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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1490 vote 0 2005.12.14 (17:58:40)

“인디는 선(善)하고 메이저는 악(惡)하다.”
“기획사는 지배하고 가수는 꼭두각시 노릇이다.”
“인디는 자부심에 살고 가요계는 돈맛에 산다.”
“진짜 실력있는 고수는 인디에 있고 방송국에는 잔재주 밖에 없다.”

이런 식의 인디와 메이저 사이에, 혹은 언더와 방송국 사이에 50 대 50의 팽팽한 대립공식이 만들어진다. 이 중 어느 한 쪽에 가담하기만 해도 최소한 자부심 하나는 얻는다.

그런데 서태지가 뜨면서 이 공식은 폐기되었다.

“서태지는 실력이 있으면서도 주류다.”
“서태지는 자부심과 돈과 명성과 권력의 네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다.”

이런 신화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되면? 인디 혹은 언더는 실력도 없이 뒤에서 투덜대는 집단이라는 오명을 쓰게 된다. 참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디밴드들에는 진짜 실력있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들 중에 서태지보다 실력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서태지처럼 영리하고 치밀할뿐더러 거기다 사업수완도 갖춘 것은 아니다.

그 사람들이 어느 한 분야에 100의 능력을 가졌다면, 서태지는 여러 분야에 90의 능력을 가졌을 수 있다. 이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한 분야에서 서태지보다 낫다는 우월성을 내세워서 결코 자기네의 주장을 포기하지 않으려 든다.

“서태지의 사업수완? 그건 반칙이야. 이건 예술이라구. 예술가가 사업을 입에 담다니 천박해, 천박해, 천박해, 천박해!”

순수? 개코나..! 허상과 신화와 환상과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넘의 왕자병, 공주병이라니.

알아야 한다. 판 구도가 이렇게 가게 되는 이면에는 지극히 정치적인 기제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놓고 말하면 각자 타산을 쫓아 정치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이래 늘 그래왔다. 음지에서 묵묵히 길을 닦는 사람 따로 있고 양지에서 돈과 명성을 얻는 사람 따로 있다. 재주는 테슬라가 부리고 돈은 에디슨이 벌듯이 말이다. 이러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반드시 충돌하고야 만다. 역사의 경험칙으로 말하면 그들이 서태지들을 인정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만약 인정하면? 그들은 돈도, 실력도, 자부심도, 명성도, 권력도 없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필사적이다.

그러나 누구도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다. 음반시장이 꺾인 것은 서태지 때문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인구 4천만의 좁은 바닥에서 영화시장의 성장, 인터넷의 등장, 게임산업의 발전 등으로 제반환경이 급변했기 때문이다.

역사이래 늘 그래왔다. 영웅이 등장한다. 영웅은 판을 깬다. 영웅은 게임의 규칙을 바꾼다. 그들 입장에서 영웅의 판깨기는 반칙처럼 느껴진다.

“돈이든 자부심이든 뭔가 하나는 줘야 공평하지 않은가?”

부질없다. 애초에 서태지에게 항의할 일이 아니었다. 처음 한국의 문화는 시장규모가 작았다. 이 바닥이 좁기 때문에 음악 하나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던 것이다. 그때가 좋은 시절이었다.

문화의 비약이 일어났다. 스포츠, 영화, 게임, 레저, 등으로 시장은 다변화 되었다. 그 안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줄어들었다. 음악은 점차 상업화 되고 쇼가 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그 역사의 흐름을 인정해야 한다.

서태지 뿐만이 아니다. 월드컵, 인터넷, 벤처붐, 한국영화, 한류붐, 노무현 등 뭐든 뜬다 하는 것에는 100프로 이런 원리가 작동하여 질투와 훼방을 낳는다. 민중들이 열광하고 서태지들을 우상화 하는 것은 그들의 집요한 딴지걸기를 의식한 지극히 타산적인 행동이다.

누구도 황우석을 우상화 하지 않았다. 누구도 서태지를 우상화 하지 않았다. 누구도 노무현을 우상화 하지 않았다. 다만 각자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행동했을 뿐이다.

대중은 서태지를, 노무현을, 황우석을 띄우는 것이 그쪽 세계의 단단한 벽을 깨고 이를 대중화 하여 민중으로 하여금 참여할 수 있게 한다는 본질을 잘 알기 때문이다.

과학도 그렇고 문학도 그렇다. 음악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스포츠도 그렇고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대중 작가가 등장한다. 상업 작가가 등장한다. 스필버그처럼 작품성과 흥행성의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드는 대가가 나타난다.

이때 순수를 표방하는 진골세력들의 집요한 방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스필버그는 진짜가 아니야. 그는 상업주의 기술자일 뿐이라구. 절대로 그에게 그랑프리를 내줄 수는 없지. 그것이 우리 칸 영화제의 자부심이야.”

그 결과로 스필버그는 더럽게도 상을 못받아서, 아주 상에 한이 맺혀서 순전히 상 받기 위한 목적의 영화를 만들게 된다.(아카데미는 원래 안쳐주는 거고.)

한국영화라도 그렇다. 헐리우드는 경박하고 한국영화는 주제의식이 있다는 식의 2분법적인 대립구도가 존재한다. 그러나 ‘주유소 습격사건’ 이후 한국영화의 흥행은 그런 공식을 깨부순다.

경박한듯 예사롭지 않고, 무거운듯 발랄하며 흥행과 비평 사이에 줄타기 곡예를 부리는 이른바 ‘깨는 영화’가 등장한다. 이럴 때 이를 가장 크게 환영해야 할 평론가가 제일 먼저 분노한다.

까놓고 말하자. 지금껏 한국영화 깎아내리기에 나서지 않은 평론가가 있었던가?

실제로 80년도 국산방화에는 과잉된 엄숙주의가 있었다. 그때는 시절이 그랬다. 민주화 이후 한국영화는 달라졌다. 그러나 평론가들은 80년대를 그리워 한다. 한국영화가 헐리우드와 홍콩영화에 개박살 나던 그때가 평론가들이 큰소리 치던 좋은 시절이었다.

80년대 .. 어차피 국산 방화는 흥행이 안되므로 작품성에만 초점을 맞추어 비평하면 된다.
2000년대.. 관객과 평단의 반응이 180도로 상반되게 나타나곤 한다. 관객이 평단의 눈에 띄지 않은 뭔가를 포착했는지 신경써야 한다.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2000년대 들어 평단에서 극찬한 영화는 쪽박을 면하지 못하고, 평단이 씹은 영화는 대박을 맞는 일이 많아졌다. 그렇다면 대중의 판단이 틀렸다는 말인가?

물론 대중의 판단이 틀릴 때도 많다. 그러나 그것도 한 두 번이다. 대중의 안목이 늘 틀리는 것은 아니다. 특히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가 등장할 경우는 대중의 판단이 옳은 경우가 더 많았다.

평단이 알아보지 못했는데 대중이 진가를 알아본 영화가 그 얼마나 많았던가?

평론가가 씹은 영화가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고 대중의 찬사가 높아지면 평단에서도 슬그머니 입장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영화사 눈치도 봐야 하고.. 평론해 먹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예술과 산업의 경계선에서

예술은 예술이고 산업은 산업이다. 테슬라는 과학자고 에디슨은 사업가다. 황우석은 둘의 경계지점에 있다. 서태지 역시 그러하다. 예술가는 순수하게 예술만 해야 한다는 것은 그들의 일방적인 선언에 불과하다.

그 경계를 무너뜨려야 한다. 과학과 산업의 경계, 예술과 상업의 경계, 순수와 참여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변혁이다. 그 변혁의 틈새에 대중의 숨쉴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수구들의 입장.. 예술은 순수해야 한다. 정치적 참여는 가당치 않다.
좌파들의 입장.. 예술은 순수해야 한다. 대중의 참여는 가당치 않다.

이 지점에서 수구와 좌파는 손을 잡는다. 문제는? 대중이 참여하기 위해서는 일정부분 상업화, 산업화 할 수 밖에 없다는데 있다.

좌파의 입장은 원칙적으로 대중의 참여다. 그러나 말만 그렇게 할 뿐 그들은 대중의 참여기회를 원천 봉쇄하려 한다. 대중이 참여하면 그들 진골귀족의 지위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대중의 참여는 언제나 그렇듯이 상업화, 산업화로 나타나기 마련이고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좌파 입장에서 이것은 타락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순수한 예술, 순수한 과학, 순수한 학문에는 대중 일반이 참여하지 못한다. 그 예술은, 그 과학은, 그 학문은 대중과 유리되어 그들 문화귀족들만의 고상한 취미생활이 된다.

예컨대 이중섭이 그러하고, 앤디워홀의 팝아트가 그러하고, 고흐가 그러하고 김홍도가 그러하다.(단원 김홍도는 어느 면에서 인기 있는 상업작가다. 당시 기준으로.) 고흐에게 영감을 준 일본의 우끼요에는 상업주의 목적의 판화그림이었다.

역사적으로 성공한 모든 것은 대중을 받아들이고 포용하였다. 이중섭이나 고흐처럼 사후에 인정받은 작가도 그러하다.

순수 지상주의 귀족들

학자들의 자존심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어떤 수학자는 전공을 물리학으로 바꾸겠다는 제자의 말에 격분했다고 한다.

“아니 자네가 그런 사악하고 타락한 세계에 발을 들여놓다니!”

어떤 수학자는 통계학이나 회계학을 수학으로 오해하는 현실에 격분했다고 한다.

“아니 그런 저급한 손재주 따위를 감히 수학의 반열에 올려놓으려 하다니. 그건 수학이 아니라 산수란 말야. 넌 산수와 수학도 구분하지 못하냐!”

어떻게 보면 그것은 그들의 목숨과도 같다. 역설적이지만 대중이 그들 귀족들의 똥고집을 이해해줘야 하는 측면도 있다. 서태지나 노무현과 같이 판을 깨는 난폭자(?)의 등장은 그들에게 있어서 끔찍한 고통이다.

좌파의 오류는 무엇인가?

정리하자. 좌파들은 인디를 지지하고 주류를 비판하면서도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를 허물어 그러한 대립구도의 판을 깨버리는 자유주의 세력의 등장을 더욱 싫어한다. 아주 몸서리를 친다. 왜인가?

그들은 다만 주류를 비판할 뿐 주류를 전복할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주류가 미워도 그들에게 자부심 하나는 주었는데, 자유주의 세력의 판깨기는 그들의 마지막 밑천인 자존심마저도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다.

수구세력.. 주류 입장에서 비주류를 억압한다.
좌파세력.. 비주류 입장에서 주류를 비판하지만 이러한 대립구도를 보호한다.
자유주의.. 주류와 비주류의 대립구도 자체를 허물어 버린다.

좌파의 문제는 영원히 비주류를 자처하며, 말로만 주류를 공격하며 그것으로 자부심을 얻으며 그것으로 자신의 진골 신분으로 영속화 하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류를 비판해도 주류와 비주류의 대립구도 자체는 유지해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서태지와 같은 영웅이 출현하여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를 허물고, 판에 끼기만 해도 50프로 공짜먹는 대립구도의 판을 깨고 변증법적인 발전을 이뤄낸다. 이것이 역사의 법칙이다.

황우석을 변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변호하려는 것은 대중의 지혜다. 대중이 바보라서 노무현 우상화를 일삼는 것이 아니다. 대중은 참여를 원한다. 진골 귀족을 견제해야만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노무현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대중은 영리하고 타산적이다. 당신네 좌파 진골 귀족이 바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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