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의 24가지 질문과 답(자유게시판 아란도님의 글에 대한 것임)
1.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들어 내 보이지 않는가? 존재는 물질 개념이고 물질은 에너지 개념이다. 신의 존재는 구조론의 ‘이다, 있다, 같다, 옳다, 맞다’ 전개에서 ‘있다’가 아닌 ‘이다’개념으로 접근되어야 한다. 물질이 아닌 정보 개념이다. 신은 어떤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다. 물질=에너지는 하드웨어 개념이고 신은 소프트웨어 개념이다. 일단 개념접근에서 빗나가므로 대개 대화가 안 된다. 신을 물질적 존재로 아는 사람과의 대화는 실패다. 신의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들어 내보이고 있다. 보고도 못 보는 사람과의 대화 역시 실패다. 물질세계가 하부구조라면 그 이전의 상부구조가 있다는데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바운더리 안의 데이터간 상호작용 형태로 존재하며 어떤 독립된 개체가 아니다. 2. 신은 우주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신은 물질존재 창조과정의 발생기전을 설명하고 있다. 3.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과정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신의 인간창조와 어떻게 다른가? 인간이나 생물도 진화의 산물 아닌가? 신은 요술을 부려 인간을 창조한 적이 없다. 단지 우주를 창조했을 뿐이며 인간과 자연은 그 연장선에서 전개되었을 뿐이다. 그 창조된 우주와 인간은 정확히 분리될 수 없다. 인간과 인간의 공동체는 명확히 분리될 수 없고, 인간공동체와 자연은 명확히 구분될 수 없고, 자연과 우주 역시 명확히 구분될 수 없다. 우주와 신 역시 명확히 구분될 수 없다. 인간에게서 인간이 아닌 불필요한 부분을 전부 떼어내면 그 즉시 인간은 죽는다. 구조론으로 보면 인간 개체는 입자에 해당하고 입자는 질에서 완전히 분리될 수 없으며 분리될 때 죽는다. 4. 언젠가 생명의 합성, 무병장수의 시대도 가능할 것 같다. 이처럼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 기성종교의 신이 부정될 뿐이다. 거짓이 부정될 때 진실은 발견된다. 5.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고통과 불행은 낡은 시대의 관념에 불과하다. 사람 겁주는게 취미인 칼뱅주의자들 습관일 뿐. 6.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예 ; 히틀러나 스탈린, 또는 갖가지 흉악범들 악인은 없다. 악행이 존재할 뿐. 그리고 그 악행에 브레이크를 걸지 못하는 무능력이 존재할 뿐. 그리고 그 악이 생성되는 타락한 바운더리가 있을 뿐. 바운더리를 소독하면 악은 퇴치된다. 이 소독작업은 반드시 상부구조에서 해야 한다. 7.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버려 두었는가? 죄는 없다. 죄는 노예주들이 노예를 통제할 의도로 만들어낸 관념일 뿐. 8.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원래 하느님은 유대인의 씨족신 곧 아버지를 뜻했다. 아버지 시절의 이야기 즉 역사라는 의미다. 성경은 원래 역사책이었다. 히브리어의 어휘빈곤이 빚은 해프닝. 9. 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 인간은 공동체적 동물이다. 종교는 인간의 본능에 충실히 응답하는 공동체다. 10.영혼이란 무엇인가? 영혼이라는 물질은 없다. 신과 일대일로 맞서는 인간의 완전성, 소통가능성이 있을 뿐이며, 그것을 설명할 적당한 언어가 없어므로 대충 영혼이라는 단어로 땜방한다. 영혼이라는 관념은 대개 개인이 무의식적으로 집단을 위해 희생하는 바 인간 특유의 진화과정에서 얻은 특질을 설명하는데 소용된다. 11. 종교의 종류와 특징은 무엇인가? 검색해봐라. 12. 천주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는가? 무종교인, 무신론자, 타종교인들 중에도 착한 사람이 많은데, 이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천국은 없으며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단지 하나의 사건이 끝날 뿐이다. 그리고 그 사건은 전체의 사건 안에서 파악된다. 이 점이 중요하다. 개인에게 일어난 사건의 의미가 그 개인 안에서 파악될 수 없으며 전체를 상정해야만 유의미해진다는 것.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하여 천국이라는 허구의 관념이 사용된다. 13. 종교의 목적은 모두 착하게 사는 것인데 왜 천주교만 제일이고, 다른 종교는 이단시하나? 어떤 무개념 신부님의 개인적 욕심일 뿐이다. 14.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거짓말이다. 단지 그런 거짓말을 사람들이 필요로 한다는게 문제다. 15.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부귀를 누릴 수 있을지언정 아는 사람과의 소통그룹에 소속하지는 못한다. 천억을 엉덩이 밑에 깔고 있은들 그것은 종이에 불과하다. 인생의 진짜배기는 창의적이고 혁신적이며 역동성 있는 즉 인류문명의 진보에 기여하는 높은 그룹에 소속되는 것이다. 그 그룹에 들지 못하는 낙오자들이 자기위안으로 돈을 자랑한다. 16.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낙타가 바늘구명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부자라고 위세하는 자는 백퍼센트 악인이다. 모든 부는 인류공동의 것이고 공동의 우물에서 각자 필요한 만큼 빨대 꽂아서 빼 쓰는 것이며 엄밀한 의미에서 내것이라는 것은 없다. 내것이 아닌걸 내것이라고 우기면 악인이다. 내게 필요하고 따라서 내가 그것을 쓰는 것이 합리적이고 그러므로 그 사용을 허락받은 것이라고 말해야 맞다. 17. 이태리 같은 나라는 국민의 99%가 천주교도인데, 사회혼란과 범죄가 왜 그리 많으며, 세계의 모범국이 되지 못하는가? 이태리니까 그렇다. 아프리카와 아랍에서 아저씨들이 계속 건너온다. 게다가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으며 정신적으로도 유럽의 주류에 들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다. 반도지만 북쪽이 알프스로 막혀서 섬나라 근성에 찌들어 있다. 18.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처럼 되는데,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같다. 개인은 집단을 위해 베타 테스터로 희생하는 본능이 있으며 그 모르모트 본능이 잘못 발휘될 때 인간은 광기를 드러낸다. 19.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라고 하는데,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들이 왜 공산국이 되었나? 예 ; 폴랜드등 동구제국, 니카라구아등. 천주교나 공산주의나 공통적으로 인간의 공동체를 위한 희생본능, 베타 테스터 본능, 모르모트 근성을 잘 이용하고 있다. 20.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 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가? 인과관계가 거꾸로다. 범죄와 시련이 많아서 교회가 많아졌다. 21. 로마 교황의 결정에 잘못이 없다는데,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독선이 가능한가? 교황이 결정하는게 아니고 교회시스템이 결정한 것을 교황이 공표할 뿐이다. 시스템은 원래 독선적이다. 교황이 독단적으로 결정했다면 자격없다. 22. 신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수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골치아픈 재산권 문제를 피해가기 위해 독신으로 한 거다. 성직자가 결혼하면 상속자가 생기고 이 상속자들이 교회를 세습하므로 교회 공동체가 깨진다. 23. 천주교의 어떤 단체는 기업주를 착취자로, 근로자를 착취당하는 자로 단정, 기업의 분열과 파괴를 조장하는데 자본주의 체제와 미덕을 부인하는 것인가? 자본주의는 원래 그 자체의 불완전성에 의해 굴러가는 시스템이다. 그러므로 미덕은 없고 악덕은 많다. 끊임없이 감시하고 견제하지 않으면 반드시 자기파괴로 치닫고 마는게 자본주의다.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 자폭장치가 들어있다. 어느 면에서는 그것이 도리어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기도 한다. 24.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안 온다. 그러나 지극히 종말스러운 사태는 이미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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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의 본질은 살아생전에 나쁜 짓을 너무 많이 했던 한 인간이 죽을 때가 가까워지자 겁이 덜컥 난 것입니다.
"나 죽어서 지옥가는거야? 그런거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걸 묻고 싶은데 본심을 숨기느라 무슨 신이 있느냐 지구가 멸망하냐 거창한 질문을 들이대며 물타기 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옛날 비디오가게에서 에로비디오 빌리면서 일반영화로 에로비디오를 싸서 알바생에게 내미는 상황과 흡사합니다.
노인네가 정말 알고싶었던 "에로비디오"는 질문번호 14번과 16번입니다. ㅎㅎ
이건희도 질문지를 남기고 가야 할텐데...
어떤 질문들을 하고 있는지....
놀랍소. 한 기업의 회장이나 되는 분이 저런 수준 낮은 질문을 한다는 것이.
ㅋ 초딩때 하는 질문.
천주교의 차신부님이 답변한 전체적인 내용은 없지만...
부분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살펴본다면...
천주교가 신을 설명하는 것에서 그 설명하는 체계를 만들어 왔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보입니다.
예수가 직접 한 얘기가 아니라, 신을 설명하는 방법을 카톨릭이 그 체계를 점점 보완해서 만들어 내었다라는 것이기에
카톨릭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그 사유체계를 가져다 이어 붙이고 쌓았다고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인간은 죽음과 '암에 걸리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을 더 두려워할까요?
설문지를 돌리면 아마 죽음이 더 무섭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암에 걸리는 것을 더 무서워 합니다.
의외로 인간은 죽음은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형집행 전날의 사형수들도 잘 먹고 잘 잡니다.
암에 걸리는 것과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두려울까요?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게 더 두렵습니다.
결국 인간이 진정으로 두려워 하는 것은 죽음도 암도 아니라는 거죠.
매트릭스의 부재입니다.
상황별 대응매뉴얼이 없다는 거죠.
다음 단계의 임무가 부재한 겁니다.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 하는지 모르는게 가장 큰 두려움입니다.
때때로 내가 하기 싫은 일을 하게 되는 것이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남들이 보았을 때 좋은 일이라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마음이 다치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때로는 당혹 스럽기도 하지만... 어떠한 관계성이나 가족을 돌본다거나 혹은 타인을 위해 뭔가를 한다거나 할 때도 이런 생각들이 들어 자존감이나 존재감의 상실이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하여 그런 생각이 문득 쳐들어와서 심난하게 할 때는 가만히 응시하다 그런 마음을 이해하며 그런 마음이 드는구나 하고 넘겨 버리기에 큰 문제는 없지만...
간혹 이러한 것들이 두려움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굳이 두려움에 대해서 얘기를 하자고 보니...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총체적으로는 내가 아직 받아 들이지 못한 것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되거나 그것이 크게 느껴질 때 그렇다는 것이지요.
아마도 그것은 하기 싫은 것을 하게 되었을 때 느꼈던 경험에서 오는 잠재적인 압박감 같은 것이라고도 생각되기도 하구요.
그래서 더 생각해본다면, 내가 아직 마음으로 받아 들이기 어려운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해당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암에 결렸다거나 그것을 인정한다거나 죽음을 받아 들인다거나...등등
이러한 것들은 모두 마음으로 받아 들이기 전에는 두려운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기 싫은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은 곧 닫힌계가 성립되어져 그 안에서 다른 선택을 하기가 어렵다는 의미도 되겠지요.
만약에 하기 싫다라고 선언한 순간 그 닫힌계가 파괴되고, 어떠한 관계들도 파탄나기 때문일 것이라고 보이지만....
대체로 많은 것들이 하기 싫다고 말해도 되는 것들이 태반이기도 하고, 또한 하기 싫다고 말하기 어려운 일들이 태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받아 들이면 한결 수월해집니다.
하지만 절대로 받아 들여서는 안되는 것들도 있지요.
그런데 받아 들이기도 어렵고, 하기 싫은 것들은 하게될 때 절대로 받아 들이면 안된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감정들(존엄이나 존재감, 자유 등등이 훼손되는 것 같은 느낌들) 이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누가봐도 나쁜일이 아니라 누가봐도 좋은 일이고, 칭찬 받을 일에서도 같은 느낌이 나타난다라는 것이어서 두려움이 더 커지고 괴로운 생각이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쩌면 인간이 인간사회를 유지하는 것에서 필요한 것들인데도 불구하고 존재의 감정은 존재를 다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만드니까 말입니다.
하여 이러한 것이 자기애가 강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를 보호하고자 하고, 집단을 위해서 희생하기도 하지만,
인간이 해야하는 많은 일들은 하기 싫은 것이 더 많다라고 보이며, 제도나 사회의 관습에서 강요되는 측면이 있다고도 생각됩니다. 반면에 인간이 인간이어야 한다면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것이고, 그것이 인간사회를 유지하는 것이라고도 생각은 됩니다.
구구절절 길어졌지만....제 말의 요지는 ^^...대화가 안되거나 대화 자체의 결이 맞지 않으면 어렵다라는 것입니다. 관계든 뭐든...., 이미 거기서 멀어져 버린 것이기 때문에 마음으로 받아 들이지 못하는 경우들이 생기는 것이라고 보이며, 하기 싫은 마음들이 생기는 것이며, 불쾌한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또한 마음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몸이 움직이기 싫은 경우들도 있겠지요.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 서는...
제가 일전에 읽었던 '보수와 수구'라는 책에서 언급하길, '인간은 천성적으로 보수적 성향을 타고 난다.'고 하더군요.
진보는 발전,변화를 주도하지만, 보수는 걍 이대로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보수적 성향을 타고 난다'는 것은 적절한 표현이 아닙니다.
문제해결 방법을 알거나 혹은 자신이 문제해결방법을 안다고 믿는 사람은 진보가 되고
답을 모르거나 좌절한 사람은 보수가 됩니다.
이는 능력의 문제이지요.
김동렬님 답글 감사합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정도의 차이지만 보수적 성향을 가진 채 태어난다.'라는 표현은 어떨지요?
아이들의 경우는 태생적으로 보수적 성향을 강하게 갖지 않습니까?
좋은 것을 몸에 익히기는 쉽지 않아도 나쁜 것은 금방 눈에 들어오는 사람의 성향도 그렇지 않나 싶고요.
결국 성악설로 흐르는 것 같은데, 이럴 때는 제가 구조론을 배우려 하면서도 결국 개인적으로는 기독교 세계관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는 점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네요.
'능력이 문제'라는 김동렬님의 말씀이 옳다고 봅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문제해결 방법을 찾지도 않고 알려고 들지도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그리고 알더라도 이해관계 상 쉬운 길을 택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실제로 다수가 그러한 능력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는데, 결국 그 능력이 인간의 상부구조에 자리를 잡는 것이라면 그러한 사람들은 대다수가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아닐지요.
^^;.. 딱선생님은 한번도 하기 싫은 일을 해본적이 없는 것처럼 말씀 하신다는 생각이 조금 드네요.
인간이 하기 싫은 일이 의외로 많지요.
밥먹기 싫은데 가족들을 위해서 밥을 하거나 같이 먹어 줘야 할 때도 있고,
어떤 사람과 같이 있기 싫은데 같이 있어야 되는 경우도 있고...
가족 관계는 수직으로 이미 서열이 정해져 있는 것도 그렇고, 이것을 바꿀 수는 없고 단지 관계의 개선을 할 수는 있는 것이지요.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부딪혔을 때 짜증을 부리던, 화를 내던, 웃던, 참던...아니면 더 나은 방법을 모색하던...
개선해 나가는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지요.
사람은 뭔가 관계를 파탄내고 싶어도 그것이 이익이 되면 하고, 이익이 되지 않으면 안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양심도 한 몫을 하겠지만, 사회적인 시스템을 쉽사리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들을 사회로 떠 넘기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하여 사회 시스템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고 보이구요.
하여 인간은 누구나 싫은 것을 많이 하고 산다고 보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보수적이다.혹은 진보적이다 라고 단정하기는 그렇다고 보입니다.
오히려 사회 시스템이 잘 못되어 있거나 개선이 되지 않음으로 인해서 개인이 피해를 보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이러한 시스템이 개선되지 않으면 인간의 정신도 바깥 환경에 그대로 영향을 받기 때문에 보수적인 경향을 띨 수 밖에 없고, 그 안에서 그냥 갇혀 살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여 대체로 하기 싫은 것을 안하기 위해서 제도는 개선되고, 사회보장제도나 복지를 늘리는 등등...
개인보다는 사회에 짐을 떠 넘기게 되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래서 시스템의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보이며, 이러한 문제들을 보는 이들이나 느끼는 이들이 시스템 개선에 적극적일 수 밖에 없다고 보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너도 알고 있어야 하며, 너가 알고 있는 것을 내가 알고 있어야 대화가 되니까요.
또한 그런 정신적인 면이 교류가 되어야 관계가 원활해지기도 하니까요.
하여 개인의 문제를 공동의 문제로 치환해 버리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개인이 병에 걸리거나 받아 들이거나 죽음을 받아 들이는 태도 역시 사회 시스템 개선으로 많은 효과를 볼 수도 있다고 생각되기도 하구요.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안하고 타인에게 떠 넘기거나 하는 것이지요.
자신이 할 수 있음에도 의지하려 하는 것은 그 자체로 폭력이 될 수도 있다고 보입니다.
즉 자신은 좋은 것만 하고 싫은 것은 타인에게 떠 넘기는 행위 같은 것이지요. 그렇게 따지고 보면 다 똑 같고, 자신이 하기 싫으면 타인도 하기 싫은 것은 마찬가지이니까요.
정말 할 수 없어서라면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이 가지만, 엄살이나 스스로의 공포감을 도에 넘게 내 보이면 그것은 정말 짜증나는 것이지요.
또한 이것은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라고 보이구요.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개인 자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와 사람을 바라보는 생각의 관점에서 발생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자신이 타인보다 더 귀한 사람이다.라는 것을 표현하려 하는 것이라고 보이니까요. 거기에서 이질감이나 어떤 불쾌감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저는 그러한 점들...예를 들어 사람들이 그러한 것을 모를 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왜? 그러한 것에 동조하고 싶지 않거나 떠 맡기 싫어서 이겠지요.
물론 이러한 경우가 발생한다 할지라도 조금은 특이한 사람..혹은 연민을 오히려 느낄 수도 있지만, 이미 마음속에는 어떠한 불쾌감이 생겨 버리기 때문에 받아 들여서 한다라기 보다는 억지로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라는 것이고, 우리 삶에서는 그러한 경우들이 의외로 많다라는 것을 얘기하고자 함입니다. 저는 이러한 경우들에 어떤 벽을 느끼기도 하고 은근하게 띄워주며, 혹은 칭찬을 해가며 사람을 부려 먹으려 하는것에 본질적으로 거부반응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사회로 확장되어도 마찬가지라고 보입니다. 물론 이러한 이들도 고마운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고마운 것을 알기 보다는 자신이 스스로 하려는 태도가 오히려 더 타인을 돕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것은 가정이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보여지고 사회나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보여집니다....고마운 거 안 느껴도 되니까 니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라는 것이지요. 개인에게 떠 넘기지 말고 시스템을 개선하는 쪽으로 힘을 실어라 하는 것으로 결국 확장 되는 것이지요. 불만이 제대로 방향을 잡아야 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구요. 그렇다고 개인이 느끼는 모든 불쾌한 감정들을 시스템으로 다 해결 할 수는 없고, 이러한 경험이나 과정들을 통해서 스스로 또한 납득하게 되는 경우들도 많지요.
하지만 ...어찌보면 그런 류의 사람들은 정말 자신의 삶을 타인에게 맡기기 때문에 바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연민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타인에게 맡기려고 하기에 타인들이 불편해집니다. ^^;
또한 사회(공동체)로 문제를 돌리는 일은...개인은 자신과 연결된 모든 일들에는 주관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려움을 느끼지만, 사회로 돌리면 자신과 당장 관계없는 일들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객관적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문제를 풀기가 수월해지기도 하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즉 주관적으로 보며 화를 내는 문제들을 객관적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사회로 떠 넘겨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회로 돌리지 못하더라도 개인들도 주관적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불쾌한 생각들이나 자기 심정을 토로하거나 누군가들에게 하소연 하기도 한다고 보입니다.
아란도님의 글들은 김동렬님의 글 외에 제가 이곳에서 가장 자주 접하는 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성스레 댓글을 주셔서 마음이 흐뭇하고 기쁩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이곳에 다시 들어 온 보람이 있네요.^^
사실 말씀하신대로 저는 제 삶을 돌아보건대 진정 제가 있어야 할 곳에 제대로 있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고민스런 진보가 아닌 쉬운 보수의 길을 택했다가 결과적으로 더 큰 불만족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때론 알고도 그랬고 몰라서도 그랬습니다.
이나미씨가 쓴 '보수와 수구'라는 책은 지난 여름에 도서관에서 빌려서 재미있게 읽은 책인데 이 책을 보면서 보수와 수구의 학문적 의미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저자는 '보수'를 정치와 경제 등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드러나는 성향, '수구'는 사상,이념을 아우른 종교적 측면에서 두드러진 성향이라고 정의하더군요.
수꼴이라는 표현이 대변하듯이 저는 상식적으로 보수와 수구는 거기서 거기고 좀더 골수가 수구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사회적, 역사적으로 두 세력이 겹치는 연고로 혼동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척점에 서는 경우도 많았더군요.
사람이 배우지 않고 교양을 쌓지 않으면 또는 자기성찰과 사색을 멈추게 되면 결국 주어진 자기 성품과 성향대로 살게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경우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정신적 성장을 멈추고 외부세계와의 소통을 거부하면서 보수적이고도 쉬운 삶을 선택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에리히 프롬도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대다수 대중들의 보수적 성향에 대해서 경고했었지요.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선택의 문제를 사유와 고민없이 그냥 사회에 떠 넘기고 마는,,,그것을 독재자들은 기꺼이 넘겨받아 자신들의 쉬운 방식으로 해결해 버리고 대중들은 결국 자신들의 그러한 결정의 일관성에 매여 독재자에게 끌려가고 맙니다.
이곳에 계신 분 내지 자주 찾으시는 분들은 진보적 성향이 강하고 진보적 방향성에 대해서도 믿음을 가진 분들이라고 여겨지는데, 그것은 경제적으로 이해관계에 보다 민감하고 정치적으로 보다 독점지향적인 보수적 성향의 대다수 보통사람들에 비해 확실히 구분되는 점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일부 진보단체에서 볼 수 있는 이념과잉 내지는 권력에의 집착으로 인한 수구화가 이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이곳 주인장의 탄탄한 내공과 구조론의 후광이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체적이고 긍정적이고 보다 성찰과 통찰을 위해 매진하는,,,건강한 그런 모습이 저는 참 보기 좋습니다.
그래서 모쪼록 구조론이 모두의 바램대로 세력화되어 이 사회가 보다 건강해지고 단단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저도 늘 구조론적 시각에서 제 인생을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기 싫은 일을 하게될까? 두렵다.라는 것을 조금 더 달리 생각하보면 친연성이 먼 사람들과 엮일까? 두렵다라는 의미이기도 한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머리가 마비되는 듯한, 피부가 아플정도로 어떤 불쾌감을 경험한적들이 있다고 생각되는데...이는 결국 공동체안에서 관계의 문제이기 때문에 어쩌면 관계성에 나름은 어러움을 느끼기도 했었고, 그럴수도 있는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하구요.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제 마음 깊은곳에 있는 생각을 잡아내어 표면으로 끌어낸것과 같기 때문에 조절이 가능하기도 하겠지요. 이 얘기를 쓰면서도 크게 마음의 동요도 없구요. 아마도 예전이라면 동요가 되었을 것 같다라는 생각도 들구요.
그러나 이제는 이정도 쯤은 굳이 관계에서 표현하거나 내세우지 않더라도 까딱 없어야 하겠지요. ^^
제가 보기에...
동렬님의 답변과 허정스님의 답변을 대조해 본 결과 언어는 다르지만 의미는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고 보입니다.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지, 아니면 다소 차이가 있다면 설명을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걸 낱낱이 읽어주기는 힘들고^^
하여간 구조론과 불교의 접근법은 완전히 다릅니다.
구조론에서 중요한 것은 방향성입니다.
불교를 비롯하여 다른 모든 것은 입자 개념으로 접근합니다.
그 차이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점을 확실히 인식해야 해요.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실은 매우 큰 차이다."
방향성은 프로세스입니다.
계속 다음 단계로 진도를 나가는 거죠.
이는 하나의 사건을 보는 관점에 있어서
모든 사건을 어떤 둘의 상호작용으로 보는 겁니다.
사건 - 철수가 돌쇠를 때렸다.
구조론 - 철수가 돌쇠의 바운더리에 들어와서 상호작용이 시작되었다.
불교 기타등등 - 철수가 돌쇠에게 매를 벌었군. 혼구녁이 나봐야 알제.
여기서 상부구조를 보느냐 하부구조를 보느냐에 따라 방향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180도로 달라지는 겁니다.
얼마전 동물농장에서 방영된 이야기인데
길고양이 두 마리를 데려와 길렀더니 이넘들이 원래부터 있던 집고양이를 괴롭히는 겁니다.
길고양이는 야생에 적응해서 자기 영역을 중요시 하는데
자기 영역 안에 외부세력이 들어와 있다는걸 용납하지 못하는 거죠.
이 사건은 동물행동 교정 전문가가
고양이 한 마리마다 자기 방 하나씩 공급함으로써 간단히 해결되었습니다.
어느 방향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문제의 해결은 180도로 달라지게 되며 그 차이는 매우 큽니다.
물론 육조 혜능쯤 되면 말 안해도 다 알지만
진제 쯤 되면 알 턱이 없죠.
대부분
"먼저 때린 길고양이가 잘못이지.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집고양이에게 두들겨 맞을걸."
이렇게 판단하지만 반대지요.
길고양이는 야생의 눈빛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집고양이 오줌싸고 도망.
질에서 시작되어야 하는데...
질의 개념이 대체로 사람들에게 별로 없으니 입자에서부터 시작된다라고 보이며,
질을 이해한다 하여도 건들면 안되는 성역이라 여겨져서 쉽사리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질을 건든다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어서...
이 말은 이미 사용하는 언어체계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카톨릭이나 불교도 그렇게 따지면 질을 건들지 못하고 계속 입자만 건들고 있다는 생각도 들구요.
질을 건드려야 반응이 온다고 생각도 되구요.
지금은 하나님께 삐져서 교회도 안나가고 스트라이크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의 신앙과 사유체계를 마음 속에 담고 있습니다.
김동렬님께서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모르지만, 구조론을 접했을 때, 제가 배워서 알고 있는 기독교의 우주관 및 세계관과 상이점을 발견하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세세하게 더 깊이 들어간다면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부분 때문에 구조론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신관과 인간관 역시 '완전함'과 '신과 인간 사이의 소통'에 있었기 때문이지요.
아울러 김동렬님이 기독교인이 아님을 알고는 있었으나, 늘 선생님의 통찰력에는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이런 말씀 드려도 되나 모르겠는데,,,목사님들께로부터 배우지 못한 조직신학의 창조론과 인간론, 묵시서의 예언의 메카니즘을 김동렬님의 글을 통해 거꾸로 확인해 가고 있는 느낌을 항상 받습니다.
어쩌면, 구약 당시 유대 땅에 태어나셨더라면 교양머리 없는 유대인들에게 돌을 맞는 이들은 선지자들이 아닌 김동렬님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아~ 물론 김동렬님을 교주로 신격화하거나, 구조론의 물살에 기독교를 태워 보겠다는 의도는 전혀 아닙니다.
사실, 기독교의 진리관이 너무 통속화 된 내용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보니 지나친 상식화의 오류에 빠져있지 않나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그런 말이 있나 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제가 알고 있는 성경 지식으로는 이병철 회장이 진실한 기독교인에게 위 질문들을 했다면은 결코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질문을 받은 그는 분명히 이병철 회장의 마음에 '마음의 평안이 아닌 검을 주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신관과 구조론 사이에 상이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니... 제가 기독교를 잘못 알고 있는건가 싶습니다.
딱 내맘이요. 찬성표 1.
개인적인 생각으로 인간 자체는 대체로 선하다고 생각됩니다.
하여 저는 성악설은 조금 아니다.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인간을 보면 전반적으로는 착하다고 보이지만, 또한 이러함 착함도 선함의 시스템을 따른다고 보이며 이는 곧 자연의 결을 따르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인간이 악으로 뭔가를 행위할때는 반드시 시스템을 의지하거나 집단적 권위나 권력을 의지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하여 자연의 시스템은 이상이 없으나 인간이 만든 시스템은 소수가 독점이 가능하여 그것을 무한정 변함없이 쓰려 하기 때문에 망가지는 것이라고 보이며, 하기에 혁신과 창의가 필요해지는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한가지 더 질문드립니다.
불교에서는 신이 '있다'고 하면 상견이라고 했고, 즉 영원을 상정하면 상견이라했고,
신이 '없다'고 하면 단견이라 했고, 즉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라 단정하면 단견이라 했고,
이 상견과 단견 두 가지 대척점을 버리고 중도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했는데...
중도적 견해란 정견을 포함함 팔정도 입니다.
즉 있다 없다에 현혹되지 말고 연기적 관점에서 보라는 것인데...,
이 말은 물질적인 접근 - 입자의 접근으로 보는 것을 경계한다고 생각되어지는데,
구조론에서 신을 '이다' 라는 추상적 질개념이라고 한다면...
불교의 상견과 단견을 벗어나야 한다라는 의미와 '구조론의 이다'의 개념과는 어떤 차이가 있으시다는 의미이신지 한번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 드립니다.^^
그리고 불교 도교 성경 환인 등과 결합하여 불교의 틀을 사용하여 다양한 종교와 신화들의 요소들을 모아서 신을 설명하는 견해들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이 부분을 제가 어찌 할 수 있는 부부들도 아니지만, 이런 견해들과 간혹 부딪히면 조금 난감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고 맨날 부딪힐 수도 없고, 그냥 모른 척 해버려야 하는데... 하지만 딱 마주치면 참 난감해져서요.^^;
상견이건 단견이건 대충 얼버무리는 소리지 뭘 알고 하는 소리는 아니지요.
석가는 추상을, 곧 형이상학을 안했습니다.
그건 근본 입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이지요.
혼자 깨닫는건 의미가 없고 언어와 문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어떤 관념이나 개념 지어내서 해결보려는 시도는 실패합니다.
도교 기타 잡다한건 논할 가치가 없습니다.
구조론은 메커니즘을 보는 것입니다.
어떤 대상을 보는게 아니에요.
상호작용의 포지션만 보는 것입니다.
중도라는 표현은 안 좋습니다.
얼버무리기죠.
탑 포지션이 정답입니다.
탑은 중간에 낑기는게 아닙니다.
위에서 갖고 노는 거지요.
답은 항상 한 단계 위에 있습니다.
남녀가 다투면 중성들이 해결해 줍니까?
공동체가 해결해 줍니다.
그 안에는 남녀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신의 포지션이 있으면 신이 있는 겁니다.
자꾸질문을 드리게 되는데..귀찮게 할려고 하는 것은 아니구요.
자꾸 궁금증이 더 생겨나네요.^^;
중도라는 것은 팔정도이고, 팔정도 안의 첫번째가 정견인데, 이는 사성제를 보는 것인데...
정견은 고집멸도를 아는 것인데..., 이것은 추상활동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 고집멸도의 과정을 먼저 추상하여야 그것을 설명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중도가 중간에 낑기는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되어지는데...^^;
그리고 구조론에서는 생각의 모형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고,
플라톤의 이데아가 생각모형의 최초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불교에서도 사성제나 연기법 등은 추상의 결과라고 보여지는데...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단지 입자로서 그 흔적들을 드러낸다고 보이는데,
우주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일단 넘어가고...,사계절이나 지구가 도는 것 등등, 존재의 태어남과 죽음..등등...
하지만 생각모형을 가지고 불교를 설명한 것은 용수에서 부터 시작(혹은 그 이전 부터일지도..)되었다고 보이며,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에서 아주 잘 드러난다고 생각되어집니다. 물론 제가 이러한 것을 잘 아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것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지요.
용수의 이제와 세제 와 진제 등이 그러하고, 원효의 일심이나 본각 시각도 그런 생각의 모형을 설정한 것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이는 추상이 가능하였기에 후에 이런 생각의 모형들이 나온 것인지...
추상이 먼저 나오고 후에 생각의 모형이 나오게 된 것이라고 보이는데..., 아니면 불교와 그리스의 생각의 모형이 만났던 것인지..., 아니면 이런 생각의 모형은 설명하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인지...,
로마 교회는 플라톤의 생각의 모형에 신을 넣었고, 용수와 원효는 인과연을 설명하였고, 법[(法:=존재(사물),마음(현상)] 등을 설명 하였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런 생각의 모형들을 카톨릭과 비슷하다고 생각되어져 종교는 가는 방법이 다를 뿐이지 다 같은 것이다.라는 말들을 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형태(구조)가 비슷하다 여겨져서 그런 생각들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신을 추상하거나 연기법을 추상하거나 인연을 추상하거나 ...모두 같은 추상이라고 생각됩니다.
모두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신도, 인과도 인연도 우리는 모두 입자로서 받아 들이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나 입자로 물질로 받아 들이려는 습관을 멈추면 오히려 문제는 쉬워진다고 보입니다.
계속 불교에 관한 질문을 해서 조금은 죄송하구요.
하지만 추상이란 것과 생각의 모형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궁금해서 올리게 됩니다.
생각의 모형도 결국은 추상인 것 같으니까요.
기분나빠.
천국이 있다고 믿을수도있져!!!!!!!!
어짜피 확인한것도아닌데 없다고 한정짓는것도
답은 아닌것같아요.
있다는데 안믿을이유가 어딨어?
내맘.
ㅋㅋ^^..그렇게 따지면 기분 나쁘든지 말든지...
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상대적인 것이고, 상대적으로 것으로 보고 있으니까요.
불교에서는 정확히 신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한 적이 없다고 보입니다. 다만 신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존재 자체를 보기 위함이겠지요. 신은 있다고 생각하면 있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것인데, 여기에 사람들이 매이고 영향을 받게 되므로...존재 자체는 무아이므로 신은 없다라고 한 것이겠지요.
있다 없다가 아니라 눈에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 증명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 이런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볼 때 신은 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존재적 원리로 있다가 되는 것이겠지요.
그것이 연기법이고 그런 연기법이나 세상 원리를 볼 때, 혹은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할 때 우리는 신과 1:1 대응이 될 수는 있는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이러한 것을 신을 물질로 있다.라고 받아 들이니 문제가 되는 것이기에 신은 물질로 없다가 성립이 또한 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신이 물질로 존재할 수 없고, 신이 어떤 형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원리로서 존재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에 이것은 추상적 접근, 개념으로서의 접근만이 가능하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렇게 따진다면 신은 내안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 바깥에서 찾으면 안된다는 것이기도 할 것이구요.
천국도 마찬가지겠지요. 천국이란 곳을 제 3의 또 다른 장소로 공간으로 상정하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러면 지옥이란 공간도 필요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이구요.
하긴 우주는 넓으니 어느곳 한곳쯤은 천국이라 하고 또 어느곳 한곳쯤은 지옥이라 하고 또 어느곳 한곳쯤은 영혼들의 서식지라고 생각해도 상관은 없고, 자기 마음이겠지요. 그리 따지면....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구조론도 불교도 내가 처음부터 생각해 낸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알게되고 보고 생각하고 때로는 서로 비교도 해보고 대조도 해보다가 의문이 생기니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불교에서 사용하는 언어나 사유체계에 대하여 구조론적 견해가 궁금한 것인데, 그것을 불교에다 물어 볼 수는 없고, 불교에서 구조론적 견해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현재는 없으므로..., 그러니 구조론에다 물어 볼 수 밖에 없는 것을 이해하여 주시기를...., 그리고 이럼으로 인해서 불교와 구조론의 닮은 점과 차이점을 더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을 것도 같기에 그러는 것이지요.
자꾸 말을 이으니 길어지는데...
그래도 하자면...
내 스스로 구조론과 불교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하기에 그 차이가 무엇인가? 에 대해서 알려고 질문하는 것이기도 한 것 같고, 물론 끝내 안되면 내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이겠지만...
또한 다른 용어들은(예를 들어 신이라는 표현과 마르크스의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보이지 않는 손, 영어식 표현인 탑 포지션, 바텀 포지션, 메카니즘, 플라톤의 이데아론인 생각의 모형 등등) 그 말을 차용해서 쓰는데..왜 불교식 표현은 부적절 하다고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이 생기는 것이어서 그런 것이지요.
언어 표현이 달라서 그런 것인지, 그 의미가 내포하고 있는 것이 달라서 그런 것인지 궁금 할 수 밖에 없다고도 생각도 되고, 아니면 구별의 필요성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충돌을 방지하고자 그런 것인지..
궁금해서 그러는 것이지요.
그러한 것이 제대로 이해되면 덜 헛갈릴 거 같아서이지요.
물론 차이가 있다고 느끼는 부분들도 많지만, 차이가 없는 부분들도 느낀다는 것이지요.
불교는 세상이 뻗어가는 원리에 대해서는 그리 자세하게 말하지 않았고, 단지 계율적인 측면이나 존재가 그렇게 생겨먹었다라는 것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고, 그것을 벗어나야 한다라는 취지로 설명하고 있지요.
어찌보면 이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욕망을 억제하는 측면으로 다가오기도 하지요. 여기서 또 많은 괴로움이 발생하게 되는데, 탐진치의 소멸을 그래서 얘기하는데..하지만 어찌보면 이것도 욕망을 상승 시키는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볼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단지 그것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의 관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라는 생각도 들었고...
반면에 구조론은 인간의 욕망이 억압되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상승해야 되는 것이라고 그냥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떤 카타르시스 같은 것도 느끼게 한다는 것이지요.
인간을 쥐어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를 긍정하고 인간이 가는 방향의 결을 그대로 인정하고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것이고, 인간 스스로의 방향성이 있다라는 것이기에 고의 존재가 아니라 사랑의 존재다 라고 설명하는 것도 같구요.
이런 부분에서 불교와는 다르게 또다른 희열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지요. 긍정하는 것. 가능성...
물론 불교는 이미 오래전 역사의 시대를 다 거쳐왔고, 그 시대 인간상과 삶의 모습들을 많이 축적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시대적 언어들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고 보이나...암튼 뭔가 조금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반면에 구조론은 현재에 나왔고, 이제까지 오래시간 축적된 모순들을 모두 알고 있는 상황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미 출발에서부터 다른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언어적으로나 상황적으로나 훨씬 여건이 좋은 것이지요.
다만 언어적 표현이나 전승된 과정에서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시대적인 차이가 있지만 석가나 동렬님이 추상하는 것에서의 차이가 과연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공자나 플라톤이나 서로의 추상하는 것이 차이가 있을까? 하는 것이지요.
단지 경험이나 시대나 언어적 표현의 발달이나..이런 것을 일단 제외한다면 저는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다만... 각자 보고 싶은 것을 보았다는 것이지요.
세상의 모순을 통해서 , 무엇이 더 관심이 가는가에 의해서, 세상의 원리를 설명하고자 하여 각자 자신에게 가장 알맞는 능력으로 알맞은 것을 보았다라는 것이고, 그것은 같은 것이나 서로 다른 형태로 보았고, 다르게 설명 되어지지만 , 받아 들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것이 조금씩 비슷한다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는 것이겠지요.
암튼..이러한 생각들이 들었고, 지금은 더 생각이 안나지만....많은 생각들이 있겠지요.
이러한 생각들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상태에서 이러한 질문들을 하게 된다는 것을 설명 드리고 싶네요.
^^..
다시한번 느끼는 것이지만...
불교에 관한 것은 불교에...
구조론에 관한 것은 구조론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위의 글은 그냥 저의 궁금증일 뿐인 것이지요.
서로의 것을 어설프게 이어 붙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생각도 그러하다.
다만 불교에 대해서 이러하게 구조론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묻는 것은 내 자신이 처음이므로( 그렇다고 보임...아닌가?)
마음에 상당히 부담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
왜 ? 처음이고 아무도 없으므로 이 순간은 내가 불교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 되므로.....
그래서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저절로 마음에 부담이 느껴지고 스트레스를 받게되는 것 같음...ㅋㅋ
아..나도 이제 이런 거 안해야지... 심리적으로 왜 압박이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제가 사이비 목사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성경을 달달 외우고 있으면서 자기들 입맛에 맞는 부분만 발췌하여
편리한대로 갖다 붙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고 이근안 목사 같은 놈들이 그렇죠.
불경을 다 뒤져보면 구조론과 비슷한 장면들을 한 컷 정도 찍어낼 수 있겠지요,.
그러나 게임은 대표 대 대표로 붙어야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육조 혜능에서 완성되었고 그게 다에요.
그 이전의 잡다한 버전에서 이것저것 끌어대는건 안 좋습니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배우면 구장산술은 필요없는 겁니다.
그냥 방정식 배우면 되지 동양식으로 산대로 계산하는건 필요없어요.
서양시계가 있는데 세종대왕 해시계와 물시계는 어떻냐는 식은 필요없지요.
거북선은 철갑을 둘렀어도 철갑선 아닙니다.
고려의 금속활자와 서양의 활판인쇄는 시스템이 다른 겁니다.
아마존의 마티스 족은 셈을 전혀 못하는데도
막대를 써서 셈을 한 것과 동일하게 숫자를 맞춰냅니다.
그런거 필요없습니다.
기본적으로 패러다임을 봐야 합니다.
1+1=2라고 하면 아 답은 2구나 하면 대화가 안 되는 겁니다.
구조론은 언어이고 문법이고 사유체계입니다.
이건 보편진리이므로 어느 분야나 다 적용될 수 있어요.
화가는 더 잘 그릴 수 있고, 기업인은 더 잘 경영할 수 있고 스포츠맨은 공을 더 잘 던질 수 있습니다.
군인은 더 잘 싸울 수 있고 작가는 더 잘 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딴나라 인간들 중에도 여기를 기웃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뭐 가져다 붙이기 나름이니까.
기독교나 불교에도 써먹을 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진리는 어디나 다 써먹을 수 있는 것이어서 그러할 뿐
구조론이 불교나 기독교나 어떤 무엇과 닮았다는 식은 본질에서 넌센스입니다.
뭐 찾아보면 닮은 데가 있을 수 있지요.
그런데 기독교가 전래되자 그 영향을 받은 부두교가 교세를 크게 늘렸고
동학이나 동학 이후 사이비 종교들도 기독교 영향을 받았고
중국의 태평천국도 기독교 영향아래 일어난 것이고
유교 성리학도 불교 영향을 받았고
일본에는 행복의 과학이라는 사이비종교가 있는데
그 집단은 그 사이비가 과학과 같다고 말하겠지만
과학 입장에서는 불쾌하겠지요.
상대성이론이 나오자
'바로 이거야 내가 옛날부터 주장하던 그것'
하고 큰소리치는 사이비 집단이 많았는데 아인슈타인은 기분 나쁘겠지요.
이용할 수 있지만 본질에서 다릅니다.
사실 구조론과 불교를 구분해야 한다고 느낀 것은 오래되었습니다.
제가 구조론을 접한기간에 비한다면은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궁금한 것은 또 그대로 생겼던 것 같습니다.
구조론은 구조를 제대로 보게하는 학문이지만, 구조 자체는 침투한다고도 생각되어졌습니다.
세상의 다양한 것들은 구조로 이루어졌지만, 그 구조를 보려하면 구조는 세상에 다양한 것들에 다시 침투 한다고 느껴졌거든요.
하여 구조를 제대로 보려면 구조론이라는 학문이 필요하고, 구조론은 구조를 제대로 보게 한다고 보이지만, 구조를 보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여 다시 구조론이란 틀이 필요해집니다.
세상의 다양한 것들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요즘 시대의 다양해진 요즘의 언어와 과학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알아듣기 때문이겠지요.
하여 구조도 구조를 보려 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세상의 다양한 것들에 대해 다시 침투한다고 생각됩니다. 즉 모형이 침투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설명되지 않았던 것을 보려 하는 것이겠지요. 이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구조론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구조를 가장 잘 보게 하는 것이 구조론 이니까요.
하여 세상의 다양한 것에 구조를 보는 모형이 침투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고 보입니다. 하지만 구조를 잘 보기 위해서는 구조론이 필요하기에...여기서 혼선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섞어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즉 구조는 매커니즘이어서 어디에나 구조가 있기에 구조의 모형이 침투할 수는 있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그 구조를 보는 방식은 구조론에 입각해서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오판을 막을 수 있다고 보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다양한 것들이 각자 말하는 것들에 대한 의미를 구조론에 끼워 맞추거나, 엮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본말이 전도되기 때문이겠지요.
구조론은 구조를 설명하고 보는 것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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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서양의 원근법을 이야기하는데
동양에도 심원법, 고원법, 평원법이 있었다고 받아치면 곤란합니다.
아 물론 그것도 그것대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본질에서 다른 거에요.
1+1=2라고 하면 여기서 '2'만 딱 보고, '아 답은 2로구나' 하고
그 '2'만 싹 빼서 어디다 써먹으려고 하면 곤란해지는 겁니다.
뭐 써먹을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건 2가 아니잖아요.
1+1과 2가 =에 의해 연결되어 세트로 다닌다는게 중요하고 이게 메커니즘이죠.
원근법의 의미는 그림이 어떤 쓸모(역사 기록이나 초상 기록)를
위해 기능하는게 아니고 그 자체의 내재한 질서를 따라가는데 있습니다.
제가 어저께 올린 사진에 나오는 왼손잡이 궁수를 보고 제가 뭐랬죠?
이건 왼손잡이 궁수가 아니고 가짜그림이다 제가 이렇게 못박아 버렸어요.
왜?
근데 왼손잡이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왜 그 그림 속의 인물이 왼손잡이가 아니라
화가가 편한대로 그린 가짜라고 단정했을까요?
이집트 고분의 람세스 상 그림은 누가 봐도 가짜입니다.
잘 보면 화살이 목 뒷부분을 지나간게 오른손잡이입니다.
오른손잡이인데 왼손잡이처럼 그린 거에요.
왜?
중요한건 이게 텍스트라는 겁니다.
고분을 조성한 이집트인들은 그림을 그린게 아니라 기록을 남기려 했고
기록에 왼손 오른손은 애초에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왼손잡이든 오른손잡이든 상관없는 거에요.
김홍도 그림은 정조임금이 백성들 어떻게 사는지 조사해 와라고 해서
임금에게 요즘 백성들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하고 그려바친 건데
왼손 오른손은 상관없습니다.
왜?
그림은 쓸모를 따라가는데 그 쓸모는
텍스트니까.
임금은 그림 자체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림은 단지 텍스트를 보조하는 것이고
초상화는 얼굴이 이렇게 생겼다는 정보를 전달하면 그 뿐이고
고분벽화는 조상이 사냥도 하고 살았다는 사실을 전달하면 그 뿐이고
그림 자체에 내재한 질서에는 눈꼽만큼의 관심도 없습니다.
기산 김준근 그림은 독일인이 부탁해서 사진기 대신 그려서 갖다준 것입니다.
애초에 그림의 목적이 다르다는 거죠.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원근법의 등장전과 등장후는 그림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검색해보면 왼손잡이 궁수가 꽤 많이 나옵니다.
걍 귀찮아서 그렇게 그린 겁니다.
왜?
애초에 텍스트 기능에 주목했으니까.
그림은 그림이 아니니까.
다시 말해서 그림이 어떤 쓸모(역사기록, 초상기록, 사건전달)이면
예술이 아닙니다.
그건 가짜에요.
왜 그리스 조각은 다 진짜고 로마조각은 다 가짜입니까?
그리스인은 예술적 목적으로 조각했고
로마인은 정원 장식, 건물장식으로 조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중요한건 로마조각은 단 1센티도 진보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왜? 무엇 때문에?
분명히 말합니다.
고구려 고분벽화, 김홍도그림, 강희언그림, 람세스그림, 중세의 초상화, 고전회화
다 가짜입니다.
그림과 텍스트의 차이가 반영이 안 된 거에요.
오른손잡이 궁수는 그리기가 골치아프니 대강 왼손잡이인척 하고 그린 겁니다.
그리고 이런 잘못된 관습은 아직도 전해집니다.
제가 왜 이현세를 쓰레기라고 합니까?
이현세는 아직도 여자 얼굴을 못 그립니다.
똑같이 그려놓고 안경씌우기, 머리칼 바꾸기, 검은 머리 흰 머리 색바꾸기,
이러고 있습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화에 잘 나오는 도망가거나 뛰어갈 때 먼지 나는 표시
=33 <- 이거 그림입니까? 아닙니다.
잘 살펴보면 만화에 굉장히 다양한 기호들이 있습니다.
그림이 아닌 기호 말입니다.
텍스트지요.
이게 만화가 망하는 공식입니다.
잘 살펴보면 인물의 얼굴도 그림이 아닌 기호의 집합입니다.
왜 일본에서 슬램덩크 같은게 나왔습니까?
그림체가 바뀌지 않으면 만화의 수준은 절대 높아지지 않습니다.
그림이 기호로 가느냐 이미지로 가느냐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왜 제가 양영순을 높이 평가합니까?
골격을 연구해서 이미지로 가자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물론 양영순도 많은 텍스트를 숨겨놓고 있습니다.
그림체를 그대로 두고 내용만 바꾸어서 좋은 만화를 그리겠다는 것은
옛날 군담소설체로 현대소설을 쓰겠다는 미친 생각입니다.
그건 불성립입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슬램덩크 그 내용 그대로
옛날의 길창덕 화백이나 신문수 화백이 그릴 수 있습니까?
그런데 허영만은 됩니다.
이게 항상 세트로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가끔 보면 답답한 언니들이
남자 마초 만화가들이 여자주인공의 비중을 너무 낮게 설정한다고 화 내는데
여자 얼굴도 못 그리는데 어떻게 여자주인공 성격을 잡고
성격도 못 잡는데 어떻게 활약을 그립니까?
기대할걸 기대해야지.
리얼리즘이 안 되면 예술은 애초에 죽고 마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감이 오는데...
아! 그렇구나...하는 느낌은 아니라서...
구조론을 배워야 한다.
구조론과 구조는 때어서 생각할 수가 없다. 1+1=2 는 항상 같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구조는 따로 침투될 수 없다.?
라는 의미 이신지요?
박정희가 서양 시멘트 건물 보고 감동받아서 한옥을 시멘트로 짓기 시작했습니다.
경주박물관부터 시작해서 전국에 시멘트 한옥이 잔뜩 깔려 있습니다.
근데 이것 보고 유홍준이 뿔따구 나서 공구리 한옥은 한옥도 아니고 양옥도 아니므로
때려부수어야 한다고 했더니 수구꼴통들이 전부 들고 일어났습니다.
근데 공구리 한옥은 한옥 아닙니다.
불교에는 불교의 논리가 있고 구조론은 구조론의 논리가 있습니다.
짬뽕은 곤란합니다.
양식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겁니다.
다만 두 가지를 동시에 접하다 보니...
그리고 구조론적인 것이 더 표면화 되다보니...조금 어려워 지네요.
ㅋㅋ...하나를 접어야 하나요?^^;
동양화를 서양화 기법으로 그리면 그게 서양화지 동양화가 아닙니다.
구조론으로 불교를 더 잘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스님들이 구조론을 공부해서 득도하고 극락 가겠다면 그건 넌센스지요.
스님들은 구조론 배우면 안되나요.?
완전 오판이네요.
그렇다면 구조론을 접하는 것에서...
대체적으로 기존에 먼저 배운 것들이 있을텐데... 기존의 것을 다 버려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기존의 것에 끼워 맞추려 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인지...짬뽕이 되면 사이비 되기 십상이니까요.
기존의 것과 공존은 안되는 것인지요?
어떤 사람이
맞는 소리를 하는지 허튼 소리를 하는 지는 일초만에 알 수 있습니다.
달을 보는지 손가락을 보는지.
구조론의 단어들을 불교나 음양이나 오행과 일대일 매치시키면 그건 틀린 겁니다.
반대로 순서와 방향을 가져가면 뭔가 아는 거죠.
질 입자 힘 운동 량은 순서입니다.
방향도 동시에 작동합니다.
가져가려면 이 순서와 방향의 방정식을 가져가야 하는데
이 순서와 방향의 프로세스를 무시하고
그냥 여기서 '질'만 빼서 챙겨간다는 식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구조론의 질에 해당하는 불교의 단어가 뭐다 해서
그것이 공이든 중도든 열반이든 뭐든.. 그런 식이면 애초에 틀린 겁니다.
구조론의 존엄 자유 사랑 행복 성취에서
존엄에 해당하는 음양의 사상은 뭐다 하는 식으로 .. 그건 아니죠.
나침반은 N극과 S극이 있는데
거기서 N만 빼가면 혹은 S만 빼가면 그 사이에 있는 자기장은 죽어버립니다.
구조론의 맥락에 주목하는 분은 몰라도 아는 분이고
단어에 집중하는 분은 알아도 모르는 분입니다.
스님이 구조론 배운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구분할건 구분해야 합니다.
하여간 19세기 중국사람들은 서양사람이 중국에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해도
'아 그거 중국에 다 있어' 그러다가 망해버렸는데
그런 식만 아니라면 상관없지요.
구조론의 개념들을 두고 '그거 다 불교에 있어' 하는 식으로
불교의 개념들과 일대일로 매치 시키려 하면 맥락을 놓칩니다.
달이 아닌 손가락을 보게 된다는 거죠.
이는 중국인들이 서양과학의 메커니즘은 보지 않고 그 성과만 본 것과 같습니다.
서양 수학자가 조선에 왔더니 조선수학자가
'서양 오랭캐도 산학을 하네. 그거 신통하다 나와 대결해볼까?'
이러고 산통을 흔들어 산대를 꺼내는데 방정식 문제를 산대로 5분만에 척척
서양수학자 두 손 두 발 다들고 도망갔습니다.
이런 식은 안 된다는 거지요.
문제 푸는 속도는 동양 산대가 더 빠를지 모르지만
그게 중요한건 아니잖아요.
'수학은 계산이다' 이래 정의 때려놓고 계산은 내가 더 빨라 .. 이건 아니지요.
중체서용
동도서기.. 정신 못 차린 거죠.
중간에 토막쳐서 쓸만한거 빼가려고 하면 안 되고 전체의 메커니즘을 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확인과 같은 것이었지요.
그 부분은 제가 잘 모르고 그런 것입니다. 죄송해지네요.
그리고 구조라고 한 것은 말씀대로 질>입자>힘>운동>양이 맞습니다.
이것을 구조라고 얘기한 것입니다.
그런 부분이 없지않아 있겠지만, 구조론을 중간에 토막쳐 가져 가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가져가려면 다 가져가야지요. 그런데 누가 반대한 사람도 없는데 이러한 것에서 심리적인 부담감이 생기더군요. 불교를 훼손 하는 것이 아닐까? 구조론을 욕되게 하는 것은 아닐까...? 뭐 혼자서 이런 부담을 느낀 것이지요.
그렇다고 어느것 하나 완벽하게 내것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도 불교를 구모적 관점에서 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고 해야겠지요.
또한 무슨말을 하면 구조론을 배우더니 구조론에 맞춰서 말한다.란 어떤 경계감도 느껴지는 것도 같구요. 그저 제 생각이 그런 것이겠지요.ㅋ~
그러니까 일종의 어떤 아웃사이더 같은 느낌을 스스로 받는데 또한 제가 속한 다른곳에서 제가 이런 느낌을 받는다고 하면 의아해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조론적 생각을 포기하기는 어려운거 같네요.
그저 그렇다는 것입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불교는 육조 혜능의 선에서 완결되어 있습니다.
간화선이 취종결론입니다.
간화선은 이론적인 주워섬기기 안 합니다.
미학으로 바로 쳐들어갑니다.
상견이든 단견이든 중도든 쓸데없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그건 불교도 폐기했다고 봅니다.
선사들이 그런거 공부해서 깨닫는건 아니라고 봅니다.
구조론과 불교가 통한다면 그 미학을 통해서 바로 통하는 거지
이미 불교가 폐기한 이론을 복구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금강경을 대체하는 구조경을 쓸 필요는 없다는 거지요.
아무래도 한문경전이 아니고 한글경전이니까요.
저도 ...아마도....구조론과 불교가 통한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미학적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군요. 금강경을 대체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런데 불교에서 예술품들을 불교미학이라 하기는 하지만 선불교 자체를 미학적 관점에서 가르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 부분에서는 유홍준 교수가 큰 공헌을 한거 같다고 생각됩니다.
불교에서.. 시대가 지나고 폐기처분되고...이러한 것에 대해서 불교가 적극적 알림이나 어떤 통일됨은 조금 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그동안의 불교에서 흘러온 모든 것들이 대체로 소수자가 신봉한다 해도 한국불교에는 다 살아 있는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더 어려운것 같다는 생각도 들구요.
초기불경파, 대승불교 파....등등등...불교는 아주 복잡하게 얽혀있다고 보입니다.지금은 예전보다는 많이 화합한것도 같지만..
에고...끝이 없네요. ^^;
불교의 여러 복잡한 것은 다 버리고...
가장 단순하게 심플하게 불교를 보아야 하고,
또한 각각의 것을 객관적으로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갑자기 뭔가 엉켜버린 듯한 느낌들도 들고...
이쯤에서 다시 새롭게 보아야 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이 질문지를 보는 순간....
사실은 그리 답변을 할만한 가치를 못 느꼈다고 해야 맞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미 고인이고, 이 질문지가 그 시대나, 혹은 지금의 시대에 있어서 정신적 성숙에 있어서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되어졌기에, 거기서 제대로 된 답변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고는 생각되어졌습니다.
질문의 수준이 곧 그 사회와 그 시대의 수준이라는 것이 드러난다고 보이기에...'역시 누가 답하든...
우문의 현답이 될 수 밖에 없다고 보이지만,'
답변 역시 그 시대를 벗어날 수는 없고, 그 시대 사람들의 수준을 벗어 날 수는 없다고 보입니다.
하여 답변은 그 시대에서 가장 앞서가는 깨어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그래야 기준이 생기니까요.
다만..각자 질문에 답을 해보면 자신의 생각을 살펴볼 수도 있는 것이어서 나름대로는 괜찮다고 생각됩니다.
또는 모든 종교나 철학에서 이런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하는지를 살펴보면 더 명확하게 그 사유체계들을 알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조금은 어설픈 질문들이라고 보이지만, 그 시대에서는 해결이 안되는 문제였을 수도 있는 것이기에 질문을 했다라는 것 그 자체만은 긍정적이다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