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어원연구

타밀어로 석탈해는 ‘대장장이 우두머리’… 삼국유사·삼국사기 내용과 일치

필자는 한국 고대사 최대 미스터리의 하나인 가야 초대 왕비 허왕후(許王侯·서기 32~189년)의 고향 아유타(阿喩陀)가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州)의 아요디야 쿠빰(Ayodhya Kuppam)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2005년 8월 16일자 ‘뉴스메이커’) 또 다른 미스터리인 신라 제4대왕 석탈해(昔脫解, 재임 서기 57~80년)의 출신지 다파나국(多婆那國) 또는 용성국(龍城國)은 어디인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史)에 나오는 석탈해 설화를 당시 타밀인의 언어 및 사회상과 비교해 분석한 결과, 그도 허왕후와 마찬가지로 인도 남부 타밀지역에서 온 인물임을 알았다.

선진 철기문화로 토착세력에 맞서

이는 지난 수년간 캐나다 토론토대학 남아시아연구센터 소장인 셀바카나간따캄교수, 토론토의 타밀인협회 산무감 코한 사무총장, 남아시아 여성센터 자얀티 레이놀드 상담관, 타밀어 교사 칼란티 쿨라나한, 그리고 힌두교 성직자 등 수많은 인도인을 직접 만나 취재했고 토론토대학 등 여러 도서관의 자료들을 추적한 결과다.

석탈해는 자신이 “숯과 숯돌을 사용하는 대장장이 집안”이라고 밝혔는데 석탈해의 성(姓)인 ‘석(Sok)’은 당시 타밀어로 ‘대장장이’를 뜻하는 ‘석갈린감(Sokalingam)’의 줄인 말로 성과 집안 직업이 그대로 일치한다. ‘석갈린감’ ‘석’ ‘석가(Soka)’등은 영어의 Blacksmith, Goldsmith나 Smith처럼 대장장이 집안의 이름으로 통용됐으며 지금도 타밀인의 남자이름에 남아 있다. 또 ‘탈해(Talhe)’는 타밀어로 ‘머리, 우두머리, 꼭대기’를 의미하는 ‘탈에(Tale)’나 ‘탈아이(Talai)’와 거의 일치한다. 따라서 ‘석탈해’라는 이름은 타밀어로 ‘대장장이 우두머리’를 가리켜 그가 바다 건너 한반도에 함께 들어온 대장장이의 지도자임을 이름에서 암시하고 있다.

아울러 석탈해의 다른 이름 토해(吐解)는 타밀어 토헤(Tohe)나 토하이(Tohai)와 일치하는 데 이는 ‘새의 날개, 특히 공작새 날개’와 ‘보호자, 후견인’ 등 2가지 뜻을 갖고 있어 석토해라는 이름은 ‘대장장이의 보호자’라는 의미다.

더구나 석탈해가 ‘대장간 도구’를 ‘단야구’(鍛冶具)라고 불렀는데 당시 타밀어의 단야구(Dhanyaku)와 그 발음 및 뜻이 완전히 일치한다.

신라와 가야의 ‘각배’숨은 비밀

약 2000년 전 당시 타밀인이 세운 촐라왕국(Chola Kingdom) 등 인도 남부지역은 당대 세계 최고 품질인 우츠(Wootz)강철의 원산지인 철의 선진국으로 동서양에 철을 수출하던 ‘철의 실크로드’ 중심지였다. 석탈해가 비록 이방인이지만 초기철기시대에 머물러 있던 한반도에 칼이나 철제 농기구 등 인도 남부의 강력한 선진 철기문화를 갖고 이주해 기존 토착세력에 맞서 신라의 왕권에 참여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잡게 된 것이다.

둘째로, 발음과 뜻이 완전히 일치하는 또 다른 단어는 석탈해의 제안에 의해 제3대 유리(儒理)왕부터 쓴 ‘니사금’(Nisagum)이라는, 왕을 뜻하는 용어이다. 제2대 왕 남해(南解) 차차웅의 후임을 놓고 노례(努禮)왕자가 장자상속 기득권을 포기, 매부인 석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하려고 했을 정도로 석탈해가 지닌 인도 남부 철기문화의 힘이 컸던 것이다. 하지만 석탈해는 “이가 많은 사람을 후임 왕으로 정하자”고 제안, 결국 떡에 물린 잇자국이 많은 노례왕자가 제3대 유리니사금(尼師今)으로 칭하기 시작한다. ‘니사금’은 사실 당시 타밀어로 ‘대왕’(a great king), 또는 ‘황제’(an emperor)라는 뜻으로 일반적인 왕보다는 상위 개념이다.

당시 타밀어 ‘니’가 우리말에 들어와 ‘이’가 됐는 데 삼국유사에서 ‘니사금’을 ‘치질금(齒叱今)’으로도 표현한 것은 ‘니’를 훈독해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다. 이빨은 타밀어로 ‘니’ 와 ‘빨’등 2가지로 쓰이다가 현재는 ‘빨’만 쓰이는 데 2가지가 합쳐진 ‘니빨’이 우리말에선 ‘이빨’이 된 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석씨계의 마지막 왕인 제16대 홀해왕(재위 310~356)까지 니사금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김(金)씨 가문에 의한 왕자리 독점을 알리는 제17대 내물왕부터 왕은 ‘마립간’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따라서 석탈해가 자신의 모국어에서 빌려온 니사금은 석씨계의 몰락과 함께 신라왕의 명칭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셋째로, 석탈해가 자신의 부친을 다파나국의 함달파(含達婆)왕, 줄여서 함달(含達)왕이라고 밝히고 있는 데 함달파(함달)는 타밀인이 가장 숭배하는 신 ‘한다파(Handappa)’, 줄여서 ‘한단(Handan)’과 거의 일치한다. ‘한다파’는 힌두교 3대신의 하나인 시바(Shiva)의 둘째 아들이며 인도 북부 아리안이 별로 중요시하지 않고 남부 타밀인만 으뜸으로 섬기는 신으로 남성 이름에도 자주 등장한다. 아울러 ‘한다파’는 당시 타밀어로 ‘아버지’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석탈해가 자신의 아버지를 타밀인이 가장 존경하는 신 ‘한다파’의 한자 표기로 함달파왕, 또는 함달왕이라고 칭했던 것이다. ‘한다파’는 최근 무루간(Murugan)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다.

넷째, 서기 8년 신라 2대 남해(南解)왕의 사위가 된 석탈해는 2년 뒤 국무총리 격인 대보(大輔)라는 중책을 맡았는데 당시 타밀 나라에선 왕의 신하 가운데 측근을 뜻하는 ‘데보(Devo)’와 일치한다. ‘데보’는 남자신(God)을 뜻하는 ‘데반(Devan)’과 여자 신(Goddess)및 왕비(queen)을 뜻하는 ‘데비(Devi)’와 같은 뿌리로 ‘신의 다음 자리’(next to God)’와 ‘막강한 사람(a powerful man)이라는 2가지 뜻을 갖고 있다. 당시 왕은 신처럼 받들어졌기에 ‘신의 다음자리’와 ‘막강한 시람’이라는 2가지 뜻을 갖는 ‘데보(Devo)’가 바로 왕 다음의 권력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를 한자어로 표기한 대보(大輔)자리에 석탈해가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오른 것은 그가 타밀 나라 출신임을 시사한다.

또 제3대 유리(儒理)왕이 죽어 서기 57년 석탈해가 왕위에 오르고 대보자리에 자신에게 집을 양도했던 ‘표주박(瓢)을 허리에 찬 호공(瓢公)’을 발탁했는데, 신라 1000년 역사에서 왕의 최측근인 대보(大補)라는 직위를 맡았던 사람은 오로지 이 두 사람뿐이며 두 사람은 매우 특수한 관계로 호공 또한 타밀 출신으로 추정된다.

“호공이란 사람은 그 족속과 성을 자세히 모른다. 본래 왜인으로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온 까닭에 호공이라고 일컫는다.”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호공에 대한 최초의 장면이자 그의 정체에 대한 설명의 전부인데 전형적인 왜인은 아니지만 아무튼 왜가 있는 지역에서 건너왔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박은 인도나 아프리카 등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식물이며 타밀인은 기원전부터 뜨거운 날씨 때문에 목을 축이기 위해 허리에 표주박을 차고 다니는 습관이 있다. 표주박은 타밀어로 단니 쿠담(Thaneer Kudam)이라고 불렸다. 호공도 석탈해와 마찬가지로 일본에 정착했던 타밀인 중 한 사람으로 석탈해보다 먼저 바다 건너 신라에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외 진출 전진기지 ‘나가파티남’

다섯째로 주목되는 것은 석탈해가 한반도에 사상 처음으로 도입한 동물 뿔로 만든 술잔인 각배(角杯)가 고구려나 백제에선 발견되지 않고 오직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만 발굴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고고역사학계에선 시베리아나 몽골 등의 북방 기마 유목민이 사용했던 뿔잔이 이 두 나라에만 전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북방의 각배가 어떻게 지리적으로 근접한 고구려나 백제를 건너뛰어 한반도 동남쪽 신라와 기야에만 전해질 수 있겠는가.

이 의문은 신라와 가야의 각배가 북방이 아니라 남방의 바닷길을 통 전해진 것으로 보면 쉽게 풀린다. 각배는 그리스, 이란, 아프가니스탄 등 지중해 및 중근동 고대국가에서 발생했는데 이들 나라와 기원전부터 이미 해상무역을 활발히 했던 타밀인의 인도 남부에서도 흔히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타밀인이 신라와 가야, 일본에 각배를 소개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훨씬 더 타당하다. 각배를 타밀어로 쿠디꿈 콤부(Kudikkum Combu)라고 부르는데 타밀 출신인 석탈해와 허왕후가 각각 신라와 가야에 이를 소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삼국사기에 나오는 석탈해의 출신국 다파나국(多婆那國) 또는 용성국(龍城國)은 과연 어디인가를 추적해 보자. 다파나는 산스크리트어와 고대 타밀어로 태양을 뜻하는 다파나(Tapana) 또는 다파난(Tapanan)과 일치해 ‘다파나국’, 즉 ‘태양국(太陽國)’으로 당시 타밀인 나라 촐라 왕국의 별명이다.

아울러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용성국(龍城國)의 용성(龍城)은 당시 촐라 왕국의 도시 가운데 대장간과 철기제작으로 잘 알려진 항구도시 나가파티남(Nagappattinam)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타밀어로 나가(Naga)는 본래 ‘코브라’를 뜻하지만 힌두교도에겐 코브라가 용으로 전화되어 숭배대상이 됐기 때문에 ‘용’으로도 불리며 파티남(pattinam)은 ‘도시’를 뜻해 ‘나가파티남’은 ‘용성’(City of Dragon)을 의미한다. 따라서 석탈해가 철기생산 및 해상무역으로 번성했던 국제도시 나가파티남, 즉 용성이 소재했던 촐라 왕국을 용성국으로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나가파티남은 대장장이를 뜻하는 ‘석’(‘석갈린감’의 줄인 말)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대거 거주했고, 동시에 타밀인의 해외 진출 전진기지였던 만큼 대장장이 가문인 석탈해의 가족이 이곳에서 동아시아를 향해 떠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 역사서 모두 모두 석탈해의 출신지가 “왜의 동북쪽 1000리 (약 435㎞) 되는 곳” 이라고만 밝히고 있을 뿐인데 당시 왜가 규슈(九州) 북쪽을 가리켰다는 점에서 다파나국의 위치는 오늘날 교도현(京都縣) 부근으로 볼 수 있다. 1세기 후반 저술된 ‘한서(漢書)’ 지리지에 따르면 기원전 현재의 규슈지역을 중심으로 “왜에는 100여 개의 소국이 있으며 통역관에 의해 한(漢)나라와 의사소통이 되는 곳이 30나라”라고 밝히고 있는 만큼 다파나국도 이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이 지역에 있던 타밀인의 집단 거주지를 석탈해가 자신의 고국 별명인 ‘다파나국’ 또는 ‘용성국’이라고 말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치 유럽에서 대서양 건너 신대륙으로 이주한 영국인이 고국을 그리워하여 집단거주지역을 캐나다에선 ‘London’, 미국에선 ‘New England’와 ‘New York’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과 일맥상통한다.

약 2000년 전 막강한 선진 철기문화와 해상력을 갖춘 타밀인은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베트남과 중국 남부지역 등을 누비며 해상무역과 힌두교 전파에 주력하면서 타이완(臺灣) 위쪽에 흐르는 흑조(黑潮,쿠로시오)난류를 타고 일본에까지 도착했다. 캄보디아의 푸난 (Funan 扶南, 서기 1~6세기) 왕국 및 베트남의 참파(Champa 占婆, 서기 2~17세기) 왕국 등 철기를 사용하는 동남아 힌두교 왕국의 유물과 유적에서 당시 타밀인들의 활발한 해외진출 증거가 고고역사학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일본어에 남은 타밀어의 흔적들

동남아시아와 중국남부를 휘젓고 다니던 타밀인이 한국 및 일본과도 교류했다는 증거는 한국어와 일본어 형성에 스며든 타밀어의 영향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타밀어 등 드라비다어와 한국어간의 연관성을 처음으로 포착한 인물은 조선 고종의 외교고문이자 미국감리회 선교사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다. 헐버트는 1905년 ‘한국어와 인도 드라비다어의 비교 문법’이라는 저서에서 “두 언어가 유사한 것은 한반도에 정착한 선주민이 최소한 일부 지역이라도 남방에서부터 이주해왔음을 입증해주는 누적된 증거의 고리” 라고 주장했다.

일본에선 1970년대 뒤늦게 자극받아 시바 수수무 교수(しば すすむ, 교토 여자대학)를 필두로 후지와라 아키라(Akira Fujiwara)와 고(故) 미노루(Minoru Go)교수 등 일본의 언어학자는 타밀어 등 드라비다어와 일본어의 친연성을 제기했다. 마침내 일본의 원로 언어학자 오노 수수무(大野 晉, 86세) 학습원대학 일본 국어학 명예교수가 타밀인이 기원전 수세기에 이미 일본열도에 집단 거주했음를 시사하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오노 교수는 ‘일본어의 기원’(1994년) ‘일본어와 타밀어’(2000년) ‘야요이 문명과 남인도’(2004년)등 일련의 역작을 통해 “야요이문명시대의 특징으로 논의 쌀경작 철, 기직(機織·베틀이나 기계로 짠 직물)등” 3가지를 거론하면서 “이 분야에 앞섰던 인도 남부의 선진 타밀문명이 기원전 수세기 일본에 도래, 북 규슈(九州)를 중심으로 야요이시대라는 새로운 문명의 시대를 여는 원동력이 됐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타밀어가 일본어 형성에 영향을 끼쳐 두 언어의 유사단어가 수백개나 남아 있으며 한반도에까지 확산돼 타밀어와 한국어도 유사한 단어가 상당수 있다고 오노 교수는 강조했다.

이처럼 헐버트와 오노 등 동북아시아 측의 연구와 더불어 인도 측에서도 언어 및 종교적 유사성을 비교 분석, 타밀과 일본 양측의 교류를 입증하는 인도 학자의 연구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뉴 델리의 인도 문화 국제연구소 소장인 로케쉬 찬드라(Lokesh Chandra)와 발람발(Balambal) 델리대학교 일본어 교사, 타밀지역의 사비트리 비스완나탄(Savithri Viswanathan) 박사 등은 타밀어와 일본어의 유사성을 집중 연구한 학자다.

또 인도의 역사학자 싱할(D. P. Singhal)은 ‘인도와 세계문명(India and World Civilization)’이라는 저서에서 “인도와 일본이 해상으로 직접 연관되어 있다는 증거를 일본 열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면서 “교토(京都)와 접하고 있는 미에현(三重縣), 시마군(志摩郡) 등 일부 지역에선 일단의 인도인을 천축낭인(天竺浪人)이라고 불렀으며 힌두교의 가네쉬와 비슈누 등 주요 신의 이미지가 일본의 신도(神道)나 불교 사원에 나타나 있다”고 지적했다.

<토론토/김정남 통신원 namkim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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