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에 대하여>
[1] 구원
인간은 비참한 존재이다. 고로 구원되어야 한다. 구원은 개인적 깨달음과 깨달음의 사회적 실천에 의해 가능하다. 신의 영광은 곧 신의 창조이다. 인간은 문명의 창조를 통하여 신의 창조에 동참한다. 구원이다.
※ 불교의 해탈과 기독교의 구원은 동일한 토대에 기초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 강화되었으나 불교 해탈은 위가 없는 개인 차원의 접근이고 기독교 구원은 아래가 없는 위로부터의 일방 구원이다. 양자는 호응되어야 한다.
[2] 진리
진리는 신이 세상을 조직하는 방식이다. 깨달음은 인간이 진리를 파악하는 방식이다. 진리는 하나다. 하나의 그릇에 만상의 무한을 담아낸다. 진리의 문제는 깨달음의 사회화, 일반화, 보편화의 문제이다. 진리에 의해 하나의 깨달음이 모두의 깨달음으로 확대된다.
※ 진리는 깨달음의 사적 영역에서 인류공동의 작업으로 확대하는 과정에 대한 논의이다. 깨달음의 하나에 접근함이 사상이며 그 실천은 이념이고 학문은 그결실이다. 진리의 그릇이 사상과 이념과 학문을 한데 담아 소통시킨다. 배타적 신비적 깨달음을 지양하고 진리의 보편성과 합리성에 의거 통일한다.
[인간은 비참한 존재이다 고로 구원되어야 한다]
살며 살아가며 많은 문제들을 만나게 된다. 때로 선택의 기로에 선다. 죽음 앞에 선다. 선택과 판단, 결심과 실천있어야 한다. 일 터지고 생각하여 늦다. 모든 판단에 대한 일관된 하나의 원칙으로 대비해야 한다.
같은 두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르게 대처한다면 후회에 빠질 것이다. 인생의 괴로움은 육체의 것이 아니라 마음의 것이며, 잘못이어서가 아니라 바로잡을수 없기 때문이며, 틀려서가 아니라 일관성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납득시키는 문제이다. 잘못은 바로잡을수 있고 악은 선으로 갚을수 있다. 나쁜 경우는 스스로 번민에 빠져 자신의 결정을 믿지 못하고 평정을 잃는 경우다.
현명한 방법은 당하는 사건들을 일일이 가치판단 하지 말고 모두 합쳐 인생 전체를 커다란 하나의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인식과 판단, 행동에 있어서의 일관성이며 이를 위한 흔들림없는 원칙이다.
그렇다면 틀린다 해도 단 한번 틀릴 뿐이다. 마음의 평정을 잃을리 없다. 우리는 사상과 종교에서 그것을 얻는다. 그것을 자기 내면 깊숙한데까지 끌어들이므로서 자기정체성을 획득하고 밖으로 외화하므로서 자아를 실현한다.
잘못된 판단이더라도 정립된 가치관, 이데올로기, 종교를 가진다면 적어도 인생의 일관성을 얻을 것이며 자기불신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신념에 살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여도 헛살은 것은 아니다.
[인생의 근본문제]
인생의 근본문제는 苦痛이 아닌 悲慘이다. 비참은 곧 자기부정이다. 의미없음, 이유없음, 가치없음, 속았음, 헛살았음이다. 오로지 일관된 하나의 인식체계와 가치관, 그리고 이에 따른 실천으로서 비참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인간은 비참한 존재이다. 근본에서 이유없고 가치없고 헛된 존재다. 신은 영광이다. 인간의 悲慘과 신의 榮光을 깨닫고 신과의 대화, 신과의 소통을 통하여 신의 영광을 빌어 자기정체성을 실현함이 인간이 이를수 있는 한이다.
신도 근원에서 불완전하다. 가치있는 것은 창조이며 신의 영광은 신이 창조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창세로 끝내지 않고 지금도 역사를 열어가고 있다. 인간은 문명의 건설로서 신의 영광을 함께할 수 있다.
깨달아야 한다. 인간의 비참을 깨닫고, 신의 영광을 깨닫고, 또 신 앞에서 신이 자신에게 맡긴 배역, 역사 앞에서 역사가 자기에게 위임한 소명을 깨달아 맡은 바 역할을 다하기다. 곧 救援이다.
[전인류의 거듭남]
기독교는 신이 일방적으로 인간을 구원한다고 말한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스스로 깨달아 부처가 된다고 말한다. 바르지 않다. 참된 구원, 진정한 깨달음은 양자의 소통에 있다. 그러나 중도통합이 아닌 대승적 포월이다.
불교의 상향식 자기구원도 기독교의 하향식 임의구원도 아닌 제 3의 길이다. 역사와 문명의 길이며 창조의 길이다. 예수의 부활을 우리 모두의 부활로, 석가의 해탈을 인류전체의 해탈로 통일해가는 과정에 대한 논의가 진리다.
진리에 의해 인간은 신의 편, 진리의 편, 역사의 편, 문명의 편, 인간의 편에 서기만 하면 자동으로 구원이며 해탈이다. 신은 인간을 구원하지 누군가를 구원하지 아니한다. 모두가 깨닫지 않을 때 누구도 깨달은 것이 아니다.
개인의 구원, 개인의 해탈이 아니라 인류의 공동작업을 통한 인류전체의 대승적 구원이다. 기독교적 구원과 불교적 해탈의 변증법적 통일이며 그 귀결은 문명의 창조를 통한 신의 창조에의 동반이다.
[진리에 접근하고 있는가?]
인생에 무수한 질문들이 있다. 문제들에 하나하나 답할수 있다. 그러나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렵다. 1번과 2번의 답이 서로 상충되기 일수다. 지금은 맞는 답인데 세월이 흐르면 안맞는 답으로 변질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문제들은 서로 모순되고 침범하며 교통한다. 언제나 그렇듯 이쪽 하나가 맞으면 저쪽 하나가 틀린다. 오른편을 맞추면 왼편이 어긋나고 둘 다 맞추면 움직이지 않으며 움직이게 해놓으면 부서진다.
강한 돌 힘있으나 깨지고 연한 물 힘없으나 힘을 낳는다. 물과 돌은 댓구가 된다. 둘은 모순이나 둘이 모이어 좋은 짝이 된다. 혼돈 속에 질서가 있다. 어긋난 가운데 열림이 있다. 어둠 가운데 빛이다.
길은 하나다. 질문이 많아서 안된다. 물음들을 조직하여 근원적인 하나의 질문으로 만들어야 한다. 단 하나로 압축하여 질문하고 단 하나로 압축하여 답변해야 한다. 단 한번의 사자후가 모든 의문을 깨부수고 모든 논쟁을 잠재운다.
우리는 그것을 진리라고 이름한다. 진리의 이름으로 말해지는 것을 사상이라고 부른다. 사상은 무수한 질문들을 조직하여 하나로 압축한 것이며 하나의 답변으로 모든 답변을 갈음한다.
우리는 종교라고도 부른다. 종교는 사상에다 실천까지를 포함한다. 역사 이래 무수한 사상과 종교들이 있었다. 사상과 종교들은 이 원칙에 충실한가? 과연 모든 의문을 하나로 조직했다고 말할수 있는가?
[신에게로의 다가섬]
우리는 실용적인 방법을 알고 있다. 학문이다. 모든 문답들을 모아 하나의 백과사전을 만든다. 거기서 서로 일치하는 부분만 모은다. 철학이고 과학이다. 학문은 검증되었으나 하나가 아니며 사상은 하나이나 위험한 도박과 같다.
근원에 하나의 진리가 있다. 인간 앞에 와서 무수한 사실이 되었다. 인간은 무수히 질문하고 또 대답한다. 학문은 아래에서 귀납의 방식으로 모든 질문과 답을 모아 질서를 부여하며, 사상은 근원의 질서를 찾아 진리의 위로부터 연역의 방식으로 낱낱이 풀어낸다.
학문은 진리에 대한 인류의 공동작업이며 사상은 신에 대한 고독한 맞섬이다. 학문은 배우는 것이고 사상은 깨닫는 것이다. 학문은 점차 이루어가는 것이고 사상은 단 한번 처연하게 맞서는 것이다.
학문은 도회에 있고 사상은 광야에 있다. 학문은 도구에 있고 사상은 마음에 있다. 학문은 귀결에 서고 사상은 출발에 선다. 양자는 호응해야 한다. 깨달음은 사상으로 시작하여 이념으로 나아가고 학문으로 완성된다.
석가의 깨달음은 끝이다. 나는 깨달음으로 시작한다. 사상은 문을 여는 것이고, 이념은 길을 가는 것이며, 학문은 자취를 기록하는 것이다. 인류전체와 역사전체로 향하여 문명전체의 영광된 전진이다.
[학문과의 소통]
깨달음을 말하는 이들의 공통된 결함은 학문과의 호환성 결여다. 좋은 컴퓨터라도 프로그램에 호환성이 없다면 팔리지 않는다. 참된 깨달음은 먼저 사상체계를 확립하고, 이념으로 나아가며, 학문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진리의 본성은 보편성과 일반성이며 정체성과 절대성, 사실성이다. 본의는 호환에 있어 진리를 배반하고 깨달음이 있을 수 없는 즉 모두가 깨닫지 않으면 누구도 깨닫지 않은 것이니 모두가 들을수 있는 방법으로 말해져야 한다.
진정한 도는 교과서적 물리학, 수학, 미학, 논리학, 언어학으로 풀어질수 있어야 한다. 언어도단, 불립문자를 내세워 호환성 결여를 호도하기도 하나 틀린 생각이다. 참된 깨달음은 원융무애라 거침이 없다.
진리는 신의 것이고 깨달음은 인간의 것이나 본질에서 하나다. 소요자재하고 원융무애하니 널리 통함에 막힘이 없다. 비밀하지 아니하고 은둔하지 아니하고 가리지 아니하고 배회하지 아니하고 속이지 아니한다.
[사상, 주의, 학문]
특정 사실에 대하여 질문과 답을 조직한 것이 主義다. 자본주의, 공산주의 하는 주의들은 진리에 대하지 아니한 즉 사상에 미달한다. 동일한 유교를 유교사상으로 대접하는가 아니면 유교주의로 비하하는가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유교사상일 때의 유가는 독자적 진리의 개념이다. 유교주의로 내려앉으면 도교주의와 비교된 즉 상대가 있는 하나의 입장이다. 상대가 있다면 즉자에 이르지 못한 대자적 위치여서 하나가 아니다.
하나가 아니면 진리가 아니다. 둘이면 상대가 있고, 상대가 있으면 입장이 생기고, 입장이 생기면 관점이 서고, 관점은 관계로 해서 유도되는 즉 관계는 타자와의 관계여서 양자를 통일하는 객관 제 3자적 위치가 된다.
사상은 하나로 실재하며 주의는 쌍으로 기능한다. 사상은 절대이며 주의는 상대이다. 학문은 제 3자의 객관으로 통일한다. 진리는 사상의 極에 서고 이념은 주의의 對에 서고 학문은 관계의 客에 선다.
(一元-열기) (二元-나아가기) (多元-닫기)
진리 -> 이념 -> 학문
사상, 종교 주의 철학, 과학
실재를 포착한다. 관점(입장)에서 바라본다. 관계(결과)를 분석한다. 초극(1자의 주인) 주관(2자의 상대) 객관(제 3자의 관객)
종교는 진리의 위치에서 말한다. 이념은 항상 복수다. 어떤 주의든 반드시 짝이 있다. 공산주의가 상대인 자본주의의 존재를 부정하고 절대를 주장할 때 종교가 된다. 진리는 종교와 같은 계급에 선다.
진리는 학문의 근거이고 진리의 증명은 학문이다. 진리에서 유도하여 깨달음으로, 깨달음에서 대응하여 사상으로, 사상에서 의속하여 이념으로, 이념에서 인과하여 주의로, 주의에서 표상하여 학문에 이르러 완성된다.
[의상의 진단과 약사의 처방]
진단과 처방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진단은 하나이나 처방은 다양하다. 진단은 깨달음이고 처방은 학문이다. 처방없는 진단은 허구이며 진단없는 처방은 요행수다. 진단은 의사가 하고 처방은 약사가 한다. 진단으로 얻은 병명은 하나이고 처방으로 주는 약은 여러 가지다.
진단 따로 처방 따로다. 또한 둘은 서로 소통한다. 약을 주는 것은 약사이지만 치료한 사람은 의사이다. 세계를 구하는 것은 과학이지만 참된 의사는 사상가이다. 본질에서 하나이나 역할분담이다.
깨달음과 학문의 소통을 부인한다면 진단과 처방을 혼동하고 있다. 의사의 병은 하나라도 약사의 약은 다양하다. 학문을 부인하는 명상가는 처방없이 진단하는 의사요, 명상을 부인하는 학자는 진단없이 처방하는 약사다.
달리는 말을 쓰러뜨리는데는 촌철로 충분하다. 게으런 말을 일으켜 세우는 데는 채찍과 당근의 정교함이 갖추어야 한다. 잘못 깨우침을 바로잡는데는 일갈이 족하나 무지에 잠든 자를 일깨우는데는 충분한 언어가 필요하다.
진리는 신을 반영하고 학문은 세계를 반영한다. 둘은 소통하며 명상가는 신과 세계 사이에 선다. 세계가 발달할수록 언어는 증가하며 언어가 늘수록 학문은 커진다. 아무리 커져도 진리의 경계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
장님이 코끼리를 만진다. 부분을 만진 사람은 神秘家가 되고 전체를 만진 사람은 分析家가 된다. 부분을 만져 전모를 알수 없고 전체를 만져 움직임을 알아채지 못하거니 물러나 한번 눈을 뜸에 미치지 못한다.
역사시대에 걸쳐 많은 사상과 주의들이 발표되었으나 참된 하나에 이른 경우는 없었다. 사상이라 말하고 있으나 주의이기 일수다. 관점과 입장을 가지고 있다. 관점이 존재한다면 이미 관측과 피측의 둘이다.
관점과 관계와 입장을 끊어야 한다. 코끼리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 뿐이다. 관점의 통일에 의한 관점의 이동이다. 관측의 방법으로는 불확정성을 극복할수 없다. 깨달음은 귀납이 아닌 연역이어서 불확정성을 넘어선다.
인간의 낮음에서 진리의 높음으로 올라가려 해서는 불확정성의 벽에 막힌다. 진리의 엘리베이터가 인간의 발밑으로 내려올 때 참된 경지를 본다. 진리는 창조의 진리이며 자기세계를 창조하므로서 창조를 안다.
신이 창조한 세계를 분석하여 아는 과학의 방법론은 계단을 밟아 올라가는 귀납의 知요, 인간의 세계를 창조하므로서 達하는 깨달음의 방법론은 엘리베이터가 발밑으로 내려오는 연역의 哲이다.
[1] 구원
인간은 비참한 존재이다. 고로 구원되어야 한다. 구원은 개인적 깨달음과 깨달음의 사회적 실천에 의해 가능하다. 신의 영광은 곧 신의 창조이다. 인간은 문명의 창조를 통하여 신의 창조에 동참한다. 구원이다.
※ 불교의 해탈과 기독교의 구원은 동일한 토대에 기초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 강화되었으나 불교 해탈은 위가 없는 개인 차원의 접근이고 기독교 구원은 아래가 없는 위로부터의 일방 구원이다. 양자는 호응되어야 한다.
[2] 진리
진리는 신이 세상을 조직하는 방식이다. 깨달음은 인간이 진리를 파악하는 방식이다. 진리는 하나다. 하나의 그릇에 만상의 무한을 담아낸다. 진리의 문제는 깨달음의 사회화, 일반화, 보편화의 문제이다. 진리에 의해 하나의 깨달음이 모두의 깨달음으로 확대된다.
※ 진리는 깨달음의 사적 영역에서 인류공동의 작업으로 확대하는 과정에 대한 논의이다. 깨달음의 하나에 접근함이 사상이며 그 실천은 이념이고 학문은 그결실이다. 진리의 그릇이 사상과 이념과 학문을 한데 담아 소통시킨다. 배타적 신비적 깨달음을 지양하고 진리의 보편성과 합리성에 의거 통일한다.
[인간은 비참한 존재이다 고로 구원되어야 한다]
살며 살아가며 많은 문제들을 만나게 된다. 때로 선택의 기로에 선다. 죽음 앞에 선다. 선택과 판단, 결심과 실천있어야 한다. 일 터지고 생각하여 늦다. 모든 판단에 대한 일관된 하나의 원칙으로 대비해야 한다.
같은 두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르게 대처한다면 후회에 빠질 것이다. 인생의 괴로움은 육체의 것이 아니라 마음의 것이며, 잘못이어서가 아니라 바로잡을수 없기 때문이며, 틀려서가 아니라 일관성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납득시키는 문제이다. 잘못은 바로잡을수 있고 악은 선으로 갚을수 있다. 나쁜 경우는 스스로 번민에 빠져 자신의 결정을 믿지 못하고 평정을 잃는 경우다.
현명한 방법은 당하는 사건들을 일일이 가치판단 하지 말고 모두 합쳐 인생 전체를 커다란 하나의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인식과 판단, 행동에 있어서의 일관성이며 이를 위한 흔들림없는 원칙이다.
그렇다면 틀린다 해도 단 한번 틀릴 뿐이다. 마음의 평정을 잃을리 없다. 우리는 사상과 종교에서 그것을 얻는다. 그것을 자기 내면 깊숙한데까지 끌어들이므로서 자기정체성을 획득하고 밖으로 외화하므로서 자아를 실현한다.
잘못된 판단이더라도 정립된 가치관, 이데올로기, 종교를 가진다면 적어도 인생의 일관성을 얻을 것이며 자기불신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신념에 살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여도 헛살은 것은 아니다.
[인생의 근본문제]
인생의 근본문제는 苦痛이 아닌 悲慘이다. 비참은 곧 자기부정이다. 의미없음, 이유없음, 가치없음, 속았음, 헛살았음이다. 오로지 일관된 하나의 인식체계와 가치관, 그리고 이에 따른 실천으로서 비참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인간은 비참한 존재이다. 근본에서 이유없고 가치없고 헛된 존재다. 신은 영광이다. 인간의 悲慘과 신의 榮光을 깨닫고 신과의 대화, 신과의 소통을 통하여 신의 영광을 빌어 자기정체성을 실현함이 인간이 이를수 있는 한이다.
신도 근원에서 불완전하다. 가치있는 것은 창조이며 신의 영광은 신이 창조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창세로 끝내지 않고 지금도 역사를 열어가고 있다. 인간은 문명의 건설로서 신의 영광을 함께할 수 있다.
깨달아야 한다. 인간의 비참을 깨닫고, 신의 영광을 깨닫고, 또 신 앞에서 신이 자신에게 맡긴 배역, 역사 앞에서 역사가 자기에게 위임한 소명을 깨달아 맡은 바 역할을 다하기다. 곧 救援이다.
[전인류의 거듭남]
기독교는 신이 일방적으로 인간을 구원한다고 말한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스스로 깨달아 부처가 된다고 말한다. 바르지 않다. 참된 구원, 진정한 깨달음은 양자의 소통에 있다. 그러나 중도통합이 아닌 대승적 포월이다.
불교의 상향식 자기구원도 기독교의 하향식 임의구원도 아닌 제 3의 길이다. 역사와 문명의 길이며 창조의 길이다. 예수의 부활을 우리 모두의 부활로, 석가의 해탈을 인류전체의 해탈로 통일해가는 과정에 대한 논의가 진리다.
진리에 의해 인간은 신의 편, 진리의 편, 역사의 편, 문명의 편, 인간의 편에 서기만 하면 자동으로 구원이며 해탈이다. 신은 인간을 구원하지 누군가를 구원하지 아니한다. 모두가 깨닫지 않을 때 누구도 깨달은 것이 아니다.
개인의 구원, 개인의 해탈이 아니라 인류의 공동작업을 통한 인류전체의 대승적 구원이다. 기독교적 구원과 불교적 해탈의 변증법적 통일이며 그 귀결은 문명의 창조를 통한 신의 창조에의 동반이다.
[진리에 접근하고 있는가?]
인생에 무수한 질문들이 있다. 문제들에 하나하나 답할수 있다. 그러나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렵다. 1번과 2번의 답이 서로 상충되기 일수다. 지금은 맞는 답인데 세월이 흐르면 안맞는 답으로 변질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문제들은 서로 모순되고 침범하며 교통한다. 언제나 그렇듯 이쪽 하나가 맞으면 저쪽 하나가 틀린다. 오른편을 맞추면 왼편이 어긋나고 둘 다 맞추면 움직이지 않으며 움직이게 해놓으면 부서진다.
강한 돌 힘있으나 깨지고 연한 물 힘없으나 힘을 낳는다. 물과 돌은 댓구가 된다. 둘은 모순이나 둘이 모이어 좋은 짝이 된다. 혼돈 속에 질서가 있다. 어긋난 가운데 열림이 있다. 어둠 가운데 빛이다.
길은 하나다. 질문이 많아서 안된다. 물음들을 조직하여 근원적인 하나의 질문으로 만들어야 한다. 단 하나로 압축하여 질문하고 단 하나로 압축하여 답변해야 한다. 단 한번의 사자후가 모든 의문을 깨부수고 모든 논쟁을 잠재운다.
우리는 그것을 진리라고 이름한다. 진리의 이름으로 말해지는 것을 사상이라고 부른다. 사상은 무수한 질문들을 조직하여 하나로 압축한 것이며 하나의 답변으로 모든 답변을 갈음한다.
우리는 종교라고도 부른다. 종교는 사상에다 실천까지를 포함한다. 역사 이래 무수한 사상과 종교들이 있었다. 사상과 종교들은 이 원칙에 충실한가? 과연 모든 의문을 하나로 조직했다고 말할수 있는가?
[신에게로의 다가섬]
우리는 실용적인 방법을 알고 있다. 학문이다. 모든 문답들을 모아 하나의 백과사전을 만든다. 거기서 서로 일치하는 부분만 모은다. 철학이고 과학이다. 학문은 검증되었으나 하나가 아니며 사상은 하나이나 위험한 도박과 같다.
근원에 하나의 진리가 있다. 인간 앞에 와서 무수한 사실이 되었다. 인간은 무수히 질문하고 또 대답한다. 학문은 아래에서 귀납의 방식으로 모든 질문과 답을 모아 질서를 부여하며, 사상은 근원의 질서를 찾아 진리의 위로부터 연역의 방식으로 낱낱이 풀어낸다.
학문은 진리에 대한 인류의 공동작업이며 사상은 신에 대한 고독한 맞섬이다. 학문은 배우는 것이고 사상은 깨닫는 것이다. 학문은 점차 이루어가는 것이고 사상은 단 한번 처연하게 맞서는 것이다.
학문은 도회에 있고 사상은 광야에 있다. 학문은 도구에 있고 사상은 마음에 있다. 학문은 귀결에 서고 사상은 출발에 선다. 양자는 호응해야 한다. 깨달음은 사상으로 시작하여 이념으로 나아가고 학문으로 완성된다.
석가의 깨달음은 끝이다. 나는 깨달음으로 시작한다. 사상은 문을 여는 것이고, 이념은 길을 가는 것이며, 학문은 자취를 기록하는 것이다. 인류전체와 역사전체로 향하여 문명전체의 영광된 전진이다.
[학문과의 소통]
깨달음을 말하는 이들의 공통된 결함은 학문과의 호환성 결여다. 좋은 컴퓨터라도 프로그램에 호환성이 없다면 팔리지 않는다. 참된 깨달음은 먼저 사상체계를 확립하고, 이념으로 나아가며, 학문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진리의 본성은 보편성과 일반성이며 정체성과 절대성, 사실성이다. 본의는 호환에 있어 진리를 배반하고 깨달음이 있을 수 없는 즉 모두가 깨닫지 않으면 누구도 깨닫지 않은 것이니 모두가 들을수 있는 방법으로 말해져야 한다.
진정한 도는 교과서적 물리학, 수학, 미학, 논리학, 언어학으로 풀어질수 있어야 한다. 언어도단, 불립문자를 내세워 호환성 결여를 호도하기도 하나 틀린 생각이다. 참된 깨달음은 원융무애라 거침이 없다.
진리는 신의 것이고 깨달음은 인간의 것이나 본질에서 하나다. 소요자재하고 원융무애하니 널리 통함에 막힘이 없다. 비밀하지 아니하고 은둔하지 아니하고 가리지 아니하고 배회하지 아니하고 속이지 아니한다.
[사상, 주의, 학문]
특정 사실에 대하여 질문과 답을 조직한 것이 主義다. 자본주의, 공산주의 하는 주의들은 진리에 대하지 아니한 즉 사상에 미달한다. 동일한 유교를 유교사상으로 대접하는가 아니면 유교주의로 비하하는가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유교사상일 때의 유가는 독자적 진리의 개념이다. 유교주의로 내려앉으면 도교주의와 비교된 즉 상대가 있는 하나의 입장이다. 상대가 있다면 즉자에 이르지 못한 대자적 위치여서 하나가 아니다.
하나가 아니면 진리가 아니다. 둘이면 상대가 있고, 상대가 있으면 입장이 생기고, 입장이 생기면 관점이 서고, 관점은 관계로 해서 유도되는 즉 관계는 타자와의 관계여서 양자를 통일하는 객관 제 3자적 위치가 된다.
사상은 하나로 실재하며 주의는 쌍으로 기능한다. 사상은 절대이며 주의는 상대이다. 학문은 제 3자의 객관으로 통일한다. 진리는 사상의 極에 서고 이념은 주의의 對에 서고 학문은 관계의 客에 선다.
(一元-열기) (二元-나아가기) (多元-닫기)
진리 -> 이념 -> 학문
사상, 종교 주의 철학, 과학
실재를 포착한다. 관점(입장)에서 바라본다. 관계(결과)를 분석한다. 초극(1자의 주인) 주관(2자의 상대) 객관(제 3자의 관객)
종교는 진리의 위치에서 말한다. 이념은 항상 복수다. 어떤 주의든 반드시 짝이 있다. 공산주의가 상대인 자본주의의 존재를 부정하고 절대를 주장할 때 종교가 된다. 진리는 종교와 같은 계급에 선다.
진리는 학문의 근거이고 진리의 증명은 학문이다. 진리에서 유도하여 깨달음으로, 깨달음에서 대응하여 사상으로, 사상에서 의속하여 이념으로, 이념에서 인과하여 주의로, 주의에서 표상하여 학문에 이르러 완성된다.
[의상의 진단과 약사의 처방]
진단과 처방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진단은 하나이나 처방은 다양하다. 진단은 깨달음이고 처방은 학문이다. 처방없는 진단은 허구이며 진단없는 처방은 요행수다. 진단은 의사가 하고 처방은 약사가 한다. 진단으로 얻은 병명은 하나이고 처방으로 주는 약은 여러 가지다.
진단 따로 처방 따로다. 또한 둘은 서로 소통한다. 약을 주는 것은 약사이지만 치료한 사람은 의사이다. 세계를 구하는 것은 과학이지만 참된 의사는 사상가이다. 본질에서 하나이나 역할분담이다.
깨달음과 학문의 소통을 부인한다면 진단과 처방을 혼동하고 있다. 의사의 병은 하나라도 약사의 약은 다양하다. 학문을 부인하는 명상가는 처방없이 진단하는 의사요, 명상을 부인하는 학자는 진단없이 처방하는 약사다.
달리는 말을 쓰러뜨리는데는 촌철로 충분하다. 게으런 말을 일으켜 세우는 데는 채찍과 당근의 정교함이 갖추어야 한다. 잘못 깨우침을 바로잡는데는 일갈이 족하나 무지에 잠든 자를 일깨우는데는 충분한 언어가 필요하다.
진리는 신을 반영하고 학문은 세계를 반영한다. 둘은 소통하며 명상가는 신과 세계 사이에 선다. 세계가 발달할수록 언어는 증가하며 언어가 늘수록 학문은 커진다. 아무리 커져도 진리의 경계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
장님이 코끼리를 만진다. 부분을 만진 사람은 神秘家가 되고 전체를 만진 사람은 分析家가 된다. 부분을 만져 전모를 알수 없고 전체를 만져 움직임을 알아채지 못하거니 물러나 한번 눈을 뜸에 미치지 못한다.
역사시대에 걸쳐 많은 사상과 주의들이 발표되었으나 참된 하나에 이른 경우는 없었다. 사상이라 말하고 있으나 주의이기 일수다. 관점과 입장을 가지고 있다. 관점이 존재한다면 이미 관측과 피측의 둘이다.
관점과 관계와 입장을 끊어야 한다. 코끼리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 뿐이다. 관점의 통일에 의한 관점의 이동이다. 관측의 방법으로는 불확정성을 극복할수 없다. 깨달음은 귀납이 아닌 연역이어서 불확정성을 넘어선다.
인간의 낮음에서 진리의 높음으로 올라가려 해서는 불확정성의 벽에 막힌다. 진리의 엘리베이터가 인간의 발밑으로 내려올 때 참된 경지를 본다. 진리는 창조의 진리이며 자기세계를 창조하므로서 창조를 안다.
신이 창조한 세계를 분석하여 아는 과학의 방법론은 계단을 밟아 올라가는 귀납의 知요, 인간의 세계를 창조하므로서 達하는 깨달음의 방법론은 엘리베이터가 발밑으로 내려오는 연역의 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