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가 하고 있는 말에는 우리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 것만이 담기는가?
언어는 의사표현의 수단이기 앞서 인간 존재의 형식이 된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여 타인에게 말하기 앞서, 먼저 자기 자신에게 말한다. 인간이 일상적으로 쓰는 언어의 95프로는 나 자신에게 말해지는 언어가 될 것이다.
타인에게 말하는 언어는? 웅변가나 직업 아나운서가 아니라면 하루에 말해진 언어 중 단 5프로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즉 언어는 타인과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자신의 존재양식의 일부로 기능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로 사유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삶 자체를 체화 혹은 내면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교감이고 체험이고 자아와 타자를 구분하는 경계이면서 동시에 그 경계를 허물어가는 즉 자아와 타자를 통합해가는 과정이 된다.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사용의 95프로가 실제로는 자기 자신에게로 향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듯이, 언어의 상당부분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식한다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깨닫고 타자와의 경계를 의식한다는 것인데, 언어는 그 벽을 만드는 한편으로 부단히 허물어가기 때문이다.
많은 부분이 의식하지 못하는 영역에 머물러 있다. 그것을 의식한다는 것이 자아의 발견이면서 동시에 그 경계를 넓혀가는 즉 자아의 확대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기였을 때 그대의 주변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이 나를 공격할지 모르는 나의 적이었다. 문득 엄마는 나의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즉 나에 의해 나 자신의 일부로 규정되는 영역이 그만큼 확대되는 것이다.
처음 적이라고 여겼던 타인이 내 이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적이라고 파악했던 타자를 내나라, 내민족, 내겨레, 내지구촌의 한가족으로 느껴내는 만큼 나의 자아가 확대되는 것이다.
그러한 반복된 작업의 끝에 천하가 두루 자기 안으로 들어온 만큼, 자아가 확대된 사람이 진정한 자유인일 것이며, 그러한 사람만이 천하 안에서 나의 존재와 그 의미를 제대로 의식할 수 있는 것이다.
천하를 두루 포용한, 완전한 자, 깨달은 자 만이 그 내면화된 완전한 각성 안에서 온전히 의식하는 법이오. 그러므로 깨닫지 못한 대부분에 있어서는 각성되지 않은 채,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가 희미한 상태로 존재할 뿐이다.
2. 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철학이 직접 세상을 바꾸지는 않지만, 만약 그 언젠가 세상이 바뀐다면 그 첫 삽은, 그 첫 단추는 반드시 철학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새로운 철학의 태동은 새로운 세상의 태동을 알리는 전주곡이라 할 것이다.
철학가는 여러개의 센서로 변화의 조짐을 감지해낸다. 철학자가 가장 빠르게 세상의 변화를 포착하여 용이하게 설명해내는데 성공하곤 한다. 철학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아니지만 철학이 그 변화과정에서의 부작용을 줄이는데는 성공한다.
먼저 ‘새로운 생각’이 주어졌다.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가 일어났고, 금속활자의 보급으로 성경이 대량보급된 이후 지리상의 발견과 산업화가 일어났다. 항상 그렇듯이 사상이 먼저 앞서가고 문명이 그 뒤를 잇는다.
그러나 한 차원 위에서 ‘존재와 인식’으로 논하면 항상 존재가 먼저다. 존재의 변화가 인식에 반영되어 철학이 일어나고, 철학의 추동에 의해 그 존재가 물리공간에서 더욱 확대되는 것이다.
즉 신대륙의 발견과 같은 물리적 접촉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 그 변화를 반영하여 철학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최근에는 인터넷의 보급이 그러하다. 물리적 환경의 변화다. 구한말의 개화과정도 그러하다. 서양과의 물리적 접촉이 먼저다.
그러한 물리적 접촉 없이 오직 철학 그 자체만으로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무모한 시도들이 있었다. 가깝게는 우리나라의 동학운동이 일면 그러하다. 그러나 동학은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다만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알리는 데는 성공했다.
마르크스주의도 그렇다. 철학 그 자체만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무모한 시도가 된다. 물론 성공하지 못한다. 철학은 새로운 변화의 조짐을 알리거나 아니면 이미 이루어진 변화를 납득할 수 있게끔 설명하는데 그친다.
철학 그 자체로 세상을 바꾸는 지렛대는 되지 못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 변화의 지렛대는 물적 토대에서 얻어진다. 예컨대 쌍방향 의사소통의 수단인 인터넷이 그 하나가 될 수 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인터넷이지만 인터넷이 세상을 바꾼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은 철학가의 몫이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세상의 변화를 설명할 뿐이다. 세상을 바꾸는 지렛대는 물적 토대에 있으며 철학은 그것을 재빨리 찾아지게 하고 또 널리 알리는 역할을 맡는다.
만약 세상이 실제로 바뀌어지기 시작했다면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포착했다면 사람들은 뒤늦게 작업에 임하여 맞는 작업복을 찾아입듯이 그 시대에 맞는 철학을 주문하곤 한다. 그리고 드물게는 광야에서 외치어 알리는 이 있어 그 작업복을 선주문하기도 한다
3. 철학자는 과학자에게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철학은 질문하고 과학은 응답한다. 철학은 문제를 찾아내고 과학은 그 주어진 문제를 해결한다. 철학은 과학으로 가는 경로의 지정이다. 철학은 과학의 서문이다. 모든 과학은 반드시 철학의 관문을 통과한다.
역사철학은 역사학의 관문이다. 정치철학은 정치학의 도입부다. 과학철학은 과학의 안내서이다. 경제철학은 경제학의 목차이다. 법철학은 법학의 일러두기다. 종교학은 종교철학의 머릿말이다. 모든 철학은 모든 과학의 서문이다.
어떤 상품이 100의 가격을 가진다면 그 중 과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5라면 철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95이다. 예컨대 10만원짜리 나이키 운동화가 있다면 OEM 주문의 하청회사가 가져가는 과학의 몫은 5천원이고 나이키 본사가 가져가는 철학의 몫은 9만 5천원이다.
철학은 과학이라는 상품의 상표다. 상표값이 제품가격의 95프로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메이커(철학) 있는 회사들은 회사의 철학을 내세운다. 삼성이 제일주의를 표방하거나 엘지가 고객우선주의를 표방하거나 하는 이유는, 마침내 철학이 상품가격의 95프로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소니의 철학은 완벽주의다. 도요다의 철학은 대중주의다. 회사마다 고유한 철학이 있다. 포드의 철학이 있고 지엠의 철학이 있다. 현대자동차의 철학은 ‘호박주의’다. 현대차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항상 호박모양으로 자동차를 디자인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그러나 최근 NF소나타의 등장으로 호박을 탈피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소비자는 상품을 사면서 동시에 철학을 산다. 현대자동차의 소비자는 호박을 사는 기분으로 현대자동차를 구매한다. 현대자동차에 탑승한 승객은 호박을 타고가는 기분을 느낀다. 왜냐하면 현대의 철학이 호박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중요하다. 현대사회에서는 어떤 상품이든 어떤 분야이든 어떤 업무이든 그 철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 옛날에는 소비자들이 어떤 제품을 소비했지만 요즘 소비자들은 상품 상호간의 연관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즉 현대의 소비자들은 상품 그 자체의 기능보다는 가구의 인테리어라든가 다른 상품과의 균형이라든가 이런 전반적인 것을 관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비자들이 자신의 철학을 가지고 그 철학과 일치하는 상품을 구매하기 시작한 것이며 이는 해당상품의 내재가치에 대한 태도가 아니라, 그 상품을 구매하므로서 다수와 한편이 되는 즉, 동류의식을 느끼고 소속감을 느끼고 일체감을 느끼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시장의 트렌드다. 이 경향이 반영된 것이 최근의 웰빙 붐이다. 웰빙은 단순히 상품을 구매하는 데서, 벗어나 한차원 더 올라가서 상품과의 철학적인 일체감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상품이 아닌 소속을 산다.
지금까지는 회사의 철학을 보고 상품을 구매했다면 이제는 자신의 철학에 맞추어서 상품을 선택하는 것이다. 최근의 이러한 경향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TV상품광고만 해도 그렇다. 과거에는 상품의 내용을 지루하게 설명했다. 요즘은 상품을 설명하지 않는다. 숫제 그 상품을 화면에 비쳐주지도 않는다. 단지 그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들을 보여준다.
왜 이 상품이 당신에게 필요한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이러이러한 사람들이 이 상품을 소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소비자는 자신에게 필요한 상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성을 초월하여 그 소비집단의 동아리에 심리적으로 가입하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철학은 과학의 명패이며, 철학은 과학의 오리엔테이션이며, 철학은 과학의 주소지이며, 철학은 과학과 과학들 상호간의 네트워크이며, 철학은 과학 상호간의 접점확인이며, 철학은 과학의 출입구이며 철학은 과학의 현관이며 모든 과학에는 모든 철학이 존재한다.
4-역사가는 객관적일수 있는가?
역사는 역사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역사 자신의 내재적인 자기동일성과 자기연속성 및 자기일관성 그리고 자기완결성에 기초한다. 쉽게 말하면 자기답고자 하는 노력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사실적으로 기록한다는 것은 객관적인 팩트만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자기 동일성, 연속성, 일관성, 완결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며, 결론적으로 역사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이는 역사가 스스로 내면화 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정체성을 획득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어떤 보편성이 개입하고 있다. 즉 동서고금의 모든 역사가 일정한 패턴과 로직을 가지고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새로우면서도 반복된다. 여기에 어떤 일정한 패턴을 나타내는 정형성이 있다. 그러므로 기록자가 주관적인 판단으로 역사를 왜곡할 경우 이 역사의 정형성을 해치게 된다.
그 경우 역사는 국적없는 역사, 무의미한 역사, 맥없는 기록, 기록할 가치가 없는 기록이 되고만다. 역사가 총체적으로 부실해지는 것이다. 고대의 신화나 전설, 영웅담, 위인전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잘못된 사관에 의하여 왜곡된 역사가 이 점을 잘 드러낸다. 일본의 고사기나 일본서기는 일본역사의 정체성을 해치고 있다. 보편성에 어긋나는 기술이 된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사마천의 사기는 훨씬 더 보편성을 담보하고 있다.
즉 정체성있는 역사, 임자있는 역사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쓰기가 중요한 만큼 역사읽기도 중요하다. 바른 역사읽기로 보면 주관에 의해 잘못 기술된 역사 속에서도 훌륭한 의의들을 찾아낼 수 있다. 단군신화는 명백히 꾸며진 신화이지만 우리는 거기서 진실의 몇가닥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와 같다.
진리의 보편성이 담보하는 바 바른 역사읽기에 의해 역사는 객관성을 획득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바른 역사쓰기에 의해서도 객관성이 담보될 수 있다. 그것은 역사가 역사 자신의 정체성, 곧 내면화된 자기동일성, 자기연속성, 자기 일관성, 자기 완결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역사는 생명과도 같다. 역사가가 주관에 함몰되어 바르지 않은 역사를 기록하면 그 역사는 호흡하지 못한다. 그 역사는 맥박이 뛰지 않는다. 그 역사의 혼은 기록되지 않는다. 바르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 역사가의 목적은 실패로 되고 만다. 역사가는 객관적일 수 있고 마땅히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진리의 보편성에
의지하여 역사 자신의 정체성을 살리는 것이다. 마땅히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그 호흡과 흐름과 맥박을 전달하는 것이어야 한다. 기술되는 개별사건들이 저마다 미학적인 자기완성을 지향하고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역사는 비로소 자기다움을 얻어 꽃 피우는 법이다.
언어는 의사표현의 수단이기 앞서 인간 존재의 형식이 된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여 타인에게 말하기 앞서, 먼저 자기 자신에게 말한다. 인간이 일상적으로 쓰는 언어의 95프로는 나 자신에게 말해지는 언어가 될 것이다.
타인에게 말하는 언어는? 웅변가나 직업 아나운서가 아니라면 하루에 말해진 언어 중 단 5프로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즉 언어는 타인과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자신의 존재양식의 일부로 기능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로 사유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삶 자체를 체화 혹은 내면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교감이고 체험이고 자아와 타자를 구분하는 경계이면서 동시에 그 경계를 허물어가는 즉 자아와 타자를 통합해가는 과정이 된다.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사용의 95프로가 실제로는 자기 자신에게로 향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듯이, 언어의 상당부분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식한다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깨닫고 타자와의 경계를 의식한다는 것인데, 언어는 그 벽을 만드는 한편으로 부단히 허물어가기 때문이다.
많은 부분이 의식하지 못하는 영역에 머물러 있다. 그것을 의식한다는 것이 자아의 발견이면서 동시에 그 경계를 넓혀가는 즉 자아의 확대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기였을 때 그대의 주변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이 나를 공격할지 모르는 나의 적이었다. 문득 엄마는 나의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즉 나에 의해 나 자신의 일부로 규정되는 영역이 그만큼 확대되는 것이다.
처음 적이라고 여겼던 타인이 내 이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적이라고 파악했던 타자를 내나라, 내민족, 내겨레, 내지구촌의 한가족으로 느껴내는 만큼 나의 자아가 확대되는 것이다.
그러한 반복된 작업의 끝에 천하가 두루 자기 안으로 들어온 만큼, 자아가 확대된 사람이 진정한 자유인일 것이며, 그러한 사람만이 천하 안에서 나의 존재와 그 의미를 제대로 의식할 수 있는 것이다.
천하를 두루 포용한, 완전한 자, 깨달은 자 만이 그 내면화된 완전한 각성 안에서 온전히 의식하는 법이오. 그러므로 깨닫지 못한 대부분에 있어서는 각성되지 않은 채,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가 희미한 상태로 존재할 뿐이다.
2. 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철학이 직접 세상을 바꾸지는 않지만, 만약 그 언젠가 세상이 바뀐다면 그 첫 삽은, 그 첫 단추는 반드시 철학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새로운 철학의 태동은 새로운 세상의 태동을 알리는 전주곡이라 할 것이다.
철학가는 여러개의 센서로 변화의 조짐을 감지해낸다. 철학자가 가장 빠르게 세상의 변화를 포착하여 용이하게 설명해내는데 성공하곤 한다. 철학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아니지만 철학이 그 변화과정에서의 부작용을 줄이는데는 성공한다.
먼저 ‘새로운 생각’이 주어졌다.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가 일어났고, 금속활자의 보급으로 성경이 대량보급된 이후 지리상의 발견과 산업화가 일어났다. 항상 그렇듯이 사상이 먼저 앞서가고 문명이 그 뒤를 잇는다.
그러나 한 차원 위에서 ‘존재와 인식’으로 논하면 항상 존재가 먼저다. 존재의 변화가 인식에 반영되어 철학이 일어나고, 철학의 추동에 의해 그 존재가 물리공간에서 더욱 확대되는 것이다.
즉 신대륙의 발견과 같은 물리적 접촉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 그 변화를 반영하여 철학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최근에는 인터넷의 보급이 그러하다. 물리적 환경의 변화다. 구한말의 개화과정도 그러하다. 서양과의 물리적 접촉이 먼저다.
그러한 물리적 접촉 없이 오직 철학 그 자체만으로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무모한 시도들이 있었다. 가깝게는 우리나라의 동학운동이 일면 그러하다. 그러나 동학은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다만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알리는 데는 성공했다.
마르크스주의도 그렇다. 철학 그 자체만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무모한 시도가 된다. 물론 성공하지 못한다. 철학은 새로운 변화의 조짐을 알리거나 아니면 이미 이루어진 변화를 납득할 수 있게끔 설명하는데 그친다.
철학 그 자체로 세상을 바꾸는 지렛대는 되지 못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 변화의 지렛대는 물적 토대에서 얻어진다. 예컨대 쌍방향 의사소통의 수단인 인터넷이 그 하나가 될 수 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인터넷이지만 인터넷이 세상을 바꾼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은 철학가의 몫이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세상의 변화를 설명할 뿐이다. 세상을 바꾸는 지렛대는 물적 토대에 있으며 철학은 그것을 재빨리 찾아지게 하고 또 널리 알리는 역할을 맡는다.
만약 세상이 실제로 바뀌어지기 시작했다면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포착했다면 사람들은 뒤늦게 작업에 임하여 맞는 작업복을 찾아입듯이 그 시대에 맞는 철학을 주문하곤 한다. 그리고 드물게는 광야에서 외치어 알리는 이 있어 그 작업복을 선주문하기도 한다
3. 철학자는 과학자에게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철학은 질문하고 과학은 응답한다. 철학은 문제를 찾아내고 과학은 그 주어진 문제를 해결한다. 철학은 과학으로 가는 경로의 지정이다. 철학은 과학의 서문이다. 모든 과학은 반드시 철학의 관문을 통과한다.
역사철학은 역사학의 관문이다. 정치철학은 정치학의 도입부다. 과학철학은 과학의 안내서이다. 경제철학은 경제학의 목차이다. 법철학은 법학의 일러두기다. 종교학은 종교철학의 머릿말이다. 모든 철학은 모든 과학의 서문이다.
어떤 상품이 100의 가격을 가진다면 그 중 과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5라면 철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95이다. 예컨대 10만원짜리 나이키 운동화가 있다면 OEM 주문의 하청회사가 가져가는 과학의 몫은 5천원이고 나이키 본사가 가져가는 철학의 몫은 9만 5천원이다.
철학은 과학이라는 상품의 상표다. 상표값이 제품가격의 95프로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메이커(철학) 있는 회사들은 회사의 철학을 내세운다. 삼성이 제일주의를 표방하거나 엘지가 고객우선주의를 표방하거나 하는 이유는, 마침내 철학이 상품가격의 95프로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소니의 철학은 완벽주의다. 도요다의 철학은 대중주의다. 회사마다 고유한 철학이 있다. 포드의 철학이 있고 지엠의 철학이 있다. 현대자동차의 철학은 ‘호박주의’다. 현대차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항상 호박모양으로 자동차를 디자인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그러나 최근 NF소나타의 등장으로 호박을 탈피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소비자는 상품을 사면서 동시에 철학을 산다. 현대자동차의 소비자는 호박을 사는 기분으로 현대자동차를 구매한다. 현대자동차에 탑승한 승객은 호박을 타고가는 기분을 느낀다. 왜냐하면 현대의 철학이 호박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중요하다. 현대사회에서는 어떤 상품이든 어떤 분야이든 어떤 업무이든 그 철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 옛날에는 소비자들이 어떤 제품을 소비했지만 요즘 소비자들은 상품 상호간의 연관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즉 현대의 소비자들은 상품 그 자체의 기능보다는 가구의 인테리어라든가 다른 상품과의 균형이라든가 이런 전반적인 것을 관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비자들이 자신의 철학을 가지고 그 철학과 일치하는 상품을 구매하기 시작한 것이며 이는 해당상품의 내재가치에 대한 태도가 아니라, 그 상품을 구매하므로서 다수와 한편이 되는 즉, 동류의식을 느끼고 소속감을 느끼고 일체감을 느끼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시장의 트렌드다. 이 경향이 반영된 것이 최근의 웰빙 붐이다. 웰빙은 단순히 상품을 구매하는 데서, 벗어나 한차원 더 올라가서 상품과의 철학적인 일체감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상품이 아닌 소속을 산다.
지금까지는 회사의 철학을 보고 상품을 구매했다면 이제는 자신의 철학에 맞추어서 상품을 선택하는 것이다. 최근의 이러한 경향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TV상품광고만 해도 그렇다. 과거에는 상품의 내용을 지루하게 설명했다. 요즘은 상품을 설명하지 않는다. 숫제 그 상품을 화면에 비쳐주지도 않는다. 단지 그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들을 보여준다.
왜 이 상품이 당신에게 필요한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이러이러한 사람들이 이 상품을 소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소비자는 자신에게 필요한 상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성을 초월하여 그 소비집단의 동아리에 심리적으로 가입하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철학은 과학의 명패이며, 철학은 과학의 오리엔테이션이며, 철학은 과학의 주소지이며, 철학은 과학과 과학들 상호간의 네트워크이며, 철학은 과학 상호간의 접점확인이며, 철학은 과학의 출입구이며 철학은 과학의 현관이며 모든 과학에는 모든 철학이 존재한다.
4-역사가는 객관적일수 있는가?
역사는 역사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역사 자신의 내재적인 자기동일성과 자기연속성 및 자기일관성 그리고 자기완결성에 기초한다. 쉽게 말하면 자기답고자 하는 노력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사실적으로 기록한다는 것은 객관적인 팩트만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자기 동일성, 연속성, 일관성, 완결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며, 결론적으로 역사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이는 역사가 스스로 내면화 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정체성을 획득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어떤 보편성이 개입하고 있다. 즉 동서고금의 모든 역사가 일정한 패턴과 로직을 가지고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새로우면서도 반복된다. 여기에 어떤 일정한 패턴을 나타내는 정형성이 있다. 그러므로 기록자가 주관적인 판단으로 역사를 왜곡할 경우 이 역사의 정형성을 해치게 된다.
그 경우 역사는 국적없는 역사, 무의미한 역사, 맥없는 기록, 기록할 가치가 없는 기록이 되고만다. 역사가 총체적으로 부실해지는 것이다. 고대의 신화나 전설, 영웅담, 위인전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잘못된 사관에 의하여 왜곡된 역사가 이 점을 잘 드러낸다. 일본의 고사기나 일본서기는 일본역사의 정체성을 해치고 있다. 보편성에 어긋나는 기술이 된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사마천의 사기는 훨씬 더 보편성을 담보하고 있다.
즉 정체성있는 역사, 임자있는 역사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쓰기가 중요한 만큼 역사읽기도 중요하다. 바른 역사읽기로 보면 주관에 의해 잘못 기술된 역사 속에서도 훌륭한 의의들을 찾아낼 수 있다. 단군신화는 명백히 꾸며진 신화이지만 우리는 거기서 진실의 몇가닥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와 같다.
진리의 보편성이 담보하는 바 바른 역사읽기에 의해 역사는 객관성을 획득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바른 역사쓰기에 의해서도 객관성이 담보될 수 있다. 그것은 역사가 역사 자신의 정체성, 곧 내면화된 자기동일성, 자기연속성, 자기 일관성, 자기 완결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역사는 생명과도 같다. 역사가가 주관에 함몰되어 바르지 않은 역사를 기록하면 그 역사는 호흡하지 못한다. 그 역사는 맥박이 뛰지 않는다. 그 역사의 혼은 기록되지 않는다. 바르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 역사가의 목적은 실패로 되고 만다. 역사가는 객관적일 수 있고 마땅히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진리의 보편성에
의지하여 역사 자신의 정체성을 살리는 것이다. 마땅히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그 호흡과 흐름과 맥박을 전달하는 것이어야 한다. 기술되는 개별사건들이 저마다 미학적인 자기완성을 지향하고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역사는 비로소 자기다움을 얻어 꽃 피우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