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read 11067 vote 0 2008.12.31 (01:10:55)

 

반야심경의 이해

반야(般若)는 연역적으로 전개되는 ‘진리의 완전성’을 의미하고 심(心)은 그 전개된 네트워크의 중심, 혹은 핵심을 의미한다.

반야심경은 ‘핵심적 진리’ 혹은 ‘완전성의 중심’을 의미한다. 만유(萬有)를 한 줄에 꿰어, 단 하나의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할 때의 그 하나를 의미한다.

반야를 단순히 ‘지혜’로 알아듣거나 심(心)을 마음으로 알아들으면 헛읽은 것이다. 지금까지 나온 반야심경 해설은 모두 헛된 것이었다.

‘이 반야(般若)가 그 반야가 아닐세.’

‘이 심(心)이 그 심이 아닐세.’

대개는 출발부터 틀렸으니 바로 이해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반야심경을 이해하려면 그 당시 사람들의 눈높이를 알아야 한다. 그 시대 사람들의 뇌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 시대의 기준으로 본다면 백프로 잘못 보는 것이다. 시대배경이 다르고 또 두 번의 번역과정에서 많은 왜곡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진정한 반야심경 해설은 지구 상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야심경은 진리 그 자체의 정수를 기록한 것이므로 진리 그 자체를 파악하지 못하면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반야심경은 사물이 개별적인 원자 알갱이가 아니라 파동으로 공명하는 거대한 하나의 네트워크로 되어 있다는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모든 정보가 모여드는 중심으로서의 포탈의 완전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러한 점이 중요한가? 당시 인도인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화가 나면 ‘불화의 신이 속삭이는구먼’, 또 바람이 불면 ‘바람의 신이 외출을 하셨구먼’ 또 비가 오면 ‘하늘의 신과 땅의 신이 ’응응응‘을 하는구먼’ 뭐 이런 식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무엇인가? 그 당시 사람들은 만유를 설명하기를 ‘있다’에 의존했던 것이다. 기분이 나쁜 것도, 날씨가 좋은 것도, 전쟁이 일어난 것도, 흉년이 든 것도, 혜성이 나타난 것도, 뭐든지 다 ‘그것이 있다’로 간단히 설명해 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있다설명법’은 매우 편리하다. ‘있다법’으로 세상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전혀 없다. 예컨대 두 사람 사이에 의견이 다르면 해결책은 간단하다. 틀림없이 ‘불화의 신’이 이간질을 하고 있을 것이므로 푸닥거리를 해서 불화의 신을 쫓아내면 된다.

반야심경은 이러한 ‘있다법’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반야심경의 내용이 대략 ‘없다없다없다없다’로 반복되는 이유가 그러하다. 사람들이 뭐든지 ‘있다’로 간단히 해결해 버리므로 ‘없다’로 제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무서운 거다. 방금 일어난 화재가 불도깨비의 불장난이 아니란 말인가? 우리는 이 사실을 무서워 하지 않지만 그건 과학을 알기 때문이고, 과학을 모르던 시대에 이는 엄청난 공포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있다법’을 버리라는 것은 죽으라는 말과 같다. 화재의 원인이 불도깨비 때문이라면 간단하다. 불도깨비를 퇴치하는 부적을 걸어놓으면 된다. 그러나 화재의 원인이 다른데 있다면?

이때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공포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99프로는 이 언덕에서 나가떨어진다. 우리가 이 부분을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은 순전히 과학을 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반야심경은 말한다. 개별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다수의 개별자를 버리고 하나의 보편자를 보라는 말이다.

이 사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화재가 일어나는 원인이 불도깨비 때문이 아니라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화재’ 그 자체도 부정하는 것이다.

‘불도깨비’가 없는 것이 아니라 ‘불’도 마찬가지로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불(결과)과 불도깨비(원인) 사이에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통제할 수 있다는 말이다. 상황을 장악하고 통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안심할 수 있는 것이다.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위대한(摩訶) 진리의 완전성(波羅蜜多)에 대한 깨달음(般若)의 핵심(心)의 수트라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성자(觀自在菩薩)가 진리의 완전성을 깊이 실천할 때(行深般若波羅密多時) 인간의 존재(五蘊)가 개별자가 아닌 보편자(空)에 의해 일원론적으로 통제되고 있음을 보고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났다.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여! 개별자(色)는 보편자(空)와 다르지 않고, 보편자 또한 개별자와 다르지 않다. 인간에 의해 인식되는 모든 사실(受想行識) 또한 마찬가지다.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여! 만유의 존재는 생겨나거나 사멸하거나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않는다.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그러므로 보편자를 긍정할 때, 보편자의 관점에서 개별자의 존재는 철저하게 부정되어야 한다. 그 연장선 상에서 너와 나의 존재(受想行識) 역시 부정된다. 이 차원에서는 존재 그 자체가 송두리째 원천부정되고 있는 것이다.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그러므로 네가 보편자에 접속할 때, 네가 내가 되고, 내가 네가 될 때, 신의 완전성과 하나가 될 때 그 경지에서는 깨달음도 없고, 깨달음을 얻은 것도 없고, 깨달음을 얻지 못함도 없는 것이다.

菩提薩 依般若波羅密多 故心無 碍 無 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성자(菩提薩)는 다만 진리의 완전성(依般若波羅密多)에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두려움도 없는 것이다.

三世諸佛依般若波羅密多 故得阿 多羅三 三菩提

모든 깨달은 이 역시 그러하다. 오직 진리의 완전성에 의지하여 온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故知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진리의 완전성에 의지하는 기도는 신과의 소통을 가능케 한다. 일찍이 성자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진리의 완전성의 세계로 나아가자. 신과 하나가 되자. 깨달음은 위대하도다.

● 진리의 완전성은 연역적으로 전개된다.

● 그 연역적 전개의 출발점이 되는 중심이 존재한다.

● 그 중심은 보편자이다.

● 보편자와 개별자는 상호전환된다.

● 개별자는 보편자에 의하여 이차적으로 전개된 주변이다.

● 보편자로 볼때 개별자가 낳는 모든 거추장스러움은 사라진다.

● 보편자의 경지는 ‘존재’의 차원을 넘어서 있다.

● 보편자로 보면 너는 나, 나는 너다.

● 보편자로 보면 나는 곧 신(진리의 완전성)이다.

● 보편자로 볼 때 깨달음도 없고 깨달을 필요도 없다.

● 다만 그러한 사정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이다.

● 깨달은 이는 진리의 완전성에 의지하므로 죽음을 극복할 수 있었다.

● 진리의 완전성에 의지하는 방법으로만이 깨달을 수 있다.

● 진리의 완전성에 의지하는 기도로 신과 소통할 수 있다.


List of Articles
No.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sort
110 인간에게는 다만 김동렬 2008-12-30 2524
109 환멸 그 이후 김동렬 2008-12-30 2582
108 신은 세상을 창조할 수 있고 김동렬 2008-12-30 2593
107 세상은 일어나는 모든 것 김동렬 2008-12-30 2633
106 사랑이란 완전에 관한 욕망이다 김동렬 2008-12-30 2678
105 콩쿨대회의 예선 심사장이라면 어떨까? 김동렬 2008-12-30 2685
104 당신이 지금 무언가를 시작한다면 김동렬 2008-12-30 2695
103 [ 사랑은 만남이다 ] 김동렬 2008-12-30 2700
102 빛은 있다 김동렬 2008-12-30 2707
101 당신이 지금 결핍을 느낀다면 김동렬 2008-12-30 2716
100 인간의 삶은 김동렬 2008-12-30 2727
99 사랑은 얻는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는 것 김동렬 2008-12-30 2749
98 내 유년의 어느 날 김동렬 2008-12-30 2752
97 사랑은 재현하는 것 김동렬 2008-12-30 2753
96 신의 정원에 초대를 받아 김동렬 2008-12-30 2759
95 구원 김동렬 2008-12-31 2772
94 나는 무엇을 믿는가? 김동렬 2008-12-30 2777
93 단어들 김동렬 2008-12-31 2785
92 구도문학에 있어서의 성 역할 김동렬 2008-12-30 2788
91 시조창을 처음 들으러 갔을 때 김동렬 2008-12-30 27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