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고대인들의 말씀의 세계관

창세기에 의하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한 첫째날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빛이 존재하게 되었다. 곧 하느님께서 『만물이 있으라』고 하신 후에 과연 그대로 되었다.

수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마찬가지다. 무협지의 고수들은 어떤 기술을 쓰기 전에 반드시 그 기술의 이름을 소리높여 외쳐야 한다. 『에라이 벽공장(劈空掌) 받아랏!』 하고 소리치거나, 『얼씨구 암연소혼장(暗然銷魂掌)이닷!』 하고 허공 중에 알리어 보고하곤 한다.

미래의 첨단 로봇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애니메이션 작가 『토미노 유시유키』의 『기동전사 건담』 이후 로봇들은 변신과 합체를 능수능란하게 해내곤 한다. 여기에도 규칙이 있다. 보통은 1천미터 허공 중에서 『무슨무슨 변신』 하고 소리를 냅다 지르거나 아니면 『영이 철이 합체』 하고 공중에다 발표하곤 하는 것이다.

마법사가 주문을 외어 도술을 부리거나, 무당이 휘파람소리로 신을 불러내거나 간에 특별한 소리로 누구에겐가 알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왜 한사코 소리를 질러야만 사업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과학의 세례를 받기 이전 시대 사람들은 자연현상을 소멸과 발생으로 이해했다. 말하자면 자연발생설이다. 어떤 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습지에서 그것이 저절로 발생했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그 발생하고 소멸하는 매커니즘을 구태여 해명하려 들지 않는다. 이건 좀 뻔뻔스럽다. 논리학을 배우지 않아도 이것이 말이 안된다는 것 쯤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요는 인과율이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 어떤 일이건 반드시 계기가 있어야 한다. 문제는 인과율은 공간이 아닌, 시간 상에서 성립한다는 사실이다. 고대인의 소멸과 발생에 대한 관념은 시간관념이 배제된 공간현상 만으로의 이해이다.

공간의 특징은 동시성이다. 시간의 특징은 비동시성이다. 공간의 문제는 동시성을 이용하여 구성형태를 변조하는 방법으로 시야로 부터 은폐할 수 있지만 시간의 문제는 그 비동시성의 특징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도 감출 수 없다.

예컨대 만약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진행된다면, 그 사건의 원인만을 시야에 노출하여 보여주고 원인이 진행되는 동안 다른 장소에서 결과가 진행되었다며 속일 수 있지만,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진행되는 일은 절대로 없으므로 이러한 속임수는 불가능하다.

이때 마술사는 뻔뻔스러운 방법을 사용한다. 매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동안 시간의 현재진행현장을 망토로 가려버리는 것이다. 그 마법사의 망토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예의 『말씀』이다.

말씀은 곧 순서의 특정이다. 창세기에 『빛이 있으라』고 명령하거나 무협지에서 『장풍받아랏』하고 선언하는 것은, 곧 원인에서 결과로 넘어가는 순서를 지정하는 것이다. 명령이 선언되기 전까지의 시기는 원인이고 그 다음 시기는 결과이다. 물론 그 구체적인 매커니즘은 노출되지 않는다.

인류역사상 모든 마술의 공통점은 공간의 구조를 변경하므로서 눈속임을 연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 이래 시간을 속이는데 성공한 마술사는 아직 한 사람도 없다. 마찬가지로 인류사 이래 모든 오해와 착각은 예의 시간요소의 망각 때문에 일어났다.

보통은 공간적 구성형태의 변화가 착각을 유발한다. 절대로 건너뛸 수 없는 시간요소는 곧 우선순위다. 원인이 먼지이고 결과는 나중이다. 이는 절대적이다. 역으로 인간이 곧잘 빠지곤 하는 모든 오류는 시간 상의 진행순서를 바로잡으므로서 해결된다.

경찰이 범인을 추궁하며 알리바이를 요구하는 것도 『누구도 시간을 속일 수는 없다』는 원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동일한 사람이 동일한 시간대에 서로 다른 두 장소에 있을 수는 절대로 없다. 공간은 그 동시성의 특징으로 하여 기술적으로 은폐될 수 있지만 시간은 비동시성의 특징으로 하여 완전히 노출되기 때문이다.

마술사가 내부 매커니즘의 시간적 진행과정을 은폐하기 위해 사용하는 망토와, 고대인이 관객의 주의를 다른데로 돌리기 위해 사용하는 말씀은 이 시간적 순서가 바뀌는 현장으로 부터 우리의 관심을 떼어놓는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자연발생설과 원자설

고대인의 자연발생설에 따르면 비가 내리는 이유는, 비의 신이 『비야 내려라』하고 비에게 명령했기 때문이다. 곧 말씀이다. 연인이 질투를 하는 이유는 질투의 신이 명령한 바에 의해 질투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연인이 서로 사랑하는 이유는 큐피드가 쏜 화살을 맞아 연인의 마음 속에 사랑이 솔솔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다.

문제는 그러한 비합리적 사고 속에 숨은 논리와 과학이다. 적어도 그들은 그 허공에 외치는 소리 또는 말씀이라는 장치의 작동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마술사가 망토라는 장치를 이용하여 품속에서 토끼나 비둘기를 꺼집어내듯이 말이다. 이를 역으로 보면 망토나 말씀으로 대체하고는 있으나, 그 매커니즘의 존재 자체는 긍정한다는 의미가 된다.

말씀이나 망토로 대체될 수는 있으나 그 매커니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다. 요는 트릭의 사용이다. 솔개가 나타나면 병아리는 낙엽더미에 몸을 숨긴다. 이때 병아리는 자신의 머리만을 낙엽속에 파묻은 채, 자신이 솔개로부터 충분히 은폐되었다고 여긴다.

『말씀의 세계관』 또한 이와 같다. 숨은 매커니즘을 감추는 대신에 자신의 눈을 가리는 것이다. 문제는 21세기 현대과학의 시대에도 궁극적인 단계에 이르면 이와 같은 『망토 속에 숨기기』에 봉착한다는 사실이다.

현대과학의 대표적인 망토가 바로 물리학에서의 원자론이다. 원자(atom)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작은 알갱이라는 뜻이다. 왜 더 이상 쪼갤 수 없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서는 안된다. 그것은 왜 관객들은 마술사의 망토를 들추어볼 수 없는가와 같다.

만약 어떤 관객이 무대로 올라와서 마술사의 망토를 들추어본다면 마술사는 화를 내고 돌아가버릴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원자를 쪼개는데 성공한다면 물리학자들은 금방 그 원자 안에서 더 작은 알갱이를 찾아내고, 그 더 작은 알갱이의 절대로 쪼갤 수 없음을 선언할 것이다.

논리학의 영역에서도 궁극적으로는 말씀이라는 망토가 작동한다. 하나의 논리는 공리로 하여 완성되고, 공리는 명제로부터 추론되고, 명제는 전제로부터 유도되고, 그 전제는 정의(定意)로부터 출발하고, 그 정의는 정언(定言)으로 성립한다. 정언은 그냥 하나의 선언이다.

궁극적으로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언어의 알갱이 곧 말씀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점들에서 볼 때 21세기 첨단문명을 구가하는 인류의 학문도 여전히 창세기의 『빛이 있으라』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자는 더 쪼갤 수 없다. 그래서 막강하다. 말씀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다. 모든 논리를 침묵시킨다. 마술사의 망토는 누구도 들추어볼 수 없다. 그래서 막강하다. 원자는 절대로 쪼개어지지 않으므로 더 이상 탐구할 필요가 없다. 그것을 쪼개지 못하는 책임은 내게 있지 않다. 어쩔 수 없다.

결국은 어떤 형태로든 불가지론에 도달한다. 그냥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대책없이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지(知)가 아니라 무지(無知)다. 궁극적으로는 무지가 논리가 되고, 무지가 무기가 되고, 무지가 철학이 되어 있다. 이래서 안된다. 어떤 경우에도 무지(無知)는 지(知)를 이길 수 없다. 지(知)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근대인들의 합리주의적 세계관

어떤 추론이든 궁극적으로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어떤 알갱이에 도달한다. 러셀의 논리원자론으로 보아도 최종적으로 예외없이 『말씀』이 되고만다. 하나의 명제는 최종적으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요소명제로 분할되고, 그 명제의 진리치는 그 알갱이인 요소명제가 가진 진리치의 합산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누구도 마술사의 커튼 안쪽을 들여다 볼 수 없듯이, 그 알갱이는 절대로 쪼갤 수 없고, 그 요소명제의 진리치는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최종적으로는 불가지론이다. 말씀이다. 지의 논리가 아니라 무지의 논리다. 무지가 모든 논리의 제 1원인이다.

반면 그 알갱이 내부에서가 아니라 그 알갱이들의 상호관계에서 답을 찾으려는 노력이 있었다. 말씀(명제)이 아니라 그 말씀들을 조직하는 과정에서의 추론규칙에서 답을 찾으려는 모색이 된다.

인도에서 발달한 수학의 영향을 받은 석가모니에 의해 최초로 모든 존재하는 것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곧 인과율이다. 비로소 합리주의의 출발이다. 세상에 저절로 발생하는 것은 없다. 반드시 원인이 있다.

원인이 있다면 그 원인의 원인도 있을 것이다. 그 원인의 원인의 원인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양파껍질을 까는 동일한 패턴이 반복된다. 돌고 도는 순환논리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 순환의 미로에서 어떻게 탈출할 수 있는가이다.

수학은 알갱이의 결합과 분리를 나타내고 있다. 덧셈과 뺄셈이다. 凹+凸=□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어떤 기본적인 알갱이들의 분리와 조합에 의해 생성되었다. 문제는 이 수학적 결합에는 시간개념이 배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수학적 분리와 조합에 시간이라는 함수를 대입하면 인과율이 얻어진다. 곧 석가의 인연설이요 연기법이다. 이러한 발상이 확대되어 근대에 와서 뉴튼적 세계관, 기계론적 세계관, 결정론적 세계관으로 발전하게 된다.

학문의 역사는 크게 보면 자연발생과 말씀을 믿는 고대인의 세계관과 자연발생과 말씀을 부정하는 근대적인 세계관이 변증법적으로 대결해온 역사이다. 크게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학과 합리주의가 주류 세계관을 형성하였고, 자연발생과 말씀은 비주류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다.

동양의 경우는 유가적 합리주의와 도가적 상대주의가 대립하는 가운데 유교합리주의가 우세하여 주류를 형성하였고, 도교상대주의는 일정부분 이단 취급을 받았다. 유교와 도교에 공통되는 음양오행설에서 오행설은 일종의 원자론이다. 곧 말씀이다. 반면 음양론은 상대적으로 추론규칙에 가깝다는 점에서 합리성을 발견할 수 있다.

굳이 비교하면 도교는 상대적으로 더 오행설에 기울어져 있고, 유교에서 강조하는 주역은 상대적으로 음양설에 기울어져 있다. 오행은 원자론이라는 점에서 말씀과 통한다. 화(火), 수(水), 목(木), 금(金), 토(土)는 그 자체로 일종의 알갱이이고 궁극적으로는 선언이다.

반면 중용을 추구하는 주역의 사상이나 발상법은 상대적으로 추론규칙을 중요시 한다는 점에서 합리주의와 가깝다. 여기에는 미미하나마 시간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불교사상 역시 인과율에 근거하고 있다는 면에서 근본적으로는 합리주의에 가깝다. 물론 음양론과 오행설이 통합되면서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비교가 무의미하다고 할 수도 있다.

서구의 경우는 플라톤 이래의 발달한 수학과 논리학에 기초하여 합리주의의 전통을 발달시켜 왔다. 뉴튼과 마르크스의 기계, 결정론적 세계관으로 확대되어 여전히 세계의 주류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다.

다섯가지 세계가 있다.

다섯가지 서로 다른 세계가 있다. 이는 움직임을 어디까지 설명할 것이냐 하는 문제로부터 비롯되었다. 예컨대 지구가 돌고 있지만, 지구의 회전은 우리의 일상적인 활동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적인 계측활동은 지구의 회전을 고려하지 않은채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주로 로켓을 쏘아올리려면 이것이 문제가 된다. 즉 조금전까지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 매우 골치아픈 문제로 대두되는 것이다.

남반구의 호주에서 북반구의 시베리아로 미사일을 발사한다면 겨냥은 빗나갈 수 밖에 없다. 미사일이 날아가는 동안에 지구가 돌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모든 논의가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진행되었다. 설사 움직임이 있다 해도 그 움직임은 너무 느려서 굳이 문제삼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 움직임을 처음으로 고려한 사람이 뉴튼이다. 다섯가지 세계가 있다. 그 첫 번째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 세계이다. 이때 모든 사물의 근원은 쪼갤 수 없는 입자 곧 알갱이이다. 뉴튼이 처음으로 크고 느린 세계를 탐구하였다. 곧 운동을 파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운동을 하는데는 반드시 시간이 걸린다. 시간이 탐구되면서 사물의 운행하는 순서 곧 우선순위가 논의되기 시작한다. 우선순위를 논의하면서 석가의 인과율로부터 발상이 시작된 추론규칙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비로소 근대과학이 열렸다.

《다섯가지 시간의 세계》

(양) 고대인의 움직이지 않는 세계 - 수학적, 기하학적 세계(시간개념이 없다)
(운동) 뉴튼의 크고 느린 세계 - 고전역학의 세계(처음으로 시간개념이 도입된다)
(힘) 아인시타인의 크고 빠른 세계 - 상대성이론의 세계(시간개념이 단계적으로 확장된다)
(입자) 작고 느린 세계 - 양자역학의 세계
(질) 작고 빠른 세계 - 양자장이론의 세계

※ 통일장이론 - 이 다섯가지 상황을 한꺼번에 설명하기 위한 가상의 이론

요는 이러한 전개에서 시간함수를 대입하는 정도이다. 시간을 배제한 논리에서 시간을 수용하는 정도를 점점 높여감에 따라, 더 정교한 이론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학문의 역사도 이와 같다.

근대인과 고대인을 가르는 기준

동서양을 막론하고 크게 두가지 세계관이 있다. 하나는 주류의 세계관이요 하나는 비주류의 세계관이다. 주류는 합리주의고 비주류는 상대주의 혹은 신비주의다. 현대에 와서 뉴튼의 기계, 결정론적 세계관에 아인시타인의 상대론이 딴지를 거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과연 어느 쪽이 옳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둘다 옳다. 아니 둘 다 틀렸다. 뉴튼이든 아인시타인이든 결국 시간개념을 대입시키고 있으며, 운동을 설명하고 있는 데서 공통된다. 문제는 뉴튼 이후 기계, 결정론적 세계관의 이론적 퇴행이다.

극단적인 기계론은 차라리 고대의 원자론과 가깝다. 곧 고대인의 『빛이 있으라』는 말씀의 자리를 뉴튼의 기계가 대체한 것이다. 처음 뉴튼이 기계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은 시간 상에서 작동하는 매커니즘 곧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뉴튼이 처음으로 마술사의 망토를 들춘 것이다. 그러나 뉴튼 이후 많은 사람들에게서 기계는 움직이지 않는 고정된 기계로 퇴행되었다. 즉 그들은 마술사의 망토 안에서 새로운 망토를 조작해낸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단선적 세계관이다.

마르크스의 단선적 세계관은 기계이되 시간개념, 곧 움직임이 배제된 죽은 기계이다. 그 기계는 고착되어 있어서 작동하지 않는다. 그 기계에는 시간 상에서 진행하는 매커니즘이 없다. 고대인의 원자론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뉴튼의 발상이 다시 고대의 원자론으로 퇴행하고 있다. 뉴튼을 잘못 해석하므로서 인류는 다시 『빛이 있으라』하는 말씀의 시대로 되돌아간 것이다.

뉴튼의 크고 느린 시간 다음에, 아인시타인의 작고 빠른 시간이, 양자론의 작고 느린 시간이, 양자장이론의 작고 빠른 시간이 이어지고 있다. 즉 과학이 발달할수록 더 정교한 공식이 요구되는데, 더 정밀한 시간개념을 대입해야 할 곳에 낡은 시간개념을 대입하므로서 고대인의 알갱이, 토생금 금생수 수생목 목생화 화생토 하는 음양오행설로 퇴행한 것이다.

정리하면 두가지 세계관이 있다. 요는 시간개념을 도입하고 있는가로 구분된다. 석가모니든 뉴튼이든 아인시타인이든 처음 새로운 이론이 도입될 때는 그 마술사의 망토를 벗기어 숨겨진 매커니즘을 노출하는 것이었다. 곧 시간개념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학들에 의해 더 작고 더 빠른 세계가 포착되자, 이번에는 그 노출된 매커니즘이 다시 더 높은 단계의 매커니즘을 감추는 망토 노릇을 하게 되었다. 기계가 알갱이 역할을 하고 추론규칙이 말씀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석가의 인연법만 해도 그렇다. 처음 인연법이 소개될 때 인과율은 이전에 없던 시간개념의 도입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요즘 불교도들이 생각하는 인연은 일종의 카스트이다. 즉 시간이 배제되고 공간요소로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많은 불교도들에 있어서 『인연이 있다』는 말은 『카스트를 얻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인연은 시간개념이므로 얻거나 잃을 수 없다. 즉 인연이라는 표현은 있다는 술어를 사용할 수 없다. 『인연하다』로 동사가 되어야 석가의 연기법과 일치한다.

이런 식으로 석가의 인연법도, 유교의 음양론도 처음 도입될 때는 일종의 추론규칙으로 시간적 우선순위를 논하기 위해 발상되었지만 그 후학들에 의해 그 시간적 의미는 탈생되고 공간적 관념만 남아있다. 같은 방식으로 마르크스는 뉴튼을 왜곡했고 마르크수주의자는 마르크스를 왜곡했다.

엄밀히 말하면 마르크스의 이론에도 변증법적인 시간개념이 숨어 있다. 말하자면 대단한 인식의 지평을 열어제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마르크스가 도입한 시간개념은 이해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마르크스 자신에 의해서도 이해되지 않았다. 오늘날 마르크스의 혁명이론은 화석화되어 고대인의 알갱이, 또는 말씀으로 퇴행하고 있다.

<주류의 세계관>
인과율-추론규칙-시간개념의 도입-과학적 세계관-합리주의

<비주류의 세계관>
원자론-말씀-시간개념의 배제-불가지론의 세계관-신비주의

학문의 역사는 주류의 세계관과 비주류의 세계관이 변증법적으로 대결해온 과정이다. 주류는 시간을 설명하는 새로운 발상법으므로서 인식의 지평을 열어제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그 세계관은 점점 화석화되어 그 후학들이 받아들이는데 있어서는 시간요소가 배제되고 공간 속에서 성립하는 하나의 알갱이나 기계로 퇴행하였다.

뉴튼적 세계관 곧 기계론, 결정론적 세계관은 고대인의 원자론적 세계관을 극복하기 위해 발상되었지만 곧 스스로 원자론으로 퇴행하였다. 뉴튼이 말씀이라는 망토를 걷어내자 기계라는 매커니즘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 기계로 설명할 수 없는 더 작고 더 빠른 세계가 포착되자 이번에는 그 기계가 더 작고 빠른 세계를 감추는 망토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 뉴튼의 망토를 벗긴 사람이 아인시타인이다. 이번에는 아인시타인의 상대론이 새로운 망토가 되었다. 그 망토를 걷어낸 사람이 하이젠베르그이다. 양자론 역시 하나의 망토였음이 양자장이론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양파껍질을 까면 새로운 양파껍질이 나온다. 마술사의 망토를 벗기면 매커니즘이 드러나지만 그 매커니즘이 새로운 망토가 된다. 과연 양파껍질은 끝없이 반복될 뿐인가? 그렇지 않다. 정답은 공간이 아닌 시간이다. 시간상에서 성립하는 추론규칙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대안의 세계관은 무엇인가?

요는 세계를 공간 속에서의 어떤 단단한 알갱이로 파악하는가 아니면 시간 속에서의 상호관계를 통하여 인식하는가이다. 알갱이는 곧 쪼갤 수 없는, 알 수 없는, 일방적으로 선언된, 죽어있는, 고착된 『말씀』의 세계이다.

반면 상호관계를 통한 인식은 반드시 시간 상에서 작동하는 매커니즘으로 존재한다. 곧 인과율의, 우선순위가 있는, 변화를 담보하는, 유기적인, 구조적인, 살아 움직이는, 부드러운, 포용력있는, 다원주의적인 세계이다.

문제는 처음에는 『알갱이』 또는 『말씀』 곧 『매커니즘을 숨기는 망토』에 대항하여 『상호관계』를 주장하기 위하여 제안된 개념일지라도 나중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의해 다시 『말씀』으로 퇴행해버린다는 사실이다.

노자의 『유가 강을 이긴다』는 말도 그러하다. 처음에는 유가의 단단한 세계를 반대하기 위하여 진일보한 새로운 세계관으로 주장되었다. 그러나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지 못하므로서 스스로 단단해졌다. 반면 유가는 성리학과 양명학으로 발전하면서 부드러워졌다. 모든 것이 이런 식이다.

기계는 일을 한다. 일을 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 상에서 무수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것이 본래 뉴튼의 이해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뉴튼의 기계론은 그 반대이다. 기계는 쇳덩어리로 만들어져 있으므로 단단하다. 단단하므로 고정된다.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바뀌어버렸다.

생명체도 하나의 기계이고 시스템이다. 그러나 생명체의 유기성과 기계의 무기성은 반대이다. 생명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계이다. 매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 진짜 기계는 결코 단단하지 않다.

이런 식으로 처음에는 『관계망』으로 제안된 개념들이 후세에는 『알갱이, 기계, 말씀』으로 받아들여져 퇴행하고 이에 대항하여 더 새로운 『관계망』에 대한 프로그램들이 선을 보이기를 변증법적으로 반복하는 과정이 곧 뉴튼과 아인시타인과 하이젠베르그와 양자장이론의 등장인 것이다.

도교철학에도 일부 유기적인, 움직이는, 시간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개념들이 다시 『말씀』 곧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어떤 알갱이로 퇴행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세계관에도 어느 면에서는 시간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문제는 기독교의 시간개념은 창세에서 말세까지 일직선으로 연결된 단선적인 시간이며 그 단선은 계속 압축되는 과정을 거쳐 하나의 알갱이가 되고 마침내 기계가 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불교의 순환적인 시간개념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기독교식의 단선적인 시간관을 극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안되었으나 그 순환 역시 돌고돌아 맨 처음으로 돌아가므로서 하나의 동그란 알갱이로 퇴행하고 말았다. 이런 식이다.

생물학적 세계관

우주는 하나의 생물이다. 존재도 하나의 생물이다. 역사도 하나의 생물이다. 생물(유기체)이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알갱이이면서 알갱이를 극복한 구조이고 구조를 극복한 시스템이다. 기계이면서 기계를 극복한 유기체이고 단단하면서 단단함을 극복한 부드러움이다.

아인시타인의 입장에서 보면 뉴튼의 고전역학은 단단한 세계이고 상대성은 부드러운 세계이다. 양자역학에서 보면 아인시타인이야 말로 단단한 세계이고 양자역학은 부드러운 세계이다. 양자장이론에서 보면 양자역학 역시 단단한 세계이다. 이런 식으로 세계는 조금씩 더 부드러워지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노자는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긴다』고 말했다. 그러나 후학들이 그 말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이 명제도 역시 단단한 고집이 되고 말았다. 언제나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요는 매커니즘의 이해이다. 생물학적 세계관은 그 매커니즘을 담보하는 기계가 단단한, 고착된 기계가 아니라 부드러운, 살아 움직이는 기계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기계는 일을 한다. 기계는 단단하지만 일은 하는 과정은 부드럽다. 인식의 지평을 하나씩 열어제침은 매커니즘 안에서 또다른 매커니즘을 발견해가는 과정이다. 세계는 조금씩 더 부드러워져 간다.

세상은 알갱이가 관계망이다. 관계는 구조이기도 하고, 기계이기도 하고, 매커니즘이기도 하고, 시스템이기도 하고, 패러다임이기도 하고, 유기체이기도 하다. 단단하기도 하고 부드럽기도 하다. 깨닫기는 관계를 깨닫기다. 유교에서 말하는 중용의 도는 관계에 대한 인식이다.

모든 관계는 둘이 하나를 공유하므로서 성립된다. 곧 구조는 둘을 포함한 하나이다. 하나일 때 단단하지만 그 내부에 둘을 포함함으로 부드럽다. 이때 관계가 결정하는 것은 우선순위다. 우선순위가 만드는 것은 기능과 정보이다.

구조는 생명체처럼 생산하고 번식한다. 그것이 미(美)로, 조화로, 아름다움으로, 체계로, 질서로, 모든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관계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팽팽한 긴장상태이다. 부드러움이 이긴다거나 단단함이 이긴다거나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그 긴장은 깨어지고, 그 평형은 깨어지고 그 관계는 소멸하고, 그 구조는 해체되고, 그 시스템은 붕괴하고, 그 기계는 고장나고, 그 유기체는 사망한다. 단단한 알갱이로 퇴행하고 만다.

생물 진화의 해답 초유기체서 찾는다

몸 속에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백혈구들이 몰려들어 바이러스를 퇴치한다. 문제는 백혈구들이 자신의 임무를 알고 의도적으로 바이러스를 공격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체의 항원항체반응에 의한 치료매커니즘은 순전히 우연에 의해 확률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외견상으로는 마치 정교한 기계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 처럼 보여진다.

꿀벌이 사는 집에 말벌 한 마리가 침입한다. 꿀벌들이 떼로 몰려나와서 말벌과 싸운다. 여기서 과연 꿀벌들이 자신의 임무와 목적을 알고 있을까? 천만에! 벌떼의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매커니즘은 실은 순전히 우연에 힘입은 것이다.

개미나 꿀벌무리가 활동하는 양상은 인체의 구조와 비슷하다. 백혈구나 적혈구도 꿀벌 한 마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하나의 세포이다. 외견상 정교한 기계가 맞물려 돌아가듯 유기적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실은 자신의 임무도 모르는 채 우연과 확률에 의해 역할을 분담한 결과를 낳는다.

개미나 꿀벌처럼 집단이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현상을 『초유기체』라 한다. 초 유기체의 작동비밀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그런데 생물의 진화과정도 이러한 초유기체의 작동원리와 같은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고 볼 수 있다.

태초에 원핵생물이 진행생물로 발전하다.

태초에 지구에는 산소가 많지 않았다. 우연히 바이러스가 발생했다. 바이러스는 분열할 뿐 생장하지 않는다. 숫자가 증가할 뿐 몸뚱이가 커지지 않는다. 이 시기의 바이러스는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존재이다.

대부분의 바이러스는 산에 약하다. 산소는 독성물질이므로 바이러스가 산소와 접촉하면 죽는다. 바이러스들이 이산화탄소를 소비하고 산소를 생산하자 지구에는 점점 산소가 많아져서 바이러스들이 살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때 최초로 산소를 좋아하는 호기성 바이러스가 생겨났다. 호기성 바이러스가 점점 증식하고 산소를 싫어하는 혐기성 바이러스는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이 상황에서 우연히 한 마리의 혐기성 바이러스가 호기성 바이러스 내부로 침투하여 둘이 공생하게 되었다.

바이러스는 증식하면 둘로 쪼개진다. 숫자가 늘어날 뿐 덩치가 커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생물이라기 보다는 무생물에 가깝다. 혐기성 바이러스가 호기성 바이러스 내부로 침투하여 공존하게 되므로서 최초의 유의미한 생명체가 탄생하였다.

세포의 숫자가 늘어나면서도 둘로 분리되지 않고 공존하며 서로 역할을 분담하는 유기체가 최초로 탄생한 것이다. 원핵생물에서 진핵생물로의 발전이다. 비로소 생장이 시작되었고 생명의 역사가 열렸다.

정자와 난자의 수정

정자와 난자도 하나의 독립적인 세포이다. 동물의 성관계에서 정자가 난자에 침투하는 과정은, 최초에 혐기성 바이러스가 호기성 바이러스 내부로 침투하는 과정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 때 정자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난자를 향해 돌진하는 것은 아니다.

정자는 산에 약하기 때문에 산도가 높은 질 안에서 대부분 죽는다. 산에 약한 정자가 죽지 않기 위해서 발작적으로 꼬리의 섬모를 움직인다. 섬모운동에 의해 사방으로 흩어진 수억마리의 정자 중 하나가 우연히 난자와 충돌한다.

정자는 순전히 살기 위해 난자 속으로 침투한다. 정자는 수정하기 위해 난자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산의 독성을 피해 그냥 꿈틀거리다가 수억마리의 정자 중 하나가 우연히 난자와 접촉하여 안전한 난자 속으로 몸을 숨기는 것이다.

생명체의 진화와 성장과정은 이러한 수정과정의 부단한 재현과 반복이다. 최초에 혐기성 바이러스 하나가 호기성 바이러스 내부로 침투하여 세포핵을 만들었다. 정자가 난자 속으로 침투하여 하나의 세포핵을 둘이 공유하는 과정에서 핵분열을 일으키므로서 생물의 생장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본질은 하나가 둘을 공유하는 과정이다. 개미나 꿀벌과 같은 초유기체의 역할분담과 정자와 난자의 수정과 같은 생명체의 생장은 그러한 공유에 의하여 일어난다. 둘이 하나를 공유하는 데서 얻어진 모순과 불합리에 대한 부단한 투쟁이 세포분열을 촉발하여 생명체를 생장시키는 것이다.

중요한건 우선순위다.

인체의 기관과 조직들이 작동하는 매커니즘도 초유기체의 역할분담과 같다. 정확한 목적을 가지고 특정한 기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멋대로 흘러다니다가 우연히 특정한 타켓과 마주치면 숨은 기능을 발현한다.

바이러스의 침입에 대항하여 항체가 생겨나는 과정이 그러하다. 항원이 특정 바이러스의 정보를 완벽하게 해독하여, 그 바이러스에 대한 준비된 항체를 대량생산하고, 상부의 지령에 따라 바이러스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그냥 여러 가지 단백질 효소들을 공중에 퍼트리면 그 중 우연히 하나의 효소가 그 바이러스에 격렬하게 반응하고, 그 반응정도가 높은 특정 효소를 대량생산하여 순전히 인해전술로 바이러스를 물리친다.

이러한 과정은 순전히 확률과 우연에 의해 진행되므로 정확도는 상상할 수 없는 정도로 낮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특정 바이러스에 대한 정보를 읽지 못하여 항체를 만들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대신 그 확률이 달성될 때 까지 효소의 물량을 대량공급 하므로서, 최종적인 성공확률은 극적으로 높아진다. 결국은 100프로 항체를 생산해내는 결과가 된다.

원자폭탄이 핵분열을 일으킬 때, 쪼개진 전자 알갱이 하나가 다른 원자의 핵에 충돌할 확률은 매우 낮다. 대신 맞을 때 까지 계속 진행하므로 언젠가는 우연히 하나가 원자핵에 충돌하게 된다. 전자의 진행속도는 매우 빠르므로 핵분열이 극적으로 확대되어 결국은 모든 원자핵이 폭발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감속장치를 두어서 그 전자의 이동속도를 늦추는 방법으로 명중확률을 떨어뜨리면 핵분열을 인공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 이것이 핵발전소의 원리다.

인체의 항원항체반응도 이와 같다. 하나의 효소가 우연히 바이러스의 정보를 읽어낼 확률은 매우 낮지만, 극도로 많은 숫자로 물량공세를 전개한 결과 그 중 하나가 우연히 정보를 읽어낼 최종적인 확률은 목표인 100에 도달하게 된다.

우주공간에 로켓을 발사하되, 아무 방향으로나 마구 발사한다. 천문학적으로 많은 숫자의 로켓을 발사하면 그 중 하나가 우연히 목표하는 목성에 도달하게 된다. 인체는 이런 원시적인 방법으로 목성에 도착하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첨단문명의 이기인 인터넷의 원리도 이와 같다는 점이다. 종래의 유선전화는 처음부터 자신이 가야할 사전에 지정된 경로를 정확하게 알고 찾아간다. 그러나 인터넷은 경로가 사전에 정해져 있지 않다.

하나의 컴퓨터가 패켓에 DNS 정보를 담아 바다처럼 넓은 네트워크 우주에 날려보내면 무수하게 많은 라우터들를 거쳐 DNS서버가 알려주는 최종목표를 찾아가서 정확하게 정보를 전달한다. 이 과정은 순전히 우연과 확률에 의지하지만 정보는 빛과 같은 속도로 날아가기 때문에 결국은 목표한 주소를 찾아내고 만다.

생명체의 작동방식은 대개 이러한 무진장의 물량공세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꿀벌이나 개미들의 군집도 이와 같은 원리로 작동된다. 한 마리 개미가 적군의 병정개미들로부터 개미집을 지키려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연히 한 마리가 적 병정개미를 발견하면 극도로 흥분하여 페로몬을 생산하게 된다.

공기 중에 뿌려진 개미의 페로몬을 느낀 개미들은 모두 페로몬에 감염되어 공격신호를 보내는 페로몬을 마구 뿌린다. 결국은 집단 전체가 페로몬에 감염되어 공격에 나서게 된다. 이때 개미들은 자신이 무엇을 왜 공격하는지 모른다.

북극에 사는 나그네쥐 레밍의 집단자살도 이와 같은 원리로 일어난다. 레밍들은 먹이가 부족해지면 정기적으로 주거지를 옮기는데 비탈을 내려가기도 하고 강을 건너기도 한다. 이때 바다를 강으로 잘못 알고 건너다가 집단적으로 익사하기도 한다. 또는 절벽을 비탈로 잘못알고 내려가다가 집단으로 추락사한다. 이는 자살이 아니라 사고다. 실은 쥐들에게 자살할 의사는 조금도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이 단계적으로 진행된다는 사실에 있다. 즉 우선순위가 정해져 있어서 1단계의 작동이 완료되면, 곧이어 2단계가 뒤따르는 식으로, 한 단계식 진행되며 이 과정은 순전히 우연이다. 그 우연을 만드는 본질은 서로 다른 둘 이상이 어떤 하나를 공유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네트워크의 원리다.

인터넷상의 정보가 라우터들 사이에서 길을 찾아가는 것도 처음부터 전 경로를 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턱대고 일단 가본다. 1단계, 2단계, 3단계의 단계적인 궤도수정을 통하여 최종목적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게놈 유전자지도의 충격

게놈유전자지도가 밝혀져 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10만개 정도로 예상된 유전자의 숫자가 알고보니 2만여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숫자가 초파리나 바퀴벌레와 비교해서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이다.

더욱 큰 충격은 그 2만개의 유전자 중 상당수가 가진 역할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즉 대부분의 유전자는 아무 역할이 없이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컴퓨터의 하드디스크 공간이 10기가라도 실제로 사용되는 부분은 1기가에 불과하듯이, 대부분의 유전자들은 뚜렷한 역할이 없이 그냥 존재한다.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들 유전자들 중 일부는 바이러스 등 하등생물의 유전자에서 우연히 끼어든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알고보니 유전자지도는 정교한 기계가 아니라 제멋대로 널부러진 난장판이었던 것이다. 넓은 광장 곳곳에 사람들이 제멋대로 몰려서 있거나 혹은 흩어져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도 겉보기로는 마치 사전에 완벽하게 설계된 기계처럼 유기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은 그 제멋대로 흩어진 광장의 군중들에게 명령을 보내는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매커니즘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개미들 중의 30프로는 자신의 임무를 모르고 그냥 놀고 있다. 어떤 과학자가 그 개미들 집단 속에서 아무런 역할 없이 노는 개미들만 따로 모아 군집을 만들어 놓았더니 그 노는 개미들 중 70퍼센트는 일하고 30퍼센트는 여전히 놀고 있었다. 그 30퍼센트만 모아 100을 만들어 놓아도 그 중 30퍼센트는 여전히 놀고 있다. 이는 개미들의 행동을 우연과 확률이 결정함을 의미한다.

초유기체의 집단지능

개미나 벌떼와 같은 초유기체에는 『집단 지능』이라는 현상이 나타난다. 개미들의 무질서한 행동이 외부적으로는 마치 지능을 가진 누군가에게 지휘되는 것처럼 보여지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사회의 질서나 지구촌 세계의 질서도 이와 같다는 사실이다.

민주국가에서 사회정의와 질서가 유지되는 이유는 사전에 잘 설계되고 짜여진 각본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 아니라, 실은 개인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최대의 이익을 따라 효율적으로 행동하면 저절로 질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주식시장에서 이러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개미주주들 개개인은 각자 자신의 이익을 쫓을 뿐이지만, 시장 전체로 보면 최고의 효율을 쫓아 최적화되는 결과가 된다. 이때 투자자의 숫자가 많을수록 그리고 시장이 개방될수록 집단지능은 높아진다.

대통령선거에서 나타나는 유권자들의 행동패턴도 이와 같다. 노무현당선자의 승리과정은 마치 잘 짜여진 하나의 각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연과 우연이 겹쳐서 기가 막히게 들어맞은 것이다. 그러나 우연처럼 보이지만 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 하나하나의 사건들이 일어난 이유는 순전히 확률에 의한 것이며 그 확률은 매우 낮다. 예컨대 김민석이 탈당할 확률, 정몽준씨가 지지를 철회할 확률, 노사모가 결성될 확률, 돼지저금통을 모을 확률, 광주의 기적이 일어날 확률 등 하나하나의 확률은 매우 낮다.

그러나 확률이 낮은 대신 경우의 수가 매우 많다. 즉 기적이 일어날 때 까지 무수한 시도가 반복되므로, 결과적으로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되는 것이다. 브라질의 호나우두가 골을 성공시킬 확률은 매우 낮지만, 90분이라는 경기시간 동안 슈팅시도는 무수히 많으므로 결과적으로 호나우두의 득점과 브라질의 승리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된다.

마찬가지로 노무현진영에서 일어난 사건들 하나하나는 확률이 낮지만, 열광적 지지자들에 의한 무수한 시도들이 조금씩 확률을 높여서, 최종적으로는 극적인 드라마가 만들어진다. 노사모 회원 한사람 한사람이 낸 아이디어가, 유권자에게 먹힐 확률은 매우 낮으나, 노사모 회원 숫자가 매우 많으므로, 그 누적된 확률은 극적으로 높아지는 것이다.

노무현진영이 이회창진영에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노무현진영의 집단지능이 이회창진영의 집단지능보다 높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노무현지지자들의 아이큐 총합과 이회창지지자들의 아이큐 총합의 비교에서 노무현지지자들의 아이큐합계가 더 높았던 것이 승리의 이유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전에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필자가 수년 전부터 노무현의 승리를 예측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러한 원리를 적용하였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목표로 하는 주소를 우연히 찾아낼 확률은 낮지만, 찾아질 때 까지 반복하여 시도하므로 결국 찾아내고 말 듯이, 계란으로 바위를 쳐서 바위를 깨뜨릴 수 없지만, 안되면 될 때까지 수억번을 내리치므로 결국은 바위가 깨지고 마는 것이다.

원자론과 오행론

2600년전 희랍의 자연철학자 탈레스가 물 1원소설을 주장한 후 서양에서는 불, 공기, 흙, 물의 4원소설이 주장되었고 동양에서는 화, 수, 목, 금, 토의 오행설이 유행하였다. 즉 사물의 생성소멸이 그 원자 알갱이에 내재한 속성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생각이다.

현재의 원자론, 소립자론도 이 발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틀렸다. 생물의 집단지능과 초유기체현상이 증명하는 바 그 개체 내부에 내재하는 속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동일한 여러마리의 꿀벌들이 어떻게 서로간의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2차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 원자설과 오행설 : 화,수,목,금,토 5원소가 각기 고유한 역할을 가진다. 》 병정개미와 일개미가 각기 고유한 자기의 역할을 가진다.

● 초유기체와 집단지능 : 동일한 개체 상호간의 관계맺기에 따라 우선순위가 결정되며 우선순위에 의한 단계적 대응에 의해 결과적으로 조직이나 기계처럼 유기적으로 연출된다》 병정개미나 일개미는 자신의 역할을 모르고 있지만 역할을 분담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인간에게 있어 인식의 지평은 단계적으로 넓혀져 왔다. 세상을 알갱이로 보는 고대인의 움직이지 않는 세계에서 뉴튼의 크고 느린 세계 그리고 아인시타인의 크고 빠른 세계, 양자역학의 작고 느린 세계, 양자장이론의 작고 빠른 세계로 발전하면서 고착된 알갱이에서 움직이는 기계로, 단단한 기계에서 부드러운 생명체로, 세상은 점점 더 부드러워져 온 것이다.

이러한 물리학의 발전은 단계적 대응을 의미하며 단계적 대응의 본질은 시간적 순서를 결정하는 정도와 비례한다. 즉 양에서 운동으로, 운동에서 힘으로, 힘에서 입자로, 입자에서 질(장)로 단계적으로 행동패턴을 결정하는 원리가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물리학자들은 특정 소립자 안에 어떤 비밀이 있다고 믿고 있다. 이는 어떤 개미나 벌꿀이나 혹은 백혈구가 자신의 고유한 임무를 알고있다는 주장과 같다. 음양오행설에서 토는 토의 성질을, 화는 화의 성질을 가지듯이 소립자들에 고유한 임무가 내재해 있다는 것이 원자론의 발상법이다. 틀렸다.

세계관을 바꾸고 발상법을 바꾸어야 한다. 인식의 지평을 열어제쳐야 한다. 컴퓨터가 아무 내용이 없는 0과 1로 정보를 조직하듯이, 소립자 안에 정보가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소립자들의 상호관계 속에서 2차적으로 정보가 조직되며, 이 정보를 결정하는 것은 시간적 순서로 결정되는 우선순위의 법칙이다.

세상은 알갱이가 아니라 정보로 조직되어있다. 정보를 생산하는 것은 시간이다. 시간이 정보를 조직하는 매커니즘이 『우선순위 결정의 원리』이다. 우주의 비밀은 이 안에 있다.

알갱이냐 아니면 관계망이냐

사물의 본성이 꿀벌 한 마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꿀벌과 꿀벌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의 원리도 이와 같다. 1바이트의 전기신호 안에 메시지가 숨어있는 것은 아니다. 무의미한 0과 1이 어떻게 조직되는가에 따라 2차적으로 기능을 획득하게 된다.

유교의 최고이론서는 주역이다. 주역은 점(占) 치는 책에 불과하다. 점은 거짓말이다. 그러므로 주역은 가짜다. 그렇다면 지난 2500년간 유림들이 세 살먹은 애도 속아넘어가지 않을 그 가짜에 집착해온 이유는 무엇일까?

문제는 주역의 내용이 아니라 그 밑바탕에서의 철학이다. 주역의 성공한 부분이 아니라 주역의 실패한 부분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그 가리켜지는 달 말이다. 주역이 뽑아낸 점괘가 가리키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주역이 가리키고자 하였으나 실패한 그 무엇이다. 주역의 핵심인 중용의 개념이 바로 거기에 있다.

세상 돌아가는 원리도 이와 같다. 한 마리의 꿀벌은 원자이다. 그 원자 알갱이에 내재한 속성이 아니라 그 원자들의 외연한 관계에서, 그 구조에서, 시스템에서, 그 패러다임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국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인류가 망하지 않고 문명을 일구어온 이면에는 집단지능이라는 비밀이 존재한다. 그 비밀을 구조론이 제시한다. 구조론은 그 집단지능과 초유기체의 작동원리인 『서로 다른 둘이 특정한 하나를 공유하는 상태에서 우선순위 지정의 원리』이다.

인터넷시대의 의미는 극한의 원리에 있다.

극한테스트라는 것이 있다. 예컨대 어느 엉터리 발명가가 무한동력장치를 발명해서 특허청에 발명특허의 등록을 요구해 온다면 특허청은 심사를 해보지도 않고, 그 발명이 엉터리이므로 발명특허를 내주지 않는다고 알려준다.

문제는 발명가들이 순순히 납득하고 물러나지 않는다는데 있다. 요즘도 일년에 약 40여건의 무한동력장치 발명특허신청이 줄을 잇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천재들이다. 머리 나쁜 사람이 무한동력장치를 발명할 수는 없으니까. 그 천재들 중의 한 사람이 특허청을 고발하여 소송을 낸 일도 있다한다.

자신의 발명품은 무한동력장치가 틀림없는데 왜 특허를 내주지 않느냐는 거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사람을 어떤 방법으로 퇴치할 수 있을까? 그 머리좋은 천재들로 하여금 열정을 낭비하지 않게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때 그 발명이 엉터리라는 것을 쉽게 증명하는 방법은 극한테스트이다. 예컨대 만약 그 발명품이 열개의 톱니바퀴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 톱니바퀴의 숫자를 하나로 줄이는 것이다. 톱니바퀴의 숫자가 반드시 10개일 이유는 없다.

이때 최소화와 최대화 양쪽으로 테스트를 할 수 있다. 보통 특정한 숫자로 이루어진 것을 최소화시키거나 최대화시켜보면 그것이 가짜임이 저절로 드러난다. 구조의 원리도 이와 같다. 중복의 배제이다. 단순화시켜보면 저절로 분명해진다.

인터넷 신문명시대의 의미는 극한개념의 적용에 있다. 그 극한은 자원의 극한이다. 인터넷시대 이전의 모든 시스템에는 결정적으로 빠져 있던 하나를 인터넷이 찾아주었다. 그것이 자원의 무제한적인 공급이다.

요는 닫힌 계인데 계는 하나의 동그라미다. 민족이나 국가나 사회나 그 어떤 것이나 간에 집단이 움직일 때는 무리지어 이동하기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병목을 만나게 되는데 이때 몇명 단위로 이동할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예컨대 100만명의 집단이 길을 가다가 강을 만나게 되었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1. 100만 명이 한꺼번에 탈 수 있는 거대한 배가 만들어질 때 까지 기다린다.
2. 각자 자기 배를 타고 건너갈 넘은 우선 건너가게 한다.

이런 문제가 제기된다. 인터넷의 의미는 그 배를 한 사람의 설계도에 따라 획일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100만명이 각자 알아서 배를 만들되 100명이든 1000명이든 각자가 알아서 하도록 다양한 팀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때 동원되는 팀의 숫자는 무제한이다.

자 어느 쪽이 효율적일까? 100만명이 힘을 합쳐 단 하나의 배를 만드는 경우와 각자 알아서 적당히 배를 만들되 협력할 사람은 협력하고 그냥 혼자갈 사람은 혼자가고 제멋대로 할 경우이다. 언뜻 보면 100만명이 힘을 합쳐서 거대한 하나의 배를 만드는 것이 더 효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비효율적이다.

왜? 단 한 사람이라도 먼저 강을 건너야만 먼저 강을 건넌 사람이 강 저쪽에서 이쪽으로 다리를 만들어 올 수 있는 것이다. 양쪽에서 다리를 연결하면 훨씬 더 빨리 100만명이 건널 수 있다. 즉 비효율적으로 가는 것이 알고보니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원리는 증권시장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증권시장은 투기와 협잡 등으로 얼룩져 있지만 사실은 이렇게 투기와 협잡이 있어야만 예방주사가 되어서 더 강해진다. 어떤 천재나 슈퍼컴퓨터가 계산하여 단 하나의 정답을 찾아내는 것 보다는, 여러 벤처에 분산투자해서 확률적으로 성공하는 하나를 건지고, 그 하나가 전체를 먹여 살리는 것이 더 빠르게 답을 찾는 것이 길이다. 왜?

이것이 왜 이렇게 되는가 하면 자원의 여유 때문이다. 즉 자원이 한정되어 있을 때는 그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쪽이 승리하지만, 자원이 무제한일 때는 더 낭비적인 쪽이 결과적으로 더 효율적으로 된다.

만약 여러분에게 무제한으로 많은 자본이 있다고 치자. 단 하나의 회사에 그 무제한으로 많은 자본을 투자할 것인가 아니면 무제한으로 많은 회사를 설립할 것인가이다. 어차피 자본이 무제한이면 회사의 숫자도 무제한으로 많이 설립하는 것이 낫다.

무론 대부분의 회사는 망하겠지만 그 무제한으로 많은 회사 중 단 하나라도 살아남으면 그 살아남은 하나의 회사가 나머지 망한 회사의 종업원 전부를 먹여살린다. 왜? 무제한이기 때문이다. 그 살아남은 하나의 회사가 벌어들이는 수익 또한 무제한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인터넷의 원리다. 경우의 수를 무제한으로 확대하여 무제한의 경쟁을 벌이고 살아남는 하나가 무제한적으로 많은 시장을 독점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제한도 없다. 문제는 우주와 생명의 원리가 역시 이와 같다는 것이다.

예컨대 세균이 몸 속에 침투해 왔을 때 인체는 어떻게 대응하는가? 면역시스템이 바이러스의 정보를 해독하여 적절한 대책을 세워서 바이러스를 파괴하는 식으로 구조적이고 효율적인 방위시스템을 갖춘 것이 아니라 사실은 정반대이다.

인체는 효율적인 기계가 아니다. 생명은 극도로 낭비적인 조직이다. 문제는 그 낭비가 최종적으로는 더 효율적이더라는 것이다. 유기체와 기계의 본질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생명체의 세계관으로 바꾸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체는 바이러스가 발견되면 일단 무제한의 효소를 투입한다. 극한테스트와 같은 원리다. 인해전술과 같은 물량작전이다. 그러면 우연히 특정 효소 하나가 그 바이러스에 반응한다. 이건 순전히 확률이다. 운이 나쁘면 그 특정 효소가 발견이 안될 수도 있다. 건강하지 못한 환자가 바이러스에 약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인체는 우연히 바이러스에 반응하는 하나의 효소를 특정하여 이를 무제한으로 복제한다. 효소를 무제한으로 생산하여 무제한으로 투입한다. 이렇게 우연과 확률이 무제한의 지원을 받아 사전에 완벽하게 설계된 구조를 이기는 것이다.

언뜻 보면 이는 매우 낭비적으로 보여진다. 한 명의 적군을 제거하기 위하여 1억명의 병사를 투입하는 식이다. 그러나 생명체에서 그 병사의 수는 무제한이고 그 병사가 이동하는 속도 또한 무제한이기 때문에 가장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이 방식이 가장 높은 효율성을 획득한다.

여기서 극한 개념이 중요하다. 우주의 기본원리가 알고보면 이 극한의 원리이다. 즉 완벽한 대책, 완벽한 설계, 완벽한 구조가 아니라 반대로 무제한의 물량공급, 무제한의 빠른 검색, 무제한의 빠른 속도, 무제한의 반복실험, 이렇게 무제한의 물량 퍼붓기로 승리하는 것이다. 그런데 외적으로는 아주 완벽하게 설계된 기계처럼 보여진다.

인터넷이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무제한이다. 극한이다. 이것은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다. 지금까지 인간의 사고를 규율한 기본적인 개념은,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공급하느냐였다. 그러나 우주와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무제한적인 자원공급의 전제하에 만들어져 있다.

예컨대 인류가 마침내 무공해의 핵융합장치를 개발해서, 무제한의 자원을 확보하고, 우주에 기지를 건설하여 무제한의 영토를 획득하고, 무제한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무제한으로 인구가 많다면 이 세상의 모습이 어떻게 변할까? 인터넷처럼 된다.

인터넷은 바로 그러한 가상사회인 것이다. 모든 것이 무제한이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인터넷 이용자 숫자는 한정되어 있고, 인터넷으로의 정보이동도 분명히 일정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이와 가까운 모델임은 분명하다.

필요한 것은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다. 어떤 발상을 하든 인터넷시대에는 기본적으로 무제한의 속도, 무제한의 물량공급이라는 전제를 깔고 들어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앞으로는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사회도 이렇게 간다. 정보의 무한정한 공유, 무제한의 물량 퍼붓기, 우연과 확률, 특정한 하나의 무한복제시스템, 대량공급의 시대이다. 인터넷신문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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