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집의 굴욕
‘그러나 포기해서 안 된다. 우리 씩씩해지자.’
‘고랑창의 택시일기’ 중에서.. 금호동 가는 70대 노인은 말한다. ‘조중동 신문 욕하는 놈은 모두 빨갱이야’..
준비한 자료를 보여주며.. ‘조중동이 2006년 말이나 2007년 초가 개헌의 적기라고 말한 증거가 이렇게 있는데요’.. 그러자 노인은..
“조중동 신문 보는 넘은 모두 빨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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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할까. 권력이다. 노인의 말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다. 그러나 상관없다. 말이야 어떻든 간에.. 노인의 행동은 앞뒤가 맞다. 권력의 생리에 충실하다.
노인의 입장은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일 권력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노인은 그 권력을 휘두른다. 그리고 거기서 쾌감을 얻는다.
‘말이 앞뒤가 맞지 않지 않느냐’고 반론을 해봤자.. ‘말귀를 못알아먹는 놈’이 될 뿐이다. 그렇다. 그 ‘말귀’가 문제다. 거기에 숨겨진 의미가 있다.
2002년 김영배의 설렁탕론.. 역시 심오한 의미가 있다. ‘설렁탕’과 ‘빨갱이’.. 그것은 권력의 법칙을 의미한다.
노인은 토론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행사하려는 것이다. 노인은 실상 개헌에 관심이 없다. 단지 그러한 결정을 앞두고 권력자(?)인 자신에게 허락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개해 있을 뿐이다.
어른께 먼저 인사를 드리지 않고, 먼저 어른께 허락을 구하지 않은 모든 결정에 그는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그리고 그 재미로 오늘 하루를 산다.
이런 사람을 설득하는 방법은 하나 뿐이다. 권위주의의 칼을 휘두르는 것이다. 대통령이 그 노인보다 더 어른이다. 권력의 서열을 확인시켜 주면 된다.
그러면.. ‘높으신 어른들이 어련히 알아서 하지 않겠나’ 하고 순순히 동의한다. 사법살인의 박정희가 늘 써먹던 방법. 노무현 대통령에게 잘못이 있다면 이 고약한 방법을 쓰지 않은 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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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주의에 쩔어있는 인간을 다스리는 방법은 권위주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권위주의로 되돌아갈 수 없다.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악순환의 고리를 그대로 물려줄 수는 없으니까.
그러므로 서로는 소통할 수는 없다. 이 문제에 대한 확실한 정답은 없다. 마찰은 계속될 것이다. 갈등 역시 계속될 것이다.
서구가 300년간 줄기차게 갈등하고도 정답을 찾지 못해서.. 마침내 양차 세계대전의 비극으로 결론난 일을.. 압도적인 살인과 인명희생의 완력으로 결판낸 일을.. 우리가 불과 50년 만에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
지금은 변혁의 시기다. 갈등이 있는 것이 정상이고 갈등의 부재가 도리어 비정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 정도 갈등이라면 오히려 약소하다.
이회창이라면? 전쟁났다.
남북한 간에 전쟁이라는 큰 갈등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신구세대 간에 세대차라는 작은 갈등이 일어난 사실에 만족해야 한다. 지금이라면 태평가를 불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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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영국에서 최후의 마녀 ‘헬렌 던컨’에 대한 사면논의가 있었다는 보도를 보았다. 그것이 1944년의 일이다. 선진국이라는 영국에서 불과 60년 전에도 마녀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황당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보도에 의하면 1차대전 중에 체포된 많은 마녀들이 나중 명예를 회복했는데 헬렌 던컨은 아직도 사면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에밀 졸라가 그 유명한 공개장 ‘나는 고발한다’를 쓴 것이 100년도 더 전인 19세기 말이다.(1898년 1월) 드레퓌스 사건에서 에밀 졸라의 용기있는 고발.. 이것이 지성이라는 것의 진정한 모습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50여년 후에 -50년이라면 한국에서 625와 지금의 시간거리, 상전벽해가 몇 번이나 일어날 긴 시간- 영국에서 마녀(?)가 체포된 것이다. 세상이 거꾸로 되어도 유분수지.
마녀사냥은 12세기 말부터 번져나갔다. 16세기 경 부터는 계몽주의 지식인들이 마녀사냥 반대에 앞장서고 있다. 그런데도 러시아나 독일 같은 후진국도 아닌 선진국 영국에서 불과 60년 전에 마녀사건이 일어났다.
그냥 사건이 일어난 정도가 아니라.. 권위있는 사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것이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영국의 에밀 졸라들은 뭘 했나? 영국의 지식인들은 다 죽었나?
유럽의 지식인들은 400년 동안 ‘마녀는 없다’고 줄기차게 외쳐왔다. 400년 정도 줄기차게 외치니까 답이 나오더라. 그것이 역사다. 어쩌면 우리는 앞으로 100년 동안 줄기차게 ‘조중동은 틀렸다’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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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설렁탕’은 권력의 법칙을 의미한다. 금호동 노인의 ‘빨갱이’는 논리가 아니라 권력 그 자체다. 그들은 스스로 반공이라는 이름의 ‘완장’을 차고 ‘빨갱이’라는 이름의 호루래기를 불어대는 것이다.
왜? 재밌으니까. 순경놀이 하는 거다.
그들의 입에서 호루래기는 떨어지지 않는다. 그들의 입에서 ‘빨갱이’는 내려지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선언한 우월적 지위를 제 손으로는 절대로 내려놓지 않는다. 이것이 백년 가는 싸움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17세기 유럽 지식인의 심정으로 보자. 마녀는 분명히 없다.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 그런데도 눈앞에서 마녀사냥이 벌어진다. 그 어떤 논리를 동원해도 그 어리석은 군중들을 설득할 수 없다. 분통 터지는 노릇이다.
마녀사냥에 나선 자들은 그 가엾은 여인이 진짜 마녀인가에는 관심이 없다. 아메리카에서는 인디언을 사냥하고, 아프리카에서는 노예를 사냥하고, 숲에서는 여우를 사냥하듯이 그들은 생존경쟁이라는 야만의 본능에 맞게 행동하고 있다.
금호동 노인이 논리에 무관심하듯이.
벽 붙잡고 씨름하기다. 서구의 지식인들은 그 씨름을 400년간 해왔다. 줄기차게 좌절해 왔다. 수 없는 실패, 수 없는 굴욕.. 억장이 무너졌다. 그리고 양차 세계대전이라는 대 파멸..
눈앞에서 저질러지는 전쟁의 야만 앞에서 지식의 무기력함이라니.
문명사회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적은 댓가를 치르고 너무 쉽게 넘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아스팔트에 뿌려질 피는 여전히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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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참으로 두려운 것이다. 나는 늘 낙담하곤 한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표현하기는 너무나 어렵다. 반면 거짓은 너무 쉽게 자행된다.
금호동 노인과 논쟁한다면.. 나는 그만 패배하고 만다. ‘빨갱이’.. 이 한마디로 노인은 좌중을 제압해 버린다. 그 어떤 논리로도 당해낼 수 없다.
죄민수는 말한다. “아무 이유 없어!”
지식의 굴욕은 계속된다.
엄기영은 비아냥댄다. “달변이고 논리적인 대통령이!”
이땅에서는 달변이 죄고 논리가 죄다.
최장집 같은 사람도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한다. 그가 거짓말 하고 싶어서 하겠는가. 진실을 말하기가 너무나 어렵다. 말꼬리 안잡히려면 본질을 흐리고 적당히 에둘러 말해야 한다. 거짓말이 쉽게 먹힌다.
‘참 나쁜 대통령’이라거나 ‘대통령을 하려면 애를 낳아봐야 한다’거나 요렇게 귀에 쏙쏙 들어오는 초딩 수준의 말을 해줘야 시청자들이 탄복하고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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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왈.. “뭣보다 대통령이 정치를 이해하는 방법과 그것이 가져온 부정적 효과가 컸다. 민주주의는 의회가 민의의 대표기구로 구실 하는 것이 기본이다.”
복잡하게 말하고 있지만.. 이 말은 무슨 일을 하든.. 윗사람 허락부터 맡고 어른께 인사부터 드리고.. 권위주의 방법으로 풀어가라는 뜻이다.
원칙이 옳아도 탈권위주의로 하고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고 그러면 힘센 중간그룹이 중간에서 틀어버린다는 말이다.
-군대에서 이등병이 애로사항이 있을 때 바로 위 고참에게 털어놓지 않고 소대장에게 직접 보고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이런거.
최장집의 썩은 발언과 금호동 노인의 발언이 무엇이 다를까? 최장집의 결론은 한마디로 ‘감히 내게 물어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결정하다니.’ 이거다.
그렇다. 최장집 말이 맞다. 무슨 일을 하든 어른들과 상의를 해야 한다. 조중동 어르신, 강남기득권 어르신, 국회의원 어르신, 전직대통령 어르신, 자칭국가원로 어르신, 김수환추기경 어르신, 반공단체 어르신, 종교단체 어르신들 허락부터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해결된다. 좋은 본보기가 사패산 문제다. 조계종 원로 어르신 만나서 합장 한번 해줬더니 하룻만에 뚝딱 해결. 지율스님은 대통령이 안만나줬더니 아직도 미해결. 앙앙불락.
문어인간 김근태라면 아마 이런 일도 잘 할 것. 그래서 기자들이 김근태를 좋아하는 것. 알아서 잘 챙겨주니까. 그러나 그런 인사 잘 챙기는 사람 치고 개혁 잘하는 사람 못봤다.
역사적으로 망한 나라들은 대부분 이러다가 망한 거다. 조선왕조 5백년 동안 그러다가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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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경주시 감포, 양남, 양북 일대는 일년 내내 시위용 현수막들이 내걸려 있다. 마을 주민들 주 소득원이 데모(?)라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원전에서 현지인을 우선적으로 채용한다. 그 중에는 경비원이 많다. 그런데 원전 경비원은 누구로부터 원전을 경비하는가? 도둑이 들어와서 원자로를 훔쳐간다는 말인가? 아니면 간첩이 몰래 침투한다는 말인가?
아들은 경비를 서는데 아버지는 데모를 한다.
“아부지요! 오늘은 제가 여기 담당이다 아인기요. 날도 추운데 오늘은 고마 들어가이소.”
“어이. 그래! 알겠다. 내 니 비번인 날 올께. 추운데 욕보거래이.”
철책을 사이에 두고 늘상 벌어지는 대화다.
원전에 경비원으로 20년 근무하면 연봉 6천만원 정도 받는다고 한다. 그들의 큰 특권은 친구들에게 원전 구역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표를 나눠주는 것이다.
발전소를 돌아나온 냉각수는 수온이 높기 때문에 난류를 좋아하는 고기떼가 몰려온다. 경주 낚시꾼들은 그 표 한장 얻기가 소원이다. 원전 직원들은 발전소 앞에서 잡은 물고기를 그 자리에서 회쳐먹는다.
‘방사능?’ ‘그것이 뭔 이바구여?’
그러다가도 지역에서 기형 송아지라도 한 마리 발견되면 사건 터진다. 그 송아지 한 마리가 현지 주민들 일년 먹을 양식을 장만해주는 셈이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고 지식인들은 어떤 판단을 해야할까?
발전소에 고로 1기가 들어설 때 마다 목숨걸고 반대하면서도 다른 곳으로 이사갈 생각은 전혀 없는 이중성. 방폐장 반대를 위해 목숨걸고 투쟁 했으면서도 한수원 사옥 유치를 위해서 데모하는 그 이중성을 비난해야 할까?
아니면 환경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훌륭하신 그분들을 도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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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들은 고민하지 않는다. 패거리 논리가 있으니까. 좌파의 입장은 정해져 있으니까. 최장집은 1초도 고민하지 않는다. 패거리 논리 뒤에 숨으면 되니까. 200년 전에 정해진 좌파의 입장을 충실하게 대변하기만 하면 된다.
경주시내 사람들과 양남양북 사람들은 한수원 본사이전 문제를 두고 지난 겨울내내 싸웠다. 지역사람들 사이에 감정이 쌓여있다. 누가 옳은 것일까?
누가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최장집도 권력의 법칙 안에서 시계부품처럼 정밀하게 작동하고 있다. 양남양북 사람들도 생존권이라는 생태계 법칙 안에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다만 슬픈 것은 이제는 지식인도 그 생태계 법칙 안에서 정밀하게 물려 돌아가는 하나의 부품으로 퇴행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밤 하늘의 모든 별이 하룻밤 사이에 천구를 한바퀴씩 돌아도 오직 북극성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제 위치를 굳건히 지키는 법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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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며느리와 작은며느리가 있다. 맏며느리는 시집 와서 고생 많이 했다. 시어머니도 옛날 시어머니였고 며느리도 옛날 며느리였다. 그때 그시절에는 누구나 다 그랬다.
그리고 10년 세월이 흘렀다. 10년 후에 시집온 둘째며느리는 미시족이다. 부부가 다 멋쟁이다. 쫙 빼입고 멋부리고 다닌다. 그 10년 사이에 시어머니 생각도 많이 바뀌어 있다. 신식 시어머니로 변신한 것이다.
작은아들 부부가 찾아오는 날에는 곱게 단장하고 나선다. 둘째며느리에게는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키지 않는다. 귀여운 둘째며느리 앞에서는 멋진 신식 시어머니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멋부리기 좋아하는 둘째며느리를 보면 자기도 모르게 말하게 된다. ‘우리 오늘은 근사한 양식집으로 가서 외식이나 할까’ 반면 꾸질꾸질하게 차려입은 맏며느리를 보면.. ‘애야 가마솥에 사골은 푹 고아놓았니?’
맏며느리는 오해한다. 며느리는 다 같은 며느리인데 차별한다는 거다. 둘째며느리 집에 모일 때는 귀여운 며느리 고생할까봐 외식하자 그러고 맏며느리 집에 모일 때는 부려먹으려고 직접 요리하게 만들고.
아뿔사 오해다. 차별할 의도는 전혀 없다. 단지 그것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한 것이다.
고생한 맏며느리에게는 잘 대해주고 싶은데 그럴 찬스가 없다. 둘째며느리도 좀 부려먹어야 공평할텐데 뻔히 알면서도 그게 잘 안된다. 어쩌랴!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우리 사회의 모순구조가 이 안에 다 있다. 불공평하지만 둘째며느리에게 맏며느리가 한 만큼의 고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이제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분쟁은 계속된다. 그래서 평화는 오지 않는다. 그래서 갈등은 계속된다. 조중동과 딴나라의 주장은 옛날에 고생한 맏며느리 기준으로 돌아가자는 거다. 그런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 세상이 다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안 내부의 분쟁을 해결하는데 집착하기 보다는 눈을 밖으로 돌려 세계와의 경쟁을 생각해야 한다. 바깥 세상에 더 중요하고 더 큰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도리없다. 욕먹으면서 부둥켜 안고 가는수 밖에.
서로가 조금씩 노력하는 수 밖에 없다. 마찰은 계속되고 갈등은 계속되고 불협화음은 계속 되겠지만. 세상의 변화에 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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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의 문제.. 독재시대에는 국가를 위해 개인이 희생되었다. 민주주의 시대에는 강제적 희생이 아닌 자발적 헌신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고 있다.
● 박정희 독재 - 국가를 위한 강제적 희생.
● 노무현 민주 - 공동체를 위한 자발적 헌신.
실상은 어떤가? 지금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일어나고 있다. 누구도 제 몫을 순순히 양보하려 들지 않는다. 강남 투기꾼들은 몇억씩 챙겨먹고 있는데 원전지역 주민들에게는 방사능이 무서워도 몇 푼 보상했으니 참고 살라?
위선적이라 해도 그들의 투쟁이 옳다. 그것이 이 사회의 작동법칙이다. 그렇다면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권위주의 시대의 강제적 희생도 아니고 높은 수준의 시민의식에 기초한 자발적 헌신도 아니다. 이제는 누구도 헌신하려 들지 않는다.
마을마다 납골당 반대 현수막이 붙어 있다. 님비현상이다. 누구도 그들의 이기주의를 나무랄 수 없다. 나무라는 방법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강남 기득권들은 수억씩 해처먹고 있는 판인데 말이나 통하겠는가?
노동자의 기득권도 인정해야 한다. 원전지역 주민의 기득권도 인정해야 한다. 우리당 당원들의 기득권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진짜 민주주의다. 이제는 희생과 헌신을 요구해서 안 된다.
무엇인가? 이제는 신용사회로 가야한다. 대한민국은 불신사회다. 민주주의만 하면 다되는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을 적용해야 한다.
이제는 냉정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내려져야 한다. 작은며느리를 강제로 희생시켜 큰며느리가 고생한 만큼 괴롭혀 주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자발적으로 작은 며느리가 헌신해 주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희생도 헌신도 바랄 수 없게 되었다.
● 박정희 독재 - 국가를 위한 강제적 희생.
● 노무현 민주 - 공동체를 위한 자발적 헌신.
● 차기 대통령 - 신용사회로 가는 새로운 패러다임
이제는 개인의 가치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과학적인 근거에 기초하여 각자에게 정당한 몫이 지불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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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은 옳고 그름을 논하지만 허무할 뿐이다. 그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권력의 생리를 들추어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영배의 ‘설렁탕’은 모든 논쟁을 무효화 시킨다. 금호동 노인의 ‘빨갱이’는 지식인을 허탈하게 한다. 그래서 죄민수는 말한다. ‘아무 이유 없어!’
최장집은 권력의 법칙을 알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옳고 그름이라는 지식인의 논리를 포기하고 대세에 순응하라고 충고한다. 군대가서 배운 권력의 법칙에 충실하라고 말한다. 강준만도 그렇게 말하고 손호철도 그렇게 말한다.
그들은 어느 사이에 이 ‘자본주의 생태계라는 야만의 정글’에 잘도 적응하는.. 고도로 발달한 현대사회의 충실한 시계부품이 된 것이다. 고독한 북극성이 아니라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는 행성이 된 것이다. 스스로는 빛을 내지 못하는 별.
한국에서 지식인의 발언권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서구의 지식인은 무려 400년간 좌절해왔다. 그리고 지금도 부시의 야만 앞에서 굴욕하고 있다.
까놓고 진실을 말하자. 세상을 바꾸는 것은 지식도 아니고 계몽도 아니다. 역사 그 자체의 동력이다. 인터넷이 세상을 바꾸고 산업이 세상을 바꾸고 끊임없이 공급되는 신세대가 세상을 바꾸고 싹싹한 둘째며느리들이 세상을 바꾼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희생이 강요되었다. 민주주의에서는 자발적 헌신이 강조되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역사는 이미 저만치 진도를 나가있다. 이제는 신용사회로 가야한다. 그것은 전혀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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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석간 노탓일보는 ‘노무현은 남탓 부시는 민생’이라는 제목을 뽑았더라. 그들은 일년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노탓하면서 감히 노무현이 남탓한다고 말한다. 왜 노탓할까? 노무현을 권위주의 지도자로 여기기 때문이다.
세상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시어머니가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누구를 탓한다는 것은 그 탓하는 대상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여전히 대통령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누구를 탓하며 의존하는 이유는 희생과 헌신이라는 낡은 패러다임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버려야 한다. 이제는 서열주의를 버리고 희생도 버리고 헌신도 버리고 냉정하게 각자의 몫을 평가해 주어야 한다. 신용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