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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3071 vote 0 2022.12.26 (16:55:52)

    세상은 변화다. 변화는 근본에서 일어나는데 우리는 말단에 대응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엔진이 꺼졌는데 바퀴를 수리하는 격이다. 헷갈릴 수 있다. 막연한 근본타령은 곤란하고 그 분야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야 한다. 각 분야가 있고 그 분야의 근본이 별도로 있다.


    내연기관 자동차의 근본은 엔진이고 전기차의 근본은 배터리다. 효율을 위주로 하는 경제의 근본과 권력을 위주로 하는 정치의 근본은 다르다. 한 분야의 근본을 찾으면 거기에 꽂혀서 다른 것을 무시하는 좁은 시야가 실패의 원인이다. 게임은 또 변하는데 말이다.


    근본은 최종적인 에너지 공급자와 그 에너지를 연결하는 루트가 있다. 고장이 났다면 전원이 나갔거나 회로가 나갔거나 둘 중에 하나다. 심장이 망가졌거나 혈관이 막혔거나다. 무엇보다 세상이 변화라는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변화를 긍정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하나의 정답을 찾으면 거기에 머무르며 공짜 먹으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대부분의 실패는 하나의 핵심을 찾으면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서울대만 입학하면 귀족으로 신분상승을 했으니 고생은 끝났다는 식이다. 


    그러나 환경은 변한다. 신곡이 나오고 유행이 바뀌고 유행어가 뜨는 현장의 변화를 즐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변화를 선점하고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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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서구의 원론을 배워야 한다. 원론의 내용은 수학자의 관심사일 뿐이고 우리는 그 배경이 되는 원론의 이념을 배워야 한다. 뭐든 최초의 출발점이 있는 법이다. 잡아야 할 단서는 그곳에 있다. 중간에 끼어들지 말고 최초 출발점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왜 원론이 있는가를 생각하라. 변화는 톱니가 맞물려 돌아간다. 에너지의 입력부터 출력까지 전부 연결되어 있다. 시계의 분침과 초침은 하나의 태엽이 관장한다. 변화는 일원론이다. 모두 연결시켜 한 묶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변화가 맥락 없이 나타나는 일은 없다. 


    모든 개소리는 맥락을 무시하고 변화가 낙하산 타고 뛰어든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것은 느낌이다. 당황한 것이다. 변화는 원인이 있다. 원인을 모르면 화가 나고 화가 나므로 이게 다 누구 때문이라며 사람에게 화풀이를 한다. 이는 상대의 반응을 끌어내는 행동이다. 


    세상을 변화로 볼 것인가, 불변으로 볼 것인가? 그 간극은 크다. 변화를 부정하고 세상이 고착되어 있다고 믿는다면 원론은 필요 없다. 서구의 사상가 중에 원론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없다. 자기 전문 분야로 범위를 좁혀야 원론의 사유가 힘을 발휘한다.


    기계공은 기계 안에서 원론이 되는 핵심을 짚어낸다. 비행기를 어떻게 공중에 띄울 것이냐가 핵심인지 아니면 비행기를 공중에서 어떻게 조종하는지가 핵심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비행기를 띄우는 문제는 중력과 싸우지만 비행기를 조종하는 문제는 바람과 싸운다.


    랭글러 박사는 바람의 힘을 몰라서 실패했고 라이트 형제는 바람을 이해해서 성공했다. 어른이 날리는 방패연과 어린이가 날리는 가오리연의 차이다. 이론을 적용하여 잘 만든 방패연이 꼬라박고 대충 만든 가오리연이 날아오르니 랭글러 박사가 화를 낼 만도 하다. 


    이 분야는 바로 이게 핵심이야. 바로 이게 원론이라구. 하는게 있다. 야구에도 있고 축구에도 있다. 우리는 그러한 핵심을 잡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스티브 잡스든, 빌 게이츠든, 일론 머스크든, 워런 버핏이든 한 분야의 핵심을 잡았다가 환경이 변해서 도루묵 된다.


    동양사상의 원론은 주역의 밸런스 개념이다. 모든 아이디어의 출처다. 이 하나의 아이디어를 무한복제한다. 애매한 말이지만 양자역학 시대는 의미가 있다. 밸런스만으로 부족하고 밸런스의 축이 움직이는 루트를 알아야 한다. 밸런스가 작동하는 계를 알아야 한다. 


    계를 지배하는 상호작용을 알아야 한다. 밸런스가 근본 에너지와 회로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에너지의 의미를 모르면서 밸런스를 안다면 맹랑한 수작이다. 막연한 균형은 교착을 부를 뿐이다. 교착을 타개하는 에너지 조절장치가 찾아야 할 진짜다. 


    서구는 원자론과 인과율 그리고 유클리드의 원론과 기독교의 일원론,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일정 부분 원론의 역할을 했다. 나름대로 한 줄에 꿰어내려는 노력을 한 것이다. 원론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없지만. 동양정신의 합리성은 변화를 긍정하는 주역에 기초한다. 


    문제는 기독교에 잡혀 있는 서양이 동양의 합리주의를 배우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동양인들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공자를 이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300년 전에 살았던 안정복은 이해했는데 김용옥은 모른다. 서구 계몽주의 관점에 오염된 때문이다.


    독일 관념론 철학은 공자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은 재빨리 공자를 버렸다. 서구가 중국철학에 관심을 가진 시기는 짧았다. 그들은 재빨리 중국을 따라잡고 중국을 버렸다. 그리스와 로마를 논외로 하면 서구인이 사람 행세를 한 시기는 길지 않다. 중세는 민족이동이다.


    게르만족은 10세기 전후로 기독교로 개종하고 비로소 사람이 되었다. 그 이전에는 바이킹이 해적질을 하고 다녔다. 민족이동을 멈추고 한 장소에 자리를 잡은 역사는 길지 않다. 문명은 정착이 완료된 다음에 시작된다. 그들은 남에게 배우려는 생각이 있었던 거다.


    대부분 자기네가 가장 앞서 있다고 믿고 배우지 않는데 게르만족이 유일하게 뭔가를 배워보려고 시도한 것이다. 왜냐하면 민족이동을 멈추고 정착해야 했기 때문이다. 정착을 하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하지? 법부터 제정하자? 교회부터 건축하자? 의회를 만들자?


    워낙 낙후되어 있어서 도무지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원론을 사유해야 했던 것이다. 살던 집을 리모델링하지 않고 빈터에 새로 집을 지으려면 원론을 사유하게 된다. 신대륙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은 빈 땅에 국가를 어떻게 세울지 고민을 해야만 했다. 


    몽골과 왜구의 침략으로 국토가 거덜 나자 국가를 원점에서 다시 건설해야 한다고 여겼던 신진사대부와 같다. 동양이 서양을 이기는 이유는 동양에는 서구를 배우려는 자세가 있고 지금 서양에는 그 자세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점으로 동양사상은 배울게 없다. 


    동양인들도 자기네가 가진 밑천이 무엇인지 모른다. 물어봐도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전통이 있기 때문에 서구인에 없는 특별한 직관력이 발달해 있다. 어떤 서양 사람이 ‘부정적 사고의 힘’ 한마디로 노자를 정의했다. 노자사상의 본질을 꿰뚫어본 것이다. 


    도덕경을 공부한 동양의 많은 지식인 중에 노자를 이해한 사람은 없는데 어깨너머로 배운 서양에는 있었다. 중국인은 원래 부정어법을 즐겨 쓴다. 가자고 하지 않고 왜 머물려고 하는가 하고 반문하는 식이다. 절대 자기 속을 밝히지 않는 음흉한 문화 때문이다. 


    긍정의 문화에 익숙한 서양인의 사고로 다름을 알아본 것이다. 동양인은 동양인을 모른다. 기생충의 가치를 알아본 한국인은 많지 않다. 라쇼몽의 가치를 알아본 일본인도 없다. 다름은 다른 곳에서 알아본다. 수학자는 숫자 안에서 완벽하다. 체계 바깥은 모른다. 


    누구든 자기 분야에서는 완벽하다. 받쳐주는 상호작용의 상대가 있기 때문이다. 전쟁을 하다보면 점점 똑똑해진다. 멍청한 부대는 전멸하고 상승부대가 남기 때문이다. 서양이 동양을 앞서는 이유는 더 많은 전쟁을 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극과 반응의 상호작용 구조 안에서만 현명하다. 외부와 연결하는 끈이 있으며 인간은 그 잡은 끈을 놓지 못한다. 잡은 것을 놓지 못하므로 다른 것을 잡지 못한다.


    순암 안정복의 기독교 비판은 신학자였던 같은 시대 서양의 뉴턴에 비해 사유의 수준이 월등히 앞서는 것이다. 뉴턴이 내세의 구원에 매몰되어 있을 때 안정복은 현실의 문제를 진단한다. 문제는 현실과 연결하는 끈이 없다는 점이다. 유교가 도덕이라는 총으로 쏠 수 있는 사냥감은 많지 않다. 


    일정한 성취를 이뤄냈지만 충분하지 않다. 동양문명은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 문명이다. 기독교문명도 결함이 있다. 서구문명은 아프리카, 인도, 아랍, 게르만, 지중해 다섯 문명권의 총합이다. 동양문명은 잉카문명과 같은 고립문명에 가깝다. 


    좋은 것은 언제나 동양에서 서양으로 흘러 들어갔을 뿐 그 반대의 경우는 많지 않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인도의 기술조차 중국으로 흘러간 흔적을 찾기 힘들다. 서양의 야금기술이 발달한 이유는 다마스커스검으로 유명한 인도강을 복제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도 인도산 강철의 위력에 감탄한 기록이 있다. 


    이런 것이 중국으로 흘러들어온 정황은 없다. 가야의 제철기술이 인도에서 온 것이 아니냐는 논의가 있는 정도다.


    연결하는 끈이 중요하다. 장성을 넘어 중국 바깥에서 오는 것은 오랑캐의 침략뿐이었다. 중국인의 사유는 여전히 장성에 갇혀 있다. 코로나19에 대한 대응이 그러하다. 조선은 외부에서 좋은 소식이 온 적이 없다. 송나라 때 한 번 좋았던 기억을 되살려 명나라 때 한 번 외교를 했다. 명과 좋았던 시절은 짧았고 내내 긴장관계였다.


    일본은 당나라 때 한 번 바람이 불었던 좋은 기억을 되살려 산업화에 성공했다. 외부에서의 나쁜 소식이 좋은 소식보다 많으면 자폐문명이 된다. 우리는 서양을 배울 수 있지만 서양은 동양을 배울 수 없다. 동양인도 모른다. 몸에 배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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