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성냥팔이 소녀를 쉽게 이해하는 해설판 패치버전

'성소'가 망할 줄이야 진즉 알았지만 막상 현실이 되고 보니 당황스럽다. 일요일 오전이다. 영화가 망하면 장선우가 자살소동을 벌일까 걱정하며 극장에 들어선다. 관객은 강타 팬으로 온 꼬맹이 열다섯명 뿐이다. 최악이구나 싶다.

필름이 돌아간다. 영화가 제법 괜찮아서 그런데로 위안이 된다. 한 50만은 들겠다 싶다. 해외판권으로 잘하면 투자액의 6할은 회수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월요일 박스오피스를 본다. 한달전에 개봉한 오아시스에도 뒤진 7위다. 거덜났다.

완벽한 쪽박. 의욕상실이다. 성소시리즈를 열편쯤 쓸 예정이었는데 싫증이다. 수요일 장선우는 여전히 해해거리며 돌아다닌다는 신문기사를 본다. 투자자가 칼침놓을지 모르니 해외로 도피하는게 어떻수 하고 충고해주고 싶다.

망해도 투자자가 망했지 관객이 망했나? 장선우가 여전히 해해거리며 단역에도 출연하고 돌아다닌다니 나도 의욕을 내서 조금 더 쓰고 그만두기로 한다.

이 글은 영화를 보고 복기한다는 느낌으로 보아야 재미가 있다. 그러나 아무도 영화를 보지 않았을 것이니 군더더기가 되겠지만 줄거리를 약간 소개할까 한다.

게임의 규칙은 캐릭터인 소녀를 얼어죽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소녀가 그를 얼어죽게 만든 플레이어를 사랑해야 한다. 이는 모순이다. 그러나 삶은 원래 모순이다.

인간을 죽이는건 신이다. 게임의 개발자인 신이 인간의 수명을 80살 전후로 설정해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을 죽이는 신을 인간이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모순의 화두는 장선우의 초기작 '서울 예수'로부터 시작된다.

85년작 '서울 예수'를 한마디로 하면, '신이 인간을 구원하는게 아니라 인간이 신을 구원한다'는 역설이다. 장선우는 그의 초기작부터 일관되게 쫓아온 이 구도(求道)라는 주제를 '성소'에서 완성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직설적이고 거칠다. 문제는 그렇게 직설적으로 정답을 찔러줘도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경악할만한 사태이다. 그러므로 기획단계에서 실패다. '성소'는 어렵다.

영화를 안본 독자를 위해 쉽게 풀이하면, 평소에는 중국집 종업원이지만 게임에만 접속하면 게임 속의 캐릭터 앞에서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는 주인공 주(主)는, 게임 속의 캐릭터인 희미한 존재 '성소'를 죽일수도 살릴 수도 있다.

구원이라는 화두가 던져진다. 주는 성소를 구원하려 한다. 그러나 성소는 가상의 존재에 불과하다. 시스템의 논리에 의하면 성소는 가상의 존재이므로 죽지 않는다. 죽지 않으므로 구원되지 않는다.

본질에서 인간은 죽지 않으므로 구원되지 않는다. 지구상에 60억이 살고있지만 모두 아담과 이브를 복제하고 있다. 신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모두 가상의 존재이다.

10만명의 플레이어가 동시접속해서 게임을 하고 있다면 10만명의 '성소'가 있다. 당신이 게임속의 성소를 죽인다 해도, 다음날 다시 접속해보면 또 살아나 있다. 신이 인간을 하루에 100만명씩 죽인다 해도 60억의 복제된 아담과 이브가 여전히 살아서 활보하고 있다.

구원되어야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예수가 인간을 구원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예수를 구원하는 것이다. 이 하나의 주제가 17년전 '서울 예수'로부터 2002년 성소에 이르기까지 장선우가 일관되게 추구해온 화두이다.

예수가 인간을 구원하기는 쉽다. 그것은 프로그래머가 게임의 모듈을 약간 수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역으로 인간이 예수를 구원하기는 어렵다.

어떤 실력없는 프로그래머가 게임을 개발했는데 그 게임은 재미가 없기 때문에 시장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받고 있었다. 이때 게임 속의 캐릭터들이 열심히 노력하여 그 게임을 찾는 플레이어들을 즐겁게 하는데 성공한다면 게임은 히트하게 되고 그때 프로그래머가 구원되는 것이다. 이런 식이다.

더 쉽게 가자! 어떤 프로그래머가 리니지게임을 개발했는데 재미가 없다. 그는 해고되었다. 그러던 중 게임 속의 캐릭터에 불과한 기사, 요정, 마법사, 군주등이 한자리에 모여 회동한다. 각기 지닌 재주를 발휘하여 자신을 탄생시켜준 프로그래머를 구원하기로 모의한다.

캐릭터들이 열심히 뛴 결과 게임은 대박을 맞는다. 해고된 프로그래머는 엄청난 연봉으로 재고용되었다. 해피엔딩이다.

실제로 리니지게임은 다른 게임과 비교할 때 엉성하다. 리니지가 대박을 맞게 된 것은 게임 자체가 가진 게임성(재미를 주는 요소)보다는 플레이어들이 게임 안에서 자기네들끼리 또다른 게임을 벌였기 때문이다. 이는 네트워크게임 중에서도 롤플레잉게임이 가진 특성이다.

네트워크형 롤플레잉게임은 플레이어들이 담합해서 게임 속에서 게임과 상관없는 이상한 짓들이 가능한 구조로 되어 있다. 이를테면 플레이어들이 캐릭터들을 한곳으로 모아서 게임내의 가상시위를 벌인 예도 있다. 이건 원래 게임의 규칙에는 없는 것이다. 게임 안에서 또다른 게임이 무수히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신이 인간을 구원해주기를 날마다 기도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구원하기 위하여 담합하여야 한다. 인간들이 책임맡은 지구 하나를 잘 건사하지 못하고 핵전쟁으로 몰락해버린다면 이 우리은하 태양계 인류게임을 개발한 하느님은 해고되어 노숙자가 되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문제는 장선우가 이러한 네트워크형 롤플레잉게임의 속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롤플레잉게임은 인터랙티브한 요소가 재미의 핵심인데 그러한 측면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 하나의 논리를 일관되게 쫓아가지 않고 뒤죽박죽을 만들어 놓았다. 대부분의 관객들이 이러한 재미(롤플레잉의 요소)를 놓친 것으로 보여진다.

줄거리를 조금 소개하자면 '성소'는 게임 속의 가상의 존재인 하나의 캐릭터이면서 한편으로 오락실 알바생 '희미'이다. 주인공인 '주'는 이름 그대로 구세주 예수님이면서(예수님을 닮은 배우다), 게임 속의 하나의 캐릭터이다. 즉 게임 안에 게임이 있고 그 게임 안에 또다른 게임이 있는 것이다.

롤플레잉게임을 이해한다면 이러한 점을 단박 알아챌 수 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다면 인간 장선우는 드라마를 창조한다. 드라마 속의 존재는 가상의 존재이지만 신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가상의 존재이다.

그 신을 만든 또 다른 신이 있다면 신 역시 가상의 존재이다. 여기서 가상과 진상의 경계는 무너지고 가상이냐 진상이냐 하는 점은 하나의 내적 논리를 일관되게 따라가는 즉 자기일관성과 내적완결성을 갖추는가의 여부로 판단된다.

이 영화의 직접적인 화두는 게임 속에서 시스템이 명령한 로드(道)를 거부하고 또다른 게임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 게임은 자기자신의 게임이다. 롤플레잉게임에서 원래 주어진 게임의 규칙은 아이템을 모아서 자기캐릭터의 신분을 상승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플레이어들은 시스템이 명령한 바 그러한 게임의 규칙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다른 플레이어의 캐릭터를 죽이거나 혹은 타인의 아이템을 슬쩍하는데만 관심이 있다. 그들은 게임 안에서 자기류의 게임의 규칙을 만들어낸다. 자기가 만든 게임의 규칙 안에서는 자기가 전지전능한 주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자가 된다. 피조물인 캐릭터가 창조자가 된다. 수동적 존재인 플레이어가 능동적 위치에 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영화의 플레이어(관객)들은 이 게임이 롤플레잉게임임을 눈치채지 못하고 전략시뮬레이션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장선우감독도 전략시뮬레이션과 롤플레잉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주의 역할은 창조다. 인간은 게임 안의 캐릭터에 불과한 '희미'한 존재이지만 게임의 규칙을 바꾸고, 게임 안에서 자기의 게임을 창조하는데 성공한다면 자신이 창조주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본래 '희미'한 가상의 존재였던 '희미'는 원래 게임의 규칙에 없는 '주를 사랑하기'라는 역할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그 순간 '희미'는 '인간'이 된다. 말하자면 게임 속의 캐릭터가 플레이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해탈하여 부처가 된다는 불교의 설정과 비슷하다.

성소게임은 플레이어가 직접 게임속에 뛰어들어 캐릭터의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실은 이런 게임은 세상에 없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게임에 비유한다면 그러하다)

장선우는 게임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이 영화는 롤플레잉게임의 규칙에 충실하지 않다. 뒤죽박죽이다. 그런 면에서는 실패다. 그러나 실패한 장선우가 진정으로 추구하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챈다면 거기에서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두가지 관점에서 이 영화는 성공하고 있다. 하나는 소재주의의 한계를 극복한 점이며 하나는 그가 '서울 예수' 이후 일관되게 추구해온 '구도(求道)의 논리'를 완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째서 그러한 지는 다음에 이야기할 기회를 엿보기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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