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이 5로 설명되는 이유 움직이는 것을 설명한다 존재는 시공간의 좌표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사건을 설명하는 개념으로는 인과율이 있다. 우리가 원인과 결과 2로 사건을 파악하는 것은 대상이 정지해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정지해 있는 탁자 위의 컵을 망치로 때린다면 망치로 때리기 전과 때린 후를 비교하면 된다. 원인과 결과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태풍의 진로를 추적한다거나 너클볼의 궤적을 판단하려면 대상 내부의 상태까지 파악해야 한다. 사건은 원인>변화>결과의 3단계로 진행하므로 실제로는 3이다. 우리는 거기서 중심이 되는 변화는 당연히 알고 있다고 간주하고 감추어진 부분인 원인과 결과를 추적한다. 혹은 변화는 알 수 없다고 착각하여 포기하고 변화 이전과 변화 이후를 비교한다. 변화 원인>변화 주체>공간의 변화>시간적인 드러남>변화의 결과로 세분해야 변화를 추적할 수 있다. 그냥 던진 공과 회전이 걸린 공은 구속이 같아도 위력이 다르다. 테일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감아 찬 공은 휘어져 들어간다. 공 내부의 사정이 중요하다. 상대성이론과 같다. 뉴턴역학은 시공간이 정지해 있다고 간주한다. 거시세계에서는 그래도 별문제가 없다. 그러나 우주선을 달에 보내려고 하면 미세한 차이가 누적되어 큰 오차를 만들어낸다. 천문학 단위로 숫자가 커지고 양자역학 단위로 미세해지면 얼렁뚱땅 넘어갈 수 없게 된다. 낱낱이 따져야 한다. 정해진 시공간의 좌표 위에서 대상을 추적할 것이 아니라 그 대상 안에서 자체의 좌표를 찾아내야 한다. 지상에서 자동차를 운전할 때는 동서남북만 알면 된다. 비행기를 조종하려면 고도와 기울기와 가속력을 비롯하여 많은 것을 따져야 한다. 구조론은 주먹구구를 버리고 따질 것을 따지는 것이다. 통제가능성의 관점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멀리서 자동차를 봤다면 아직 자동차를 본 것이 아니다. 엔진을 봐야 자동차를 본 것이다. 내부의 메커니즘을 파악해야 한다. 자동차와 마차를 구분할 줄 아는 정도로 아는 척하면 안 된다. 그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어야 자동차를 안다고 할 수 있다. 외부에서의 피상적 관찰로는 부족하고 내부에서 조작할 수 있어야 한다. 원인과 결과만 알아서는 대상을 통제할 수 없다. 그 대상을 제어하려면 메커니즘을 알아야 한다. 변화의 범위, 변화의 시작점, 핵심적 변화, 변화의 진행과정, 변화의 결과까지 모두 파악해야 한다. 사건의 원인과 결과만 알아서는 환자를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한다는 정도의 판단이 가능할 뿐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 통제가능성을 아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메커니즘에 답이 있다 움직이는 것은 메커니즘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메커니즘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다. 질량보존에 의해 어떤 하나는 변화할 수 없다. 모든 변화는 공간의 자리바꿈이며 자리를 바꾸려면 최소 둘이 존재해야 한다. 즉 자연계의 모든 변화는 둘 사이에서 성립하는 관계의 변화다. 관계는 둘이고 둘이면 방향과 순서가 도출되므로 그 방향과 순서를 특정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음식이 썩었다면 그냥 썩었다고 말하면 된다. 그러나 커플이 깨졌다면 누가 원인제공을 했는지가 특정되어야 한다. 복잡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메커니즘을 해명하려면 균일한 닫힌계로 사건의 범위확정, 사건의 중심이 되는 시작점의 지정, 공간의 방향변화, 시간의 순서변화, 변화의 종결까지 다섯을 특정해야 메커니즘을 파악할 수 있다. 둘 사이에서는 작용과 반작용이 성립하므로 복잡해진다. 관측자는 사건 내부에 있어야 한다 우리가 원인과 결과 둘로 사건을 파악하는 것은 관측자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판단에 앞서 먼저 판단주체를 특정해야 한다. 그게 자로 길이를 잰 것인지, 저울로 무게를 단 것인지, 됫박으로 부피를 계량한 건지 확인해야 한다. 그 판단기준은 관측대상 내부의 내재한 질서에서 찾아야 한다. 사건 내부에는 대칭이 작동하며 대칭은 쌍을 이루고 그 쌍을 이룬 둘 중에서 하나가 다른 한쪽을 관측해야 사건이 바르게 기술된다. 그것이 상호작용이다. 상호작용으로 엮여서 대칭을 이루고 동시에 움직이는 둘 중에 하나를 관측하면 다른 쪽의 사정을 파악할 수 있다. 사건은 원인>변화>결과로 일어난다. 원인, 원인의 관측자, 변화, 결과, 결과의 관측자로 다섯 가지 사항을 특정해야 하나의 사건이 온전하게 파악된다. 구조가 5인 이유는 원인과 결과에 변화를 추가하고 다시 원인의 관측자와 결과의 관측자를 추가한 것이다. 오른팔로 공을 던진다면 왼팔을 뒤로 뻗어야 한다.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는다면 왼발은 뒤에서 체중을 버텨야 한다. 작용반작용에 따라 하나가 움직일 때 실제로는 둘이 관계된다. 이때 받쳐주는 쪽이 움직이는 쪽을 관측하는 것이 상호작용이다. 즉 대칭된 둘의 상호작용을 통해 변화가 추적되는 것이다. 증인이 있어야 한다 어떤 둘 사이에서 일어난 변화는 상대성이 성립하므로 믿을 수 없다. 가해자가 공격한 건지 피해자가 유도한 건지 알 수 없다. 무언가를 안다고 말하려면 그것을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결과를 도출해야 하는 것이다. 누가 실험해도 같은 답이 나와야 한다. 그러므로 메커니즘을 파악하려면 제 3자를 보증인으로 끼워서 관측해야 한다. 청동거울을 깨뜨려서 두 쪽을 나눠 가졌다가 나중 맞춰보면 증거가 된다. 거울은 동시에 깨져야 한다. 시간차가 일어나면 믿을 수 없다. 깨진 거울은 톱니가 있다. 톱니는 맞물려 돌아간다. A, B, C의 3자가 톱니로 연결되어 맞물려 돌아갈 때 B를 감추고 A와 C를 얻을 때 3단논법이 성립한다. B는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 공을 발로 차면 믿을 수 없다. 키커가 살짝 찰 수도 있고 세게 찰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구대의 공이 쓰리쿠션을 맞고 왔다면 믿을 수 있다. A, B, C 세 공을 나란히 세워놓고 A를 쳤는데 C가 움직였다면 믿을 수 있다. 같은 조건에서 같은 결과가 나온다. 그러므로 세 번째 당구공이 필요하다. 구조론은 질과 입자의 관계가 당구공 1이 되고 운동과 량의 관계가 당구공 2가 되고 그사이의 힘이 또 다른 사건으로 복제될 때 당구공 3이 되어 삼단논법을 성립시킨다. 빛이 번쩍하면 그 장면이 외부의 관측자 눈에 복제된다. 사건 하나가 다른 사건으로 복제된 것이다. 5를 이루어야만 그러한 외부와의 연결을 성립시킨다. 1+2=3이 있다면 1->3, 2-> 3, +->=이라는 세 가지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간다. (A -> B) E (C -> D) E -> F 다른 사건으로 복제된다. ABCDE가 하나의 사건을 이루고 F는 다른 사건이 된다. 이런 구조가 작동할 때 붕어빵틀처럼 동일하게 재현된다. 이런 것은 지극히 기본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1만 년 역사시대 동안 이 핵심을 놓쳐왔다. 이는 인간 언어의 한계다. 뉴턴의 공간과 아인슈타인의 공간은 언어가 다르다. 같은 단어를 다른 의미로 쓰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언어가 존재의 이런 내밀한 사정을 반영할 정도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런 기본적인 사항을 인류가 그동안 천연덕스럽게 무시하면서 살아왔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동양인이 5천 년 동안 기하학도 모르고 원근법도 모르고 살아온 것과 같다. 여기서 대화가 되는지 안 되는지가 갈린다. 기본적인 사실을 지적받고도 태연한 사람과는 어른들의 대화에 끼워줄 수 없다. 정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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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ㅡ스스로가 1이 아니다
C의 출현은
A조직 자체의 역동과
B조직 자체의 역동을
아우르고 포함하여,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역동으로서 나타난다
하지만 C는 A와 B 사이에서 태어났다
C는 먼저 단계인 A와 B에게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는
메커니즘을 따라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