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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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2689 vote 0 2008.12.30 (10:27:01)

구조론의 전개

 

양질전화와 비가역성

구조론의 가장 극적인 부분은 열역학 제 2법칙의 비가역성에 관한 것이다. 이 부분을 해명하는 데서 구조론을 통째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양질전화설이야 말로 봉건적 신념에 따른 비과학적 발상의 전형적인 예가 된다. 이건 거대한 착각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자연에서 양질전화는 없다. 그러나 양질전화 현상은 있다. 양질전화가 일어났다고 착각될 수 있는 현상이 있는 것이다.

구조론으로 보면 존재는 질의 자루에 양의 내용물이 담긴 것이다. 양이 가득차 질의 자루가 찢어질 때 그 모습이 질적인 비약처럼 보여질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양질전화가 아니다. 양 그 자체는 계속 양으로 남아있다. 질의 비약처럼 보이는 현상은 심층구조에서 상위 단계의 질서가 작동한 결과다.

구조는 중첩된다. 그것이 심층구조다. 높은 단위의 질서와 낮은 단위의 질서가 있다. 낮은 단계의 질서에서 질이 높은 단계의 질서에서는 양이다.

질과 양의 개념은 상대적이다. 그 판단기준은 일이다. 그 일을 진행하는 평형계가 있다. 어떤 존재가 분자 단위에서 양이면서 원자 단위에서 질일 수 있다.

높은 단계의 질서가 움직여서 낮은 단계의 질서가 갖는 모순을 해소했을 때 낮은 단계에서 질의 비약이 일어난 것과 같은 착시효과가 있다.

존재는 심층구조를 이루고 있다. 하나의 질서는 하나의 평형계를 이루고 하나의 일을 한다. 그 일을 기준으로 질과 양이 판단된다.

● 질 - 들뜬 상태
● 양 - 바닥 상태

우주는 무수한 평형계들의 중첩으로 이루어져 있다. 낮은 단위의 평형계에서 들뜬상태(질)가 높은 단위의 평형계에서는 바닥상태(양)가 된다.

 

열역학 제 1 제 2 법칙

열역학 제 1법칙은 양질전화가 일어난다는 착각을 준다. 그러나 열역학 제 2법칙의 비가역성은 양질전화가 절대로 일어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질량보존의 법칙에 따라 물질이 에너지 형태를 변화시키더라도 총량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자연에서 에너지의 형태는 언제나 한 방향으로만 변화한다.

● 비가역성 - 자연에서 에너지 형태는 한 방향으로만 변화한다.
● 심층구조 - 높은 단위에서 바닥상태가 낮은 단위에서 들뜬 상태다.

에너지의 형태 변화는 질이 해체되어 양이 되는 일방향으로만 일어난다. 그것은 평형계의 해체다. 구조가 붕괴하는 것이다. 그 역의 경우는 없다.

구조는 붕괴할 뿐 발생하지 않는다. 산이 깎여서 평지가 되는 일은 있어도 평지가 솟아서 산이 되는 일은 없다. 조산활동은 다른 영역에서 일어난다.

열역학 제 2법칙의 비가역성에 의해 결국 모든 질이 모든 양으로 변하게 되며 양에서 질로 다시 환원되지는 않는다.

수천억년 후 우주는 죽음을 고하게 된다. 우주의 모든 에너지가 질에서 양으로 변하면, 우주의 에너지는 모두 바닥상태가 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에너지는 들뜬 상태에서만 사용된다. 이는 밀도가 고르지 않은 상태다. 에너지는 질서에서 무질서로 이행한다. 점차 무질서도가 증가한다.

무질서도의 증가로 우주 전체의 밀도가 완전히 균일해 졌을 때 우주의 에너지는 총량은 변함이 없으나 모든 에너지가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이때 우주는 완전히 호흡을 정지한다. 양질전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양질전화처럼 오해되는 현상은 열린계에서 보다 높은 단위의 개입에 의한 것이다.

건물의 2층이 붕괴되어 1층 바닥에 쌓인다. 1층만 보면 바닥에 벽돌이 쌓였으므로 양질전화처럼 보여지만 2층의 존재를 깨닫게 되면 아니다.

1차원 선에 사는 개미들은 3차원 세계의 존재를 모른다. 개미의 세계에 위라는 개념은 없다. 위에서 무언가 떨어지면 그것이 저절로 발생했다고 여긴다.

에너지는 언제나 질(들뜬 상태)에서 양(바닥상태)으로 변하며 그 역은 없다. 존재는 불안정에서 안정으로 변한다. 높은 질서에서 낮은 질서로 변한다.

 

들뜬상태와 바닥상태

댐의 물이 강으로 내려와 바다로 들어간다. 이 과정에 질량보존의 법칙이 적용된다. 댐에서 빠져나간 물의 총량은 바다에 더해진 물의 총량과 같다.

바다로 간 물이 댐으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다시 댐에 물이 고이지만 이는 다른 평형계에서 별개의 동력원에 의해 일어난 전혀 다른 사건이다.

댐의 물이 바다로 간 사건은 지구 중력에 의한 것이다. 바다의 물이 다시 댐으로 간 사건은 태양광에 의한 것이다. 동력원이 다르면 계가 다르고 일이 다르다.

중력에 의해 댐의 물은 위치에너지를 품는다. 물이 댐에서 바다로 가는 것은 위치에너지를 잃어 바닥상태로 이행한 것이다. 질에서 양으로의 이행이다.

바닷물이 증발하여 댐으로 간 사건은 햇볕에 의해 에너지를 품어 들뜬 상태에서 에너지를 잃고 다시 바닥상태가 된 점에서 질에서 양으로의 이행이다.

에너지 총량으로 보면 1차적으로 태양에너지가 바닷물을 댐으로 보냈고 2차적으로 중력에 의한 위치에너지가 댐의 물을 바다로 보냈다.

전체적으로 태양에너지가 순소비되었다. 무한동력장치와 같은 개념의 에너지 순생산은 일어나지 않았다. 양질전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준 용돈으로 자식이 아버지의 가게에서 물건을 샀다면 돈은 돌고 돌아서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이는 우연일 뿐 그 돈은 순환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준 돈은 자식에 의해 소비되어 사라졌다. 금고로 되돌아온 돈은 순환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노동에 의한 새로운 수입이다.

무한동력장치가 작동한 것은 아니다. 가치가 순환되어 맴을 돈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노동이 새로이 가치를 창출한 것이다.

양질전화 개념은 무한동력장치와 같다. 태양에너지가 외계에서 공급된다는 사실을 모를 때 물이 바다에서 댐으로 순환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생태계의 순환은 양질전화처럼 보여진다. 식물은 중력을 거슬러 생장하고 동물은 하등동물에서 고등동물로 진화한다. 바닥상태에서 들뜬상태로 이행한다.

지구가 무한히 넓거나 화석연료가 무한히 있다면 양질전화가 일어나는 것과 같다. 신대륙 신자원 신소재가 계속 나타난다면 그러하다.

18세기만 해도 바다의 물고기는 무한히 존재했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 미개척지가 무수히 있었다. 인구는 적었고 개척해야 될 땅은 넓었다.

달로, 화성으로, 금성으로 우주 식민지를 넓혀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양질전화가 있는듯 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착각이었다. 세계는 유한했다.

 

심층구조와 일의 중첩성질

심층구조가 있다. 구조 위에 또다른 구조가 덧씌워져 있다. 이러한 중첩은 5회 진행된다. 컴퓨터와 같은 기계장치는 많은 일들의 중첩으로 이루어진다.

1바이트의 정보 위에 정보의 집합인 파일이 있고, 파일 위에 파일의 집합인 폴더가 있고, 폴더 위에 프로그램 있고, 프로그램 위에 OS가 있다.

낮은 질서에서 질이 높은 질서에서는 양으로 기능한다. 이는 낮은 신분의 집단에서 장(長)이 높은 신분의 집단에서 졸(卒)로 기능함과 같다.

일의 중첩은 5회 반복되며 이는 질적인 심화이다. 그러나 아무리 복잡한 장치라도 무한히 복잡한 경우는 없고 일의 중첩은 단 5회로 한정된다.

동력원, 동력발생, 동력제어, 동력전달, 동력효과로 하나의 일은 완결되기 때문이다. 고도로 복잡한 컴퓨터나 자동차나 그 어떤 기계장치도 예외는 없다.  

자동차의 볼트는 그 자체로 하나의 질을 이루지만 바퀴라는 높은 질서에서 양으로 기능한다. 바퀴에서 질을 이루지만 자동차 전체에서는 다시 양이 된다.

정보가 폴더에 가득차면 소프트웨어가 새로운 폴더를 만든다. 이때 정보가 양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에 질의 폴더가 발생했다고 착각한다.

사실은 프로그램 안에 무수한 폴더가 예비되어 있다. 프로그램이라는 주인이 새로이 자루(폴더)를 꺼낸 것이다. 감추어져 있던 것이 드러났을 뿐이다.

양질전화는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역사이론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청동기가 아무리 많아도 청동기가 철기로 진화하지는 않는다.

단 이미 철기가 발명되어 있을 때 청동기로 인한 전쟁의 증가가 철기에 대한 수요를 촉발한다. 이때 철기는 이미 발명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양의 증가가 질에 대한 수요를 촉발하여 이미 준비되어 있던 질의 사용을 부추길 뿐 양의 증가가 직접적으로 질적인 비약을 촉발하지는 않는다.  

양떼의 수가 아무리 늘어나도 양떼는 인간으로 비약하지 않는다. 개미는 아무리 숫자가 늘어나도 영원히 개미일 뿐이다. 양은 질과 무관하다.

폴더에 파일이 가득차면 새로운 폴더가 만들어진다. 이때 파일이라는 양이 폴더라는 질을 만들어낸 것은 전혀 아니다.  

소프트웨어라는 질이 새폴더라는 양을 공급한 것이다. 그것은 무에서 유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사전에 예비된 자원이 비로소 지원된 것이다.

● 파일의 낮은 단위에서 - 폴더는 질이다.
● 소프트웨어의 높은 단위에서 - 폴더는 양이다.

질의 부대에 양의 밀가루가 가득차면 새로운 부대가 공급된다. 밀가루라는 양이 부대라는 질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밀가루는 절대로 부대가 될 수 없다.

외부에서 새 부대가 공급된 것이며 부대는 방앗간 주인이라는 더 높은 단위의 일에서 양이다. 존재는 언제나 질에서 양으로만 이행한다.

양이 그 자체로는 질로 전환되지 않지만 양의 증가여부가 더 높은 질서의 작동여부를 판단하는 척도가 될 수는 있다.

소대원의 증가가 중대를 발생시키는 일은 절대로 없지만, 소대원의 증가량을 보고 중대의 이동을 점칠 수는 있다.

소대원이 30명인데 30명 이상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면 중대가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다. 이는 양질전화가 아니라 중대이동을 소대이동으로 착각한 것이다.

병사가 30명이 넘으면 중대를 새로 창설하는 것이 아니라 병사가 단 한 명이라도 전쟁 전체를 그 한 명이 총괄한다면 그 한 명이 군단(軍團)이다.

국가를 상태로 독립적인 전쟁을 수행한다면 병사의 수에 상관없이 그는 장군이다. 김좌진 장군은 부하가 100명이라도 장군이고 1000명이라도 장군이다.

양적 증가가 질적 비약을 촉발하지는 않지만 양의 증가여부를 보고 높은 단위의 질서가 작동하는 타이밍을 파악할 수는 있다.   

 

구조론의 일방향성의 원칙

구조론을 이해한다는 것은 구조를 이루는 다섯 갈피들 사이에서 일이 진행하는 순서와 방향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질서가 있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따른 비가역성이야 말로 구조론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존재의 작용에는 일정한 방향성이 있으며 그 역은 없다.

존재는 언제나 진행할 뿐 역행하지 않는다. 역행으로 보여지는 현상들은 열린계에서 일어나는 구조의 중첩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모든 변화는 질에서 양으로의 일방향으로 일어난다. 들뜬 상태에서 바닥상태로 이행한다. 높은 질서에서 낮은 질서로 이행한다.

변화는 또 전체에서 부분으로 일어난다. 밖에서 안으로 이행한다. 그 역은 없다. 그러므로 구조론에서는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

형식이 내용보다 더 중요하다. 스타일이 주제보다 더 중요하다. 예술의 양식이 기교보다 더 중요하다. 이는 어떤 면에서 우리의 상식과 반대되는 것이다.

구조론을 알면 왜 피카소의 양식이 밀레의 기교보다 더 대접을 받는지 이해할 수 있다. 형식(스타일)이 내용(기교, 주제)보다 더 상위의 가치다.

우리가 형식보다 내용을 중시함은 형식 다음에 내용이 오는데 우리가 형식을 이미 파악했기 때문에 이제는 내용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형식의 변화가 없다는 선입견을 전제로 한 것으로 전모를 보는 시야가 아니다. 형식은 변화하며 형식이 변화할 때 형식이 내용에 우선한다.

우리가 이미 사건에 개입해 있다면 이미 형식의 단계는 지났다. 모든 착오가 이 때문에 일어난다. 우리가 이미 사건에 개입해 있다는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구조론은 사건에 개입하기 이전 단계로 되돌아가서 본래의 순수한 상태에서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며 이래야지만 존재의 질서가 온전하게 이해된다.

우리는 아직 사건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래야 전모를 볼 수 있다. 전모를 파악하면 평형계가 포착되고 평형계 내부에 숨은 질서가 보인다.

● 질서는 평형계를 이룬다.
● 평형계는 순서와 방향을 가진다.
● 순서와 방향의 비가역성이 존재한다.
● 순서와 방향은 진행할 뿐 역행하지 않는다.
● 존재의 질서는 질에서 양으로의 일방향으로 이행한다.

● 질에서 양으로 이행한다.
● 들뜬상태에서 바닥상태로 이행한다.
● 높은 질서에서 낮은 질서로 이행한다.
● 평형계의 성립에서 계의 해체로 이행한다.
● 불안정에서 안정으로 이행한다.
● 전체에서 부분으로 이행한다.
● 형식에서 내용으로 이행한다.
● 질서에서 무질서로 이행한다.
● 밖에서 안으로 이행한다.
● 위에서 아래로 이행한다.

● 불균일한 상태에서 균일한 상태로 이행한다.
● 부분의 불균일이 해소될 때 전체의 불균일이 드러난다.
● 부분의 균일화에 의한 전체의 불균일 노출이 양질전화로 착각되곤 한다.
● 낮은 단계에서의 양적 변화가 높은 단계의 질적 개입을 촉발한다.
● 높은 단계가 전부 개입했을 때 우주는 완전히 균일해진다.
● 우주가 완전히 균일해지면 우주는 호흡을 멈춘다.

우주는 수백억년 전 빅뱅에 의해서 탄생하고 있다. 빅뱅은 거대한 불균일의 성립이다. 그 불균일의 크기 만큼 에너지가 총량에서 존재한다.

빅뱅에 의해 우주 전체의 밀도는 고르지 않게 되었다. 밀도차에 의해 공간 그 자체가 구겨져서 밀도가 낮은 부분으로 쏠린 것이 별의 탄생이다.

우주의 밀도는 낮은 질서부터 서서히 균일해져 가고 있다. 낮은 질서의 밀도가 고르게 되면 높은 질서가 붕괴되어 새로운 불균일이 노출되곤 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결국 우주 전체의 밀도가 완전히 균일해진다. 우주의 구석구석이 완전히 고르게 되면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는 제로가 된다.

 

구조론적 세계관

구조론의 이해는 세계관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 사고방식의 변화를 요구한다. 세계를 깨달음의 연역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지식의 귀납으로 볼 것인가이다.

● 지식의 귀납 - 자동차의 제작, 주택의 건축, 상품의 제조.
● 깨달음의 연역 - 자동차의 운행, 주택에서의 생활, 상품의 소비.

세계가 하나의 자동차라면 귀납적 지식은 자동차의 제작에 관한 것이다. 또 세계가 하나의 건물이라면 그 건물의 건축에 관한 것이다.

독재자들은 자동차를 제조하듯이 세계를 제조한다, 혹은 건물을 건축하듯이 세계를 건축한다. 그러나 이러한 치우침은 운전실력의 향상을 방해한다.

민주주의는 국가라는 자동차의 운전이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국가는 자동차를 잘 만드는 사람보다 잘 운전하는 사람에 의해 제어되어야 한다.

정치가들이 제작의 관점을 버리고 운행의 관점으로 철학을 바꾸고 세계관을 바꾸어야 한다. 세계는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운행되는 것이다.

전자제품의 기능이 복잡할수록 사용하기 불편하다. 최고의 상품은 심플해야 한다. 단순해야 한다. 인간 위주여야 한다. 이러한 점은 운전에 의해 드러난다.

자동차를 운전해 보지 않고는 결코 진실을 알 수 없다. 생산자의 기술력보다 소비자의 불만에 의해서 상품의 질은 높아지는 것이다.

니드(need)를 발견하는 일이 최우선의 가치다. 불만의 제기가 먼저다. 우리는 되도록 까다로운 기호를 가진 말 많은 소비자가 되어야 한다.

최악의 소비자는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는 소비자이다. 까다로운 입맛이 최고의 요리를 만든다. 불만을 제기하는 소비자야 말로 제조사의 큰 은인이다.

니드가 먼저고 기술은 그 다음이다. 발명은 기술의 진보 이전에 니드의 발견에서 시작된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은 거기서 나온 것이다.

 

양으로 질을 테스트한다

양질전화는 부분이 모여서 전체가 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자동차 부품을 한곳에 모아놓아도 거기서 자동차는 발생하지 않는다.

도로정체가 심해지면 자동차에 날개가 생겨서 문득 교통이 소통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도로정체가 교통마비를 낳을지언정 소통을 낳지는 않는다.

그러나 교통정체를 겪어보고 신호등을 발명할 수는 있다. 이는 양이 질로 변화한 것이 아니라 심층구조에서 더 높은 단위의 질이 개입한 결과다.

● 질 - 도로가 좋아야 잘 달릴 수 있다.
● 입자 - 자동차가 좋아야 잘 달릴 수 있다.
● 힘 - 운전실력이 좋아야 잘 달릴 수 있다.
● 운동 - 정체가 풀려야 잘 달릴 수 있다.
● 량 - 속도를 높여야 잘 달릴 수 있다.

속도를 높여도 도로정체는 풀리지 않는다. 량이 증가해도 질은 좋아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도로정체가 풀려도 운전실력이 좋아지지는 않는다.

운전실력이 좋아도 자동차는 좋아지지 않는다. 자동차가 좋아도 도로는 좋아지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양은 질을 비약시키지 않는다. 양질전화는 없다.

반대로 도로가 좋아야 자동차가 좋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고, 자동차가 좋아야 운전실력이 좋음을 입증할 수 있다. 질이 양을 담보하는 것이다.

양의 극한에 도달했을 때 질의 우수함이 발견된다. 자동차의 속도를 높여야 도로정체를 알 수 있고, 정체가 풀려야 운전실력을 알 수 있다.

이는 양이 질을 비약시킨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양의 증가로 하여 질이라는 결코 넘을 수 없는 한계를 발견한 것이다.

양을 최대화 시켜도 사정이 전혀 나아지지 않음을 보고 질이 나쁘다는 사실을 안다. 양질전화의 불가능함을 보고 질의 개선에 관심을 돌린다.

자동차를 전혀 운행하지 않는다면 좋은 자동차인지 알 수 없다. 200키로를 밟아서 양을 최대화 해봤을 때 그 자동차의 질이 어떤지를 파악할 수 있다.

민주화운동의 양적인 증가가 사회의 질을 비약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투쟁수위를 최대치로 끌어올렸을 때 독재정권의 야만성이 입증된다.

양을 최대한 끌어올려 시스템의 질이 낮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이 정보를 널리 알려서 질을 개선하는 쪽으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

양으로 질을 비약시키지 못했다. 동학농민항쟁은 조선사회를 비약시키지 못했다. 단 조선왕조 지배집단의 무능을 확인할 수는 있었다.  

무엇보다 질이 좋아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양은 질을 이길 수 없다.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질을 측정하는가이다. 양을 증가시켜 보면 된다.

양이 증가해도 시스템이 견뎌낸다면 질이 좋다는 증거다. 양을 증가시켰을 때 시스템이 붕괴한다면 질이 좋지 않다는 증거다.

양질전화는 없다. 그러나 양으로 질을 테스트 할 수 있다. 좋은 칼인지는 무수히 베어보면 알 수 있고 좋은 연필인지는 무수히 써보면 알 수 있다.

질이 바뀌어야 세상이 변한다. 토대를 이루는 사람이 변해야 사회가 변한다. 개인이 변해야 체제가 변한다. 양을 증가시켜 질의 수준을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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