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6번째 글입니다.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한 서민의 지도자는 엘리트 지도자가 절대로 알 수 없는 것 한가지를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알아야 노무현의 전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2. 합리주의적 사고방식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롭게 발달하고,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다. [나의 소원]

백범은 유교와 불교 동학과 기독교에 데모크라시와 사회주의까지 두루 섭렵했다. 그러면서도 그 중 어느 한가지에 기울지 않고 그 모든 주의들의 장점만 받아들이고 있다. 노무현의 삶에서도 이와 같은 면을 발견할 수 있다.

노무현은 강경한 진보주의자로 오해되고 있지만 이는 민중의 지도자로서의 자기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취하는 포지셔닝일 뿐이다. 노무현은 어떤 사상에도 극단적으로 휘둘리는 일이 없는 합리주의자이다.

『정치는 정의와 효율입니다. 정치에서 중요한 큰 틀은 정의지만 역사를 움직여온 것은 효율입니다』 [노무현어록]

백범과 노무현이 업무의 효율성과 실용성을 강조하는 합리주의자일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사상이 스승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주입된 것이 아니고 본인이 스스로 터득한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트들은 스승으로부터 배우되 학문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학문을 다루는 툴(tool)을 배운다. 그것은 집단 내부에서 공론을 조성하고 인맥을 형성하고 선배가 당겨주고 후배가 밀어주며 보호해주고 보호받는 시스템에 관한 것이다.

엘리트들이 만약 배운 학문의 장점만 취하고 조직의 전통과 다른 길을 주장하면 단번에 그 시스템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그러므로 엘리트집단 내부에서 백화제방 백가쟁명식 자유로운 사고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조직에는 조직의 생리가 있다. 시스템의 자기보호본능이 발동하여 조직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자유로운 사고를 차단해버리는 것이다. 조직의 생존을 위하여는 항상 원리주의가 승리해야 한다. 좌파들의 집단에서는 가장 강경한 좌파 원리주의자가 승리하게 되어있고 우파들의 집단에서도 마찬가지로 극우주의자가 논쟁에서 승리하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교리와 강령과 도그마가 판단을 대리하게 되고 인간의 이성적인 판단은 배제될 수 밖에 없다. 엘리트집단 내부에서 합리주의자의 설자리는 애초에 없는 것이다.

 

13. 전모를 아는 사람

논에 물을 대는 한가지 일로 보아도 나무 톱니바퀴를 우마에 매고 남녀 수인이 밟아 굴려서 한 길 이상 호수의 물을 끌어올리니 그 얼마나 편리한가. [백범일지]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 중에 특히 합리적인 생활태도를 가진 사람이 많다. 중국의 등소평이 실용주의자가 된 것은 프랑스 유학시절 장사를 해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범과 노무현도 마찬가지로 실용주의자이다.

다시 키워드를 이야기한다면 ‘원칙과 신뢰’, ‘대화와 타협’입니다. 그 다음에 "통합과 조정", 우리 사회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노무현어록]

김구와 노무현의 공통점은 어떤 일이 진행되는 전 과정에 참여하여 본 경험이 있다는 사실이다. 처음 일이 시작되어 조금씩 발전하며 혹 성공하고 또는 실패하며 무수한 시련과 시행착오 끝에 피드백을 통한 오류시정을 거쳐 조금씩 방향을 잡아나가다가 마침내 바른 길을 찾아 상승일로의 본 궤도에 오르는 과정을 낱낱이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성공보다 실패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처음 씨앗을 뿌리는 단계부터 어느 정도 사업이 뿌리를 내려 본 궤도에 오르는 단계까지는 무수한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의 가역과정이 있다. 스승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수 받은 엘리트에게는 실패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러한 지식이 결여되어 있다.  

엘리트들은 성공해본 경험은 있어도 실패한 경험은 없다. 그 성공도 실은 자신의 성공이 아니라 스승의 성공이거나 아버지의 성공이기 쉽다. 씨앗은 스승이 뿌리고 제자는 수확만 하는 식이다. 그러므로 스승이 제공한 궤도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실패하게 되고 이 경우 원상복구가 안된다.

스승이 심어놓은 과일나무의 열매만 수확해서는 전모를 볼 수 없다. 그 일이 진행되는 전 과정에 참여해 본 경험이 있어야 한다.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의 피드백과정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거함의 항로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엘리트들은 스승이 가르쳐준 항로를 고집할 뿐 자기 스스로 항로를 개척하는 일은 없다. 부단히 변화하는 상황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상황적응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14. 모두가 돕고 싶어하는 사람

절에서는 총회를 열어 사찰의 재산을 관리하고 마곡사의 명성을 이어갈 사람은 오직 나 원종(圓宗) 김구 뿐이라 결정하고, 덕삼(德三)스님을 금강산까지 보내서 나의 행적을 탐문하였다고 한다. [백범일지]

백범은 일생동안 무수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다. 목숨을 살려준 고종황제, 큰 재산을 마련해 주려했던 김경득의 비밀결사, 백범을 사위 삼으려 했던 고능선선생, 수십만냥의 사찰재산을 물려주려 한 하은당스님, 동학에 실패하고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해준 안태훈진사 등 백범을 도와주려 한 사람은 너무나 많다.

왜 무수한 사람들이 다투어 백범을 도와주려 했을까? 그 이유는 백범이 그 모든 도움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만약 백범이 주지 하은당스님의 사찰재산을 물려받아 마곡사의 명성을 이었다면 평범한 스님으로 일생을 마쳤을 것이다.

백범이 누구보다도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고능선선생의 사위가 되었다면 조선의 마지막 유림이 되었을 것이다. 안태훈진사의 사랑에 식객으로 더 머물렀다면 그 길로 기독교로 개종하여 목사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백범은 터무니없이 그릇이 크다. 무수한 사람들이 다가와서 백범의 큰 그릇에 무언가를 채워주려 한다. 백범은 그 채워진 그릇을 도로 비워버린다. 그 큰 그릇에 아무 것도 채우지 않고 혈혈단신으로 천하를 유랑한다.

노무현 당선자는 그를 이렇게 평했다. 영혼이 맑은 남자. 이호철. 선거 때면 나타나 모든 걸 쏟아놓고 이내 사라지는 사람. 그리고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중앙일보 기사]

노무현도 마찬가지다. 김영삼의 3당야합에 합류했다면 평범한 국회의원으로 끝났을 것이다. 안전한 서울에서 출마했다면 잘 나가는 여당 중진으로 끝났을 것이다. 큰 기회가 눈앞에 왔는데도 제 발로 그 기회를 차버렸기 때문에 노사모와 네티즌들이, 이호철씨와 같은 무수한 자원봉사자들이 노무현의 그 비워진 그릇을 채워주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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