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과 깨달음 인식의 문제는 관점의 문제다. 인간과 관측대상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이냐다. 보통 이 문제를 그냥 건너뛰고 넘어간다. 사람이 만나면 먼저 인사를 해서 서로간의 관계를 설정하고 대화를 하는데, 인간의 인식 또한 그런 관계설정의 문제가 있으며, 이러한 관점의 문제가 인식의 방해자가 된다. 관측자와 관측대상 사이의 관계설정에서 앎과 깨달음이 나눠진다. 앎은 관계설정이 필요없는 것이다. 그것은 정지해 있는 것, 약한 것, 타자화 되고 대상화 되는 것, 3인칭으로 존재하는 것들이다. 우리가 사적인 공간에서 우간다나 짐바브웨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는 함부로 ‘깜둥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씨바’나 ‘졸라’가 들어가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지해 있고, 약하며, 타자화 되고, 3인칭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왜 인사를 차리지 않느냐고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태여 예의를 갖출 필요가 없다. 그런데 움직이는 것, 강한 것, 타자화 되지 않는 것, 대상화 될 수 없는 것, 2인칭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어떨까? 당연히 인사를 차려야 한다. 머저리 부시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눈치볼 필요가 없지만, 대통령 오바마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잘못하면 야단맞는 수 있다. 예의를 갖춰야 한다. 타자화 된다는 것은 국경 바깥에 있는 남남이라서 절대 날 건드릴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예컨대 일본인들이 함부로 망언을 일삼는 이유는 그래봤자 바다 건너 저쪽 대륙에 사는 지들이 어쩔건데 하는 오만방자한 생각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현해탄 건너가서 패줄 수도 없고, 일본상품 불매운동 벌여봤자 간에 기별도 안 가기 때문이다. 반면 EU의 여러나라들이라면 어떨까? 독일이 프랑스에 대해 망언을 할 수는 없다. 당장 타격을 받는다. 하나의 대륙 안에서 엮여있기 때문이다. 대상화 된다는 것은 말하자면 창녀취급하듯이 일종의 상품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 인간대접을 하지 않는다.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는 3인칭들이나, 사물이나, 죽은 것이나, 흘러간 것들은 앎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반드시 예의를 차려야 할 때가 있다. 초보운전자라면 자동차 탈 때도 공손해야 한다. 차 문을 닫아도 살살 닫아야 한다. 운전석에 앉을 때도 겸손하게 앉아야 하며 시동을 걸 때는 경건한 마음으로 걸어야 한다. ‘자동차 형님! 이번에도 잘 부탁합니다.’ 하는 마음이어야 한다. 왜? 3인칭이 아니라 1인칭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동차와 내가 일체가 되었다. 자동차는 남이 아니고 나다. 타자화 되지 않고 대상화 되지 않는다. 그런 지점이 있다. 신사는 자기가 입은 양복을 소중히 다룬다. 양복을 확 패대기치는 것은 자기 자신을 패대기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넥타이를 확 잡아당기면 자기 목만 졸라진다. 넥타이는 살살 풀어야 한다.
◎ 3인칭의 지식 – 분별하여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남북한 관계라면 어떨까? 만만하지 않다. 함부로 했다가는 서울 불바다 발언 나온다. 서로 인접하여 엮여있는 것은 주객이 전도되는 수가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역설의 세계다. 역설은 의도와 반대로 되는 것이다. 되치기 당한다. 강한 것, 건드리면 안 되는 것, 살아있는 것, 움직이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뱀이 작아도 독사일 수 있다. 벌이 작아도 독침을 숨기고 있다. 벌레가 작아도 전염병을 옮길 수 있다. 함부로 건드렸다가 피본다. 역설에 대응하는 것은 얕은 깨달음이다. 선제공격을 하지 말고 신중하게 대응하면 된다. 역설의 세계에서는 무리한 선제공격을 삼가고 찬스를 기다렸다가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면 된다.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는 1인칭의 세계다. 나와 일체가 되는 것이다. 타자화 될 수 없는 것, 대상화 될 수 없는 것, 나와 공동운명체를 이루는 것이다. 말에 올라탄 기수는 말을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운전자는 함부로 했다가는 사고나는 수 있다. 진리라는 자동차, 역사라는 말, 진보라는 공동운명체, 자연이라는 한 배를 탔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다. 점점 발전하는 기업, 팽창하는 조직, 불어나는 식구, 사랑하는 사람, 내부에 스핀이 걸려 있는 것, 팽팽한 긴장상태로 존재하는 것, 자연에 에너지가 있고, 사회에 권한이 있고, 마음에 존엄이 있는 것은 이러한 1인칭의 원리가 작동한다. 이 때는 분별하여 아는 지식으로 부족하고 운전자가 차를 다루듯이, 기수가 말을 다루듯이 살살 꼬드겨 다룰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깨달음의 세계다. 신과 진리와 역사와 자연과 문명과 진보와 환경은 나와 일체가 되어 있으므로 1인칭의 세계다. 당연히 깨달음이 필요하다. 진리를, 역사를, 자연을, 문명을, 진보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대상을 아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아는 것이 아니라 관측자인 나와 대상과의 상호작용에서 호흡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본래 무였으나 그 순간에 도출된다. 그것은 있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이 새로 생겨나는 창의의 세계다. 자동차의 무단기어와 같다. 있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에 창의하여 생성해낸다. 모든 성장하는 것, 발전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라는 것, 내부에 스핀이 걸린 것, 상호작용하는 것은 깨달음의 원리, 동적균형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다. 내가 능동적으로 선제대응해야 한다. 그냥 함부로 다루면 안 될 뿐 아니라 눈치를 보며 되치기를 해도 안 된다. 역이용하려 해도 안 된다. 역설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남북한 관계처럼 대칭적인 관계는 역설의 원리가 작용하나 주인과 고객의 관계, 부모와 자식의 관계, 나와 내 차의 관계는 역설의 세계가 아니다. 주인이 애마를 다루는 방법, 사랑하는 사람을 다루는 방법, 엄마가 아이를 다루는 방법은 되치기로 이기는 역설의 세계가 아니다. 남한이 북한을 다루는 방법으로는, 오바마가 푸틴을 다루는 방법으로는 실패한다. 이 세계는 1인칭의 방법을 써야 한다. 동적균형의 방법을 써야 한다. 선제대응해야 한다. 숨어서 엿보며 기다렸다가 반격하는 방식은 곤란하다. 신의를 지켜야 한다.
◎ 3인칭의 사물 – 관측자 입장을 무시하는 일반적 지식으로 충분하다. 깨달음의 표현에 물아일체라거나 무라거나 공이라거나 무아라거나 평상심이라거나 하는 표현들이 쓰이는 이유는 1인칭을 나타내려는 의도 때문이다.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룰줄 아는 것이다. 이미 한 배를 탔기 때문이다. 토대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죽이면 나도 죽기 때문이다. 주인이 고객을 속이거나, 경영진이 노동자를 골탕먹이거나, 아프리카에 난로를 판다거나, 에스키모에 냉장고를 팔다가는 상대방도 죽고 나도 죽는다. 어떤 경우에도 아프리카에 가서 난로장사를 하면 안 된다. 그것은 배신이다. 명박의 꼼수로는 곤란하다. |
1.
타자의 세계는 지식의 세계다. 타자의 세계에서 관측대상이란, 수도 없이 많은 다른 관측 대상들로 대체 가능한 특별할 것 없는 목록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 곳에서 대상과 주체는 서로 아무런 영향을 주고받지 못한다.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상과 주체는 같은 토대를 공유하지 않는다. 이 곳에 속한 지식인들은 너나 할 것없이 자신들만의 분류학을 소리높여 주장하지만, 뚜렷한 흐름에 있어서는 합의를 보지 못한다. 주체는 야만적이고 배은망덕하며 예의를 지키지 않고, 가치 판단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타자의 세계는 마치 사람이 없는 도서관처럼 쓸모가 없다. 소통은 없고, 깨달음도 없다.
2.
공존의 세계에서 주체는 링 위에 오른 복서가 상대방의 몸짓을 예의주시하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긴장 속에서 대상을 다룬다. 주체와 대상은 링이라는 토대를 공유하고 있으며 주체는 대상의 행동에 따라 자신의 자세를 바꾼다. 이 곳에서는 대상의 힘을 이용, 카운터펀치로 대상을 쓰러뜨리는 일이 가능하다. 공존의 세계에서 진정한 의미의 공존이란 대상을 제압하여 대상의 의도를 소거했을 때 가능하다. 보통은 선제공격을 하지 않고 빈틈을 노리다가 역습을 감행한다. 한 쪽의 약점이 다른 쪽의 강점으로 가산되는 기계적인 게임의 법칙을 따를 뿐이므로 진정한 소통이라고 할 수 없다.
3.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사대강 삽질이나 정몽즙 꼼수가 먹히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는 추잡한 거짓말이나 치졸한 되치기도 통하지 않는다. 자신이 상대해야 할 것은 자기자신이기 때문이다. 내가 죽는 방법은 남에게도 쓸 수 없다. 주체는 운전석, 대상은 조수석에 타고 있지만 결국은 같은 자동차를 타고 있다. 책임감이 있는 주체가 의사 결정을 내리고 가치판단을 한다. 가야할 길을 알기 때문에 방향성이 있고 가치판단을 하기에 윤리에 무감각하지 않다. 동적균형과 상호작용이 깨달음을 가능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