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read 4617 vote 0 2004.03.08 (18:40:33)

김기덕의 영화에는 많은 암시와 상징과 복선이 들어있습니다. 전편의 다른 영화와 연결되기도 하구요. 뭐 거기에 딱부러지는 1+1=2 식의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런 ‘링크’의 고리들을 찾는 게임도 꽤나 재미나지요.

저만 해도 글을 쓸 때 때로는 복선을 심기도 하고 암시를 집어넣기도 합니다. 그게 재밌으니까요.

하여간 제 글에 재영이 죽기 전에 웃은 이유가 무엇이겠느냐고 질문한 것은, 또한 대화하기 위해서입니다. 근데 화두를 풀어주시는 분은 없군요. 그거 꽤 재미있는데 거기서 재미를 느끼지 못하다니 유감이로소이다.

하여간 이쪽동네 게임은 .. 일단 어떤 대답을 내놓더라도 반박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어요. 그럼 그 반박에 대해 재반박할 수 있는 거지요. 그 재반박에 대해서 또 재반박할 수 있겠지요. 과연 그럴까요? 더 이상 재반박할 수 없는 상태가 있습니다.

대꾸를 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단세포적인 말대꾸 .. 물이 반컵 있어요. 반컵이나 있다는 파와 반컵 밖에 없다는 파의 지리한 말대꾸 대결.. 이걸 종식시키기 게임입니다. 노무현의 1/10 밖에 안된다는 파와 1/10은 적으냐의 지리한 말대꾸 대결.. 이걸 종식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그걸 발견한 사람은 굉장히 많은 영화를 대량생산할 수 있습니다. 김기덕은 천재입니다. 이건 확실해요. 적어도 남이 못하는 것을 해내고 있으니까. 요는 그의 아이디어가 그냥 쥐어짠 아이디어냐 아니면 대량 복제된 것이냐입니다.

제 결론은 그의 아이디어는 그냥 머리가 좋은 사람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서 대량생산된.. 자기복제의 산물이라는 거죠. 그렇게 믿는 이유는 저의 글쓰기 방법 또한 그런 자동복제.. 대량생산기법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러니까 남들도 그러려니 하는 거죠. 하여간 저는 아이디어를 짜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동기술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거기에다 뭔가 소재를 입력하면 글이 출력되는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김기덕도 같은 방법을 쓰죠.

그게 뭐냐입니다. 즉 예의 컵에 물이 반밖에 없다는 파와 반이나 된다는 파의 지루한 말대꾸 대결을 종식시키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예컨대 탈무드의 굴뚝에서 나온 두 아이 중 누가 먼저 씻을까의 게임구조와 동일한 것입니다.

남성판타지다 .. 이런 식의 접근은 .. 얼굴이 흰 아이가 혹은 검은 아이가 먼저 씻는다는 발상입니다. 즉 컵의 물이 반밖에 혹은 반이나와 같은 말대꾸죠. 이항대립구조 안에서 한 쪽을 차지하고 맞은편의 입장을 공박하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는 다람쥐의 쳇바퀴를 돌 뿐이죠. 그 구조 곧 이항대립의 구조를 붕괴시켜야 하는 거에요. 둘 중 하나가 승리할 것이라는 식의.. 머거본님의 논리구조 역시 이항대립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해요. 한쪽의 입장을 강화하면서 상대편의 논리기반을 붕괴시키려는 방식 말입니다.

근데 재영이 죽기 전에 웃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여간 저는 게임의 규칙을 전부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도 이해가 안된다는 분을 위하여 한번 더 게임의 규칙을 이야기 하면..

‘죄’라는 굴뚝이 있습니다. 그 굴뚝 속에 검댕이가 묻지 않아 얼굴이 흰 아이와 얼굴이 검은 아이가 있어요. 혹은 원조교제의 성매매를 한 소녀와 남자어른이 있습니다. 남성판타지라고 우기는 사람은 어른은 무죄다고, 혹은 어른은 검댕이 묻지 않아 얼굴이 희다고.. 혹은 김기덕감독이 그렇게 주장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거지요.

하여간 김기덕감독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했다고 우기고 싶은 심사라면 그 배배꼬인 심사는 인정해 드리지요. 과연 영화를 보고 한 소리인지 의심이 되지만..

김기덕이 수상한 이유는 간단해요. 김기덕식으로 영화를 만들기로 하면 누구나 쉽게 영화를 대량생산할 수 있다는 점을 눈치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옛날에는 모든 소설이 권선징악의 형태로 되어 있어야 한다고 믿었지요. 근데 누군가 이 규칙을 깨뜨렸어요. 권선징악의 주제의식 없이 기발한 반전만 있어도 소설이 된다는 걸로 규칙이 바뀐 거지요. 그래서 갑자기 그 이전에 없던 단편소설이 대량생산된 겁니다.

즉 규칙을 바꾸므로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제친다. 이겁니다. 김기덕은 영화의 규칙을 바꾼 거지요.

하여간 우리는 이항대립구조라는 게임의 규칙에 갇혀 있어요. 그래서 반컵의 물을 가지고 반컵이나/반컵밖에 하며 수천년을 줄다리기 해 온 것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그 죄라는 굴뚝 속에 갇혀 있는 신세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네 얼굴이 더 검다니 하며 비교우위를 주장하고 있지만 허망한 일이지요. 비교우위.. 그런건 안쳐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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