것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 논리에 반박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도 달리기 시합을 해보면 아무리 봐도 아킬레스
는 거북이를 앞지른다. 당대의 그리이스적인 논리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는 골
때리는 현상이지요^^;;
사실 이것이 어느 정도로나마 과학적으로 해결이 된 것은 바로 수학에 극한 개
념이 도입되면서 부터이다.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격차는 점점 작아져서 마침내 0
이 되고 어느 지점부터는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추월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보는 것
이 극한의 개념이다. 이 극한의 개념에서 뉴튼과 라이프니쯔의 미적분학이 나왔
다. 뉴튼의 만유인력의 법칙이나 역학적 운동 법칙의 발견은 과학상의 새로운 발
견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수학의 발견이기도 했다. 물론 이렇게 극한 개념으로 해
결했다 하더라도 엄격한 논리학을 주장하는 사람들 일각에게는 "여전히 그 문제는
엉터리로 해결한 것이다, 극한 개념은 사기다" 라는 주장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면 과학자들은 싱긋 웃고 다음 단계의 관심사로 넘어갈 것이다 - 예컨대
"이상한데.. 왜 빛을 속도를 넘어갈 수 없지? 절대 공간, 절대 시간의 논리 자체
가 좀 이상한 거 아냐?"하면서^^
닭이 먼저다 달걀이 먼저다를 논리학적으로 해결한 것이 논리학적으로 유효할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1. 닭이 먼저다 = 어느날 생식 가능한 어른 닭 비슷한 것이 있다가 갑자기 생식
가능한 어른 닭으로 변했다. 이후 그 닭의 후손들이 지금의 닭이 되었다.
2. 달걀이 먼저다 = 어느날 닭 비슷한 것이 알들을 낳았는데, 그 알들에서 지금
의 어른 닭과 같은 생물들이 나왔다. 이후 그 어른 닭과 같은 생물들의 후손들이
지금의 닭이다.
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남고, 그 해석 가능성을 떠나서도 이런 사건
의 가능성이 있을 때..
1. 어느날 닭은 아니지만 생식 가능한 어른 닭 비슷한 것이 있다가 갑자기 생식
가능한 어른 닭으로 변했다. 이후 그 닭의 후손들이 지금의 닭이 되었다.
2. 어느날 닭은 아니지만 닭 비슷한 것이 알들을 낳았는데, 그 알들에서 지금의
어른 닭과 같은 생물들이 나왔다. 이후 그 어른 닭과 같은 생물들의 후손들이 지
금의 닭이다.
1,2의 가능성 있는 사건 중에 어느 사건이 더 일어날 가능성이 많은 지를 검토
하는 것은 과학적으로-아마도 특히 생물학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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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가 운행하지 못하고 고장났으면 그것은 "고장난 자동차"다. 과학적으로
그리고 기술공학적으로 볼 때는 "제대로 굴러가는 자동차"와 "고장난 자동차"의
차이를 탐구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본다^^
오반이는 공부 더하고 와야 되겠다.
여전히 동화책에 나오는대로 뉴튼이 사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다고 믿느냐?
그것은 어떤 전기작가가 지어낸 개풀 뜯어먹는 소리다. 아그야.
밑에 해공님 글 읽어보면 알겠지만 오반은 공부 더해야 된다.
하늘천 따지부터 다시 배와라.
중요한게 뭐이고 중요하지 않은게 뭐인지 해임이 가르쳐 줄게.
이건 진짜로 중요한 이바구다 귀씻고 들어라.
[무슨 일을 진행하다가 장벽에 부닥쳤을 경우 뒤돌아가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이때 어디까지 후퇴할것인가? ]
부산서 진주를 가는데 잘못가서 삼천포로 빠져버렸다.
오반은 부산까지 되돌아가서 다시 출발할 넘이다. 그라이 일이 안되는기라.
마산 고성 지나 사천까지는 잘온기라.
중요하다는 것은 오류발견시 후퇴하한선 위치인기라.
중요하지 않은 것은 사정없이 폐기해버리고 중요한 데서 다시 출발하는기라.
집을 짓는다치자 집이 잘못되었으면 헐어내고 다시지어야 하는데
설계도까지 폐기하면 안되는기라. 설계는 하자없어 시공잘못이야.
여기서 설계와 시공은 엄격히 구분되지. 잘못된 집을 때려부시는데 2층만
부수고 1층은 놔두었다가 다시지으면 집이 되겠남? 부술 때는 1층까지
확실하게 부숴야 하는기라. 그러나 설계도는 하자없응께로 놔둬야 혀. 알간.
이렇듯 무슨 일을 하다가 시행착오를 반복할 때 다시 시작해야 하는 지점과
폐기해야 하는 지점은 완죤히 구분된다 말여. 테레비는 고장나면 완죤히
부수지마는 컴퓨터는 고장나면 고부분만 바꾸는기야.
컴퓨터 본체 - 체인지 업이 가능하구만 옳거니 중요하다.
모니터 - 고장나면 깨부셔. 업그레이드 안돼여. 안중요혀.
마우스 자판 - 깨부셔. 안중요혀.
프린터- 깨부셔. 안중요혀.
업그레이드가 가능한게 중요한 거여 알간?
이는 정치 제도 철학 사상에도 마찬가지여. 민주주의, 자본주의는 고장나면
업그레이드 해서 다시 쓰지만 공산주의는 고장나면 수리가 안되는거야.
혀서 민주주의는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안망하고 공산주의는
조용하다가 한방에 가는거야.
오반은 논리학을 안배웠응께로 이걸 모리는거야.
천지를 분간을 못하여. 컴퓨터 고장나면 본체는 때려부수고 모니터
업그레이드 하러 짊어지고 갈넘이여. 그게 아이라 카이.
세상 무엇이든 마디가 있어. 무슨 일이 잘못되면 얼렁뚱땅 다시 하면 안돼.
실패했을 때는 철저히 파괴하고 원점서 다시 시작혀야 해.
도공이 도자기를 만들다가 실패하면 주물러서 다시 하든? 박살을 내부리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 근데 오반은 녹로까지 부수고 가마까지 부순당께로.
오반은 국민학교서부터 중요한 거이 무엇인지 안중요한거이 무엇인지
배웠을 거야. 그러나 그게 무슨 말인지는 한번도 생각해 본적 없재?
철학을 배와야 혀.
철학은 분명히 정답을 가르쳐 주지.
시행착오가 발생하면 원점에서 다시 출발해야지 그 자리서 뭉기적대면 안돼.
과학에서 가설이 실험보다 중요한 거야.
실험이 잘못되면 다시 실험하지는 거지 안되면 또하고. 한 십만번은 실험을
혀야 혀. 그래도 안되면 가설까지 틀린거지. 오반은 한번 실험해보고
안되면 가설까지 폐기할 넘여. 뭐가 중요한지를 모르니께롱.
가설은 틀린 가설이라도 함부로 폐기 안혀. 이 가설은 틀린 가설이니
잘보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하시오 하고 학계에 발표를
하는기야. 그러니 중요하재.
인간이 말여. 세상을 안다니 철이 든다니 하는 것은 말여.
이 중요한게 뭔지 안중요한게 뭔지를 안다는 거여. 그거 알면 철든거여.
그러이 무슨 일을 착수할 때는 항상 이 작업이 실패하면 어디까지 부술지를
생각해놓고 있어야 하는기야.
그때 깨부수지 말아야 할 것은 특별히
기억하고 기록하고 표시해두어야 하는거이니 중요한기야.
수학-논리학은 매우 중요한 거이고 가설이 그 다음이고 실험은
한번 실패한 실험 두 번 할거없어. 중요안혀. 실험은 백만번도 다시할수
있는거고 가설은 결코 놓치면 안돼여.
형제여~! 그대는 인생에 있어 실패할 때 혹 장애를 만날 때
어디까지 후퇴할지를 항상 의식하고 사는가? 그거이 안되니까 함부로
자살한다거나 자해한다거나 고민과 방황에서 헤매이는 거라.
자기인생의 1차저지선, 2차방어선, 3차전략거점을 알고 있는자에겐
두려움도 슬픔도 없어, 당차게 나아갈수 있는거야.
그대가 두려워하고 뭉기적대는 것은 바로 그것을 모르기 때문이야.
자기인격(자존심)을 최후로 한 자는 한번 실패에 죽고
진리에 대한 믿음을 최후로 한 자는 결코 죽지 않는 법.
어떤 일이든 반드시 선후가 있고
여기서 앞서는 것이 뒤지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이건 절대의 진리이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시행착오가 발견될 때 폐기하고
중요한 것은 결코 폐기하지 않는다.
인생은 초딩학교 운동회 때의 달리기 시합이다.
출발점에선 나란히 선다. 평등한 것이다.
결승점에선 일렬로 선다. 평등하지 않다.
출발점이 먼저고 결승점이 나중이다.
고로 출발점의 평등이 결승점의 불평등보다 더 주요하다.
그러므로 올림픽의 제전에는 참가하는데 의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개막식 식장에서는 평등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결승점의 일렬에서 가장 먼저 들어온 선수가 가장 중요하다.
가장 나중 들어온 선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1등한 선수는 다음
경기에도 참가하지만 꼴찌한 선수는 그것이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가지의 논의
A- 하나의 경주에서 출발점과 결승점
B- 결승점에서 1등과 꼴등.
A에서는 출발점의 평등이 중요하고 결승점의 불평등은 중요하지 않다.
출발이 먼저고 결승은 나중이기 때문이다.
B에서는 1등이 중요하고 꼴찌는 중요하지 않다.
1등이 먼저고 꼴등은 나중이기 때문이다.
결론 A나 B나 항상 먼저가 중요하고 나중은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논리학을 안배운 사람들은 혼돈을 겪게 된다.
이 두가지 별개의 사건을 하나로 섞어서 관찰하면 뭐 출발이 중요하다가
끝이 중요하다가 뒤죽박죽이 되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므로 그들 논리를 모르는 사람은 1등이나 꼴등이나 다 중요하다고
말해버린다. 천만의 말씀 1등이 중요하지 꼴등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사건은 전혀 별개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 가장 먼저 해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것을 해야만 다른 것을 할수있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잘못이면 폐기되는 수가 있지만 가장 먼저 한 것은 결코
폐기되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결과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하나의 사건의 결과는 다른 사건의 시작이 되므로
그 시작부분에서 결과가 중요한 것이지
결과가 늦게 나왔기 때문에 그 늦음에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언제나 1초라도 더 앞서고 더 빠른 것이 절대로 중요하며
이는 절대진리이다.
형제여. 부디 말하노니 인생에서 결과를 기대하지 말라.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허나 또한
어떤 일의 결과는 다른 모든 일의 시작이 된다는 점을 잊지 말라.
인생의 결과는 죽음 -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 - 죽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삶이 중요한 것이다.
철학이 없었을 때는 과학도 없었다.
철학이 과학을 만들어내고 과학이 문명을 만들어내었다.
철학이 먼저고 과학은 나중이고 문명은 더욱 나중이다.
왜 문명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것은 결과다. 결과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원인은 정신이며 그것은 철학이다.
인간은 문명(결과)을 만들어내었지만 이건 결국 버릴거다.
정신(원인)은 최후까지 남는다.
논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구분하기 위해서다.
어떤 결실은 뒤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으로의 앞인 것이다.
해공님의 진화론에 대해서.
저는 진화에 대해 전혀 다른 종류의 가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우 복잡한 이론이므로 통신게시판에 설명하기 어렵지만 말한다면
[화살과 표적] 이론이라고 명명해도 괜찮은 건데
진화의 핵심은 유전정보의 진화이고 그 유전정보에는 화살 역할을 하는
유전정보와 타켓 역할을 하는 유정정보가 있다고 봅니다.
진화는 점진적으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점에서 일제히 일어난다고
보는데 그 시점이 화살이 타켓을 때린 시점이라 할수 있지요.
사람에게 눈썹이 있고 가마도 있고 소에게도 개에게도 있습니다.
뭐냐하면 서로 다른 종들이 나뭇가지처럼 서로 다른 경로를 거쳐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별개의 종들은 동일한 유전정보 타켓을
가지고 있는데 어느 시점에서 화살 유전정보가 활동을 개시하여
표적을 향해 쏘아지면 (쏜다는 표현이 적당) 서로 다른 종에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포유류 종은 사람처럼 속눈썹 유전정보를
가지고 있는데 화살이 그 유전정보의 어느 부위를 맞히는가에 따라
종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모든 원시적인 종은 그 다음 진화단계를 예비하고 있습니다.
즉 유인원은 사람으로 진화할 유전적 소인을 이미 가지고 있는거지요.
그 화살 유전인자가 표적을 맞히는 방식에 따라
사람, 고릴라, 침팬지 등으로 동시에 다양하게 진화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이론대로면 사람은 원숭이보다 더 진화한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원숭이가 사람의 조상인 것도 아니지요.
화살이 타켓의 어느부분을 때리는가에 따라 유전적 불안정성이 커지는 경우
여러개의 잃어비런 고리를 가지고 유전적 안정성을 확보할 때까지
계속 진화하고 반대로 유전적 안정성을 확보할 때는 진화를 멈추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과 고릴라와 침판지와 오랑우탄은 동일한 공동조상에서
화살유전인자의 공격을 받아 동시에 진화한 것입니다.
이는 골프에서 타구가 어떤 골프클럽을 쓰는가에 따라 비거리가 긴 경우와
짧은 경우가 있는 것과 같아서 인간은 유전적불안정성에 의해 멀리 날아간
경우이고 고릴라나 침판지는 유전적안정성에 의해 조금 날아간 경우지요.
두 개의 주사위를 던지는데(공동조상)
두 주사위 숫자의 합이 짝수가 되어야 합니다(유전적 안정성)
짝수가 안나오면 나올때가지 계속 던지는데
몇번을 던지든 그 나온 숫자를 모두 더합니다.
그래서 한번 던졌는데 6과 4가 나와서 합이 10인 경우가 침판지.
처음 5와 2가 나와 홀수이므로 다시 던져 2와 3이 나와 총합이
12인 경우가 고릴라.
하필이면 홀수가 계속 나와서 거듭거듭 7번이나 던져 총합이 100이
되어버린 것이 인간.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 경우 침판지나 고릴라는
인간의 조상이 아니지요.
화살이론의 핵심은 진화를 결정하는 특수 유전자가 존재하며 돌연변이의
이유로 유전적불안정성을 가진 종이 있으면 유전적 안정성을 확보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타켓을 때려 진화가 일어나고 안정성을 획득하면
멈추는 것입니다.
타켓을 때릴 때까지 쏘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종(특히 식물)은 자가수정을
기피하는데 이는 유전적안정성을 획득하기 위한 걸로 봐야겠지요..
진화론은 처음부터 다시 연구되어야 할것입니다.
단성생식의 경우 그 화살유전자가 없다고 보지요.
화살과 타켓이 구분되지 않거나.
단성생식의 경우 자연적 진화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모든 종의 본질적은 특성은 자기제어가 된다는 것인데 단성생식이
무한진화를 개시하면 제어가 안되므로 어떤 괴물이 나올지 알수없습니다.
생태계는 존재가 불가능하게 되지요. (단일 종의 지구정복)
화살유전자의 존재는 유전정보 내에 통제가능한 수단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유전적 안정성을 확보할 때까지 진화하며 유전적안정성이 없는 종은
생존경쟁에 의해 자연도태되는 것이 아니라 몽고병이나 혈우병 환자가
살아남을 확률이 적은 것처럼 자연사멸하게 된다고 봅니다.
대부분의 잃어버린 고리들은 생존경쟁에서 도태된 것이 아니라
유전적불안정성에 의해 후손을 남기지 못해 자연사멸한 것입니다.
잃어버린 고리들이 경쟁에 의해 죽는다면 경쟁이 매우 치열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적절한 제어가 안되어 대부분의 종이 죽기 때문입니다.
전부 죽거나 전부 살거나죠. (단일 종의 생태계 독점)
유전적안정성을 확보한 종은 결코 안죽습니다. 경쟁력이 없으면 희소가치
덕분으로 천적이 없어져서 더 살기쉽게 되지요. 생존경쟁에 뒤지는 토끼가
줄면 늑대도 줄고 늑대가 줄면 다시 토끼가 늘어나는 식으로 경쟁력없는
종도 잘안죽습니다.
[지구 최초의 종은 단성생식을 했다. 이때 진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 시점에서 특별한 변이에 의해 화살유전자가 생겨나고 동시에
양성생식이 시작되어 비약적인 진화가 일어났다. 진화한 종에서도 가끔 변이에
의해 퇴보가 일어나 단성생식을 하는 종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 종으로부터의
진화는 없다]
이런 가설.
그런데 전 창조론자거든요. 기독교적 창조론은 아니고 창조적진화론자라고
해야 맞지요. 전 무신론자가 아니므로 최초의 진화를 유발한 화살유전자는
신의 개입에 의해서만 설명될수 있다고 봅니다.
[화살유전자(진화를 유발하는 진화담당유전자)는 잠복해 있다가 돌연변이에
의해 유전적 불안정성이 생겨나면 일제히 활동을 개시하여 잠깐 동안에
수많은 종을 양산한다. 유전적안정성이 확보되면 화살유전자는 활동을 멈추고
다시 잠복에 들어간다]
[공룡의 멸종 또한 멸종유전인자가 활동을 개시하여 유전적 자살를 한
것으로도 볼수 있다. 인간의 수명도 수명조절 유전인자가 수명을 한정하는
것이지 그냥 늙어죽는 것은 아니다. 인간세포의 복제회수는 지정되어 있다.]
사막의 생물들은 비가 오지 않으면 활동을 멈추고 가사상태에서 몇 년이고
비를 기다린다. 인간의 유전정보에도 대기방사선이나 공해물질 등
외기요인에 반응하는 부분이 있어 일제히 무정자증을 일으켜 인류가
어느날 멸종할지도 모른다. [지구생태계의 자기보호 프로그램 가동]
스카이콩콩님을 위한 논리게임.
논리가 중요한(중요하다는 건 순서상 1번이라는 의미.) 것은
우리가 판단할수 없다고 말하는 모든 문제를 실상 정확하게 판단해낼수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모든/ 절대]가 들어가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논리가 아니다.
논리란 [어중간, 적당히, 대충, 보통] 이런 말을 사망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1+1= 2 <- 절대로 2임. 반드시 2임. 모든 경우 2임. 고로 논리임.
한 대 맞은데 + 한데 더맞으니 = 존나이 아픔 <- 절대로? ???? 논리아님.
과정이나 결과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1번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히 그렇다. 과정은 1번이 아니다.
무엇이 중요한가?
우리는 흔히 말하기를 시작/도 과정/도 마지막/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깨부셔야 할 고정관념이다. 보자.
결실을 획득하는 농사법 - 원시사회의 채집경제.
과정에 집중하는 농사법 - 조선시대식 노동집약적 영농.
시작에 중점을 두는 농사법 - 현대식 대규모 시설영농.
미국 농사는 파종만 하면 끝이다. 그런데 거기에 돈든다.
트랙터 비료 농약 엄청나다. 그러나 일단 심어만 놓으면 대지가 알아서
키워준다. 원시시대 삼한시대의 영농은 반대다. 심지도 않고 산천을
헤매고 다니며 수확만 한다.
제초제- 파종 전에 뿌린다.(시작에 에너지 투입)
김매기- 풀이 자라면 뽑는다.(과정에 에너지 투입)
컴퓨터도 보자.
시작만 클릭하면 저절로 되는 빠빠라기 컴퓨터는 윈도95.
중간에 열심히 노가다를 해야 하는 스카이콩콩 컴퓨터는 MS도스(?).
끝부분까지 하나하나 명령어를 입력해야 하는 포트란 베이직시대의
컴퓨터는 원시컴퓨터.
컴퓨터가 발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과정이 생략된다는 것이다. 시작이 다다.
이것이 이 세상의 참된 이치다.
이러한 이치를 터득한 자는 가히 깨달은 자라 할 수 있다.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작과 과정과 결과]의 부분으로 되어있는데
어떤 것이든 그것이 발전한다는 것은 결과가 과정 속으로 압축되어 들어가고
과정이 시작 속으로 압축되어 들어가는 과정이다. (사라지지는 않는다)
조선시대의 밥하기.
시작- 쌀을 앉힌다. 과정- 장작불을 땐다. 결과- 뜸을 들인다.
현대식 밥하기.
시작- (밥짓기는 전기밥솥으로) 과정- (보온은 보온밥통으로)
첨단식 밥하기
시작- 쌀앉히기만 하면 보온까지 알아서 다해줘요. 끝. (전자동 전기밥솥)
여기서 깨우쳐야 할 것은 시작은 결코 생략할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문명이 아무리 발달되어도 마찬가지다.
100년 후에라도 천년 후에라도 시작은 같다.
어떤 것이 발전한다는 것은 과정과 결과가 압축되어 시작 속으로 들어와
원스톱서비스가 된다는 것이다.
예를들면 몇 달전 테레비젼에 떠든 공압식자동차- 시작(밧데리)은 가만 두고
과정만 개발했다. 그 결과 돈낭비 시간낭비 머저리짓. 깨달은 이는 무슨 일을
착수하든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판단가능하다.
발명이든 개량이든 발전이든 그것은 결과를 과정 속으로 말아넣고
과정을 시작속으로 압축해 넣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터득하면 발명을 열배로 많이 할수 있다.
자동차의 발명.
시작- [시동]을 건다. 과정- 엔진이 작동한다. 결과-바퀴가 구른다.
신라시대자동차 (인력거)
시작- 수레를 잡는다. 과정- 수레를 민다. 결과 -[바퀴]를 열심히 굴린다.
근세 18세기 자동차 (자전거)
시작-자전거를 탄다. 과정- [페달]을 밟는다. 결과- 바퀴가 구른다.
여기서 드러난 바
진보라는 것은 (그 어떤 종류의 진보이든) 결과(바퀴굴리기)에 인력을
투자하던 것을, 과정(페달밟기)에 노가다를 투입하는 것으로
또 시작(시동걸기)에 힘을 들이는 걸로
인간의 에너지 투입부분이 점점 앞으로 당겨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법칙은 절대진리이며 예외는 없다]
우리가 통신에서 진보를 부르짖는 것은 또 역사의 발전이라는 것은,
문명의 발달이란 것은 간단히 말하여 인간의 에너지 투입부분을
말초적인 부분에서 그 알대가리 부분으로 당겨보자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그 출발점은 머리다. 모든 인간행위는 머리에서 시작하여
가슴을 통과하여 손발로 끝난다. 문명의 발전 역사의 진보란 머리에서
해결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진보니 발전이니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핵심을 모른다.
왜 발전하지 않으면 안되는지 왜 민주주의를 해야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이치를 깨우쳐야 한다. 발명을 할 때 그냥 머리를 맹렬히 굴린다고 되는게
아니고 [어떻게 꽁무니를 과정 속으로 집어넣고 과정을 대가리 속으로
집어넣지?] 이렇게 접근하면 금방 답이 나온다.
다시 논리로 돌아가자.
물론 운전(시작)도 엔진(과정)도 결과(바퀴)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건 논리가 아니다. 논리로 풀어보면 바퀴를 엔진에 종속시키므로서
인간은 바퀴에서 손뗀다. 엔진을 운전에 종속시키므로서 인간은 엔진에도
손뗀다. 그러나 아무리 발전해도 운전 안해도 되는 자동차는 없다.
물론 운전도 그 자체로 하나의 과정으로 보고 압축하여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최초의 시작(그것은 자동차에 올라타는 일이다)도 안하고
자동차를 이용하는 방법은 절대로 없다. 이건 절대진리다.
11호 자가용(건강한 두다리)는 일종의 바퀴다. 자전거의 페달은 일종의
엔진이다. 뒷부분은 앞부분에 집어넣을수 있으나 앞부분은
뒷부분에 집어넣을수 없다. (또한 절대진리다)
앞부분을 뒷부분에 집어넣은 자동차 -> 무한동력 원동기.
인생을 말한다면
깨달음이야 말로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생활은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은 결과라 할 수 있다.
깨닫지 못하므로 생활이 분주하고 생활이 안되는 자가 죽음이 두려운 것.
죽음에 에너지를 투입하는자(쓰지도 않고 벌기만 하는 자)
과정에 에너지를 투입하는 자(열심히 소비하며 사는 생활인들)
시작에 에너지를 투입하는 자(깨달은 자)
나는 언제나 시작할 뿐이다.
과정은 시작 속에 다 들어있고 죽음은 삶 속에 다 들어있다.
깨닫는다는 것은 죽음(결과)을 삶(과정) 속으로 압축해 넣고
삶을 깨달음 속으로 압축해 넣는다는 것이다.
고로 깨달은 자에게는 삶(생활)이 없고 삶이 없으므로 죽음도 없다.
전쟁무기의 발전
총]- 시작(발사)만 잘하면 과정(총알의 비행)과 결과(적의 사망)
에 대한 에너지투입은 생략되어도 좋다.
창]- 과정(칼의 휘두름)만 잘하면 적이 알아서 사망한다.
돌]- 죽을 때 까지 패야된다. 적이 반드시 죽는다는 보장은 없다.
과정의 단계들이 존재하며 진보는 결과를 과정에, 과정을 시작에
압축해 넣으므로 과정을 단축하는 것이다. 거꾸로 과정을 결과에 시작을
과정에 압축해넣는 방법은 절대로 없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바느질이나 재봉틀이나 바늘에 실을 끼우는
시작을 생략하지는 못한다.
죽음이 중요한 자는 죽음을 삶에 압축해 넣는데 실패한 이들이요
삶이 중요한 자는 삶을 깨달음에 압축해넣는데 실패한 이들이다.
무엇이든 압축된다. 그러나 순서를 거스르고는 절대로 안된다.
그대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좋은 스피커를 백만원 주고
샀다. 그대 이렇게 말한다. [음악을 듣는데는 무조건 소리만 잘나면 되는기야]
과연 그럴까? 스피커는 결과를 보장한다.
근데 그 스피커가 소리가 삑삑 하고 잘안나는 이유는?
과정의 역할을 하는 전축이 고물이기 때문이다. 이때 나는 이렇게 말한다.
[돈 버렸다.]
과정이 중요함을 깨달은 그대가 200만원을 주고 전축을 샀다.
그러면 소리가 잘나는가? 안돼안돼~! 시작이 잘못되면 다 소용없어.
좋은 노래를 불러줄 가수가 없잖아. 그게 시작인거지. 아무리 전축에 고급
스피커라도 가수가 좋은 노래 불러주지 않으면 소용없어.
모로 가서는 서울을 갈수없다.
이러한 이치를 아는 이는 쓸데없이 머리 굴린다고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이 없게 된다.
♧♥
오반아 그렇게 수업시간이 기둘려지냐?
껄껄껄. 그려 맞아부리. 오반은 논리를 배워야 혀.
그려야 시비분별을 알게되고 시비분별을 알아야 시비분별을 떠나게 되는 것이여.
가르쳐 주지 이건 중요하니 밑줄 쫙에 암송해.
[중요하다는 것은 1 대 1로 비교된 상태에서의 상대적 중요성이다.
비교된 것은 절대로 평형이 아니다. 평형일 때 둘은 하나로 통합되어 보다 큰
다른 전체에 의속하므로 개별자로서의 독립적인 기능을 상실한다. ]
이런 원리에 의해 시작도 과정도 끝도 다 중요하면 어느쪽도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된다. 논리는 반드시/ 절대/ 모든의 영역이다.
오반아 종이를 꺼내어 긴 선을 그려보거라.
거기에 처음 점을 찍는데가 시작이다. 그 시작에서 계속 전개하면 과정이 된다.
그런데 뭐가 이상하지 않아?
벌써 이상한 느낌이 들지? 뭐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그런 생각이 바로 직관력이야~! 그런 느낌이 들면 그 느낌이 맞는거야.
자 오반군은 선을 그렸는가? 점을 그렸는가?
오반군은 처음 시작에서 점을 그렸어~! 근데 선으로 변해부렀어.
여기에서 패러독스의 발견. 자 뭔가 머리에 전기가 번쩍하고 불이 켜지지?
선의 시작은 점인데 그것이 시작이기 위해서는 점이 전개되어야 한다.
점이 전개되면 선이 되어버린다. 즉 선이 점을 담보한다는 것이야.
그렇다면 선을 담보하는 것은? 그것은 면이지.
면을 담보하는 것은? 입체이지.
입체를 담보하는 것은? 공간이지.
아 뭔가 전기가 오는 것 같았는데 다시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고?
엉아가 정리해주께 새겨들어. 지금부터는 논리야. 장난이 아니라구.
논리에서는 항상 절대/ 모든/ 반드시가 들어가야 혀. 적당히는 엄써. 따져보자구.
오반은 최초 점을 시작했지 선을 시작하지 않았다.
점을 전개하므로 선이 되었다.
여기서 점의 관점과 선의 관점.
점의 관점에서는 점의 시작과 점의 전개가 있었다.
선의 관점에서는 선의 시작만 있고 선의 전개는 없었다. 왜?
선을 전개하면 이미 면이 되거든.
그렇다면 오반군은 선을 전개하지 못한 셈이 되네?
왜냐하면 선을 전개하면 면이 되는데 오반군은 선을 그린거지
면을 그린거이 아니니까. 자 이제 정리가 되었지?
다시 머리에 불이 들어왔나? 반짝반짝?
논리는 아이큐가 뒷받침이 안되면 진도를 못따라가여.
선의 관점과 면의 관점.
오반의 선은 점의 시작과 점의 전개인데 점은 길이가 없응께로
오반이 길게 그은 선은 여러개의 점(점의 집합)인 거야 그리고 거기엔
시작만 반복되고 과정은 없어. 왜냐구? 점은 길이가 없으니까.
오반이 길게 그은 선을 하나로 통합하면 그건 선의 시작이지 선의 과정은 없어.
선의 과정이 있으려면 면이 되어야 하거든.
자 오반군 다시 볼펜을 들어.
선 밑에다 선을 하나 더긋구 또하나 더 그어라구.
이제 면이 되었지? 그렇다면 그게 선의 과정인거야~! 그렇지?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입체의 시작이 되는 거지.
점의 시작은 점
점의 과정은 선. 이를 합치면 선의 시작.
선의 과정은 면. 이를 합치면 입체의 시작.
입체의 과정은 공간. 공간의 과정은 없어. 끝.
이를 다시 하나로 통합하면 모든 종류의 기하학적 도형(점, 선, 면, 입체, 공간)
은 공간의 시작일 뿐 그 과정(전개)은 없다. 왜?
압축되어 공간 속으로 다 들어갔으니까.
점의 과정은 압축되어 선의 시작속으로 들어가고
선의 과정은 압축되어 면의 시작속으로 들어가고
면의 과정은 압축되어 입체의 시작 속으로 들어가고
입체의 과정은 압축되어 공간의 시작 속으로 들어간다.
모두 압축되어 들어가 버린다. 그리하여 최대의 관점. 공간차원에서 보면
언제나 시작 뿐이고 과정은 없다. 과정은 어디로 갔나요?
압축되어 자기 몸 속으로 들어갔어요. 알갔어여?
손가락은 압축되어 손으로 들어가고 손은 압축되어 팔로 들어가고
팔은 압축되어 몸으로 들어가네여. 언제나 시작만 있고 과정은 없네여.
자 이제 오반군은 서울로 간다.
한걸음을 떼면 시작이다. 두걸음을 떼면 과정이다. 근데 걸음은 한걸음이 걸음이지롱.
즉 시작 + 시작인 게롱. 오반은 두 번 시작한거지. 과정이 되려면 이걸 합쳐야지.
걸음에 걸음을 합치면 걸음걸이가 되지.
걸음 오반의 두 걸음은 걸음걸이의 시작인가? 과정인가?
걸음걸이는 복수개념이므로 두걸음은 당연히 시작이지.
자 본래로 돌아가보자. 오반은 시작 + 과정을 했는데 다시 시작이 되었잖은가?
우리의 인생은 이와 같아여.
언제나 시작 뿐이지 과정은 없어. 삶은 이미 죽음을 통일하고
태어남은 이미 삶을 통일하거든. 그것을 깨달은 자 삶과 죽음을 초월한다네.
시계를 보자.
1초는 시작이지. 2초는 과정이지.
1초 + 2초는 1분의 시작이지.
1분 + 2분은 1시간의 시작이지.
1시간 + 2시간은 하루의 시작이지.
하루 + 이틀은 일년의 시작이지.
1년 + 2년은 평생의 시작이지.
평생 + 두평생은 엄찌.
그러니 오반은 평생 시작밖에 못하는거야.
과정은 언제나 시작 속으로 압축되어 들어갈 뿐이야.
하느님이 세상을 맹글 때에는 수학을 이용해 맹글었거덩.
수학은 반드시/ 항상/ 절대로/ 꼭/ 모든/ 의 법칙이 지배하거덩.
그러므로 수학에는 과정이 엄써.
1은 있는데 2는 없다구.
만약 2가 생기면 그 2는 다시 압축하여 더 큰 1로 만들어버리지.
1+1=2 -> 1분의 2.
이는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지. 과정은 중복이여. 그러니 압축되지.
말하자면 1,1,1,1,1,1,1,1,1,1 이렇게 표시하면 이게 과정인데 압축하여
10 하나로 땡, 끝이여.
수는 언제나 1이어야 한다. 그 어떠한 수든 하나의 자리로 표현될수 있어야 한다.
만약 하나의 자리로 표현할수 없다면 그것은 수식이 되지. 이를 테면 {□ + 1}
수식은 또 하나의 수식이야.
하나의 수식으로 표현할수 없다면 등식을 쓰지. 등식은 하나의 등식이여.
하나의 등식으로 표현할수 없다면 방정식이 되지. 방정식은 하나의 방정식이야.
하나의 방정식으로 표현할수 없다면 이때는 함수식이 되지.
하나의 함수로 표현할수 없는 것은? 없어. 그기서 끝. 더없다구.
거기가 수학의 극한이여.
우리는 언어를 뒤죽박죽으로 쓰지.
네말도 맞고 내말도 맞고 다맞다면 다틀렸다는 거지.
다 중요한 것은 다 중요하지 않은거지.
논리는 좀 복잡하긴 하지만 이 세상을 [어중간, 과정, 현재진행, 적당히, 대충, ]
이 아닌 0과 1로 표현하는 방법이야.
0은 없는 거구 1은 있는 거구 그 중간과정은 없어.
0은 절대로 0이구 1은 모든 1이지.
진리를 믿어야 혀. 좀 복잡해서 그렇지.
이 세상 모든 법칙을 우리는 명백히 규명할수 있어.
법칙 : 모든 존재는 51 대 49의 불균형이며 그 불균형부분만큼 운동이 개입한다.
만약 존재가 균형을 취하여 50 대 50이 될 때 운동은 정지하고
운동이 정지하면 기능을 상실하고 기능을 상실하면 독립성이 사라지고
독립성이 사라지면 더 큰 다른것에 자기존재를 의속시키며 그때 개별자의
성질은 없어진다. 개별자는 보편자 속으로 다운.
저울의 한쪽은 항상 기울어져야 한다. 만약 좌우대칭이 완벽해서 평형이 될 때
존재는 소멸하고 다른 것에 의탁한다.
돌고 있는 팽이는 원심력과 구심력이 51: 49로 불균형이다.
모자라는 부분은 팽이의 운동이 카바한다. 원심력과 구심력이 같아질 때
팽이는 운동을 정지한다. 더 이상 팽이는 팽이가 아니다.
독립할수 없으므로 쓰러지고 지구의 일부분이 된다.
고로 어떤 것이 개별자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불균형하다는 것이며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운동한다는 것이며 만약 완벽한 평형을 이룰 때 블랙홀의 특이점 속으로
아웃되어버린다. 즉 절대 空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존재를 성립시키는 기본값은 51(플러스 우주)과 49(마이너스 우주)의
간격 2이며 그 크기가 우주의 크기를 담보한다. 우주의 호흡은 그 간격을 메꾸려는
운동이다. 그 2의 정확한 크기를 알아내면 우주의 전부를 파악할수 있다.
쇠귀에 목탁을 두르리면 뭐하냐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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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은 과연 점의 집합인가?
점을 모아놓으면 여러개의 점이 되거나 큰 점이 되지 어찌 선이 되남?
논리영역에서는 정확하게 정의를 해야 하는 것이라~!
논리학이 아니면 그냥 대충 점으로 보이면 점이구 글치만.
엄밀하지 않고서는 [대충 어림짐작 적당히 우물쭈물]은 논리가 아니거덩.
자 한권의 책이 있어.
이걸 찢으면 어떻게 찢던지 상관없이 여러면의 페이지로 분할이 되어.
거꾸로 여러 면을 이어붙이면 책이 되남?
아건 아녀~! 면이 책이 되려면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제책을 해야 되는데
그 방법은 동양에서는 채륜이 종이를 발명한 이후고
서양에서는 카이사르가 개발하여 주장했지.
선을 분할하면 어떻게 분할하던 점이 되어.
그러나 점을 아무렇게나 집합하면 선이 안되여.
이게 대충 어림짐작으로 아는 것 하고 제대로 아는 것 하고 차이지.
그려서 논리가 필요한 것이여 알간모르간?
자 종이 위에 점을 하나 찍자.
그 위에다 점을 하나 더 찍어보자. 천번을 찍어도 그냥 점이야.
한번 찍으면 1점이고 백번 찍으면 백점이야 고마찍어,
[점 + 점 = 점] [점 + 점 + 점 + 점 = 점]
[ 1 × 1 = 1 ] [ 1×1×1×1×1×1 = 1 ]
본래 점이라는 것은 그냥 점이 아니고 [마주치는 점]인 것이야.
점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위상공간에 구형의 두 물체를 두고
이를 충돌시켰을 때 부딪히는 점이 점인 것이야.
즉 점은 그냥 점이 아니라 대칭점인 것이지.
이걸 2차원 평면 위에서 이해하려면 좌표를 그려야 해.
X축과 Y축이 마주치는 점이 점이지.
고로 점은 그냥 점이 아니고 항상 대칭점이거나 균형점, 꼭지점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야.
점은 그냥 점이 아니라 어떤 지점인 것이지.
거기엔 명백한 기능이 있고 역할이 있어, 점의 역할은 쉽게 말하자면
무게중심이지. 지구중력의 중심점. 자동차 바퀴축의 중심점.
어떤 힘의 전달이 있을 경우 그 힘에는 반드시 대항하는 힘이 존재해.
구심력과 원심력, 인력과 척력, 인장력과 팽창력. 압력과 저항력.
플러스와 마이너스인 이 두 개의 힘은 반드시 하나의 점으로 집결되지.
고로 어떤 힘의 작용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점으로부터 출발혀.
이를테면 유리창이 깨어지던가 종이가 찢어지던가 공이 펑크가 나던가
하나의 점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예외는 없어.
모든 운동의 작용은 점으로 부터만 유발되고 예외는 없다.
<-알아두면 보약이 되는 절대진리
내 길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오반 한사람을 위해서가 아니지.
말싸움에서 이겨보려는 것도 아니고.
이런 이야기 어디 다른데서 들을수 없어.
서점에 책이나 뒤진다고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여.
이건 논리이기 때문이야 배워서 남주남?
자 머리 식혀가면서 생각해 보자. 내 이바구의 포인트는
[점의 집합은 선]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거꾸로 [선을 분할하여 점]
정확한 인식에 도달하자는 거.
이게 뭔소리인가 하면
위상공간의 분할 -> 입체, 입체의 분할-> 면, 면의 분할-> 선,
선의 분할-> 점. 이렇게 가는 것은 맞는데 그 반대는 아니라는 것이여.
수학시간에 필요조건 충분조건 배왔으면 알아듣것지?
왜 모든 것은 시작일 뿐 과정은 없는가?
모든 운동 및 작용은 위상공간>입체>면>선>점의 한 방향으로만 진행하는데
관점을 위 전개에서 앞서는 위상공간에서 보면 시작이고
입체에서 보면 과정이고 면에서 보면 끝이고 하는 식으로 진행이
되더란 말쌈이야.
그러니 면에서 보면 시작, 선에서 보면 과정, 점에서 보면 끝.
또한 입체에서 보면 시작, 면에서 보면 과정, 점에서 보면 끝.
뭐든 점에서 끝난다구. 이게 우주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운동 및 작용의
보편적인 법칙이며 절대로 맞는 절대진리야 알아두면 보약이지.
그럼 오반의 헷갈리는 이바구는 뭔가?
그건 [이중기준의 오류]라는 것으로 두 개 이상의 관측점을 가지고 있거덩.
요상한 선을 쭉 그어놓고 여기까지는 35초고 우짜고.
논리란 그러면 안돼여. 규칙위반이여. 긍거엄써,
현대와 기아가 농구를 해서 현대가 이겼지.
오반의 판정 -- 많이 넣은 쪽이 이긴걸로 하면 현대 승리
적게 넣은 쪽이 이긴걸로 하면 기아 승리, 고로 둘다 승자요 패자임.
종이 위에 점을 찍는다 선을 긋는다는 오반의 관점이야 즉 주관이지.
이미 오반의 관측사실이 사태에 개입했어, 오반은 제 3자야.
사실에서 손떼, 뒤로 물러나서 관측만 하란 말여.
점이나 선은 위상공간 안에서 그 기하학적 내부논리로 규정되는 것이지
인간이 점을 찍으면 점이고 선을 그으면 선인감? 아니지라. 그건 아녀.
모든 판단의 절대적인 근거는 자연계 내부에 존재하는 원리이며
힘과 힘의 작용으로만 드러나지. 그 힘의 전달경로를 따지는 것이여.
야구장에서 투수와 타자의 대응에서 힘의 질서는 공간형태,
타자의 타격자세에서 힘의 질서는 입체형태,
공과 방망이가 맞는 순간 힘의 질서는 면의 형태.
공이 날아가는 과정에서 힘의 질서는 선의 형태,
공의 낙하지점에서 힘의 질서는 점의 형태.
즉 위상공간 안에 분산되어 있는 힘이 입체로 면으로 선으로 점으로
점점 범위가 좁아져서 운동 혹은 작용이 유발되는 것이여.
중요한 것은 점이든 선이든 면이든 모두 질서라는 것이여,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정의를 내릴 수가 있지.
점/ 선/ 면/ 입체/ 공간/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다섯가지 양상의
보편적인 질서이다. 여기에서 더하거나 뺄수는 없다.
공간은 질서도가 0인 상태(엔트로피가 가장 낮은 최대의 무질서)
(엔트로피를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최대의 무질서는 동시에 최대의
양호한 질서상태이다. )
엔트로피를 중가시켜 질서도를 높이면 차례대로 입체>면>선>점에
이르고 더 이상의 질서는 없다.
말했지. 점은 대칭점, 균형점, 꼭지점이라고.
자 넓은 교실 (20평) 안에 열명의 아이(힘)들이 뛰놀고 있다.
근데 교실 맨 뒤쪽에서부터 길다란 판자로 막은 뒤 밀어붙이면 힘들은
자연히 입구쪽으로 몰리지. 이때 힘들은 매우 무질서하게 뛰놀므로
아이들이 몰려드는 방향은 사방에서 한 점을 향해 집결하지.
이때 힘의 방향은 최대의 질서도를 가진다구. 즉 힘이 한방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전후좌우상하 모든 방향에서 한 점을 향해
몰리는 것이야. 가장 질서있다는 것은 그걸 말하는 것이야.
이해가 안되남? 오반이 짧게 말하는데 내가 길게 말하는게 아녀.
오반의 헛소리에 대해선 딱 한마디 -> [이중기준의 오류]
질서와 무질서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배워야 혀.
60명의 학생이 담임선생님을 일제히 보는 것은 질서 무질서?
한명의 담임선생님이 60명의 학생을 보는 것은 질서 무질서?
위상공간(60명의 학생)은 자기 내부의 배열에서는 최대의 질서이면서
힘의 대응에 있어서는 최대의 무질서를 가진다. 점(담임선생님)은
자기 내부의 배열에 있어서는 최대의 무질서이면서 힘의 대응에
있어서는 최대의 질서를 가진다.
모든 힘의 작용은 위상공간에서 비롯되어 입체>면>선>의 압축과정을 거쳐
점에서 촉발된다. 압축과정은 엔트로피의 증가를 의미한다.
그런 고로 우리는 점을 이렇게 정의 할수 있어,
[점은 위상공간 안에서 내적 양상으로는 최소의 질서상태이며
외계와의 상호대응에 있어서는 최대의 질서상태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그 질서는 무엇인가? 위치이지. 점은 위치를 나타내는 거야.
여기서부터 질서를 하나씩 추가하여 가는데.
위치 + 순서(앞과 뒤)은 선.
위치 + 순서 + 방향(좌,우)는 면.
위치 + 순서 + 방향 + 크기(안과 밖)은 입체,
위치 + 순서 + 방향 + 크기 + 위상(중심과 주변)은 공간.
간단히 점은 최소의 질서상태를 나타내는 것이여.
그러나 외계와의 대응에 있어서(운동작용)는 최대의 질서이지.
그럼 이러한 이바구는 다 뭘로 정리가 되는가?
시작(최대의 질서상태=공간)
끝(최소의 질서상태=점)
모든 운동 작용은 [공간=>점]의 한 방향으로만 이행한다.
힘의 작용은 시작에서 유발되고 끝에서는 끝나므로 끝부분에서는
힘의 작용이 없다. 고로 중요성도 없다.
고로 모든 작용은 [시작->끝]의 한 방향으로만 이행한다.
과정은 무엇인가? 과정은 그 중간인 공간과 점 사이의 입체, 면, 선이지.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구.
파파라=> [시작만 있고 끝은 없다. ] 다른 말로 [시작은 1이며 끝은 0이다]
다른 말로 [우리의 눈에 비친 이 세상은 아날로그 형태로 존재하지만
거기엔 이미 인간의 주관이 개입했고 존재의 사실 영역은 디지털 형태로
존재하며 디지털 세계는 1과 0뿐이 없고 1은 시작 0은 끝 과정은 없다.]
논리란 아날로그 세계를 디지털 세계로 전환한 것이다.
모든 아날로그는 디지털로 전환가능하다. 아날로그는 두 개이상의 사건을
뒤죽박죽으로 섞어 보는 흐리멍텅한 관점이요 디지털은 복잡(중복)을
제거하여 순수하게 만들어둔 엄밀한 세계이다.
논리의 세계에선 오반처럼 34초의 관점, 35초의 관점, 36초의 관점들이
배제된다. 배중률에 의거해서 중간이 없기 때문이다.
우주는 오직 1과 0으로만 설명된다.
우리는 우주를 너무나 어렵게 이해한다.
우주는 질서이며 질서는 다섯가지 밖에 없다.
그것을 최종단계에서 1과 0으로 압축가능하며 0은 없는 것이므로
생략가능하고 결국 1 하나뿐이 없다.
우주는 복잡으로 되어 있는데 복은 중복된 0이고 잡은 섞인 1이다.
0을 제거하고 1을 찾아내면 우주는 곧 이해된다.
논리의 영역에서 보면 엄청 어려운 것도 너무나 쉽게 이해된다.
1과 0밖에 없으니까.
도처에 1이 숨어있다. 대칭점 1, 꼭지점 1, 균형점 1, 중심점 1, 소실점 1,
1을 찾아내는 것이 곧 깨달음이다.
1 안에 우주가 몽땅 들어 있다.
논리란 무엇인가?
오반을 위해 한마디 더한다면 교과서적 지식은 여그서 안통한다는 것.
대충 아는 것, 대충 들어맞춰 본 야그들은 논리게임에선 반칙이 되어.
사실 논리란 것은 무지 쉬운 것인데 사람들이 핵심을 몰라서 모르거덩.
논리란 간단히 말하면 1이라 할수 있다.
왜 1인가 하면 중복된 것을 제하고 잡된 것을 분리하면 남는 것이 1이다.
우리가 쓰는 십진기수법도 편하긴 하지만 비논리적인거다.
숫자가 10 단위로 꺽어지는 것은 인간이 지어낸 거지 자연엔 긍거없다.
자연에선 모든 수가 1이다.
논리란 그 1이 될 때까지 제하고 분리하는 거다.
구조물을 설치하는데 위험하다 싶어 버팀목을 하나 고이고
불안해서 하나 더 고이면 넘 복잡하다. 애초부터 튼튼한 걸로 하나만 고여도
될 것을 가느다란 버팀목 두 개면 번거롭잖은가?
애초에 벽을 더 두껍게 해서 버팀목 없이 해도 되자나.
그러면 이번엔 기둥이 무너지는뎁쇼?
얼씨구 허면 애초에 기둥을 더 큰걸로 해야되자나.
기초가 작아서 기둥을 더 큰걸로는 못하는뎁쇼?
그렇다면 애초에 기초(주춧돌)를 더 큰걸로 했어야 자나.
터다지기를 덜해서 기초를 큰걸로 못하는뎁쇼?.
그렇다면 애초부터 터를 제대로 다져야 하자나.
지반이 모래땅이라서 안되는 뎁쇼?.
어휴~! 누가 모래땅에 집지으래?
작은 버팀목 하나 번거롭다고 집을 다시 지으랴?
잉간들은 터를 잘못 골라서 번거롭게 살지만 자연은 긍거없다.
무식하다. 인간처럼 형편 봐가면서 적당히 알아서 하는게 아이다.
위에 쓸데없이 긴 이야기를 나열한 것은 뭐든 원인을 따지면 어딘가
자꾸 딴데로 샌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최초에 터를 잘 골라야지 건물이 되든 뭐가 되든 최적화를
지향할 수가 있다. 자연에서는 항상 가장 빠른 길로만 간다.
최단거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번거로운 일은 하지 않는다.
즉 인간이 집을 지을 때는 뭐
[아따 땅값비싼데 모래땅에라도 대충 집짓고 살지 뭐.
지반이 약하니까 2층만 짓지 뭐, 번거롭더라도 버팀목을 여러개 대지 뭐. ]
인간은 경비를 계산하므로 돈이 되는데로 형편맞춰 살지만
자연은 1억이 들던 100억이 들던 신경안쓴다. 자연에선 남아도는게
에너지니까.
이를테면 지진이 나는데 [에흠 이번에 고베를 때릴라 카니 힘이 딸리고
시카고를 함 때려봐?] 이런거 없다. 그들은 경비가 얼마들던 신경안쓴다.
존냥 무식한 거이 자연이다.
화산이 폭발하는데 [도꾜를 함 뚫어봐? 아냐 거기 뚫었다간 존냥 욕먹어.
홋카이도나 한번 뚫자구~! 으잉~! ] 긍거없다. 그들은 가깝기만 하면
아무데나 뚫어제친다.
돈많은 재벌회장이다.
회장실 근처에 지저분한 것이 쪼까 눈에 밟히는데
청소원 불러 치울라니 번거롭다. 청소원은 총무과 담당인데 과장을 부르랴?
이사를 부르랴? 엥이 안되가서 외부용역업체에 전화해. 즉 돈많기 때문에
경비가 얼마들던 그들 편한데로 하는 것이다.
편하다는 것은 번거롭지 않다는 것, 에너지가 얼마가 들던 중간에 거쳐가는
단계의 회수만 적으면 그들로서는 만족이다.
중간에 거쳐가는 단계를 줄일려 하는 것. 이것이 자연의 보편적인 성질이다.
위에서 우리가 알아낸 것은 중간에 작은 버팀목 하나 줄일려다가
집터를 딴데로 옮기게 생겼다는 것. 단계를 줄일려면 애초부터 줄여야지
중간에 적당히는 안통한다는 것. 뭐든 끝까지 가봐야 한다는 것.
논리의 세계도 이와 같아서 한가지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원인을 찾고 그 원인의 원인의 원인의 원인의 원인의 원인의 ->
가는데꺼정 가봐야 한다.
그럼 그 최후에 뭐가 남는가? 1이 남는다.
자연에선 번거로운거 취하지 않는다. 뭐든 1이다.
한 개의 집터에 하나의 주춧돌, 하나의 기둥, 하나의 벽, 하나의 지붕.
그게 산이고 강이고 바다다. 자연은 늘 그런식으로 최단거리를 지향한다.
그들은 에너지를 절약하지 않기 때문이다.
논리란 그 1 찾아내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