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read 5328 vote 0 2002.09.10 (19:08:30)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물론 다양한 견해가 있다. 그러나 실은 아무런 견해도 없다. 본질의 차원에서 볼 때 필자는 아직 유의미한 견해 하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신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가 직접적인 방식으로 제기되는 일은 거의 없다. 신자들과 비신자들은 상대방의 논박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고 간접적인 방법으로 상대방의 입장의 근원을 붕괴시키려 한다. 즉 상대방의 생물적, 심리적, 사회적인 동기를 폭로하고 비판하므로서 그들의 주장을 원천적으로 소멸시키려 한다. 이러한 자세는 심리주의(Psychologisme)라는 말로 대변될 수 있다."

이상은 신의 존재여부에 대한 다양한 철학적 입장을 소개하고 있는 프랑스 철학교과서의 한 구절이다. 신과 관련된 논쟁 뿐 아니라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많은 논쟁들도 대개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틀렸다.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신과 관련된 논쟁은 어디에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양한 견해가 있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본질을 논하고 볼 때 대부분 견해가 아니다.

우선 종교적입장은 배제되어야 한다. 진리 그 자체보다는 종교의 목적이 선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범신론적 입장도 배제되어야 한다. 범신론적 입장은 엄밀하게 말하면 무신론의 일부로서 대부분 신의 존재 그 자체와 상관없이 단어의 개념을 비틀려고 하고 있다. 일종의 언어유희다.

대부분의 무신론적 입장도 배격되어야 한다. 이들은 종교적 입장에 대항하고 있다. 종교적 입장이 오류이므로 종교적 태도를 논박하는 방식도 유의미하지 않다.

귀머거리들의 대화같다. 신은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과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각기 말하는 신이 그 의미가 다르다. 서로 다른 관념 속의 신을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하며 논쟁하는 것이다.

우선 신은 존재 차원의 논의대상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존재는 곧 물질을 의미하는 경향이 있다. 유물론자들은 대부분 이러한 입장을 취한다.

본질에서 볼 때 존재가 물질을 의미하지 않으므로, 유물론자들과 신의 존재를 논하는 것은 의미없다. 물질적 존재를 넘어 본질을 보아야 한다.

신의 존재에 관한 바른 접근은 형이상학적 논의로 다가가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개념은 존재론적 접근이며, 존재론적 접근은 존재를 곧 물질로 보는 유물론을 넘어서고 있다. 곧 유물론자는 원천적으로 논의에서 배제된다.

유물론은 엄밀한 의미에서 형이상학을 부정하고 있다. 그들은 존재를 이성의 세계가 아닌 감각의 세계로 한정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 존재는 신체감관을 통한 지각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의 첫페이지는 존재를 지각을 넘어선 이성의 영역으로 확대하는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본질에서 신의 존재는 유물론을 넘어서고, 유물론에 대항하는 바 형이상학의 영역에서 접근되며, 형이상학은 인간의 신체감관을 넘어서는 바 이성의 능력을 긍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차원이 다르다.

- 형이상학을 인정하는가?
- 인간의 이성을 인정하는가?

이 두가지 질문에 답변할 수 있는 사람이 본질의 차원에서 이 논의에 접근할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신의 존쟁에 관한 접근이 형이상학과 인간이성의 긍정이라는 확고한 영역을 담보하고 있으며, 이 영역에 도달하지 못하고서는 논쟁 자체가 성립될수 없음을 알았다. 이는 셈을 전혀 모르는 미개인과 미적분을 논할 수 없음과 같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과 이메일로 소통할 수 있고, 벙어리가 아닌 사람과 전화로 통화할 것이며, 장님이 아닌 사람과 피카소를 논할 수 있다. 애초에 형이상학의 영역과 인간이성을 긍정하지 않는 사람과는 논쟁할 수 없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다양한 태도 중에는 범신론과 무신론, 불가지론, 종교적 입장, 심리주의 태도 등이 있다. 이들 그릇된 태도들은 대부분 형이상학과 충돌하거나 인간이성을 긍정하지 않으므로서 전화가 가설되지 않은 사람과 통화할 수 없듯이 대화할 수 없다. 논쟁할 수 없다. 위에서 말했듯이 그것은 논쟁처럼 보이지만 실상 정치행위이기 십상이다.

각각의 태도들을 검증해보자면

■ 범신론 : 존재는 곧 기능이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신이 기능한다는 것이다. 범신론은 이런 간단한 결론을 매우 어렵게 곡예하여 피해가는데 성공한다. 그들은 기능을 무시한다.

신의 존재가 형이상학의 영역이며, 형이상학이 존재를 물질운동으로 좁게 보는 그릇된 태도를 넘어선다는 사실 정도는 그들도 알고 있다. 대신 그들은 시,공간이라는 새로운 속임수의 수법을 발견해낸다.

대부분의 범신론자들은 '무한'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있어 무한의 개념은 게임의 규칙을 흐트러뜨릴 수 있는 모든 것이다. 그들은 무한이라는 애매한 개념을 남용하는 방법으로 모든 것을 신으로 규정하거나, 혹은 모든 것을 신이 아닌 것으로 개념을 왜곡하는데 성공한다.

시간과 공간은 무한할 수 없다. 시공간이 무한하다는 말은 시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존재론적으로 보면 시공간은 없다. 시공간은 물질운동을 설명하고 계측하는 표준으로서만이 유의미하다.

시공간은 자나 저울이다. 자나 저울은 물질운동을 계측하기 위하여 인간들이 정해놓은 약속에 불과하다.

모든 형태의 범신론은 무한의 개념을 남용하고 있으며, 이는 무한이라는 추상개념 자체를 이해못한 것이 첫째이고, 시, 공간이라는 추상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이다. 그들은 함부로 개념을 확장한다.

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한이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감명받아 이걸 아무데나 써먹으려 덤벼든다. 이들은 진지하지 않다. 깊이 파고들면 범신론은 불가지론의 한가지 형태임이 확인된다.

정리하자. 신체감관으로 인지되는 물질운동영역이 있다. 이 영역을 넘어서서 인간 이성으로 인식되는 형이상학의 영역이 있다. 물질운동과 형이상학 사이에 시, 공간이라는 추상개념이 자리하고 있다. 시공간의 특성은 무한성이다.

그들은 시공간개념의 무한성을 물질운동의 영역도 아니고 형이상학도 아닌 알 수 없는 무엇으로 정의한다. 그 알 수 없는 무엇은 알 수 없으므로 모든 것이 될 수 있고 모든 것이 되지 않을 수도 잇다. 그러므로 그들은 무엇이든지 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그것이 신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는 논리학지식의 부재로 인한 언어사용의 혼란에 불과하다.


■ 무신론 : 무신론은 대부분 유물론의 입장을 취한다. 유물론은 인간의 언어사용범위를 신체감관으로 인지되는 영역으로 한정한다. 즉 형이상학을 부정한다. 인간의 이성을 부정한다. 그들에게 있어 신은 인간이 지어낸 스토리에 불과하다. 왜 그러한 스토리를 인간이 지어내야만 했는지 그 원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애초에 형이상학을 반대하므로 이들과는 애초에 토론이 가능하지 않다.

라디오가 있다. 라디오에서 소리가 나오면 종교적 태도에 빠진 이들은 그 라디오 안에 요정이 숨어있다고 말한다. 무신론자들은 라디오를 박살내는 방법으로 라디오 속에 요정이 숨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들은 끝끝내 방송국의 존재를 발견해내지 못한다. 그들이 신을 부정하는데 성공한다는 것은 라디오를 깨부순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애초에 방송국에 관심이 없다. 형이상학에 무관심한 것이다.

무신론이 유의미한 영역은 종교적태도에 대립각을 세우는 범위로 한정된다. 그들은 종교적 태도의 오류에 기생한다. 그들은 라디오 안에 마녀가 숨어있다는 종교적 태도의 그릇된 신념을 극복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우리가 발견해야 할 대상은 라디오 속에 숨은 마녀가 아니라 그 라이도를 제어하는 방송국이다.


■ 불가지론 : 범신론이나 무신론도 궁극적으로 추구해 들어가면 불가지론의 변형이다. 이들은 논리학에 대해서 무지하다. 그들은 머리가 나쁘기 때문에 형이상학적 사고가 불능이다. 그들은 인식의 영역을 신체감각이 지각하는 범위로 한정한다. 그들은 추론이나 연역의 방법론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이 무신론과 구별되는 점은 타인의 주장을 부정할 뿐 아니라 심지어 그들 자기자신의 주장까지도 부정한다는 점이다. 무신론이 '당신의 말은 틀리고 내 말은 옳다'고 주장하는 반면 불가지론은 결론을 유보한다. '당신의 말도 내 말도 입증할 수 없다'는 태도이다. 그러나 불가지론은 논리학의 발달에 의해서 간단히 극복된다.

이상 세가지 오류를 비교하면

- 불가지론 : 형이상학에 대한 무지를 내세워서 결론을 유보한다.
- 무신론 : 형이상학을 인정하지 않고 형이하학의 범위 안에서 결론을 강요한다.
- 범신론 : 형이상학에 대한 무지를 악용하여 자의적으로 왜곡된 추상개념을 남용한다.

즉 이들은 모두 형이상학을 부정하는 공통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존재여부에 관한 논쟁은 형이상학을 긍정할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에서 100프로 결정된다.

이 외에도 종교적 태도와 심리주의태도의 오류가 있다. 종교적태도는 종교의 교리에 따른 목적을 앞세우므로 진지한 논의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신의 존재자체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신을 이용하여 이익을 추수하는데만 관심이 있다.

심리주의의 태도는 진지하지 않은 저급한 논의이다. 종교적태도와 마찬가지로 논의의 목적을 앞세우는 것이다. 즉 신의 존재를 밝히려는 생각 보다는 그 저의와 배경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역시 목적주의의 오류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신의 존재여부와 그 증명에 관한 토론은 결국 물질운동을 넘어선 차원에서 접근되는 형이상학을 긍정할 것인가 아니면 부정할 것인가로 결정된다. 형이상학을 토대는 인간 이상의 긍정이다. 그러므로 신의 존재여부와 그 증명에 관한 논쟁은 인간이성을 긍정할 것인가의 여부로 결정된다.

라디오는 눈에 보이지만 방송국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라디오가 존재하므로 방송국의 존재는 증명된다. 무신론자는 라디오를 깨부수고, 범신론자는 라디오로 사람을 홀리고, 불가지론자는 모르겠다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들은 모두 라디오에 붙잡혀 있으므로 방송국을 발견할 수 없다.

정리하자.
- 바른 논의의 태도는 형이상학적 접근이다.
- 형이상학적 접근은 인간 이성의 역할을 긍정하고 있다.
- 신의 존재는 기능의 여부로 판단하는 존재론으로 하여 접근된다.
- 존재론은 형이상학의 영역에 속한다.
- 형이상학은 신체감관의 인지를 넘어선 논리와 추론 및 연역의 영역이다.
- 형이상학의 영역은 신체감관의 인지를 인식의 한계로 삼은 유물론적 태도를 배격한다.
- 이 지점에서 존재론은 역시 형이상학의 영역에 속하는 인식론과 만난다.
- 인식론적으로 볼 때 신체감관영역과 이성의 영역이 있다.
- 형이상학은 신체감관의 영역을 넘어선 이성의 영역을 긍정한다.
- 시 공간의 추상개념은 신체감관의 영역에 속하는 유물론적태도와 이성의 영역에 속하는 형이상학적 입장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며 혼란을 유발한다.
-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시공간의 추상개념은 이성의 영역에서만 바르게 인식된다.
- 이성의 영역에서 접근할 때 시공간의 무한성은 부정된다.
- 무한개념의 극복이 이 논의의 출발점이 된다.

만약 그대가 무(無)라는 개념을 순수한 그대로의 무(無)로 볼 수 있다면 신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無)를 어떤 형태의 유(有)로 왜곡하여 인식한다. 그들은 방송국없이 무(無)에서 라디오를 발생시킨다. 그러나 알아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라디오는 방송국을 복제, 반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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