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깨달음에 대한 이해와 오해

깨달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행동이다. 지난 수천년간 동양 정신의 화두는 깨달음이었으며 ‘깨달음의 문제’야 말로 서구정신을 압도할 수 있는 동양정신의 유일한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나는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 여기에는 사람들을 당혹하게 하려는 의도를 얼마간 감추고 있다. 즉 깨달음의 문제에 대하여 신비주의적인 관점 혹은 종교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려는 사람들을 당황케 하고자 하는 저의가 있는 것이다.

러시아가 민주화 되기 전까지 소련에서는 ‘사랑’이라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 언론에서 방송에서 영화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일종의 금기어가 되어서 자취를 감춰버렸다는 것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을 연상시킨다.(근데 과연 그랬을까.. 그건 나도 모름.. 지금 북한의 방송이나 드라마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있을까?.. 절대적으로 그렇지는 않더라도 상당히 그럴수 있다고 봄)

‘자유’라는 단어는 근래에 소개된 단어이다. 100년 전만 해도 자유라는 단어가 우리나라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99.9프로 사용 안됨) ‘자유’는 이승만이 북한과의 이념대결을 위해 널리 퍼뜨린 단어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사랑’이라는 단어는 사용되지 않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랑의 순 우리말 표현은 ‘괴다’이며 ‘사랑’은 춘원 이광수가 소설 ‘무정’을 쓰면서 퍼뜨린 단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 알려진 주장이며 사랑은 춘향전에 ‘어화둥둥 내사랑’ 하며 옛 부터 사용되고 있었다.

요즘 한국인들은 ‘진리’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진리!.. 넘 버거운 단어이다. 그래서 나는 의식적으로 ‘진리’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진리가 두렵니?”

자신있게 ‘진리’라고 혹은 ‘사랑’이라고 혹은 ‘역사’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당당하게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깨달음은 성철스님 정도나 되어야 사용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잘못이다. 용기있는 젊은이 예수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전파했듯이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사용했듯이 공자가 ‘학문’을 구사했듯이 사랑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하며 깨달음을 전파할 수 있어야 한다.

두가지 복선이 감추어져 있다. 하나는 신비주의 혹은 종교적 태도에 대하여서다. 깨달음은 하나의 추상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석가가 ‘해탈’을 말함이나 공자가 ‘학’을 말함이나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말함이나 노자가 '도'를 말함이나 예수가 ‘사랑’을 말함이나 같은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깨달았다’는 표현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다. 이는 예수가 '사랑한다'의 현재형으로 말하지 '사랑했었다'의 과거형으로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그녀를 사랑했었다.”고 과거형으로 말한다면 이는 거짓이다. 사랑이란 것이 하다가 말다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때는 사랑했는데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거짓이다.

마찬가지로 그저 ‘깨달음’이 존재하는 것이며 이는 명사이다. 동사 ‘깨닫다’ 까지는 허용되나 ‘깨달았다’고 말하면 이미 잘못이다. 더우기 시간과 공간을 특정하여 ‘그때 그 장소’를 말한다면 이는 거짓된다. 진짜가 아닌 것이다.

깨닫는다는 것은 컴퓨터가 부팅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하나의 네트워크이며 접속되는 것이다. 접속은 언제나 현재이다. 과거에 한번 접속하고 그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다. 그 접속상태를 지속하므로서 의미있는 것이다. 깨달음 또한 마찬가지다. 현재이어야 한다.

두 번째 복선은 깨달음의 일반화이다. 연속극이 날이면 날마다 사랑타령을 하듯이 깨달음이라는 단어는 널리 사용되어야 한다. 날마다 깨달음을 타령해야 한다. 사랑은 아무리 사용해도 부족하듯이 깨달음 또한 아무리 사용해도 부족한 것이다.

깨달음의 일반화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 깨달음을 독점하려 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타인의 깨달음을 되도록 엄격하게 심사하고자 한다. 그 깨달음에 급수를 매기려 한다. 가짜다. 깨달음은 독점될 수 없으므로 심사될 수도 없다.

우리의 사랑이 아무리 대단해도 예수의 사랑에 미칠 수 없다. 그렇다 해서 예수가 우리의 소박한 사랑을 거절하지 않듯이 말이다.

개도 깨달을 수 있고, 목수도 깨달을 수 있고, 소나무도 깨달을 수 있다. 다만 개는 깨달아서 훌륭한 개가 될 뿐이며, 목수는 깨달아서 훌륭한 목수가 될 뿐이며, 소나무는 깨달아봤자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뿐이며, 너와 나는 깨달아서 너와 나 자신의 본래를 회복할 뿐이다.

요는 깨달음이라는 단어를 긍정할 것인가이다. 두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신비주의적 혹은 종교적 태도를 가지고 깨달음에 접근하려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기, 둘은 깨달음이란 단어에 친숙해지도록 하기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진리라는 단어, 사랑이라는 단어, 역사라는 단어, 자유라는 단어, 신이라는 단어에도 친숙해져야 한다.

사랑이 밥이어야 하고, 자유가 공기이어야 하고, 진리가 손발이어야 하고, 깨달음이 몸이어야 한다. 어색해서 안되고 생경해서 안된다. 그것이 내가 독자들의 오해를 무릎쓰고 깨달음이라는 단어를 퍼뜨리려는 이유이다.

깨달음은 길(道)과 같다. 길을 발견했다면, 그 ‘길’이라는 네트워크와 접속했다면, 지금 현재 그 길을 부지런히 가야만 한다. ‘깨달았다’고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은 ‘길을 얻었다’고 외치면서 그 길을 가지 않고 거기에 집을 지어 눌러붙는 것과 같다. 그들은 길을 차단하고 통행세를 받으려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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