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요 몇년 동안 『인문학의 위기』가 사회의 화두로 떠올랐다.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인문학자의 위기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있다. 실은 인문학자의 위기가 아니라 강단학계의 위기일 뿐이라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얼마전에 있었던 김용옥의 동양학강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토종 인문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날로 높아가고 있다. 위기는 대중과 유리된 강단학계의 위기일 뿐이다. 남의 나라 학문의 번역과 수입을 위주로 하는 매판학문의 위기, 학벌 수입업자의 위기, 학문을 수단으로 삼는 한 라이선스 브로커들의 위기일 뿐이다.

위기는 기회라 했다. 매판인문학의 위기야 말로 토종인문학을 일으킬 절호의 찬스일 수 있다. 매판인문학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수요의 부족에 기인한다. 인문학이 학자의 양성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교양에 목적이 있다면 수요가 없는 매판 인문학의 설 자리는 없다.

생각하면 언제 이나라에 인문학이 있어본 적이 있기나 했단 말인가? 한국에서 수입과 번역을 위주로 하는 종래의 인문학은 학문을 가장한 일종의 라이선스 사업일 뿐이다. 학벌을 일종의 조선시대 과거급제로 보고 학벌을 따서 신분상승을 해보자는 썩은 것들을 상대로 하는 자격증 장사에 불과했다.

반면 토종인문학에는 대중의 광범위한 수요가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건 진짜다. 대중은 교양을 원한다. 문제는 소통이다. 매판인문학은 대중과의 소통이 불가능하다. 진짜가 아니면 안된다. 우리의 피와, 넋과, 얼과, 삶과 교감하는 것이어야 대중과의 소통이 가능하다.

선행주자의 핸티캡과 후발주자의 잇점

동양철학을 논하더라도 서구의 방법론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동양사상이 아니다. 오늘날 강단학계가 혹 퇴계를 논하고, 혹 원효를 논할지라도 서구의 방법론을 차용하는 이상 그것은 철학이 아니라 역사학의 한 분야로서 철학사에 불과하다.

서구의 잣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동양사상의 대안을 이야기하려면, 강단학계의 바깥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물론 재야학계로 눈을 돌려본다 해서 신통한 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강단학계와 재야학계의 경계선에서 곡예를 벌이고 있는 한 기묘한 인물을 발견할 수 있다.

문화일보 기자가 된 김용옥이다. 그는 적어도 서구사상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는 큰 틀에서 『서구사상의 대안으로서의 가능성 차원에서 동양정신의 재조명』이라는 하나의 화두를 던지는 데는 성공하고 있다.

김용옥을 이야기하려다 보니 또 김용옥에 한마디를 던진 재야학자 기세춘을 언급하게도 된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기세춘의 논의방법은 일정부분 서구의 진보주의 시각을 들이대고 있다는 점에서 자유분방한 논의의 장을 마련한 김용옥에 비해 한 단계 격이 떨어진다.

후발주자의 잇점은 선행주자의 시행착오를 답습할 이유가 없다는 점에 있다. 후발주자는 일단 경우의 수를 늘리고 선택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 너무 목표의 범위를 좁혀놓아서는 선행주자의 시행착오를 답습하게 될 뿐이다.

서구의 진보주의 사상이 일구어낸 성과도 인정할만 하다만, 후발주자인 우리는 더 열린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 사회주의 복지국가 모델이 그들의 진보주의적 유토피아관이 만들어낸 최종결론이라면 우리에겐 우리들 방식의 유토피아관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꿈이 세계의 꿈이 될 그날을 위하여라면 우리는 더 사고의 폭을 개방하여야 한다.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더 많은 경우의 수를 대입해 보아야 한다. 서구관점의 유토피아관에 기초한 진보주의로 한정지으므로서 스스로 보폭을 좁히는 우를 범해서 안된다.

앞서가는 그들이 하나를 얻기 위해 하나를 버리고 있을 때, 뒤따라가는 우리까지 그것을 버릴 필요는 없다. 그들이 새것을 얻기 위해 낡은 것을 버릴 때, 우리는 낡은 것에서 새것을 찾아낼 수 있다.

앞서간 그들이 금을 찾아내기 위하여 다이아몬드를 버렸을 때, 우리는 그들이 버린 폐석더미에서 보배를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이 개인의 가치를 위하여 가족의 가치를 버렸을 때, 우리는 그 버려진 가족의 가치 안에서 개인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다.

공자에게는 공자의 달이 있다.

재야철학자 기세춘은 그의 저서 『공자는 왜 소정묘를 죽였는가』를 통해 김용옥이 공자를 명상가 혹은 수도자로 보는 시각을 반대하고 있다. 기세춘에 따르면 『논어』는 철학도 뭣도 아니고 관료가 살아남는 처세술에 불과하다.

그는 공자의 『안이한 시대인식과 민초에게 등돌린 보수주의적 처세』를 비판하며, 김용옥이 공자를 예악(禮樂)과 인생을 논하는 풍류가객이자 달관한 사람으로 찬양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비판하고 있다.

김용옥이 논어 강의를 통해 『기존의 가치체제와 타협하지 않은 진보적 사상가』로 공자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반면, 기세춘은 공자가 제시한 난국타개 방안은 구체제로 돌아가는 복례(復禮)를 제창하고 천자중심주의를 주장하고 있다는 면에서 진보가 아니라 보수라며 깎아내리고 있다.

둘 중 어느 쪽이 옳을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서구관점의 유토피아관을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기세춘의 진보주의 관점보다, 동양적 대안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김용옥의 열린 시야에 상대적으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분명히 할 것이 있다. 김용옥이 공자를 명상가로 보았다면 그의 강론에는 명상가 김용옥이 숨어있을 것이며, 김용옥이 공자를 수도자로 보았다면 그의 강의에 수도자 김용옥이 숨어있을 것이며, 그가 공자를 진보주의자로 보았다면 그의 공자론 속에 진보주의자 김용옥이 숨어있다는 사실이다.

김용옥은 죽은 공자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공자를 빌어 살아있는 김용옥 자기자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용옥의 공자론을 반대한다는 것은 곧 김용옥을 반대한다는 의미도 된다. 마찬가지로 기세춘이 공자를 보수주의자로 보았다면, 그것은 진보주의자 기세춘을 자랑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쟁을 지켜보는 우리의 관전법은 어떠해야 하는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그 가리켜지는 달을 바라보아야 한다. 김용옥이나 기세춘이 무엇이라고 말했는지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김용옥이나 기세춘이 공자를 이용하여, 자신의 무엇을 나타내려 했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2500년전 공자의 존재를 감당한 그 시대, 그 역사의 관점은 또한 어떠한 것이었겠는가? 마땅히 그 시대의 정신은, 공자라는 한 인간을 이용하여 그 시대정신 자신의 입장을 말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2500년 전 공자가 무어라고 말했는가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역사가 공자를 통하여 무엇을 얻어내려고 했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그 시대의 요구를 읽어야 하고 그 역사의 주문서를 읽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서기 2003년 이 시대가, 이 시대의 대중들이, 김용옥의 동양학 강의로부터, 또 강의를 한 김용옥과 반론을 한 기세춘 및 그 과정을 지켜본 학계와, 그들로 하여 귀가 가려웠을 공자와 그 숱한 오고감들로부터 무엇을 얻어낼 수 있는지, 또 무엇을 얻어내려 하는지의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노자에게는 노자의 달이 있다.

김용옥에 따르면 노자는 『항상 그러함』을 말할 뿐 『불변』을 말하지 않는다. 동양인들에게 『불변』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서양인들이 『불변의 영원』을 추구했다면, 동양의 지혜는 『변화의 영원』을 추구한다.

여기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 할 『변화의 영원』이나 혹은 『불변의 영원』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그 가리켜지는 달이라 할 바탕이 되는 컨셉으로서의 기본구도, 곧 김용옥이 동양정신과 서구정신을 어느 지점에서 대비시키고 있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세춘에 따르면 『생명살림의 정치만이 바른 정치』이며 노자는 생명살림의 정치를 추구하고 있는 무정부주의자이다. 여기서 기세춘은 일단 서구의 진보주의적 가치기준을 긍정하면서 서구의 진보주의에 없는 동양적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 따르면 김용옥과 기세춘 어느 쪽이든 자신의 사상을 공자와 노자에 덧씌우는 방법으로, 각자 자기 자신의 철학을 발표하고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이 글의 필자 또한 김용옥을 빌어, 혹은 공자와 노자를 빌어, 혹은 박노자를 빌어, 김동렬 자기 자신의 주장을 덧씌우는 방법으로, 저자 자기자신의 철학과 관점을 주장하고 있다.

당연히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도 필자가 무엇이라고 말했는지에 집착하지 말고 필자의 말에서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리어 자신을 이롭게 할 것인지의 관점에서 자기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 필요한 것은 적절한 취사선택의 지혜이다.

각자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충돌되는 듯 하지만 실로 충돌되지 않는다. 혹자는 앞에서 끌고 혹자는 뒤에서 밀고 있다. 마찬가지로 동양과 서양은 충돌되는 듯 하지만 실로 역할이 다를 수 있다.

깨달아야 한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달이 있다. 김용옥에게는 김용옥의 달이 있고 기세춘에게는 기세춘의 달이 있다. 필자에게는 필자의 달이 있고 독자여러분께는 독자 여러분의 달이 있다. 노자나 공자는 그 달들이 서로 비추고 그 빛을 겨루어 서로 소통하게 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공자는 나무 한그루를 심었을 뿐이다. 그 나무는 맹자에 의해 성장하고, 그 열매는 주자에 의해 수확된다. 공자 한사람에게서 모든 것을 얻으려 하는 이는 필연 실패하게 된다. 마찬가지다. 서구의 진보주의는 씨앗을 뿌렸을 뿐이다. 물질문명은 성장과정일 뿐이다. 동양의 대안으로 하여 그 문명의 열매를 최종적으로 수확할 수 있다.

작은 서구에 큰 동양을 담을 수 없다

공자든 노자든 지금 이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케케묵은 수구사상일 뿐이다. 그러나 잘 나가던 서구문명이 일부 한계를 노정하자 그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아쉬운 따나 노자나 공자에게서 혹 건질만한 것이 없는가 하고 돋보기를 들여대 보는 사람이 있었다.

과연 조금은 건질만한 것이 있었다. 그걸 잘 갈고닦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동양정신이라는 큰 틀에서 이 인류문명의 대안을 모색해 보자는 것이 도올 김용옥의 노력이다. 결론적으로 도올의 노력은 서구정신의 유토피아관과 대비되는 동양정신의 유토피아관이라는 큰 틀에서만 유의미한 것이다.

반면 범위를 좁혀서 공자의 발언 하나하나에서 2003년 이 시대의 현재의 구체적인 현실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찾으려 든다면 넌센스다. 공자든 노자든 2500년 전에 심어진 하나의 씨앗일 뿐이다. 그것을 씨앗이 아닌 결실이라고 착각하므로서 실패는 시작된다.

2500년 전의 그 씨앗은 이상(理想)이라는 이름의 유토피아관이다. 공자의 유토피아는 군주를 중심으로 한 주류사회의 것이다. 노자의 유토피아는 백성을 위주로 하는 비주류 아웃사이더의 것이다. 석가의 유토피아는 사회를 떠나 개인의 내면에 찾아지는 것이다.

공자사회주의는 군주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공동체의 이상적인 모델을 제시하려 한다는 점에서 서구 진보주의 유토피아관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주자의 성리학은 석가가 주장한 개인적 관점에서의 유토피아 개념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여 공자의 유토피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이상의 논의에서 발견되는 바는 공자의 군주를 중심으로 한 주류질서의 유토피아, 노자의 백성을 중심으로 하는 아웃사이더의 유토피아, 석가의 개인적 관점에서의 유토피아, 그리고 주자가 이들을 변증법으로 통일한 성리학 및 양명학의 유토피아들이 가지는 다양성과 질적인 깊이이다.

마르크스가 제시하고 있는 서구 진보주의철학의 근대적 유토피아관은 그 깊이와 넓이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박한 것이다. 오늘날 현실 사회주의권이 몰락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근본적으로 그 철학이 깊이와 너비에서 동양정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천박한 것이다.

왜 답은 동양정신에서 찾아지는가?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다. 동양정신은 출발점에서의 스케일이 크고 서구정신은 그 스케일이 작다. 동양정신이 서구정신의 장점을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서구정신이 동양정신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오늘날 프랑스 등에서 라마교가 유행한다는가 하는 형태로 동양정신을 서구정신에 접목해보려는 노력이 없는바 아니나 예정된 실패를 벗어날 수 없다. 애초에 번짓수를 잘못 짚고 있는 것이다. 동양이 서양을 받아들이는 것은 가하나 그 반대는 애시당초 가능하지 않다.

김용옥과 기세춘의 실패와 가능성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보아주기로 하자면 도올의 공자, 노자론은 서구정신에 없는 동양정신의 특장점인 『깨달음의 관점』에서, 불교나 유교, 도교에 공통되는 동양정신의 코드를 찾아서 이를 세계 보편적인 이념으로 발전시켜보려는 노력이 되겠다.

기세춘은 공자를 비판하고 차라리 묵자를 발굴하자는 입장이다. 또 노자에 대해서는 생명사상이라는 거창한 포장지를 덧씌우면 21세기 이 시대에 교훈이 될만한 뭔가를 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노력이 되겠다.

기세춘은 조금 더 진보주의라는 서구의 시각으로 보고 있다. 어차피 노자나 공자의 사상에서 세상을 뒤집을만한 신통한 것이 나올 리는 없다는 점에서 볼 때, 기세춘의 노력에서 약간의 진전된 점을 발견할 수는 있으나 우리가 원하는 답은 아니다. 그래봤자 앞서가는 서구사상에 경탄하게 될 뿐이다.

서구사상을 정통으로 세워놓고 동양정신에서 그 서구의 틀에 맞는 부분을 발굴하여 『우리도 조금은』하고 인정받기를 바라는 심리로 안된다. 어느면에서는 도올 또한 마찬가지다. 공자나 노자는 2500년의 씨앗일 뿐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열매가 아니다.

노자나 공자는 영감을 던져주고 방향을 잡아줄 뿐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그 열매는 공자나 노자에게서 바랄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우리가 찾아내어야 한다. 그것은 일단 서구정신에 없는 『깨달음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공자, 노자, 석가, 묵자 등 모든 동양사상을 『깨달음』이라는 하나의 큰 울타리로 통일시켜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이 관점에서만 도올의 노력이 일정부분 유의미하다. 이 관점을 잃어버리고 서구의 진보주의 가치기준에 대입할 때 노자든 공자든 이 시대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들과 우리는 무엇이 다른가?

서구사상에는 앎은 있어도 깨달음은 없다. 서구와 동양은 본질이 다르고 접근법이 다르다. 앎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모든 철학과 사상의 궁극적인 귀결점은 깨달음에 있다. 동양사상의 특징은 그 과정을 생략하고 그 최종결과인 깨달음으로 바로 쳐들어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점진적인 수행과정은 생략하고 돈오견성(頓悟見性)의 지름길로 달려가는 것이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이 더 중요하다. 동양문명의 정체(停滯)는 최종결론이 되어야 할 깨달음에 집착해서 그 과정을 소홀히 한데 원인이 있다. 씨앗을 심기도 전에 열매를 수확하려고 덤빈 것이다. 반면 서구사상은 그 진행과정에서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발달시키고 있다.

동양정신의 한계가 있듯이 서구정신의 한계도 분명하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에 집착해서 목적을 잃어버리고 있다. 가기는 잘 가는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그들의 자동차는 힘과 속도가 있지만 길을 잃어버렸다. 반면 우리의 수레는 길은 알고 있는데 엔진이 없다.

서구정신의 최종결론은 진보주의다. 진보란 그 주어진 길을 가는 것이다. 자연과학이라는 엔진도 좋고 물질문명이라는 자동차도 좋다. 시동을 걸어주면 진보라는 길을 가기는 곧잘 가는데 가는 방향을 모르고 있다. 결정적으로 그 자동차에 운전기사가 없다.

목동이 양떼를 물가에 데려올 수는 있어도, 물을 먹여줄 수는 없다. 목동은 양치기 개를 이용해서 양떼를 호숫가로 몰고 간다. 서구는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지만 길을 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양치기 개에 쫓겨가는 것이다.

서구의 사회주의라는 공동체의 이상, 복지국가라는 유토피아는, 그 길 잃은 양들이 더는 양치기 개에 쫓이는 고통 없이 편안하게 살자는 생각이다. 옳지 않다. 왜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알아챌 때 양치기 개에 쫓길 이유가 진정으로 소멸한다.

서구는 아직 이 양떼가 호숫가로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 목동이 양치기 개를 부려서 양떼를 몰아대는 이유를 모른다. 그들은 어리석게 양치기 개에 적개심을 나타내곤 한다. 그들은 양치기 개 없는 이상사회를 꿈꾸지만 아직 멀었다.

그 길이 호숫가를 향하고 있고 그 호수에 맛난 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때, 그 호수로 가는 길을 기억하고 있을 때, 양치기 개 없이도 스스로 호숫가를 찾아갈 수 있을 때 비로소 양떼는 양치기 개로부터 해방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비유하자면 서구정신은 배 고픈 자가 밥을 먹는 것과 같다. 그들은 허겁지겁 먹고 있지만 아직 그 참된 맛을 모르고 있다. 배가 고프기 때문에 먹는 것이어서 안된다. 맛을 알고 먹는 참된 경지는 따로 있다.

문명이라는 음식이다. 서구는 열심히 심고 가꾸는 기술을 발달시켰을 뿐 결정적으로 그것을 수확하고 먹는 법은 연구하지 않았다. 반면 동양은 가꿀 줄도 모르면서 그것을 수확하고 먹는 방법만 연구해왔다. 그 문명의 맛을 알고 그 향을 음미하며 제대로 먹는 기술이 바로 동양정신의 대안이다.

김지하 박노해 등의 생명사상 혹은 율려사상

김지하니 박노해니 하며 혹은 율려사상이니 생명사상이니 또는 공동체운동이니 하며 다양한 논의와 모색들이 나오고 있다. 동양정신의 경쟁력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이다. 기세춘의 주장도 생명사상이라는 점에서 이 울타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어느 면에서 볼 때 생명사상은 확실히 서구정신과 차별화되는 면이 있다. 문제는 과연 이 시대의 대안이 되는가이다. 또한 본질인 깨달음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깨달음이 배제된 생명사상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상의 논의들을 크게 세가지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서구정신의 틀 안에 동양정신을 가두어 놓고 서구정신의 잣대로 동양정신을 재평가해보자는 노력이다. 서구의 진보주의 사상을 정답으로 전제해 놓고 동양정신에서도 일부 진보적인 측면을 발굴해보겠다는 것이다. 이 경우 갑자기 공자가 진보주의자가 되고, 하루아침에 노자가 자유주의자로 둔갑하는가 하면 무정부주의자로 변신하기도 한다. 어색하다.

그 진보주의와 그 자유주의와 그 무정부주의 속에 숨은 서구의 기독교적 가치관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유감이다. 가짜다. 서구식 진보라는 관념은 이 문명이 전진하여 나아가는 과정에서의 필요한 기술일 뿐 이 문명이 최종적으로 도착해야 할 최종목적지는 아니다.

두번째는 프랑스 등지에서 유행한다는 라마교 선풍, 혹은 미국에서 유행한다는 숭산선사의 몽둥이로 두들겨패는 구타 수행법, 박노자가 열심히 찾아보았다는 무릉도원의 미학들이다. 오리엔탈리즘의 혐의를 벗어날 수 없다. 이건 명백히 비난되어야 할 가짜다.

라마교는 그 본래의 철학을 잃고 신비주의로 포장되어 관광상품으로 프랑스에 수입되었을 뿐이다. 임제의 방과 덕산의 할은 미국에서 우스꽝스런 레크레이션의 하나가 되었을 뿐이다. 박노자의 터무니없는 무릉도원의 미학 또한 넌센스이기는 마찬가지다.

세번째는 전혀 새로운 대안이다. 혹은 김지하의 생명사상에서, 혹은 감히 칠조를 거론하는 김용옥의 패기만만에서, 혹은 기세춘이 엿보았다는 생명살림의 정치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하나의 코드이다. 답은 나와있다. 그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깨달음으로 귀일 될 수 밖에 없다.

왜인가? 서구의 진보주의가 이미 필요한 답을 찾을 만큼 찾아버렸기 때문이다. 서구의 진보주의라는 고속도로가 좋고, 현대 물질문명이라는 자동차가 좋다면 이미 답은 나올만큼 나온 것이다. 남은 것은 솜씨좋은 운전기사다.

그러므로 동양정신은 노자의 재발견이 되든, 공자의 재해석이 되든, 공자가 갑자기 사회주의자가 되고, 노자가 엉뚱하게 무정부주의자가 되더라도 결론적으로는 깨달음 밖에 없다. 깨달음 그 하나를 남겨놓고 다른 모든 분야를 서구가 이미 선점해버렸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동양정신이 서구정신에 대립각을 세운다 해서 서구가 얻은 성과를 전면부정할 필요는 없다. 진보주의의 잘 닦여진 고속도로나 자연과학은 엔진성능도 좋은 자동차나 우리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 우리는 그 고속도로와 그 자동차를 받아들여 거기에 깨달음이라는 운전실력 하나를 더하면 된다.

서구는 헬레니즘 아니면 헤브라이즘이다. 그 정신의 바탕은 얕고도 좁다. 반명 동양은 공자와 묵자의 유토피아와, 노자와 석가의 유토피아가 서로 경쟁하면서 성리학의 주자와 양명학의 왕수인을 거치면서 단계적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그 최종결론은 깨달음이다.

용을 그리되 그 발은 서구의 진보주의가 그렸고, 그 몸통은 서구의 자연과학과 물질문명이 그렸다. 화룡첨정이라 했다. 마지막으로 그 용의 눈을 그려야 한다. 그것은 깨달음이다. 그것은 물질문명이라는 자동차를 몰고 진보주의라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운전실력이다. 비로소 그 용이 승천할 수 있다.

깨달음에서 출발하라

1989년에 공개된 김대문의 화랑세기 필사본에 의하면, 16세 풍월주 보종공은 우주의 진기를 살펴 큰 깨달음을 이루었다 한다. 깨달음이야 말로 동양정신의 본령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그러하다. 유교도, 불교도, 도교도, 심지어 화랑도 까지도 한국에 와서는 깨달음의 종교가 되었다. 왜?

이유가 있다. 난해한 이론은 문자의 장벽과 국경의 장벽을 넘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바로 거기가 출발점이다. 인도의 선(禪) 보다 중국의 선이, 중국의 선 보다 한국의 선이 더 불립문자(不立文字) 돈오견성(頓悟見性)의 원칙에 철저한데는 이유가 있다.

깨달음은 언어와 문자의 장벽을 넘는데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나라 때 신수의 북종선과 대립한 육조 혜능의 남종선(南宗禪)이 언어와 문자를 초월하는 심법인(心法印)의 우수성을 주장한 이래 한국의 조계종이 오직 돈오돈수 뿐이라는 성철스님의 일갈에 이르기 까지 일관되게 주장해온 바가 역시 그러하다.

아는 사람끼리나 통한다는 지식은 가짜다. 문명이라는 자동차는 지식이라는 툴을 가진 전문가가 아니면 만들 수 없지만, 그 자동차의 운전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깨달음은 자동차를 제작하는 기술이 아니라 운전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운전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보편성의 원리다.

누구나 운전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자동차가 가장 잘 만들어진 자동차이다. 누구나 영위할 수 있는 문명이 가장 잘 만들어진 문명이다. 깨달음의 본령은 누구나 그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어야만 진짜라는 대원칙이다. 곧 언어와 문자의 벽을 깨부술 수 있는가이다.

깨달음! 그것은 형식을 버리고 언어를 버리고 본질로 바로 치고들어가자는 것이다. 인도의 난해한 이론이, 중국의 복잡한 예법이 국경을 넘을 때는 깨달음이라는 본질 하나만 남겨놓고 그 껍데기는 모두 걸러진다. 그리하여 한국에서는 불교도, 유교도, 도교도 모두 깨달음의 종교가 되었다.

바로 그 지점이다. 철학은, 사상은, 종교는, 인간이 어떻게 언어와 국경의 장벽을 넘어 하나될 수 있는가의 문제에 각기 답하는 방식이다. 최종적으로는 깨달음으로만이 가능하다. 바로 그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너와 나 사이를 가르는 장벽을 제거해 줄 수 있는가이다. 깨달음으로 만이 가능하다.

『동방의 등불』에서 타고르가 노래한 곧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의 경지가 바로 깨달음이다. 무릇 철학과 사상이란 세계를 하나의 보편된 그릇으로 통일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반면 우리는 현실에서 목도한다. 그 철학이, 그 사상이 도리어 세계를 좁다란 담벽으로 갈라 조각조각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회주의도 좋고 진보주의도 좋다. 그러나 통합이 아니면 안된다. 깨달음이 아니고서는 불능이다. 생각하면 그 좋다는 자유의 이름으로, 그 훌륭하다는 진보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가슴들이 조각조각 찢어졌는가 말이다.

당나라 때 중국의 남쪽 지방은 그야말로 오랑캐였다. 육조 혜능이 처음 오조 홍인을 뵈었을 때 대사는 혜능을 꾸짖어 말했다.

『너는 영남 사람이요 또한 오랑캐인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이는 다시 원효의 깨달음으로 돌아온다.

『나는 신라 사람이요 변방의 오랑캐인데 어찌 깨달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여기서 그 문명세계와 오랑캐를 가르는 담벼락은 곧 언어와 문자이다. 그 언어와 문자의 벽을 깨부시지 못한다면 그 철학과 사상의 존재이유는 없는 것이다. 역으로 모든 철학과 사상의 출발점은 바로 그 언어와 문자의 벽을 깨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깨닫는다는 것, 곧 깨친다는 말에는 깨부순다는 의미가 있다. 깨부수어야 하는 것은 곧 언어와 문자의 좁다란 담벼락이다.

왜 한국에서는 모든 사상이, 철학이, 학문이 깨달음의 철학이 되었는가?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에 놓인 그 거대한 언어와 문자의 담벼락을 깨부수지 않고는, 애초에 이나라에는 철학과 학문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2003년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강단학계의 본질적인 한계는 서구기준의 언어와 문자로 된 좁다란 담벼락에 갖혀있다는 데 있다. 그 담벼락을 부수지 않고서 토종 인문학의 미래는 없다. 이 시대에 왜 인문학이 위기인가? 강단학계의 그 누구도 그 언어와 문자라는 밥벌이수단으로는 그만인 그 담벼락을 깨부수려고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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