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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4434 vote 1 2012.11.10 (20:08:38)

 

   

http://media.daum.net/economic/consumer/newsview?newsid=20090817113709047

 


황진이에게서 찾은 승자의 언어

 

“나는 수도를 하는 도승이오. 내게 있어 여인은 사마외도요. 냉큼 물러가시오.”
 
젊은 처자는 물러날 수밖에 없다. 젊은 처자를 심부름 보낸 노파는 기가 막혔다. 그날 밤 당장 암자를 불태워버렸다.
 
“내가 20년 동안 엉뚱한 놈을 공양했구나.”
 
노파는 불같이 화를 냈다. 수행에는 철저하면서도 한점의 자비심을 익히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였다. 20년 이상 수행한 수좌가 아직 본성을 억누르는 계율에 묶여 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미욱한 짓이었다.
 
노파의 분노가 화두로 변모했다. 수행이 우선인가, 자비가 먼저인가? 조선의 명기 황진이의 일화에서 그 해법을 찾아보자.
 
“송도에는 삼절이 있는데 그것을 아십니까. 박연폭포와 서화담 그리고 소인입니다.”
 
오연(傲然)하다. 누가 어디 감히 이런 선언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내용에 시비를 따질 생각은 없다.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그것은 황진이 개인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로 인하여 발생한 문제에 대해서는 시비를 붙여 마땅하다. 지족선사의 문제다. 당시 생불(生佛)로 평가받던 지족선사가 그만 ‘팽’ 당했다. 낙인은 파계였다. 단 한번의 외도로 30년 염불이 하룻밤사이에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간 지족선사는 ‘땡중’이 되어 전국을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황진이 이야기를 전개하기 전에 먼저 인식해야할 것이 있다. 삶은 축제의 장이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축제에 초대된 존재들이다. 축제가 아니라고? 그렇다면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왜 태어났느냐? 제발 고행이라는 말은 하지 말자. 당신 지성의 허약함만 드러낼 뿐이다.
 
축제의 장에 왔으면 놀이에 참여해야 한다. 한바탕 떠들썩하게 뛰놀다 갈 일이다. 굳은 얼굴로 축제의 한편에 머물다 갈 생각은 아예 하지마라. 축제를 망치는 짓이다.
 
축제의 놀이 중 강력한 것은 유혹이다. 열정의 한 형태인 유혹은 즐거운 놀이다. 유혹하는 것도 유혹을 받는 것도 놀이의 한 형태다. 유혹으로 인해 삶은 팽팽하게 긴장하고, 생생하게 살아 있다. 바다위로 솟구쳐 오르는 물고기처럼 삶은 진한 생동감으로 다가온다. 유혹에서 중요한 것은 유혹하는 것보다 유혹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그 태도에 따라 유혹이 즐거운 놀이가 될 수도 있고, 추악한 추문으로 끝날 수도 있다.
 
유혹은 인간 맺기의 생생한 수단이다. 유혹으로 인간 맺기가 시작되고 유혹을 받아들임으로써 인간 맺기가 완성된다. 유혹을 받아들이는 것은 유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행동이다.
 
황진이는 조선의 팜므파탈이다. 그 치명적 유혹을 거부한 것은 서화담이다. 그리고 그 도발적 유혹을 받아들인 것은 지족선사다. 그 결과 유혹을 축제의 일환으로 파악한 지족선사는 서화담과 반대로 일순간에 ‘못된 놈’으로 변했다.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서화담은 과연 추앙받을 만한 인물일까. 그는 유혹의 울타리를 뛰어넘지 못했다. 자신이 설정한 좁은 울타리에서 머물다 간 사람일 뿐이었다. 자신의 한계가 뚜렷한 사람이었다. 혹자는 그것을 높게 평가할 수도 있다. 여하튼 그는 삶이 얼마나 큰 축제의 장인지 몰랐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메마른 지식을 갖고 있는 지식인이었다. 메마른 지식은 불임(不姙)이다. 탄생의 기쁨을 모른다. 탄생을 모르니 유혹이라는 열정을 알 리 없다.
 
자기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인간은 추하다. 삶은 함께 어울려야 진정한 맛이 난다. 유혹을 받아들여 한바탕 웃고 지나갈 일이었다. 축제마당에 왔으면 축제를 즐겨야지, 축제를 거부하는 것은 무슨 놈의 작태란 말인가.
 
그는 냉정한 눈을 가졌다. 냉정한 눈은 삶의 전체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차가운 면만 안다. 그래서 삶이 뜨거운 열정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그는 자신밖에 몰랐다. 자신에 파묻혀 삶이라는 전체의 장을 잃어버렸다.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은 허약하다. 삶이라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자신이라는 부분을 바라보아야 하거늘 자신이라는 부분에 함몰되고 말았다. 축제의 장이라는 전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수행이라는 부분에만 몰두했다. 부분에 몰두하는 것은 극단적이다. 극단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미성숙이다.
 
서화담은 황진이를 품어야 마땅했다. 유혹에 넘어갔어야 했다. 축제의 마당에서 유혹이라는 놀이에 흠뻑 취했어야 했다. 유혹을 하고 당하면서 삶을 한바탕 축제의 장으로 만들었어야 했다.
 
유혹을 받아들이는 것은 전체를 보는 것이다. 흥겨운 삶을 즐기는 태도다. 전향적인 자세다. 전체적인 시각에서 보면 좋은 작품이 나온다. 인생이든 사업이든 전쟁이든 예술이든 모두 같은 원리다.
 
전체를 본다는 것은 한편의 그림을 보는 것과 같다. 아무리 잘 그린 그림이라도 부분은 의미가 없다. 세계적인 명화를 보라. 추상화의 창시자인 칸딘스키, 입체파의 거장 피카소, 광기어린 작가 고흐의 그림이든 부분으로 쪼개면 전혀 무가치하게 된다. 무엇을 의도하는지 도통 알 수 없다. 전체와의 고려가 없는 부분은 몰가치하다. 역사에서도 전체와 부분, 부분과 전체의 함수관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가 많다.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의 인상여가 그러한 인물이다.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에는 인상여라는 재상과 염파라는 장군이 있었다. 인상여가 화씨지벽(和氏之璧)사건으로 벼락출세를 하자 염파가 발끈했다. 염파는 인상여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도가 지나친 염파였다. 소위 군대에서 소장이 대장에게 벼른 꼴이다.
 
어느 날 외출을 하다가 염파가 탄 수레와 마주쳤다. 인상여는 자기 수레를 골목길에 비켜 세우고 염파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인상여의 이런 행동은 손가락질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식객들마저 말이 많았다.
 
이에 인상여가 말했다. 먼저 자신이 큰 나라인 진나라 임금에게도 큰소리를 쳤던 사람임을 상기시켰다.
 
“막강한 진나라를 욕보인 사람인데 유독 염장군을 두려워하겠는가. 진나라가 우리를 침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염파와 내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염파와 싸운다면 서로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진나라에게 이익이 된다. 나라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기 때문에 염파를 피한 것이다. 개인적인 감정은 나중 문제다.”
 
나중에 저간의 사정을 알게 된 염파가 회초리를 한짐 가득 짊어지고 인상여를 찾아갔다. 인상여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그리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서로를 배신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이 일화는 문경지교(刎頸之交 ; 서로 죽음을 함께 할 수 있는 막역한 사이), 선공후사(先公後私 ; 공적인 일이 우선이고 사적인 일은 나중에),부형청죄(負荊請罪 ; 가시나무를 지고 죄를 청함) 등의 다양한 고사의 배경이 되었다.
 
인상여와 염파의 차이는 무엇인가. 인상여는 전체에서 부분을 파악한 것이고, 염파는 부분에 국한했다. 전체의 맥락에서 사건을 파악한 인상여의 지혜가 진나라의 침입을 막았다. 인상여가 검은 칠판에 하얀 백묵으로 글씨를 썼다면 염파는 하얀 칠판에 하얀 백묵으로 글씨를 쓴 격이다. 그 차이가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할 만큼 크다.
 
리더는 전체를 보아야 한다. 전체를 보지 못하는 리더는 일을 파국으로 이끈다. 전체는 승자의 언어요, 부분은 패자의 언어일 수밖에 없다.
 
서두에 나왔던 일화는 고목선(枯木禪)이란 화두로 발전했다. 선은 선이되 감각이 살아있는 선이 아니라 마른 나무처럼 메마르고 죽어 있는 선을 가리켜서 고목선이라 부른다. 고목선의 주인공은 철오선사다. 그는 쫓겨나오면서도 그 이유를 몰랐다. 그래서 그는 또 하나의 화두를 일으켰다.
 
“어떻게 하면 암자에서도 쫓겨나지 않고 노파도 실망시키지 않는단 말인가”
 
이런 생각으로 다시 20년을 보냈다. 어느덧 나이 60여세가 되었을 때 갑자기 한 생각이 터졌다.
 
‘불성은 선과 악이 없고, 남녀도 없다.
 길고 짧음이 없고, 더럽고 깨끗함이 없다….’
 
철오선사에게 부분은 사라졌다. 삶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자신만의 울타리에서 벗어났다. 수행이라는 부분에서 삶이라는 전체 무대로 자리이동을 했다. 그는 20년의 수행과 그리고 20년의 고행 끝에 축제의 장에 당당히 등장했다. 주빈(主賓)으로서 말이다. 선악(善惡), 남녀(男女), 장단(長短), 염정(染淨)이 함께 어우러진 축제의 장에서 즐겁게 춤을 추는 철오선사로 거듭 태어났다.
 
철오선사의 깨달음으로 인해 노파의 분노는 자연스레 사그라졌다. 온데 간데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그런데도 아직도 자비가 먼저냐, 수행이 우선이냐를 따질 것인가. 꼭 집어 얘기하자면 자비는 전체이고 수행은 부분이다. 따라서 전체는 승자의 언어요, 부분은 패자의 언어일 수 밖에 없다.

 

머니투데이 정보철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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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 중에 우연히 발견했는데 괜찮구료. 아직 완전히 아는건 아니지만 꽤 높은 수준이오. 완전히 몰라도 되오. 대략 방향만 맞으면. 이 분의 사고방식이 상당히 구조론적이오.

 

리플을 보니 이 분 칼럼이 잘못되었다는건 독자도 알고 있소.

읽어보시고 어디가 맞고 어디가 틀렸는지 논해보시오.

 

철오선사는 무엇을 잘못했소?

칼럼작가는 무엇을 잘못했소?

 


[레벨:15]오세

2012.11.10 (22:16:28)



1. 철오선사는 무엇을 잘못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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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은 관계이오. 

철오선사는 첫단추를 잘못 꿰었고, 두 번째 단추도 잘못꿰었소. 애당초 첫단추인 노파와의 관계가 잘못 맺어졌소. 노파와의 관계가 좋았다면 노파가 굳이 선사를 시험할 이유가 없소. 관계가 틀어진 것이 먼저이오. 구조론에서 말하듯 노파와 선사와의 '사이'가 틀어졌고, 그것이 잘못 꿰어진 첫단추라오. 


그런데 20년이나 또 골방에 틀어 앉아서, 

“어떻게 하면 암자에서도 쫓겨나지 않고 노파도 실망시키지 않는단 말인가”

이따구 고민이나 한다고?

내가 노파라면 철오선사를 찾아가 그 수행처를 다이나마이트로 폭파시켜버렸을 것이오. 아직도 정신 못차렸으니까. 


고목선이 고목이 된 이유는 나무가 햇볕을 못만나고 비를 맞지 못하고 비옥한 대지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즉 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했기 때문이오. 노파를 끌어안고 울든, 손녀딸을 찾아가 다시 껴안든 간에, 아무튼 철오선사는 집이 불태워진 즉시 관계의 장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소. <사이>로 뛰어드는 것이 정답이오. 다시 단추를 새로 꿰어야 하오. 관계를 다시 맺어야 하오. 


그리고 그 관계는 암자에서 쫒겨나지 않기 <위하여>도 아니고 노파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하여>도 아니오. 그것은 내 안에 터져나오는 에너지로, 열정으로, 사랑으로, 자비로 이어지는 관계여야 하오. 그것이 될 때, 더 이상 노파는 스님을 테스트할 필요가 없소. 고목이 아니라 생명으로 살아 숨쉬는 아름드리 나무가 노파와 스님 사이에서 무럭무럭 자라날 테니까. 스님의 가슴에 핀 꽃 한송이의 향기가 노파의 늙은 코에도 전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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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칼럼작가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는 여전히 정답에, 화살이 날아가 꽂힌 과녁에 눈이 돌아가 있소. 그는 지족과 서화담 사이에서, 인상여와 염파 사이에서, 노파와 철오 사이에서, 전체와 부분 사이에서 정답을 찍고 자랑하고 있소. 하지만 그는 놓치고 있소. 중요한 것은 유혹에 응하거나 응하지 않거나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인상여가 염파와 싸우거나 싸우지 않거나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노파가 불을 지르고, 지르지 않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이오. 


중요한 것은 바로 유혹 그 자체이오. 유혹이라는 살아 숨쉬는 펄떡거리는 에너지의 장, 그리고 그 열정과 흥분의 무대에 서화담과 지족, 그리고 황진이가 초대받았다는 것이 중요하오. 


중요한 것은 바로 전국시대라는 고도의 긴장이 걸려있는 공간이오. 그 공간에 인상여와 염파는 하나의 배역을 맡아 연기한 것이오. 인상여가 잘했고, 염파가 못했고는 중요하지 않소.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 거대한, 어마어마한 긴장의 공간에서 인간 군상들이 연출한 드라마라오. 


중요한 것은 앞에서도 언급하듯이 노파와 철오의 관계라오. 노파가 테스트를 해야 하는 관계라면 이미 오래전에 그 관계는 파탄난 것이오. 누군가 시험문제를 내고 누군가는 거기에 답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비참한 것이오. 더군다나 한 번 틀린 문제를 또 다시 20년 동안 고민해야 한다면 그것은 설령 정답을 찾았다 하더라도 비참하고 비루하기 짝이 없소. 관계는 북채로 한가운데를 두드리면 나는 북소리와 같아, 관계가 올바로 맺어지면 바로 소리가 나게 되어있소. 20년을 또 기다린다고? 미쳤소?


칼럼작가는 정답을 찍으려다 정답을 놓쳤소. 

우리가 보아야 하는 정답은 지금 동렬님의 글에 답하는 나에게 있는 것도, 동렬님의 글에 있는 것도, 독자들의 눈에 있는것도 아니오. 


정답을 맞추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질문이 나를 불렀소. 그리고 나는 그 초대에 응하였고. 


원래 그러한 것이오, 

황진이가 지족을 파계시키려고, 서화담을 테스트하기 위해 유혹하였다면 그것은 참으로 비루한 것이오. 

진실은, 유혹이라는 무대에 세 사람이 초대되었고, 이 셋이 길이길이 인구에 회자다는 명장면을 남겼다는 것이오. 

그것으로도 충분하오. 


에너지가 부르고, 거기에 답하고. 완전성은 그 안에 있소.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2.11.10 (22:47:25)

 

오세님 답변은 그럴듯하나 잼없소. 확 와주는게 없소. 이 칼럼 작가는 엉터리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나름대로 눈이 확 뜨이는 표현을 다수 쓰고 있소. 뭔가를 아는 양반이오. 그러나 참된 깨달음은 없소.

 

철오는 할매가 관음보살임을 알아보지 못해서 쫓겨난 거요. 20년 동안 매일 마주치고도 그가 누구인지 모르니 쫓겨날 밖에. 황금이 눈앞에 있어도 관계를 맺지 못하면 쫓겨나는 것은 당연.


지족은 황진이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해서 쫓겨난 거요. 황진이는 지족을 유혹했지만 지족은 황진이를 유혹하지 않았소. 북과 북채는 제대로 만나야 하오. 북채가 북을 아무데나 막치면 연주가 아니라 구타가 되오. 그 경우는 소리가 나지 않소.


화담은 황진이를 유혹했고 둘은 서로를 알아보았고 그래서 소리가 난 것이오. 이 칼럼 작가는 서화담과 황진이의 러브스토리를 모르는 사람이오.

 

축제 어쩌구는 제법 그럴듯한데 에너지가 없소. 막연히 즐기자는건 답이 아니오. 관계를 맺고 존엄을 얻는데서 에너지는 작동하오.

 

축제를 즐기는게 아니라 걸맞는 연주를 해야 하오. 상갓집에서 춤 추면 매맞소. 잔치집에서 곡하면 매맞소. 만날 사람이 만날 장소에서 만나야 하오. 결론은 항상 그렇지만 서로 대등해야 한다는 것. 서로 필요로 해야 한다는 것.


작가는 자비를 이야기하는데 자비가 일방적인 베풀음, 시혜라고 여기면 착각이오. 자비는 에너지요. 에너지는 명연주에서 나오고 명연주는 명만남에서 얻어지오.

[레벨:15]오세

2012.11.10 (23:14:54)

전송됨 : 트위터
그렇구려. 황금이 주인을 만나듯 노파를 선사가 알아보듯 화담이 황진이를 대접하듯 정상에서 만나야 하오. 고맙소
[레벨:15]오세

2012.11.11 (02:35:35)

화담과 황진이의 만남은 지성과 예술의 만남. 

하나의 세계와 또 하나의 세계가 부딪힌 사건. 

화담은 황진이를 정상에 선 예인으로 대접하였고,

황진이는 그렇게 자신의 진면목을 알아준 화담을 최고의 지성으로 대접하였고, 


둘의 스토리는 그야말로 조선시대판 정상회담. 

둘이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일대 사건. 

극과 극이 만난것. 남극과 북극이 부딪힌 것만큼이나 대사건. 


황진이는 아마 화담을 만나기 전, 

철오 선사에게 젊은 처자를 보낸 노파처럼 끊임없이 남자들을 시험했을 것이오. 

자신의 몸도, 자신의 기예도, 자신의 언변도 아닌, 황진이라는 최고의 예인을 알아볼 위대한 안목을 지닌 사람을 찾았던 것이오. 


아니지. 


달마가 서쪽에서 온 것처럼, 뜰 앞의 잣나무처럼, 인도라는 세계를 품고 중국이라는 세계와 만난 달마처럼, 황진이 역시 화담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가슴속에 거대한 열정을, 에너지를 품고 그렇게 서쪽으로 가다가 화담과 부딪힌 것이오. 북태평양 기단과 해양성 한대기단인 오호츠크 해 기단이 서로 거대한 수증기 덩어리를 품고 만나듯, 그렇게 만난 것이오 한 사람은 예술을 한 사람은 지성을. 



북태평양 기단과 해양성 한대기단인 오호츠크 해 기단이 서로 거대한 수증기 덩어리를 품고 만나면 한달 동안 내리 비가 쏟아지듯,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이 만나면 6.15 남북 공동선언이 나오듯, 

오바마와 청소부가 만나면 멋진 장면이 연출되듯. 

그렇게 만남으로 위대한 무언가를 낳으려면 서로가 대등해야 하고, 서로가 대등하려면 결국 각자가 존엄해야 하오. 

그리고 우리는 존엄한 관계 속에서 진실로 서로 대등해질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맞설 수 있고 맞물릴 수 있고 하나 될 수 있고, 낳을 수 있소. 


서화담과 황진이의 만남은 이후에도 계속 재현되었소. 

백석은 자야를 만나고, 

이상은 금홍을 만나고, 


그렇게 지성은 예술을 만나 역사에 남고, 작품을 낳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재현되고 있소. 

완전함은 또 다른 완전함을 낳소. 

정상회담은 계속 되오. 

그렇게 진도를 나간게 바로 진보의 역사. 

프로필 이미지 [레벨:11]탈춤

2012.11.11 (08:08:41)

지켜본바 순간은 완성되었소 아름답소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2.11.11 (09:27:52)

선문답은 문제에 대해 답을 맞추는게 아니고 답에 대해 문제를 조직하는 것이오.

 

어디선가 소리가 났소. 그 소리는 종소리요. 그렇다면 누가 종을 쳤다는 이야기. 그 종은 완전한 종이오. 만약 완전하지 않다면 소리가 나지 않을테니까. 그러므로 답은 완전성이오.

 

답은 정해져 있고 거기에 맞춰 문제를 조직해 내기요.

 

이야기들이 지어질 당시에는 사람들이 순박해서 내가 어제 길에서 문수보살을 만났다 해도 믿던 때였소.

 

철오는 마땅히 살아있는 관음을 안으니 백룡이 청운을 만난듯하다는 말 정도는 해야 관음할매의 김성모식 싸대기 108단 콤보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오.

 

지족은 황진이를 기생취급해서 짤린 것이오. 황진이가 원하는 것은 존엄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오.

 

중국이 원하는 것은 존엄이지 달마에게 뭐 한 소식을 배워보자는둥 이딴 것이 아니오. 중국은 준비된 종이고 달마가 그 종을 쳤소. 달마가 오기 전부터 중국은 고유한 깨달음의 도를 가지고 있었소. 그것을 달마가 알아봤다는 이야기.

 

몽룡이 춘향을 알아보듯 단숨에 알아봐야 이야기가 되오. 선문답은 일정한 공식이 있기 때문에 알고 보면 꽤 잼있소.

 

[레벨:15]오세

2012.11.11 (12:3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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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렬님이 동쪽으로 온 이유도 알겠구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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