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는 두 가지 상태가 있다. 어떤 상태와 어떤 상태의 변화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어떤 상태의 변화다. 즉 두 번째 상태다. 그런데 두 번째 상태의 전제가 되는 것이 첫 번째 상태다. 먼저 어떤 상태가 있고 다음 그 상태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 어떤 상태는 평형상태다. 그리고 우리가 의도하는 상태는 그 평형이 깨진 상태다. 즉 인간은 자연에서 평형을 찾아 이를 깨려고 한다. 자연에서 평형상태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닫힌계를 설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관측이 개입하여 대상을 교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통 이 단계를 생략한다. 기본전제가 되는 닫힌계 설정문제다.
◎ 인간의 의도는 어떤 상태의 변화다.
◎ 어떤 상태는 평형상태다. 게임을 하려면 게임이 깔려 있어야 하고 그 이전에 컴퓨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전제를 놓친다. 왜? 편한 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 편한 길이 오류를 낳는다. 편한 길은 ‘입자’ 상태다. 입자상태는 관측의 오류를 낳는다. 우리의 관측은 한 개나 두 개와 같은 낱 개個가 정해져 있다. 예컨대 소가 있다면 소는 한 마리의 형태로 존재한다. 소가 딱 반 마리만 있다든가 하는 일은 없다. 입자는 단위가 있으므로 셈하기 편하다. 문제는 죽은 소나 병든 소가 있다는 거다. 송아지도 있다. 노새나 버새처럼 애매한 것들도 있다. 입자단위는 오류를 낳는다. 과학은 입자를 부정해야 한다. 입자 단위의 왜곡을 제거하려면? 낱개를 제거해야 한다. 한 개 두 개 하고 셈하는 단위를 없애버려야 한다. 그런데 자연에서 단위가 미리 제거되어 있는 것이 열역학이다. 열은 담아낼 통이 없다. ‘열통에 열 백개만 담아오시오.’ 하고 시킬 수 없다. 열은 꼼수를 부릴 수 없다. 열역학은 병든 것이나 썩은 것을 갖고와서 대략 눈가림 속임수를 쓴다든가 할 수 없다. 그래서 진실이 드러난다. 셈의 단위인 입자를 제거하면 무엇이 남는가? 양자가 남는다. 양자는 대칭이다. 대칭은 평형이다. 평형과 비평형, 대칭과 비대칭으로 해명해야 바르다. 입자의 극복에서 진정한 과학이 시작된다. 열역학의 핵심은 제 2 법칙이다. 제 2법칙은 방향을 다룬다. YES와 NO 중에서 길을 선택한다. 세상 모든 문제가 따지고 보면 갈림길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다. 마이너스를 선택해주면 된다. A에서 B로 갈 수는 있으나 B에서 A로 올 수는 없다. 이것이 열역학이다. 왜? 닫힌계의 설정 때문이다. 담장을 쳐놨다. 못 들어간다. 일상적으로는 한 개 두 개 하는 개가 있어서 이를 건너뛴다. 왜? 호박 한 개가 있든 수박 한 개가 있든 낱개가 있으면 반드시 껍데기가 있는데 이 껍질이 닫힌계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물이나 기름이라면 그 개가 없다. 대신 들이가 있다. 물통이 있다. 그래도 속일 수 있다. 여름에는 기온이 올라가므로 휘발유가 팽창한다. 그러므로 겨울에 기름을 사재기하여 저유고에 쟁여놨다가 여름에 팔면 5퍼센트를 남겨먹는다. 기름을 끓이는 얌체도 있다. 껍질이 있는 개는 닫힌계가 있는 대신 껍질 자체에 속임수가 있다. 껍질있는 게도 물렁게가 있어서 잘못 사면 영덕대게라고 샀는데 홍게만큼이나 살이 없는 경우가 있다. 결론인즉 믿을수 없다. 껍질이 있으면 있는대로 속이고 껍질이 없으면 담는 용기로 속인다. 수박은 덜 익은 수박으로 속이고 쇠고기는 물 먹인 쇠고기로 속인다. 그러므로 껍질도 없고 용기도 없는 걸로 과학해야 한다. 속일 수 없는 것이 있다. 평형과 비평형의 논리다. 그래서 열역학 법칙은 모든 과학의 어머니 지위를 누린다. 유체역학도 용기나 껍질로 속이기 어렵다는 점에서 열역학과 비슷한 값어치가 있다. 닫힌계로 막으면 무엇이 얻어지는가? 대칭이 얻어진다. 자연의 어떤 상태는 대칭상태다. 대칭상태는 안정된 상태다. 안정되지 않으면? 운동한다. 운동하면 변화한다. 변화를 제거하면 대칭상태다. 모두에서 말한대로 자연에는 어떤 상태와 어떤 상태의 변화 밖에 없으므로 변화를 제거하면 어떤 상태밖에 없고 어떤 상태는 안정된 상태이며 그 상태는 양자적인 대칭상태 곧 짝수상태이다.
◎ 자연의 어떤 상태는 평형이다. 평형상태는 짝수상태, 평형이 깨지면 홀수상태다. 의사결정은 짝수상태를 홀수상태로 바꾼다. 우리는 자연의 어떤 상태가 평형상태임을 전제로 의사결정하여 그 상태를 홀수로 바꾸어 답을 얻는다.
◎ 의사결정 이전에 닫힌계 내부는 평형이다. 닫힌계에서 평형은 짝수이며 그 상태의 변화는 마이너스 방향의 홀수 밖에 없다. 즉 짝수에서 홀수는 가능해도 그 반대는 불가능한 것이다. 왜? 닫혔기 때문이다. 껍질 때문이다. 용기 때문이다. 물이나 기름은 플라스틱이나 금속용기에 담아놔서 닫혀 있고 과일이나 동물은 껍질이나 피부 때문에 닫혀 있다. 돌이나 쇠붙이라도 분자의 화학적 결합에 위해 닫혀 있다. 모든 상태는 닫혀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썩은 것, 물 먹은 것, 말라비틀어진 것, 쪼그라든 것, 금이 간 것, 병 걸린 것, 망한 것 등이 꼽살이 끼어 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열려있다는 것이다. 열려 있으면 죽는 수가 있다. 우유를 샀는데 용기의 뚜껑이 열려있다면? 세균이 들어갔을 수 있다. 그렇다면? 먹을 수 없다. 버려야 한다. 절대로 닫혀있어야 하며, 그래야 내부의 평형이 유지되며 닫힌상태에서 의사결정은? 결론은 마이너스다. 플러스는 없다. 닫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사결정이 일어나면 그 결과는 무조건 평형을 깨트리는 마이너스인 것이다. 도박판에서 중간에 나간 넘은 무조건 잃은 넘이다. 따고 중간에 튀는 먹튀는 용납할 수가 없다. 돈을 따면 잃은 사람이 동의할때까지 계속 도박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열역학의 세계에서는 중간에 의사결정이 개입하면 무조건 손실이 일어난다. 의사결정량의 증가≫무질서도의 증가다. 그러므로 무한동력 장치는 있을 수 없다. 입력에서 출력까지 닫혀 있으며 그 사이에 어떤 짓을 하든 의사결정이며 의사결정은 열손실로 결과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질서도라는 표현이다. 오해하기 딱 좋은 단어다. 의사결정 총량증가로 해야 한다. 이런 내막을 굳이 실험할 필요는 없다. 사유실험으로 충분하다. 언어로 이해하는 것이 구조론이다. 구태여 실험하지 않고 언어로 해결하는 것은 수학이다. 수학은 숫자를 쓰는데 그게 언어다. 구조론 역시 수학이므로 언어로 해결한다. 언어는 주어와 동사로 세팅하여 1 소통단위를 이룬다. 주어는 어떤 상태이고 동사는 어떤 상태의 변화다. 우리의 목적은 동사다. 언어는 소통의 매개이고, 소통은 주체와 대상의 일치이며, 일치는 짝수인데 짝수는 홀수+홀수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언어는 대상을 지시한다. ◎ 존재측 : 말(주어)이 달리다(동사) ↔ 달리는(동사) 말(주어)이다. : 인식측 주어는 짝수이고 동사는 홀수이며, 인간은 동사를 추적한다. 동사는 주어에서 획득된다. 비로소 말이 통하여 가치가 획득된다. 이렇듯 언어는 자연의 패턴을 복제하므로 정당성을 획득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관측이 문제다. 관측의 개입 때문이다. 닫힌계로 막아서 외부개입을 차단해야 하는데 관측이 개입한다. 그런데 관측은 헷갈리는 비과학적 언어이므로 의사결정으로 해야 한다. 양자상태의 빛을 관측하면 입자가 되는데 인간이 관측하기 때문이 아니고 닫힌계를 헐어서 의사결정하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인문학적 소양의 부족으로 잘못된 표현을 써놓고 헷갈리는 거다.
◎ 관측은 인간 위주의 잘못된 표현이다. 인간이 관측한다고 해서 빛이 입자가 되거나 할 리가 없다. 관측하려면 개입해야 하는데 개입하면서 닫힌계를 허물어 견본을 오염시켰기 때문이다. 때묻은 손으로 세포를 만지면 과학이 되냐고. 양자는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이며 기본적으로 파동이다. 관측하면 관측자에 대해서 위치와 속도를 특정해야 하므로 상태를 바꾸어 입자가 된다. 그런데 입자는 인간에 관측되어 결정된 상태다. 자연에서 궁극적인 존재는 사물이 아닌 사건이며, 입자가 아닌 양자상태다. 입자는 거기에 껍데기를 부여한 것이다. 그 과정에 왜곡이 들어감은 물론이다. 병든 넘, 썩은 넘, 죽은 넘 나온다. 인간은 고체로 된 것은 껍데기를 부여하고, 액체로 된 것은 들이容器를 부여하여 존재를 계량하며 그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난다. 왜곡을 방지하기 위하여 가상으로 부여한 껍질이 닫힌계다. 닫힌계 안에서의 의사결정은 닫혔기 때문에 무조건 마이너스다. 그러므로 열역학의 방향성 곧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 성립한다. 의사결정이 들어가면 무조건 에너지 손실이 일어나는 것이다. 닫힌계 안에서 껍데기나 들이容器를 대신하는 것은 대칭≫비대칭이다. 정확하게는 의사결정이다. 초딩이든 중딩이든 고딩이든 혹은 소대이든 중대이든 대대이든 이런 단위들은 의사결정 단위다. 질량보존의 법칙과 같은 표현은 비과학적 표현이다. 의사결정의 대칭성 원리로 명명해야 한다. 사건의 원인과 결과 사이에 의사결정이 있다. 어떤 결정이 일어나든 전체적인 값은 동일한 것이다. 이런건 대개 의사결정을 하려면 닫힌계 밖에서 자극이 들어와야 하는데 그 자극 만큼 열로 바뀌어 빠져나가는데 그 새나간 것을 회수해서 계산하면 같다는 거다. 근데 항상 빠져나가기만 한다.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 사이에 어떤 상태의 변화는 평형을 깨뜨리고 그 사건의 종결은 다음 단계의 평형으로 옮겨가며 그 역시 짝수가 되어야 하므로 무조건 100에서 2가 빠져나가는 것이다. 반드시 짝수가 빠져나간다. 100이 있는데 평형을 이루고 있다. 사건이 일어나려면 50 대 49가 되어야 하므로 1이 빠져나간다. 사건이 종결되려면 49 대 49가 되어야 하므로 역시 1이 빠진다. 사건이 종결되지 않으면? 변화가 지속되게 된다. 자연에서 어떤 상태와 어떤 상태의 변화 둘 밖에 없으므로 물샐틈없이 닫힌계를 둘러치고 외부에서 때려보면 쉽게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다. 무한동력 장치는 절대로 없다. 이건 누구나 다 아는 거다. 중요한건 이렇듯 법칙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거다. 왜냐하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걸쳐 매우 많은 무한동력장치들이 있기 때문이다. 안철수나 박영선이 하는 짓을 보면 문재인에게 공천권을 안 주기 위해 의사결정을 어렵게 만들려고 한다. 무한동력 아저씨들은 전원과 부하 사이에 무슨 장치를 하나 끼워넣는다. 하는 짓이 같다. 어떤 장치든 입력과 출력 사이에 장치가 들어가면 그 장치는 무언가 의사결정을 하는 장치일테고 그렇다면 비용을 유발한다. 무조건 에너지 손실이다. 무조건 의사결정의 난맥상이다. 비용증가다. 닫힌 공간에서 누구 한 명이 빠지는 방법으로만 의사결정이 가능한 경험은 일상적으로 무수히 하는 것이다. 정치라도 마찬가지다. 불필요한 관절을 하나 더 만들면 무조건 의사결정에 실패한다. 이명박의 사대강도 불필요한 무한동력이다. 옥상옥을 만드는 것이며, 쓸데없는 관절을 추가하는 것이며, 중간보스가 개입하는 것이며, 부족주의가 작동하는 것이다. 박근혜의 협잡도 마찬가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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