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read 6538 vote 0 2006.11.10 (18:47:35)

유아독존을 깨달음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다. 멋진 말이다. 이 빛나는 한 마디 말이 과연 누구의 입에서 나왔을 때 가장 그럴듯한 말씀이 되겠는가?

샤카 족 왕자 고타마 싯다르타다. 그와 결부시켰을 때 이야기는 높은 격조에 어울리는 미학적 완성도를 가진다. 옛 사람들의 의견은 일치했다.

중요한 것은 이천오백년 전에 석가모니라는 사람이 과연 그런 말을 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나라면 언제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배짱이 있느냐다.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면 세상 전부와 맞선다는 의미다. 그 지점에 자신의 눈높이를 결정한다. 그 지점에서 나의 이상주의를 유도해 낸다.

최고의 눈높이에 최대의 너른 시야여야 한다. 가장 고결한 이상주의다. 그것은 순수의 극한이다. 절대자유에 절대사랑이다. 거룩함이 그곳에 있다.

깨달음의 세계는 소통의 세계다. 소통으로 보면 언제라도 네가 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은 존귀하지 않은데 석가가 홀로 존귀하다는 말이 아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여덟글자를 읽고도 여전히 당신이 석가이고 석가가 당신이며 소통의 경지가 본래 그러함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 말씀은 실패다.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이 결국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석가는 고(苦)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고는 바로 나의 문제다.


뜰 앞의 잣나무

여섯 살 꼬마는 ‘엄마가 그러던데’ 하며 또래 앞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열살 어린이는 ‘선생님이 그러던데’ 하며 친구들 앞에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열다섯 소년은 ‘텔레비전에 나왔더라’ 하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스무살 젊은이는 ‘신문에 기사가 났던데 말이야’ 하며 이야기를 꺼낸다.

신문의 칼럼은 ‘00일자 보도에 의하면’으로 첫 머리를 시작하고 강단의 지식인은 ‘아인시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모두들 타인의 권위를 빌리고 있다. 진정 나 자신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예수와 소크라테스와 석가 정도가 있을 뿐이다.

공자는 요순을 팔았고 맹자는 공자를 팔았고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팔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팔았다. 모두가 누군가를 팔고 있다.

다만 근대에 와서 니체가 각별히 ‘남의 말 옮기지마라’고 거꾸로 반격했다. 니체의 반격에 의해 생의 철학이니 실존주의니 하는 것이 쏟아져나왔다.

또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선언했으니 니체의 ‘신은 죽었다’와 마찬가지로 석가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에 비길만 하다.

본질에서 이야기는 결국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인류사 5천년에 나로부터 출발시킨 사람은 예수, 소크라테스, 석가, 니체, 데카르트 정도다.

그 외에는 대략 남의 말을 옮기고 있다. 누군가를 팔아먹고 있다. 주석하고 해석하고 번역하고 편역한다. 진짜와 가짜가 가려지는 지점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와 존재의 정면대결이다. 나와 세상 전부의 고독한 맞서기다. 이것이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깨달음은 연역이다. 연역은 풀어낸다. 짜맞추기의 귀납과 다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높은 고지에서 출발하여 큰 낙차를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 결국은 소통이니까. 결국은 너와 나의 문제이고 너와 나 사이에서 소통의 문제이니까. 자유도 사랑도 슬픔도 기쁨도 그 안에 다 있으니까.

조개가 껍질을 벌리는 것과 같고 책이 표지를 펼치는 것과 같아서 존재와 나 그 하나의 대결에서 무수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한 그루 완결된 뜰 앞의 잣나무에 있음이 그 때문이다. 세상은 맞물려 있다. 완성되면 통한다. 그 고독한 존재의 완결성 말이다.

완성되었을 때 북은 소리를 낸다. 그렇게 소리가 나야 울림이 전해진다. 전해져야 소통된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과의 접속에 성공하는 것이다.

나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는다면 인터넷에 접속하지 않고 자판을 치는 것과 같아서 공허할 뿐이다. 접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내가 여기서 공자를 팔든 맹자를 팔든 예수를 팔든 니체를 팔든 결국은 나와 너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라는 본질을 인정해야 한다.

컵에 물이 반컵 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는 사람이고 반컵이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 보는 사람이다.

어디서 어떻게 보고 어떤 논평을 내놓든 그것은 결국 컵이라는 거울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비쳐보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공자를 팔면 공자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보는 일이고 예수를 팔면 예수의 거울에 자기를 비추어보는 것이다.

그대가 진위를 논하고 미추를 논하고 선악을 논해도 결국 세상이라는 거울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것에 불과한 거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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