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앞의 잣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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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037 vote 0 2008.12.29 (12:5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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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정승


황희 정승이 말하였다.


“그래. 네 말이 옳다.”


황희 정승이 또 말했다.


“그래. 네 말도 맞다.”


황희 정승이 한 번 더 말했다.


“부인 말도 옳소.”


당신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황정승님.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제 말도 맞다고 그러실 거죠?”


천만에. 당신의 개입은 부당하다. 황희 정승은 하인 1, 2와 부인의 개입을 인정했을 뿐이다. 그러면서 정작 황희 정승 자신은 그 사건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대도 이 사건에 개입해서 안 된다.



정신차렷! 바로 그것을 보라. 사람들은 자신이 이미 사건에 개입해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천만에. 그대의 개입은 부당하다.


황희 정승은 부인의 개입사실을 확인하여 주는 방식으로 황희 정승 자신의 개입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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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변


희랍시대 아테네에 제논이라는 궤변가가 있었다. 그는 ‘발이 빠른 아킬레스가 한 걸음 앞서 출발한 거북이를 이기지 못한다’든가 또는 ‘쏜 화살은 날아가지 않았다’는 궤변으로 유명해졌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이 궤변이 속임수임을 논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임수를 증명하는데 성공한다 해도 어떤 위화감이 엄습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상자가 하나 있다. 그 상자에 1을 집어넣으면 3이 나오고 2를 넣으면 4가 나오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상자 속에는 무엇이 숨겨져 있을까?


상자 속에는 [+2]가 숨겨져 있다. 함(函) 속에 숫자가 숨어있다는 뜻에서 이를 ‘함수(函數)’라고 한다. 제논의 함수도 이와 같다.


우리는 제논의 궤변이 거짓임을 증명할 수 있다. 제논이 상자 속에 무언가를 숨겨놓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그 상자 속에 숨어있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아내는데 성공한 사람은 아직 없다. 그러므로 제논의 궤변은 여전히 유효하다. 



세상도 이와 같다. 우리가 모르는 ‘신의 플러스 알파’를 대입하지 않고는 어떤 의문도 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정신차렷.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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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


궤변은 언어의 헛점을 파고든다. 인간의 언어란 결국 불완전한 도구인 것이다.


궤변이란 ‘내 말은 맞고 네 말은 틀렸다’가 아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서 아직 아무런 규칙도 정해놓지 않았다’이다.


고로 궤변은 여전히 유효하다. 궤변들을 하나씩 논파해 가는 과정이 역사의 진보이다.



사회의 법률이나 제도 또한 이와 같다. 때로는 법을 어겨 보임으로써 ‘우리는 이 부분에 관해 아무런 사회적 계약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추어 낼 필요가 있다.


법을 어기는 방법으로 법의 헛점을 찾아내는 일에 대해서도 사회의 적절한 보상이 따라야 한다. 민주화시대에 그 힘든 역할을 맡았던 사람을 우리는 투사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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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가(名家)


중국에서는 제자백가의 하나였던 궤변가 집단을 명가(名家)라고 한다. 공손룡, 등석, 혜시 등이 유명하다. 그들은 검은 고양이가 흰 고양이임을 증명(?)해 내는데 성공하곤 한다.


언어는 약속이다. 그 약속을 깨뜨림으로서 궤변이 가능하다. 언어는 허술하다. 우리는 아직 많은 부분에 있어서 아직 약속해두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지곤 한다.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논리학이 소용된다.


궤변가를 꾸짖는 데서 끝내는 한 학문과 사회의 진보는 없다. 진보는 허술한 사회적 약속을 바로잡아 새로이 약속함으로써 약속위반이 불가능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세상은 기존의 약속을 강조하는 방법으로 애초의 약속을 깨뜨리려는 사람과 기왕의 약속을 깨뜨리고 새로이 약속함으로써 애초의 약속을 지켜내려는 사람과의 투쟁이다.


애초에 맺었던 신과의 약속을 지켜내기 위하여 우리의 싸움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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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실한 개


자전거를 지키도록 명령받은 개는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하루종일 그 자전거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진실로 말하면 개는 자전거를 지키지 않는다.


개는 자전거를 자신이 머물러야 할 집으로 여긴다. 개는 도둑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자전거라는 이동식 주택에 머무르도록 명령받은 것이다.


일본영화 ‘하치 이야기’의 주인공은 일생에 한번쯤은 반드시 주인을 감동시킨다고 알려진 아키다견이다. 하치는 주인이 세상을 떠난 줄 모르고 10년 동안이나 퇴근시간에 맞추어 철도역으로 마중을 나간다.


진실로 말하면 개는 주인을 마중 나가지 않는다. 개에게는 주인이 자신의 집이다. 아침에 출근한 남자가 저녁이면 집으로 퇴근하듯이 개는 10년 동안이나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오곤 했던 것이다.


개에게는 주인이 돌아가야 할 자신의 집이다. 개가 주인을 잃는 것은 사람이 돌아갈 집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신과 인간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가 날마다 퇴근하여 돌아갈 집으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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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키메데스의 미소


한 로마병사가 땅바닥에 엎드려 수학문제를 풀고 있던 시라쿠사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를 발견하고 검을 겨누었다.


“이봐! 그 수학문제가 네 목숨을 구해주기라도 한다던?”


아르키메데스는 로마병사를 쳐다보고 씨익 웃었다. 그 순간 병사의 칼날이 아르키메데스의 목을 잘랐다.


그 죽음의 한 순간에 아르키메데스의 미소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걱정하지마 아르키메데스. 네가 아니라도 훗날 누군가가 그 문제를 풀어줄 거야. 왜냐하면 그 문제에는 분명한 답이 있거든.”


그 순간 아르키메데스는 신의 미소를 보았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답이 있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 문제를 내가 풀거나 혹은 네가 풀거나는 중요하지 않다. 그 진리를 내가 알거나 혹은 모르거나는 중요하지 않다. 신이 내게 먼저 말을 걸었거나 혹은 그렇지 않거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나는 너, 너는 나. 어떻게든 답이 있다면 의미 또한 있는 것이며 그렇게 비참은 극복되는 것이다. 기쁘게 신의 집으로 퇴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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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


정신과 의사가 환자의 정신병을 고쳐준다고 말하면 거짓이다. 모든 정신질환은 환자 스스로가 고치는 것이다. 물론 의사는 환자에게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있다.


자동차 운전교습소라면 어떨까? 강사가 운전을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단지 옆에서 지켜보며 적절히 조언해줄 뿐이다.


어떤 경우에도 강사는 그대에게 바른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단지 그대가 그릇된 길을 가려고 할 때 브레이크를 밟아서 그것을 제지해줄 뿐이다.



인생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타인의 삶에 개입하여 억지로 고삐를 잡아당기며 바른 길로 인도해주려 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릇된 길로 빠지는 것을 그때그때 차단해 줄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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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문제


신의 이름은 무엇인가 혹은 신은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혹은 과연 인간이 내세에 갈 천국이 존재하는가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신은 우리의 삶에 부단히 개입한다. 인류의 역사와 문명에도 개입한다. 신의 문제는 신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는 방식과 개입하는 정도에 관한 문제이다.


신은 관념으로 존재하지 아니한다. 실재하는 신은 부단히 인간과 대화하고 쌍방향적으로 교류한다. 부단히 오류를 수정하며 문명의 항해를 유도한다.



자본의 투자자가 기업의 경영에 관심을 가지듯이 인간의 삶은 신으로부터 빌어 온 바 되며 그 삶의 자본을 빌려준 투자자의 입장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신은 인간의 삶에 부단히 관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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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튼의 운동법칙


인간의 마음에도 뉴튼의 운동 3법칙은 그대로 적용된다. 에고(ego)에 지배되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는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다. 늘 하던 대로를 반복하는 습관적인 사고는 관성의 법칙과 같다. 남의 말에 일단 반대하고 보는 말대꾸의 태도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과 같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미 사건에 개입해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 그 사건에 개입하여 가는 절차와 과정을 소홀히 하고 자기도 모르게 역할 게임에 빠져드는 것이다.


명상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그 사태에 개입하여 가고 있는지를 관찰하기다.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끌려들었는지 아니면 어떤 배후에서의 입김에 조종당하여 나도 모르게 말려들었는지 아니면 순수한 나의 의지로 걸어 들어간 것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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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운 맛은 없다


단맛을 느끼는 미뢰는 혀 끝에 모여 있다. 그러므로 단맛을 느낄 때 혀는 음식을 안으로 삼키려고 한다.


쓴맛을 느끼는 미뢰는 혀 깊숙한 안쪽에 있다. 쓴 맛을 느끼면 혀는 음식을 밖으로 도로 밀어내려고 한다.


신 맛을 느끼는 미뢰는 혀의 양쪽 가장자리에 있다. 신맛은 음식을 가운데로 모으는 역할을 한다.


짠 맛을 느끼는 미뢰는 혀의 앞부분에 있다. 짠 맛은 음식을 골고루 뒤섞는 역할을 한다.


매운 맛은 없다. 매운 맛은 혀의 미각이 아니라 피부의 촉각이다. 그것은 맛이 아니라 발열상태를 감지하는 것이다. 매운 맛을 느낄 때 사람들은 시원하다고도 하고 뜨겁다고도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자. 맛은 그 자체로는 하나의 전기신호에 불과하다. 혀가 음식을 거부하여 밀어내거나 혹은 음식을 받아들여 삼키거나 하면서 우리 자신을 길들이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거기에 속아넘어가는 것이다.



인간은 길들여진다.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에 길들여진다. 슬픔과 반가움으로 길들여진다. 열등감과 우월감으로 길들여진다. 쾌락과 고통으로 길들여진다. 그렇게 바깥에서 지켜보는 신의 시선 앞에서의 어리광으로 길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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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사고의 힘


노만 빈센트 필은 ‘적극적인 사고의 힘’이라는 책을 썼다.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수많은 강연과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적극적인 사고갖기 운동을 벌였다. 부시와 레이건의 황금시대를 향유한 수많은 미국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80년대 우리의 서점가 처세술코너를 메운 책들도 대개 그의 영향을 받았다. 배짱으로 삽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런 목소리들이 있었다.


‘잘해봐’하는 격려도 좋지마는 ‘잊어버려’하는 다독거림도 필요하다. 나는 부정적 사고의 힘에 대해서도 말하고자 한다. 무(無), 공(空), 도(道)를 통해 강조되는 부드러움들은 동양적 사고이다.


서구적 사고가 긍정적 사고라면 동양적 사고는 대부분 부정적 사고이다. 무엇인가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가 아니라 ‘그대여, 마음을 비워라’ 혹은 ‘당신의 야심을 버려라’이다.


서점가에 장기베스트셀러로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라는 책이 있다. 좋은 책이다. 그러나 미국식 패권주의, 황금만능주의, 승리 지상주의, 생존경쟁, 강자의 논리가 약간의 독소로 스며 있다.

내향형이 외향형보다 강하다고 한다. 역설이다. 가장 크게 부정하는 자가 가장 크게 긍정할 수 있다. 진실이 아닌 모든 것을 부정함으로써 하나 뿐인 최후의 진리를 긍정할 수 있는 것이다.



동양의 부정적 사고가 반드시 권장할 만한 것은 아니다. 우리도 이제는 매사에 소극적인 ‘하지 마라’가 아닌 능동적인 ‘하자’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진짜가 아닌 것들을 완벽하게 부정함으로써 하나의 온전한 진짜를 긍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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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 사고와 부정적 사고


맹목적으로 현실을 긍정하는 사람은 실상 그 현실을 변화시키기는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겉으로 긍정을 강조하고 있지만 변혁을 싫어한다는 점에서 진실로 말하면 부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다.


민주화 시대에 그들은 우리를 향하여 말하곤 했다. 세상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말라고. 그렇게 힘주어 긍정을 말하던 그들이 민주화된 지금에 와서는 도리어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아이러니를 본다.



현실과 미래를 동시에 긍정할 수는 없다. 현실을 긍정하는 사람은 그 현실에 안주하여 미래를 부정하기 쉽다. 우리는 현실을 매섭게 비판하면서도 미래를 철저하게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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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암컷


노자는 신성성(神聖性)을 일러 신비한 암컷(玄牝)이라 했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의 도는 그 부드럽고 유연한 성질에서 여성성과 일치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이나 무(無)의 이미지도 남성성보다는 여성성에 더 가깝다 하겠다.


최고의 신은 창조의 신이다. 창조의 성은 흔히 여성성으로 묘사되곤 한다. 어머니가 아기를 낳듯이 창조는 그것을 낳기 때문이다. 



지혜의 창을 든 남자 손님은 응접실까지 접근이 허용될 뿐이다. 사랑의 쟁반을 든 여자 손님이라야 그의 침실까지 침투하는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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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일이 잘 안 될 때는


내가 하는 일이 떳떳한 일이므로 마땅히 잘 되어야 하는데도 현실적으로 잘 안 되고 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그 일에 신이 개입하고 있는 증거일 수 있다. 들리지 않는가?


“너는 왜 그렇게도 작게 가느냐? 왜 더 많은 사람을 태워가려고 하지 않느냐? 왜 더 근본적으로 바꾸려들지 않는 것이냐?”


역사는 때로 진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 퇴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진실로 말하면 역사는 언제나 진보할 뿐이며 역사가 퇴보하는 일은 결단코 없다.


역사가 일시적으로 퇴보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신이 말고삐를 잡으며 이렇게 부탁하는 것이다.


“더 크게 가자. 모두 다 태우고 가자. 더 큰 수레를 준비하라”



우리의 인생은 짧지만 신의 입장에서 보면 도무지 급할 일이라곤 없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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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도단(言語道斷)


“마이너스란 빚이 분명한데 1만프랑의 빚에 5백프랑의 빚을 곱하면 어째서 그것이 오백만프랑의 큰 재산이 되는 것일까?” 스탕달(작가)

“0보다 작은 것을 수(數)라고 부르는 것은 무의미하다.” 파스칼(수학자)


“마이너스 곱하기 마이너스가 플러스가 된다는 규칙은 잘못이다.” 카르다노(수학자)


이해 못 하겠는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이해한다. 이해하기 쉬운데 설명하기가 어렵다. 이때 사람들은 소극적이 된다. 잘 설명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놀림감이 될 수 있으니까.


진리도 이와 같다. 신의 진실을 이해하기는 쉽지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생각하라. 내가 아는 것을 당신이 모를 리가 없다. 내가 이해하고 있으므로 당신은 이해하고 있다. 단지 용이하게 설명하지 못할 뿐이다. 이런 때 나는 다만 이렇게 한마디만 던지련다.


“왜 포기하는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 했다. 언어의 길이 끊어졌다는 뜻이다. 언어로 진리를 마저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맥락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한 언어의 한계를 인정한다면 말이다.


당신이 이미 이해하고 있고 또 내가 이해하고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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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초판사의 법


‘돈 키호테’의 부하 ‘산초 판사’는 나중 작은 성의 영주가 되었다고 한다. 산초 판사의 성문을 통과하는 자는 누구나 병사의 검문을 받아야 한다. 병사의 질문에 거짓으로 대답하는 자는 즉시 목이 달아났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나는 목이 잘려 죽기 위해 이곳에 왔소”


이 말이 참이면 병사는 그의 목을 자를 수 없다. 목을 자르지 않으면 거짓이 된다. 그렇다면 목을 잘라야 한다. 목을 자르면 도로 참이 된다. 이미 잘라진 목을 도로 붙여야 한다.


그렇다면 병사는 목을 잘라야 한다는 말인가 자르지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


독재에 저항하는 투사는 산초판사의 성을 방문한 사람과 같다. 산초 판사의 법률은 잘못되어 있다. 법이 잘못임을 증명하기 위해 법을 어겨 보인다. 실상 이는 사람이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법이 사실을 어긴 것이다.


양심수는 감옥에 있다. 그가 갇힌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죄이다. 그러나 그가 갇혀있음으로 해서 그는 무죄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판결은 산초 판사가 ‘그의 목을 쳐라’하고 판결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논리학에 따르면 후건이 전건을 결정할 수 없다. ‘산초 판사’의 성문을 통과하는 이방인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그가 말한 뒤에 결정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국가보안법 상의 불고지, 회합, 누설, 통신의 죄라는 것은 대부분 행위 후에 결정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법이 사실을 어긴 것이다.



“생각하면 진리를 어긴 법이 얼마나 많은가? 인간이 신을 형벌하는 방법이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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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성의 정리


뉴튼 이후 근대 합리주의의 발전은 논리실증주의에 힘입은 바 크지만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에 의해 그 기초가 흔들려버렸다.


아인시타인의 상대성이론 이후 합리주의 전통은 불확정성의 원리, 정신분석학, 카오스이론 등의 융단폭격을 받아 회복불능의 상태에 빠져버렸다.



세상이 완전하다는 것은 신이 개입할 여지가 차단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을 창조하고 신은 떠났다는 말이다.


세상이 불완전하다는 것은 신이 개입하고 있다는 뜻이며 신이 스스로 창조한 세상을 여전히 지켜보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 지켜보는 신의 시선을 느껴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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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한 해의 극장가


재난영화 도입부의 공식은 이러하다. 조만간 재난의 한가운데 서게 될 운명의 주인공이 말한다.


“큰 일 났어. LA 시가지 한가운데서 화산이 폭발했다구.”


이때 심드렁한 관객의 부아를 돋구는 역할을 맡은 조연이 말한다.


“야아 썰렁하다야. 너 어디 아프니?”


세기말 1999년 한 해의 극장가는 유난히 재난영화들로 채워졌다. ‘타이타닉’을 필두로 ‘딥 임팩트’ ‘고질라’ ‘쥐라기공원2’ 등.

  

30년대의 대공황, 40년대의 2차 세계대전 등 힘들고 우울할 때 찰리 채플린의 코미디를 보며 위안 받았듯이 사상 유례 없는 미국의 대호황기를 맞아 도리어 재난영화를 보고싶어 했던 것이다. 다행히 재난이 우리 마을은 비켜갔다는 사실에 안도하기 위하여.


주인공의 말은 실은 그 영화를 만든 감독 자신의 말일 수 있다. 관객의 부아를 돋구는 조연은 실은 그 영화의 관객인 바로 당신일 수 있다.


이 희곡의 작가인 감독은 말한다.


“큰일 났어. LA 시가지 한가운데서 화산이 폭발했다구.”


관객인 당신은 조소한다.


“야아 썰렁하다야. 3류감독 주제에 나를 한번 놀래켜 보겠다는거니?”


물론 영화에서는 그렇게 뺀질거리며 말하는 사람이 그 재난에 제일 먼저 희생된다. 감독은 그러한 방법으로 성의 없는 관객에게 복수한다.



세익스피어가 쓴 햄릿의 마지막 대사는 이렇다.


“이 비극에서 무언의 역을 맡았거나 혹은 극을 관람하는 관객에 불과한 여러분. 아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호레이쇼. 알지 못하는 모두에게 나의 행동과 그 이유를 전해주게.”


신의 무대에서 당신은 오늘도 관객이다. 알지 못하는 모두에게 신의 행동과 그 이유를 전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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