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read 3608 vote 0 2002.09.14 (20:23:39)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의 안목을 눈여겨 보는 것이다. 안목은 참된 가치를 알아보는 눈이다.

그것은 명품을 알아보는 눈이기도 하고,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그 사람의 가치관이 담겨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그 사람도 좋아한다면 그 사람과는 충분히 대화가 된다.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두고 그 사람의 안목을 판단할 것인가이다.

다양한 척도가 있을 수 있지만 손쉽게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영화다. 좋은 영화를 알아보는 사람이라면 분명 좋은 사람이다. 아무 영화나 보는 사람이라면 아무 생각없이 사는 사람이다. 이런건 절대로 속일 수 없다.

영화가 아니래도 정치적 입장이나 혹은 소설이나 시라든가 종교나 철학을 두고 토론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깊이있게 접근할 수 있는 장르는 역시 영화다. 영화에는 그만큼 다양한 측면이 있는 까닭이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이라면 세대차 느껴지는 노친네가 아닌가 해서 관심 없었는데 이 양반이 김기덕의 나쁜남자를 호평한 반면 오아시스를 혹평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귀가 솔깃해졌다. 사실이지 오아시스를 비난할 수 있는 배짱을 가진 평론가는 이나라에 많지 않다.

오아시스에 대한 비판은 최근 오마이뉴스 등에 보여지고 있다. 그러나 장애자의 입장 등 특수한 경우이고, 영화의 질을 두고 본질적인 차원에서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아시스는 겉으로 보면 멀끔하다. 판자대기로 가려놓은 이면을 꿰뚫어 보기 어렵다.

이런 식이다. 말하자면 평론가 정성일씨가 우연히 나쁜남자와 오아시스에서 공통적으로 필자와 의견이 일치했는지 모르지만, 어쨌던 나와 의견이 일치하는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단 한 사람이라도 존재한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나쁜남자라면 평론가들의 반은 찬성, 반은 반대로 입장이 갈라지지만, 오아시스라면 평론가 100인 중 99인이 찬성한다. 이때 나 홀로 '그 영화 문제있는데...!'하고 말 꺼내기는 참 어렵다.

정성일이 오아시스를 비판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말하자면 사방에 온통 적들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듯이 한 사람의 동지를 발견한 기분이 된다.

그 사람과 친구가 되지 못한다 해도, 세상 어딘가에 한 사람쯤 의견이 같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는 것은 '세상을 뒤집어 버리기'를 삶의 목적으로 하는 사람에겐 위로가 되기에 상당하다.

영화가 좋은 이유 중 하나는 바로바로 검증이 되기 때문이다. 검증장치는 흥행여부이다. 물론 흥행하는 영화가 반드시 좋은 영화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의 근거는 된다.

모든 영화가 대박을 낼 필요는 없다. 그러나 투자대비로 이윤을 뽑아낼 수는 있어야 한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흥행에 실패한다 해도 평단의 지지를 이끌어내어 가능성을 확인시켜 줄 수는 있다.

흥행에서도 비평에서도 실패한다면 그 영화는 엉터리임에 틀림이 없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확실한 검증장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화 외에 다른 분야라면 도무지 검증할 방법이 없다. 예컨데 정치라면 오류가 확인되어도 패자가 절대 승복하지 않는다.

사실 평단은 엉터리다. 문학이든 혹은 다른 분야이든 평론계는 대개 썩었다. 새로운 영화가 나타났을 때 이를 관객이 알아볼 확률이 50퍼센트라면, 평단이 이를 알아볼 확률은 30프로쯤 된다. 관객의 판단도 절반은 틀려있지만 평단의 판단은 관객보다 오히려 더 못하다.

여기서 3개의 시선이 발견된다. 관객의 시선, 평단의 시선 그리고 필자의 시선이다. 이 시선들이 다르다.

관객은 걸작과 태작을 절반쯤 구분해 낸다. 물론 관객은 뚜렷한 기준이 없이 느낌으로 알아낸다. 느낌은 직관이다. 직관을 경험이 만든다. 관객의 경험적 판단이 옳을 확률은 50프로 쯤 된다.

평단은 걸작과 태작을 30프로 쯤 구분해 낸다. 평단의 이론적 판단이 관객의 직관적 판단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유의미한 것은 확실한 평가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그 확실한 평가기준 때문에 평단의 판단이 틀렸어도 관객들에게는 유익한 참고가 되는 것이다.

평단이 별 넷 이상을 주면 재미없는 영화이고 둘이나 셋을 주면 재미있다는 공식을 얻어내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관객들은 다른 용도로 평단을 이용하고 있다.

이는 기상대의 일기예보와 비슷하다. 날씨가 항상 맑은 가을이나, 항상 비가오는 장마철의 일기예보는 잘 맞는다. 날씨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날 기상대가 내일 날씨는 춥다고 발표하면 100프로의 확률로 맞다. 그날 춥다.

그러나 날씨가 잘 변하는 환절기의 일기예보는 높은 비율로 맞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새롭지 않은 영화들을 평단은 잘 비평한다. 새로운 영화를 평단은 전혀 비평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제 3의 시선이 필요하다. 관객의 경험적 판단과 평단의 틀에 갖힌 판단을 넘어선 참다운 눈이 필요한 것이다.

이야기가 길어졌으니 이쯤에서 정리하다.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인가?

화두를 제공하는 영화가 좋은 영화다. 화두란 베이스다. 먼저온 사람이 베이스를 던져주면 뒤에온 사람이 거기에 살과 뼈를 더한다. 뒤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앞에서 길을 개척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작가이다.

반면 앞서온 사람이 던져놓은 베이스에 살과 뼈를 붙이는 사람이 있다. 그는 작가가 아니다. 기능공이다.

임권택은 기능공이다. 스필버그도 기능공이다. 그들은 영화를 잘 만든다. 그러나 그가 사용하는 베이스캠프는 언제나 앞에온 사람이 설치해놓은 것이다.

잘만든 2류도 있고 2프로 부족한 1류도 있다. 1류는 최초에 와서 베이스를 만드는 사람이고 2류는 뒤에 와서 앞사람이 설치한 베이스에 뼈대를 세우는 사람이고, 3류는 뒤늦게 와서 남이 다 해놓은 밥에 숟가락 하나 들고 달라붙는 사람이다.

장선우는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개척하여 최초로 베이스를 던져놓는 척 하지만 언제나 실패한다. 아무도 장선우가 던져놓은 베이스에 골조를 올리지 않는다. 그는 늘 실패한다. 그때마다 새로운 시도를 한다.

김기덕은 새로운 시도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결같은 점이 있다. 그는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는다. 그가 만들어놓은 베이스가 이미 훌륭하기 때문이다.

장선우가 늘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은 늘 실패하기 때문이고 김기덕의 모든 영화가 하나의 일관된 공통성을 갖는 것은 늘 성공하기 때문이다.

장선우와 김기덕의 공통점은 구도영화를 만든다는 점이다. 김기덕은 자궁 안에서 도를 닦고 장선우는 자궁 밖에서 도를 닦는 정도의 차이는 있다. 구도영화를 만든다는 점은 같다.

장선우와 김기덕은 이런 점에서 극명하게 대비가 된다. 김기덕은 구도의 도자도 말하지 않는다. 장선우는 유치하게 극 중에 금강경을 베껴서 써넣는다.(정말 치졸하다. 패죽이고 싶다)

장선우가 늘 실패한다고 해서 그 점 때문에 비난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목표가 더 큰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간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아직 보지 않았지만 들려오는 소문으로 말한다면 절망적이다.

그래도 장선우와 김기덕 두 사람은 1류다. 영화를 잘 만들어서 1류인 것은 아니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여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기 때문에 1류이다. 어쨌던 둘 다 일류라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해야 한다.

장선우의 베이스캠프는 늘 실패한다. 캠프는 철수된다. 그는 한동안 잠적했다가 다시 나타나서 다른 산을 오르곤 한다. 어쨌든 그는 쉬지 않고 재도전한다.

김기덕은 베이스캠프를 철수하지 않는다. 제 2캠프와 제 3캠프를 차례로 설치한다. 그는 열편의 영화를 만들어도 하나의 산을 고집한다. 그 산은 에베르스트이다.

홍상수와 이창동은? 홍상수 역시 평가되어야 할 작가이기는 하지만 판자대기 뒤에 숨겨진 것이 있다. 그는 창작과 번역 사이에서 곡예를 하고 있다. 그의 캠프가 베이스캠프인지는 불확실하다. 적어도 그 산이 에베르스트는 아니다.

이창동은 전통적인 새마을영화 계보를 계승하고 있다. 새마을영화는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다는 공식을 깨뜨려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낡아서 용도폐기된 캠프를 잘 갈고닦아 제법 꾸며내기는 했지만 그 산은 오래전에 버려진 산이다. 그것이 한계다.

훌륭한 2류 임권택은? 스필버그와 마찬가지로 기능공에 불과하다. 그는 한번도 새로운 산을 개척하여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적 없다. 남이 쳐놓은 베이스캠프를 이용하여 거기에 뼈대를 세우고 살을 덧붙인다. 그는 한번도 설계사였던 적이 없다.

그에게 유명세를 안겨준 주요한 작품들은 타인의 시나리오였고 타인의 촬영이었다. 그는 팀에서 하나의 역할을 맡을 뿐이다. 그는 작가라기 보다는 타고난 감독이다. 물론 감독으로서는 완벽하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척되어야 할 새로운 산이며, 그 산은 에베르스트여야 하며,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 산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산에 홀로 가는 자 있다. 모두들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지만 훗날 무수한 사람들이 그 앞서간 이의 발자국을 쫓아가게 된다. 지금 우리가 가야하는 길이 그 길이다.

나머지 이야기는 역사적인 실패로 예감되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보고나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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