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은 일원론이라고 만 번쯤 말해도 딴소리를 하는 분이 다수이니 답답한 노릇이다. 백 번도 아니고 천 번도 아니고 만 번쯤 말하면 좀 알아들어도 될 텐데. 반항하는 것도 아니고. 어휴! 어째야 하나? 도끼로 머리를 쪼개버려야 하나? 좌절감을 느낀다. 어떤 대칭된 둘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양자를 통일하는 근원의 하나가 있다.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접근할 때는 근원의 하나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헷갈리지 않는다. 이건 구조론의 근본원리이자 출발점이다. 이것을 헷갈려 하면 구조론을 배울 자격이 없다. 일단 첫 관문부터 넘어놓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한다면 힘 빠지는 일이다. 주변을 둘러보자. 모든 것이 대칭이다. 대칭이면 둘이다. 둘이면 이원론이다. 이원론 나오면 다원론이 따라붙는다. 원이 여럿이다. 원이 여럿이면 원이 아니다. 원元은 으뜸이다. 1이 으뜸이고 2는 버금이다. 이원론이나 다원론은 원론이 아니다. 근본이 되는 원형을 찾는 건데 원론이 아니면 찌그러져야 한다. 복제의 원본을 찾는다. 원이 아니면 차次다. 이원론이라는 말은 불성립이고 2차론이 맞겠다. 어불성설이다. 연역이 있으니 귀납도 있어야 한다는 식의 대칭적 사고를 하면 안 된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우리가 초딩은 아니잖아. 좀 생각이라는 것을 하자. 모든 것은 변한다. 둘은 대칭이고 대칭은 변화다. 변하면 차次다. 차는 원이 아니므로 찌그러지자. 지적 용기를 내야 한다. 담대한 도전을 망설일 건가? 만유는 움직이고 움직임의 시작과 끝을 짝지으면 대칭인데 시작에는 끝이 없고 끝에는 시작이 없다. 시작과 끝의 동시존재는 불성립이다. 플랫폼에서 기차의 머리가 먼저 보이고 꼬리가 나중에 보인다. 머리와 꼬리는 인간의 인식에 비친 그림자고 사실은 그냥 한 대의 기차가 있는 것이다. 머리차와 꼬리차로 기차가 두 대인 것은 아니다. 이걸 헷갈려서 기차가 두 대라고 믿는 돌대가리들은 굴밤을 멕여줘야 한다. 오백 방 맞아야 한다. 제발 정신 좀 차리자. 음과 양이 있는 것은 아니며 우주 안에는 오직 음이 존재할 뿐이고 양은 음의 결과측이다. 성은 원래 모두 여성이다. 그런데 변화의 머리쪽 대응과 꼬리쪽 대응으로 역할을 정하다 보니 편의로 성별을 나눠둔 것이다. 뭐든 원인측과 결과측의 할일이 있다. 자동차는 전진뿐이고 후진이 없다. 후진은 방향을 바꿔서 전진이다. 매번 방향을 바꾸기 귀찮으니 편의로 성별을 나눠서 남성과 여성으로 역할을 정한 것이며 그래서 우주에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있지만 사실은 하나의 마이너스에 원인측과 결과측이다. 주고받는 형태로 사건은 일어나며 주는 사건과 받는 사건은 같다. 물건을 사고파는데 한 번은 사고 한 번은 팔고 두 번 거래한 것이 아니다. 고객은 사고 점원은 파는데 고객의 구매와 점원의 판매는 두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다. 헷갈리지 말자고. 근데 이걸 적당히 하지 이렇게 시시콜콜 따지는 게 더 고약하지 않느냐고? 과학이란 것은 원래 따질 것을 따진다. 왜? 에너지 문제 때문이다. 에너지의 일방향성과 결을 맞추려면 일원론으로 가야 한다. 2원론이 되면 에너지의 일원적 통제가 불가능해진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연병장에서 1만 명의 병사가 분열을 하는데 시계 반대방향 한 방향으로 가야지 뒤죽박죽이 되면 개판된다. 통제가 안 되는 거다. 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원론으로 맞춰야 우리가 원하는 질서를 얻는 것이다. 구조론은 사건과 에너지와 구조로 보는 관점이다. 이 세계로 들어왔으면 일원론을 따라야 한다. 구조론으로 보면 전기는 마이너스가 근본이고 플러스는 마이너스가 일정한 조건에서 떡진 것이다. 우주의 근본은 음전자이며 양성자는 음전자가 꼬인 거다. 그러므로 자기홀극은 없다. 음전자가 양성자 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근본이고 음전자와 양성자로 이루어진 전기의 쌍이 여럿 있을 때 그 여러 사이에서의 이동은 전기적으로 중성인데 이것이 자기장이다. 자기장은 전기장에 딸린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음전자와 양성자와 중성자의 관계는 질, 입자, 힘의 관계이며 전기는 질과 입자의 관계이고, 자기장은 힘의 포지션이므로 전기장의 변화에 의해서 자기장이 만들어지며 자기단극자는 없다. 물론 구조론의 추정이다. 구조론은 일원론이므로 그렇게 맞춘다. 가설과 검증을 보통 귀납이라고 하는데 엄밀하지 않는 용어사용이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우주에 암컷만 있고 수컷은 없다. 이 관점으로 보면 연역만 있고 귀납은 없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연역과 귀납은 연역적 혹은 귀납적인데 추론의 방향을 말한다. 부분에서 단서를 먼저 얻고 보편적 원리를 찾아내는 게 귀납인데 여기에 함정이 있다. 부분의 단서로 보편의 원리를 찾지 못한다. 조선 시대에 어떤 학자가 산소나 수소 따위를 만들었다 치고 그래서 어쩔 건데? 단서가 있어도 보편원리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럼 서양학자는 왜 그게 되는가? 왜 조선학자나 일본학자나 청나라 학자는 절대로 안 되고 서양학자는 쉽게 되느냐고? 서양은 수학이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보편원리가 이미 찾아져 있다. 거기에 대입한다. 그들은 이미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알고 있다. 서양학자들은 선배학자가 수천 년간 노력해서 만들어놓은 시스템을 공짜로 가져다 쓰면서 마치 자기가 보편원리를 찾아낸 것처럼 사기친다. 즉 귀납은 거짓말이다. 개별적 단서에 보편원리를 때려 맞춘 사람은 자기고 그 보편원리는 선배들이 만든 것이다. 조선의 학자들은 그 선배가 없기 때문에 물질을 연구하다가 뭘 발견했다 해도 의미가 없다. 거기서 더 진도를 나가지 못한다. 꽉 막혀 버린다. 부분의 단서에서 보편원리를 찾아내는 일은 절대 없다. 이미 찾아져 있는 원리를 가져다 쓰면서 기세를 올린다. 가설과 검증은 수학에 의존하는 연역이며 그 수학은 선배학자들에 의해 먼저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복제하는 것이다. 보편원리를 개별적 사실에 적용하여 이미 있는 지식을 더 확장한 것이다. 학문이 대를 이어 선배와 후배로 가는 사건 전체를 봐야 한다. 선배가 해놓은 것을 공으로 가져다 쓰면서 자기가 만든 것처럼 사기를 치므로 귀납의 착각을 하게 된다. 물론 일상적인 언어사용은 이 부분을 엄밀히 따지지 않지만 구조론은 그것을 엄격히 따질 목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학문은 인류 전체의 공동작업이며 우리는 선배학자들이 만들어놓은 것을 복제하여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자가 단서를 가져오면 스승이 검증하는데 이게 제자의 업적이 아니고 스승의 확장이다. 짝퉁과 모방제품은 발명자의 아이디어를 확장한 것이다. 짝퉁을 만들어놓고 자기가 만들었다고 사기치면 곤란하다. 고양이가 단서를 물어왔다면 그것은 고양이의 업적이 되는 것인가? 아니다. 단서는 그냥 단서일 뿐 아직 지식이 아니다.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 잠재적 소스다. 진리와 연결되어야 지식이다. 이걸 대충 뭉개고 넘어가면 귀신, 도깨비, 종교, 허깨비, 요정, 마귀, 사탄, 괴력난신, 음모론, 주술, 초능력 따위가 난장쳐서 인류는 망하게 된다. 과학은 애들 장난이 아닌 것이며 종교나 주술 수준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 이런 부분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지식의 전체구조를 알고 논해야지 파편화된 부스러기 지식으로 논하므로 헷갈린다. 학문을 인류 전체의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적 작업으로 본다면 답이 보이지 않는다. 그게 하지 마라는 자기소개다. 인류의 시스템으로 보면 학문에 연역만 있고 귀납은 없다. 물론 귀납적 접근은 있다. 귀납추론은 아니지만 귀납적 방향으로 학습을 진행하는 것이다. 요리사가 요리를 배운다고 치자. 먼저 조리법을 익히고 다음 레시피를 배운다. 그런데 레시피는 잔뜩 알지만 조리해본 적이 없다면 그 사람은 요리사인가? 아니다. 안 쳐준다. 레시피가 오백 개 있어도 조리법은 수십 가지뿐이다. 지지고 볶고 삶고 대치고 삭히고 찌고 졸이고 무치고 채썰고 빻고 갈고 굽고 거르고 하면 된다. 요리법은 연역적 원리고 레시피는 귀납적 학습이다. 귀납은 먼저 레시피부터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조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암기한 레시피는 진짜 지식이 아니다. 그 사람은 요리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조리할 줄 아는 사람은 레시피가 하나라도 경우에 따라 요리사가 될 수 있다. 레시피만 안다면 요리지식이 없는 사람이며 그 지식은 잠정적이다. 문제는 레시피를 많이 아는 사람이 조리에 통달하게 되면 갑자기 지식이 폭발적으로 팽창한다는 점이다. 일류요리사라도 모든 레시피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며 레시피는 적당히 만들어도 된다. 예컨대 조선 시대 음식디미방을 발굴하여 재현한다고 치자. 일반인에게 보여주면 요리를 못 만든다. 내용이 너무 간략해서다.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다. 삼계탕을 설명한다고 해도 단어가 30개 정도다. 이걸 보고 어떻게 조선 시대 삼계탕을 재현하지? 그런데 일류요리사는 그것만 보고 정확히 재현에 성공한다. 연역하기 때문이다. 연역은 아는 조리법을 토대로 레시피를 추가하여 확장하는 것이다. 이때 엄청난 속도로 확장된다. 천 가지 만 가지 요리도 해낸다. 오스만 제국 왕실 주방장은 3년 이내에 같은 요리를 올리면 목이 달아나므로 1천 가지 레시피가 있다. 어떻게 천 가지 요리를 할 수 있지? 간단하다. 조리법만 알면 재료를 바꿔서 내고 다른 이름을 붙이면 된다. 지식은 이런 식으로 폭발하는데 조리법을 모르면서 레시피만 암기한 사람이 불완전한 지식을 진짜 지식이라고 우기며 귀납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배운 그거 지식 아니다. 지식이 될 수 있는 잠재적 요소일 뿐이며 진짜 비행기를 몰아보면 그 잠재적인 요소들이 한꺼번에 지식으로 넘어간다. 그러므로 귀납은 학습에 쓰인다. 그 학습은 진짜 지식이 아니고 비행기를 몰아보고 아는 체해야 한다. 강단의 먹물들이 뭣도 모르면서 아는 체를 한다. 그것은 검증이 안 된 것이며 지식의 후보들이며 연역을 통과해야 진짜 지식이 되며 학교에서 배운 어설픈 부스러기들도 일단 연역을 통과하면 한꺼번에 지식으로 상승하므로 일정한 가치는 있다는 말씀이다. 인간의 뇌는 원래 연역한다. 컴퓨터는 프로그램을 돌리는 OS가 연역이다. 그 OS는 또 다른 원시 OS가 돌린다. 원시 OS가 원시적인 방법을 써서 밀레니엄버그 소동이 일어난 것이다. 그 원시 OS는 더 원시 OS가 구동하는데 최종적으로는 하드웨어가 된다. 반도체 구조 자체가 연역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인간의 뇌도 궁극적으로는 하드웨어가 돌린다. 원시뇌가 있다. 최종보스는 위장의 신경이라는 설도 있다. 인간이 히드라 수준일 때 장에 들어온 먹이와 이물질을 걸러내는 데서 신경세포가 발생한 것이다. 인간의 신경은 뇌의 명령을 잘 따르는데 위장의 신경은 고조할배라서 도무지 말을 안듣는다. 그래서 차멀미가 난다고. 히드라가 반사신경으로 이물질을 게울 때의 방식으로 인간은 오바이트를 하는 것이다. 맞는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뇌에도 계급이 있다. 논리적 추론은 모두 세팅된 수학적 프레임을 가져다 쓰는 연역이며 귀납은 학습에나 쓰는 보조수단이며 정확히 말하면 귀납적 접근이지 귀납추론은 아니다. 우주 안에 귀납추론은 없다. 선배들의 공을 빼먹는 속임수다. 보편원리는 수학으로 존재한다. 어제도 해가 동쪽에서 떴고 오늘도 해가 동쪽에서 떴으니 아마 내일도 해가 동쪽에서 뜰 것이다. 이건 추론이 아니다. 그냥 추측이며 지식이 아니다. 태양과 지구의 관계를 지동설 수준에서 알아야 지식이다.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건 세상을 일원론으로 바라보고 에너지의 결로 바라보는 태도다. 에너지가 일원론이므로 헷갈리지 않으려면 그 기준에 맞춰야 한다. 그 기준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으면 구조론을 배울 자격이 없다. 뭐든 둘이 보이면 아직 공부가 덜된 것이다. 내가 사람들 엿먹이려고 구조론의 규칙을 그렇게 정한 것이 아니고 에너지의 원리에 맞추려면 하나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잘난 수학자들이 머리 싸매고 공부하는 우리 불쌍한 중학생, 고등학생들 엿먹이려고 수학의 규칙을 그렇게 정했겠는가 말이다. 문제를 풀려고 그렇게 정한 것이다. 에너지는 하나는 방향으로 존재하며 그것은 화살표다. 쌍방향이 아니다. 진보와 보수의 대칭이 보이면 아직 모르는 것이다. 하나의 ->가 보여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포기하지 말고 사유를 극한까지 밀어붙여야 한다. |
"중요한건 세상을 일원론으로 바라보고 에너지의 결로 바라보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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