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앞의 잣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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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328 vote 0 2008.12.29 (12:5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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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1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기억하는가? ‘중년 유부녀가 늦바람이 났나 보다. 장성한 자식들도 있을 텐데 그것이 잘하는 짓인가?



옳거나 그르거나 간에 논평하려 든다면 그대는 지금 터무니없이 남의 일에 개입하려들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



“정신차렷!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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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2


중년의 아줌마가 늦바람이 났다. 그 사랑은 아름답지 않다. 남편 보기에 부끄러운 일이다. 자녀들이 보기에도 추한 일이다.


다만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왜 포기하는가?”


그 사랑이 그대의 시선 앞에서 아름답지 않을 수 있지만 그대가 그 하찮은 사랑을 포기한다 해도 신은 포기하지 않는다. 철없는 중년 아줌마의 작은 사랑을 신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 작은 사랑을 포기한다면 그 시골의 작은 강과, 그 작은 강 위의 작은 나무다리와, 그 하늘과 그 땅과 그 숲과 그 들판과 풀벌레들과 그 하찮은 더 많은 것들의 존재를 연출하기에 분주하였던 신의 노력이 허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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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매


선생님의 회초리를 ‘사랑의 매’라고 일컫는 모양이다. 매질하는 선생님의 마음에 미움보다는 사랑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질문하고 싶다.


“왜 포기하는가?”


99프로의 미완성작 백 개보다는 100프로의 완성작 하나가 낫다.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신은 언제라도 차선을 버리고 최선을 구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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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사랑과 치사랑


부모와 자식간의 아가페적인 사랑도 있고 연인간의 에로스적인 사랑도 있고 친구간의 우정도 있다고 한다.


천만에! 그저 사랑이 있을 뿐이다.



희생은 사랑이 아니다. 애정도 사랑이 아니다. 참된 사랑은 네가 내라는 사실을, 네가 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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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것


오늘 날씨는 많이 풀렸고 하늘은 더 낮게 내려와 있다. 사람들의 옷맵시는 더 겨울다와졌고 뜰 앞의 목련은 마지막 남은 잎사귀를 떨구었다.


오늘 아침에 이런 점들이 눈에 띄었던가? 만약 그대의 눈에 띄었다면 그대는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맑은 날에는 고음이 잘 들리고 흐린 날에는 저음이 잘 들린다. 아침 일어나 가만히 귀 기울여 소리를 들어보면 창을 열지 않고도 바깥 날씨를 알 수 있다.


만약 그대의 감각이 이토록 예민하다면 그대의 내부에 사랑이 충만해 있다는 증거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긴장한다는 것이다. 깨어 있는다는 것이다.


그대 깨어있지 않다면 그것은 진짜 사랑이 아닐 수 있다.



새끼를 갓 낳은 어미 토끼가 예민해져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만약 평소에 우둔하던 친구가 갑자기 예민한 태도를 보인다면 어쩌면 그는 지금 사랑에 빠져 있는 것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를 사랑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에 앞서 사랑 그 자체를 먼저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를 좋아하기에 앞서 자기 내부에 사랑 그 자체가 충만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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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정(情)


한국인의 정서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정(情)이다. 정(情)이 무엇이길래 한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한국의 초가집은 지붕이 낮다. 천장도 낮고 처마도 낮은데 식구는 많고 방은 비좁다. 따끈따끈한 구들목에 궁뎅이를 부비고 바람벽에 등을 기대고 묵직한 한이불을 덮고서야 마음이 편안해지는 한국인들이다. 


그것은 접촉이다. 한국인들만큼 피부 접촉을 좋아하는 민족은 없다.


음식을 먹어도 그렇다. 눈으로 먹는 일식이 있는가 하면 혀로 먹는 중국음식이 있다. 목구멍을 시원하게 자극하고 뱃속을 따뜻하게 하는 얼큰한 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국인이다. 몸으로 먹는다.


일본인들은 접촉을 싫어한다. 일본의 부부들은 각자 자기 이불을 가지고 있어서 따로 잠자리에 든다. 일본의 건물들은 벽이 무척 얇아서 벽에 등을 기대지 않는다. 따뜻한 온돌이 없으니 접촉할래야 접촉할 곳도 없다.


서양도 마찬가지다. 차가운 대리석과 유리는 피부접촉을 거부한다. 한국의 아이가 따뜻한 온돌방에서 뒹구를 때 서구의 아이는 얌전하게 의자에 앉아있어야 했다. 한국의 아이가 엄마의 등에 업혀 땀 냄새를 맡을 때 서구의 아기는 요람에 갇혀 있어야 했다.


참견하기 좋아하는 한국인의 언어도 그러하고 모여 앉아 노래하기 좋아하는 노래방문화도 그러하고 명절 때마다 구들장이 내려앉는다는 고스톱문화도 그러하다.


가끔은 심각한 표현으로 상처를 주기도 하는 우리의 인터넷문화도 그러하다. 그것은 접촉이다. 


정(情)은 마음의 접촉이다. 키스하고 포옹하는 서양문화와 달리 손끝만 살짝 닿아 애간장이 타는 마음의 접촉이다.



생각하자. 그대는 상대가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이를 고쳐주기 위해 충고하고 간섭하였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대는 한국인이었던 것이다. 접촉하고 싶었던 것이다. 더 넓은 접촉면을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다투고 화해하며 정들고 싶어하는 감정적 접촉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것이 한국인의 사랑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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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의 꽃


선인장의 꽃은 크고 아름답다. 외로운 사막에서 간혹 지나가는 나비나 벌의 이목을 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선인장의 꽃은 좀처럼 지지 않는다. 무더운 사막에서 나비나 벌을 만나기 위해서는 오래 기다려야 하는 까닭이다.

사막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드물게 한 번 비가 왔을 때 선인장은 단번에 크게 자라나지 않으면 안 된다.


비가 오면 쑥쑥 자라나야 하기 때문에 선인장은 정작 기다리는 비가 오면 꽃을 피우지 않는다. 



사랑도 이와 같다. 아름다움의 크기는 그 기다림의 크기에 비례한다. 한 떨기 꽃에는 무수한 실패의 자취가 감추어져 있다. 그 꽃을 피우게 하기 위해서는 그대를 풍요롭게 하는 그 비가 그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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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의 아큐정전(阿Q正傳)


阿Q와 小don은 골목길에서 서로 상대방의 머리끄덩이를 부여잡고 30분간 버티었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阿Q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방해자 역할을 맡은 小don이 버티고 있다. 둘은 호적수이다. 웨이짱(未壯) 마을의 라이벌이다.


그대 역시 가는 곳마다 그대의 앞길을 막아서는 그대 인생의 방해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삶의 비참이 여기에 있다.



알아야 한다. 네가 내고 내가 네다. 阿Q가 곧 小don임을 깨닫지 못하는 한 이 교착된 상황은 결코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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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


그대의 아내가 아름답다 해서 행복해 할 수 있는 것은 그대의 아내가 특별히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신의 축복임을 은연 중에 느끼기 때문이다.


그대가 한 송이 꽃의 아름다움을 두고 행복해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신의 축복임을 그대가 직관하고 있는 까닭이다.



인간은 그러한 방식으로 우주와 만나고 세상과 만나고 신과 만난다. 그러나 그대가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그대가 진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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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의 정석


조훈현은 행마가 날래니 별명이 조제비라 한다. 이창호는 냉정하니 두꺼비라 한다. 유창혁은 화려한 공격바둑을 둔다고 한다.


우주류의 다케미야가 있고 이중허리의 린하이펑이 있고 미학의 오다케가 있다. 바둑기사마다 스타일이 다르다. 변화가 무궁하다. 과연 그럴까?


반상은 361로 뿐. 그 많은 자리 중에 한 지점을 선택하여 둘 수 있다. 우리에게는 많은 선택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천만에. 이기는 바둑을 두려면 선택의 여지는 넓지 않다. 지려면 아무데나 두어도 상관없지만 이기려면 정석대로 두어야 한다.


그대는 지금 인생이라는 바둑을 두고 있다. 바둑판은 넓고 둘 곳은 많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선택의 여지는 361개. 그러나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


“동작 그만.”


손 따라 두지 말라고 한다. 어느 곳에 두어도 좋지만 상대가 두어주기를 바라는 그 지점에는 두지 말아야 한다. 상대가 먼저 보고 상대가 먼저 설계하고 유도하는 그 자리에는 두지 말아야 한다. 



정신차렷. 지금 그대가 두려는 그 자리가 과연 진정으로 그대 스스로가 선택한 자리인지를 확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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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게 그게 아니야


"이봐! 넌 틀렸어. 그게 아니라구."


혹은 

“짜식! 뭔가를 모르는군. 비켜 봐. 내가 한 수를 알려주지."


흔히 이렇게 말하며 남의 일에 끼어들곤 한다. 상대방이 무언가 잘못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그 잘못을 바로잡아줄 요량으로 타인의 삶에 개입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어떻게든 개입한다. 산다는 것은 타인의 인생에 부단히 침투하고 개입하는 과정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남의 일에 간섭하고 나서는 것이다.


어떻게 개입할까? 어떤 명분으로? 무슨 자격으로? 어떻게 하면 상처를 주지 않고 남의 영역에 개입하며 틈입할 수 있을까?



고백하라! 내가 고독해서 그랬다고 고백하라. 상대가 무언가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오직 내가 외로워서 그랬다고 고백하라.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남의 일에 끼어드는 이유는 나 자신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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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고


시골을 방문한 몇 사람이 밤중에 화장실에 갔다. 그 중 한 사람이 주위 사람들에게 충고한다.


“조심해! 발이 빠지는 수가 있어.”


그는 여러 번 화장실에 빠져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타인에게 충고하며 의기양양한 태도를 취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 타인에게 충고하는 형식을 빌어 실은 자기 자신에게 충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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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


소크라테스는 불행하다. 아내 크산티페와 여전히 화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행복한 사람이 불행한 소크라테스를 찾아와 이렇게 충고하였다.


“이보게 친구. 자네는 왜 그렇게 울상을 짓고 있나? 그대는 왜 대낮에 등불을 들고 거리를 헤매고 있나? 자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하늘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네. 도무지 뭐가 문제란 말이야? 아침이면 해가 뜨고 저녁이면 해가 지네. 모든 것은 정상이야. 해가 뜨면 들로 나가 일을 하고 해가 지면 다시 보금자리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지. 잘못된 일은 어디에도 없어. 정신차려, 이 친구야.”



부당하다. 행복한 사람이 불행한 사람을 질투하는 것은 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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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조건


어떤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그 행복을 지켜보아 주는 증인이 되는 한 사람의 친구가 그에게 있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 사랑을 나눌 상대방이 존재할 뿐더러 두 사람의 사랑을 축복해 줄 제 3의 친구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대가 어떤 것을 두고 아름답다고 말한다면 그 아름다움을 창조한 신이 그대를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지켜보아 주는 한 사람의 증인이 없다면 가치란 미(美)란 행복이란 선(善)이란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다.


그 친구가 그대를 지켜보고 있지 않더라도 그렇게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그대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랑이 그대를 떠난다 해도 그렇게 세상 어딘가에 그 사람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대 가슴 가득 사랑일 수 있어야 한다.



설사 신이 당신의 기도를 외면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존재하여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대는 기쁨일 수 있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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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話頭)


조개가 진주를 키우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진주는 조개의 몸 속에서 이물질이다. 조개는 진주를 거부한다. 조개는 부단히 진주를 배척한다.


진주양식장의 어부는 조개의 살 속에 작은 심을 심는다. 조개는 심을 배척하기 위하여 거기에다 키틴질의 막을 씌운다.


영롱하게 빛나는 진주는 우연히 조개의 몸 속으로 침투한 이물질을 조개가 부단히 배척한 데 따른 결과이다.



선사가 공안(公案)을 품는 것은 조개가 진주를 품는 것과 같다. 화두는 불완전하고 모순된다. 진주가 조개의 몸 안에서 이물질이듯이 화두는 내 몸을 찢고 심어진 내 안의 상처이다.


그 상처를 치유하려 하므로 그 공안이 점점 자란다. 그 공안을 깨부수려 할수록 그 공안은 도리어 영롱한 빛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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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尋牛)


산사의 절집이다. 네 면 벽 모퉁이를 돌아가며 십우도(十牛圖)가 그려져 있다. 심우(尋牛)라고도 한다.


소년이 소를 찾아 떠난다. 소 발자국? 진실이 아니다. 소? 역시 진짜는 아니다. 소를 찾는 소년? 또한 진정한 것은 아니다.


그것이 그대에게 한가지 역할을 제공하고 있는 한 그것은 실상이 아닌 허상이다. 그대가 소를 찾고 있는 한 그대는 거기서 소를 찾을 수 없다.


소가 그대를 그리로 불렀고 그대가 그 부름에 응하여 그곳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 방식으로 그대는 소를 찾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그 무대를 지배하는 연출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신도 모르게 역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길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차렷! 그 사이에 붙들려 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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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부대사가 금강경을 설해 달라는 양(梁)나라 고조의 청을 받아 상당(上堂)하더니 앞에 놓인 법상을 육환장으로 꽝 내리쳐 보이고 말없이 내려왔다. 임금은 꼼짝 않고 앉아있다.


옆에서 지켜보던 지공선사 이르기를.


“폐하께서는 이해하셨습니까?”


황제는 머리를 저었다. 지공이 또 세 치 혀를 놀려 허투루 수작을 늘어놓았다.


“저런. 대사께서 그리도 자세하게 일러 주셨는데도요.”



지공이 끼어들었으므로 이 문답은 실패다. 게임의 규칙을 정하고 이르는 자와 듣는 자로 역할을 배분해서 안 된다.



☞☞☞ 선종의 대의는 ‘불립문자(不立文字)’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문자는 일체의 기호를 의미한다. 입으로 내뱉어지는 언어까지도 포함된다. ‘꽝’ 하고 내려친 동작 자체가 일종의 기호이다.


지공이 끼어들어 ‘자세히 일러주셨다’고 말한 것은 최악이다. 일러주면 이미 정(定)의 원리에서 어긋난다.


반야(般若)의 큰 뜻은 소통에 있다. 소통을 위한 수단으로 오직 직지인심(直指人心) 이 하나가 소용될 뿐이다. 소통은 내게서 네게로 주거니 받거니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곧 내이므로 전달할 필요까지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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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의 일기


“나는 오늘 아침을 먹고 양치질을 하고 학교에 가서 수업을 받고 점심시간에 철수와 놀았다.”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가 쓰는 일기의 첫 문장은 반드시 ‘나는 오늘~’로 시작된다. ‘나는’과 ‘오늘’을 쓰지 않으면 그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인지를 생각해내지도 못한다.


‘나’를 배제하여야 한다. 에고(ego)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사태의 중심에 서지 말아야 한다.


초등학교 3학년쯤 되면 담임 선생님이 일기 쓰는 요령을 일러준다. 첫 머리에 ‘나는’과 ‘오늘’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첫 머리에 ‘나는’과 ‘오늘’을 쓰지 않기로 하면 일기를 전혀 쓰지 못하는 아이도 많다. 그러나 지혜로운 소년이라면 ‘나는’과 ‘오늘’을 배제하면서 일기에 쓸 소재가 열 배로 늘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오늘~’로 첫 문장을 시작했을 때 일기에 쓸 만한 사건은 많지 않았다. 나와 오늘이 일기에 쓸 사건의 범위를 ‘오늘 일어난 사건 중에 내가 중심이 된 사건’으로 한정해 버리기 때문이다.


나와 오늘을 배제하고 보니 일기에 쓸 소재가 너무나 많다. 나와 상관이 없는 개울가에 개구리 이야기도 쓸 수가 있고, 오늘 일어난 사건이 아닌 강아지 누렁이 이야기도 쓸 수 있다. 모든 것이 일기의 소재가 된다.



깨달음은 이와 같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나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습관이 있다. 나와 관련시키지 않고 대상에 다가가는 방법을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훈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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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가기 싫은 날


아홉 살이었다. 약간의 감기 기운이 있었다. 아프면 조퇴해도 좋다는 허락을 엄마한테서 받아낸다. 2교시를 마치고 선생님께 말씀드린다. 선생님은 이마를 짚어보더니 조퇴를 허락한다. 반은 꾀병이다. 


교실을 나서기까지는 신이 났다. ‘다들 교실에 갇혀 있는데 나 홀로 자유다. 무언가 신나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그날따라 넓어 보이는 운동장이다. 저 운동장을 가로질러야 한다. 달음박질을 한다. 그렇게 교문을 나선다. 사위는 적막하다. 볕은 따갑게 살을 찔러온다. 나는 그만 화석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태산같은 허무가 엄습해온다.


“어디로 가지?”


빠르게 갈 이유도 없고 천천히 갈 이유도 없다. 오른쪽으로 갈 이유도 없고 왼쪽으로 갈 이유도 없다. 이제 집으로 가야할지 다람쥐 쫓아 뒷산으로 가야할지 알 수가 없다.


거리는 너무나 조용하고 들판은 침묵으로 나를 외면하였다. 하늘도 돌아앉았고 태양도 비웃고 있다.



인간으로 하여금 동기를 부여하는 것들. 기대감, 흥분, 설렘, 희망들이 다 무엇이었던가? 행복은 무엇이고 쾌락은 또 무엇이며 욕망은 또 무엇이었던가?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던 거다. 부지불식간에 그 시선을 의식하며 때로 개입하고, 때로는 참견하며, 때로는 떳떳해하며, 때로는 부끄러워하며 그것이 다 그 은밀한 시선을 의식한 나의 어리광이었던 것이다.


도무지 누가 지켜보고 있길래 그때 그 시절의 나는 그리도 부끄러워하였더란 말인가?


내가 있어야 하는 자리를 떠났을 때, 수업받던 교실을 벗어났을 때, 반복되는 일상의 틀에서 비켜섰을 때, 기어이 동기가 소멸하였을 때, 그 존재는 그렇게 내게 모습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신과의 첫 대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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