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한 것은 분별하고 움직이는 것은 다룬다 ‘동적균형’을 깨닫는 것이 깨달음이다. 고정된는 것을 분별할 줄 아는 것이 일반의 지식이라면, 움직이는 것을 다룰 줄 아는 것은 깨달음이다. 동적균형을 알아야 움직이는 것을 다룰 수 있다. 깨달음의 앎이 필요한 것은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 점차 성장하는 것이다. 움직이는 자동차, 살아있는 사람, 항해하는 배, 발전하는 조직, 성장하는 기업, 사랑하는 사람과 같다. 그냥 아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그것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대상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가로막는 장벽이 있다. 그것은 관점의 문제이다. 대상과 나 사이에서 관계설정의 문제이다. 자동차를 운전하려면 차에 올라타야 한다. 움직이는 자동차를 세워야 그 자동차에 올라탈 수 있다. 그 자동차의 움직임을 따라잡아야 한다. 달리는 야생마를 길들여야 한다. 깨달음이 필요하다. 모든 움직이는 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의사결정이다. 의사결정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일어나고, 상호작용은 토대의 공유에 의하여 일어나고, 토대의 공유는 동적균형에 의하여 일어난다. ◎ 깨달음≫의사결정≫상호작용≫토대공유≫동적균형 모든 존재는 내부에 움직임을 담고 있다. 가만있는 것처럼 보여도 내부에서는 활발하게 운동하고 있다. 양자단계에서 중력과 상호작용하고 있다. 강력과 약력, 전자기력과도 상호작용하고 있다. 그것은 에너지다. 자연에는 에너지 처리의 동적균형이 있고, 사회에는 권한행사의 동적균형이 있고, 마음에는 존엄의 동적균형이 있다. 동적균형을 통해 자연과 사회와 인간은 의사결정한다. 깨달음은 에너지에 의해 운행되는 자연과, 권한에 의해 운행되는 사회와, 존엄에 의해 운행되는 인간의 의사결정원리를 깨닫는 것이며, 그 답은 동적균형이다. 계 내부에 무엇인가 숨어 있다. 당구공을 쳤는데 당구공이 예상된 방향으로 굴러갔다면 원인은 당구공에 있지 않고 당구공을 친 사람에게 있다. 그런데 만약 당구공이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갔다면? 원인은 당구공 자체에 있다. 그 당구공은 보통의 당구공이 아니라 스핀이 걸린 당구공이다. 파워볼과 같다. 내부에 RPM이 걸려 있다. 돌아가는 팽이와도 같다. 생명있는 것처럼 살짝 건드려도 강하게 튕기는 것이 있다. 당구공이 아니라 만약 살아있는 생쥐라면 어떨까? 자연의 사물 내부에 에너지가 숨어 있다면, 사회의 조직 내부에 권한이 숨어 있다면, 인간 내부에 존엄이 숨어 있다면 예측대로 가지 않는다. 당구공이 가는 방향은 큐대가 정하지만 생쥐가 가는 방향은 생쥐가 결정한다. 자연은 에너지가 결정하고, 사회는 권한이 결정하고, 인간은 존엄이 결정한다. 결정하는 측이 사건의 원인이다. 자연의 원인은 에너지, 사회의 원인은 권한, 인간의 원인은 존엄이다. 자연 내부에 에너지라는 스핀이 걸려 있고, 사회 내부에 권한이라는 스핀이, 인간 내부에는 존엄이라는 스핀이 걸려 있다. 그것이 동적균형이다. 존재는 사건이며 사건은 동적균형을 통해 에너지를 처리한다. 동적균형을 잃으면 토대의 공유에 실패하여, 상호작용을 일으키지 못하므로 에너지 작용을 처리할 수 없다. 의사결정에 실패하는 것이다. 의사결정에 실패하면 존재는 무산된다. 자동차는 고장나고, 사람은 죽고, 배는 침몰하고, 정부는 붕괴하고, 국가는 정복당하고, 조직은 해체되고, 기업은 망한다. 반대로 자동차를 운전하고, 사람을 살리고, 배를 띄우고, 국가는 부흥하고, 조직은 발전하고, 기업은 번영하고, 일은 지속되어야 비로소 존재의 지위를 얻는다. 동적균형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 존재는 그냥 존재가 아니라 사건의 존재이며, 살아있는 존재이며, 에너지를 처리하는 존재다. 삶과 죽음 사이에, 존재와 부재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에너지 처리가 있다. 의사결정원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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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한 것은 분별하고 움직이는 것은 다룬다'
지식은 분별하지만, 깨달음은 다룬다.
야구공에 대해 아는 것은 지식이지만, 야구공을 잡을 수 있는 것은 깨달음이다. 상대방의 이름을 아는 것은 지식이지만,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고루한 낱말이 아니다. 깨달음은 즉각적인 쓸모가 있다. 깨달음은 즉각적으로 사건에 개입하여 즉각적으로 사건의 방향을 바꾼다. 깨달음은 그 자체로 쓸모가 없다. 형태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쓸모를 찾아 쓸모를 만든다. 깨달음과 결합한 것은 무엇이든 쓸모가 있다. 오히려 우리가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쓸모가 없다. 확장성이 없기 때문이다. 단단한 돌로는 반죽을 빚을 수 없다. 이미 완성되어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무언가를 완성시킬수는 없다. 깨달음은 확장성이다.
실용의 아버지인 이명박의 실용정부는 실용의 극치였지만 전혀 실용적이지 못했다. 이명박은 삽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포크레인이 있다는 것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쉬지도 않고 사대강 삽질을 열심히 했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한다고 하면 아무래도 미심쩍은 것이다. 그렇게 오래 걸릴 리가 없기 때문이다.
삽에 집착하는 것은 입자적 사고이다. 포크레인과 삽이 같은 형태를 공유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한개의 패턴 한 개의 모델 한 개의 원리를 세상이 공유한다는 것이 구조론의 입장이다. 패턴은 반응함으로써 복제된다. 자연에서 인간으로 아버지에서 아들로 음악에서 마음으로 컴퓨터에서 스마트폰으로. 모든 반응하는 것들은 반응함으로써 존재하고 세상에 반응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면 반응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반응은 사건이고 사건은 에너지의 입출력이다.
'존재는 그냥 존재가 아니라 사건의 존재이며, 살아있는 존재이며, 에너지를 처리하는 존재다. 삶과 죽음 사이에, 존재와 부재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에너지 처리가 있다. 의사결정원리가 있다.'
동적균형은 어디에나 있다. 인체는 매순간 좁은 범위의 활력징후를 유지하며 항상성을 고수하는 극도로 정교한 기계다. 실온에 가만히 놓여있는 물의 표면에서도 사실은 수없이 많은 물분자들의 기화와 액화가 일어나고 있다. 당신이 물이라 불렀던 그 물들은 며칠후에는 전부 물을 떠나고 없다. 암기하고 규정하고 이름 붙이고 나면 실체는 이미 증발해버린다. 바닷물은증발해 구름으로 응결된 후 비가 되어 내리고 다시 강에서 바다로 흘러든다. 에너지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며 길고 복잡한 통로를 통해 온 우주를 영원히 돌아다닌다.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단 하나의 우주적 사건이다.
나무를 잘라 나이테를 보면 그 안에 수십개 수백개의 여름과 가을이 들어있다. 나무 한 그루가 계절의 변화를 담고 있고, 오래된 화석 한 개가 지구의 역사를 담고있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시간과 공간은 한통속으로 움직이며 탐욕스러운 구조의 복제에 적극적으로 기여한다. 아버지는 자신이 낳은 아들의 얼굴에서 자신의 아버지의 얼굴을 발견한다. 역사는 반복되고 자연은 복제하며 구조는 있는데 그냥 있는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어디에나 있다. 구조가 없는 곳은 없다. 깨달음은 어디에나 구조가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것이다.
구조론관계자분들이 부럽습니다,감사
의사결정은 과정을 통해 일어나고,
깨달음은 순간에 일어난다.
개인적인 의사결정은 한 사람이 하면 그만이지만
집단의 의사결정은 모두가 함께 결정해야 한다.
집단의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진보한 사회고,
성숙한 사회고, 집단 지성이 높은 사회다.
한국은 아직 공동의 의사결정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게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