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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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4519 vote 0 2008.12.29 (12:47:34)


동양사상의 보편성

학문은 인류의 공동작업이다. 그것은 큰 나무와 같다. 먼저 와서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있고 뒤에 와서 거름을 주어 키워내는 사람이 있다. 수확은 그 다음에 오는 사람의 몫으로 된다. 


처음 공자의 제안이 있었고 뒤이어 노자의 반론이 나왔다. 그 이전에도 양주와 묵적의 아이디어가 있었으나 이는 뒤에 온 맹자에 의해 종합되었다. 또 인도에서는 석가의 창안이 먼저 있었고 용수의 대승이 이론을 보강하고 있다. 거기서 한걸음 더 전진한 것이 중국과 한국에서의 선종(禪宗)불교이다.


이 모든 과정을 종합한 사람은 성리학의 주자이다. 그 주자를 받아들여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한 것이 한국적 기(氣)일원론의 율곡과 기대승이며 또 혜강 최한기의 기학이며 수운 최제우의 동학이다. 이렇듯 동양의 인문주의는 부단히 진보해 왔던 것이다. 그러한 변증법적인 진보를 가능케 한 것은 동양정신에 숨은 보편성이었다.


겉으로는 맹자가 양주와 묵자를 맹렬히 비판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변증법적으로 종합하고 있다. 성리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원래 유교에는 형이상학이 없었다. 우주론이 빈곤했던 것이다. 주자는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불교와 도교의 핵심사상을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불교와 도교를 필요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당나라 때 성했던 불교와 도교가 이후로 쇠퇴한 것은 성리학이 맹위를 떨쳤기 때문이 아니라 실은 원래 유교에 없었던 형이상학이 새로 도입됨으로써 불교와 도교의 효용가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다. 불교가 선제공격에 나서 유교의 가치들을 흡수해버리는 경우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하다. 불교는 중국이 아닌 인도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번역의 관문이 등장하고 원전의 권위가 성립한다. 진리의 게임이 권력의 게임으로 변질된다. 누가 임의로 불교를 뜯어고칠 수 없다.


만약 불교가 유교주의를 받아들여 개량을 꾀한다면 그것은 인도인의 손에 의해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도교는 중국의 중심이라 할 황토지대의 사상이 아니라 남쪽 변방 오랑캐의 사상이라는 한계가 있다.


왜 이 점이 중요한가? 현실도피적인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서 현실주의적인 유교의 장점을 포용하지 못했듯이 우리나라에 수입된 서구사상이 그 뾰족함으로 이 땅에서 동양정신의 넓음을 포용하기란 불능이다.


원전해석의 권위 때문에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학문의 매판 길드가 여전히 작동하는 이 나라에서 학문은 진리의 게임이 아니라 권력의 게임이다. 동양정신이 서구정신을 포용하는 수 밖에 없다.



자생적 철학의 가능성

주자의 성리학은 중화(中華)와 만이(蠻夷)를 구분하는 방법으로 한족의 역량을 결집하여 오랑캐에 맞서자는 의도를 숨기고 있다. 그런데 조선은 중국이 경계해 마지않는 오랑캐다. 이런 식으로는 국경이라는 장벽을 넘을 수 없다. 


왜 율곡은 한국적 기(氣)일원론을 제창했어야만 했는가? 이항대립적 사고에 기초하는 이원론으로는 그러한 장벽들을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입장에서 불교도 유교도 수입된 이방의 것이다. 그러므로 종합이 필요하다.


성리학이 불교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 율곡의 기일원론이다. 수운 최제우가 유불선 삼교에 일부 기독교의 장점까지를 종합하고 있는 이치도 마찬가지다. 혜강 최한기의 기학이 조선왕조 500년간 선비들이 줄기차게 토론하여 이룩한 성취를 집약하고 있음도 마찬가지다.   


그것을 가능케 한 바탕은 불교의 중도(中道)와 도교의 무위(無爲) 그리고 유교의 중용(中庸)사상이다. 서로 다른 듯 하지만 통하는 점이 있다. 서구에서 기독교사상의 특수주의가 부단히 이단을 배척해 온 즉 진리의 보편성을 잃은 데 비해 불교의 중도, 도교의 무위, 유교의 중용에 흐르는 보편주의의 끈이 그러한 통합을 가능케 한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그 점을 꿰뚫어보지 못한다. 유불선(儒彿仙)이 경쟁하는 한편으로 종합되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 한다. 동양정신을 개별적으로 파악하려 들 뿐 이를 전체적으로 통찰하는 시야가 결여되어 있다.


서구의 근대과학에 대립각을 세우고 이에 대항하려는 의도를 앞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더 시야를 넓혀야 한다. 동양정신의 보편성은 서구의 과학을 담아내는 커다란 인문주의의 그릇이어야 한다.


동양정신의 이상주의

인문학의 목적은 인류가 이상적인 하나의 공동체를 건설하는데 있다. 인류가 하나의 이상과 가치를 공유할 때 가능하다. 특정 종교의 이상이나 특정 이념의 편향된 가치를 강요하고 있을 뿐 유사 이래 누구도 만인에 의해 합의될 수 있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비전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뛰어난 누군가가 그럴듯한 이상을 제시하고 잘 다듬어진 설계도를 완성한다면 범인류적인 이상과 가치의 공유는 가능한가? 천만에!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만 해도 그렇다. 문제는 커뮤니케이션이다. 언어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문화가 달라서 애초에 의사소통이 가능하지 않다.


인위적인 이상과 가치의 공유는 가능하지 않다. 다양성을 죽이게 되고 특정한 가치를 위해 더 많은 가능성들을 압살하는 잘못이 빚어진다. 인위적으로 언어와 문자를 통일한다거나 혹은 문화와 전통을 해체한다거나 해서 안 된다.


이상과 가치를 인간이 발명해서 안 된다.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모든 것들은 진실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소통이다. 참된 소통의 수단은 인위에 의해 발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의해 발견되어져야 한다.


미(美)를 예로 들 수 있다. 미(美)는 인간에 의해 창안된 것이 아니다. 미(美)는 자연스러움의 방식으로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미(美)는 언어와 국경과 계급을 뛰어넘은 전방위적인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문제는 인간이 과연 그 미(美)에 도달할 수 있는가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 할지라도 인간에게 그것을 알아보는 눈이 없다면 소용이 없다. 필요한 것은 인간의 계발이다. 이에 계발된 인간의 인격형태가 곧 ‘지성’이다. 그 지성을 각성시키는 방법은 깨달음이다.


깨달음으로하여 얻어지는 것은 소통의 가능성이다. 지성인이라면 언어와 국경의 장벽을 넘어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소통을 위해서 깨달아야 한다. 개인의 인격적 상승과 인간적 존엄이 전제되어야 한다.


유교와 불교와 도교를 막론하고 동양정신은 이 점에 있어서 일치하고 있다. 바로 그 점에 동양정신의 보편성이 자리하고 있다. 대항이론으로서의 동양정신의 가능성이 발견될 수 있다.



깨달음은 소통 가능성

태산은 제법 높다. 그 높음으로 하여 많은 약속들의 근거가 된다. 북극성은 언제나 제 위치를 지킨다. 그 변하지 않음으로 하여 많은 약속들을 보증하는 수단이 된다. 태산보다 높고 북극성처럼 변치 않는 것은 무엇인가? 완전성이다.


미학은 어떤 독립된 계 안에서의 완전성을 추구하기다. 완벽한 그림이 있다면 그 그림의 수준은 태산보다 높을 수 있다. 모나리자의 명성은 북극성처럼 변치 않을 수 있다. 완전에 가깝다. 


완전하다면? 통한다. 깨달음은 완전한 인격에 의한 소통 가능성을 의미한다. 미학은 자연에 기초한 소통 가능성을 의미한다. 완전한 음악, 완전한 그림이 있다면 그것을 매개 삼아 소통할 수 있다. 


미학은 국경을 넘어 어디서나 통한다. 역으로 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미(美)가 아니다. 진리의 의미는 보편성에 있다. 보편성은 두루 통하는 성질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식은 ‘1+1=2’라는 말도 있었다. 유럽이나 혹은 중국이라서 1+1의 답이 3으로 된다든가 하는 일은 없다. 통하기 때문에 진리다. 통하고 있기에 미학이다. 통할 수 있기에 깨달음이다.


왜 유교주의는 다른 종교들과 달리 지속적으로 발전하는가? 역시 소통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유교주의는 일정부분 불교 및 도교사상과 소통해왔던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사상에 기초한 서구정신과 차별화되는 동양정신의 승리다.



소통구조로서의 열린 프레임

모든 진보하는 것은 바깥세계와 소통하고 있다. 소통이 막힐 때 발전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곧 소통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반대로 정체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면 소통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깨달음은 완전성을 추구한다. 완전하다는 것은 붙잡혀 있지 않다는 뜻이다. 독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독립하여 완전할 때 증폭현상과 공명현상이 일어난다. 완전하면 통한다.


의례와 격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신호이다. 그것으로 언어와 문자를 대리한다. 대리한다는 것은 붙잡혀 있다는 것이다. 독립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증폭되지 못한다. 그 기호를 넘어설 때 소통을 얻는다. 


왜 깨달음인가? 의례와 격식이라는 기호를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언어와 문자를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역으로 의례나 격식이나 언어나 문자가 다 본래는 소통을 위한 수단으로 고안된 것들이다. 그러나 닫혀있다. 도리어 소통을 방해하는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는 것들이다.


불완전하다. 언어와 문자로는 낮은 수준의 소통이 가능할 뿐이다. 불완전한 수단에 의존할 때 인간과 인간 사이에 벽이 생겨난다. 소통하기 위해 만든 수단들이 그 불완전함으로 인하여 도리어 소통을 방해하고 있다.


답은 완전함에 있다. 완전함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어디에도 붙잡혀 있지 않은 그것은 무엇인가? 자연이다. 자연에 숨은 본래의 모습에서 완전함을 찾을 수 있다. 증폭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다.


왜 유교주의인가? 종교적 퇴행의 찌꺼기인 삼강오륜 따위의 교리가 아니라 근간이 되는 프레임을 보아야 한다. 유교의 프레임은 다른 종교사상들에 비해 열려있다. 유교는 그 열려있음에 의해 진보해 왔다. 유교는 맹자에 의해 양주, 묵적과 소통해 왔다. 주자와 왕수인에 의해 불교, 도교와도 소통해 왔다.


율곡이 젊은 시절 불교를 익히고 그 영향을 받았음은 알려진 바다. 그러한 소통의 결과로 유교의 변증법적인 진보가 있다. 역으로 그 진보의 과정을 추적하여 거기에 숨은 소통의 프레임을 발견할 수 있다.



닫힌 프레임과 열린 프레임

마르크스는 ‘종교는 아편이다’고 선언하고 있지만, 그 발상법은 기독교의 단선적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다. 곧 헤브라이즘의 세계관이다. 헤브라이즘의 논리틀은 닫힌 구조이다.


기독교는 창세로 시작하여 말세로 끝나는 단선구조의 시간적 논리틀을 가지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역시 해방과 혁명의 형태로 심판과 구원에 해당하는 단선적 논리틀을 두고 있다. 거기에는 동양의 비선형적인 세계관 혹은 입체적인 세계관이라 할 중용의 세계관이 없다.


자궁이 없이 태어난 아기는 없다. 기독교문화권에서 성장한 서구인들 중 기독교세계관의 영향 아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별수 없는 기독교도들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인들은 석가와 공자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별수 없는 유교주의자들이다. 


세계관은 인간이 이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사고의 틀이다. 그 프레임은 열려 있거나 닫혀 있다. 단선적이거나 입체적이다. 이항대립적이거나 변증법적이다. 세계관이 없는 사람은 없다. 세계관을 부정하는 사람도 나름대로 유치한 단계의 일정한 사고범위를 가지고 있다.


열린 프레임을 가진 입체적 세계관이라면 자기와 다른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로서의 작은 싹이나 돌기 하나씩을 가지고 있다. 동양적 전통이 서구에 비해 더 개방적이고 유연한 것은 이 때문이다. 동양은 서구를 충분히 받아들이고 있지만 서구는 끝내 동양을 이해할 수 없다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원자론과 비트의 세계관

서구사상으로 말하면 창세에서 말세까지 1사이클의 주기로 파악하는 기독교의 단선적 세계관 말고도 요소환원주의에 기초한 뉴튼 이래의 기계론적 세계관 혹은 결정론적 세계관이 있다. 고대의 원자론적 세계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원자론적인 발상법은 그리이스와 인도에서 시작되어 현대의 이론물리학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문제는 그 동그란 형태의 원자 알갱이가 외부를 향한 촉수나 돌기를 갖지 않음으로써 외부세계에 대해 닫혀있다는 점이다.


요소환원주의도 일정부분 원자론에 의존하고 있다. 물질은 원자의 집합으로 되어 있으므로 어떤 사물이든지 구조를 해체하여 최초의 단순한 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요소환원주의다.


환원하면 원위치로 되돌아가고 만다. 진보는 없다. 여기에서 발전하고 있는 뉴튼 이래의 기계론 혹은 결정론적 세계관 역시 원자 알갱이와 마찬가지로 외부세계에 대해 닫혀 있다고 볼 수 있다.


세계관은 하나의 프레임이다. 그 기둥줄기에서 가지가 뻗어 나오고서야 손을 내밀어 다른 사상을 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원자론 혹은 결정론적 세계관은 안으로 닫혀 있어 외부와 교섭할 필요가 없다. 네트워크를 구성하지 못한다.


기독교의 세계관 역시 창세에서 말세까지 1사이클의 순환구조가 하나의 원자 알갱이를 이루고 있어 닫혀 있으므로 외부세계와 교섭할 필요가 없다. 


사회는 복잡한 프레임을 가진 하나의 시스템이다. 시스템의 완성은 그 최소단위가 되는 원소들을 집적함에 의해서 가능하다. 사회의 원소는 개인이다. 개인을 돌보지 않은 채 시스템의 구축을 시도한다면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서구정신은 개인을 돌보지 않는다. 개인을 그냥 하나의 원자 알갱이로 보고 이 알갱이들을 조직하여 사회라는 더 큰 규모의 알갱이를 조직하고자 할 뿐이다. 그러니 외부에 대해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다.



주역의 바탕은 관계망의 세계관

동양정신의 정수는 유교의 주역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교주의가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장구한 세월을 따라 단계적으로 업그레이드 되어온 것은 프레임의 구조가 열려 있는 개방형 구조였기 때문이다.


주역의 정수는 ‘중용의 도’에 있다. 중용은 언제든지 왼쪽과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 수 있다는 점에서 운전자의 ‘제어’와 같다. 여기에는 균형감각이 소용된다. 중용은 또 음(陰)과 양(陽)이라는 좌우 양측의 존재를 동시에 긍정한다. 그러면서 양자를 통일하는 제 3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에 변증법적인 발전가능성이 숨어있다.


이는 원자 알갱이의 세계관, 혹은 기계-결정론의 세계관이 아니라 그에 대응되는 유기체적인 세계관, 생명의 세계관, 세계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파악하는 관계망의 세계관에 가깝다.


중용은 하나의 기본이 되는 프레임이다.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 가지를 쳐 나아갈 수 있다. 음과 양은 가지가 뻗어나갈 수 있게 하는 두 개의 돌기다. 이는 식물의 생장점과 같다. 이에 진보할 수 있다. 서구의 원자론과 다르다.


불교의 연기설 또는 인연설의 바탕이 되는 중도(中道)의 세계관도 마찬가지다. 인연은 하나의 네트워크 개념이며 중도는 네트워크의 중심이 되는 ‘라우트’와 같다. 스스로를 가운데 두고 왼쪽과 오른쪽에서 음양의 가지를 뻗어나간다. 그러므로 외부에 대해 열려있다. 개방적이다. 진보할 수 있다.


특히 불교사상을 많이 받아들여 선학(禪學)으로도 불린 왕양명의 심학(心學)이 그러하다. 여기서 심(心)은 우리가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라 핵심, 중심, 본심의 심을 의미한다. 곧 심은 네트워크의 중심이다. 정(These)과 반(Antithese)의 양극단을 아우르는 헤겔의 합(Synthese)을 의미한다. 


### 라우트

네트워크 상에서 오가는 정보를 교통정리 해 주는 장비.



이항대립적 사고의 극복

고전물리학의 핵심원리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으로 증명되는 ‘물리적 등방성과 대칭성’의 원리이다. 주역의 기본 원리는 경험칙으로 파악된 물리적 등방성과 대칭의 원리가 된다. 


작용-반작용의 법칙은 자연이 내재한 원리에 따라 미학적인 자기완결성을 찾아가는 이치다. 그 원인은 물리적 등방성과 대칭성에 있다. 자연은 등방성과 대칭성을 통하여 하나의 개체로서 완성되려고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만유인력은 그 완성된 형태를 나타낸다.


뉴튼의 고전역학으로 설명하는 이 원리의 기본형은 나무의 가지와도 같이 Y자 모양을 한 하나의 프레임이다. 작용과 반작용의 방식으로 그 기본 프레임에서 점차 가지를 쳐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우리 주변에서 무수히 관찰되어 경험칙으로 인식된다. 그러한 경험칙이 원시적인 형태로 적용된 것이 이른바 흑백논리다.


주역에서 말하는 중용(中庸)의 도나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사상은 고전물리학이 말하고 있는 물리적 등방성과 대칭성의 원리를 직관적으로 파악한 데 따른 것이다. 음양(陰陽)의 대칭구조가 물리적 등방성과 대칭성의 원리에 해당한다.


문제는 경험칙에 바탕한 이 논리가 흑백논리의 원시성을 극복하고 변증법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느냐이다. 유교가 말하는 조화의 개념은 작용과 반작용의 두 날개를 아우르면서 동시에 왼쪽과 오른쪽으로 가치쳐 나갈 수 있는 인자의 존재를 함의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중용의 도는 서구의 원자론이 빠지곤 하는 순환논리의 오류나 기독교적 흑백논리의 이항대립을 극복한 열린 프레임의 개방적인 세계관이다. 그러한 개방성이 제자백가의 다양한 사상을 수용하여 유교주의가 상대적인 진보성과 포용성을 낳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원론과 일원론

이원론은 물리적 대칭성-등방성의 원리를 원시적인 수준에서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음과 양의 두 축은 팽팽한 균형을 이루어 서로의 발목을 잡고 적대적 의존관계를 이룬 채 고착하고 있다. 이는 기성질서의 유지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임금과 신하, 귀족과 노예, 남자와 여자, 강자와 약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서로 적대적 의존관계를 형성한 채 서로가 서로의 행동을 제약하고 있다. 이항대립적 사고의 오류와 흑백논리의 오류가 여기서 비롯한다.


율곡 이래 한국유교의 특징인 일원론의 경향은 양자를 통일하는 제 3의 프레임과 그 구성인자들을 인식하는데 성공했음을 나타낸다. 음과 양이 평형을 이룬 채 고착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과 주변으로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 콜더의 모빌과 같은 가지치기가 가능하다.


한국적 일원론의 개방성과 진보성은 그러한 사상의 ‘가지치기’에 의해 담보된다. 주자학을 소개한 고려말의 안향 이후 5백년간 선비들이 줄기차게 토론한 결과물로서의 5백년 유교의 성취가 거기에 압축되어 있다.


재래의 원자론 개념으로는 그러한 가지치기가 불가능하다. 원자들은 불변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발전을 담보할 수 없다. 원자들은 존재할 뿐 교섭하지 않는다. 서로 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 원자들의 고립을 극복할 때 ‘관계망의 세계관’이 얻어질 수 있다.


기독교의 선과 악, 혹은 신과 사탄으로 나누어 보는 발상법 역시 이원론적이다. 주자학에 있어서의 중화(中華)와 만이(蠻夷)를 구분하는 이항대립적 사고, 그리고 마르크스의 계급이론에서 나타나는 이원성도 마찬가지다. 그 이원의 둘은 대립할 뿐 침범하거나 교섭하지 않는다. 상황은 고착되고 발전은 불가능하다.



음양오행론의 응용과 변주

음양오행론은 고대 원자론에서 출발하고 있으나 약간의 일원론적인 진보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음양론과 오행론은 원래 별개의 사상이었다. 음양과 오행이 만나기 전 음(陰)과 양(陽)은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양자를 변증법적으로 통일하는 제 3의 프레임은 발견되지 않았다.


음양과 오행이 만났을 때 프레임이 얻어졌다.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의 ‘가치치기’가 일어난다. 더 많은 가지들을 포용할 수 있는 개방성이 얻어졌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주어졌다. 무수히 많은 응용과 변주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선과 악의 이항대립을 기본 축으로 삼는 기독교나 불변의 요소를 전제로 하는 원자론의 개념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주요개념들이 다양한 변주와 응용이 불가능하다는 점과 비교할 때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 된다.


서구사상이 교조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상의 핵이 원자와 같은 단핵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가지가 뻗어나가는 단초가 되는 뾰족한 돌기들을 두지 않고 있다.


예컨대 입멸(入滅)을 앞둔 석가가 제자 가섭에게 해석의 전권을 부여하는 사권(師拳)을 주기를 거부하고 ‘자등명 법등명’의 유지를 남긴 뜻은 불교가 교조주의에 얽매이지 않도록 자유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그 결과로 당나라때의 선사 임제(臨濟) 의현(義玄)에 이르러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선언하는 단계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석가는 불교사상을 딱딱한 원자 알갱이가 아니라 무한히 뻗어나갈 가지를 갖춘 트리(tree)형태의 프레임 구조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뼈대가 연기(緣起)의 프레임임은 물론이다.



한국 유교의 개방성

음양오행사상이 그 원시성에도 불구하고 기이한 생명력을 가진 것도 그 때문이다. 무제한의 응용과 변주가 가능하다는 개방형 프레임 구조의 매력이 있다. 물론 실제로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오행은 둥글게 원을 그린 형태로 도식화되곤 한다. ‘상생과 상극’의 가치치기가 있지만 그 가지들은 한결같이 밖이 아닌 안을 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음양오행 전체가 하나의 원자 알갱이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응용과 변주가 있지만 닫힌 계 내부에서 일어날 뿐 바깥으로는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한다. 다양하게 변주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하학적인 비약이 적용되지 않고 있어서 동일한 2차원 평면상에서 산술적인 복제를 무한히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돌기들이 내부를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열린 프레임의 예로 인용할 수 있는 콜더의 모빌구조와 다르다. 그러나 제한된 범위 안에서는 개방형 프레임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음양오행설은 적어도 선형구조에서 면형구조로의 상승이 있는 것이다. 


유교주의의 최종 버전이라 할 한국 유교의 일원론은 음양오행사상의 이러한 문제들을 상당부분 해결하고 있다. 음양오행설과 달리 바깥으로 난 뾰족한 돌기를 가지고 있다. 이 돌기들에 살이 붙어서 가지로 자라고 있다.


물리적 등방성의 원리가 가진 이원성을 극복하고 있다. 불교의 연기법과 같이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을 추적하는 즉 ‘기승전결’과 같은 시간개념을 도입하는 방법으로 보다 입체적인 모빌구조에 가깝게 발전하고 있다.


오행이 공간에서 전개하는 원자와 같다면 음양은 밤과 낮처럼 시간적인 진행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그 방법으로 시간성과 공간성이 통일되면서 입체적인 차원의 비약을 낳고 있다. 현상과 이면을 동시에 파악하는 관계망의 세계관에 근접하고 있다. 한국 유교에서만 특별히 그러하다. 



주역에서 배운 강희제

청나라의 강희제가 남겼다는 문집을 참고할 수 있다. 그는 주역을 본래의 목적인 점치는 기술이 아닌 도덕적 각성의 수단으로 삼았다고 한다. 강희제가 배운 주역의 정신은 ‘항상 뒤집어보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것이다. 여기에 경험칙으로 터득된 물리적 등방성-대칭성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우리 주변의 사물들에서 천칭 저울과도 같이 이항의 대립을 이룬 채로 절묘한 균형을 찾아가는 현상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다. 이때 저울의 중심축을 장악하면 현상과 이면의 두 대립항을 동시에 관측할 수 있는 잇점이 있다.


뉴튼은 그러한 경험칙에 수학의 논리를 대입하여 근대과학으로 발달시키고 있다. 반면 중국인들은 그러한 경험칙의 집대성이라 할 주역을 단순히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만 삼고 있다. 논리학과 수학이 발달하지 못한데 원인이 있다.


강희제, 건륭제, 옹정제로 이어지는 청나라의 전성기의 절묘한 통치술은 적을 타도하기 보다 ‘견제와 균형의 묘’를 살리는 주역의 가르침을 실천한 바가 된다. 중국이 다민족을 포용하면서 거대한 몸집을 유지한 채 5천년의 역사를 이어간 비결이 여기에 있다.


전쟁광 부시가 주역을 한 줄이라도 배웠다면 생각을 바꿨을 것이다. 물론 주역이 항상 긍정적으로 쓰이는 것은 아니다. 사농공상의 신분질서나 남존여비의 차별관습 또 권선징악 등의 형태로 기성질서를 옹호하는 수단으로 유지되는 때가 더 많았다.


요는 주역의 개방성이다. 주역은 특정 집단에 그 해석의 권한이 독점되지 않는다. 다양한 응용과 변주가 가능하다. 그러한 단초가 처음부터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주역은 나쁘게 이용될 수 있는 가능성의 크기만큼 선(善)한 목적에 이용될 수 있는 가능성도 함께 갖추어져 있다.


유교주의가 상하관계를 위주로 하는 수직적 위계질서를 가리키면서도, 어느 면에서는 노자의 가르침에 가까운 견제와 균형, 조정과 제어의 원리로 설명되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교와 불교의 상호침투

불교가 그 철학의 깊음에도 불구하고 유가가 더 동양적 전통의 중심에 놓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더 학문에 가까운 유가가 불가를 포용하여 받아들일 수 있을 뿐 종교에 가까운 불교가 유가를 받아들일 수는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단초가 사상정립의 초기에 제공되어야 한다. 석가가 입멸을 앞두고 ‘자등명 법등명’의 유언을 남겨 개방적 태도를 주문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에는 가지가 자라날 생장점이 되는 돌기가 많지 않았다.


보편성과 특수성의 차이다. 불교는 지나치게 개입하여 구체적인 행동을 주문하지만 유교는 기본 원칙만 밝히고 있다. 특히 무신론에 가까운 불교의 지나친 현실개입과 우주론의 빈곤이 포용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주희의 성리학은 일정부분 불교의 형이상학을 받아들이고 있다. 왕수인의 양명학은 한술 더 뜨고 있다. 양명학은 선학(禪學)으로 불리었을 정도로 불교에 기울었던 것이다. 반면 불교가 유교의 합리주의를 받아들여 탈종교화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성리학과 양명학의 차이는 성(性)과 심(心)의 차이에 있다. 성(性)은 근원의 인자가 되는 불변의 요소를 가리킨다. 원자론에 가깝다.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단은 네 개의 원소와 같다. 딱딱한 원자 알갱들이다. 반면 심(心)은 상대적으로 가변적인 운동가능성을 의미한다. 심은 핵심(核心)이자 중심(中心)이다. 주변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네트워크의 라우트에 비유할 수 있다. 


성(性)은 남성과 여성처럼 본래부터 주어져 있다. 반면 마음은 네트워크에 의해 주변과 연동되어 서로 교감하며 흘러간다. 성은 남자와 여자, 군자와 소인, 임금과 신하처럼 근본적으로 차별화된다. 심은 계절이 모습을 바꾸듯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습을 바꾼다. 심(心)이 더 관계망의 세계관에 가깝다. 따라서 양명학이 더 대중성 있는 유교가 된다.


근대과학이 증명하는바 ‘임금과 신하’ 역시 상황에 따라 흘러간 결과일 뿐 불변의 속성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심학이 성학보다 더 진보한 사상이다. 심학이 더 대중적이고 성학은 더 권위주의적이다.



왜 일원이어야 하는가?

유교가 엘리트 지식인 위주의 성리학에서 대중적인 양명학으로 발달하는 과정은 불교가 소승에서 대승으로 발달하는 과정과 닮아있다. 또 불교가 교종에서 선종으로 발달하는 패턴, 남종선과 북종선의 대결에서 남종선이 승리하는 과정, 불교의 수행법이 위빠사나에서 간화선으로, 또 돈오점수에서 돈오돈수로 발전하는 과정도 같은 맥락에 해당한다.


유교의 사단칠정론으로 말하면 사단은 최초의 단초가 되는 요소로서의 알갱이를 의미하고, 칠정은 다양한 변주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 역시 마찬가지로 성(性)에서 심(心)으로의 대중화 패턴을 따르고 있다.


성(性)에서 심(心)으로 간다. 알갱이에서 네트워크로 간다. 우리 사회의 변혁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엘리트중심 운동에서 대중운동으로 간다.


네트워크는 코어(core)와 어프로치(approach)로 설명될 수 있다. 코어(실체)의 역할을 하는 것이 컴퓨터의 서버라면 어프로치(관계)의 역할을 하는 것이 네트워크망이다. 코어가 사단(四端)이라면 칠정(七情)이 어프로치가 된다.


최초에 제안자가 생장점 혹은 돌기가 되는 단단한 심(core)을 심으면 그 심으로부터 차차로 가지(approach)가 뻗어나가서 다양한 응용과 변주를 취하는 것이다. 코어와 어프로치가 결합하여 Y자 모양을 이룬 것이 동양사상의 개방적 프레임 구조다.


이원론의 문제는 코어(core)의 부재로 설명될 수 있다. 중심은 없고 날개만 있으니 좌파와 우파의 두 날개가 서로 충돌하여 적대적 의존관계를 이룬 채 고착하고 만다. 발전하지 못한다.


일원론은 음양의 두 가지(approach)가 중용이라는 하나의 축(core)에 의해 통일되고 있다. 제자가 내놓은 새로운 학설이 스승이 제안한 이론(core)과 충돌하지 않고 바깥으로 뻗어나감으로써 트리(tree)를 이루니 학문이 번성하고 있다.


학문의 성과가 차차 축적되어 진보라는 방향성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원이어야만 한다. 일원은 무엇인가? 세상의 모든 변화와 패턴들이 공유하고 있는 하나의 프레임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뉴튼의 고전역학을 성립시키는 물리적 등방성과 대칭성이다. 곧 ‘관성의 법칙’이라는 하나의 축과 ‘작용-반작용의 법칙’이라는 두 돌기로 된 Y자 모양의 개방형 구조이다.


일원이어야 한다. 일원이 아니면? 학문의 성과는 축적될 수 없다. 진보라는 방향성을 나타낼 수 없다. 아라비안나이트처럼 밑도 끝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이라면 곤란하다. 미로처럼 얽혀서 안 된다. 밖으로 가지를 쳐야 한다. 



대중이 학문의 주체가 된다

학문은 진보하며 그 진보에는 일정한 방향성이 있다. 모든 학문에 공통되는 기본적인 하나의 프레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원리를 세계관에 반영하여 차별을 위주로 하는 이원론적인 사고 혹은 이항대립적 사고를 극복하고 대신 일원론의 통합적인 사고 곧 관계망의 세계관으로 발전할 수 있어야 한다.


불교에서 말해지는 분별지(分別智)와 통합지(無分別智, 般若)로 설명할 수 있다. 분별지가 이원론적 사고 혹은 이항대립적 사고(흑백논리)라면 반야(般若) 곧 통합지는 일원론적인 사고 또는 사물을 낱낱이 쪼개어 분별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관계망의 세계관이다.


이원론의 분별지가 지배계급과 대중을 구분하여 사회에 질서를 부여하는데 의미를 둔다면 일원론의 통합지에서는 대중이 새로이 학문의 주체로 등장하는데 의미가 있다. 대중이 학문의 주체로 등장할 때 이를 교통정리하기 위해 커다란 하나의 울타리로 기능하는 일원이 필요하다.


그것은 무엇인가? 소통가능성이다. 반면 대중이 학문의 주체가 아닐 때 소통의 문제는 대두되지 않는다. 대중이 소외되고 학문이 지식계급에 의해 독점될 때 번역의 문제, 언어와 문자의 문제, 문화권의 문제들은 부각되지 않는다. 


학문이 발달하지 않았던 초기 단계에서 학문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 비밀스럽게 전수되곤 했다. 대중은 학문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학문이 진보하여 대중화 될 때 비로소 소통의 문제가 제기되고 그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프레임의 공유에서 답을 찾게 된 결과로 일원론 혹은 관계망의 세계관이 요청되는 것이다.


학문이 발달할수록 하나의 프레임에 더 많은 가지가 뻗어나가는 다양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 다양성에 의해 유발된 복잡성이 역으로 그 혼란상을 정리하기 위한 일원을 요청하는 경향도 있다.



이기이원론과 이기일원론

퇴계의 이기이원론은 위와 아래로 구분하여 서열을 짓는 방법으로 사회에 질서를 부여하자는 것이다. 퇴계에 있어 이(理)는 위에서 지배하는 사(士)계급이요 기(氣)는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 민중이다.


이가 하늘이면 기는 땅이다. 이는 주류질서 위주의 기득권세력이고 기는 비주류의 아웃사이더이다. 이런 식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차별하고 나누고 구분 짓는다. 그러나 한국 유교의 최종 결론은 율곡의 일원론이다.


이원의 분별망상은 무분별지(無分別智) 곧 반야(般若)의 일원에 의해 해체되어야 한다고 율곡은 젊은 시절의 불교수업을 통해 배웠던 것이다. 그 일원의 일자(一者)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통일하는 대중일반이다.


주류와 비주류를 통일하는 대중이 승리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모든 학문은 궁극적으로 ‘소통’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쌍방향성이 중간에 개입하는 브로커를 부인하고 이용자와 이용자를 직접 연결시키듯이 대중은 직접적인 소통을 원한다. 정치, 경제, 문화, 사회를 막론하고 그러하다.  


기대승과 율곡의 사상은 퇴계에 비해 더 대중친화적이고 현실참여적이다. 물론 율곡이 처음부터 일원론이었던 것은 아니다. 굳이 말하면 1.5원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일원론의 경향은 노골화된다.


훗날의 혜강 최한기의 기학에 이르러서는 기일원론으로 정리된다. 한국 유교가 정통과 이단을 구분하고 중화와 만이를 차별하는 이분법의 차별주의를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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