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장
{시점에서 현실인식}
이데올로기로서의 자본주의와 사회법칙으로서의 자본주의
뿌리를 캤다 싶으면 상투잡은 것이고 앞차를 탔다 싶으면 막차를 탄 것이다
참된 이론 - 성공사례발표와 이론은 구분되어야 한다
산업경제와 민족성 - 적응하지 말고 주도하라
전략적 사고 - 입에 맞는 떡은 먹지 않는다
제 13 장
{시점에서 현실인식}
이데올로기로서의 자본주의와 사회법칙으로서의 자본주의
문명은 그 자체로서 '생성, 확산, 조정, 활동, 이탈'의 거대한 사이클을 가지고 있어서 그 내부에서 요동치며 무수한 작은 사이클들을 만들어 냅니다.
자본주의는 그 무수한 파도들에서 지금 우리가 맞닥들이는 하나의 작은 파랑에 지나지 아니합니다. 그 파랑은 사회에서 강조점의 변화, 주도권의 변화로 나타나며 소재, 기능, 성능, 효용, 미감의 순서대로 강조점과 주도권을 바꾸어 갑니다.
이 변화에의 적응장애에 의해 공산주의라는 허구가 만들어졌으며 그 허구를 설명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왜곡되어 사회현상에서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고 변질된 이데올로기로서의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와의 조작된 대립을 통해 오히려 그 자연스런 변화를 부정하고 반대하는 수단으로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현실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수만년의 인류문명사에서 산업화는 처음 등장하였으며 겨우 이백년의 역사를 가집니다. 그 산업사회의 기능적 특성이 인류문명의 생성, 확산, 조정, 활동, 이탈의 사이클에서 21세기 진입 직전의 지금 이시점에서 활동기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산업화가 낳은 활동기적 특성이 우리로 하여금 효능요인에 강조점을 두게 하였으며 자본주의란 '소재, 기능, 성능, 효능, 미감'의 강조점들에서 특별히 효능단계에 강조점을 두게 된 산업화단계의 한 기능적 특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체제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산업화과정에서 하나의 강조점, 곧 일시적 주요관심사항에 불과합니다.
실재하는 것은 사회현상이지 관념이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특정의 정치적 체제가 아니라 문명의 자연스런 변화이어야 하며 우리는 그 변화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권력집단에 의해 이데올로기로 왜곡된 자본주의는 오히려 변화를 반대하는 수단으로 되기도 하며 공산주의와의 허구적 대결을 통해 그 속임수를 정당화 할 때도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기본적으로 허구이므로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자본주의도 허구일 수 밖에 없습니다. 허구에 경도된 이들은 그 허구적 대결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사회현상에 불과한 자본주의를 이데올로기로 승격시켜 허구화시켜 나가면서 그 허구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으로 자기생명력을 유지합니다.
시류는 변화하며 변화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자본주의는 자연스런 변화여야 합니다. 그러나 기득권력은 오히려 그 변화를 반대하면서 거기에 자본주의의 이름을 붙여 정당화하려 하고 거기에 공산주의와의 대결관계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즉 공산주의가 억지에 의한 변화라면 자본주의는 자연스런 변화여야 하는데 기득권력은 사회주의는 변화의 찬성이고 자본주의는 변화의 반대라고 조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자본주의는 이미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과학이 아니라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서의 종교적 도그마로 변질된 자본주의인 것입니다.
관념을 배제하고 정치목적을 배제하고 객관적 과학의 입장에 서서 문명의 자연스런 흐름에서 주도권의 변화를 읽어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문명은 그 내적 속성에 기초하여 자연스럽게 변화해 가며 우리는 거기서 두드러진 특성들을 찾아낼 수 있고 거기에 자본주의라는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 크게 어색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정치에 있어서는 인위적 목적이 개입하여 충분히 왜곡됩니다. 정치에서 자본주의라고 말하면 그것은 '문명의 흐름에서 주도권의 변화'가 아니라 기득권력이 만들어 놓고 강요하는 일종의 교리 비슷하며 주술 비슷한 것입니다.
뿌리를 캤다 싶으면 상투잡았고 앞차를 탔다 싶으면 막차를 탔다
한 대의 자동차가 움직여 간다면 먼저 운전자가 시동을 걸어야 하고 다음 연료가 분사되고 실린더에서 폭발 행정이 일어나야 하며 다음 피스톤이 움직이고 동력이 전달되며 마지막으로 바퀴가 구릅니다. 이 순서는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움직임들은 거의 동시에 시작됩니다.
피스톤이 다 뛰고 멈춘 이후에야 비로소 바퀴가 구르는 것이 아니라 피스톤과 바퀴는 동시에 움직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능과 성능과 효능의 순환도 하나씩 차례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러면서도 일정한 순서가 있으며 사회에 반영될 때에는 인간에게 인지되는 측면에서 강조점이 다르고 주도권이 다르기에 우리는 인식에서 단계적으로 인식합니다.
즉 문명의 발전은 한 시대가 대마디처럼 똑 부러지게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다음 시대가 오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공존하지만 인간의 인식이 그 받아들이는 측면에서 재차 걸러내므로 그 중 가장 주도적인 측면을 강조하게 되어 거기서 순서가 차별화되는 것입니다.
즉 상품에 있어서 공급자가 기능경쟁단계에서는 기능만 고려하고 성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기능에 더 우선적으로 중점을 둘 뿐인 것입니다. 문명도 이와 같아서 자본주의는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고대사회에서부터 있었으나 부각되지 않았을 뿐인 것입니다.
이를테면 이집트 문명이나 마야문명을 하나의 개체로 격리시켜 놓고 고찰하면 거기서 또한 자본주의적 특성이 부각되는 시기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일반화되어 무슨 가족이나 사회단체나 오락게임이나 그 어떤 것이든 모든 변화하고 성장하며 소멸해 가는 것에는 자본주의적 특성이 부각되는 한 시기가 순환구조의 성장사이클로 있는 것입니다.
모든 변화하는 것에는 이러한 흐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시류에 순응해서도 아니 되고 적응해서도 아니 됩니다. 더욱 도피 일탈해서도 아니 됩니다. 시류를 간파하고 장악하고 조정하고 주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류를 한 걸음 앞서야 하고 때로 시류를 거스르는 모험을 해야만 합니다.
지금 사회에서 한참 강조되고 있는 재치위주의 반짝 아이디어에 가담하는 것이 시류에 휩쓸리는 일이라면 그 태생적 한계를 직시하고 보다 근본적이며 진정한 창의에 도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인식은 언제나 사실에 한 단계 뒤지는 법입니다. 존재론이 먼저고 인식론이 그 존재를 거울에 비추듯 비추어 투사하기 때문입니다. 존재가 시점단위로 스스로를 인간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식에서 한 단계 머물러 버리기 때문입니다.
능한 재사가 시류를 잘 간파했다 싶으면 실은 시류에 한 걸음 뒤처진 것입니다. 시류를 잘 탄 것이 아니라 실은 시류에 휩쓸려버린 격이 됩니다. 가장 앞섰다 싶을 때 실은 상투잡은 격이며 앞차를 탔다고 믿으면 실은 막차를 탄 것입니다.
참된 이론 - 성공사례발표와 이론은 구분되어야 한다
한때 신바람이니 신사고니 하는 이론의 캠페인이 있었습니다. 그 차원에서 어떠한 것을 생각해 내더라도 기존의 것에 대한 차별화를 시도하는 아이디어 이상의 의미가 없습니다. 더욱 국민감정, 민족정서를 자극하는 신토불이류 캠페인이어서는 아니 됩니다. 진정한 이론은 존재론적 전개에 기초한 일반이론으로부터 유도되어져 나와야 합니다.
X이론이니 Y이론이니 하는 외국의 이론들도 한 국가의 경제발전단계에서 나타나는 주도적 특성을 분석 보고한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이론이 아니라 성공사례발표인 것입니다. 그 성공은 과거의 성공이지 미래의 성공이 아닙니다. 더욱이 그들 국가의 경제발전단계에 맞는 성공사례이지 우리나라 경제발전단계에 맞는 성공사례는 아닙니다.
경제발전단계는 변화해 가며 그 변화에 따라 전략과 전술도 지속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한 건에 성공했다 해서 거기에 이론의 이름을 붙여 낡은 방법을 고수하면 곧 뒤처지게 될 뿐입니다.
미국은 앞서가므로 소재요인과 기능요인에서 특징이 두드러지고 일본은 뒤처졌으므로 성능요인에 전념하게 되며 한국은 아예 늦었으므로 효능요인으로 승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 동남아 등 후발주자들이 쫓아오니 뒷마무리 캠페인, 소량다품종 캠페인 등 허황된 일과성 캠페인이 난무하다가 반도체와 자동차가 살아나니까 그런 캠페인이 쑥 들어갔습니다. 다시 불경기가 찾아오니까 또 무슨 황당한 캠페인이 바가지이론하고 나타나려 합니다.
산업경제와 민족성 - 적응하지 말고 주도하라
전략과 전술은 차별화 되어야 합니다. 반도체 등 시장이 성숙되지 않은 개척단계의 상품과 자동차 등 시장이 한창 과열되고 있는 경쟁단계의 상품이 동일한 방식으로 접근되어져서는 아니 됩니다. 소재나 기능단계에서 전략의 선택이 필요하고 완구나 의류 등 잡제품에서는 가격과 디자인 중심의 전술승부가 필요합니다.
불쑥불쑥 내밀어지는 캠페인들은 한결같이 산업경제의 보편성을 부인하고 민족정서의 특수성을 강조합니다.
미국인은 개척정신이 강하므로 모험적 승부가 필요한 소재나 기능요인에 주목해야 하고 일본인은 축소지향인데다 성질이 꼼꼼하므로 기술위주의 성능요인에 주목해야 하고 한국인은 성질이 급하므로 덜렁덜렁 신바람나게 가격이나 깍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산업경제는 민족성하고는 직접적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어느나라도 제 단계들에서 어느 한곳에만 치중하다가는 곧 역효과의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경기는 순환하고 변동하므로 팔릴 때 팔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앞서서 앞을 내다보고 미래의 상품을 찾아내고 전략과 전술의 다단계 승부를 동시에 벌여야 합니다.
원대한 국가의 전략은 소재요인에서 찾아야 하고 대기업의 큰 승부는 기능요인에서 벌여야 하며 중소기업의 작은 승부는 성능과 가격, 디자인에서 벌여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민족성과 기후 풍토에 가장 알맞는 산업을 찾는다는 식의 적응하기 관점은 뒤처지기 딱 좋은 우리식 사회주의의 김일성식 사고방식입니다.
전략적 사고 - 입에 맞는 떡은 먹지 않는다
중국인들은 한때 동양인들은 몸집이 작으므로 힘들지 않는 탁구나 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탁구에만 전념했습니다. 탁구는 몸집이 작은 동양인의 체형에 맞는 운동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실패하는 것입니다. 중국이 탁구에 전념하지 않았더라면 올림픽에서 더 큰 성과를 거두었을 것입니다.
중국인이 못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육상이나 수영이나 체조나 격투기나 구기운동이나 무엇이든 다 잘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것이야말로 가장 큰 해독이 됩니다.
여성은 여성에게 맞는 직업을 가져야 하고 키가 작은 사람은 키가 작은 사람에게 맞는 직업을 가져야 하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가는 모든 사람이 실업자가 됩니다. 자신에게 맞는 일이란 없습니다. 여성도 남성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수 있으며 키 작은 사람도 도구를 이용한다던가 수단을 개발하면 또한 못할 일이 없습니다.
적응하려는 태도야말로 스스로의 가능성을 한정시키고 시류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여 낙오하게 합니다. 결코 환경에 적응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적응은 곧 낙오입니다. 결코 시류에 편승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편승은 곧 뒤처지기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식은 시점단위로 존재를 반영하지 못하고 항상 의식 안에서 한바퀴 굴리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앞서가야 하며 환경을 장악하고 개조해야 합니다. 한국인에게 딱 맞는 방식은 없으며 한국인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시장은 끝없이 스스로를 해체해 가면서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꼭 맞는 일이 가장 나쁜 일입니다.
도전을 기피하고 주저앉게 합니다. 입에 꼭 맞는 음식은 먹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입맛을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입에 맞는 음식을 찾을 것이 아니라 입맛을 개발해야 합니다. 이것이 전략적 사고입니다.
민족국가의 특수성을 강조하다가 실패합니다. 한국인의 특성에 꼭 맞는 방식을 찾으려 해서는 안됩니다. 적응하려는 태도야말로 스스로 자기 발목을 묶는 비참한 잔꾀입니다. 진정한 이론은 인류문명의 보편성과 산업경제의 일반성에 기초해야 합니다. 원대한 전략과 단기적 전술이 공존되어야 합니다.
개인의 삶은 짧고 국가와 민족의 삶은 깁니다. 적응은 개인의 생존술이 될지언정 국가나 민족의 생존술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 변화하고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지만 국가나 민족은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점에서 현실인식}
이데올로기로서의 자본주의와 사회법칙으로서의 자본주의
뿌리를 캤다 싶으면 상투잡은 것이고 앞차를 탔다 싶으면 막차를 탄 것이다
참된 이론 - 성공사례발표와 이론은 구분되어야 한다
산업경제와 민족성 - 적응하지 말고 주도하라
전략적 사고 - 입에 맞는 떡은 먹지 않는다
제 13 장
{시점에서 현실인식}
이데올로기로서의 자본주의와 사회법칙으로서의 자본주의
문명은 그 자체로서 '생성, 확산, 조정, 활동, 이탈'의 거대한 사이클을 가지고 있어서 그 내부에서 요동치며 무수한 작은 사이클들을 만들어 냅니다.
자본주의는 그 무수한 파도들에서 지금 우리가 맞닥들이는 하나의 작은 파랑에 지나지 아니합니다. 그 파랑은 사회에서 강조점의 변화, 주도권의 변화로 나타나며 소재, 기능, 성능, 효용, 미감의 순서대로 강조점과 주도권을 바꾸어 갑니다.
이 변화에의 적응장애에 의해 공산주의라는 허구가 만들어졌으며 그 허구를 설명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왜곡되어 사회현상에서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고 변질된 이데올로기로서의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와의 조작된 대립을 통해 오히려 그 자연스런 변화를 부정하고 반대하는 수단으로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현실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수만년의 인류문명사에서 산업화는 처음 등장하였으며 겨우 이백년의 역사를 가집니다. 그 산업사회의 기능적 특성이 인류문명의 생성, 확산, 조정, 활동, 이탈의 사이클에서 21세기 진입 직전의 지금 이시점에서 활동기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산업화가 낳은 활동기적 특성이 우리로 하여금 효능요인에 강조점을 두게 하였으며 자본주의란 '소재, 기능, 성능, 효능, 미감'의 강조점들에서 특별히 효능단계에 강조점을 두게 된 산업화단계의 한 기능적 특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체제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산업화과정에서 하나의 강조점, 곧 일시적 주요관심사항에 불과합니다.
실재하는 것은 사회현상이지 관념이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특정의 정치적 체제가 아니라 문명의 자연스런 변화이어야 하며 우리는 그 변화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권력집단에 의해 이데올로기로 왜곡된 자본주의는 오히려 변화를 반대하는 수단으로 되기도 하며 공산주의와의 허구적 대결을 통해 그 속임수를 정당화 할 때도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기본적으로 허구이므로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자본주의도 허구일 수 밖에 없습니다. 허구에 경도된 이들은 그 허구적 대결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사회현상에 불과한 자본주의를 이데올로기로 승격시켜 허구화시켜 나가면서 그 허구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으로 자기생명력을 유지합니다.
시류는 변화하며 변화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자본주의는 자연스런 변화여야 합니다. 그러나 기득권력은 오히려 그 변화를 반대하면서 거기에 자본주의의 이름을 붙여 정당화하려 하고 거기에 공산주의와의 대결관계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즉 공산주의가 억지에 의한 변화라면 자본주의는 자연스런 변화여야 하는데 기득권력은 사회주의는 변화의 찬성이고 자본주의는 변화의 반대라고 조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자본주의는 이미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과학이 아니라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서의 종교적 도그마로 변질된 자본주의인 것입니다.
관념을 배제하고 정치목적을 배제하고 객관적 과학의 입장에 서서 문명의 자연스런 흐름에서 주도권의 변화를 읽어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문명은 그 내적 속성에 기초하여 자연스럽게 변화해 가며 우리는 거기서 두드러진 특성들을 찾아낼 수 있고 거기에 자본주의라는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 크게 어색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정치에 있어서는 인위적 목적이 개입하여 충분히 왜곡됩니다. 정치에서 자본주의라고 말하면 그것은 '문명의 흐름에서 주도권의 변화'가 아니라 기득권력이 만들어 놓고 강요하는 일종의 교리 비슷하며 주술 비슷한 것입니다.
뿌리를 캤다 싶으면 상투잡았고 앞차를 탔다 싶으면 막차를 탔다
한 대의 자동차가 움직여 간다면 먼저 운전자가 시동을 걸어야 하고 다음 연료가 분사되고 실린더에서 폭발 행정이 일어나야 하며 다음 피스톤이 움직이고 동력이 전달되며 마지막으로 바퀴가 구릅니다. 이 순서는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움직임들은 거의 동시에 시작됩니다.
피스톤이 다 뛰고 멈춘 이후에야 비로소 바퀴가 구르는 것이 아니라 피스톤과 바퀴는 동시에 움직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능과 성능과 효능의 순환도 하나씩 차례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러면서도 일정한 순서가 있으며 사회에 반영될 때에는 인간에게 인지되는 측면에서 강조점이 다르고 주도권이 다르기에 우리는 인식에서 단계적으로 인식합니다.
즉 문명의 발전은 한 시대가 대마디처럼 똑 부러지게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다음 시대가 오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공존하지만 인간의 인식이 그 받아들이는 측면에서 재차 걸러내므로 그 중 가장 주도적인 측면을 강조하게 되어 거기서 순서가 차별화되는 것입니다.
즉 상품에 있어서 공급자가 기능경쟁단계에서는 기능만 고려하고 성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기능에 더 우선적으로 중점을 둘 뿐인 것입니다. 문명도 이와 같아서 자본주의는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고대사회에서부터 있었으나 부각되지 않았을 뿐인 것입니다.
이를테면 이집트 문명이나 마야문명을 하나의 개체로 격리시켜 놓고 고찰하면 거기서 또한 자본주의적 특성이 부각되는 시기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일반화되어 무슨 가족이나 사회단체나 오락게임이나 그 어떤 것이든 모든 변화하고 성장하며 소멸해 가는 것에는 자본주의적 특성이 부각되는 한 시기가 순환구조의 성장사이클로 있는 것입니다.
모든 변화하는 것에는 이러한 흐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시류에 순응해서도 아니 되고 적응해서도 아니 됩니다. 더욱 도피 일탈해서도 아니 됩니다. 시류를 간파하고 장악하고 조정하고 주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류를 한 걸음 앞서야 하고 때로 시류를 거스르는 모험을 해야만 합니다.
지금 사회에서 한참 강조되고 있는 재치위주의 반짝 아이디어에 가담하는 것이 시류에 휩쓸리는 일이라면 그 태생적 한계를 직시하고 보다 근본적이며 진정한 창의에 도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인식은 언제나 사실에 한 단계 뒤지는 법입니다. 존재론이 먼저고 인식론이 그 존재를 거울에 비추듯 비추어 투사하기 때문입니다. 존재가 시점단위로 스스로를 인간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식에서 한 단계 머물러 버리기 때문입니다.
능한 재사가 시류를 잘 간파했다 싶으면 실은 시류에 한 걸음 뒤처진 것입니다. 시류를 잘 탄 것이 아니라 실은 시류에 휩쓸려버린 격이 됩니다. 가장 앞섰다 싶을 때 실은 상투잡은 격이며 앞차를 탔다고 믿으면 실은 막차를 탄 것입니다.
참된 이론 - 성공사례발표와 이론은 구분되어야 한다
한때 신바람이니 신사고니 하는 이론의 캠페인이 있었습니다. 그 차원에서 어떠한 것을 생각해 내더라도 기존의 것에 대한 차별화를 시도하는 아이디어 이상의 의미가 없습니다. 더욱 국민감정, 민족정서를 자극하는 신토불이류 캠페인이어서는 아니 됩니다. 진정한 이론은 존재론적 전개에 기초한 일반이론으로부터 유도되어져 나와야 합니다.
X이론이니 Y이론이니 하는 외국의 이론들도 한 국가의 경제발전단계에서 나타나는 주도적 특성을 분석 보고한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이론이 아니라 성공사례발표인 것입니다. 그 성공은 과거의 성공이지 미래의 성공이 아닙니다. 더욱이 그들 국가의 경제발전단계에 맞는 성공사례이지 우리나라 경제발전단계에 맞는 성공사례는 아닙니다.
경제발전단계는 변화해 가며 그 변화에 따라 전략과 전술도 지속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한 건에 성공했다 해서 거기에 이론의 이름을 붙여 낡은 방법을 고수하면 곧 뒤처지게 될 뿐입니다.
미국은 앞서가므로 소재요인과 기능요인에서 특징이 두드러지고 일본은 뒤처졌으므로 성능요인에 전념하게 되며 한국은 아예 늦었으므로 효능요인으로 승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 동남아 등 후발주자들이 쫓아오니 뒷마무리 캠페인, 소량다품종 캠페인 등 허황된 일과성 캠페인이 난무하다가 반도체와 자동차가 살아나니까 그런 캠페인이 쑥 들어갔습니다. 다시 불경기가 찾아오니까 또 무슨 황당한 캠페인이 바가지이론하고 나타나려 합니다.
산업경제와 민족성 - 적응하지 말고 주도하라
전략과 전술은 차별화 되어야 합니다. 반도체 등 시장이 성숙되지 않은 개척단계의 상품과 자동차 등 시장이 한창 과열되고 있는 경쟁단계의 상품이 동일한 방식으로 접근되어져서는 아니 됩니다. 소재나 기능단계에서 전략의 선택이 필요하고 완구나 의류 등 잡제품에서는 가격과 디자인 중심의 전술승부가 필요합니다.
불쑥불쑥 내밀어지는 캠페인들은 한결같이 산업경제의 보편성을 부인하고 민족정서의 특수성을 강조합니다.
미국인은 개척정신이 강하므로 모험적 승부가 필요한 소재나 기능요인에 주목해야 하고 일본인은 축소지향인데다 성질이 꼼꼼하므로 기술위주의 성능요인에 주목해야 하고 한국인은 성질이 급하므로 덜렁덜렁 신바람나게 가격이나 깍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산업경제는 민족성하고는 직접적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어느나라도 제 단계들에서 어느 한곳에만 치중하다가는 곧 역효과의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경기는 순환하고 변동하므로 팔릴 때 팔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앞서서 앞을 내다보고 미래의 상품을 찾아내고 전략과 전술의 다단계 승부를 동시에 벌여야 합니다.
원대한 국가의 전략은 소재요인에서 찾아야 하고 대기업의 큰 승부는 기능요인에서 벌여야 하며 중소기업의 작은 승부는 성능과 가격, 디자인에서 벌여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민족성과 기후 풍토에 가장 알맞는 산업을 찾는다는 식의 적응하기 관점은 뒤처지기 딱 좋은 우리식 사회주의의 김일성식 사고방식입니다.
전략적 사고 - 입에 맞는 떡은 먹지 않는다
중국인들은 한때 동양인들은 몸집이 작으므로 힘들지 않는 탁구나 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탁구에만 전념했습니다. 탁구는 몸집이 작은 동양인의 체형에 맞는 운동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실패하는 것입니다. 중국이 탁구에 전념하지 않았더라면 올림픽에서 더 큰 성과를 거두었을 것입니다.
중국인이 못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육상이나 수영이나 체조나 격투기나 구기운동이나 무엇이든 다 잘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것이야말로 가장 큰 해독이 됩니다.
여성은 여성에게 맞는 직업을 가져야 하고 키가 작은 사람은 키가 작은 사람에게 맞는 직업을 가져야 하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가는 모든 사람이 실업자가 됩니다. 자신에게 맞는 일이란 없습니다. 여성도 남성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수 있으며 키 작은 사람도 도구를 이용한다던가 수단을 개발하면 또한 못할 일이 없습니다.
적응하려는 태도야말로 스스로의 가능성을 한정시키고 시류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여 낙오하게 합니다. 결코 환경에 적응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적응은 곧 낙오입니다. 결코 시류에 편승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편승은 곧 뒤처지기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식은 시점단위로 존재를 반영하지 못하고 항상 의식 안에서 한바퀴 굴리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앞서가야 하며 환경을 장악하고 개조해야 합니다. 한국인에게 딱 맞는 방식은 없으며 한국인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시장은 끝없이 스스로를 해체해 가면서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꼭 맞는 일이 가장 나쁜 일입니다.
도전을 기피하고 주저앉게 합니다. 입에 꼭 맞는 음식은 먹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입맛을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입에 맞는 음식을 찾을 것이 아니라 입맛을 개발해야 합니다. 이것이 전략적 사고입니다.
민족국가의 특수성을 강조하다가 실패합니다. 한국인의 특성에 꼭 맞는 방식을 찾으려 해서는 안됩니다. 적응하려는 태도야말로 스스로 자기 발목을 묶는 비참한 잔꾀입니다. 진정한 이론은 인류문명의 보편성과 산업경제의 일반성에 기초해야 합니다. 원대한 전략과 단기적 전술이 공존되어야 합니다.
개인의 삶은 짧고 국가와 민족의 삶은 깁니다. 적응은 개인의 생존술이 될지언정 국가나 민족의 생존술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 변화하고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지만 국가나 민족은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