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2002년 8월에 개봉한 이창동감독의 영화 『오아시스』는 장애자 처녀와 전과자 청년의 사랑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신인배우상을 수상한 명작이다. 평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드물게는 감독의 주제의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과연 이창동의 오아시스는 『소수자의 입장에서 본 바른 시선』을 가지고 있는가?

약자를 돕고자 하는 선한 의도에서 한 행동이 결과적으로 약자에게 모욕을 가한 셈이 되는 수가 있다.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한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역설이다. 특정한 범위 안에서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만, 범위를 넓혀 돌아가는 판 전체를 보면 오히려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오아시스는 사랑에 관한 영화이다. 행여 사랑이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에 집착한 나머지 『소수자의 정의』라는 작은 이데올로기를 압살해 버리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는가 하는 점에서 오아시스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이 영화를 거론하는 이유는 『정치적 올바름의 관점』을 목적으로 제작된 영화이기 때문이다. 왜 낮은 계급의 신데렐라는 항상 높은 계급의 왕자에 의해서만 구원되는가 하는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 제작된 것이다.

왜 백설공주는 난장이들이 아니라 왕자에 의해서만 구원되는가? 왜 천한 계급 출신의 춘향은 양반계급 출신의 이몽룡에 의해서만 구원되는가? 왜 항상 위가 아래를 구원하는가? 왜 방자는 춘향을 구원할 수 없는가 하는 물음에 도전하기 위해 이 영화는 만들어졌다.

이와 유사한 설정으로는 디즈니에 반기를 든 드림웍스의 슈렉을 예로 들 수 있다. 슈렉은 디즈니가 즐겨 다루는 백설공주식 설정을 정면으로 뒤집고 있다. 슈렉에서 카메론 디아즈가 연기한 피오나공주는 왕자의 키스를 받고도 공주로 돌아가지 않을 뿐 아니라 왕자이어야 할 파쿼드영주를 버리고 늪지대의 초록괴물로 남는다.

슈렉은 종두이고 피오나공주는 공주이다. 슈렉과 피오나가 끝내 왕자와 공주가 되지 않듯이 종두는 감옥에 갖히고 공주는 혼자 남겨진다. 『귀여운 여인』에서 창녀 줄리아로버츠가 왕자 리차드기어의 키스를 받고 공주가 되는 것과는 다른 설정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아시스는 『정치적 올바름의 관점』으로 보아도 일정부분 성과를 얻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최고단계의 인식은 아니다. 오아시스의 한계는 다수자의 동정과 연민을 불러 일으켰을 뿐 소수자와 다수자 사이에서 적절한 대립각을 세우지 못했다. 소수자의 정의는 다수에 편입하거나, 다수자를 위주로 하는 사회질서에 적응하거나, 다수자와 공존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절히 분리하여 다수자와 대립하며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다수자와 전선을 형성하는데서 얻어지는 법이다.

소수자에게는 소수자의 위신이 있다. 소수자의 위신은 다수그룹으로부터 인정받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소수자그룹 안에서 자가발전으로 얻어진다. 다수자가 소수자를 포용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소수자는 다수자그룹에 종속될 뿐이다.

소수자의 꿈은 소수자 집단 안에서 최고가 되는 것이어야 한다. 거지의 꿈은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거지집단의 우두머리거지가 되는 것이어야 한다. 노숙자의 꿈은 노숙자생활을 벗어나 건전한 생활인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노숙자 세계에서 최고의 평판을 받는 알아주는 노숙자가 되는 것이어야 한다.

조폭의 꿈은 한밑천 벌어서 조폭생활을 청산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조폭세계에서 이름난 전국구조폭이 되는데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소수자의 정의는 다수자그룹에 인정받고 다수자집단에 편입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수자와 적절히 대립함으로서 대등해지는 데서 얻어진다.

『흑인도 인간이다』 하여 흑인이 백인으로 부터 동종의 인간임을 인정받는다 해서 흑인의 정의가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오산이다. 소수자는 같은 소수자끼리 연대하는 방법으로 소수자그룹 내부에서 스스로 질서를 형성하고, 그 질서를 토대로 하여 대외적인 신뢰를 창출하여야 한다.

소수자가 그 내부에 질서를 형성할 때 힘과 권위을 얻는다. 이때 소수자는 다수자에 의해 포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얻은 권위와 힘을 바탕으로 오히려 다수자와 적절히 대립하므로서 대등한 위치에 올라설 수 있다.

그렇다면 소수자인 문소리와 설경구는 사랑을 통하여 다수자인 사회로부터 그들도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임을 인정받으려 애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와 적절히 대립하는 방법으로 소수자그룹 내부에 질서와 권위와 힘을 창출하여야 한다.

이창동은 사랑이라는 미명아래 다수자와 소수자 사이에 형성된 그 전선을 무너뜨리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는가? 이창동감독은 결과적으로 장애자와 전과자의 위신을 깎아내린 셈이 되지는 않았는가? 다수자의 이해를 구하는 형태로 다수자그룹에 받아들여지기를 간청하고 애원한 셈이 되지 않았는가?

오아시스는 보이는 부분을 보았을 뿐 그 이면을 헤집지는 못했다. 동정과 연민을 이끌어내었을 뿐 대립각을 세우고 긴장된 전선을 형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종두는 교도소에, 공주는 아파트에 갇혀버렸다. 적절한 방법으로 사회와 격리되었다. 관객들은 자신의 영역이 침해되지 않은 사실에 안도하고 돌아갔다. 옳은가?

다수자에 속하는 관객들은 최종적으로 그들을 격리, 고립하는 대신 동정과 연민을 베풀었다. 그들도 인간임을 인정해주었다. 그들을 포용하여 주었다. 거래는 적절하였다. 충분한가? 이것으로 만족해도 좋은가?

참된 사랑은 긴장의 이완이 아니라 오히려 극적인 긴장상태의 유지이어야 한다. 비유하면 사랑은 운전이다. 운전자는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종두와 공주는 눈을 부릅뜨고 대립하고 긴장하며 깨어있어야 한다. 세상과의 칼날같은 전선을 형성하고 전선을 지키는 초병처럼 최고도의 긴장상태를 유지하여야 한다.

능히 깨어있을 수 있는가이다. 지구로 귀환하는 우주왕복선의 선장처럼 깨어있어야 한다. 만약 부부사이에, 연인사이에, 다수자와 소수자 사이에 긴장이 사라지고, 대립이 사라지고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식은 것이다. 사회가 죽은 것이다.

최고단계의 인식 무상정등정각은 있다. 바늘귀만한 틈으로 지구궤도로 재진입한다는 우주왕복선의 귀환처럼 두 눈 부릅뜨고 있다. 왼쪽날개에 파편을 맞고도 흐트러진 궤도를 수습하여 돌아오게 하는 진짜는 있다.

그것이 공자가 이미 가리킨 곳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공자가 미처 가리키지 못한 곳까지 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석가가 이미 말한 것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석가가 미처 말하지 못한 것까지 알아채는 것이다. 그것은 노자가 기록하여 전달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노자가 언어로는 차마 말하지 못하여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던 그것까지 받아들이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른 시선이다. 최고단계의 인식이다. 돌아가는 판 전체를 보는 것이다. 나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숲을 보는 것이며, 손가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달을 보는 것이다. 보이는 부분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이면까지 꿰뚫어보는 것이다.

무상정등정각을 위하여

깨닫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이면을 꿰뚫어본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보이지 않는 이면의 세계는 과연 실재하는가 하는 물음이 먼저 던져져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존재한다. 깨달음에 관한 모든 논의는 그 이면의 세계, 나무가 아닌 숲의 세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가리켜지는 달의 세계가 실재한다는 전제하에 출발한다.

북극해의 물 위에 떠 다니는 빙산의 수면 위로 보이는 부분은 전체의 10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0.083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다. 나머지 0.917은 바닷물 속에 숨어 있다. 이 때문에 지나가는 배들이 거대한 빙산을 작은 빙산으로 착각하여 그 옆을 지나다가 충돌하여 좌초하곤 했던 것이다.

『손가락이 아니라 달』, 『결과가 아니라 원인』, 『나무가 아니라 숲』, 『효과가 아니라 요소』, 『수면 위의 0.083이 아니라 수면 하의 잠복한 0.917』, 현상이 아니라 본질의 세계가 떠억하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두가지 세계가 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이다. 깨닫는다는 것은 그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아내는데 성공한다는 것이다. 요는 사고의 틀을 규정하는 기본적인 세계관이다. 보이는 부분만을 보는 그 협량한 사고의 틀을 깨부셔야 한다.

두가지 세계관이 있다. 하나는 보이는 부분만을 보는 사고의 틀이요.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보는 사고의 틀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기본적인 원리가 무엇이냐이다. 보이는 부분만을 보는 사고의 틀은 세상을 규정하는 기본적인 원리가 어떤 고착되고 단단한 알갱이들의 집합이라는 생각이다.

반면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보는 사고의 틀은 세상을 규정하는 기본적인 원리가 어떤 단단하고 고착된 알갱이가 아니라, 일정한 형태가 없이 가변적이고 추상적인 관계망이라는 인식이다. 어느 쪽이 옳은가? 물론 후자가 옳다.

깨닫는다는 것은 보이는 부분만을 보는 앞의 세계관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보는 뒤의 세계관을 취한다는 의미다. 우주는 단단한 알갱이들의 집합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일정한 형태가 없이 가변적이고 추상적인 관계망으로 되어 있다.

만약 세상이 단단한 알갱이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 이면을 들여다 보려고 노력할 필요조차 없다. 손가락이 아니라 달, 나무가 아니라 숲, 0.083이 아니라 0.917, 결과가 아니라 원인, 효과가 아니라 요소, 현상이 아니라 본질을 보기 위해서 노력하는 이유는 세계가 추상적인 관계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깨달아야 한다.

세계관이 없는 사람은 없다

마르크스는 『종교는 아편이다』고 선언하고 있지만, 그 발상법은 하나부터 열까지 기독교의 단선적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다. 곧 헤브라이즘의 세계관이다. 마르크스의 혁명이론은 창세에서 시작하여 말세로 끝나는 즉 시작과 끝이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단선적 논리틀을 가지고 있다. 마르크스는 은연중에 기독교의 논리틀을 빌어 쓰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원시사회주의는 창세에 해당된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이후 세상의 타락은 자본주의의 타락상과 같다. 노아의 방주 사건은 마르크스의 혁명과 같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유토피아론은 기독교의 심판 및 구원과 같은 개념이다.

자궁이 없이 태어날 수 있는 아기는 없다. 아들이 아버지를 부인할 수 없듯, 아무리 부인해도 결코 부정되지 않는 것이 있다. 기독교문화권에서 성장한 서구인들 중 기독교세계관의 영향 아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마찬가지로 한국인들은 석가와 공자의 영향권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세계관은 인간이 이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사고의 틀이다. 문제는 세상에 세계관이 없는 사람은 없으며, 아무런 세계관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나름대로 유치한 형태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그 저급한 세계관이 그 인간의 사고범위를 전적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세계관은 기독교의 세계관에서 빌어온 바 되며 기독교의 세계관은 예의 고착된 알맹이의 세계관과 통하고 있다. 숲을 부정하고 나무를 긍정하는 세계관, 수면하의 0.917을 부정하고 눈에 보이는 0.083만을 고집하는 세계관, 달을 부인하고 손가락만을 고집하는 세계관과 통하고 있다.

과학적, 합리적 사고는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훈련을 쌓아야 얻어진다. 문제는 마르크스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그 과학적, 합리적 사고라는 것도 알고보면 하나의 미신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언뜻 보면 합리적인 세계관처럼 보이지만 한꺼풀 벗겨보면 예의 알갱이의 세계에 파묻혀 있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세계관의 문제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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