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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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호와 무궁화호는 무엇이 다른가? 단지 요금이 비싼 정도가 다를 뿐 별다른 점이 눈에 띄지 않았다.

새마을호라서 승무원이 자주 지나다니며 승객의 편의를 보살필 의사를 내비쳤지만 특별히 승무원에게 부탁할만한 불편은 없었고 미녀 스튜어디스라도 있어서 어여쁜 미소에 알사탕하나라도 서비스해 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굳이 두배의 요금을 주고 새마을호를 이용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무궁화호를 탔다가 모진 경험을 한번 하고 앞으로는 새마을호를 타리라 하고 결의하게 되었으니 사정은 이렇다.

야간열차는 밤 10시에 청량리역을 출발하여 다음날 새벽 5시 30분에 정동진역에 닿는다. 마침 동해바다로 태양이 솟아오른다. 한적한 바닷가 역사에서 맞는 일출, 부푼 기대를 안고 무궁화호를 탄 것 까지는 좋았는데.

옆자리에 앉은 꼬마 6인방, 밤이 늦었는데도 도무지 떠들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었다. 에구 시끄러워. 귀를 막아야 할 판.

통로에서 장난을 치는 꼬마의 어깨를 툭 쳤다. “애! 너희들 어디까지 가나?” “정동진요” “으악” 밤새 저 꼬마들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에 시달려야 한다는 말인가? 밤차여행의 호젓한 기분은 완전히 잡쳐버렸다. 저 앞쪽에서 일단의 대학생무리도 시끄럽다. 참다못해 한마디 한다.

“애들아 좀 조용히 해. 부탁이야. 그만 놀구 잠이나 자는게 어떻니?”

몰랐는데 앞자리에 앉았던 꼬마들의 부모되는 아줌마 4인방이 그 말을 들었던가 보다. 내심 불쾌했으리라. 곧 보복을 당하게 된다.

꼬마들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는 그치지 않는데 승무원이 지나가자 아줌마 한사람이 승무원에게 말했다. “애들 좀 나무래 주세요” “하하 꼬마들아 그만 좀 조용히 해”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악몽의 한시간쯤이 지난 후 갑자기 앞자리의 아주머니가 뒤를 돌아보더니 “애들이 있는데 삼가해주세요” “네?” “좀 삼가해 달라구요!” “뭐를 삼가해요?”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삼가하라니 뭘 삼가하지? 하옇든 “네 삼가할께요” 대답하고 잠을 청하고 있었는데

한참 후 다시 승무원이 지나가는데 그새 아이들과 자리를 바꿔앉은 그 아줌마일행 승무원을 불러세우는 것이었다. “아저씨 우리 말이에요. 애들하고 자리 바꿨어요 왜 그랬는지 아세요?” “아하 애들이 너무 떠들어서 그랬군요.” “그게 아네요. 아저씬 뒤에 눈이 없어서 몰르나 봐. 뒤를 좀 보세요”

승무원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봤다. 여자친구는 내쪽으로 어깨를 기대고 있었는데 별일은 없다. 어리둥절한 승무원 왈 “아 이건 아무것도 아네요” “에어컨 바람이 세군요. 너무 심해서 추워서 그런가봐요” 다행히 승객은 우리를 지지해주었고 아줌마들은 머쓱해졌는데.

날씨가 덥길래 가벼운 옷차림으로 출발했었다. 차 내의 온도는 매우 낮았다. 에어컨바람은 차가왔다. 더군다나 맨끝자리여서 입석손님이 좌석 뒤에 끼어있었으몰 의자를 뒤로 젖힐수도 없어서 두 연인은 몸을 꼭 붙이어 기대고 있었는데 아주머니들은 그것을 애들 교육상 삼가해야할 포즈라고 생각한 것이다.

기차안에서 연인들이 서로 어깨를 기대어 앉는 것이 뭐 어때서? 뭐가 어떻다는 거지?

무릇 ‘예’란 무엇인가? 공자는 예를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 말했다. 아이들이 기차 안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행동을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는 할수 없다. 그것은 무례다.

그렇다면 기차 안에서 연인이 서로 다정하게 포옹하고 있는 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없음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은 변하고 있다. 타인에 대한 부질없는 관심 역시 배려가 아니다. 왜 남의 포즈에 관심을 가지지?

최근 호주에서는 고등학생들이 교내에서 연인끼리 키스할 권리를 위해 투쟁을 시작했다는 보도다. 호주의 고등학교 규칙은 연인들의 포옹과 키스를 허용한다. 그러나 ‘오랫동안의 포옹과 키스(?)”는 허용되지 않는다. 즉 가벼운 신체접촉과 입맞춤은 허용하되 찐한 키스와 심한 포옹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예’는 타인에 대한 배려다. 타인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이 예다. 그렇다면 과연 동방예의지국 대한민국인들은 충분히 타인을 배려하는가? 타인들을 편하게 하는가? 외국인들은 한국에서 편함을 느끼는가?

어쨌든 우리는 새마을호를 이용하기로 했다. 새마을호는 적어도 승객의 질이 다르다. 시설이 더 편하다던가 승무원이 더 친절하다던가 하는 것은 그 상당한 요금의 차이를 설명할만큼이 되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경험상 새마을호승객은 절대 기차안에서 떠들지 않더라는 것이다. 또 옆자리를 힐끗힐끗 쳐다본다던가 이리저리 소란스럽게 돌아다닌다던가 하지도 않더라는 것이다.

무엇이 타인에 대한 배려인가? 대개 한국인들은 타인에 대해 과도하게 관심을 가질뿐 아니라 무리하게 남의 일에 개입하려 든다.

전철 안에서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이라도 만날라치면 힐끔힐끔 쳐다본다. 함부로 말을 걸기도 한다. 왜 쳐다봐?

2호선 전철 안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중절모를 쓴 잘생긴 은발의 신사(멋쟁이)가 노랑머리의 백인청년에게 말을 붙인다. 제법 숙달된 영어로 뭔가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 백인이 약간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저씨 그냥 한국말로 하세요”

그 친절한 멋쟁이 은발신사는 외국인을 돕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잉친절이 그를 짜증나게 했음이 분명하다. 무엇이 타인에 대한 배려인가?

한가지 분명한 것은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구 여러나라들에서는 타인에 대한 부당한 관심과 개입을 상당한 무례로 친다는 것이다. 남이야 무슨 짓을 하던 관심갖지 말란 말이다. 피해를 안끼치는 한도 안에서.

한국인들은 인정이 많다. 관대하다. 남들이 약간의 피해를 끼쳐도 화내지 않는다. 그래서 남의 발등을 밟고도 사과하지 않는다. 사과를 요구하지도 않으니까. 미국이었으면 어떨까? 저녀석이 혹 품속에 총이라도 감추고 있었다면 발등을 밟은 날 쏴버렸을 것이 아닌가? 일본이라면 어떨까? 사무라이는 모욕을 당했을 때 농부를 죽일 권리를 가지고 있다. 죽어야 한다.

한국인은 어떤가? 어지간한 피해는 당하는 쪽이 참는다. 그 부당한 인내로 하여 사회의 진보는 더뎌진다. 언제나 그렇듯이 결국은 약자가 더 많이 참게 되기 때문이다.

참아서 안된다. 타인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어서 안된다. 기차 안에서 떠들어서는 안된다. 미국이라면 일본이라면 총맞을, 칼맞을 일이 아닌가? 옆자리의 승객이 야꾸자가 아니고 갱이 아니란 보장이 없다.

각설하고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서 여성의 노출을 이야기해 보자.

미국인의 친절과 일본인의 친절이 다르고 한국인의 친절이 다르다. 한국인은 정이 많아서 남을 잘 돕고 사소한 피해를 잘 참아낸다. 좋다. 일본인과 미국인은 타인에게 결코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 대신 사소한 피해라도 적극 항의한다. 어느 쪽이 나은가?

분명한 것은 지구촌 나라들은 서로 닮아간다는 것이다. 한국식의 친절은 우리 민족의 고유
한 특징이 아니라 농촌사회, 봉건문화의 특징에 불과하다. 현대사회는 더 이상 인내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사회가 너무 복잡하고 첨예해져 버렸다. 참아도 될 만큼 이해관계의 폭이 좁지 않다. 세상은 변한다. 우리는 변화에 대응하고 적응해야 한다.

전철 안에서 아슬아슬한 미니를 입은 여성을 본다. 아슬아슬하다. 나를 아슬아슬하게 한 그녀가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잘못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타인의 자세를 관찰하는 내가 무례한가? 내가 무례하다.

중요한 것은 사회는 변한다는 점이다. 과거라면 그녀가 잘못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잘못이다. 우리 과도하게 타인의 삶게 관심가져서도 개입해도 안된다. 그것은 서로 불편하게 함이다.

그렇다면 여성의 노출은 허용되어야 하는가? 천만에. 우리는 또다른 각도에서의 접근법을 알고 있다.

왜 노출하는가? 노출한 모습이 더 아름답기 때문이다. 과연 아름다운가? 천만에. 최근에 달라지고 있다. 혼자 노출했을 때 두드러져 보이고 아름답지만 모두가 노출했을 때는 그렇지 않다. 노출은 추하다.

미니스크트 붐은 사라져가고 있다. 비키니의 충격도 사라지고 있다. 노출은 당사자 본인에게 불편하다. 타인에게 예뻐보이기 위하여 불편을 감수하는 것 또한 어리석다.

이건 개인주의다. 사회는 점점 개인주의화 해 가고 있으며 이것이 곧 진보다. 왜 개인주의가 진보인가? 진보한 사회는 개인의 문제를 더 적극해결하므로 더 이상 타인의 조력을 받을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낙후한 사회에서는 형의 부모의 이웃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고로 형의 부모의 친구의 이웃의 개입을 허용하고 참고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진보한 사회는 국가가 보장한다. 위험이 감소한 만큼 주위의 개입을 차단한다.

이젠 인터넷이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필요한 것을 얻을수 있고 도움받을 수 있다.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있다. 더 많은 협력자를 쉽게 구할 수 있다.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과만 선택적으로 사귈 수 있다. 이제 더는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억지 웃음 지어보일 이유가 없다.

언제든지 119를 부를 수 있고 언제든지 휴대폰통화를 할 수가 있다. 사회단체와 정부기관으로부터 조력을 구할 수 있다. 고로 부모라서 이웃이라서 내 삶에 부당하게 개입할 수 없다. 고로 우리는 과도하게 타인의 포즈에 관심가져서 안되고 개입해서 안된다. 귀찮아. 내게 말걸지 마.

마찬가지로 이제 한국인들은 더 이상 타인을 위하여 잘 보일 이유가 없다. 타인을 위하여 짙게 화장하고 값비싼 옷으로 치장할 이유가 없다. 굳이 노출할 필요조차가 없다.

아직 한국 여인들은 지나치게 화장한다. 한국 남자들은 무더위에도 불편하게 정장을 고수한다. 그러나 천만에. 벤처밸리를 가보라. 달라진 것을 볼 것이다.

2~30대의 젊은이들은 타인을 위하여 더운 날씨에 정장을 고수하지 않는다. 타인을 위하여 짙게 화장하지 않는다. 예뻐보이기 위하여 노출하지도 않는다. 오직 자신에게 편하도록만 한다.

노출이 편한가? 그렇다면 노출하라. 그러나 타인을 위하여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억지노출은 하지 말라. 그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낙후한, 세련되지 못한 유행이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반바지 차림으로 출근할 수 있다. 여인들은 나시 차림으로 전철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본인에게 불편한 과잉노출은 좋지않다. 그리고 타인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예가 아니다.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는 말했다. “여성의 노출에는 찬성한다. 그러나 아내의 노출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이기적인 생각이다.

본인에게 편리한 노출은 찬성한다. 그러나 타인을 위하여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불편하게 하이힐을 착용하고 불편하게 코르셑을 죄어매고 불편하게 미니를 입을 필요는 없다. 그건 후진거다.

본인에게는 편리를, 타인에게는 배려를, 이것이 진보한 삶의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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