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가치설이란 것을 일부 좌파 또라이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인줄로 알았는데, 상당히 우파(?)로 짐작되는 최용식님 사이트에서도, 200년 전의 노동가치설을 고집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듯이, 노동은 생산의 여러 요소 중에 하나가 아닌가요? 지금 두 분이 내 주장에 시비하고 있는데, 한분은 거의 모든 것을 노동이라고 우기고 있고, 다른 한 분은 (정치)경제학적인 개념에서 볼 때 내가 제시하는 예들은 노동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 분은 서로 모순되는 주장으로 양쪽에서 나를 공격하면서 그들 서로간에는 아무런 충돌도 느끼지 못하는 듯 합니다. 이거 기묘한 일이 아닌가요? 그들 두 분은 서로간에는 왜 싸우지 않을까요? 나는 중간에 있고 그들은 내 좌우에 있는데 왜 맞은 편의 적을 공격하지 않고 엉뚱하게 중간을 공격할까요?
어쨌든 내가 양쪽에서 공격을 받는다는 그 자체로서 기존의 논의들에 헛점이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상식적으로 갑시다. 옛날에 탈레스라는 양반이 물 1원론을 주장했지요. 세상은 물이다. 수천년 후에 마르크스라는 양반이 노동 1원론을 주장했지요. 경제는 노동이다. 아담 스미스가 원조라는 양반도 있는데 거기까지는 관심없고..
경험칙으로 알 듯이, 뭐 어떤 한가지를 가지고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한다면 이건 황당한 겁니다. 이건 '하나님 아부지 아멘'이에요. 과학이 아니죠.
자~! 아래 어떤 사람이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이나, 에디슨이 전구를 발견한 것도 노동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그분에 의하면 저의 글쓰기도 노동일 듯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분은 노동과 비노동은 엄격하게 구분되는 것이며, 아무거나 다 노동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학문의 발전이란 것은 원래 포괄적으로 정의되던 것을, 세분하여 점점 더 엄격하게 정의하여 가는 과정입니다. 즉 옛날에는 개나 소나 다 노동이라고 하다가도, 학문이 진보함에 따라, 노동은 노동이고, 기술은 기술이고, 발견은 발견이고, 발명은 발명이고, 이걸 세세하게 구분한다 말입니다.
근데 여기서는 까꿀로 가는 분위기인지 세세하게 구분하던 것을 도리어 두루뭉수리로 구분해야 한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어요. 우습지 않나요?
상식으로 갑시다. 두가지 부류가 있어요. 하나는 뭐든지 어떤 하나에 붙들어매려는 무식한 주장인데 세상은 물로 되어 있다. 혹은 세상은 불로 되어 있다. 혹은 세상은 기(氣)로 되어 있다. 경제는 오직 노동으로 되어있다. 이런 식으로 어떤 하나에 같다 붙들어매는 1신론 부류입니다.
또 하나는 다신교처럼 이것저것 줏어섬기는 부류입니다. 이 부류는 세상은 굉장히 많은 것들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지요. 예를 들면 집은 벽돌과 기왓장과 서까래와 ...기타등등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일일이 줏어섬기는 겁니다.
그렇다면 과학은?
첫 번째 1원론이 황당하다는 건 다 아실터이고, 두 번째 다원론은 중복이 발생하므로 역시 과학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아실 겁니다. 벽돌은 통나무로 대체될수 있는데, 다른 것으로 대체된다면 그건 배제되는 것이 원칙이거든요.
과학의 방법은 물질을 두고 말한다면, 원자는 양자와 음전자와 중성자와 등등 몇가지 기본요소를 제시하고 이 요소들의 다양한 결합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요는 여기서 과학자가 든 요소들을 다른걸로 대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과학이 이렇게 가는 이유는 첫째 중복을 제거하기 위함이고, 둘째 기능을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즉 1원론으로 가서는 기능을 구분할 수 없고, 다원론으로 가서는 중복을 배제할 수 없다는 거지요.
예를 들면 발명가나 모험가의 발견, 발명이나 병사의 전쟁은 그 자체로서는 노동이 아닙니다. 왜? 기능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발견도 노동이라고 우깁니다. 왜? 발명하는 동안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으니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건 발명이 아니고 발명가의 노동이에요.
이거 구분 안되나요? 발명가가 한 발명은 노동이 아니라 발명이고, 발명하는 동안 들인 시간과 노력의 투자가 노동이라는거. 요 정도는 구분해야 대화가 되죠.
발명 그 자체는 기술의 영역입니다. 이건 명백히 기능이 다르죠.
여기서 규칙은
■ 첫째 기능을 구분할 것
■ 둘째 중복을 방지할 것
왜 이러한 구분이 필요한가 하면 교환원리 때문입니다. 즉 중복 방지를 위하여 다른 걸로 대체되는 것은 요소에서 배제하는 겁니다. 벽돌을 통나무로 대체할 수 있다면 벽돌은 건축의 요소가 될 수없죠. 이 때는 대체할 수 없는 표현 즉 벽돌이나 통나무가 아니라 '건축자재'라는 표현이 과학적 용어가 되는 겁니다. 이건 다른걸로 대체가 안되거든요.
토지 1헥타아르가 있다 칩시다. 봄에 씨만 뿌려놓으면 저절로 수확이 됩니다. 가을에 1톤을 수확해요. 근데 한국인들은 88번 손이 가는 벼농사를 짓습니다. 즉 노동투입량이 열배에요. 왜? 토지가 없으니까 그렇죠.
즉 동일한 토지면적 하에서는 노동투입량이 많을수록 수확이 증가하며, 반대로 동일한 노동량에 있어서는 토지투입량이 많을수록 수확이 증가합니다.
다시 말해서 토지와 노동은 교환됩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그렇다면 노동가치설 대신에 토지가치설도 주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실제로 옛날에는 이런 설도 있었을 겁니다. 아마.
마찬가지로 동일한 토지와 노동에 대해서 기술투입량이 많을수록 수확이 증가합니다. 또 자원투입량이 많을수록 수확이 증가합니다. 자원은 씨앗과 거름이지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종합한 최적화개념이 요청됩니다.
문제는 단일한 토지 혹은 노동 혹은 자원(씨앗과 거름), 기술에 대하여 어느 하나가 남거나 모자랄 수 있다는 겁니다.
즉 토지가 남아돈다면? 노동을 과다 투입할 필요가 없지요. 러시아가 그렇습니다. 러시아에는 화려한 귀족들의 거성이 많은데 그 이유가 뭘까요? 러시아농부들은 일 안합니다. 봄에 씨 뿌리고 가을에 수확할 때 까지 밭에 안나갑니다. 그 이유는? 땅이 너무 넓기 때문입니다.
러시아농부들은 농한기에는 봉건영주의 성에 가서 일합니다. 그래서 러시아에는 화려한 귀족의 성이 있는 거에요. 땅이 남아도니까 그렇죠.
(러시아농부들의 관심은 어떻게 농작물을 잘 관리하여 수확을 두배로 늘리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열심히 봉건영주의 성에서 일해주므로서, 영주에게 잘보여 내년에 두배의 토지를 임대할 수 있느냐이다. 그들의 노동목적은 수확의 증대가 아니라 토지임대면적의 증대에 있다.)
토지나 노동이나 자원이나 기술이나 무제한 많이 투입한다고 해서 무제한으로 수확이 늘어나지 않으므로, 어느 하나가 남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최적화해야 합니다. 방법은? 교환입니다. 남는 것을 모자라는 쪽에 빌려주는 거죠. 이것이 시장입니다.
노동가치설이라는 것은 여기서 기술이나, 신용이나, 자원이나, 토지나 다 노동을 통해서 얻으므로 개나 소나 다 노동이라는 건데 학문의 진보라는 것은 기능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겁니다. 기술은 기술이고 노동은 노동이고 자원은 자원입니다.
씨앗 없이 수확할 수 있습니까?
자원 없으면 노동은 불능입니다.
토지 없이 수확할 수 있습니까?
기술 없이 수확할 수 있습니까?
어떤 노동이라도 최소한의 기술은 필요합니다.
여기서 노동은 기술이나 자원이나 토지와 교환되는 것이며 물론 이 요소들 중 어느 하나라도 바닥나면 생산은 불능입니다. 이들은 골고루 중요한 것이지 어느 하나만 절대적으로 강조하는건 터무니없는 거지요.
경제학이 잘못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에요.
경제학이란 본질에서 최적화입니다. 즉 자원이나 토지나 기술이나 노동이나 어느 하나가 남아돌면 쓸모없으니까 남는걸 모자라는 것과 교환해서 최적화하자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기술은 노동이 아니냐? 교환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교환된다면 중복되는 거에요. 중복은 배제한다는 원칙에 의해 다른걸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은 논외로 치는 겁니다.
노동은 기술이나 토지나 자원으로 대체될 수 있어요. 즉 최소한의 노동만 투입하고 기술과 토지와 자원을 점점 늘려 나간다면 생산은 점점 증가합니다. 고로 과학자의 발견은 기술에 해당하므로 그건 노동이 아니라고 구분하는 거죠.
그걸 노동이라고 우긴다면? 그럼 차라리 이렇게 말하죠. 인간은 숨 안쉬고 노동할 수 없으니까 경제는 숨쉬기가 결정한다. 숨쉬기가치설..호흡가치설..말장난에 불과한거죠.
경제의 발전사는 노동을 기술로 대체해온 역사입니다. 자원과 토지와 노동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노동은 인구증가와 관련있고 토지는 신대륙 개척, 자원은 매장자원탐사 등으로 획득할 수 있는데 물리적으로 한도가 있다 이거에요.
기술은?
기술도 역시 한도가 있습니다. 무제한으로 기술이 증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기술의 진보가 노동을 대체하고 있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가치있는 것은 기술의 진보입니다. 노동은? 노동은 별로 가치없어요. 노동력은 모자라면 외국에서 수입하면 되니까요.
노동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것은, 노동은 기술과 자원과 토지와 신용과 대등한 하나의 생산요소로서 기술이나 자원이 모자랄 경우 노동투입량을 늘려 이를 대체할 수 있다는 주장에 불과합니다.
진지해져야 합니다. 80대 20의 법칙은 경제학자가 발견한 겁니다. 이걸 경험에 불과하다고 무시한다면 과학자는 뭣 때문에 존재하는 겁니까? 경험이 있다면 그 경험이 발생한 원인을 조사해야지 그냥 펑펑 놀면서 그건 경험에 불과하다고요?
민간의학이 있어요. 말라리아 치료약은 키니네입니다. 근데 이건 인디언 원주민의 경험이에요. 근데 과학자가 키니네로 말라리아를 치료하는 것은 원주민의 경험에 불과하다고 무시하실 겁니까? 이거 과학자 맞습니까?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백인들이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죠. 원주민은 키니네로 쉽게 치료하는데도요.
아스피린은 버드나무 껍질을 다려먹든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버드나무 껍질이 감기를 치료하면 그걸 연구해서 아스피린을 개발할 생각은 안하고 내가 "감기에는 버드나무 껍질 다린 물이 최고다" 이러면 "그건 과학이 아니야. 경험에 불과하지"하고 무시하는게 과학자의 태도입니까?
이건 과학이 아니지요. 과학을 헛배운 자의 오만이지요.
분명히 동일한 노동투입량에 대해서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술과 자원과 신용과 토지를 활용하는 노동입니다. 그것을 활용하지 않는 노동은? 더 적은 가치를 생산합니다. 당연히 더 적은 임금을 받지요.
또 이런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어떤 마을에서 10명이 사는데 5명은 자급자족을 합니다. 근데 경제학자는 이 다섯명은 통계에서 제외합니다. 왜? 통계를 내는 이유는 시장의 변화를 추적하기 위함인데 자급자족은 시장바깥에 있으니까 제외하는 거죠.
그런 식으로 김동렬의 가치생산은 무시하는 겁니다. 김동렬의 글쓰기는 가치없다 이거죠. 물론 자급자족의 노동은 제외해도 통계내는데 하자없어요. 그러나 그건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원시사회에서 자급자족하는 원주민의 노동은? 이것도 생산입니다. 근데 채집경제라면 생산 즉 소비에요. 생산과 소비가 동시에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그건 생산이 아니다 이겁니까?
보세요. 김동렬이 여기에 글을 안쓰면 다른 곳에 가서 딴짓을 합니다. 거기엔 돈이 듭니다. 여기에 글을 쓰면 그동안은 소비를 안해요. 그만큼 김동렬이 이익을 봅니다. 즉 김동렬은 글쓰기로 이익을 보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김동렬은 지금 생산과 소비를 동시에 하고있는 것이며 그것은 원주민의 자급자족과 같은 겁니다.
자급자족은 생산이 아닙니까?
물론 자급자족은 통계에서 제외합니다. 그건 편의에 불과한거죠. 문제는 이러한 편의가 결정적으로 하자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쓴 글을 모아 책을 낸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때는 물론 생산이라고 말하겠죠?
즉 자급자족을 통계에서 제외하므로서 경제학이 왜곡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걸 다 통계로 잡자면 피곤한 일이 될테지만.
80대 20의 법칙을 절대 무시해서 안됩니다. 왜 우선순위 1번의 노동이 우선순위 2번의 노동보다 가치있는가? 이건 과학적으로 설명이 됩니다.
우선순위 1번의 노동은 기술과 신용과 토지와 자본을 필요로 하는 노동입니다. 즉 사장의 노동은 기술없으면 안되는 노동입니다. 신용없으면 안되는 노동입니다. 토지 없으면 안되는 노동입니다. 이게 다 있어야 사장은 노동할 수 있는 거에요.
노동자는? 노동자는 신용이 없어도 노동할 수 있고 토지가 없어도 노동할 수 있어요. 왜? 사장이 제공하니까. 기술이 없어도 노동합니다. 왜? 고참이 가르쳐 주니까.
즉 노동자는 기술, 신용, 자원, 자본 없이도 노동할 수 있지만 사장은 기술, 신용, 자원, 자본 중 하나라도 없으면 사장은 노동할 수 없어요. 사장이 기술도 신용도 확보하지 못했다면? 사장자리에서 축출되는 거죠. 그 회사 망합니다.
여기서 법칙
■ 사장의 노동 - 기술, 신용, 토지, 자원을 사용하는 노동이므로 5배로 가치있다.
■ 공장장의 노동 - 기술과 자원을 사용하여 노동하므로 3배로 가치있다.
■ 숙련노동자의 노동 - 기술을 사용하여 노동하므로 2배로 가치있다.
■ 미숙련노동자의 노동 - 노동만 사용하므로 1배의 가치를 지닌다.
이런 가치의 차별이 발생하는 것이며 여기서 작업의 순서는 사장>공장장>숙련노동자>미숙련노동자의 순서로 작업이 진행되는 것이며, 이 순서대로 더 많거나 적은 임금을 받는 것이며 그 이유는 가치 자체에서 차별이 발생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면 사장은 노동자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합니다. 이걸 무시하고 사장이나 노동자나 동일한 임금을 받으라고 우긴다면 이 사회는 터무니없는 비효율에 빠져버립니다. 왜냐하면 기술이나 신용이나 토지나 자원은 남거나 모자라는데 남거나 모자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므로 최적화에 실패하기 때문이죠.
이걸 경험에 불과하다고요?
경험을 이론으로 대체해온 것이 과학이 아니면 뭐가 과학입니까?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듯이, 노동은 생산의 여러 요소 중에 하나가 아닌가요? 지금 두 분이 내 주장에 시비하고 있는데, 한분은 거의 모든 것을 노동이라고 우기고 있고, 다른 한 분은 (정치)경제학적인 개념에서 볼 때 내가 제시하는 예들은 노동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 분은 서로 모순되는 주장으로 양쪽에서 나를 공격하면서 그들 서로간에는 아무런 충돌도 느끼지 못하는 듯 합니다. 이거 기묘한 일이 아닌가요? 그들 두 분은 서로간에는 왜 싸우지 않을까요? 나는 중간에 있고 그들은 내 좌우에 있는데 왜 맞은 편의 적을 공격하지 않고 엉뚱하게 중간을 공격할까요?
어쨌든 내가 양쪽에서 공격을 받는다는 그 자체로서 기존의 논의들에 헛점이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상식적으로 갑시다. 옛날에 탈레스라는 양반이 물 1원론을 주장했지요. 세상은 물이다. 수천년 후에 마르크스라는 양반이 노동 1원론을 주장했지요. 경제는 노동이다. 아담 스미스가 원조라는 양반도 있는데 거기까지는 관심없고..
경험칙으로 알 듯이, 뭐 어떤 한가지를 가지고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한다면 이건 황당한 겁니다. 이건 '하나님 아부지 아멘'이에요. 과학이 아니죠.
자~! 아래 어떤 사람이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이나, 에디슨이 전구를 발견한 것도 노동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그분에 의하면 저의 글쓰기도 노동일 듯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분은 노동과 비노동은 엄격하게 구분되는 것이며, 아무거나 다 노동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학문의 발전이란 것은 원래 포괄적으로 정의되던 것을, 세분하여 점점 더 엄격하게 정의하여 가는 과정입니다. 즉 옛날에는 개나 소나 다 노동이라고 하다가도, 학문이 진보함에 따라, 노동은 노동이고, 기술은 기술이고, 발견은 발견이고, 발명은 발명이고, 이걸 세세하게 구분한다 말입니다.
근데 여기서는 까꿀로 가는 분위기인지 세세하게 구분하던 것을 도리어 두루뭉수리로 구분해야 한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어요. 우습지 않나요?
상식으로 갑시다. 두가지 부류가 있어요. 하나는 뭐든지 어떤 하나에 붙들어매려는 무식한 주장인데 세상은 물로 되어 있다. 혹은 세상은 불로 되어 있다. 혹은 세상은 기(氣)로 되어 있다. 경제는 오직 노동으로 되어있다. 이런 식으로 어떤 하나에 같다 붙들어매는 1신론 부류입니다.
또 하나는 다신교처럼 이것저것 줏어섬기는 부류입니다. 이 부류는 세상은 굉장히 많은 것들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지요. 예를 들면 집은 벽돌과 기왓장과 서까래와 ...기타등등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일일이 줏어섬기는 겁니다.
그렇다면 과학은?
첫 번째 1원론이 황당하다는 건 다 아실터이고, 두 번째 다원론은 중복이 발생하므로 역시 과학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아실 겁니다. 벽돌은 통나무로 대체될수 있는데, 다른 것으로 대체된다면 그건 배제되는 것이 원칙이거든요.
과학의 방법은 물질을 두고 말한다면, 원자는 양자와 음전자와 중성자와 등등 몇가지 기본요소를 제시하고 이 요소들의 다양한 결합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요는 여기서 과학자가 든 요소들을 다른걸로 대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과학이 이렇게 가는 이유는 첫째 중복을 제거하기 위함이고, 둘째 기능을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즉 1원론으로 가서는 기능을 구분할 수 없고, 다원론으로 가서는 중복을 배제할 수 없다는 거지요.
예를 들면 발명가나 모험가의 발견, 발명이나 병사의 전쟁은 그 자체로서는 노동이 아닙니다. 왜? 기능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발견도 노동이라고 우깁니다. 왜? 발명하는 동안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으니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건 발명이 아니고 발명가의 노동이에요.
이거 구분 안되나요? 발명가가 한 발명은 노동이 아니라 발명이고, 발명하는 동안 들인 시간과 노력의 투자가 노동이라는거. 요 정도는 구분해야 대화가 되죠.
발명 그 자체는 기술의 영역입니다. 이건 명백히 기능이 다르죠.
여기서 규칙은
■ 첫째 기능을 구분할 것
■ 둘째 중복을 방지할 것
왜 이러한 구분이 필요한가 하면 교환원리 때문입니다. 즉 중복 방지를 위하여 다른 걸로 대체되는 것은 요소에서 배제하는 겁니다. 벽돌을 통나무로 대체할 수 있다면 벽돌은 건축의 요소가 될 수없죠. 이 때는 대체할 수 없는 표현 즉 벽돌이나 통나무가 아니라 '건축자재'라는 표현이 과학적 용어가 되는 겁니다. 이건 다른걸로 대체가 안되거든요.
토지 1헥타아르가 있다 칩시다. 봄에 씨만 뿌려놓으면 저절로 수확이 됩니다. 가을에 1톤을 수확해요. 근데 한국인들은 88번 손이 가는 벼농사를 짓습니다. 즉 노동투입량이 열배에요. 왜? 토지가 없으니까 그렇죠.
즉 동일한 토지면적 하에서는 노동투입량이 많을수록 수확이 증가하며, 반대로 동일한 노동량에 있어서는 토지투입량이 많을수록 수확이 증가합니다.
다시 말해서 토지와 노동은 교환됩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그렇다면 노동가치설 대신에 토지가치설도 주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실제로 옛날에는 이런 설도 있었을 겁니다. 아마.
마찬가지로 동일한 토지와 노동에 대해서 기술투입량이 많을수록 수확이 증가합니다. 또 자원투입량이 많을수록 수확이 증가합니다. 자원은 씨앗과 거름이지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종합한 최적화개념이 요청됩니다.
문제는 단일한 토지 혹은 노동 혹은 자원(씨앗과 거름), 기술에 대하여 어느 하나가 남거나 모자랄 수 있다는 겁니다.
즉 토지가 남아돈다면? 노동을 과다 투입할 필요가 없지요. 러시아가 그렇습니다. 러시아에는 화려한 귀족들의 거성이 많은데 그 이유가 뭘까요? 러시아농부들은 일 안합니다. 봄에 씨 뿌리고 가을에 수확할 때 까지 밭에 안나갑니다. 그 이유는? 땅이 너무 넓기 때문입니다.
러시아농부들은 농한기에는 봉건영주의 성에 가서 일합니다. 그래서 러시아에는 화려한 귀족의 성이 있는 거에요. 땅이 남아도니까 그렇죠.
(러시아농부들의 관심은 어떻게 농작물을 잘 관리하여 수확을 두배로 늘리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열심히 봉건영주의 성에서 일해주므로서, 영주에게 잘보여 내년에 두배의 토지를 임대할 수 있느냐이다. 그들의 노동목적은 수확의 증대가 아니라 토지임대면적의 증대에 있다.)
토지나 노동이나 자원이나 기술이나 무제한 많이 투입한다고 해서 무제한으로 수확이 늘어나지 않으므로, 어느 하나가 남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최적화해야 합니다. 방법은? 교환입니다. 남는 것을 모자라는 쪽에 빌려주는 거죠. 이것이 시장입니다.
노동가치설이라는 것은 여기서 기술이나, 신용이나, 자원이나, 토지나 다 노동을 통해서 얻으므로 개나 소나 다 노동이라는 건데 학문의 진보라는 것은 기능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겁니다. 기술은 기술이고 노동은 노동이고 자원은 자원입니다.
씨앗 없이 수확할 수 있습니까?
자원 없으면 노동은 불능입니다.
토지 없이 수확할 수 있습니까?
기술 없이 수확할 수 있습니까?
어떤 노동이라도 최소한의 기술은 필요합니다.
여기서 노동은 기술이나 자원이나 토지와 교환되는 것이며 물론 이 요소들 중 어느 하나라도 바닥나면 생산은 불능입니다. 이들은 골고루 중요한 것이지 어느 하나만 절대적으로 강조하는건 터무니없는 거지요.
경제학이 잘못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에요.
경제학이란 본질에서 최적화입니다. 즉 자원이나 토지나 기술이나 노동이나 어느 하나가 남아돌면 쓸모없으니까 남는걸 모자라는 것과 교환해서 최적화하자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기술은 노동이 아니냐? 교환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교환된다면 중복되는 거에요. 중복은 배제한다는 원칙에 의해 다른걸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은 논외로 치는 겁니다.
노동은 기술이나 토지나 자원으로 대체될 수 있어요. 즉 최소한의 노동만 투입하고 기술과 토지와 자원을 점점 늘려 나간다면 생산은 점점 증가합니다. 고로 과학자의 발견은 기술에 해당하므로 그건 노동이 아니라고 구분하는 거죠.
그걸 노동이라고 우긴다면? 그럼 차라리 이렇게 말하죠. 인간은 숨 안쉬고 노동할 수 없으니까 경제는 숨쉬기가 결정한다. 숨쉬기가치설..호흡가치설..말장난에 불과한거죠.
경제의 발전사는 노동을 기술로 대체해온 역사입니다. 자원과 토지와 노동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노동은 인구증가와 관련있고 토지는 신대륙 개척, 자원은 매장자원탐사 등으로 획득할 수 있는데 물리적으로 한도가 있다 이거에요.
기술은?
기술도 역시 한도가 있습니다. 무제한으로 기술이 증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기술의 진보가 노동을 대체하고 있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가치있는 것은 기술의 진보입니다. 노동은? 노동은 별로 가치없어요. 노동력은 모자라면 외국에서 수입하면 되니까요.
노동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것은, 노동은 기술과 자원과 토지와 신용과 대등한 하나의 생산요소로서 기술이나 자원이 모자랄 경우 노동투입량을 늘려 이를 대체할 수 있다는 주장에 불과합니다.
진지해져야 합니다. 80대 20의 법칙은 경제학자가 발견한 겁니다. 이걸 경험에 불과하다고 무시한다면 과학자는 뭣 때문에 존재하는 겁니까? 경험이 있다면 그 경험이 발생한 원인을 조사해야지 그냥 펑펑 놀면서 그건 경험에 불과하다고요?
민간의학이 있어요. 말라리아 치료약은 키니네입니다. 근데 이건 인디언 원주민의 경험이에요. 근데 과학자가 키니네로 말라리아를 치료하는 것은 원주민의 경험에 불과하다고 무시하실 겁니까? 이거 과학자 맞습니까?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백인들이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죠. 원주민은 키니네로 쉽게 치료하는데도요.
아스피린은 버드나무 껍질을 다려먹든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버드나무 껍질이 감기를 치료하면 그걸 연구해서 아스피린을 개발할 생각은 안하고 내가 "감기에는 버드나무 껍질 다린 물이 최고다" 이러면 "그건 과학이 아니야. 경험에 불과하지"하고 무시하는게 과학자의 태도입니까?
이건 과학이 아니지요. 과학을 헛배운 자의 오만이지요.
분명히 동일한 노동투입량에 대해서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술과 자원과 신용과 토지를 활용하는 노동입니다. 그것을 활용하지 않는 노동은? 더 적은 가치를 생산합니다. 당연히 더 적은 임금을 받지요.
또 이런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어떤 마을에서 10명이 사는데 5명은 자급자족을 합니다. 근데 경제학자는 이 다섯명은 통계에서 제외합니다. 왜? 통계를 내는 이유는 시장의 변화를 추적하기 위함인데 자급자족은 시장바깥에 있으니까 제외하는 거죠.
그런 식으로 김동렬의 가치생산은 무시하는 겁니다. 김동렬의 글쓰기는 가치없다 이거죠. 물론 자급자족의 노동은 제외해도 통계내는데 하자없어요. 그러나 그건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원시사회에서 자급자족하는 원주민의 노동은? 이것도 생산입니다. 근데 채집경제라면 생산 즉 소비에요. 생산과 소비가 동시에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그건 생산이 아니다 이겁니까?
보세요. 김동렬이 여기에 글을 안쓰면 다른 곳에 가서 딴짓을 합니다. 거기엔 돈이 듭니다. 여기에 글을 쓰면 그동안은 소비를 안해요. 그만큼 김동렬이 이익을 봅니다. 즉 김동렬은 글쓰기로 이익을 보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김동렬은 지금 생산과 소비를 동시에 하고있는 것이며 그것은 원주민의 자급자족과 같은 겁니다.
자급자족은 생산이 아닙니까?
물론 자급자족은 통계에서 제외합니다. 그건 편의에 불과한거죠. 문제는 이러한 편의가 결정적으로 하자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쓴 글을 모아 책을 낸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때는 물론 생산이라고 말하겠죠?
즉 자급자족을 통계에서 제외하므로서 경제학이 왜곡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걸 다 통계로 잡자면 피곤한 일이 될테지만.
80대 20의 법칙을 절대 무시해서 안됩니다. 왜 우선순위 1번의 노동이 우선순위 2번의 노동보다 가치있는가? 이건 과학적으로 설명이 됩니다.
우선순위 1번의 노동은 기술과 신용과 토지와 자본을 필요로 하는 노동입니다. 즉 사장의 노동은 기술없으면 안되는 노동입니다. 신용없으면 안되는 노동입니다. 토지 없으면 안되는 노동입니다. 이게 다 있어야 사장은 노동할 수 있는 거에요.
노동자는? 노동자는 신용이 없어도 노동할 수 있고 토지가 없어도 노동할 수 있어요. 왜? 사장이 제공하니까. 기술이 없어도 노동합니다. 왜? 고참이 가르쳐 주니까.
즉 노동자는 기술, 신용, 자원, 자본 없이도 노동할 수 있지만 사장은 기술, 신용, 자원, 자본 중 하나라도 없으면 사장은 노동할 수 없어요. 사장이 기술도 신용도 확보하지 못했다면? 사장자리에서 축출되는 거죠. 그 회사 망합니다.
여기서 법칙
■ 사장의 노동 - 기술, 신용, 토지, 자원을 사용하는 노동이므로 5배로 가치있다.
■ 공장장의 노동 - 기술과 자원을 사용하여 노동하므로 3배로 가치있다.
■ 숙련노동자의 노동 - 기술을 사용하여 노동하므로 2배로 가치있다.
■ 미숙련노동자의 노동 - 노동만 사용하므로 1배의 가치를 지닌다.
이런 가치의 차별이 발생하는 것이며 여기서 작업의 순서는 사장>공장장>숙련노동자>미숙련노동자의 순서로 작업이 진행되는 것이며, 이 순서대로 더 많거나 적은 임금을 받는 것이며 그 이유는 가치 자체에서 차별이 발생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면 사장은 노동자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합니다. 이걸 무시하고 사장이나 노동자나 동일한 임금을 받으라고 우긴다면 이 사회는 터무니없는 비효율에 빠져버립니다. 왜냐하면 기술이나 신용이나 토지나 자원은 남거나 모자라는데 남거나 모자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므로 최적화에 실패하기 때문이죠.
이걸 경험에 불과하다고요?
경험을 이론으로 대체해온 것이 과학이 아니면 뭐가 과학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