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살밖에는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과연 김동렬님은 설득할 수 있습니까?
★ 때로 자살의 시도는 세상과 소통하는 여러 방법들 중 하나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신의 의지를 테스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의 진정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귀를 기울여 주어야겠지요.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그렇지 않은 자살도 있습니다. 저는 존엄사(안락사)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자살의 시도를 설득할 수도 없고 설득할 이유도 없답니다.
완벽한 정답은 없습니다. 단지 최선의 대응이 있을 뿐이지요. 중요한 것은 자살의 시도가 세상을 향한 말걸기의 여러 방법들 중 하나일 수도 있다는 것. 그 사람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면 나는 그 말에 귀를 기울여 주어야 한다는 것.
● 미학이라는 것이 사람의 생명을 구할만큼 힘이 센가요? 그저 아름다운 이야기일뿐인가요? 미학이라는 것은 감동을 줍니다. 그런데 의문이 생겼습니다. 깊이 절망한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도 과연 이것이 울림이 있을까라고... 나는 과연 설득할 수 있을까라고 말이죠... 매스컴을 통해 아까운 생명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어떤 아쉬움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정말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악한도 잘 살아가는데 왜 궂이 그럴 수 밖에 없었나..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얼마든지 가치있게 살아갈 수 있을 듯 한데 말이죠.
★ 미학은 사람에게 동기를 부여합니다. 사람이 좌절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동기가 분명한데 다만 이를 실현할 능력이 없는 경우. 둘은 동기 자체가 불분명한 경우입니다. 미학은 두 번째 경우에 있는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깊은 절망은 큰 욕망 때문에 생겨납니다. 절망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희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희망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적습니다.
자신이 진정 무엇에 희망을 걸었는지 그 대상을 정확히 바라보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거나 착각하고 있지요.
예컨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돈을 욕망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사실일까요? 천만에. 진정 원하는 것은 자기완성입니다. 단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요. 돈은 자기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는 한 가지 방법일 뿐입니다.
절망은 자신이 진정으로 욕망하는 대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기를 완성하는 것, 그 방법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것, 소통의 성공으로 하여 신의 완전성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상을 모르기 때문에 돈을 원한다든가 하는 현실적 목표를 자신의 희망으로 착각하고 그 거짓 희망에 도달할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불필요한 악한은 없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악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실패자들이 존재할 뿐. 교도소에 수감된 그들은 실패자들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실패자라는 점에서는 흉포한 악한이나 자살한 선량한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실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표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목표를 착각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허무 그 자체를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선도 없고 악도 없고 노력도 없고 그 노력에 대한 댓가도 없으며 정의도 없고 불의도 없으며 승리도 없고 패배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진실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의 깊은 절망은 커다란 착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인간은 과연 절망할 정도로 희망을 갖고 있기나 할까요?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실패에 지나지 않습니다.
● 그리고 동정심이라는 감정에 대해 의문이 생깁니다. 동정은 상대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나보다 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동정하지 않고 날카로운 비판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의문이 생깁니다. 그런 사람을 대할 때는 그냥 한수 접고 대하는 것이 미학인가요, 강한 개인이라고 상정하고 대하는 것이 옳은가요...
★ 동정한다는 것은 소통을 시도한다는 것입니다. 소통하기 위해서는 대등해져야 합니다. 상대가 내 수준으로 올라서거나 내가 상대수준으로 눈높이를 낮추거나. 상대가 비참하기 때문에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하기 위해서 동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질을 잊어서 안 됩니다.
동정하면서도 자선을 베풀면서도 소통은 거부하는 가진 자들의 위선은 고발되어야 합니다. 만약 누군가를 동정하고 자선을 베풀고자 한다면 진정으로 소통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이 왜 누군가를 동정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동정심이 발동했다는 것은 양심의 목소리가 ‘왜 그 사람과 소통하려들지 않느냐’고 따져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위선자들은 몇 푼어치의 자선을 베푸는 것으로 자신을 기만하고 소통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습니다. 그건 가짜지요. 그것은 동정심이라는 자신의 심리를 보상하는 자기위안에 지나지 않습니다.
타인을 동정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근사하게 포장한 즉 자기만족적인 태도지요. 아프리카 사람들을 동정하기는 쉽지만 그 사람들과 소통하기는 위험합니다.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지요.
그리고 나보다 약한 위치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른 스테이지에서 다른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도시의 잘 나가는 사업가와 시골의 가난한 농부는 다른 스테이지에서 다른 임무를 받아 다른 종류의 게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강자도 없고 약자도 없습니다. 단지 자기 몫의 성공과 실패가 있을 뿐입니다.
도시의 사업가가 사업에 실패할 확률은 시골의 농부가 재배에 실패할 확률보다 높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누구를 동정하고 할 입장은 아니지요. 누구든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의 삶을 미학적으로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시골의 농부가 아름답게 완성할 확률이 더 높지요. 단지 그 아름다운 성공을 스스로 즐기지 못한다면 낭패입니다.
하나의 기준으로 확일적으로 들이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지고 각자의 무대에서 다른 종류의 게임을 벌이며 전혀 다른 성공의 기준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 누가 누군가에게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이 과연 현명한 것일까요? 어떨 때는 동생에게 조언을 한답시고 긴 메일을 보내기도 합니다. 타인의 삶에 개입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 현명한 것일까요? 그저 나의 고독한 외침만이 의미가 있을까요? 들어주면 들어주는 대로 안 들어주면 안들어주는 대로 아무 기대도 하지 않으면서 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옳은가요? 누군가를 붙잡고 내 말 좀 들어달라고 하는 것이 옳을까요?
★ 누군가에게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실은 자기 자신에게 좋은 말을 해주는 것입니다. 동생에게 조언을 한 것이 아니라 진실로 말하면 자기 자신에게 조언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조언은 나쁘지 않습니다.
타인의 삶에 개입함은 위험합니다. 끝까지 책임져야 하니까요. 소통은 단순히 대화한다는 것과 다릅니다. 팀이 맞고 조가 맞고 포지션들 간에 포메이션이 맞고 손발이 맞고 궁합이 맞고 조합이 맞고 공격과 수비가 역할분담이 맞고 궁극적으로 좋은 하모니를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말로 소통하는 것은 소통이 아닙니다. 삶 그 자체로 소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내 삶의 완성된 무대에 당신을 초대하는 것, 그리고 당신의 삶의 완성된 무대에 내가 손님으로 방문하는 것입니다.
● 소통을 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 혹은 내 마음과 똑같은 사람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있었거나 있다는 것? 내가 아플 때 나를 간병해줄 사람 하나를 가지는 것?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 자체?
★ 소통한다는 것은 완전해 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먼저 나라는 존재의 불완전성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인생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절절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맹목한 삶은 설사 노력하여 천금을 얻는다 할지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실패로 될 확률이 높다는 위험을 인지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정의도 없고 불의도 없으며 성공도 없고 실패도 없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소통의 출발입니다. 그러한 삶의 성공과 실패를 가름하는 가치판단의 기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간들의 성공과 실패라는 것은 대략 허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정한 경지에서는 동정도 없고 은혜도 없으며 내가 네게 받은 것도 없고 내가 네게 준 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 함께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너도 벽돌 한 개를 더하고 나도 벽돌 한개를 더하여 우리 함께 공동의 작품을 조금씩 완성해 간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선이니 악이니 정의니 불의니 은혜니 동정이니 하는 것은 결국 내가 벽돌놓을 차례인데 왜 네가 먼저 벽돌을 놓으려 하느냐는 식의 자리다툼에 불과합니다. 누가 벽돌을 놓든 함께 벽돌을 놓아야 그 건물은 완성됩니다.
주거나 받는 것은 소통이 아닙니다. 말로 나누는 것도 소통이 아닙니다. 대화하고 이해하고 마음을 나누는 것도 소통이 아닙니다. 진정한 소통은 인류가 힘을 합쳐 문명이라는 커다란 작품을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나의 삶이라는 완성된 작품에 당신을 초대하는 것이며 동시에 당신의 삶이라는 완성된 작품에 내가 손님으로 방문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으로 제각기 독립적으로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라도 완성을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완성된 모습이 결국은 본래부터 주어져 있던 신의 완전성을 인간의 삶이라는 무대에 재현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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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을 막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희망들의 종류를 더 늘려가는 것입니다. 가치판단의 기준 자체를 늘려가는 것입니다. 개인의 희망과 희망들을 연계시켜 더 큰 공동의 희망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집단적 의지 바깥에서 개인의 희망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자살시도의 확률을 낮추는 수 밖에 없습니다. 당장 눈앞에서 자살시도가 일어나고 있다면 막을 방법은 많지 않습니다. 단지 그 사람이 사회를 향하여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수 밖에요. 그 말이 일생이라는 기간이 걸릴 매우 긴 말이 되게하는 방법 밖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