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구도문학에 있어서의 성 역할

얼마전 신라 시조를 제사 지내는 나을신궁 옛터에서 우물이 발견되었다. 신라인들은 샘(우물)을 숭배했던 것이다.

‘도덕경’에서 노자는 곡신불사 시위현빈(谷神不死 是謂玄牝) ‘현빈지문시위천지근(玄牝之門是謂天地根)이라 했다. ‘골짜기 신은 죽지 않으니 이를 일컬어 신비한 암컷이라 하고 신비한 암컷의 문을 일컬어 천지의 뿌리라 한다’는 뜻이 되겠다.

샘과 골짜기는 통한다. 샘에서는 물이 솟구치고 골짜기에서는 물이 흘러 내린다. 그것은 무언가를 낳는 것이다. 낳는 것은 여성이다. 노자의 신비한 암컷(玄牝) 역시 같은 맥락이다. 도는 낳는 것이다. 도는 창조하는 것이다.

어느 나라나 태초의 신은 여신인 경우가 많다. 기독교의 성모신앙도 게르만족의 여신숭배가 변용된 것이라 한다. 원시 기독교에는 성모신앙이 없었던 것이다.

왜인가? 창조의 신은 여신이기 때문이다. 태초에 창조가 있었고 창조는 낳는 것이며 낳는 것은 여성이다. 나중에 부계사회로 진입하면서 남신이 등장하지만 고금의 신화를 분석해 보면 여신이 많다.

구도문학(求道文學)에서 깨달음을 ‘여성성’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는 일정한 레파토리가 있다. 어떤 소년이 우연한 계기로 한 소녀를 사모하게 되었는데 어떤 이유로 마을을 떠나서 오래 방랑하다가 다시 마을로 돌아와 기다리고 있던 소녀와 맺어진다는 설정이다.

요는 소년이 방랑하는 동안 소녀는 여전히 마을을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설정이 문제되는 이유는 여성의 역할이 소극적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주체는 남자이고 여성은 다만 그 남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우선하고 깨달음의 과정을 ‘성 역할’에 비유하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타당하지 않다. 깨달음의 구조와 남녀관계의 구조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을 쓰려면 남녀간의 러브스토리를 끼고 들어가야 흥미를 배가할 수 있으므로 자연히 이러한 설정을 따라가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플롯이 진리의 구조를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데 있다.

진리로 말하면 여성과 남성의 존재 이전에 모성(母性)과 어린이의 성이 존재할 뿐이다. 진리는 곧 완전을 말한다. 완전한 진리의 본질은 자신이 자신을 낳는 것이다. 네가 내고 내가 네인 이유가 그 때문이다.

본래 하나가 있었고 그 하나의 자기복제에 의하여 둘이 성립하였다. 둘은 둘이면서 애초의 하나를 기억하고 있다. 탄생의 경로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경로의 기억에 진리의 보편성이 성립하는 것이다.

만유는 하나다. 즉 만유는 하나에서 갈라져 나왔으며 하나로부터 전개해 온 과정에서의 경로를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유는 서로 통할 수 있다.


진리의 첫 번째 성질은 자기가 자신을 낳는 것이다. 즉 복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질은 여성이나 남성의 성질이 아니라 어머니의 성질이다. 진리의 두 번째 성질은 그 전개해온 자녀가 본래의 어머니로부터 전개해온 과정의 경로를 기억하고 이를 되밟아가는 능력이다. 즉 재현이다.

진리의 세 가지 성질

1) 복제한다.

2) 경로를 기억한다.

3) 재현한다.

진화론으로 보더라도 그러하다. 태초에 원핵생물 무리들에서 한 마리의 혐기성바이러스가 호기성바이러스 내부로 침투하여 핵을 구성하면서 진핵생물로의 진화를 촉발하면서 성별이 탄생했다.

태초의 성은 모성(母性)이며 그것은 암컷도 수컷도 아닌 것이었다. 여기서 자기복제가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X염색체 일부의 손상이 일어났는데 이것을 남성의 Y염색체라고 부른다.

Y염색체는 손상된 X염색체이다. 그러한 손상에 의해 퇴화가 진행된 결과로 애초에 1098개 유전인자 중 대부분을 잃어버리고 6백만년 전부터 인간은 16개만 가지고 있다. 즉 남자는 손상된 여성인 것이다. 남자가 쓰지도 않는 젖꼭지를 가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결론은 모성은 완전한 성이며, 여성은 예비된 성이고, 남성은 손상된 성이다. 그러므로 남성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불완전한 남성이 완전한 존재를 추구하는 것을 깨달음의 과정에 비유하는 것은 약간은 이치가 닿는 것이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이야기도 한 남성이 한 여성을 찾아다니는 구도로 되어 있다. 김기덕의 영화들에서도 그러한 면이 지적되고 있고 거의 대부분의 구도문학의 설정이 그러하다.

구도란 길을 찾는 것이다. 경부선이나 호남선이 어디로 도망가지 않는다. 그저 발 밑에 있다. 자동차는 그 길 위를 달리면서 길을 찾는 것이다. 길 위에 있지만 길 끝까지 가보아야 길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도란 것이 그러하다. 이미 손에 쥔 것을 찾는 것이다. 내 발 밑의 것을 찾는 것이다. 진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지만 그래도 끝까지 가보아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구도문학은 연어가 모천으로 회귀하듯이 떠돌아다니는 존재인 남자가 길처럼 그곳에 머물러 있는 여자를 찾아가는 형태로 구성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이러한 설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러한 설정은 완전성의 표상으로서의 신(神)의 불개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이 내 삶에 개입하지 않은 채 다만 방황하는 내가 돌아올 때 까지 기다리기만 한다면 신일 수 없다.

내가 손을 내밀었을 때, 그 손을 잡아주지 않는 신은 신일 수 없다. 내가 신과의 소통을 시도했을 때 침묵하는 신은 신일 수 없다. 그래서는 완전일 수 없다.

신은 언제라도 완전을 표상한다. 도는 완전하므로 도일 수 있다. 그것은 창조하는 것이며 그것을 낳는 것이다. 완전할 때 비로소 낳을 수 있다. 여성이 가만히 있기만 해서는 아기를 낳을 수 없다.

진리란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낳는 것이다. 신은 신을 낳는다. 우리는 그렇게 낳아진 존재이므로 낳은 존재를 사랑한다. 우리의 미의식의 기저에는 그러한 낳음의 과정이 각인되어 있다.

우리는 그 태초의 희미한 기억을 되밟아 나를 낳아준 존재인 신을 방문한다. 그러한 낳음의 과정을 재현한다. 그것이 사랑이다.

벽암록(碧巖錄)에 줄탁동기라는 공안이 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99가 준비되었을 때 마지막 1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신은 인간의 삶에 개입한다. 신은 침투한다. 대화를 건다. 말을 건넨다. 그 말을 알아듣든지 그러지 못하든지는 당신의 깜냥에 달렸다.

구도는 불완전에서 완전을 찾아가는 것이다. 작가는 보통 여성을 완전한 존재로 묘사하고 남성을 불완전한 존재로 설정하고 싶어한다. 작가는 남성을 구도자로 여성을 구원자로 묘사한다.

구도문학에서 남성은 능동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로 묘사되고 여성은 소극적으로 남성의 간청을 허락하는 자로 설정된다. 여성은 구원하고 남성은 구도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는 진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결여된 것이다.

인간이 신과의 소통을 열망하듯이 신도 인간과의 소통을 열망하고 있다. 신은 인간을 앉아서 기다리지 않는다. 신은 인간의 삶에 상당히 개입한다. 그러므로 구도자는 매 순간 신의 의지를 파악하려 애쓰지 않으면 안 된다.

정리하면 진리의 구조와 성별의 구조가 명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상당한 유사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남성과 여성으로 보았을 때 오류이지만 모성과 자녀로 보았을 때 일치점이 있다.

여성을 수동적인 구원자로 설정하고 남성을 능동적인 구도자로 설정하는 방식은 오래된 관습이지만, 이는 신을 소극적인 방관자로 묘사하는 데서 적확한 진리의 파악이 되지 못한다.

방황하던 아이가 기다리는 엄마의 품으로 되돌아가는 설정, 혹은 고향을 떠나 방황하던 남자가 고향에서 기다리는 여인에게로 되돌아가는 설정은 진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다.

언제라도 인간의 역할은 재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성숙하여 엄마가 되는 것이다. 엄마가 아이를 창조하였듯이 자신 역시 누군가를 창조해야 한다. 그러한 창조과정에는 적극적인 개입이 존재한다. 그러한 개입에 의해 서로는 서로를 성숙시키며 서로를 완성한다.

이 부분을 정확히 설명한 문학작품은 아직 없었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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