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는 作意가 있는 법이어서 작의를 헤아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넉넉
하고 미처 작의를 헤아리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어서
작의를 헤아리려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작가 입장에서 읽어야 하는 법
이거니 읽는 데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말씀..!
지난번 인터넷에 관한 글에서 저는 "인터넷은 거품이다. 그러나 거품
이 있어야 발전이 있다"고 모순되어 보이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거품이 있습니다. 거품이 필요하지요. 그러나 언젠가 그 거품은 꺼지게
됩니다. 그때 당황하고 충격받지는 말아야겠지요.
몇가지 주고받음들..!
[라즈니시 - 근대인인가 현대인인가?]
『라즈니시는 윤리 및 도덕의 허위의식을 걷어내기 위하여 많은 역설
을 하고 있는데, 그럼 그는 감정과 의식의 과잉에 빠져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요?』
문예거품론은 말하자면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기준선인 바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규칙인데 라즈니시는 말하자면 근대적인(근대가 곧 전근대를
의미할 수도 있다)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 기본적으로 지성의 입장에 서서 말해야합니다. 지성이란 곧 지식일
반에 있어서의 보편주의적 행동통일입니다. 전 인류의 공동작업이죠.
이를테면 수학을 공부함에 있어서 덧셈을 창시한 1만년전 아무개 크로
마뇽인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시작할 일은 없겠죠. 수학에는 스승이
없습니다.
라즈니시는 스승입니다. 스승과 제자로 구분하여 계급을 두었죠. 이것
은 사제계급을 인정하는 기독교와 유사하면서 스승을 부인한 석가의
출발점과는 다르죠(후에 보살이나 아라한이니 계급을 만들었지만)
학문은 공적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스승이 있을 수 없습니다. 깨달았
으므로 내가 스승이다고 선언하는 즉 지성의 영역에서 떠난 것입니다.
신 앞에서 방자한 행동이죠.
신은 인간과 직접 대화할 뿐 그 사이에 브로커를 두지 않습니다. 라즈
니시의 여러 거품들은 공적영역에 속한 학문을 사적영역에 두기 위하
여 즉 '스승'이 되기 위하여 가공된 바 진짜가 아닙니다.
석가는 스승이 아니며, 가르치는 자가 아니며, 스스로 도달한 자임을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라즈니시, 청해무상사, 숭산 같이 스승을 자처하는 부류들. 물론 한소
식을 들은바 있겠으나 '현대'가 아님은 알고 접근하는 것이 좋습니다.
[고전주의미학의 현대주의적 수용은 어디까지?]
『클래식음악도 계몽주의 지식인들처럼 귀족들에 빌붙어 한끼 식사를
화려하게 하기 위한 치장으로 음악을 만든 사람들인 것은 역사적인 사
실일진데...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음악들의 진가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없지요, 금을 만들기 위한 연금술이 화학의 발전을 가져 왔듯이....우리
인류 역사는 이러한 것들로 가득차 있는데. 과연 옳은 것은 무엇이
고.....참된 가치판단의 근거는 무엇으로 사용하여야 할 것인지....』
▲ 기능과 성능과 효능의 접근순서를 이해해야 합니다. 학문분야에 대
한 기능적 접근은 공자왈 윤리적 완전인을 지향하는 것이고 성능적 접
근은 고전주의, 미학적 극한을 추구하는 태도이며 효능적 접근은 현대
주의, 실용적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고대 - 기능 측면에서 윤리적 완전인 - 문명의 의미를 추구함
봉건 - 성능 측면에서 미학적 극한 - 문명의 질을 끌어올림
현대 - 효능 측면에서 실용적 보편화 - 문명을 양에서 전개함
『과연 진보, 발전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서양의 역사주의적인 직선적
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서양적 발전관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우리
가 정녕 미개와 문명이라는 것을 어찌 구분해야 한단 말인가요? 과연
그 구분이 있기나 한 것인지.』
▲ 문명사적 관점에서 직선적인 진보, 발전은 존재합니다. 문명을 하나
의 수레라고 본다면 고대는 "어디로 갈 것인가?" 중세는 "어떤 엔진을
달 것인가?" 현대는 "몇명이나 거기에 탈 것인가?" 이렇게 다른 관점
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클래식이란 무엇인가? 자전거에서 오토바이, 자동차로 발전하는 단계
에서는 속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자전거-시속 20키로, 오토바이-시속
100키로, 자동차-시속 200키로..여기서 더 빠를 필요는 없습니다. 한계
에 달하는 거지요. 그때부터는 얼마나 빠른가 보다 몇 명이 타는가로
관점이 바뀌는 겁니다.
고전주의가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라 미학적으로 어떤 한계에 도달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실용주의적 관점이 제기되며 미학의 가치는 필요없게
되는 것입니다.
컴퓨터도 메모리용량경쟁이 끝나면 D램은 하나의 갖춤일 뿐 관심영역
에서 멀어집니다.
옛날 - 8비트냐 16비트냐 286이냐 386이냐? (고전주의)
요즘 - 노트북이냐 팜탑이냐 데스크탑이냐? (현대주의)
[孝는 무엇인가?]
효가 뭐지요? 문명이 발생하기 전에는 가족제도가 없었고 따라서 효가
없었습니다. 왜? 가족이 없으니까.
효는 결혼제도가 발생하고 가족이 성립한 이후에 생긴 개념입니다. 고
로 효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생각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아담은 친아버
지가 없었으니까요.
고대 유목민에게는 형사취수제가 있어서 형수와 결혼하고 그랬습니다.
몽고인들은 대상들에게 아내를 빌려주어 씨를 받았지요. 모계사회였습
니다.
공자의 효는 곧 가족제도의 인정이며 가족은 자산에 대한 소유권 동기
로부터 출발하고 있으니까 효는 곧 사유재산제의 인정과 밀접한 관련
이 있는 것입니다.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기준은 소유권을 인정하는가로부터 출발합니다.
야만은 소유권이 없습니다. 씨족공유제이지요. 그래서 문명이 없지요.
문명이란 무엇인가? 기록하고 축적하고 남기어 물려주므로서 대대손손
이어지는 인류의 공동작업입니다. 소유권이 없으면 문명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효는 소유권의 긍정, 곧 인류문명의 긍정에 기초한 관념입니다. 공자는
효도를 가르친 남성우월주의자가 아니라 인류문명의 참된 의미를 깨우
친 철학자입니다.
『과잉의 거품을 끄는 것이 현대이고 진보라 하셨는데 자칫 현대와 진
보는 기계적인 감정들 도덕은 없는 그런 세상이 되어버리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제 머리에 잔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 반드시 거품이 없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벤처에는 거품이
필요하다고 맹 주장하고 있지요. 어제 조선일보에는 "인터넷 거품론이
야 말로 거품이다"는 칼럼이 실렸더군요. 공감합니다.
문제는 거품의 존재유무가 근대와 현대, 18세기와 20세기를 가르는 명
료한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18세기 서구귀족들 복장 보세요. 그리고
조선시대 양반들 복장을 비교해보세요. 요즘 양복도요. 거품을 끄는 것
이 현대의 문명적 특징입니다.
『인디언의 형형색색은 나름으로 각각의 history와 종교의 색채를 띄
고 있는데 색이 야만인가요? 아니면 현대의 해석이 야만을 만들었나
요?』
▲ 현대의 양복은 기능 측면에서 이해됩니다. 즉 전체가 먼저 있고 그
전체 가운데 자기 역할이 있으며 그 역할을 패션으로 나타내고 있습니
다. 말하자면 100명의 등장인물이 나오는 영화에 한 배역을 맡은 것이
지요.
이에 비해 인디언 패션은 그 의상 안에 모든 역할이 다 포함되어 있어
요. 모자는 신분을 나타내고 얼굴의 장식은 무엇을 나타내고 허리띠는
무엇을 나타내고 하는 식으로 그 의상 안에 기승전결이 전부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자기완결이 되면 타인에게 역할을 나눠줄 수
없어요. 그 의상 안에 100명의 배역이 전부 포함되고 있는 거지요.
하고 미처 작의를 헤아리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어서
작의를 헤아리려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작가 입장에서 읽어야 하는 법
이거니 읽는 데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말씀..!
지난번 인터넷에 관한 글에서 저는 "인터넷은 거품이다. 그러나 거품
이 있어야 발전이 있다"고 모순되어 보이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거품이 있습니다. 거품이 필요하지요. 그러나 언젠가 그 거품은 꺼지게
됩니다. 그때 당황하고 충격받지는 말아야겠지요.
몇가지 주고받음들..!
[라즈니시 - 근대인인가 현대인인가?]
『라즈니시는 윤리 및 도덕의 허위의식을 걷어내기 위하여 많은 역설
을 하고 있는데, 그럼 그는 감정과 의식의 과잉에 빠져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요?』
문예거품론은 말하자면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기준선인 바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규칙인데 라즈니시는 말하자면 근대적인(근대가 곧 전근대를
의미할 수도 있다)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 기본적으로 지성의 입장에 서서 말해야합니다. 지성이란 곧 지식일
반에 있어서의 보편주의적 행동통일입니다. 전 인류의 공동작업이죠.
이를테면 수학을 공부함에 있어서 덧셈을 창시한 1만년전 아무개 크로
마뇽인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시작할 일은 없겠죠. 수학에는 스승이
없습니다.
라즈니시는 스승입니다. 스승과 제자로 구분하여 계급을 두었죠. 이것
은 사제계급을 인정하는 기독교와 유사하면서 스승을 부인한 석가의
출발점과는 다르죠(후에 보살이나 아라한이니 계급을 만들었지만)
학문은 공적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스승이 있을 수 없습니다. 깨달았
으므로 내가 스승이다고 선언하는 즉 지성의 영역에서 떠난 것입니다.
신 앞에서 방자한 행동이죠.
신은 인간과 직접 대화할 뿐 그 사이에 브로커를 두지 않습니다. 라즈
니시의 여러 거품들은 공적영역에 속한 학문을 사적영역에 두기 위하
여 즉 '스승'이 되기 위하여 가공된 바 진짜가 아닙니다.
석가는 스승이 아니며, 가르치는 자가 아니며, 스스로 도달한 자임을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라즈니시, 청해무상사, 숭산 같이 스승을 자처하는 부류들. 물론 한소
식을 들은바 있겠으나 '현대'가 아님은 알고 접근하는 것이 좋습니다.
[고전주의미학의 현대주의적 수용은 어디까지?]
『클래식음악도 계몽주의 지식인들처럼 귀족들에 빌붙어 한끼 식사를
화려하게 하기 위한 치장으로 음악을 만든 사람들인 것은 역사적인 사
실일진데...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음악들의 진가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없지요, 금을 만들기 위한 연금술이 화학의 발전을 가져 왔듯이....우리
인류 역사는 이러한 것들로 가득차 있는데. 과연 옳은 것은 무엇이
고.....참된 가치판단의 근거는 무엇으로 사용하여야 할 것인지....』
▲ 기능과 성능과 효능의 접근순서를 이해해야 합니다. 학문분야에 대
한 기능적 접근은 공자왈 윤리적 완전인을 지향하는 것이고 성능적 접
근은 고전주의, 미학적 극한을 추구하는 태도이며 효능적 접근은 현대
주의, 실용적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고대 - 기능 측면에서 윤리적 완전인 - 문명의 의미를 추구함
봉건 - 성능 측면에서 미학적 극한 - 문명의 질을 끌어올림
현대 - 효능 측면에서 실용적 보편화 - 문명을 양에서 전개함
『과연 진보, 발전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서양의 역사주의적인 직선적
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서양적 발전관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우리
가 정녕 미개와 문명이라는 것을 어찌 구분해야 한단 말인가요? 과연
그 구분이 있기나 한 것인지.』
▲ 문명사적 관점에서 직선적인 진보, 발전은 존재합니다. 문명을 하나
의 수레라고 본다면 고대는 "어디로 갈 것인가?" 중세는 "어떤 엔진을
달 것인가?" 현대는 "몇명이나 거기에 탈 것인가?" 이렇게 다른 관점
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클래식이란 무엇인가? 자전거에서 오토바이, 자동차로 발전하는 단계
에서는 속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자전거-시속 20키로, 오토바이-시속
100키로, 자동차-시속 200키로..여기서 더 빠를 필요는 없습니다. 한계
에 달하는 거지요. 그때부터는 얼마나 빠른가 보다 몇 명이 타는가로
관점이 바뀌는 겁니다.
고전주의가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라 미학적으로 어떤 한계에 도달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실용주의적 관점이 제기되며 미학의 가치는 필요없게
되는 것입니다.
컴퓨터도 메모리용량경쟁이 끝나면 D램은 하나의 갖춤일 뿐 관심영역
에서 멀어집니다.
옛날 - 8비트냐 16비트냐 286이냐 386이냐? (고전주의)
요즘 - 노트북이냐 팜탑이냐 데스크탑이냐? (현대주의)
[孝는 무엇인가?]
효가 뭐지요? 문명이 발생하기 전에는 가족제도가 없었고 따라서 효가
없었습니다. 왜? 가족이 없으니까.
효는 결혼제도가 발생하고 가족이 성립한 이후에 생긴 개념입니다. 고
로 효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생각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아담은 친아버
지가 없었으니까요.
고대 유목민에게는 형사취수제가 있어서 형수와 결혼하고 그랬습니다.
몽고인들은 대상들에게 아내를 빌려주어 씨를 받았지요. 모계사회였습
니다.
공자의 효는 곧 가족제도의 인정이며 가족은 자산에 대한 소유권 동기
로부터 출발하고 있으니까 효는 곧 사유재산제의 인정과 밀접한 관련
이 있는 것입니다.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기준은 소유권을 인정하는가로부터 출발합니다.
야만은 소유권이 없습니다. 씨족공유제이지요. 그래서 문명이 없지요.
문명이란 무엇인가? 기록하고 축적하고 남기어 물려주므로서 대대손손
이어지는 인류의 공동작업입니다. 소유권이 없으면 문명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효는 소유권의 긍정, 곧 인류문명의 긍정에 기초한 관념입니다. 공자는
효도를 가르친 남성우월주의자가 아니라 인류문명의 참된 의미를 깨우
친 철학자입니다.
『과잉의 거품을 끄는 것이 현대이고 진보라 하셨는데 자칫 현대와 진
보는 기계적인 감정들 도덕은 없는 그런 세상이 되어버리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제 머리에 잔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 반드시 거품이 없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벤처에는 거품이
필요하다고 맹 주장하고 있지요. 어제 조선일보에는 "인터넷 거품론이
야 말로 거품이다"는 칼럼이 실렸더군요. 공감합니다.
문제는 거품의 존재유무가 근대와 현대, 18세기와 20세기를 가르는 명
료한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18세기 서구귀족들 복장 보세요. 그리고
조선시대 양반들 복장을 비교해보세요. 요즘 양복도요. 거품을 끄는 것
이 현대의 문명적 특징입니다.
『인디언의 형형색색은 나름으로 각각의 history와 종교의 색채를 띄
고 있는데 색이 야만인가요? 아니면 현대의 해석이 야만을 만들었나
요?』
▲ 현대의 양복은 기능 측면에서 이해됩니다. 즉 전체가 먼저 있고 그
전체 가운데 자기 역할이 있으며 그 역할을 패션으로 나타내고 있습니
다. 말하자면 100명의 등장인물이 나오는 영화에 한 배역을 맡은 것이
지요.
이에 비해 인디언 패션은 그 의상 안에 모든 역할이 다 포함되어 있어
요. 모자는 신분을 나타내고 얼굴의 장식은 무엇을 나타내고 허리띠는
무엇을 나타내고 하는 식으로 그 의상 안에 기승전결이 전부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자기완결이 되면 타인에게 역할을 나눠줄 수
없어요. 그 의상 안에 100명의 배역이 전부 포함되고 있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