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렬의 분류학 】
어떤 것을 알고자 한다면 먼저 그것을 구분 할줄 알아야 한다.
초등학교 국어교과서는 첫 페이지를 이렇게 시작하더라.
나, 너, 우리, 우리나라, 대한민국
분류구분이다. 먼저 너와 나를 구분하고 집합이 되는 우리를 찾아내며 확대하여 우리나라가 되고 명명하여 대한민국이 된다.
뭐든 시작은 꼭 이래야만 하는 것이다.
그 어떤 공부를 하든 처음에는 모으고 나누어 구분하고 분류하는 것부터 배운다. 거기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 여기서 나, 너, 우리의 분류하기엔 어떤 규칙을 사용하였는가?
도서관의 책들도 종류별로 분류되어 있고 컴퓨터의 프로그램도 적절한 구분규칙에 의하여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도스의 잘못된 분류는 깜깜절벽을 헤매게 하고 인터넷 항해의 곤란함은 분류의 무리이다.
린네가 생물분류학을 열어 비로소 우리는 전체적으로 개괄할수 있게 되었다. 화학수업도 원소주기표부터 배운다. 분류는 꼭 필요한 것이며 또한 합리적이어야만 한다. 잘못된 분류는 도스사용자의 불만을 낳고 인터넷의 미로에 허우적거리게 한다.
분류가 어려움에도 우리가 쉽게 분류하기에 성공하는 것은 모든 분류에는 공통된 규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간의 상호대칭성과 시간의 연속성이다.
공간의 상호대칭성은 그래프의 X축과 Y축의 대칭, 또 도표의 종횡구분을 낳으며 시간의 연속성은 그 전개를 낳는다. 한 방향으로 나열되는 것은 시간의 성질이며 마주보고 대칭하여 모이는 것은 공간의 성질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 공간의 성질을 사용하여 분류하기에 성공하고 있지만 개체의 수가 적을 때 유효한 것일 뿐이다. 수가 증가하면 인터넷 항해의 곤란에 빠진다.
모든 과학에 공통되는 절대적인 분류공식은 인간에 의해 발견되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들이 너무나 쉽게 분류에 성공하므로서 그 공식의 필요성을 찾아내지 못한 까닭이다.
절대적 분류공식이 꼭 필요한 것은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분류하는데 쉽게 성공한다면 대개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변화가 개입하면 인간은 혼란에 빠져버리고 주저하게 된다.
우주를 통일하는 절대적인 분류공식은 존재하며 그것은 신이 세계를 창조하는데 소용된 절대적인 도구다. 신은 모으기와 나누기의 방법으로 세상을 창조하였으며 인간이 그것을 파악하므로서 세상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무한한 우주를 5라는 작은 숫자안에 집적하여 넣을 수 있다. 그것이 절대적이며 공통된 분류규칙으로서 자기복제이론, 구조론, 전개이론, 일반이론, 집적이론이다.
제시하는 바 우주라는 사전찾기 공식이다. 국어사전은 가나다 순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신은 5 안에 세상을 다 집어 넣었다. 신의 우주는 5차원으로 되어 있으며 그 각각의 방 안에 다시 5가 들어 있는 식으로 집적회로처럼 우주를 집적해 놓았다.
이론의 효용은 그 어떤 문제든 전체와 부분, 본질과 현상, 원인과 결과를 단박에 알수 있게 하는데 있다. 분류에 성공한다는 것은 굉장히 유익하다. 적어도 생각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100배 단축시켜 준다.
어떤 문제든지 생각으로 알아내어야 하는 문제에 부닥치면 먼저 종이와 연필을 꺼내어 분류규칙만들기에 돌입하라. 이것은 내가 국민학교 3학년때부터 꾸준히 써먹어온 습관이다.
인간들이 세상을 알아가는 방식은 사전찾기 규칙을 모른체 우연히 글자를 발견하는 식이다. 분류규칙은 가장 빠른 길을 안내한다. 학습능력을 두배로 향상시키며 (인간의 두뇌구조가 이런 원리이므로) 문제해결능력을 열배 향상시킨다.
[자기복제이론, 구조론, 전개이론, 일반이론, 집적이론]
인간은 타고난 직관력을 가지고 있다. 자기직관을 믿어라. 그것은 깨달음과 통한다. 순수로서 믿음에 이른다.
[진리는 하나다]
우리는 직관으로 안다. 진리가 둘일수 없음을. 그렇다면 옳다. 올바른 태도는 이런 확실한 것에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가 아니면 진리가 아니다]
세계는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무엇과 무엇으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 예를 들어보자.
구름이 우주는 (정보와 뭐)로 되어있다고 말했다면 벌써 둘이다. 고로 진리가 아니다. 구름은 그 정보와 또다른 뭐가 둘이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 둘이 아니면 정보라는 말이 굳이 필요할까?
나가르주나의 공(空)사상은 자성설(自性說)을 공격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그 방법은 동일률에 근거하여 자성설이 결국 둘이 될 수밖에 없음을 논증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논리학이 없었기 때문에 [배중률에 어긋난다, 동일률에 어긋난다. 모순률에 어긋난다] 한마디로 끝낼수 있는 것에 용수는 수천단어를 낭비하고 있다.
나는 [물질의 바탕은 입자가 아니다]고 말한다. 용수가 자성설을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자물리학은 논리적으로 둘로 귀결된다. 입자형태는 항상 둘 이상의 힘의 대칭으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모든 논리법칙은 둘인가 하나인가를 판별한다. 둘에 이르면 오류이고 하나에 이르면 진리다. 배중률 = 하나의 사건으로 만난다. 동일률 = 하나의 실체로 만난다. 모순률 = 하나의 공간으로 만난다. 인과율 = 하나의 시간으로 만난다. 한정률 = 하나의 표상으로 만난다.
인과법칙은 서로 다른 시간에 일어난 두 개의 사건인 원인과 결과가 하나의 시간대에 의해 연결되어 있으므로 결국 하나라는 것이다. 모순법칙은 창이 방패를 뚫는 사건과 방패가 창을 뚫는 두 개의 사실이 하나의 공간 안에 집어넣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창이 방패를 뚫기도 하고 방패가 창을 뚫기도 하지만 동일공간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결국 진리는 하나이며 하나이어야 진리다]
[자기복제이론, 구조론, 전개이론, 일반이론, 집적이론]의 다섯 개 이론이 필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라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서다.
자연의 체험에서 우리는 무수한 법칙들을 만난다. 법칙이란 반복되는 것이다. 오늘 해가 동쪽에서 뜨고 내일 역시 동쪽에서 뜨면 반복이다. 그것은 법칙이다.
자연은 무수한 법칙들로 이루어져 있다. 법칙은 반복이며 반복이란 둘이 둘이 아니라 하나인데 둘로 늘여진 것이다. 자연은 본래 하나로부터 출발하며 그것이 늘어져서 둘이 되었다.
하나가 둘이 되는 과정을 풀어내므로서 둘이 하나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나를 둘로 만드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다.
공간의 기본성질은 대칭성이다. 좌우대칭, 상하대칭, 전후대칭, 내외대칭, 중앙과 주변의 대칭이 공간의 성질이다. 대칭이란 동일한 둘이 마주보고 동일한 접점을 공유하며 하나이면서 동시에 둘의 성질을 가지는 것이다.
시간의 기본성질은 반복성이다. 1초와 2초, 1분과 2분, 1월과 2월, 1년과 2년은 반복된다. 공간의 대칭과 시간의 반복이 본래 하나인 것을 둘로 늘인다.
[자기복제이론] = 원형을 유지한다. (물리영역)
자기복제개념은 본래 하나라는 것이다. 입자와 에너지, 혹은 물질과 정보가 합쳐져서 세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원래 [입자 = 에너지]로 하나이며 [물질=정보]로 하나라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이 둘이 아니라 [공간=시간]이라는 것이다. [시공과 물질]이 아니라 [시공=물질]이라는 것이다. [하드웨어 = 소프트웨어]
[구조론] = 분리되지 아니한다. (수리영역)
구조개념은 본래 하나이든 것이 둘로 나누어졌을 때도 최초의 하나로부터 결코 떨어져나가지 않는 성질이다. 공간의 대칭성에 의해 분리된 둘이 접점을 유지한채 마주보고 대응한 상태에서 떨어지지 아니한다. 고로 외부의 물리적 충격에 대해 개별적으로 대응하지 아니하고 전체적으로 대응한다.
[전개이론] = 열기와 닫기, 접기와 펼치기 (미학영역)
제행무상, 모든 것은 변화한다. 그러나 변화는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열리고 닫히며 접히고 펼쳐지는 것에 지나지 아니한다. 즉 본질에서의 변화는 없다. 우리가 변화라고 보는 모든 것은 열기와 닫기 접히기와 펼치기(벌리기)에 다름 아니다.
[일반이론] = 게임의 룰이 존재한다. (논리영역)
모든 변화에서 절대로 넘나들 수 없는 경계선이 되는 다섯가지 룰이 존재한다.
[집적이론] = 존재는 시스템이다. (언어영역)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서로 다른 존재들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최초의 하나가 자기복제하여 집적된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성질을 내는 것이다. 집적은 동일한 공간 안에 넣을 수 있는 정해진 최대한의 수이다. 우리가 존재라고 느끼는 것은 곧 집적이다.
☞☞☞☞☞
컴퓨터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되어 있다. 존재 또한 하드와 소프트로 되어 있다. 하드는 요소이며 소프트는 정보이다. 논증하는 것은 이것이 별개가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다. 소프트도 하드로 이루어진다.
하드가 어떻게 소프트를 획득하는가? 그것이 공간의 대칭성질과 시간의 연속성질 때문이다. 존재는 시공의 이런 성질을 이용하여 특정한 질서로 배열하면서 정보를 획득한다. 정보란 존재의 배열방식이다.
존재의 배열방식은 둘이다.
1. 열기와 닫기 (공간의 대칭성질을 이용한 디지털 확장)
2. 접기와 벌리기 (시간의 연속성질을 이용한 아날로그 확장)
동일한 공간 안에 디지털과 아나로그를 통한 최대확장 수치는 한정되어 있다. 그것이 집적이론이다.
1. ※ 우주의 비밀 텐서그리티 ※
텐서그리티를 아는가? (한겨레 21 참조)
텐서그리티를 안다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이런 말이 나온다.
/자연의 책은 기하학에 의해 다시 쓰여져야 할 것이다/
이 말은 생물학자 톰슨이 갈릴레오의 말을 인용해서 한 말이고 갈릴레오는 플라톤에게 인용했으며 그것을 한겨레 21이 인용하고 있고 나는 또 그것을 인용한다. 기하원리가 곧 우주의 기본원리라는 점은 누누히 강조해 온 바다.
텐서그리티에 대해 간단히 말하면 인장력과 수축력에 대해 기하학적으로 안정된 구조이다. 두가지 형태를 예시할수 있는데 요는 이런 기하학 원리가 생명체의 진화원리로 채택될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소개하는 이유는 전부터 말해오던 구조론과 부분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구조는 곧 시스템이며 그것은 외부의 어떤 물리적 충격에 대해 그 힘이 전체에 골고루 분산되는 정도를 말한다. 안정된 구조, 완벽한 시스템은 어떤 물리적 충격에도 부서지지 않는다. 그것은 풍선이 힘을 골고루 나눠 가지므로서 터지지 않듯 힘을 분산하여 가지기 때문이다.
텐서그리티란 그 실물모형인데 하나는 6각형 벌집구조이고 하나는 여섯 개의 막대와 그 끝을 연결하는 여러개의 끈으로 만들어진 모형이다. 요는 생명체의 자기복제 원리가 이 구조원리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자기복제 개념은 내가 제안하는 주장이고 텐서그리티는 하버드 대 [도널드 인그버]교수가 주장하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기하학원리 = 생명체 원리 = 우주원리 = 텐서그리티/라는 것이고 내 말은 그 모든 것을 /자기복제 원리 = 집적이론/으로 풀이할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내 이야기다.
근래 프랑스에서 80만년 전의 인간 두개골이 발견되었다. 문제는 이 두개골이 현생인류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배운 교과서 내용대로라면 4만년전에 크로마뇽인이고 20만년 전에 네안데르탈인이고 80만년 전에는 호모 에렉투스가 살던 때다.
몇 년 전 칼 세이건교수가 진화에 대한 그림모형으로 히트친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텔레비젼을 통해 그 현란한 그림쇼를 보아왔다. 그것은 하나의 원시생명체가 인간으로 진화하기까지의 과정의 연속그림이다.
거기에 따르면 80만년 전의 인류는 오랑우탄과 현생인류의 중간형태의 두개골 모양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문제는 유감스럽게도 80만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 학계는 그 원시인은 소년이므로 유형화단계를 거쳐서 네안데르탈인을 따라갈지 모른다고 변명하고 있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고...!
누차에 언급했듯 진화론을 구조론으로 풀어보면 진화는 비약적으로 일어나며 잃어버린 고리는 없다는 것이다. 왜?
그것은 구조론의 자기복제 개념으로 충분히 설명되지만 텐서그리티로도 풀어볼 수 있다. 이렇다. .../어느 하나의 부품에서 인장력이 작용하면 구조전체에 인장력이 전달된다. 인장력이 전체적으로 증가하면 어느 특정 부재의 압축력이 증가하면서 전체가 균형을 이루게 된다/
구조는 곧 시스템구조이며 시스템구조는 건축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건축이야말로 기하학이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되며 또 증명되는 부분이다.
모든 건축은 이러한 텐서그리티의 원리를 이용하고 있다. 가장 안정된 건축구조는 일본의 모 사원처럼 못 하나를 빼면 그 건물 전체가 무너지게 되어있는 형태이다. 일본의 그 신사는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데 딱 하나의 못을 사용하고 있고 그 하나를 제거하면 마치 풍선이 터지는 것처럼 전체가 무너지게 된다.
역으로 그 하나의 못을 빼지 않으면 어떠한 물리적 충격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또한 텐서그리티의 원리다. 그래서 건축에는 한식이면 한식, 벽돌이면 벽돌, 슬라브면 슬라브지 어중간한 복합형태가 없다. 그 기초가 목재냐 벽돌이냐 슬라브냐에 따라 전체적인 형태가 단번에 나오는 것이다.
생명체 또한 건축원리가 적용된다. 그러므로 다윈의 진화론은 부정된다. 이것은 진화론 전체가 부정된다는 것이 아니라 적자생존이론이 부정된다는 것이다. 텐서그리티의 원리를 따르면 돌연변이는 그 전체가 균형을 이루는 현상에 배치되므로 태내사망하여 사산하게 된다. 사산하지 않은 경우 진화의 의미가 없다.
생명체도 알고보면 하나의 건축물이므로 어떤 변이가 개입하면 그 영향을 전체가 고루 나눠가지게 되므로 그것은 비약적인 진화로 나타나던지 아니면 기형아로 사산하던지 둘 중의 하나가 된다.
유인원의 유전인자에 변이가 개입했다면 제 2의 안정형태를 따라 인체의 전 부분에 걸쳐 비약적인 변화가 일어나므로 중간단계인 잃어버린 고리는 없게 된다. 그것은 대뇌, 골격, 근육, 내부장기, 신경조직에 동시에 작용한다.
즉 진화를 담당하는 유전정보 자체가 기하학적 배열구조를 가지며 텐서그리티의 원리에 따라 /부분의 진화 = 전체의 진화/로 연결되는 것이다.
기하는 건축에 소용되며 생명체도 우주도, 언어도, 수학도 그 자체로 하나의 건축, 하나의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집을 지을 때 꼭대기층이 돌이면 아래층도 돌이어야 한다. 2층은 돌인데 1층은 나무면 그 집은 무너진다. 우주도 마찬가지,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다섯가지 부재를 사용하며 그 외에는 없다.
대수학에 있으서는 수가 건축의 부재이고 식이 그 건축의 설계도다. 기하에 있어서는 점은 선의 부재이고 선은 점의 설계도인 동시에 선은 면의 부재이고 면은 선의 설계도이다. 또 면은 입체의 부재이며 입체는 면의 설계도이고 입체는 공간의 부재이며 공간은 입체의 설계도이다.
즉 기하는 한단계식 상향할때마다 설계도인 동시에 부재가 되는 것이다. 고로 최종적으로는 질과 공간이 설계도가 되며 양과 점이 부재가 된다. 그 중간은 설계도의 성질과 부재의 성질을 동시에 가진다. 설계도일 때 절대성이, 부재일 때 상대성이 적용된다. 고로 우주의 기본원리는 절대적이면서 동시에 상대적인 것이다. 확정적이면서 동시에 불확정적이고 변하면서 동시에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물질의 텐서그리티 개념이다. 인장과 수축에 대해 동시에 대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는 혹 진리는 보편성과 특수성, 일반성과 다양성, 정체성과 의속성, 절대성과 상대성, 사실성과 신비성을 동시에 가지는 이중구조로 되어있다. 이러한 물질의 혹 기하의 혹 시스템구조의 기본원리를 파악하므로서 우주를 존재를 전체적으로 이해할수 있게 된다.
건축의 기본은 견고성과 효울성이다. 견고성은 외부의 물리적 충격에 대해 가장 안전하게 방어함을 의미하며 효율성은 가장 적은 비용이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과 우주의 원리도 마찬가지다. 어떠한 생명체든 절대로 낭비되는 부분이 없어야 한다.
텐서그리티 개념은 /부분 = 전체/다. 그것은 효울성을 낳는다. 단 하나가 모자라도 전체가 무너지며 단 하나가 남아도 전체가 둔해진다. 생명과 우주도 같다. 그것은 행동통일이다.
공상과학영화에서는 이와 배치되는 부분이 나온다. 예를 들면 H G 웰즈의 화성침공에서 화성인은 매우 많은 팔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상당히 남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성인의 여덟이나 되는 팔 중 몇은 언제나 놀고 있다. 이것이 텐서그리티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체에 있어서 두 팔과 열손가락이 있지만 하나도 남는 것은 없다. 하나가 모자라도 매우 불편해진다. 텐서그리티 개념은 이것이 유전인자 차원에서 정해지므로 우주의 그 어떤 생명체든 텐서그리티의 지배를 받아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으므로 모자라거나 남았다는 이유로 자연도태, 적자생존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우주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요즘 논의되는 초끈이론은 마땅히 텐서그리티를 참고해야 한다. 초끈의 끈은 미립자와 미립자를 연결하는 끈이다. 텐서그리티를 적용하면 우주는 인장력과 수축력에 대응하는 두개의 끈에 의해 지탱되며 통일장 개념은 그 두개의 힘을 하나의 범위안에 담아내는 개념이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빅뱅 개념은 여기에 충분히 배치된다. 최초에 하나의 점을 설정하고 그로부터 확장되었을 뿐 그 반대는 논의되지 아니한다. 텐서그리티 개념을 도입한 구조론적 우주론은 우주는 확장이 동시에 수축인 것이다.
초끈을 도입한 빅뱅은 하나의 점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팽창이 아니라 그 반대로 하나의 점 안으로 수축하는 방향으로의 빅뱅이다. 우주는 하나의 작은 점에서 무한히 커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달걀 그 내부로 무한히 조밀해진 것이다.
그 달걀의 내부에서 보면 무한히 커진 것으로 보이고 밖에서 보면 무한히 작아진 것처럼 보인다. 전체적으로는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았다. 달라진 것은 비례 뿐이다. 집적도만 증가했을 뿐 물리공간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조만간 빅뱅이론은 이렇게 수정된다.
화성인은 귀가 크다. 이것은 텐서그리티에 안맞다. 개가 귀가 큰 것은 감정표현을 위해서고(개는 귀로 의사를 소통한다) 토끼가 귀가 큰 것은 체온조절을 위해서다.(굴토끼(집토끼)는 원래 사바나에 적응하고 있다, 산토끼는 귀가 작다)
만약 화성인이 귀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 크다면 귀는 잘 보이는 머리꼭지에(고양이나 호랑이처럼) 있어야 하고 그러면 두 개골의 위차가 좁아져서 머리가 나빠진다. 텐서그리티는 최적화를 따라가므로 결국 화성인은 인간처럼 귀가 작다는 결론이 나온다.
텐서그리티는 정치에도 적용된다. /그렇게 되게되어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게 되어 있는대로 되어간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구조원리/가 모든 것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것이다.
신의 지문
신이 곧 기독교의 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천지간에 만연한 잡귀신들이 신인 것도 아니다. 이매망량 요정 정령 저승사자 야차 외계인 스머프들이 신인 것도 아니다.
신은 존재한다. 증명된다. 문제는 존재론과 인식론, 신은 존재하지만 인간들이 존재라는 말의 참된 의미를 모르고 있으므로 납득 안된다. 존재한다는 것이 인간들의 존재감, 충일감, 충족감, 소속감을 곧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느낌으로만 판단한다.
존재를 모르는 자에게 신의 존재를 말한다는 것이 또 증명한다는 것이 가당한가? 우리가 느끼는 딱딱한 알갱이가 곧 존재인 것은 아니다. 알갱이는 존재의 다섯가지 성질, (질, 입자, 힘, 운동, 량) 중 하나일 뿐 신이 곧 어떤 알맹이들의 형태는 아니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는 이치다. 작은 인간의 감관에 신의 큰 존재를 담을수는 없다. 감각은 인간이 정보를 취득하는 수단일 뿐 존재의 즉자적 성질은 아니올시다. 먼저 존재론을 배우라.
인식론이 또한 문제가 된다. 인식에는 경계가 있다. 인식할수 있는 부분과 불가능한 부분이 있다. 어떤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이미 개입한다는 것이다. 사태에 개입한 부분까지가 인식의 궁극적 종결점이다. 신이 개입한 부분까지만 인식가능하다. 신은 과연 인간에 백프로 개입하는가? 아니올시다.
신의 문제는 신의 존재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느냐의 문제이다. 신은 존재하는 방식으로 개입한다. 신이 없다는 의 의미는 신이 인간의 삶에 사사건건 개입하지는 않는다는 말이 되고 신이 있다는 말은 전체적으로 개입한다는 말이 된다.
존재론적으로 말하면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은 없다. 세계는 궁극적인 차원에서 수수한 0, 순수한 무(無)으로 환원된다.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완벽하게 증명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존재하는 듯이 보이게 할 그 어떤 힘의 존재가 역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우리는 물질이 존재한다고 믿지만 물질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촉각이 존재하는 것이다. 물질은 공(空), 존(存), 재(在), 사(事), 상(像)의 다섯가지 양상으로 전개한다. 각각은 서로 전개, 환원되므로 이들은 하나다. 우리가 있다고 느끼는 것은 존(存)이나 재(在)다. 그것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명목을 가진다/존(存)/거나 위치한다/재(在)/는 것이다.
명목을 가짐은 다른 것이 그에 지배, 소속된다는 것이고 위치한다는 것은 다른것에 지배, 소속된다는 것이다. 고로 존재란 결국 연관관계인 것이다. 고로 신이 존재한다는 개념은 개입한다는 개념으로 바뀌는 것이다.
무신론이란 신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인식일 뿐이다. 그것은 집주인이 셋방살이 하는 사람에게 간섭하지 않는다는 말일 뿐이다. 이미 신의 터에 집 짓고 사는 터 어찌 간섭 없으랴.
옛날 우주론은 과거로 미래로 시간무한 공간무한이었다. 그러나 무한은 없다. 한은 지경을 의미하며 경계가 없는 것은 존재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의 다섯가지 성질(질, 입자, 힘, 운동, 량)이 다 경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간은 공간으로 치환되고 공간은 특이점으로 환원하여 사라지고 시공이 물질과 분리되지 않는 시간과 공간과 물질이 삼위일체가 되어버리는 물리학이 등장하게 된다. 존재한다는 것은 시,공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인데 시공간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이다.
그 차원에서 물질은 알갱이가 아니라 순수한 수학공식으로 돌아가버린다. 그것은 시스템이며 구조이고 거기에는 앞과 뒤, 겉과 속, 중앙과 주변, 좌와 우가 있다. 그 위치는 고유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우주는 집적도 5이므로 다섯 번을 지정해야 존재가 시스템으로 작동하게 되어 있다.
물질은 자기복제원리에 의해 집적도 공식을 따라 자가발전하여 스스로 세계를 창조해 왔지만 그 시스템 자체는 지정되어야 한다. 이는 우주존재(물질계)가 스스로 모순에 차 있다는 말이다.
우주는 불완전하며 결핍되어 있다. 즉 분명히 측정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측정되지 않는 부분은 반드시 물질계의 바깥에 있어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우주는 딱딱한 알갱이가 아니라 순수한 수학공식이며 스스로 불완전한 공식이다. 그것을 완전하게 할 보상부분은 우주의 바깥, 시공의 바깥에 있다. 내가 말하는 신은 바로 그 부분을 지시하는 것이다.
어쨋든 지정1, 유도의 문제
지정2, 대응의 문제
지정3, 의속의 문제
지정4, 인과의 문제
지정5, 표상의 문제는 학문의 근원인 물리학의 형님이며 물리학으로도 답이 안나온다. 우리가 아는 세계는 물리적 세계일 뿐이나 물리 이전의 세계가 존재한다.
요기까지만.
존재론
있다는 것은 만져진다는 것이거나 위치한다는 것이다. 만져지지도 않고 위치도 포착 안되면 없는 것이다. 인간이 있고 그 위에 존재가 있고 그 위에 위치가 있다. 존재는 위치에 매달려 있고 인간은 존재에 매달려 있다. 그것은 사슬관계이다.
서로 연쇄된 사슬의 한 마디일 뿐이다. 문제는 이 사슬이 끝없이 이어지는 무한이 아니라 어딘가 잘라지는 부분이 있다는데 있다. 사슬은 앞과 뒤가 연결되어 유한한 하나가 되어버린다. 여기에 시간을 대입하면 사슬에서 빠져나가 다른 사슬로 가버린다. 그 사슬과 사슬이 또한 사슬관계가 된다. 그 사슬관계도 역시 유한하며 또 더 큰 사슬로 건너 뛴다. 그것이 지시 1에서 5까지다.
《】
초끈은 없다.
1. 물질은 입자가 아니다.
스티븐 호킹이 통일장이론을 완성하겠다고 큰소리 친 서기 2000년이 코앞에 다가왔다. 어림없다. 허황되다. 요즘 호킹은 자기의 옛날 이론을 수정하고 있는 모양이다.
러시아 인형처럼 자꾸만 속에서 더 작은 입자가 나오는 물리학이 그 입자의 벽에 막혀 버렸다. 대신으로 주목받는 것이 초끈이론이다. 그러나 초끈이론 또한 적어도 1세기 안에는 가시화된 모양으로 복장을 갈아입지 못할 모양이다.
초끈이론에 주목하는 것은 내가 소년 때 순전히 논리학, 수학적인 탐색의 끝에 물질의 기본단위는 결코 입자일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과 부분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초끈이론은 물질의 기본이 입자알갱이가 아니라 미세한 끈이라는 것인데 입자를 탈피한 것은 진일보지만 기본적으로 어떤 알갱이 형태를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함으로서 한계를 가진다. 물질은 입자도 끈도 아니고 비다.
어째서 물질이 입자일수 없는가?
앞에 텐서그리티 이야기를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질이 둥근 구(球)의 형태를 가지는 것은 적어도 두 개 이상의 힘이 작용하고 있을 때이다. 그러므로 입자라면 거기에는 적어도 두 개 이상의 힘이 마주보고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구성(構成)을 의미한다.
구성이란 건축의 바탕인 벽돌이 아니라 그 벽돌의 결합하는 시멘트가 작용했음을 의미하는 즉 둘 이상의 구성소들이 어울려 형태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고로 입자는 물질의 최소구성소일 수 없다. 이건 간단한 법칙이다.
고로 물질은 입자가 아니다.
텐서그리티에 대해 한마디 더.....풀잎에 맺힌 이슬은 왜 구(球)의 형태를 가지는가? 텐서그리티란 외부에서 물리적 힘이 전달될 때 그 힘이 그 전체에 고루 분산되어 나눠가지는 것이다.
풍선에 바람을 집어넣으면 그 힘은 전체에 고루 분산된다. 그 분산되는 정도가 고를수록 구조는 안정된다. 힘이 어느 한쪽으로 집결되면 풍선은 터지고 구조는 무너진다.
풀잎을 확대해 보면 미세한 요철(凹凸)구조를 볼수 있다. 그 하나의 돌기가 이슬방울을 찌르면 중력에 의해 납작해져 있던 물분자들은 텐서그리티의 작용에 따라 강한 수축력을 발휘 외부의 물리력에 대해 가장 안정된 방어형태를 가지게 되는 데 곧 구의 형태로 나타난다.
물질의 기본이 입자인 것은 텐서그리티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내부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이며 내부의 구성소들 간에 힘의 균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이미 물분자들은 서로 당기는 응집력과 서로 미는 힘(압력)을 동시에 가지며 그 둘의 균형이 성립함을 의미한다.
고로 어떤 개별자가 입자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면 거기에는 최소한 복수의 구성소들이 결합된 형태로 존재하며 그것은 집합이지 원소가 아니다는 증거가 된다.
2. 차원을 이해해야 한다.
물질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먼저 차원개념을 이해해야 된다. 차원은 1차원에서 5차원까지 밖에 없다. 초끈이론은 벌써 10차원 26차원 하는 것이 틀려먹은 것이다. 천차원 만차원은 왜 없어야 되는가?
공간 상에 점 a와 점 b를 설정했을 때 a에서 b를 찾아가려면 최소한 몇번의 궤도수정을 해야하는가? 그것이 차원이다. 요는 내가 생각하는 차원개념과 일반적으로 알려진 차원개념이 다르다는 것이다.
차원이 5차원까지 밖에 없다는 것은 공간 상의 어떤 위치를 찾아가려면 아무리 해도 5번의 궤도수정만 하면 이 우주 안에 찾아가지 못할 위치가 없다는 것이다.
사격을 할 때 0점이 안잡히면 크리크수정을 해야 하는데 이때 몇 군데를 수정해야 하는가? 크리크는 상하를 조정하고 가늠자는 좌우를 조정한다. 평면이라면 이 두곳만 수정하면 어떤 위치에도 도달가능하다.
그러나 총알은 공간을 날아가므로 엄밀히 해서 네곳이다. 먼저 총의 위치확정, 다음 총알이 날아가는 거리확정, 다음 상하 크리크확정, 다음 좌우 확정, 이것만으로 총알은 정확히 표적을 찾아간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세계는 4차원의 세계이다. 그러나 최초의 총이 놓인 위치는 셈에서 빼므로(옛날 사람의 실수) 총의 위치가 0차원이 되어서 우리는 3차원 공간이라고 한다.
문제는 이것이 지구에서는 되는데 우주공간에서는 안맞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는 우주공간의 어떤 지점이다. 우리는 우주선을 타고 우주의 어떤 위치에 있다. 지구로 가려면 이 우주선은 몇번의 궤도수정을 해야하는가? 정답은 다섯 번이다.
그러므로 이 우주는 5차원의 세계이다. (점을 0차원으로 친다면 4차원) 우리는 다섯 번의 위치설정으로 이 우주 안의 그 어떠한 위치라도 정확히 찾아갈수 있다.
보통 차원을 생각할 때 정육면체를 상정한다. 문제는 이 정6면체가 항상 예각을 가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각도설정이 빠져있다. 왜 예각인가? 그것은 최초에 찍는 점을 항상 그 정육면체의 가장 바깥(꼭지점)에 있는 어떤 위치로 설정하기 때문이다. 왜 바깥인가?
이것은 교묘한 착각이다. 최초에 찍는 점이 그 정육면체 내부에 어떤 위치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3차원(선, 면, 입체)로는 결코 도달할수 없는 어떤 위치가 생겨난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사차원이며 거기에다 최초의 위치 0차원을 더하면 5차원이다.
아인시타인이 말한 4차원은 시간개념인데 시간에는 별도로 시간차원이 존재하므로 논의에서 빼야한다. 초끈이론의 10차원 26차원 하는 발상도 시간변수를 더한 것이므로 역시 오류이다. 차원개념에 시간은 전혀 배제된다.
시간을 배제하면 움직이고 있는 어떤 위치로는 찾아갈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던질수 있겠지만 그 움직임은 사전에 계산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우주선이 정확히 다섯 번의 궤도수정으로 우주공간의 어떤 위치를 찾아가는데 시간이 흘러 별이 다른 데로 가 있으면 어찌되나 하는건데 이건 사전에 계산되어야 하며 시간차원은 그 계산에 소용되는 것이다.
시간에도 역시 5차원이 있다. 먼저 시간의 위치를 확정하고 그 시간의 변화에 따른 공간의 상대위치를 확정하고 다음 정확히 다섯 번의 궤도수정만으로 우주공간의 어떤 위치라도 찾아갈수 있다.
3.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구분해야 한다.
존재는 디지털(열기)과 아날로그(벌리기)로 되어 있다. 여기서 다섯 번의 크리크 이동은 디지털이고 그 거리설정은 아나로그다. 디지털이란 0과 1로 나타낼수 있다는 것이다. 차원개념을 생각할 때 정육면체를 떠올리는 것은 그 차원이동을 항상 90도 각도로 생각하기 때문인데 이것은 아날로그 개념이다. 디지털에는 0과 1만 있기 때문에 각도가 얼마다 하는 것은 없다.
저격수가 크리크조정을 하는데 크리크를 조정한다 하는 것은 디지틸이요 크리크를 3이나 4로 조정하는 것은 아날로그다. 차원개념은 거리(아날로그)를 배제하고 각(디지털)만 따지는 것이다.
즉 각은 디지털이고 각도는 아날로그다. 각은 모서리이고 각도는 그 모서리의 확장이다. 각(열기)만 있고 각도(벌리기)는 없어야 차원이 포착되는 것이다. 아나로그에는 무한이 있지만 디지털에는 0과 1 뿐이므로 모든 것이 유한하다. 차원의 착오는 아나로그와 디지털을 섞어 무한한 선, 면, 입체를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런건 없다.
모든 논의는 닫힌 계를 전제로 유한한 세계 안에서 판단하는 것이다. 그 무한을 유한으로 만드는 것이 비(比)다.
모든 논의의 기본개념은 자기복제다. 최초에 점 1이 자기복제 하면 선이 되고 선이 자기복제하면 면이되고 면이 자기복제하면 입체가 되고 입체가 자기복제하면 공간이 된다.
차원은 곧 디지털이며 디지털은 자기복제 여부의 판단이고 아날로그는 그 복제회수를 나타낸다. 즉 선이 자기복제하면 면이 되는데 그 면이 자기복제하여 입체가 되는 것이 디지털이요 선이 했던 복제를 한번 더하여 더 넓은 면이 되는 것이 아날로그다.
디지털 (자기복제)
아날로그 (동일한 자기복제의 회수 반복)
디지털은 뼈고 아날로그는 살이다. 논의에서 살은 빼고 뼈만 말하는 것이다. 왜 살을 빼야 하는가하면 점 a에서 b로 찾아갈 때 크리크 조정은 여러번 하지만 탄환의 발사는 딱 1회 뿐이므로 아날로그 전개는 한번만으로 충분한 까닭이다.
수학이란 중복을 피하고 최소화 시켜서 판단하는 것이다. a에서 b로 찾아갈 때 궤도수정을 한번 할 때마다 정확히 각도 얼마를 수정해야 할지 판단할 필요가 없다. 표적이 포착될때까지 차원을 바꾸다가 포착된 이후 딱 1회의 아날로그 설정으로 표적을 정확히 때릴 수 있다.
그러므로 반복된 아날로그 개념은 필요없는 것이다. 그것은 총을 한방 쏠 때마다 0점을 잡는 것이 아니라 0점을 잡아놓은 총을 쏘기만 하면 되는 것과 같다.
11층에 있는 삼돌이를 찾아간다.
1, 자기위치를 확정한다. 자기위치는 1층이다.
2. 엘리베이터를 탄다.
3. 엘리베이터를 상승시킨다.
4. 엘리베이터를 내린다.
5. 삼돌이를 찾는다. 아무리 최소화 시켜도 이 5는 있어야 하며 가장 에너지를 절약할 때 이동(아날로그설정)은 엘리베이터 상승 딱 1회 뿐이다. 그것이 차원개념.
위에서 엘리베이터 이동은 이동거리 얼마(아날로그)가 지정되어야 하지만 그 이외의 부분은 yes와 no, 0과 1로 충분하다. 실 우주공간에서 이동이라면 그 아날로그 벌림은 언제하던 무방하다. 위 1,2,3,4,5, 단계의 그 어디에서 아날로그 벌림을 지정하던 상관없기 때문에 중복을 피하기 위해 제외하는 것이다.
차원개념을 입방체로 그릴 때
1. 먼저 꼭지점을 찍고 (0차원)
2. 선을 길게 벌려 그으며 (1차원)
3. 사각형 평면을 만들고 (2차원)
4. 그 사각형을 위로 쌓아 (3차원) 작업을 끝내는데 이것이 무식한 경우인 것은 점을 무한히 많이 찍어버려도 입방체가 되고 선을 무한히 많이 그어도 입방체가 되는데 굳이 반복하여 선의 길이를 정하고 면의 넓이를 지정하며 입체의 높이를 얼마로 지정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컴퓨터로 그린다면 단 1회의 수치입력으로 충분히 입방체를 그릴 수 있다. 아날로그 벌림은 1회 만으로 충분한 것이므로 종이위에 그리는 도형은 눈금 자를 여러번 댄 즉 기하학의 기본원리 눈금자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어긴 것이다.
콤파스의 벌림은 1회로 충분하다. 왜 기하학은 눈금자를 사용하지 않는가? 눈금은 아날로그며 반복되기 때문에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다. 눈금자 없이 자와 콤파스만으로 입방체를 그려보자.
1. 점을 찍는다 (1차원)
2. 점에다 임의의 각을 설정한다. (2차원)
3. 각에 대한 상대각을 설정한다. (3차원)
4. 그렇게 만들어진 상대각에 대한 상대각을 설정한다. (4차원)
여기까지는 도형을 그릴 것 없이 생각만으로 가능하다. 다음 여기에다 임의의 수치를 부여하기만 하면 입방체가 성립한다.
여기서 각은 곧 꼭지점을 의미하고 상대각이란 서로 마주보는 꼭지점을 의미한다. 1차원에서 최초에 점을 찍는 것은 하나의 꼭지점을 부여하는 것이다. 2차원에서 임의의 각을 주는 것은 점을 하나 더 찍어서 두 점이 마주보게 한다는 것이다. 3차원에서는 그렇게 하여 생긴 서로 마주보는 두 개의 각 과 동일한 것을 하나 더 설정한 후 둘을 마주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평면이 떠오를 것이다. 4차원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동일한 것을 자기복제하여 하나 더 설정한 후 마주보게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여덟 개의 꼭지점을 가진 입방체가 떠오를 것이다. 거기에 아무 수치만 주면 입체가 된다. 눈금없는 자와 콤파스 만으로 그릴 수 있다.
입방체는 4차원이므로 1,2,4,8로 자기복제하면 8개의 꼭지점을 가진다. 이것을 자기복제하여 16개의 꼭지점으로 만들면 구가 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사는 공간에서 16개의 꼭지점을 가진 입방체는 만들 수 없다.
그것은 입방체의 내부에 중심점을 부여하여 여섯 개의 사각뿔로 나눈 후 자기복제하여 12개의 사각 뿔을 다시 두 개씩 마주보고 붙여 여섯 개로 만든후 붙이면 14개의 꼭지점을 가진 형태가 되는데 여기에 중심을 지정하기 위하여 중심과 마주보는 대칭각을 설정하면 16개의 꼭지점이 된다. 그것이 구의 기본형이다.
여기서부터 자기복제를 진행하여 꼭지점의 수를 늘려나가면 갈수록 공이 된다. 공은 16꼭지점 입방체의 꼭지점 수를 무한히 늘려버린 것이라 할수 있다.
차원이 왜 5차원 뿐인가 하면 입방체까지는 바깥으로 진행하지만 5차원부터는 꼭지점이 내부로 들어가 버리므로 자기복제를 진행하면 자기 내부를 통과하는 즉 겹쳐지기 때문이다.
4차원까지는 겹치지 않고 외부에서 설정할수 있으나 5차원에서 끝이다. 더 이상은 설정이 불가능하다.
《】
§디지털과 아날로그§
수학과 물리학을 연결하는 통로가 되는, 가장 기본이 되는 두가지 개념이 '차원 개념'과 '디지털 개념'이다. 이걸 알아야 만사가 보인다. 돌연 확 뜨이는 것이다. 까만 어둠에 서광이 비치듯 세상이 확 밝아보인다. 가히 깨달음이다.
초끈이론이 안되는 것은 연관되는 수학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학이야 말로 미개척지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간단한 수학원리인데 수학책에 나오지 않는다. 기본이 되는 개념인데 누구나 다 알고 있다고 믿으면서 실은 누구도 모르고 있다.
차원에 대해서는 여러번 언급했다. 그것은 시스템이며 식이고 구조다. 제곱셈 같이 건너뛰는 것이다. 중간이 없다. 그런데 이걸 이해못한다. 다 알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전혀 모르는게 차원이다. 4차원, 10차원 26차원 하는 말들 다 잘못 인식된 개념이다.
그것은 디지털을 모르기 때문이다. 디지털을 알아야 차원이 보인다. 누구나 디지털을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게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아는 것이다.
차원과 디지털은 일상생활에서 너무나 많이 관찰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냥 안다고 믿는다. 그러나 결과를 보고 얻은 것이지 원인을 아는 것이 아니므로 오인(誤認)이며 착각이다. 그것이 아니다.
/존재를 이루는 기본공식이 차원과 디지털이다./
/세상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라는 두가지 기본요소, 그리고 그 구성인 차원으로 되어 있다/
세상은 복잡하다. 그러나 단순화하면 세상은 [YES와 NO],
[0과 1]로 압축된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세상이 [같은 것]과 [다른 것]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한 견해는 누천년 전에 이미 성립하였다. 상식이다. 그런데 그게 뭐지?
1은 (열기), 0은 (닫기)다. 1을 열면 1의 반복인 아날로그 2,3,4,5,...가 펼쳐진다. 0은 10, 100, 1000과 같이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을 위한 닫기다.
여는 것은 뭐고 닫는 것은 무엇인가? 여는 것은 집합을 열어 원소들을 보이는 것이며 닫는 것은 원소들을 집합 안으로 가두는 것이다. 집합은 무엇인가? 그것은 차원이다.
우주는 집합(集合)과 원소(元素), 곧 식(式)과 수(數), 그리고 집합에서 더 높은 집합으로의 이동인 열기와 닫기, 또 이들을 잇는 구조(構造)로 구성되는 것이다.
존재의 원 구성소는 총 다섯이 된다.
1. 차원(次元) : 식(式), (집적도(集積道).)-- 질(質)을 나타낸다.
2. 집합(集合) : 수(數), (실수實數) --입자(粒子)를 나타낸다.
3. 구조(構造) : 대칭, (각) -- 힘(力)을 나타낸다.
4. 아나로그 : 벌리기, (아나로그) -- 운동(運動)을 나타낸다.
5. 디지털 : 열기 닫기 (디지털) -- 량(量), 자기복제를 나타낸다.
물질존재가 양(量)과 그 양들의 집합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러나 그 양이 자기복제를 통해 성립하며 집합이 집적도(集積度) 곧 차원에 의해 성립한다는 것을 아는 이는 없다.
우주는 양으로 가득차 있다. 그것은 최초의 하나가 복제된 것이다. 그 복제된 것들이 어떤 양상으로 구조화(構造化) 하는지에 따라 하늘이 되고 땅이 된다. 구조화란 곧 결집(結集)이다.
양이 구조화 하려면 벌리기(운동)와 대칭(구조)을 거쳐야 한다. 벌린다는 것은 양이 추가된다는 것이고 대칭은 남자와 여자, 하늘과 땅, 낮과 밤 처럼 서로 마주보고 붙는 것이다. 벌리기와 대칭이 없다면 결집되지 않고 집합이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가 뭔가 (있다)라고 말할 때 그 있음은 집합, 곧 입자로 있는 것이다. 그 입자는 단 하나의 알갱이로 된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부구조를 가지는 여러 요소들의 구조로 되어 있다. 입자를 이루기 위해서는 내부에 대칭을 가져야 한다. 좌우, 상하, 전후, 내외, 근원의 대칭없이는 입자가 성립하지 않으며 집합이 되지 않는다.
정리하면 존재는 수학적 존재이며 디지털(점)과 아날로그(선), 대칭(각, 평면), 집합(직각, 직각사각형, 입체), 식(원, 시스템, 공간)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앞으로 갈수록 원소이고 뒤로 갈수록 집합이다.
여기에 차원을 도입하면 차원은 집합의 종류이다. 집합은 1차원에서 5차원까지 존재하며 그 하나하나의 집합마다 열기(디지털 1)와 닫기(디지털0) 그리고 원소 (아날로그 2,3,4,...) 로 되어 있다.
차원 질 5 (여닫기) + (벌리기) + 대칭 + 집합 + 식
입자 4 (여닫기) + (벌리기) + 대칭 + 집합
힘 3 (열기 닫기) + (벌리기1,2,3,....) + 대칭
운동 2 (열기 닫기) + (벌리기1,2,3,....)
량 1 (yes열기 ,no닫기)
우리는 수학에서 집합론을 배우지만 막연히 집합과 원소를 구분할 뿐 열기와 닫기를 배우지 않는다. 존재는 다섯가지 집합으로 구조화하며 각각의 집합마다 (열기와 닫기)를 가진다.
원소도 집합이다. 마찬가지로 집합도 상위집합의 원소이다. 디지털은 순수한 원소이자 가장 작은 집합이며 식은 가장 높은 집합이자 우주존재의 기본원소다.
순수한 원소 디지털(0,1)에서 차원이 하나 증가할 때마다 아나로그(....), 대칭(각), 집합(입자)가 추가되고 식에서 완성된다. 식은 5차원에서 완전해지며 4차원에서는 그저 집합일 뿐 독립적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모여있을 뿐 리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디지털이 우주의 최소구성소인가?
왜 원소는 1이 아니고 (0,1)인가?
왜 모든 원소는 원소이자 동시에 집합인가?
왜 집합은 집적도 5(5차원)에서 완전해지는가?
원소 (1,0)은 왜 자기복제를 수행하는가?
또한 하회를 볼 밖에.
§ 존재의 으뜸 §
만유(萬有)를 구성하는 디지털 (1, 0)은 [ ◐ ] 요렇게 생겼는데 1이면서 동시에 0이므로 (열기, 닫기)라고 하는 것이다.
디지털 ◑는 우주가 탄생하던 시점부터 있었던 하나이며 이것이 자기복제로 번식하여 가득찬 것이 우주다.
디지털 ◐는 비유하면 접시에 담긴 사과이다. 접시 ○는 0이고 사과 ●는 1이다. 접시와 사과는 붙어다니므로 ◐다.
1+1=2라고 한다. 그러나 1+1은 결코 2가 되지 않는다. 한 개의 접시에는 한 개의 사과만을 담을 수 있다. 고로 1+1이란 1이 2로 변한 것이 아니라 2를 1로 치기로 약속을 바꾼 것이다.
1+1이 2가 되는 법은 없다. 자연에서는 질량보존의 법칙에 의해 증가, 감소가 없다. 무엇인가? 1+1=2라는 말은 사과를 한손에 한 개 쥐고 운반하다가 양손에 하나씩 쥐고 운반하는 즉 사과의 사정이 아니라 사과를 나르는 사람의 사정이 변한 것이다.
무엇인가? 반드시 대칭이 있다. 1+1이 2라는 것은 1이 2가 된 것이 아니라 천칭의 한쪽에 1키로그램 짜리 둘 그리고 맞은편에 2키로그램 짜리 하나를 올려두어 평형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즉 1의 사정이 변한 것이 아니라 대칭을 이룬 맞은 편의 사정이 변한 것이다.
역사가 생긴 이후로 1이 2로 된 일은 없다 진시황도 나폴레옹도 1을 2로 만들지 못하였다. 고로 1더하기 1이 2가 되는 경우는 없다. 언제나 변하는 것은 실재의 변화가 아니라 대칭구조의 변화이다.
모든 존재는 모든 존재와 대응하며 대칭구조를 이룬다. 그 대칭의 변화를 변화로 부르는 것이다.
사과는 반드시 접시에 올려져 있다. 즉 사과 1은 반드시 접시 0에 붙어 있는 것이다. 만약 그 접시에서 사과를 내리면 빈자리가 발생하고 거기를 무언가가 메꾸어야 한다. 또한 집어낸 사과도 어느 다른 접시에 올려져야 한다. 그러면 자리바꿈만 있지 실질변동은 없다.
물속에서 물을 한줌 움켜내면 반드시 그 빈자리를 무언가가 메꾼다. .
이것을 기하학에 대면 콤파스는 열기와 닫기를 나타내는 디지털 개념이며 자는 벌리기를 나타내는 아날로그 개념이다.
* 알아둘 것....컴퍼스는 원을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크기를 나타내기 위해서다. 원은 그 '같은 크기'의 한가지일 뿐.
같은 크기는 곧 자기복제다. 컴퍼스는 자기복제를 나타낸다.
*. 컴퍼스가 나타내는 것
1, 점(량) 2, 선(운동) 3, 각(힘) 4, 직각(입체) 5, 원(공간)
*. 자가 나타내는 것
1, 점의 위치 2, 선의 길이 3, 각의 크기 4, 사각형의 면적
5. 원의 체적
컴퍼스가 나타내는 것은 모두 닫힌 계다. 유한한 세계다.
자가 나타내는 것은 모두 열린 계다. 무한한 세계다.
컴퍼스를 들고 바늘부분으로 먼저 하나의 꼭지점을 찍으면 점,
컴퍼스의 다리를 벌리면 선,
연필부분을 종이에 대면 각 (그것은 180도의 평각이다)
각의 양끝에서 등거리에 분할하면 직각 (그것은 사각이기도 하다)
꼭지점을 직각의 중심점으로 이동하면 원 (구이기도 하다)
왜 이런 논리가 필요한가?
그것은 무에서 유가 나올수 없기 때문이다.
수학은 순수관념이므로 잡다한 도구를 사용할수 없다.
그런데 왜 자와 컴퍼스는 괜찮은가?
자와 컴퍼스는 수학적인 논리로 창조되기 때문이다.
자와 컴퍼스는 도구가 아니라 관념이다. 실제의 컴퍼스 없이 순전히 논리로만 컴퍼스를 만들어 낼수 있다. 즉 실제로는 컴퍼스도 자도 없이 논리적인 계산만으로 자와 컴퍼스가 사용되는 것과 똑같은 효과가 가능하다.
관념의 컴퍼스
1. 어떤 위치를 설정한다. ○
2. 자기복제한다. ○○ 이것은 선이다.
3. 복제된 ∞를 다시 복제하면 88이 된다. 네 개의 원 사이에서 직각이 만들어진다. ( ┿ )
4. 88을 다시 복제하면 입방체가 만들어진다. ▣
5. ▣를 다시 복제하면 ⊙가 만들어진다.
여기서 5번이 헛갈린다. 알아보자.
논리의 기본이 '무에서 유가 생겨나지 않는다' 즉 외부에서 어떠한 재료도 투입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니 자기복제는 밖으로의 팽창이 아니라 실은 거꾸로 내부로의 자기분할이다.
○ => ◐로 쪼개지는 것이다. 1에서 2기 아니라 (1/2 +1/2)다.
그 쪼개는 칼은 단 한번 휘둘러야 한다.
자기복제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논리는 디지털의 (yes와 no) 열기와 닫기만 있고 2는 없는 것이다.
또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쪼갠다는 것은 시각적으로 묘사한 것이고 논리적으로는 대칭의 설정이다. ○가 ◐로 쪼개진다는 것은 내부에 대칭을 설정한다는 것이다. 즉 서로 마주보는 위치(꼭지점)를 설정한다는 것이지 정말 칼로 탁 쪼개버린다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수학적 추론이니까.
고로 8개의 꼭지점이 하나의 대칭점을 가진 형태가 입방체일 때 이 입방체를 하나의 대칭점을 기준으로 자기복제 곧 분할하여 16개의 꼭지점을 두면 그림이 나온다. 모니터 화면에 그릴 수는 없지만 머릿속에는 그려진다.
┌─┬─┐
│┌┼┐│
├┼┼┼┤
│└┼┘│
└─┴─┘
이런 모양이 둘 겹친 형태가 그려진다. 여기서 중심과 주변이 성립하는 즉 대칭의 중심점이 도형의 내부로 들어가서 원의 꼭지점이 성립하는 것이다.
여기서 더 이상의 자기복제는 불가능하다.
홍야님의 불확정성의 원리
불확정성의 원리는 전혀 말이 안되는 이야기로 그걸 억지로 말이
되도록 끼워 맞추려는 노력은 부질없다. 그게 말이 안된다는 것
은 홍야님 스스로 잘 알지 않는가?
그것은 논리적 주장이 아니라 하나의 언어적 표현이다.
실험을 해보자.
풍선에 물을 가득 집어넣자.
그렇다면 풍선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물이 들어 있다.
근데 거기서 기압을 낮추어 보자.
풍선 속의 공기가 빠져나와 방울을 이룬다.
즉 풍선에는 물과 공기방울이 들어있다.
여기서 물을 핵이라고 하고 공기방울을 전자라고 하자.
전자의 존재는 그 물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기압이
결정한다. 이 경우 물풍선 속의 공기방울은 있는 것도 되고
없는 셈도 된다.
불확정성의 원리란 이런 정도로 비유할수 있다. 그것을 확정할수 없 다는 것은 상대적인 관계를 확정할수 없다는 것일 뿐이다.
왜 확정할수 없는가? 그것은 물풍선과 주변기압을 통일하는 전체적 인 개념을 포착하는 언어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순전히 언어의 문제인 것이다.
즉 극미립자들은 기존의 (있다 없다)하는 언어표현으로 나타낼수
없는 성질을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있다)고 하는 개념 자 체에 문제가 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공간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빡은 (있다)를 다섯가지로 세분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저 있다로 나타낼수 없는 존재가 있다.
소립자들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입자상태를 포기할 뿐이다.
즉 그 어딘가에 다른 형태로 있는 것이다.
다만 입자는 두 개의 힘의 대립상태를 나타내므로
충돌의 방식으로 포착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을 뿐이다.
그것은 기압이 높으면 없어지고 낮으면 나타나는
공기방울 (氣泡)과 같다.
그것은 전혀 신비한 일이 아닌 것으로
자석을 처음 발견한 미개인이 악령이 깃들은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하는 것과 같다. 자석에는 전혀 악령이 없다. 그것을 설명하지 못하니까 그렇게 둘러대는 것이다. 자석에는 인력과 척력이 있는데
인력과 척력이란 개념이 없던 시절에는 그저 악령이 들어있다고
말하는 것이 편한 것이다. 알고 보면 암것도 아이다.
불확정성의 원리가 신비한 것이 아니라 물질은 곧 입자라는
고정관념이 매우 답답한 생각이다. 물질은 전혀 입자가 아니다.
두 개의 힘이 대립한 상황에서 입자의 성질을 나타내기도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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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이야기가 어렵다고들 말한다. 어렵게 써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원래 어려운 이야기를 평이한 언어로 말하는거다.
한번 접해본 적 없는 새로운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낯설은 것은 어렵고 이해되지 않기 마련이다. 또 방대하다. 통신에 몇줄로 써놓았지만 학자들이 논문쓰는 방식으로 쓴다면 책이 1천권은 나와야 한다.
제시하는 주요문제에 대해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 사람은 인류역사상 없다. 이건 내가 최초로 시도하는 새로운 접근법이다.
접근법은 최초로 시도되지만 생각 자체는 석가의 연기법부터 헤겔의 변증법까지 꾸준히 모색되어온 것이다. 또한 수학 물리학 눈리학 미학의 주요개념들과 부지런히 맞닥드린다.
5년전부터 꾸준히 말해오던 이야기들을 이참에 정리해 본다. 그것은 다섯 개의 이론이며 더하여 하나이다.
※. 자기복제 이론 : 물리학영역
※. 구조론 : 수학영역
※. 분류이론 : 미학영역
※ 일반이론 : 논리학영역
※ 집적이론 : 언어학영역
그것은 물리에서 출발하여 언어로 완성되는 거대한 하나의 집짓기이다. 지금까지 별개로 취급되든 물리학 수학 미학 논리학 언어학을 하나로 통일하는 거대한 시스템의 형성이다.
왜 이것들이 필요한가?
집을 짓는데는 물리학이론도 수학이론도 미학이론도 필요하다. 그러나 무지한 목수는 그것을 모른다. 몰라도 집만 잘지었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집이 팔리지 아니하기 시작하면 그는 새로운 건축을 시도해야 한다.
건축설계가는 물리학과 수학과 미학을 모두 알아야 한다. 물리학을 모르면 집이 무너지고 수학을 모르면 비용이 모자라고 미학을 모르면 집이 개집된다.
현대과학의 한계는 수학이 필요하면 셈 잘하는 이에게 묻고 물리학이 필요하면 옆집 학생에게 묻고 하여 위기를 넘겨오던 능한 목수가 늘 짓든 집을 버리고 새로운 형태의 집을 지어야 할 필요를 느꼈을 때 이젠 누구에게 물어보면서 할수없다는 문제에 부닥친 것이다. 그렇다면 별개로 치부되던 물리학 수학 미학 논리학 언어학을 하나로 통일하는 이론을 개발해야 한다.
현대과학은 능한 목수의 집짓기다. 설계도가 필요없이 쌓아올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이제 더 쌓을 데가 없다.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 설계부터 다시 시작하자.
영감은 소년적에 얻어졌다. 인생의 대부분을 포기하고 이론들에 명명하고 체계화하는 작업에 매달려 왔다. 이를테면 위에 [디지털이론]은 조만간 다른 이름으로 바뀌어질 것이다.
설계도없이 집짓기인 현대과학은 끝장나야 한다. 아무러나 혼잡하기인 기공, 마법, 연금술로 되돌아가서도 아니된다. 다시 설계도를 그려야 한다. 분류하기와 명명하기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린네가 생물분류학을 만든 것과 같다. 현대과학은 분류없는 생물학이다. 계통과 체계에 따른 분류, 종속과목강문계가 필요하다. 린네는 일곱단으로 분류하지만 나는 5단으로 분류한다.
린네가 일곱단으로 분류한 것은 유사성과 차별성이 7가지 밖에 없기 때문이고 이는 동물이나 식물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다섯단으로 분류하는 것은 또한 유사성과 차별성이 다섯가지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 그 어떤 것이든 존재하는 것은 모두 5로 분류할수 있다. 그 분류는 정확하다. 분류법을 알고 있으면 생각을 대량생산 할수 있다. 나는 머리가 좋은 자가 아니라 포드시스템으로 기계로 찍어내듯이 생각을 대량생산 하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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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똑똑한 자인가? 분류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 정치든 경제든 뭐든 분류를 잘하는 자가 제일 똑똑한 자이다. 그것은 유사성과 차별성에 따른 질적 양적 구분이다.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하나는 많이 아는 자이고 하나는 깊이 아는 자이다. 후자가 이기게 되어 있다. 많이 아는 자는 남들이 말하기 전에 서둘러 말하는게 좋다. 깊이 아는 자는 남들이 말하길 기다렸다가 최후에 말하는게 좋다.
통신에서도 마찬가지 훅시 남들에게 선수를 빼앗길라 재빨리 논쟁에 끼어드는 자는 많이 아는 자다. 남들에게 말을 시키기만 하고 저는 안하는 자는 깊이 아는 자다.
게임이다. 반드시 그가 이긴다. 왜? 분류법이 있기 때문이다. 비유해 보자.
갑과 을이 싸웠다. 누가 이길까? 갑이 아니면 을이 이긴다.
똑똑한 자는 갑과 을에 대해 남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자다. 조금이라도 많은 정보를 소유한 자가 이기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 그렇다면 승부는 양의 승부인가? 천만에.
지혜있는 자는 침묵한다. 그 침묵 속에 무엇이 들어있나?
분류법은 승부형태의 분류이다. 학교에서 싸웠다면 반장이 이긴다. 집에서 싸우면 자기동네 애가 이긴다. 물에서 싸우면 헤엄 잘하는 아이가 이기고 산에서 싸우면 산골아이가 이긴다. 이것은 갑과 을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주변환경에 대한 정보다.
정보는 곧 에너지다. 에너지불변의 법칙에 의해 어떤 정보든 반드시 노가다가 개입한다. 인간은 누구든 동일한 노가다를 소유한다. 특정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드는 노력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분배되며 그 노력을 어떻게 적절히 분산 배치하여 최적의 방법으로 최고급의 정보를 획득하느냐의 게임인 것이다.
동일한 100의 노가다로 갑과 을에 대한 정보를 취득하는게 유리한가? 아니면 갑과 을이 싸우는 주변환경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 유리한가? 장단점이 있다.
갑과 을은 둘 뿐이므로 노가다 투입은 매우 효율적이다. 100의 노력을 투입하여 100의 정보를 취득한다. 그러나 1회용이다.
환경은 매우 방대하다. 학교, 집, 동네, 산, 물, 도시 다 파악해야 한다. 고로 100으로 모자란다. 대신 반복하여 우려먹을 수 있다.
많이 아는 자는 갑과 을에 대한 정보를 가진 자다. 갑이 을보다 강하다. 고로 갑이 이긴다. 그의 정보는 옳다. 그는 승리자다.
지혜있는 자는 그 에너지를 환경에 대한 정보취득에 투입한다. 고로 그는 갑과 을에 대해 모른다. 그의 정보는 이용가치가 없다.
그러나 반전이 없다면 게임일수 없지. 갑은 강하나 진다. 왜냐하면 을의 동네기 때문이다. 많이 아는 자는 갑이 강하다는 것을 알 뿐 싸움이 을의 동네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모른다.
을의 동네에서 싸운다고 을이 이기는 것은 아니다. 약간 유리할 뿐, 여기서 가중치는?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말하는가이다. 이것은 큰 거짓말하기 시합이다. 반드시 나중에 말하는 자가 이긴다.
왜냐하면 먼저 말한 사람은 자기정보를 타인에게 제공하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정보란 감추어야 돈이 된다. 이기기 위해서는 말해야 하고 그것은 적에 대한 정보누출이다.
지혜있는 자가 이기는 것은 항상 최후에 말하기 때문이며 많이 아는 자의 말을 자기정보로 역이용하기 때문이다.
말하는 것은 5단계 분류법이다. 최후에 말하는 방법이다. 가장 적은 에너지를 투입하고 가장 높은 효율을 끌어내는 방법이다.
많이 아는 자는 먼저 말할 수 밖에 없다. 양이 많으므로 시간이 걸리고 따라서 뒤늦게 말하면 다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고로 그는 언제나 자기정보를 적에게 제공하는 셈이 되며 100전 100패다.
깊이 아는 자는 되도록 늦게 말해야 한다. 양이 적으므로 딱 한번밖에 말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동일한 100의 노가다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 100의 노력을 양의 많음에 투자할 것인가? 질의 깊이에 투자할 것인가? 질에 투자하라. 그것이 정답이다.
깊이 아는 자는 타인의 정보를 이용한다. 아는 것 없으면서 타인이 말하면 그것을 재가공한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그가 가장 많이 아는 듯 보인다.
많이 아는 자는 갑이 을보다 강하므로 갑이 이긴다고 말하는 자다. 깊이 아는 자는 을의 동네이므로 을이 이긴다고 말한다. 그러나 깊이 아는 자가 그렇게 큰소리쳐 말할수 있는 것은 많이 아는 자가 갑이 강하며 그 차이는 51: 49라고 말해버렸기 때문이다. 지혜있는 자는 가만이 듣고 있다가 그 차이가 2정도면 홈링의 잇점으로 역전되겠군 하고 비로소 말하는 것이다. 그는 사실 갑이 을보다 강한지 약한지 모르고 있었다.
지혜 있는 자는 아는 것이 없다. 타인의 정보를 이용하면 되므로 알 필요도 없다. 분류법과 게임의 규칙만 알고 있다.
마음님은 그것을 안다. 그러므로 아제님이 먼저 말하도록 말시켜놓고 가만 듣고 있다가 한방에 꽝. 그러나 나는 그가 안다는 것 까지를 안다. 그러므로 그가 생각한 적 없는 것만 골라 말한다.
이것은 하나의 이론이면서 또 다섯 개의 이론이다. 카오스 이론, 상대성이론 같은 하나의 이론이되며 기본적으로 분류이론이므로 그 어떤 영역이든지 해당이 된다.
카오스이론이나 상대성이론은 확대하여 카오스세계관, 상대성세계관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함정,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수 없다는 원리.
무엇인가? 물리의 특수원리를 일반화할수 있는가의 문제. 그것이 물리학에서 성립한다고 해서 다른 모든 영역에서도 그같아야 한다는 근거는?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상대성이론과 카오스이론에 따라야 하는가? 그렇다면 왜? 만약 이것을 긍정한다면 상대성은 정치 물리 그 모든 것을 통합한 그보다 더 높은 단계로부터 유도되어야 한다.
진화론은 생물학이다. 이것은 인간에다 대어 사회진화론으로 인간도 생존경쟁 하면 안된다. 보편과 특수의 구분이다. 우리가 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보편성의 전제 하에서다. 특수상황에서 성립하는 이론이 함부로 진리일수 없다.
주장하는 바 이론(자기복제 이론, 구조론, 분류이론, 일반이론, 집적이론)은 보편이론이다. 그것은 분류된 이론이 아니라 분류이론이기 때문이다.
이 이론이 어디에 쓸모있는가하면 뭐든 분류구분 하는데 쓰인다.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문화든 음악이든 예술이든 물리든 분류구분으로부터 학문이 시작된다.
그대가 어떤 문제앞에서 고민한다면 그것은 일단 부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답하여야 한다. 사랑이 뭐지? 그대가 분류할수 있다면 (아가페적 사랑이 있고)하면서 아는 체를 할수 있다.
고로 안다는 것은 분류할 줄 안다는 것이다. 주장하는 것은 정치든 경제든 예술이든 그 어떤 영역이든 동일한 절대적인 분류공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분석하고 종합할 줄 안다는 것이다. 나눌줄 알고 합칠 줄 알면 다 아는 것이다. 제시하는 것은 그 나눔의 칼과 합침의 꿰매는 바늘이다. 분류가 되면 이미 다 된 것이다.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안되는 것은 분류가 안되므로 안되는 것이다. 먼저 분류하기에 성공하자. 전략과 전술로 나눌 줄 알고 장기전과 단기전으로, 요소와 효과로, 본질과 현상으로, 내포와 외연으로, 원인과 결과로, 정체와 의속으로, 절대와 상대로, 보편자와 개별자로 분류구분하기에 성공한다면 이미 성공한 것이다.
사람들의 분류하는 방식은 너무나 많고 무질서 하다. 동양은 궁상각치우의 오음으로 분류하고 서양은 도레미파솔라시의 7음으로 분류한다. 어느 것이 옳은가? 어느 쪽이 옳다면 그절대적인 근거는 어디있는가?
세상 뭐든지 분류는 아날로그 분류와 디지털 분류, 시스템구분이 있다. 아날로그 분류는 1부터 무한으로 무한정 그 수를 늘릴수 있다. 이것은 시간의 연속성질을 이용한 것이다.
디지털분류는 공간의 상호대칭성을 이용한 것으로 0과 1, 둘로만 분류할 수 있다.
시스템분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결합한 것으로 5개의 식만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세상 그 어떤 것이든 일단 5로 분류되고 그 하나하나는 다시 둘로 나뉘어지며 거기에 시간성을 대입하면 무한정 늘어난다.
고로 세상 뭐든 무한정 분류할수도 있고 유한정 분류할수도 있다. 우주는 무한하면서도 동시에 유한한 존재이다.
나눌수 있는 것은 다시 결합할 수도 있다. 이것이 집적이론이다. 집적은 공간적 집적이므로 시간성에 기대는 무한개념은 집적에서 제외된다. 고로 집적의 세계는 유한성만이 작용하는 세계이다.
집적은 공간의 상호대칭성에 의존하므로 우선 둘로 나눌수 있고 이것을 다시 집적하여 5로 만들 수 있다. 즉 어떤 하나의 자리에는 최대한 집어넣을 수 있는 것이 5로 유한하다는 것이다.
이 5를 다시 5배증하여 5, 25, 125, 625, 3125로 5회 집적할수 있으므로 시간변수를 제외화고 어떤 한자리에 최대한 집어넣을수 있는 최대숫자는 3125이다. 그 이상은 중복을 피할수 없다. 중복에는 반드시 시간변수가 필요하므로 공간의 기하원리에 의지해서는 3125로 한정된다.
이론은 다섯 개다.
1의 자기복제 이론은 최초에 1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결코 처음부터 2가 나와선 안된다.
2의 구조론은 자기복제를 반복하여 증가한 수가 최초의 1로부터 이탈하지 않고 머무르게 잡아두는데 필요한 이론이다.
3의 분류이론은 자기복제를 1회 할 때마다 끼어드는 시간변수를 구조로부터 분리해내는데 필요한 이론이다.
4의 일반이론은 거기서 게임의 규칙으로서의 지켜져야 할 룰이다.
5의 집적이론은 자기복제에 의해 산술적으로 증가한 세계가 포화상태에 도달하지 않고 지속하여 복제하게끔 최적화하여 요소들을 분산배치하는데 필요한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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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현정(破邪顯正)
거짓을 깨뜨리고 진리를 드러낸다.
세상에는 네가지의 근원적 힘이 존재한다.
[중력, 강력, 약력, 전자기력]들인데 나는 이것이 잘못된 분류이며 여기에 하나나 둘이 더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강력과 약력은 같은 종류의 힘이어서
전기에너지와 자기에너지를 하나의 전자기력으로 보듯이
같은 걸로 분류해야 되는게 아닌가 한다.
풍력, 인력, 척력, 구심력, 압력 많지만 허튼 구분이고
적합한 분류법이 필요하다. 물질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다섯가지 양상을 가지므로 이에 따라 다섯가지의 에너지가 있다.
분류기준은 집적정도이다.
집적은 곧 압축이다. 하나의 공간에 많이 들어간 정도를 말한다.
우선 량/에서 자연의 물리력이 있다.
미는 힘, 타격의 힘, 마찰력, 폭발력, 압력 들이다.
이들 에너지의 특징은 직접 이용할수 있되 저장, 보관, 운반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노출되어 있으며 가만히 두면 흩어 없어져 버린다.
우리는 이 에너지들의 운동방향을 전환시켜 이용하거나 차단 할수 있을 뿐이다. 이들은 가장 낮은 단계로 존재하므로 하나의 범주로 통일하여 [제 1의 에너지]라고 부를 수 있다.
다음이 운동/에서 열, 연소, 빛 등 화학에너지이다. 석유, 석탄의 연소, 각종 화학반응, 빛, 열, 들은 어딘가에 가두어져 있다가 물리반응에 의하여 촉발된다. 문이 열리면 쏟아져 나와 제 1의 에너지로 변한다.
우리는 이를 차단, 혹은 촉발하여 에너지 형태를 변경시키므로서 이용, 저장, 보관, 운반할수 있다. 이를 하나의 범주로 묶어 [제 2의 에너지]라 부를 수 있다.
다음 힘/에서 전기와 자석의 전자기력이다. 전자기력은 화학에너지보다 더 안정된 형태로 존재하며 가두어져 있고 문을 열어 이를 꺼집어내었을 때 열, 빛, 등 화학에너지로 변한다.
우리는 전자기기를 이용하여 전자기력을 1차 제 2에너지로 변환시키고 재차 이것을 제 1에너지로 변환시켜 이용한다. 전자기력을 그대로 이용할 수는 없다.
전기곤로에 의해 코일이 달구어져 열을 내는 화학반응은 제 2에너지로의 변환이며 열에 의해 음식이 조리되는 것은 제 1에너지로의 변환이다. 전자기력을 우리는 제 3의 에너지라 부를 수 있다.
다음이 입자/에서 강력과 약력 등 소립자 사이에 존재하는 핵력이다. 유도전류의 방법으로 강력과 약력들에서 전자기력을 유도해낼수 있다.
에너지는 본래 소립자들 사이에 존재하는데 그 일부가 튀어나가 전기나 열 또는 물리효과로 변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핵발전이다. 그러나 핵발전은 핵력을 그대로 이용하는게 아니라 더 낮은 형태인 제 3의 에너지로 또 제 2의 에너지로 변화시켜서 최종 제 1에너지 상태에서 이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힘을 [제 4의 에너지]라 부를 수 있다.
마지막 질/에서 [제 5의 에너지]는 공간에너지이다. 이는 아직 규명되지 않았지만 만약 규명되면 1차 제 4의 에너지인 핵력으로 변하고 다시 이것을 전기로, 열로, 물리력으로 변화시켜 사용하는 것이지 제 5의 에너지를 곧 이용할 수는 없다.
※ ※ ※
에너지를 [전자기력, 강력, 약력, 중력]의 넷으로 구분하는 것은 모호하며 적합하지 않은 방법이다.
개념의 혼란이 있을수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물질의 다섯가지 전개양상 [질, 입자, 힘, 운동, 량]에서 세 번째인 [힘] 만이 에너지이며 따라서 전자기력만 순수한 에너지이다.
제 1에너지는 곧 량이며, 제 2에너지는 운동이고, 제 3에너지는 힘(에너지)이며 제 4에너지는 입자이고 제 5에너지는 질이다. 우리가 운동에너지라고 말할 때 실은 운동에서 량으로의 변환이다. 즉 제 2에너지가 제 1에너지로 변환하는 것을 우리는 운동에너지라 말하는 것이다. 이를 [제 2 에너지변환]이라 이름할수 있다.
[여기서 나는 에너지와 에너지변환을 구분한다.]
에너지가 물질존재의 집적도에 따른 구조적 불안정성을 의미한다면 에너지변환은 특정의 집적도를 가진 에너지상태에서 더 낮은(안정된, 엔트로피가 높은) 에너지 상태로 변화하는 것이다.
위치에너지는 [제 4 에너지 변환]이다. 내연기관이 폭발하여 피스톤을 밀어내는 것은 [제 3 에너지변환]으로서 일종의 전기반응으로 3에너지가 2에너지로 변환하는 것이며 바퀴가 지면을 밀어내는 것은 2에너지가 1에너지로 변환하는 것이다.
우리가 운동에너지라고 말하는 것은 엄밀한 과학용어가 못된다. [제 2에너지변환]이라고 해야 학명이 된다.
에너지는 최종적으로 물리반응을 보여야 비로소 에너지이며 화학반응(예를 들면 연소燃燒)은 그 자체로 에너지가 아니며 그 화학반응의 결과 생성된 열이나 빛이 재차 물리적 효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에너지이다.
전기(전기에너지)가 곤로의 코일을 가열하고(제3에너지 변환), 그 열이 전도되어 냄비의 고기를 익히고(제2에너지 변환), 고기의 세포벽이 파괴되어야(제1에너지변환) 에너지인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항상 동시에 일어나므로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에너지라고 착각하지만 실은 한가지(물리효과), 두가지(운동에너지), 세가지(전기에너지), 네가지(핵에너지), 다섯가지(공간에너지) 에너지 변환이 동시에 그러면서 순서대로 일어난다.
※ ※ ※
압력, 폭발력, 팽창력, 마찰력 들은 [제 1 에너지변환]에 해당한다. 제 1에너지인 물리력이 물리효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모두 미는 힘이며 단 하나의 방향으로만 일한다. 고로 방향성 자체가 존재하지 아니한다.
인력, 척력, 원심력, 구심력 등은 [제 2 에너지 변환]에 해당한다. 제 2에너지인 화학에너지가 제 1에너지인 물리에너지로 변하는 것이다. 제 2에너지 변환은 열의 전도(고온-> 저온) 빛의 복사(어둠-> 밝음) 처럼 일정한 방향성을 두고 일방통행한다.
○ 제 1 에너지(물리력) ▶ 제 1 에너지 변환(물리효과)
→ 에너지의 소모(무방향)
○ 제 2 에너지(화학에너지) ▶ 제 2 에너지 변환(운동에너지) → 에너지작용(일방향)
○ 제 3 에너지(전기에너지) ▶ 제 3 에너지 변환(일반에너지)
→ 에너지 발생(쌍방향의 장)
○ 제 4 에너지(핵에너지) ▶ 제 4 에너지 변환(위치에너지)
→ 에너지 보존
○ 제 5 에너지(중력에너지) ▶ 제 5 에너지 변환(공간에너지)
→에너지원
풀이하면 제2에너지인 화학에너지(열, 빛, 이온)가 제1에너지(압력, 폭발력)로 변환할 때 그 변화하는 성질을 우리는 운동에너지라 부르는 것이다.
자석이나 전기의 힘은 제3에너지이다. 우리는 전기나 자석의 힘을 곧 이용할수 있는 것으로 믿지만 모든 전자기력은 그 동력의 발생과정에서 반드시 분자단위의 구조변화를 유발한다.
건전지에서는 가시적인 화학적변화(이온의 이동)를 관찰할수 있다. 구동모터의 회전에서 전하의 건너뜀 자체가 화학에너지이다. 열의 전도, 전기(이온)의 전도, 빛의 복사가 다 화학에너지이다.
태양 내부에서 진행되는 수소핵융합은 제4에너지인 핵에너지이며 핵에너지가 빛과 열을 내는 것은 전기에너지다. 즉 행융합이 바로 빛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전기반응의 과정을 거쳐 빛으로 변하여 지구로 복사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의 의미는 지향성의 파악이다.
○ 제1에너지인 물리력은 항상 일방적이다. 미는 힘은 있되 당기는 힘은 없다. 1에너지에서 모든 힘은 압력의 형태로 존재한다.
○ 2에너지에서 모든 힘은 일정한 방향성이 존재한다. 즉 극성을 가지는 것이다. 빛에도 이온에도 자기에도 플러스와 마이너스, 구심과 원심, 인력과 척력의 방향성이 존재한다.
○ 3에너지에서 모든 힘은 인력과 척력의 양방향을 동시에 가진다. 즉 자기장, 중력장의 장을 가지는 것이다. 2에너지의 운동에너지는 인력이든 원심력이든 장이 없다. 장은 대립된 방향의 두가지 힘을 동시에 가지는 것이다.
○ 4에너지에서 힘은 고유한 질량을 가진다. 1,2,3에너지는 단순한 전달경로에 불과하므로 질량의 절대적 증가, 감소가 없다. 4에너지에서 에너지작용은 실질적인 증가, 감소를 나타낸다.
물질존재는 집적도에 따른 고유한 질서를 가지며 그 질서의 변화가 시, 공간의 변화일 때 5에너지이며 이는 곧 태초의 천지창조, 빅뱅이다.
변화가 소립자 단위에서 일어날 때 4에너지이며, 이온 단위에서 일어날 때 3에너지이며, 분자단위에서 일어날 때 2에너지이며, 물체단위에서 일어날 때 1에너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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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나비의 날개짓이 우주를 흔들다.
본문작
♠
홍노사 => 파파님은 <온도는 질, 열량은 양> 이러시는데,
정확하게 말한다면 온도는 <양의 척도> 아니겠슴둥?
빠빠 => 질이란 약분하고 간략하고 압축하여 최소화 했을 때
남는 것을 말한다.
[100,000,000의 힘으로 10,000,000개를 들수 있다. ]
압축 => [10의 힘으로 1개를 둘수있다]
온도가 질인 것이 아니라 [온도+압력+질량+밀도.....]의 구분되는
성질이 질이다. 온도수치는 [10+10+10=30]이므로 10+10+10을 30으로
줄일수 있지만 (온도+압력+질량......)에서 하나를 줄일수는 없다.
질 : 凹凸□■△▽
량 : 凹凹凹凹凹凹凹凹凹凹
온도의 질 : 온도는 그냥 온도인 것이 아니라 압력, 밀도, 위치,
질량 들과의 상호관계에 따라 다양한 성질을 가진다.
온도의 양 : 1000도면 1000도 100000도면 100000도.
홍노사 => <모든 존재는 하나 - 에너지>임. 물리학은
에너지를 연구하는 학문임.
빠빠 => 홍: 모든 사고는 교통사고임.
빠: 저 자동차를 전봇대에 꼴박아부렀는디 운전자과실인가요?
홍: 음 그것도 교통사고임.
빠: 저기 브레이크가 파열인데여. 정비불량일까요?
홍: 음 그것도 교통사고임.
빠: 저기 도로파손 때문에 차를 꼴박았는데 책임이 뉘한테 있나요.?
홍: 음 그것도 역시 교통사고야. 모든 사고는 교통사고지. 흐흐흐흐.
교통사고가 원인이야. 교통사고가 없어봐라. 아무 탈 없지.
홍홍아이씨...자동차와 운전사와 도로는 교통사고보다 먼저
있었고 교통사고는 나중 결과죠. 마찬가지로 우주존재의
기본구성은 먼저 있고 그것이 합성되어 에너지가 되재요.
홍노사 : <양은 질을 낳는다> -->우리나라 재벌들, 정치꾼들한테
물어 보시면 알 수 있음.
빠빠 : 그거 믿고 양적 성장만 치중하다가 IMF?
민주주의는 질, 경제성장은 양. 민주주의가 경제발전을 낳음
========================================================
뭉치
질문 1>
갑 -- [판결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을 -- [한달 뒤에 오겠다]
사건 갑에서는 판결이라는 사건을 기준으로 앞 뒤를 판단한다.
사건진행의 앞부분.
사건 을에서는 사건이 없으므로 말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앞뒤를 판단한다.
사람 자신이 일을 챙기는 우선순위의 뒷부분.
즉 사건 갑에서는 객관적 판단으로 앞을
사건 을에서는 주관적 판단으로 뒤를 말하는 것이다.
객관이 필요한 연설회에선
[일년 앞을 내다봐야 합니다. 여러분]
주관이 필요한 일기장에는 [일년 뒤엔 주가가 폭락하겠군]
모든 열차가 서울을 상행으로 하는 것은 객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역마다 상행과 하행이 달라버리면 승객들은 별로 불편한거 모르는데
역무원들 자기들끼리 연락할때는 엄청 헛갈리잖아.
대부분 논의에서 헛갈리는 것은 이렇듯 관점을 분명히 안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마누라만 50이 되어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동쪽으로 여행해서 지구를 한바퀴 돌면 하루를 덕보는데
그런식으로 365바퀴를 돌고와서 에헴 내 한 살 벌었지 용용.
나는 너들보다 1년 더 젊었다고 헤헤. 이제 3650바퀴만 돌면
10년을 벌어 끼끼.
3만6천5백바퀴를 돌아서 100년을 더 젊어져버릴까? <- 뭉치바브
♠질문2> 무슨 말인지 홍갈리고 콩갈려서 감이 잘 안오는데
내 이바구만 정리하면
[양적팽창이 질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이미 질이 다 갖추어진 상태에서
양의 하나가 모자랄 때 ....]
임계가 되기 위해 압력 밀도 등이 다 갖추어지고 온도만 미달할 때
온도의 변화(양의 변화)가 임계에 이르러서 폭발.
여기서 패러독스..온도는 어디서 오죠? 그것은 오는 것이 아니라 빌려오는 것.
어디서 빌리지?
[사건 갑] 온도 밀도 압력 등 임계조건 중에서 온도만 미달.
[사건 을] 온도 밀도 압력 등 임계조건에서 온도가 남아돌아.
이때 사건 갑과 사건 을을 하나의 닫힌 계로 설정하면
사건을이 사건 갑에게 온도를 빌려주고 임계도달 화학반응시작 꽈꽝.
여기서 닫힌 계는 어디에?
사건 을이 이미 개입해 있으므로 양자를 통일한 전체에서 이미 임계에
도달해 있은 것이다.
즉 온도가 증가했기 때문에 폭발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온도를
다르게 분류구분 한 것이다. 이는 속임수. 이중기준의 오류.
두 대의 자동차가 있다. 한 대는 뒷바퀴 하나가 모자라서 못달리고
한 대는 앞바퀴가 없어서 못달린다.
이때 저쪽에서 뒷바퀴 하나를 빌려오면 달린다.
이걸 보구 홍야같은 사람은 [으음 바퀴의 증가가 자동차를 달리게 했군여.]
자동차의 바퀴는 이미 갖추어 있었는데 배열을 잘못한 것이다.
그 적절한 배열이 달리게 한 것이다.
♠
질문3> [에너지가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전환이 되어도 양적으론 변화가
없다는 뜻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여?]
빠빠 => 엄밀한 의미에서 에너지의 형태전환은 없다.
에너지는 가만 있는데 가만있는 바퀴를 갑자동차의 뒷바퀴로
분류하는가 을자동차의 앞바퀴로 분류하는가의 차이일 뿐.
더 엄밀하게 말하면 에너지의 드나듦도 없다.
에너지는 가만 있는데 인간들이 금을 여기저기 긋는 것이다.
바둑판의 돌이 말의 머리가 되고 몸이 되고 꽁지가 되는 것은
정해져 있는 것이아니라 그때그때 정해지는 것이다.
에너지의 총량만 안변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는 논바닥 같아서 가만 있는데 인간들이 논둑을 여기저기로
옮겨놓는다.
태양이 에너지를 내뿜으면 태양이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눈에 보이지 않는 마이너스우주에서 그만큼 보충되는 것이다.
즉 태양광이 지구로 오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서 교환되는 것이다.
♠질문4> 모든 논의는 닫힌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 따라 정해진다.
바둑판을 에너지라 치자. 흑백의 돌이 바둑판 전체를 메우고 있는데
여기에 흑돌하나를 놓으면 흑이 백을 다잡아먹고 백돌 하나를 놓으면
백이 흑을 다잡아먹는다.
이 상태가 엔트로피 0인 상태이다.
흑이든 백이든 상대를 잡으려면 상대보다 돌이 하나더 많아야 한다.
백이 150개이면 흑은 151개라야 백을 잡을수 있다.
현재 백돌 150, 흑돌 150
이때 흑돌 한 개로 백을 다 잡았다 치자.
백을 잡은 흑의 에너지는 단 한 개의 흑돌인 1인가 아니면 151인가?
움직인 것은 입자 하나지만 작용한 것은 공간의 151이다.
그런데 이론물리학에선 그 한 개를 반상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찾는다. 즉 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자리바꿈.
잘못놓은 돌을 한수물리고 위치를 슬쩍바꾸면 에너지 없이도
150의 백돌을 잡는다.
에너지는 필요없다.
양이 질을 이긴다는 논의 : 바둑돌만 많으면 이긴다.
질이 양을 이긴다는 논의 : 바둑을 잘두면 이긴다.
아무리 바둑알이 많아도 반상은 361로 백이 하나 둘 때 흑이 하나 두므로
에너지(바둑돌)는 남아돌아 소용이 없어.
♠질문5> 심부름꾼 없이 직접 전달하면 되잔아여..
그 심부름꾼이 딴 맘을 먹으면 어케되나여?
정보자체에 개입은 안한다지만..몬가 달라지지 않을까여?
달라진다면 왜 달라질까여?
빠빠 => 달라진건 게임의 규칙. 닫힌 계다.
저자동차에서 바퀴 하나를 빌려오는 것(에너지의 심부름)을
규칙위반으로 보는가 아닌가 하는 것.
에너지의 역할은 시간단축이다. 임계조건이 다 갖추어져 있는데
그들의 배열상태가 나빠서 반응이 없다면
에너지가 충격을 가하여 凹凸이 우연히 배열될 확률을 높이는 것.
논리로 따지면 이건 규칙위반이므로 인정안한다.
에너지가 변화를 유발한 것은 아니고 언제든지 일어날 변화를
앞당긴 것이다.
시동이 이미 걸린 차가 있다. 그 차가 안가는 것은 클러치를 밟지 않은
탓인데 이때 밖에서 차를 향해 돌을 마구 던지면 (에너지의 심부름)
우연히 돌 하나가 클러치
어떤 것을 알고자 한다면 먼저 그것을 구분 할줄 알아야 한다.
초등학교 국어교과서는 첫 페이지를 이렇게 시작하더라.
나, 너, 우리, 우리나라, 대한민국
분류구분이다. 먼저 너와 나를 구분하고 집합이 되는 우리를 찾아내며 확대하여 우리나라가 되고 명명하여 대한민국이 된다.
뭐든 시작은 꼭 이래야만 하는 것이다.
그 어떤 공부를 하든 처음에는 모으고 나누어 구분하고 분류하는 것부터 배운다. 거기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 여기서 나, 너, 우리의 분류하기엔 어떤 규칙을 사용하였는가?
도서관의 책들도 종류별로 분류되어 있고 컴퓨터의 프로그램도 적절한 구분규칙에 의하여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도스의 잘못된 분류는 깜깜절벽을 헤매게 하고 인터넷 항해의 곤란함은 분류의 무리이다.
린네가 생물분류학을 열어 비로소 우리는 전체적으로 개괄할수 있게 되었다. 화학수업도 원소주기표부터 배운다. 분류는 꼭 필요한 것이며 또한 합리적이어야만 한다. 잘못된 분류는 도스사용자의 불만을 낳고 인터넷의 미로에 허우적거리게 한다.
분류가 어려움에도 우리가 쉽게 분류하기에 성공하는 것은 모든 분류에는 공통된 규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간의 상호대칭성과 시간의 연속성이다.
공간의 상호대칭성은 그래프의 X축과 Y축의 대칭, 또 도표의 종횡구분을 낳으며 시간의 연속성은 그 전개를 낳는다. 한 방향으로 나열되는 것은 시간의 성질이며 마주보고 대칭하여 모이는 것은 공간의 성질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 공간의 성질을 사용하여 분류하기에 성공하고 있지만 개체의 수가 적을 때 유효한 것일 뿐이다. 수가 증가하면 인터넷 항해의 곤란에 빠진다.
모든 과학에 공통되는 절대적인 분류공식은 인간에 의해 발견되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들이 너무나 쉽게 분류에 성공하므로서 그 공식의 필요성을 찾아내지 못한 까닭이다.
절대적 분류공식이 꼭 필요한 것은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분류하는데 쉽게 성공한다면 대개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변화가 개입하면 인간은 혼란에 빠져버리고 주저하게 된다.
우주를 통일하는 절대적인 분류공식은 존재하며 그것은 신이 세계를 창조하는데 소용된 절대적인 도구다. 신은 모으기와 나누기의 방법으로 세상을 창조하였으며 인간이 그것을 파악하므로서 세상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무한한 우주를 5라는 작은 숫자안에 집적하여 넣을 수 있다. 그것이 절대적이며 공통된 분류규칙으로서 자기복제이론, 구조론, 전개이론, 일반이론, 집적이론이다.
제시하는 바 우주라는 사전찾기 공식이다. 국어사전은 가나다 순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신은 5 안에 세상을 다 집어 넣었다. 신의 우주는 5차원으로 되어 있으며 그 각각의 방 안에 다시 5가 들어 있는 식으로 집적회로처럼 우주를 집적해 놓았다.
이론의 효용은 그 어떤 문제든 전체와 부분, 본질과 현상, 원인과 결과를 단박에 알수 있게 하는데 있다. 분류에 성공한다는 것은 굉장히 유익하다. 적어도 생각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100배 단축시켜 준다.
어떤 문제든지 생각으로 알아내어야 하는 문제에 부닥치면 먼저 종이와 연필을 꺼내어 분류규칙만들기에 돌입하라. 이것은 내가 국민학교 3학년때부터 꾸준히 써먹어온 습관이다.
인간들이 세상을 알아가는 방식은 사전찾기 규칙을 모른체 우연히 글자를 발견하는 식이다. 분류규칙은 가장 빠른 길을 안내한다. 학습능력을 두배로 향상시키며 (인간의 두뇌구조가 이런 원리이므로) 문제해결능력을 열배 향상시킨다.
[자기복제이론, 구조론, 전개이론, 일반이론, 집적이론]
인간은 타고난 직관력을 가지고 있다. 자기직관을 믿어라. 그것은 깨달음과 통한다. 순수로서 믿음에 이른다.
[진리는 하나다]
우리는 직관으로 안다. 진리가 둘일수 없음을. 그렇다면 옳다. 올바른 태도는 이런 확실한 것에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가 아니면 진리가 아니다]
세계는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무엇과 무엇으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 예를 들어보자.
구름이 우주는 (정보와 뭐)로 되어있다고 말했다면 벌써 둘이다. 고로 진리가 아니다. 구름은 그 정보와 또다른 뭐가 둘이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 둘이 아니면 정보라는 말이 굳이 필요할까?
나가르주나의 공(空)사상은 자성설(自性說)을 공격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그 방법은 동일률에 근거하여 자성설이 결국 둘이 될 수밖에 없음을 논증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논리학이 없었기 때문에 [배중률에 어긋난다, 동일률에 어긋난다. 모순률에 어긋난다] 한마디로 끝낼수 있는 것에 용수는 수천단어를 낭비하고 있다.
나는 [물질의 바탕은 입자가 아니다]고 말한다. 용수가 자성설을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자물리학은 논리적으로 둘로 귀결된다. 입자형태는 항상 둘 이상의 힘의 대칭으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모든 논리법칙은 둘인가 하나인가를 판별한다. 둘에 이르면 오류이고 하나에 이르면 진리다. 배중률 = 하나의 사건으로 만난다. 동일률 = 하나의 실체로 만난다. 모순률 = 하나의 공간으로 만난다. 인과율 = 하나의 시간으로 만난다. 한정률 = 하나의 표상으로 만난다.
인과법칙은 서로 다른 시간에 일어난 두 개의 사건인 원인과 결과가 하나의 시간대에 의해 연결되어 있으므로 결국 하나라는 것이다. 모순법칙은 창이 방패를 뚫는 사건과 방패가 창을 뚫는 두 개의 사실이 하나의 공간 안에 집어넣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창이 방패를 뚫기도 하고 방패가 창을 뚫기도 하지만 동일공간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결국 진리는 하나이며 하나이어야 진리다]
[자기복제이론, 구조론, 전개이론, 일반이론, 집적이론]의 다섯 개 이론이 필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라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서다.
자연의 체험에서 우리는 무수한 법칙들을 만난다. 법칙이란 반복되는 것이다. 오늘 해가 동쪽에서 뜨고 내일 역시 동쪽에서 뜨면 반복이다. 그것은 법칙이다.
자연은 무수한 법칙들로 이루어져 있다. 법칙은 반복이며 반복이란 둘이 둘이 아니라 하나인데 둘로 늘여진 것이다. 자연은 본래 하나로부터 출발하며 그것이 늘어져서 둘이 되었다.
하나가 둘이 되는 과정을 풀어내므로서 둘이 하나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나를 둘로 만드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다.
공간의 기본성질은 대칭성이다. 좌우대칭, 상하대칭, 전후대칭, 내외대칭, 중앙과 주변의 대칭이 공간의 성질이다. 대칭이란 동일한 둘이 마주보고 동일한 접점을 공유하며 하나이면서 동시에 둘의 성질을 가지는 것이다.
시간의 기본성질은 반복성이다. 1초와 2초, 1분과 2분, 1월과 2월, 1년과 2년은 반복된다. 공간의 대칭과 시간의 반복이 본래 하나인 것을 둘로 늘인다.
[자기복제이론] = 원형을 유지한다. (물리영역)
자기복제개념은 본래 하나라는 것이다. 입자와 에너지, 혹은 물질과 정보가 합쳐져서 세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원래 [입자 = 에너지]로 하나이며 [물질=정보]로 하나라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이 둘이 아니라 [공간=시간]이라는 것이다. [시공과 물질]이 아니라 [시공=물질]이라는 것이다. [하드웨어 = 소프트웨어]
[구조론] = 분리되지 아니한다. (수리영역)
구조개념은 본래 하나이든 것이 둘로 나누어졌을 때도 최초의 하나로부터 결코 떨어져나가지 않는 성질이다. 공간의 대칭성에 의해 분리된 둘이 접점을 유지한채 마주보고 대응한 상태에서 떨어지지 아니한다. 고로 외부의 물리적 충격에 대해 개별적으로 대응하지 아니하고 전체적으로 대응한다.
[전개이론] = 열기와 닫기, 접기와 펼치기 (미학영역)
제행무상, 모든 것은 변화한다. 그러나 변화는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열리고 닫히며 접히고 펼쳐지는 것에 지나지 아니한다. 즉 본질에서의 변화는 없다. 우리가 변화라고 보는 모든 것은 열기와 닫기 접히기와 펼치기(벌리기)에 다름 아니다.
[일반이론] = 게임의 룰이 존재한다. (논리영역)
모든 변화에서 절대로 넘나들 수 없는 경계선이 되는 다섯가지 룰이 존재한다.
[집적이론] = 존재는 시스템이다. (언어영역)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서로 다른 존재들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최초의 하나가 자기복제하여 집적된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성질을 내는 것이다. 집적은 동일한 공간 안에 넣을 수 있는 정해진 최대한의 수이다. 우리가 존재라고 느끼는 것은 곧 집적이다.
☞☞☞☞☞
컴퓨터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되어 있다. 존재 또한 하드와 소프트로 되어 있다. 하드는 요소이며 소프트는 정보이다. 논증하는 것은 이것이 별개가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다. 소프트도 하드로 이루어진다.
하드가 어떻게 소프트를 획득하는가? 그것이 공간의 대칭성질과 시간의 연속성질 때문이다. 존재는 시공의 이런 성질을 이용하여 특정한 질서로 배열하면서 정보를 획득한다. 정보란 존재의 배열방식이다.
존재의 배열방식은 둘이다.
1. 열기와 닫기 (공간의 대칭성질을 이용한 디지털 확장)
2. 접기와 벌리기 (시간의 연속성질을 이용한 아날로그 확장)
동일한 공간 안에 디지털과 아나로그를 통한 최대확장 수치는 한정되어 있다. 그것이 집적이론이다.
1. ※ 우주의 비밀 텐서그리티 ※
텐서그리티를 아는가? (한겨레 21 참조)
텐서그리티를 안다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이런 말이 나온다.
/자연의 책은 기하학에 의해 다시 쓰여져야 할 것이다/
이 말은 생물학자 톰슨이 갈릴레오의 말을 인용해서 한 말이고 갈릴레오는 플라톤에게 인용했으며 그것을 한겨레 21이 인용하고 있고 나는 또 그것을 인용한다. 기하원리가 곧 우주의 기본원리라는 점은 누누히 강조해 온 바다.
텐서그리티에 대해 간단히 말하면 인장력과 수축력에 대해 기하학적으로 안정된 구조이다. 두가지 형태를 예시할수 있는데 요는 이런 기하학 원리가 생명체의 진화원리로 채택될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소개하는 이유는 전부터 말해오던 구조론과 부분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구조는 곧 시스템이며 그것은 외부의 어떤 물리적 충격에 대해 그 힘이 전체에 골고루 분산되는 정도를 말한다. 안정된 구조, 완벽한 시스템은 어떤 물리적 충격에도 부서지지 않는다. 그것은 풍선이 힘을 골고루 나눠 가지므로서 터지지 않듯 힘을 분산하여 가지기 때문이다.
텐서그리티란 그 실물모형인데 하나는 6각형 벌집구조이고 하나는 여섯 개의 막대와 그 끝을 연결하는 여러개의 끈으로 만들어진 모형이다. 요는 생명체의 자기복제 원리가 이 구조원리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자기복제 개념은 내가 제안하는 주장이고 텐서그리티는 하버드 대 [도널드 인그버]교수가 주장하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기하학원리 = 생명체 원리 = 우주원리 = 텐서그리티/라는 것이고 내 말은 그 모든 것을 /자기복제 원리 = 집적이론/으로 풀이할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내 이야기다.
근래 프랑스에서 80만년 전의 인간 두개골이 발견되었다. 문제는 이 두개골이 현생인류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배운 교과서 내용대로라면 4만년전에 크로마뇽인이고 20만년 전에 네안데르탈인이고 80만년 전에는 호모 에렉투스가 살던 때다.
몇 년 전 칼 세이건교수가 진화에 대한 그림모형으로 히트친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텔레비젼을 통해 그 현란한 그림쇼를 보아왔다. 그것은 하나의 원시생명체가 인간으로 진화하기까지의 과정의 연속그림이다.
거기에 따르면 80만년 전의 인류는 오랑우탄과 현생인류의 중간형태의 두개골 모양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문제는 유감스럽게도 80만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 학계는 그 원시인은 소년이므로 유형화단계를 거쳐서 네안데르탈인을 따라갈지 모른다고 변명하고 있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고...!
누차에 언급했듯 진화론을 구조론으로 풀어보면 진화는 비약적으로 일어나며 잃어버린 고리는 없다는 것이다. 왜?
그것은 구조론의 자기복제 개념으로 충분히 설명되지만 텐서그리티로도 풀어볼 수 있다. 이렇다. .../어느 하나의 부품에서 인장력이 작용하면 구조전체에 인장력이 전달된다. 인장력이 전체적으로 증가하면 어느 특정 부재의 압축력이 증가하면서 전체가 균형을 이루게 된다/
구조는 곧 시스템구조이며 시스템구조는 건축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건축이야말로 기하학이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되며 또 증명되는 부분이다.
모든 건축은 이러한 텐서그리티의 원리를 이용하고 있다. 가장 안정된 건축구조는 일본의 모 사원처럼 못 하나를 빼면 그 건물 전체가 무너지게 되어있는 형태이다. 일본의 그 신사는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데 딱 하나의 못을 사용하고 있고 그 하나를 제거하면 마치 풍선이 터지는 것처럼 전체가 무너지게 된다.
역으로 그 하나의 못을 빼지 않으면 어떠한 물리적 충격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또한 텐서그리티의 원리다. 그래서 건축에는 한식이면 한식, 벽돌이면 벽돌, 슬라브면 슬라브지 어중간한 복합형태가 없다. 그 기초가 목재냐 벽돌이냐 슬라브냐에 따라 전체적인 형태가 단번에 나오는 것이다.
생명체 또한 건축원리가 적용된다. 그러므로 다윈의 진화론은 부정된다. 이것은 진화론 전체가 부정된다는 것이 아니라 적자생존이론이 부정된다는 것이다. 텐서그리티의 원리를 따르면 돌연변이는 그 전체가 균형을 이루는 현상에 배치되므로 태내사망하여 사산하게 된다. 사산하지 않은 경우 진화의 의미가 없다.
생명체도 알고보면 하나의 건축물이므로 어떤 변이가 개입하면 그 영향을 전체가 고루 나눠가지게 되므로 그것은 비약적인 진화로 나타나던지 아니면 기형아로 사산하던지 둘 중의 하나가 된다.
유인원의 유전인자에 변이가 개입했다면 제 2의 안정형태를 따라 인체의 전 부분에 걸쳐 비약적인 변화가 일어나므로 중간단계인 잃어버린 고리는 없게 된다. 그것은 대뇌, 골격, 근육, 내부장기, 신경조직에 동시에 작용한다.
즉 진화를 담당하는 유전정보 자체가 기하학적 배열구조를 가지며 텐서그리티의 원리에 따라 /부분의 진화 = 전체의 진화/로 연결되는 것이다.
기하는 건축에 소용되며 생명체도 우주도, 언어도, 수학도 그 자체로 하나의 건축, 하나의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집을 지을 때 꼭대기층이 돌이면 아래층도 돌이어야 한다. 2층은 돌인데 1층은 나무면 그 집은 무너진다. 우주도 마찬가지,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다섯가지 부재를 사용하며 그 외에는 없다.
대수학에 있으서는 수가 건축의 부재이고 식이 그 건축의 설계도다. 기하에 있어서는 점은 선의 부재이고 선은 점의 설계도인 동시에 선은 면의 부재이고 면은 선의 설계도이다. 또 면은 입체의 부재이며 입체는 면의 설계도이고 입체는 공간의 부재이며 공간은 입체의 설계도이다.
즉 기하는 한단계식 상향할때마다 설계도인 동시에 부재가 되는 것이다. 고로 최종적으로는 질과 공간이 설계도가 되며 양과 점이 부재가 된다. 그 중간은 설계도의 성질과 부재의 성질을 동시에 가진다. 설계도일 때 절대성이, 부재일 때 상대성이 적용된다. 고로 우주의 기본원리는 절대적이면서 동시에 상대적인 것이다. 확정적이면서 동시에 불확정적이고 변하면서 동시에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물질의 텐서그리티 개념이다. 인장과 수축에 대해 동시에 대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는 혹 진리는 보편성과 특수성, 일반성과 다양성, 정체성과 의속성, 절대성과 상대성, 사실성과 신비성을 동시에 가지는 이중구조로 되어있다. 이러한 물질의 혹 기하의 혹 시스템구조의 기본원리를 파악하므로서 우주를 존재를 전체적으로 이해할수 있게 된다.
건축의 기본은 견고성과 효울성이다. 견고성은 외부의 물리적 충격에 대해 가장 안전하게 방어함을 의미하며 효율성은 가장 적은 비용이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과 우주의 원리도 마찬가지다. 어떠한 생명체든 절대로 낭비되는 부분이 없어야 한다.
텐서그리티 개념은 /부분 = 전체/다. 그것은 효울성을 낳는다. 단 하나가 모자라도 전체가 무너지며 단 하나가 남아도 전체가 둔해진다. 생명과 우주도 같다. 그것은 행동통일이다.
공상과학영화에서는 이와 배치되는 부분이 나온다. 예를 들면 H G 웰즈의 화성침공에서 화성인은 매우 많은 팔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상당히 남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성인의 여덟이나 되는 팔 중 몇은 언제나 놀고 있다. 이것이 텐서그리티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체에 있어서 두 팔과 열손가락이 있지만 하나도 남는 것은 없다. 하나가 모자라도 매우 불편해진다. 텐서그리티 개념은 이것이 유전인자 차원에서 정해지므로 우주의 그 어떤 생명체든 텐서그리티의 지배를 받아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으므로 모자라거나 남았다는 이유로 자연도태, 적자생존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우주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요즘 논의되는 초끈이론은 마땅히 텐서그리티를 참고해야 한다. 초끈의 끈은 미립자와 미립자를 연결하는 끈이다. 텐서그리티를 적용하면 우주는 인장력과 수축력에 대응하는 두개의 끈에 의해 지탱되며 통일장 개념은 그 두개의 힘을 하나의 범위안에 담아내는 개념이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빅뱅 개념은 여기에 충분히 배치된다. 최초에 하나의 점을 설정하고 그로부터 확장되었을 뿐 그 반대는 논의되지 아니한다. 텐서그리티 개념을 도입한 구조론적 우주론은 우주는 확장이 동시에 수축인 것이다.
초끈을 도입한 빅뱅은 하나의 점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팽창이 아니라 그 반대로 하나의 점 안으로 수축하는 방향으로의 빅뱅이다. 우주는 하나의 작은 점에서 무한히 커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달걀 그 내부로 무한히 조밀해진 것이다.
그 달걀의 내부에서 보면 무한히 커진 것으로 보이고 밖에서 보면 무한히 작아진 것처럼 보인다. 전체적으로는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았다. 달라진 것은 비례 뿐이다. 집적도만 증가했을 뿐 물리공간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조만간 빅뱅이론은 이렇게 수정된다.
화성인은 귀가 크다. 이것은 텐서그리티에 안맞다. 개가 귀가 큰 것은 감정표현을 위해서고(개는 귀로 의사를 소통한다) 토끼가 귀가 큰 것은 체온조절을 위해서다.(굴토끼(집토끼)는 원래 사바나에 적응하고 있다, 산토끼는 귀가 작다)
만약 화성인이 귀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 크다면 귀는 잘 보이는 머리꼭지에(고양이나 호랑이처럼) 있어야 하고 그러면 두 개골의 위차가 좁아져서 머리가 나빠진다. 텐서그리티는 최적화를 따라가므로 결국 화성인은 인간처럼 귀가 작다는 결론이 나온다.
텐서그리티는 정치에도 적용된다. /그렇게 되게되어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게 되어 있는대로 되어간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구조원리/가 모든 것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것이다.
신의 지문
신이 곧 기독교의 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천지간에 만연한 잡귀신들이 신인 것도 아니다. 이매망량 요정 정령 저승사자 야차 외계인 스머프들이 신인 것도 아니다.
신은 존재한다. 증명된다. 문제는 존재론과 인식론, 신은 존재하지만 인간들이 존재라는 말의 참된 의미를 모르고 있으므로 납득 안된다. 존재한다는 것이 인간들의 존재감, 충일감, 충족감, 소속감을 곧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느낌으로만 판단한다.
존재를 모르는 자에게 신의 존재를 말한다는 것이 또 증명한다는 것이 가당한가? 우리가 느끼는 딱딱한 알갱이가 곧 존재인 것은 아니다. 알갱이는 존재의 다섯가지 성질, (질, 입자, 힘, 운동, 량) 중 하나일 뿐 신이 곧 어떤 알맹이들의 형태는 아니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는 이치다. 작은 인간의 감관에 신의 큰 존재를 담을수는 없다. 감각은 인간이 정보를 취득하는 수단일 뿐 존재의 즉자적 성질은 아니올시다. 먼저 존재론을 배우라.
인식론이 또한 문제가 된다. 인식에는 경계가 있다. 인식할수 있는 부분과 불가능한 부분이 있다. 어떤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이미 개입한다는 것이다. 사태에 개입한 부분까지가 인식의 궁극적 종결점이다. 신이 개입한 부분까지만 인식가능하다. 신은 과연 인간에 백프로 개입하는가? 아니올시다.
신의 문제는 신의 존재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느냐의 문제이다. 신은 존재하는 방식으로 개입한다. 신이 없다는 의 의미는 신이 인간의 삶에 사사건건 개입하지는 않는다는 말이 되고 신이 있다는 말은 전체적으로 개입한다는 말이 된다.
존재론적으로 말하면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은 없다. 세계는 궁극적인 차원에서 수수한 0, 순수한 무(無)으로 환원된다.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완벽하게 증명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존재하는 듯이 보이게 할 그 어떤 힘의 존재가 역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우리는 물질이 존재한다고 믿지만 물질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촉각이 존재하는 것이다. 물질은 공(空), 존(存), 재(在), 사(事), 상(像)의 다섯가지 양상으로 전개한다. 각각은 서로 전개, 환원되므로 이들은 하나다. 우리가 있다고 느끼는 것은 존(存)이나 재(在)다. 그것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명목을 가진다/존(存)/거나 위치한다/재(在)/는 것이다.
명목을 가짐은 다른 것이 그에 지배, 소속된다는 것이고 위치한다는 것은 다른것에 지배, 소속된다는 것이다. 고로 존재란 결국 연관관계인 것이다. 고로 신이 존재한다는 개념은 개입한다는 개념으로 바뀌는 것이다.
무신론이란 신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인식일 뿐이다. 그것은 집주인이 셋방살이 하는 사람에게 간섭하지 않는다는 말일 뿐이다. 이미 신의 터에 집 짓고 사는 터 어찌 간섭 없으랴.
옛날 우주론은 과거로 미래로 시간무한 공간무한이었다. 그러나 무한은 없다. 한은 지경을 의미하며 경계가 없는 것은 존재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의 다섯가지 성질(질, 입자, 힘, 운동, 량)이 다 경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간은 공간으로 치환되고 공간은 특이점으로 환원하여 사라지고 시공이 물질과 분리되지 않는 시간과 공간과 물질이 삼위일체가 되어버리는 물리학이 등장하게 된다. 존재한다는 것은 시,공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인데 시공간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이다.
그 차원에서 물질은 알갱이가 아니라 순수한 수학공식으로 돌아가버린다. 그것은 시스템이며 구조이고 거기에는 앞과 뒤, 겉과 속, 중앙과 주변, 좌와 우가 있다. 그 위치는 고유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우주는 집적도 5이므로 다섯 번을 지정해야 존재가 시스템으로 작동하게 되어 있다.
물질은 자기복제원리에 의해 집적도 공식을 따라 자가발전하여 스스로 세계를 창조해 왔지만 그 시스템 자체는 지정되어야 한다. 이는 우주존재(물질계)가 스스로 모순에 차 있다는 말이다.
우주는 불완전하며 결핍되어 있다. 즉 분명히 측정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측정되지 않는 부분은 반드시 물질계의 바깥에 있어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우주는 딱딱한 알갱이가 아니라 순수한 수학공식이며 스스로 불완전한 공식이다. 그것을 완전하게 할 보상부분은 우주의 바깥, 시공의 바깥에 있다. 내가 말하는 신은 바로 그 부분을 지시하는 것이다.
어쨋든 지정1, 유도의 문제
지정2, 대응의 문제
지정3, 의속의 문제
지정4, 인과의 문제
지정5, 표상의 문제는 학문의 근원인 물리학의 형님이며 물리학으로도 답이 안나온다. 우리가 아는 세계는 물리적 세계일 뿐이나 물리 이전의 세계가 존재한다.
요기까지만.
존재론
있다는 것은 만져진다는 것이거나 위치한다는 것이다. 만져지지도 않고 위치도 포착 안되면 없는 것이다. 인간이 있고 그 위에 존재가 있고 그 위에 위치가 있다. 존재는 위치에 매달려 있고 인간은 존재에 매달려 있다. 그것은 사슬관계이다.
서로 연쇄된 사슬의 한 마디일 뿐이다. 문제는 이 사슬이 끝없이 이어지는 무한이 아니라 어딘가 잘라지는 부분이 있다는데 있다. 사슬은 앞과 뒤가 연결되어 유한한 하나가 되어버린다. 여기에 시간을 대입하면 사슬에서 빠져나가 다른 사슬로 가버린다. 그 사슬과 사슬이 또한 사슬관계가 된다. 그 사슬관계도 역시 유한하며 또 더 큰 사슬로 건너 뛴다. 그것이 지시 1에서 5까지다.
《】
초끈은 없다.
1. 물질은 입자가 아니다.
스티븐 호킹이 통일장이론을 완성하겠다고 큰소리 친 서기 2000년이 코앞에 다가왔다. 어림없다. 허황되다. 요즘 호킹은 자기의 옛날 이론을 수정하고 있는 모양이다.
러시아 인형처럼 자꾸만 속에서 더 작은 입자가 나오는 물리학이 그 입자의 벽에 막혀 버렸다. 대신으로 주목받는 것이 초끈이론이다. 그러나 초끈이론 또한 적어도 1세기 안에는 가시화된 모양으로 복장을 갈아입지 못할 모양이다.
초끈이론에 주목하는 것은 내가 소년 때 순전히 논리학, 수학적인 탐색의 끝에 물질의 기본단위는 결코 입자일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과 부분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초끈이론은 물질의 기본이 입자알갱이가 아니라 미세한 끈이라는 것인데 입자를 탈피한 것은 진일보지만 기본적으로 어떤 알갱이 형태를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함으로서 한계를 가진다. 물질은 입자도 끈도 아니고 비다.
어째서 물질이 입자일수 없는가?
앞에 텐서그리티 이야기를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질이 둥근 구(球)의 형태를 가지는 것은 적어도 두 개 이상의 힘이 작용하고 있을 때이다. 그러므로 입자라면 거기에는 적어도 두 개 이상의 힘이 마주보고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구성(構成)을 의미한다.
구성이란 건축의 바탕인 벽돌이 아니라 그 벽돌의 결합하는 시멘트가 작용했음을 의미하는 즉 둘 이상의 구성소들이 어울려 형태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고로 입자는 물질의 최소구성소일 수 없다. 이건 간단한 법칙이다.
고로 물질은 입자가 아니다.
텐서그리티에 대해 한마디 더.....풀잎에 맺힌 이슬은 왜 구(球)의 형태를 가지는가? 텐서그리티란 외부에서 물리적 힘이 전달될 때 그 힘이 그 전체에 고루 분산되어 나눠가지는 것이다.
풍선에 바람을 집어넣으면 그 힘은 전체에 고루 분산된다. 그 분산되는 정도가 고를수록 구조는 안정된다. 힘이 어느 한쪽으로 집결되면 풍선은 터지고 구조는 무너진다.
풀잎을 확대해 보면 미세한 요철(凹凸)구조를 볼수 있다. 그 하나의 돌기가 이슬방울을 찌르면 중력에 의해 납작해져 있던 물분자들은 텐서그리티의 작용에 따라 강한 수축력을 발휘 외부의 물리력에 대해 가장 안정된 방어형태를 가지게 되는 데 곧 구의 형태로 나타난다.
물질의 기본이 입자인 것은 텐서그리티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내부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이며 내부의 구성소들 간에 힘의 균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이미 물분자들은 서로 당기는 응집력과 서로 미는 힘(압력)을 동시에 가지며 그 둘의 균형이 성립함을 의미한다.
고로 어떤 개별자가 입자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면 거기에는 최소한 복수의 구성소들이 결합된 형태로 존재하며 그것은 집합이지 원소가 아니다는 증거가 된다.
2. 차원을 이해해야 한다.
물질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먼저 차원개념을 이해해야 된다. 차원은 1차원에서 5차원까지 밖에 없다. 초끈이론은 벌써 10차원 26차원 하는 것이 틀려먹은 것이다. 천차원 만차원은 왜 없어야 되는가?
공간 상에 점 a와 점 b를 설정했을 때 a에서 b를 찾아가려면 최소한 몇번의 궤도수정을 해야하는가? 그것이 차원이다. 요는 내가 생각하는 차원개념과 일반적으로 알려진 차원개념이 다르다는 것이다.
차원이 5차원까지 밖에 없다는 것은 공간 상의 어떤 위치를 찾아가려면 아무리 해도 5번의 궤도수정만 하면 이 우주 안에 찾아가지 못할 위치가 없다는 것이다.
사격을 할 때 0점이 안잡히면 크리크수정을 해야 하는데 이때 몇 군데를 수정해야 하는가? 크리크는 상하를 조정하고 가늠자는 좌우를 조정한다. 평면이라면 이 두곳만 수정하면 어떤 위치에도 도달가능하다.
그러나 총알은 공간을 날아가므로 엄밀히 해서 네곳이다. 먼저 총의 위치확정, 다음 총알이 날아가는 거리확정, 다음 상하 크리크확정, 다음 좌우 확정, 이것만으로 총알은 정확히 표적을 찾아간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세계는 4차원의 세계이다. 그러나 최초의 총이 놓인 위치는 셈에서 빼므로(옛날 사람의 실수) 총의 위치가 0차원이 되어서 우리는 3차원 공간이라고 한다.
문제는 이것이 지구에서는 되는데 우주공간에서는 안맞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는 우주공간의 어떤 지점이다. 우리는 우주선을 타고 우주의 어떤 위치에 있다. 지구로 가려면 이 우주선은 몇번의 궤도수정을 해야하는가? 정답은 다섯 번이다.
그러므로 이 우주는 5차원의 세계이다. (점을 0차원으로 친다면 4차원) 우리는 다섯 번의 위치설정으로 이 우주 안의 그 어떠한 위치라도 정확히 찾아갈수 있다.
보통 차원을 생각할 때 정육면체를 상정한다. 문제는 이 정6면체가 항상 예각을 가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각도설정이 빠져있다. 왜 예각인가? 그것은 최초에 찍는 점을 항상 그 정육면체의 가장 바깥(꼭지점)에 있는 어떤 위치로 설정하기 때문이다. 왜 바깥인가?
이것은 교묘한 착각이다. 최초에 찍는 점이 그 정육면체 내부에 어떤 위치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3차원(선, 면, 입체)로는 결코 도달할수 없는 어떤 위치가 생겨난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사차원이며 거기에다 최초의 위치 0차원을 더하면 5차원이다.
아인시타인이 말한 4차원은 시간개념인데 시간에는 별도로 시간차원이 존재하므로 논의에서 빼야한다. 초끈이론의 10차원 26차원 하는 발상도 시간변수를 더한 것이므로 역시 오류이다. 차원개념에 시간은 전혀 배제된다.
시간을 배제하면 움직이고 있는 어떤 위치로는 찾아갈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던질수 있겠지만 그 움직임은 사전에 계산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우주선이 정확히 다섯 번의 궤도수정으로 우주공간의 어떤 위치를 찾아가는데 시간이 흘러 별이 다른 데로 가 있으면 어찌되나 하는건데 이건 사전에 계산되어야 하며 시간차원은 그 계산에 소용되는 것이다.
시간에도 역시 5차원이 있다. 먼저 시간의 위치를 확정하고 그 시간의 변화에 따른 공간의 상대위치를 확정하고 다음 정확히 다섯 번의 궤도수정만으로 우주공간의 어떤 위치라도 찾아갈수 있다.
3.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구분해야 한다.
존재는 디지털(열기)과 아날로그(벌리기)로 되어 있다. 여기서 다섯 번의 크리크 이동은 디지털이고 그 거리설정은 아나로그다. 디지털이란 0과 1로 나타낼수 있다는 것이다. 차원개념을 생각할 때 정육면체를 떠올리는 것은 그 차원이동을 항상 90도 각도로 생각하기 때문인데 이것은 아날로그 개념이다. 디지털에는 0과 1만 있기 때문에 각도가 얼마다 하는 것은 없다.
저격수가 크리크조정을 하는데 크리크를 조정한다 하는 것은 디지틸이요 크리크를 3이나 4로 조정하는 것은 아날로그다. 차원개념은 거리(아날로그)를 배제하고 각(디지털)만 따지는 것이다.
즉 각은 디지털이고 각도는 아날로그다. 각은 모서리이고 각도는 그 모서리의 확장이다. 각(열기)만 있고 각도(벌리기)는 없어야 차원이 포착되는 것이다. 아나로그에는 무한이 있지만 디지털에는 0과 1 뿐이므로 모든 것이 유한하다. 차원의 착오는 아나로그와 디지털을 섞어 무한한 선, 면, 입체를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런건 없다.
모든 논의는 닫힌 계를 전제로 유한한 세계 안에서 판단하는 것이다. 그 무한을 유한으로 만드는 것이 비(比)다.
모든 논의의 기본개념은 자기복제다. 최초에 점 1이 자기복제 하면 선이 되고 선이 자기복제하면 면이되고 면이 자기복제하면 입체가 되고 입체가 자기복제하면 공간이 된다.
차원은 곧 디지털이며 디지털은 자기복제 여부의 판단이고 아날로그는 그 복제회수를 나타낸다. 즉 선이 자기복제하면 면이 되는데 그 면이 자기복제하여 입체가 되는 것이 디지털이요 선이 했던 복제를 한번 더하여 더 넓은 면이 되는 것이 아날로그다.
디지털 (자기복제)
아날로그 (동일한 자기복제의 회수 반복)
디지털은 뼈고 아날로그는 살이다. 논의에서 살은 빼고 뼈만 말하는 것이다. 왜 살을 빼야 하는가하면 점 a에서 b로 찾아갈 때 크리크 조정은 여러번 하지만 탄환의 발사는 딱 1회 뿐이므로 아날로그 전개는 한번만으로 충분한 까닭이다.
수학이란 중복을 피하고 최소화 시켜서 판단하는 것이다. a에서 b로 찾아갈 때 궤도수정을 한번 할 때마다 정확히 각도 얼마를 수정해야 할지 판단할 필요가 없다. 표적이 포착될때까지 차원을 바꾸다가 포착된 이후 딱 1회의 아날로그 설정으로 표적을 정확히 때릴 수 있다.
그러므로 반복된 아날로그 개념은 필요없는 것이다. 그것은 총을 한방 쏠 때마다 0점을 잡는 것이 아니라 0점을 잡아놓은 총을 쏘기만 하면 되는 것과 같다.
11층에 있는 삼돌이를 찾아간다.
1, 자기위치를 확정한다. 자기위치는 1층이다.
2. 엘리베이터를 탄다.
3. 엘리베이터를 상승시킨다.
4. 엘리베이터를 내린다.
5. 삼돌이를 찾는다. 아무리 최소화 시켜도 이 5는 있어야 하며 가장 에너지를 절약할 때 이동(아날로그설정)은 엘리베이터 상승 딱 1회 뿐이다. 그것이 차원개념.
위에서 엘리베이터 이동은 이동거리 얼마(아날로그)가 지정되어야 하지만 그 이외의 부분은 yes와 no, 0과 1로 충분하다. 실 우주공간에서 이동이라면 그 아날로그 벌림은 언제하던 무방하다. 위 1,2,3,4,5, 단계의 그 어디에서 아날로그 벌림을 지정하던 상관없기 때문에 중복을 피하기 위해 제외하는 것이다.
차원개념을 입방체로 그릴 때
1. 먼저 꼭지점을 찍고 (0차원)
2. 선을 길게 벌려 그으며 (1차원)
3. 사각형 평면을 만들고 (2차원)
4. 그 사각형을 위로 쌓아 (3차원) 작업을 끝내는데 이것이 무식한 경우인 것은 점을 무한히 많이 찍어버려도 입방체가 되고 선을 무한히 많이 그어도 입방체가 되는데 굳이 반복하여 선의 길이를 정하고 면의 넓이를 지정하며 입체의 높이를 얼마로 지정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컴퓨터로 그린다면 단 1회의 수치입력으로 충분히 입방체를 그릴 수 있다. 아날로그 벌림은 1회 만으로 충분한 것이므로 종이위에 그리는 도형은 눈금 자를 여러번 댄 즉 기하학의 기본원리 눈금자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어긴 것이다.
콤파스의 벌림은 1회로 충분하다. 왜 기하학은 눈금자를 사용하지 않는가? 눈금은 아날로그며 반복되기 때문에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다. 눈금자 없이 자와 콤파스만으로 입방체를 그려보자.
1. 점을 찍는다 (1차원)
2. 점에다 임의의 각을 설정한다. (2차원)
3. 각에 대한 상대각을 설정한다. (3차원)
4. 그렇게 만들어진 상대각에 대한 상대각을 설정한다. (4차원)
여기까지는 도형을 그릴 것 없이 생각만으로 가능하다. 다음 여기에다 임의의 수치를 부여하기만 하면 입방체가 성립한다.
여기서 각은 곧 꼭지점을 의미하고 상대각이란 서로 마주보는 꼭지점을 의미한다. 1차원에서 최초에 점을 찍는 것은 하나의 꼭지점을 부여하는 것이다. 2차원에서 임의의 각을 주는 것은 점을 하나 더 찍어서 두 점이 마주보게 한다는 것이다. 3차원에서는 그렇게 하여 생긴 서로 마주보는 두 개의 각 과 동일한 것을 하나 더 설정한 후 둘을 마주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평면이 떠오를 것이다. 4차원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동일한 것을 자기복제하여 하나 더 설정한 후 마주보게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여덟 개의 꼭지점을 가진 입방체가 떠오를 것이다. 거기에 아무 수치만 주면 입체가 된다. 눈금없는 자와 콤파스 만으로 그릴 수 있다.
입방체는 4차원이므로 1,2,4,8로 자기복제하면 8개의 꼭지점을 가진다. 이것을 자기복제하여 16개의 꼭지점으로 만들면 구가 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사는 공간에서 16개의 꼭지점을 가진 입방체는 만들 수 없다.
그것은 입방체의 내부에 중심점을 부여하여 여섯 개의 사각뿔로 나눈 후 자기복제하여 12개의 사각 뿔을 다시 두 개씩 마주보고 붙여 여섯 개로 만든후 붙이면 14개의 꼭지점을 가진 형태가 되는데 여기에 중심을 지정하기 위하여 중심과 마주보는 대칭각을 설정하면 16개의 꼭지점이 된다. 그것이 구의 기본형이다.
여기서부터 자기복제를 진행하여 꼭지점의 수를 늘려나가면 갈수록 공이 된다. 공은 16꼭지점 입방체의 꼭지점 수를 무한히 늘려버린 것이라 할수 있다.
차원이 왜 5차원 뿐인가 하면 입방체까지는 바깥으로 진행하지만 5차원부터는 꼭지점이 내부로 들어가 버리므로 자기복제를 진행하면 자기 내부를 통과하는 즉 겹쳐지기 때문이다.
4차원까지는 겹치지 않고 외부에서 설정할수 있으나 5차원에서 끝이다. 더 이상은 설정이 불가능하다.
《】
§디지털과 아날로그§
수학과 물리학을 연결하는 통로가 되는, 가장 기본이 되는 두가지 개념이 '차원 개념'과 '디지털 개념'이다. 이걸 알아야 만사가 보인다. 돌연 확 뜨이는 것이다. 까만 어둠에 서광이 비치듯 세상이 확 밝아보인다. 가히 깨달음이다.
초끈이론이 안되는 것은 연관되는 수학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학이야 말로 미개척지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간단한 수학원리인데 수학책에 나오지 않는다. 기본이 되는 개념인데 누구나 다 알고 있다고 믿으면서 실은 누구도 모르고 있다.
차원에 대해서는 여러번 언급했다. 그것은 시스템이며 식이고 구조다. 제곱셈 같이 건너뛰는 것이다. 중간이 없다. 그런데 이걸 이해못한다. 다 알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전혀 모르는게 차원이다. 4차원, 10차원 26차원 하는 말들 다 잘못 인식된 개념이다.
그것은 디지털을 모르기 때문이다. 디지털을 알아야 차원이 보인다. 누구나 디지털을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게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아는 것이다.
차원과 디지털은 일상생활에서 너무나 많이 관찰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냥 안다고 믿는다. 그러나 결과를 보고 얻은 것이지 원인을 아는 것이 아니므로 오인(誤認)이며 착각이다. 그것이 아니다.
/존재를 이루는 기본공식이 차원과 디지털이다./
/세상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라는 두가지 기본요소, 그리고 그 구성인 차원으로 되어 있다/
세상은 복잡하다. 그러나 단순화하면 세상은 [YES와 NO],
[0과 1]로 압축된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세상이 [같은 것]과 [다른 것]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한 견해는 누천년 전에 이미 성립하였다. 상식이다. 그런데 그게 뭐지?
1은 (열기), 0은 (닫기)다. 1을 열면 1의 반복인 아날로그 2,3,4,5,...가 펼쳐진다. 0은 10, 100, 1000과 같이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을 위한 닫기다.
여는 것은 뭐고 닫는 것은 무엇인가? 여는 것은 집합을 열어 원소들을 보이는 것이며 닫는 것은 원소들을 집합 안으로 가두는 것이다. 집합은 무엇인가? 그것은 차원이다.
우주는 집합(集合)과 원소(元素), 곧 식(式)과 수(數), 그리고 집합에서 더 높은 집합으로의 이동인 열기와 닫기, 또 이들을 잇는 구조(構造)로 구성되는 것이다.
존재의 원 구성소는 총 다섯이 된다.
1. 차원(次元) : 식(式), (집적도(集積道).)-- 질(質)을 나타낸다.
2. 집합(集合) : 수(數), (실수實數) --입자(粒子)를 나타낸다.
3. 구조(構造) : 대칭, (각) -- 힘(力)을 나타낸다.
4. 아나로그 : 벌리기, (아나로그) -- 운동(運動)을 나타낸다.
5. 디지털 : 열기 닫기 (디지털) -- 량(量), 자기복제를 나타낸다.
물질존재가 양(量)과 그 양들의 집합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러나 그 양이 자기복제를 통해 성립하며 집합이 집적도(集積度) 곧 차원에 의해 성립한다는 것을 아는 이는 없다.
우주는 양으로 가득차 있다. 그것은 최초의 하나가 복제된 것이다. 그 복제된 것들이 어떤 양상으로 구조화(構造化) 하는지에 따라 하늘이 되고 땅이 된다. 구조화란 곧 결집(結集)이다.
양이 구조화 하려면 벌리기(운동)와 대칭(구조)을 거쳐야 한다. 벌린다는 것은 양이 추가된다는 것이고 대칭은 남자와 여자, 하늘과 땅, 낮과 밤 처럼 서로 마주보고 붙는 것이다. 벌리기와 대칭이 없다면 결집되지 않고 집합이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가 뭔가 (있다)라고 말할 때 그 있음은 집합, 곧 입자로 있는 것이다. 그 입자는 단 하나의 알갱이로 된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부구조를 가지는 여러 요소들의 구조로 되어 있다. 입자를 이루기 위해서는 내부에 대칭을 가져야 한다. 좌우, 상하, 전후, 내외, 근원의 대칭없이는 입자가 성립하지 않으며 집합이 되지 않는다.
정리하면 존재는 수학적 존재이며 디지털(점)과 아날로그(선), 대칭(각, 평면), 집합(직각, 직각사각형, 입체), 식(원, 시스템, 공간)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앞으로 갈수록 원소이고 뒤로 갈수록 집합이다.
여기에 차원을 도입하면 차원은 집합의 종류이다. 집합은 1차원에서 5차원까지 존재하며 그 하나하나의 집합마다 열기(디지털 1)와 닫기(디지털0) 그리고 원소 (아날로그 2,3,4,...) 로 되어 있다.
차원 질 5 (여닫기) + (벌리기) + 대칭 + 집합 + 식
입자 4 (여닫기) + (벌리기) + 대칭 + 집합
힘 3 (열기 닫기) + (벌리기1,2,3,....) + 대칭
운동 2 (열기 닫기) + (벌리기1,2,3,....)
량 1 (yes열기 ,no닫기)
우리는 수학에서 집합론을 배우지만 막연히 집합과 원소를 구분할 뿐 열기와 닫기를 배우지 않는다. 존재는 다섯가지 집합으로 구조화하며 각각의 집합마다 (열기와 닫기)를 가진다.
원소도 집합이다. 마찬가지로 집합도 상위집합의 원소이다. 디지털은 순수한 원소이자 가장 작은 집합이며 식은 가장 높은 집합이자 우주존재의 기본원소다.
순수한 원소 디지털(0,1)에서 차원이 하나 증가할 때마다 아나로그(....), 대칭(각), 집합(입자)가 추가되고 식에서 완성된다. 식은 5차원에서 완전해지며 4차원에서는 그저 집합일 뿐 독립적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모여있을 뿐 리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디지털이 우주의 최소구성소인가?
왜 원소는 1이 아니고 (0,1)인가?
왜 모든 원소는 원소이자 동시에 집합인가?
왜 집합은 집적도 5(5차원)에서 완전해지는가?
원소 (1,0)은 왜 자기복제를 수행하는가?
또한 하회를 볼 밖에.
§ 존재의 으뜸 §
만유(萬有)를 구성하는 디지털 (1, 0)은 [ ◐ ] 요렇게 생겼는데 1이면서 동시에 0이므로 (열기, 닫기)라고 하는 것이다.
디지털 ◑는 우주가 탄생하던 시점부터 있었던 하나이며 이것이 자기복제로 번식하여 가득찬 것이 우주다.
디지털 ◐는 비유하면 접시에 담긴 사과이다. 접시 ○는 0이고 사과 ●는 1이다. 접시와 사과는 붙어다니므로 ◐다.
1+1=2라고 한다. 그러나 1+1은 결코 2가 되지 않는다. 한 개의 접시에는 한 개의 사과만을 담을 수 있다. 고로 1+1이란 1이 2로 변한 것이 아니라 2를 1로 치기로 약속을 바꾼 것이다.
1+1이 2가 되는 법은 없다. 자연에서는 질량보존의 법칙에 의해 증가, 감소가 없다. 무엇인가? 1+1=2라는 말은 사과를 한손에 한 개 쥐고 운반하다가 양손에 하나씩 쥐고 운반하는 즉 사과의 사정이 아니라 사과를 나르는 사람의 사정이 변한 것이다.
무엇인가? 반드시 대칭이 있다. 1+1이 2라는 것은 1이 2가 된 것이 아니라 천칭의 한쪽에 1키로그램 짜리 둘 그리고 맞은편에 2키로그램 짜리 하나를 올려두어 평형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즉 1의 사정이 변한 것이 아니라 대칭을 이룬 맞은 편의 사정이 변한 것이다.
역사가 생긴 이후로 1이 2로 된 일은 없다 진시황도 나폴레옹도 1을 2로 만들지 못하였다. 고로 1더하기 1이 2가 되는 경우는 없다. 언제나 변하는 것은 실재의 변화가 아니라 대칭구조의 변화이다.
모든 존재는 모든 존재와 대응하며 대칭구조를 이룬다. 그 대칭의 변화를 변화로 부르는 것이다.
사과는 반드시 접시에 올려져 있다. 즉 사과 1은 반드시 접시 0에 붙어 있는 것이다. 만약 그 접시에서 사과를 내리면 빈자리가 발생하고 거기를 무언가가 메꾸어야 한다. 또한 집어낸 사과도 어느 다른 접시에 올려져야 한다. 그러면 자리바꿈만 있지 실질변동은 없다.
물속에서 물을 한줌 움켜내면 반드시 그 빈자리를 무언가가 메꾼다. .
이것을 기하학에 대면 콤파스는 열기와 닫기를 나타내는 디지털 개념이며 자는 벌리기를 나타내는 아날로그 개념이다.
* 알아둘 것....컴퍼스는 원을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크기를 나타내기 위해서다. 원은 그 '같은 크기'의 한가지일 뿐.
같은 크기는 곧 자기복제다. 컴퍼스는 자기복제를 나타낸다.
*. 컴퍼스가 나타내는 것
1, 점(량) 2, 선(운동) 3, 각(힘) 4, 직각(입체) 5, 원(공간)
*. 자가 나타내는 것
1, 점의 위치 2, 선의 길이 3, 각의 크기 4, 사각형의 면적
5. 원의 체적
컴퍼스가 나타내는 것은 모두 닫힌 계다. 유한한 세계다.
자가 나타내는 것은 모두 열린 계다. 무한한 세계다.
컴퍼스를 들고 바늘부분으로 먼저 하나의 꼭지점을 찍으면 점,
컴퍼스의 다리를 벌리면 선,
연필부분을 종이에 대면 각 (그것은 180도의 평각이다)
각의 양끝에서 등거리에 분할하면 직각 (그것은 사각이기도 하다)
꼭지점을 직각의 중심점으로 이동하면 원 (구이기도 하다)
왜 이런 논리가 필요한가?
그것은 무에서 유가 나올수 없기 때문이다.
수학은 순수관념이므로 잡다한 도구를 사용할수 없다.
그런데 왜 자와 컴퍼스는 괜찮은가?
자와 컴퍼스는 수학적인 논리로 창조되기 때문이다.
자와 컴퍼스는 도구가 아니라 관념이다. 실제의 컴퍼스 없이 순전히 논리로만 컴퍼스를 만들어 낼수 있다. 즉 실제로는 컴퍼스도 자도 없이 논리적인 계산만으로 자와 컴퍼스가 사용되는 것과 똑같은 효과가 가능하다.
관념의 컴퍼스
1. 어떤 위치를 설정한다. ○
2. 자기복제한다. ○○ 이것은 선이다.
3. 복제된 ∞를 다시 복제하면 88이 된다. 네 개의 원 사이에서 직각이 만들어진다. ( ┿ )
4. 88을 다시 복제하면 입방체가 만들어진다. ▣
5. ▣를 다시 복제하면 ⊙가 만들어진다.
여기서 5번이 헛갈린다. 알아보자.
논리의 기본이 '무에서 유가 생겨나지 않는다' 즉 외부에서 어떠한 재료도 투입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니 자기복제는 밖으로의 팽창이 아니라 실은 거꾸로 내부로의 자기분할이다.
○ => ◐로 쪼개지는 것이다. 1에서 2기 아니라 (1/2 +1/2)다.
그 쪼개는 칼은 단 한번 휘둘러야 한다.
자기복제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논리는 디지털의 (yes와 no) 열기와 닫기만 있고 2는 없는 것이다.
또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쪼갠다는 것은 시각적으로 묘사한 것이고 논리적으로는 대칭의 설정이다. ○가 ◐로 쪼개진다는 것은 내부에 대칭을 설정한다는 것이다. 즉 서로 마주보는 위치(꼭지점)를 설정한다는 것이지 정말 칼로 탁 쪼개버린다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수학적 추론이니까.
고로 8개의 꼭지점이 하나의 대칭점을 가진 형태가 입방체일 때 이 입방체를 하나의 대칭점을 기준으로 자기복제 곧 분할하여 16개의 꼭지점을 두면 그림이 나온다. 모니터 화면에 그릴 수는 없지만 머릿속에는 그려진다.
┌─┬─┐
│┌┼┐│
├┼┼┼┤
│└┼┘│
└─┴─┘
이런 모양이 둘 겹친 형태가 그려진다. 여기서 중심과 주변이 성립하는 즉 대칭의 중심점이 도형의 내부로 들어가서 원의 꼭지점이 성립하는 것이다.
여기서 더 이상의 자기복제는 불가능하다.
홍야님의 불확정성의 원리
불확정성의 원리는 전혀 말이 안되는 이야기로 그걸 억지로 말이
되도록 끼워 맞추려는 노력은 부질없다. 그게 말이 안된다는 것
은 홍야님 스스로 잘 알지 않는가?
그것은 논리적 주장이 아니라 하나의 언어적 표현이다.
실험을 해보자.
풍선에 물을 가득 집어넣자.
그렇다면 풍선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물이 들어 있다.
근데 거기서 기압을 낮추어 보자.
풍선 속의 공기가 빠져나와 방울을 이룬다.
즉 풍선에는 물과 공기방울이 들어있다.
여기서 물을 핵이라고 하고 공기방울을 전자라고 하자.
전자의 존재는 그 물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기압이
결정한다. 이 경우 물풍선 속의 공기방울은 있는 것도 되고
없는 셈도 된다.
불확정성의 원리란 이런 정도로 비유할수 있다. 그것을 확정할수 없 다는 것은 상대적인 관계를 확정할수 없다는 것일 뿐이다.
왜 확정할수 없는가? 그것은 물풍선과 주변기압을 통일하는 전체적 인 개념을 포착하는 언어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순전히 언어의 문제인 것이다.
즉 극미립자들은 기존의 (있다 없다)하는 언어표현으로 나타낼수
없는 성질을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있다)고 하는 개념 자 체에 문제가 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공간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빡은 (있다)를 다섯가지로 세분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저 있다로 나타낼수 없는 존재가 있다.
소립자들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입자상태를 포기할 뿐이다.
즉 그 어딘가에 다른 형태로 있는 것이다.
다만 입자는 두 개의 힘의 대립상태를 나타내므로
충돌의 방식으로 포착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을 뿐이다.
그것은 기압이 높으면 없어지고 낮으면 나타나는
공기방울 (氣泡)과 같다.
그것은 전혀 신비한 일이 아닌 것으로
자석을 처음 발견한 미개인이 악령이 깃들은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하는 것과 같다. 자석에는 전혀 악령이 없다. 그것을 설명하지 못하니까 그렇게 둘러대는 것이다. 자석에는 인력과 척력이 있는데
인력과 척력이란 개념이 없던 시절에는 그저 악령이 들어있다고
말하는 것이 편한 것이다. 알고 보면 암것도 아이다.
불확정성의 원리가 신비한 것이 아니라 물질은 곧 입자라는
고정관념이 매우 답답한 생각이다. 물질은 전혀 입자가 아니다.
두 개의 힘이 대립한 상황에서 입자의 성질을 나타내기도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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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이야기가 어렵다고들 말한다. 어렵게 써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원래 어려운 이야기를 평이한 언어로 말하는거다.
한번 접해본 적 없는 새로운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낯설은 것은 어렵고 이해되지 않기 마련이다. 또 방대하다. 통신에 몇줄로 써놓았지만 학자들이 논문쓰는 방식으로 쓴다면 책이 1천권은 나와야 한다.
제시하는 주요문제에 대해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 사람은 인류역사상 없다. 이건 내가 최초로 시도하는 새로운 접근법이다.
접근법은 최초로 시도되지만 생각 자체는 석가의 연기법부터 헤겔의 변증법까지 꾸준히 모색되어온 것이다. 또한 수학 물리학 눈리학 미학의 주요개념들과 부지런히 맞닥드린다.
5년전부터 꾸준히 말해오던 이야기들을 이참에 정리해 본다. 그것은 다섯 개의 이론이며 더하여 하나이다.
※. 자기복제 이론 : 물리학영역
※. 구조론 : 수학영역
※. 분류이론 : 미학영역
※ 일반이론 : 논리학영역
※ 집적이론 : 언어학영역
그것은 물리에서 출발하여 언어로 완성되는 거대한 하나의 집짓기이다. 지금까지 별개로 취급되든 물리학 수학 미학 논리학 언어학을 하나로 통일하는 거대한 시스템의 형성이다.
왜 이것들이 필요한가?
집을 짓는데는 물리학이론도 수학이론도 미학이론도 필요하다. 그러나 무지한 목수는 그것을 모른다. 몰라도 집만 잘지었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집이 팔리지 아니하기 시작하면 그는 새로운 건축을 시도해야 한다.
건축설계가는 물리학과 수학과 미학을 모두 알아야 한다. 물리학을 모르면 집이 무너지고 수학을 모르면 비용이 모자라고 미학을 모르면 집이 개집된다.
현대과학의 한계는 수학이 필요하면 셈 잘하는 이에게 묻고 물리학이 필요하면 옆집 학생에게 묻고 하여 위기를 넘겨오던 능한 목수가 늘 짓든 집을 버리고 새로운 형태의 집을 지어야 할 필요를 느꼈을 때 이젠 누구에게 물어보면서 할수없다는 문제에 부닥친 것이다. 그렇다면 별개로 치부되던 물리학 수학 미학 논리학 언어학을 하나로 통일하는 이론을 개발해야 한다.
현대과학은 능한 목수의 집짓기다. 설계도가 필요없이 쌓아올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이제 더 쌓을 데가 없다.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 설계부터 다시 시작하자.
영감은 소년적에 얻어졌다. 인생의 대부분을 포기하고 이론들에 명명하고 체계화하는 작업에 매달려 왔다. 이를테면 위에 [디지털이론]은 조만간 다른 이름으로 바뀌어질 것이다.
설계도없이 집짓기인 현대과학은 끝장나야 한다. 아무러나 혼잡하기인 기공, 마법, 연금술로 되돌아가서도 아니된다. 다시 설계도를 그려야 한다. 분류하기와 명명하기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린네가 생물분류학을 만든 것과 같다. 현대과학은 분류없는 생물학이다. 계통과 체계에 따른 분류, 종속과목강문계가 필요하다. 린네는 일곱단으로 분류하지만 나는 5단으로 분류한다.
린네가 일곱단으로 분류한 것은 유사성과 차별성이 7가지 밖에 없기 때문이고 이는 동물이나 식물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다섯단으로 분류하는 것은 또한 유사성과 차별성이 다섯가지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 그 어떤 것이든 존재하는 것은 모두 5로 분류할수 있다. 그 분류는 정확하다. 분류법을 알고 있으면 생각을 대량생산 할수 있다. 나는 머리가 좋은 자가 아니라 포드시스템으로 기계로 찍어내듯이 생각을 대량생산 하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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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똑똑한 자인가? 분류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 정치든 경제든 뭐든 분류를 잘하는 자가 제일 똑똑한 자이다. 그것은 유사성과 차별성에 따른 질적 양적 구분이다.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하나는 많이 아는 자이고 하나는 깊이 아는 자이다. 후자가 이기게 되어 있다. 많이 아는 자는 남들이 말하기 전에 서둘러 말하는게 좋다. 깊이 아는 자는 남들이 말하길 기다렸다가 최후에 말하는게 좋다.
통신에서도 마찬가지 훅시 남들에게 선수를 빼앗길라 재빨리 논쟁에 끼어드는 자는 많이 아는 자다. 남들에게 말을 시키기만 하고 저는 안하는 자는 깊이 아는 자다.
게임이다. 반드시 그가 이긴다. 왜? 분류법이 있기 때문이다. 비유해 보자.
갑과 을이 싸웠다. 누가 이길까? 갑이 아니면 을이 이긴다.
똑똑한 자는 갑과 을에 대해 남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자다. 조금이라도 많은 정보를 소유한 자가 이기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 그렇다면 승부는 양의 승부인가? 천만에.
지혜있는 자는 침묵한다. 그 침묵 속에 무엇이 들어있나?
분류법은 승부형태의 분류이다. 학교에서 싸웠다면 반장이 이긴다. 집에서 싸우면 자기동네 애가 이긴다. 물에서 싸우면 헤엄 잘하는 아이가 이기고 산에서 싸우면 산골아이가 이긴다. 이것은 갑과 을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주변환경에 대한 정보다.
정보는 곧 에너지다. 에너지불변의 법칙에 의해 어떤 정보든 반드시 노가다가 개입한다. 인간은 누구든 동일한 노가다를 소유한다. 특정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드는 노력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분배되며 그 노력을 어떻게 적절히 분산 배치하여 최적의 방법으로 최고급의 정보를 획득하느냐의 게임인 것이다.
동일한 100의 노가다로 갑과 을에 대한 정보를 취득하는게 유리한가? 아니면 갑과 을이 싸우는 주변환경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 유리한가? 장단점이 있다.
갑과 을은 둘 뿐이므로 노가다 투입은 매우 효율적이다. 100의 노력을 투입하여 100의 정보를 취득한다. 그러나 1회용이다.
환경은 매우 방대하다. 학교, 집, 동네, 산, 물, 도시 다 파악해야 한다. 고로 100으로 모자란다. 대신 반복하여 우려먹을 수 있다.
많이 아는 자는 갑과 을에 대한 정보를 가진 자다. 갑이 을보다 강하다. 고로 갑이 이긴다. 그의 정보는 옳다. 그는 승리자다.
지혜있는 자는 그 에너지를 환경에 대한 정보취득에 투입한다. 고로 그는 갑과 을에 대해 모른다. 그의 정보는 이용가치가 없다.
그러나 반전이 없다면 게임일수 없지. 갑은 강하나 진다. 왜냐하면 을의 동네기 때문이다. 많이 아는 자는 갑이 강하다는 것을 알 뿐 싸움이 을의 동네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모른다.
을의 동네에서 싸운다고 을이 이기는 것은 아니다. 약간 유리할 뿐, 여기서 가중치는?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말하는가이다. 이것은 큰 거짓말하기 시합이다. 반드시 나중에 말하는 자가 이긴다.
왜냐하면 먼저 말한 사람은 자기정보를 타인에게 제공하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정보란 감추어야 돈이 된다. 이기기 위해서는 말해야 하고 그것은 적에 대한 정보누출이다.
지혜있는 자가 이기는 것은 항상 최후에 말하기 때문이며 많이 아는 자의 말을 자기정보로 역이용하기 때문이다.
말하는 것은 5단계 분류법이다. 최후에 말하는 방법이다. 가장 적은 에너지를 투입하고 가장 높은 효율을 끌어내는 방법이다.
많이 아는 자는 먼저 말할 수 밖에 없다. 양이 많으므로 시간이 걸리고 따라서 뒤늦게 말하면 다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고로 그는 언제나 자기정보를 적에게 제공하는 셈이 되며 100전 100패다.
깊이 아는 자는 되도록 늦게 말해야 한다. 양이 적으므로 딱 한번밖에 말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동일한 100의 노가다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 100의 노력을 양의 많음에 투자할 것인가? 질의 깊이에 투자할 것인가? 질에 투자하라. 그것이 정답이다.
깊이 아는 자는 타인의 정보를 이용한다. 아는 것 없으면서 타인이 말하면 그것을 재가공한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그가 가장 많이 아는 듯 보인다.
많이 아는 자는 갑이 을보다 강하므로 갑이 이긴다고 말하는 자다. 깊이 아는 자는 을의 동네이므로 을이 이긴다고 말한다. 그러나 깊이 아는 자가 그렇게 큰소리쳐 말할수 있는 것은 많이 아는 자가 갑이 강하며 그 차이는 51: 49라고 말해버렸기 때문이다. 지혜있는 자는 가만이 듣고 있다가 그 차이가 2정도면 홈링의 잇점으로 역전되겠군 하고 비로소 말하는 것이다. 그는 사실 갑이 을보다 강한지 약한지 모르고 있었다.
지혜 있는 자는 아는 것이 없다. 타인의 정보를 이용하면 되므로 알 필요도 없다. 분류법과 게임의 규칙만 알고 있다.
마음님은 그것을 안다. 그러므로 아제님이 먼저 말하도록 말시켜놓고 가만 듣고 있다가 한방에 꽝. 그러나 나는 그가 안다는 것 까지를 안다. 그러므로 그가 생각한 적 없는 것만 골라 말한다.
이것은 하나의 이론이면서 또 다섯 개의 이론이다. 카오스 이론, 상대성이론 같은 하나의 이론이되며 기본적으로 분류이론이므로 그 어떤 영역이든지 해당이 된다.
카오스이론이나 상대성이론은 확대하여 카오스세계관, 상대성세계관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함정,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수 없다는 원리.
무엇인가? 물리의 특수원리를 일반화할수 있는가의 문제. 그것이 물리학에서 성립한다고 해서 다른 모든 영역에서도 그같아야 한다는 근거는?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상대성이론과 카오스이론에 따라야 하는가? 그렇다면 왜? 만약 이것을 긍정한다면 상대성은 정치 물리 그 모든 것을 통합한 그보다 더 높은 단계로부터 유도되어야 한다.
진화론은 생물학이다. 이것은 인간에다 대어 사회진화론으로 인간도 생존경쟁 하면 안된다. 보편과 특수의 구분이다. 우리가 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보편성의 전제 하에서다. 특수상황에서 성립하는 이론이 함부로 진리일수 없다.
주장하는 바 이론(자기복제 이론, 구조론, 분류이론, 일반이론, 집적이론)은 보편이론이다. 그것은 분류된 이론이 아니라 분류이론이기 때문이다.
이 이론이 어디에 쓸모있는가하면 뭐든 분류구분 하는데 쓰인다.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문화든 음악이든 예술이든 물리든 분류구분으로부터 학문이 시작된다.
그대가 어떤 문제앞에서 고민한다면 그것은 일단 부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답하여야 한다. 사랑이 뭐지? 그대가 분류할수 있다면 (아가페적 사랑이 있고)하면서 아는 체를 할수 있다.
고로 안다는 것은 분류할 줄 안다는 것이다. 주장하는 것은 정치든 경제든 예술이든 그 어떤 영역이든 동일한 절대적인 분류공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분석하고 종합할 줄 안다는 것이다. 나눌줄 알고 합칠 줄 알면 다 아는 것이다. 제시하는 것은 그 나눔의 칼과 합침의 꿰매는 바늘이다. 분류가 되면 이미 다 된 것이다.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안되는 것은 분류가 안되므로 안되는 것이다. 먼저 분류하기에 성공하자. 전략과 전술로 나눌 줄 알고 장기전과 단기전으로, 요소와 효과로, 본질과 현상으로, 내포와 외연으로, 원인과 결과로, 정체와 의속으로, 절대와 상대로, 보편자와 개별자로 분류구분하기에 성공한다면 이미 성공한 것이다.
사람들의 분류하는 방식은 너무나 많고 무질서 하다. 동양은 궁상각치우의 오음으로 분류하고 서양은 도레미파솔라시의 7음으로 분류한다. 어느 것이 옳은가? 어느 쪽이 옳다면 그절대적인 근거는 어디있는가?
세상 뭐든지 분류는 아날로그 분류와 디지털 분류, 시스템구분이 있다. 아날로그 분류는 1부터 무한으로 무한정 그 수를 늘릴수 있다. 이것은 시간의 연속성질을 이용한 것이다.
디지털분류는 공간의 상호대칭성을 이용한 것으로 0과 1, 둘로만 분류할 수 있다.
시스템분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결합한 것으로 5개의 식만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세상 그 어떤 것이든 일단 5로 분류되고 그 하나하나는 다시 둘로 나뉘어지며 거기에 시간성을 대입하면 무한정 늘어난다.
고로 세상 뭐든 무한정 분류할수도 있고 유한정 분류할수도 있다. 우주는 무한하면서도 동시에 유한한 존재이다.
나눌수 있는 것은 다시 결합할 수도 있다. 이것이 집적이론이다. 집적은 공간적 집적이므로 시간성에 기대는 무한개념은 집적에서 제외된다. 고로 집적의 세계는 유한성만이 작용하는 세계이다.
집적은 공간의 상호대칭성에 의존하므로 우선 둘로 나눌수 있고 이것을 다시 집적하여 5로 만들 수 있다. 즉 어떤 하나의 자리에는 최대한 집어넣을 수 있는 것이 5로 유한하다는 것이다.
이 5를 다시 5배증하여 5, 25, 125, 625, 3125로 5회 집적할수 있으므로 시간변수를 제외화고 어떤 한자리에 최대한 집어넣을수 있는 최대숫자는 3125이다. 그 이상은 중복을 피할수 없다. 중복에는 반드시 시간변수가 필요하므로 공간의 기하원리에 의지해서는 3125로 한정된다.
이론은 다섯 개다.
1의 자기복제 이론은 최초에 1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결코 처음부터 2가 나와선 안된다.
2의 구조론은 자기복제를 반복하여 증가한 수가 최초의 1로부터 이탈하지 않고 머무르게 잡아두는데 필요한 이론이다.
3의 분류이론은 자기복제를 1회 할 때마다 끼어드는 시간변수를 구조로부터 분리해내는데 필요한 이론이다.
4의 일반이론은 거기서 게임의 규칙으로서의 지켜져야 할 룰이다.
5의 집적이론은 자기복제에 의해 산술적으로 증가한 세계가 포화상태에 도달하지 않고 지속하여 복제하게끔 최적화하여 요소들을 분산배치하는데 필요한 이론이다.
○●◎◇◆□■△▲▽▼
파사현정(破邪顯正)
거짓을 깨뜨리고 진리를 드러낸다.
세상에는 네가지의 근원적 힘이 존재한다.
[중력, 강력, 약력, 전자기력]들인데 나는 이것이 잘못된 분류이며 여기에 하나나 둘이 더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강력과 약력은 같은 종류의 힘이어서
전기에너지와 자기에너지를 하나의 전자기력으로 보듯이
같은 걸로 분류해야 되는게 아닌가 한다.
풍력, 인력, 척력, 구심력, 압력 많지만 허튼 구분이고
적합한 분류법이 필요하다. 물질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다섯가지 양상을 가지므로 이에 따라 다섯가지의 에너지가 있다.
분류기준은 집적정도이다.
집적은 곧 압축이다. 하나의 공간에 많이 들어간 정도를 말한다.
우선 량/에서 자연의 물리력이 있다.
미는 힘, 타격의 힘, 마찰력, 폭발력, 압력 들이다.
이들 에너지의 특징은 직접 이용할수 있되 저장, 보관, 운반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노출되어 있으며 가만히 두면 흩어 없어져 버린다.
우리는 이 에너지들의 운동방향을 전환시켜 이용하거나 차단 할수 있을 뿐이다. 이들은 가장 낮은 단계로 존재하므로 하나의 범주로 통일하여 [제 1의 에너지]라고 부를 수 있다.
다음이 운동/에서 열, 연소, 빛 등 화학에너지이다. 석유, 석탄의 연소, 각종 화학반응, 빛, 열, 들은 어딘가에 가두어져 있다가 물리반응에 의하여 촉발된다. 문이 열리면 쏟아져 나와 제 1의 에너지로 변한다.
우리는 이를 차단, 혹은 촉발하여 에너지 형태를 변경시키므로서 이용, 저장, 보관, 운반할수 있다. 이를 하나의 범주로 묶어 [제 2의 에너지]라 부를 수 있다.
다음 힘/에서 전기와 자석의 전자기력이다. 전자기력은 화학에너지보다 더 안정된 형태로 존재하며 가두어져 있고 문을 열어 이를 꺼집어내었을 때 열, 빛, 등 화학에너지로 변한다.
우리는 전자기기를 이용하여 전자기력을 1차 제 2에너지로 변환시키고 재차 이것을 제 1에너지로 변환시켜 이용한다. 전자기력을 그대로 이용할 수는 없다.
전기곤로에 의해 코일이 달구어져 열을 내는 화학반응은 제 2에너지로의 변환이며 열에 의해 음식이 조리되는 것은 제 1에너지로의 변환이다. 전자기력을 우리는 제 3의 에너지라 부를 수 있다.
다음이 입자/에서 강력과 약력 등 소립자 사이에 존재하는 핵력이다. 유도전류의 방법으로 강력과 약력들에서 전자기력을 유도해낼수 있다.
에너지는 본래 소립자들 사이에 존재하는데 그 일부가 튀어나가 전기나 열 또는 물리효과로 변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핵발전이다. 그러나 핵발전은 핵력을 그대로 이용하는게 아니라 더 낮은 형태인 제 3의 에너지로 또 제 2의 에너지로 변화시켜서 최종 제 1에너지 상태에서 이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힘을 [제 4의 에너지]라 부를 수 있다.
마지막 질/에서 [제 5의 에너지]는 공간에너지이다. 이는 아직 규명되지 않았지만 만약 규명되면 1차 제 4의 에너지인 핵력으로 변하고 다시 이것을 전기로, 열로, 물리력으로 변화시켜 사용하는 것이지 제 5의 에너지를 곧 이용할 수는 없다.
※ ※ ※
에너지를 [전자기력, 강력, 약력, 중력]의 넷으로 구분하는 것은 모호하며 적합하지 않은 방법이다.
개념의 혼란이 있을수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물질의 다섯가지 전개양상 [질, 입자, 힘, 운동, 량]에서 세 번째인 [힘] 만이 에너지이며 따라서 전자기력만 순수한 에너지이다.
제 1에너지는 곧 량이며, 제 2에너지는 운동이고, 제 3에너지는 힘(에너지)이며 제 4에너지는 입자이고 제 5에너지는 질이다. 우리가 운동에너지라고 말할 때 실은 운동에서 량으로의 변환이다. 즉 제 2에너지가 제 1에너지로 변환하는 것을 우리는 운동에너지라 말하는 것이다. 이를 [제 2 에너지변환]이라 이름할수 있다.
[여기서 나는 에너지와 에너지변환을 구분한다.]
에너지가 물질존재의 집적도에 따른 구조적 불안정성을 의미한다면 에너지변환은 특정의 집적도를 가진 에너지상태에서 더 낮은(안정된, 엔트로피가 높은) 에너지 상태로 변화하는 것이다.
위치에너지는 [제 4 에너지 변환]이다. 내연기관이 폭발하여 피스톤을 밀어내는 것은 [제 3 에너지변환]으로서 일종의 전기반응으로 3에너지가 2에너지로 변환하는 것이며 바퀴가 지면을 밀어내는 것은 2에너지가 1에너지로 변환하는 것이다.
우리가 운동에너지라고 말하는 것은 엄밀한 과학용어가 못된다. [제 2에너지변환]이라고 해야 학명이 된다.
에너지는 최종적으로 물리반응을 보여야 비로소 에너지이며 화학반응(예를 들면 연소燃燒)은 그 자체로 에너지가 아니며 그 화학반응의 결과 생성된 열이나 빛이 재차 물리적 효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에너지이다.
전기(전기에너지)가 곤로의 코일을 가열하고(제3에너지 변환), 그 열이 전도되어 냄비의 고기를 익히고(제2에너지 변환), 고기의 세포벽이 파괴되어야(제1에너지변환) 에너지인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항상 동시에 일어나므로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에너지라고 착각하지만 실은 한가지(물리효과), 두가지(운동에너지), 세가지(전기에너지), 네가지(핵에너지), 다섯가지(공간에너지) 에너지 변환이 동시에 그러면서 순서대로 일어난다.
※ ※ ※
압력, 폭발력, 팽창력, 마찰력 들은 [제 1 에너지변환]에 해당한다. 제 1에너지인 물리력이 물리효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모두 미는 힘이며 단 하나의 방향으로만 일한다. 고로 방향성 자체가 존재하지 아니한다.
인력, 척력, 원심력, 구심력 등은 [제 2 에너지 변환]에 해당한다. 제 2에너지인 화학에너지가 제 1에너지인 물리에너지로 변하는 것이다. 제 2에너지 변환은 열의 전도(고온-> 저온) 빛의 복사(어둠-> 밝음) 처럼 일정한 방향성을 두고 일방통행한다.
○ 제 1 에너지(물리력) ▶ 제 1 에너지 변환(물리효과)
→ 에너지의 소모(무방향)
○ 제 2 에너지(화학에너지) ▶ 제 2 에너지 변환(운동에너지) → 에너지작용(일방향)
○ 제 3 에너지(전기에너지) ▶ 제 3 에너지 변환(일반에너지)
→ 에너지 발생(쌍방향의 장)
○ 제 4 에너지(핵에너지) ▶ 제 4 에너지 변환(위치에너지)
→ 에너지 보존
○ 제 5 에너지(중력에너지) ▶ 제 5 에너지 변환(공간에너지)
→에너지원
풀이하면 제2에너지인 화학에너지(열, 빛, 이온)가 제1에너지(압력, 폭발력)로 변환할 때 그 변화하는 성질을 우리는 운동에너지라 부르는 것이다.
자석이나 전기의 힘은 제3에너지이다. 우리는 전기나 자석의 힘을 곧 이용할수 있는 것으로 믿지만 모든 전자기력은 그 동력의 발생과정에서 반드시 분자단위의 구조변화를 유발한다.
건전지에서는 가시적인 화학적변화(이온의 이동)를 관찰할수 있다. 구동모터의 회전에서 전하의 건너뜀 자체가 화학에너지이다. 열의 전도, 전기(이온)의 전도, 빛의 복사가 다 화학에너지이다.
태양 내부에서 진행되는 수소핵융합은 제4에너지인 핵에너지이며 핵에너지가 빛과 열을 내는 것은 전기에너지다. 즉 행융합이 바로 빛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전기반응의 과정을 거쳐 빛으로 변하여 지구로 복사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의 의미는 지향성의 파악이다.
○ 제1에너지인 물리력은 항상 일방적이다. 미는 힘은 있되 당기는 힘은 없다. 1에너지에서 모든 힘은 압력의 형태로 존재한다.
○ 2에너지에서 모든 힘은 일정한 방향성이 존재한다. 즉 극성을 가지는 것이다. 빛에도 이온에도 자기에도 플러스와 마이너스, 구심과 원심, 인력과 척력의 방향성이 존재한다.
○ 3에너지에서 모든 힘은 인력과 척력의 양방향을 동시에 가진다. 즉 자기장, 중력장의 장을 가지는 것이다. 2에너지의 운동에너지는 인력이든 원심력이든 장이 없다. 장은 대립된 방향의 두가지 힘을 동시에 가지는 것이다.
○ 4에너지에서 힘은 고유한 질량을 가진다. 1,2,3에너지는 단순한 전달경로에 불과하므로 질량의 절대적 증가, 감소가 없다. 4에너지에서 에너지작용은 실질적인 증가, 감소를 나타낸다.
물질존재는 집적도에 따른 고유한 질서를 가지며 그 질서의 변화가 시, 공간의 변화일 때 5에너지이며 이는 곧 태초의 천지창조, 빅뱅이다.
변화가 소립자 단위에서 일어날 때 4에너지이며, 이온 단위에서 일어날 때 3에너지이며, 분자단위에서 일어날 때 2에너지이며, 물체단위에서 일어날 때 1에너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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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나비의 날개짓이 우주를 흔들다.
본문작
♠
홍노사 => 파파님은 <온도는 질, 열량은 양> 이러시는데,
정확하게 말한다면 온도는 <양의 척도> 아니겠슴둥?
빠빠 => 질이란 약분하고 간략하고 압축하여 최소화 했을 때
남는 것을 말한다.
[100,000,000의 힘으로 10,000,000개를 들수 있다. ]
압축 => [10의 힘으로 1개를 둘수있다]
온도가 질인 것이 아니라 [온도+압력+질량+밀도.....]의 구분되는
성질이 질이다. 온도수치는 [10+10+10=30]이므로 10+10+10을 30으로
줄일수 있지만 (온도+압력+질량......)에서 하나를 줄일수는 없다.
질 : 凹凸□■△▽
량 : 凹凹凹凹凹凹凹凹凹凹
온도의 질 : 온도는 그냥 온도인 것이 아니라 압력, 밀도, 위치,
질량 들과의 상호관계에 따라 다양한 성질을 가진다.
온도의 양 : 1000도면 1000도 100000도면 100000도.
홍노사 => <모든 존재는 하나 - 에너지>임. 물리학은
에너지를 연구하는 학문임.
빠빠 => 홍: 모든 사고는 교통사고임.
빠: 저 자동차를 전봇대에 꼴박아부렀는디 운전자과실인가요?
홍: 음 그것도 교통사고임.
빠: 저기 브레이크가 파열인데여. 정비불량일까요?
홍: 음 그것도 교통사고임.
빠: 저기 도로파손 때문에 차를 꼴박았는데 책임이 뉘한테 있나요.?
홍: 음 그것도 역시 교통사고야. 모든 사고는 교통사고지. 흐흐흐흐.
교통사고가 원인이야. 교통사고가 없어봐라. 아무 탈 없지.
홍홍아이씨...자동차와 운전사와 도로는 교통사고보다 먼저
있었고 교통사고는 나중 결과죠. 마찬가지로 우주존재의
기본구성은 먼저 있고 그것이 합성되어 에너지가 되재요.
홍노사 : <양은 질을 낳는다> -->우리나라 재벌들, 정치꾼들한테
물어 보시면 알 수 있음.
빠빠 : 그거 믿고 양적 성장만 치중하다가 IMF?
민주주의는 질, 경제성장은 양. 민주주의가 경제발전을 낳음
========================================================
뭉치
질문 1>
갑 -- [판결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을 -- [한달 뒤에 오겠다]
사건 갑에서는 판결이라는 사건을 기준으로 앞 뒤를 판단한다.
사건진행의 앞부분.
사건 을에서는 사건이 없으므로 말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앞뒤를 판단한다.
사람 자신이 일을 챙기는 우선순위의 뒷부분.
즉 사건 갑에서는 객관적 판단으로 앞을
사건 을에서는 주관적 판단으로 뒤를 말하는 것이다.
객관이 필요한 연설회에선
[일년 앞을 내다봐야 합니다. 여러분]
주관이 필요한 일기장에는 [일년 뒤엔 주가가 폭락하겠군]
모든 열차가 서울을 상행으로 하는 것은 객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역마다 상행과 하행이 달라버리면 승객들은 별로 불편한거 모르는데
역무원들 자기들끼리 연락할때는 엄청 헛갈리잖아.
대부분 논의에서 헛갈리는 것은 이렇듯 관점을 분명히 안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마누라만 50이 되어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동쪽으로 여행해서 지구를 한바퀴 돌면 하루를 덕보는데
그런식으로 365바퀴를 돌고와서 에헴 내 한 살 벌었지 용용.
나는 너들보다 1년 더 젊었다고 헤헤. 이제 3650바퀴만 돌면
10년을 벌어 끼끼.
3만6천5백바퀴를 돌아서 100년을 더 젊어져버릴까? <- 뭉치바브
♠질문2> 무슨 말인지 홍갈리고 콩갈려서 감이 잘 안오는데
내 이바구만 정리하면
[양적팽창이 질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이미 질이 다 갖추어진 상태에서
양의 하나가 모자랄 때 ....]
임계가 되기 위해 압력 밀도 등이 다 갖추어지고 온도만 미달할 때
온도의 변화(양의 변화)가 임계에 이르러서 폭발.
여기서 패러독스..온도는 어디서 오죠? 그것은 오는 것이 아니라 빌려오는 것.
어디서 빌리지?
[사건 갑] 온도 밀도 압력 등 임계조건 중에서 온도만 미달.
[사건 을] 온도 밀도 압력 등 임계조건에서 온도가 남아돌아.
이때 사건 갑과 사건 을을 하나의 닫힌 계로 설정하면
사건을이 사건 갑에게 온도를 빌려주고 임계도달 화학반응시작 꽈꽝.
여기서 닫힌 계는 어디에?
사건 을이 이미 개입해 있으므로 양자를 통일한 전체에서 이미 임계에
도달해 있은 것이다.
즉 온도가 증가했기 때문에 폭발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온도를
다르게 분류구분 한 것이다. 이는 속임수. 이중기준의 오류.
두 대의 자동차가 있다. 한 대는 뒷바퀴 하나가 모자라서 못달리고
한 대는 앞바퀴가 없어서 못달린다.
이때 저쪽에서 뒷바퀴 하나를 빌려오면 달린다.
이걸 보구 홍야같은 사람은 [으음 바퀴의 증가가 자동차를 달리게 했군여.]
자동차의 바퀴는 이미 갖추어 있었는데 배열을 잘못한 것이다.
그 적절한 배열이 달리게 한 것이다.
♠
질문3> [에너지가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전환이 되어도 양적으론 변화가
없다는 뜻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여?]
빠빠 => 엄밀한 의미에서 에너지의 형태전환은 없다.
에너지는 가만 있는데 가만있는 바퀴를 갑자동차의 뒷바퀴로
분류하는가 을자동차의 앞바퀴로 분류하는가의 차이일 뿐.
더 엄밀하게 말하면 에너지의 드나듦도 없다.
에너지는 가만 있는데 인간들이 금을 여기저기 긋는 것이다.
바둑판의 돌이 말의 머리가 되고 몸이 되고 꽁지가 되는 것은
정해져 있는 것이아니라 그때그때 정해지는 것이다.
에너지의 총량만 안변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는 논바닥 같아서 가만 있는데 인간들이 논둑을 여기저기로
옮겨놓는다.
태양이 에너지를 내뿜으면 태양이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눈에 보이지 않는 마이너스우주에서 그만큼 보충되는 것이다.
즉 태양광이 지구로 오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서 교환되는 것이다.
♠질문4> 모든 논의는 닫힌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 따라 정해진다.
바둑판을 에너지라 치자. 흑백의 돌이 바둑판 전체를 메우고 있는데
여기에 흑돌하나를 놓으면 흑이 백을 다잡아먹고 백돌 하나를 놓으면
백이 흑을 다잡아먹는다.
이 상태가 엔트로피 0인 상태이다.
흑이든 백이든 상대를 잡으려면 상대보다 돌이 하나더 많아야 한다.
백이 150개이면 흑은 151개라야 백을 잡을수 있다.
현재 백돌 150, 흑돌 150
이때 흑돌 한 개로 백을 다 잡았다 치자.
백을 잡은 흑의 에너지는 단 한 개의 흑돌인 1인가 아니면 151인가?
움직인 것은 입자 하나지만 작용한 것은 공간의 151이다.
그런데 이론물리학에선 그 한 개를 반상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찾는다. 즉 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자리바꿈.
잘못놓은 돌을 한수물리고 위치를 슬쩍바꾸면 에너지 없이도
150의 백돌을 잡는다.
에너지는 필요없다.
양이 질을 이긴다는 논의 : 바둑돌만 많으면 이긴다.
질이 양을 이긴다는 논의 : 바둑을 잘두면 이긴다.
아무리 바둑알이 많아도 반상은 361로 백이 하나 둘 때 흑이 하나 두므로
에너지(바둑돌)는 남아돌아 소용이 없어.
♠질문5> 심부름꾼 없이 직접 전달하면 되잔아여..
그 심부름꾼이 딴 맘을 먹으면 어케되나여?
정보자체에 개입은 안한다지만..몬가 달라지지 않을까여?
달라진다면 왜 달라질까여?
빠빠 => 달라진건 게임의 규칙. 닫힌 계다.
저자동차에서 바퀴 하나를 빌려오는 것(에너지의 심부름)을
규칙위반으로 보는가 아닌가 하는 것.
에너지의 역할은 시간단축이다. 임계조건이 다 갖추어져 있는데
그들의 배열상태가 나빠서 반응이 없다면
에너지가 충격을 가하여 凹凸이 우연히 배열될 확률을 높이는 것.
논리로 따지면 이건 규칙위반이므로 인정안한다.
에너지가 변화를 유발한 것은 아니고 언제든지 일어날 변화를
앞당긴 것이다.
시동이 이미 걸린 차가 있다. 그 차가 안가는 것은 클러치를 밟지 않은
탓인데 이때 밖에서 차를 향해 돌을 마구 던지면 (에너지의 심부름)
우연히 돌 하나가 클러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