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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4856 vote 0 2016.02.08 (17:16:11)

    

    ### 25,


    만물은 섞인混 데서 났으니, 천지가 생기기 전이었다. 고요하고 쓸쓸한 허공 속에서 홀로 우뚝하니 변치 않더라. 두루 나아가니 위태롭지 않더라. 그래서 천하의 근본이 되니 나는 그 이름을 모른다. 글로 쓰면 도道요 억지로 이름을 붙이면 ‘커지는 것大’이라. 커지는 것大은 가는 것逝이며, 가는 것은 멀어지는 것이며, 멀어지는 것은 돌아오도다. 그리하여 도는 크고,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왕도 크다. 세상에 큰 것이 넷인데 왕도 그 중에 하나다. 왕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며, 하늘은 도를 따르고, 도는 스스로 그러하니 자연이다.


    도는 대大, 대는 가는 것逝이라 했는데 서逝는 진보하는 것, 혹은 무한히 커지는 것으로 봐야 한다. 원래 의미는 점 치는 산대에서 뽑은 괘 중의 하나로 무한히 많은 것을 의미한다는 설이 있다. 자연에서 도, 도에서 무한, 무한에서 하늘, 하늘에서 땅, 땅에서 왕으로 연역하고 있다. 자연≫도≫서逝≫하늘≫땅≫왕의 순서가 엄격하지 않다. 대충 주워섬긴 것으로 보인다. 공자라면 왕≫제후≫대부≫사≫민으로 서열이 엄격하며 이를 봄≫여름≫가을≫겨울의 운행으로 풀이하고 있다. 즉 일의 시작과 중간 의사결정과 결말로 보는 것이다. 왕은 일의 시작을 담당하고, 제후는 의사결정을 담당하고, 대부는 현장을 챙기고, 사는 현장을 오가며 심부름하고, 민은 다스림을 받는다. 하나의 일로 통합되어야 한다. 도 따로, 하늘 따로, 땅 따로, 왕 따로 가면 곤란하다. 자연이라는 말은 얼버무리는 표현이다. 답은 의사결정구조다.


    ### 26,


    무거움에서 가벼움이 비롯되니, 묵직함에서 성급함이 비롯된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루종일 가도 수레를 떠나지 않고, 아름다운 경치가 있어도 초연함에 머무른다. 어찌 만승 수레의 주인으로서, 천하의 몸을 가볍게 하는가? 가벼우면 근본을 잃고 조급하면 망한다.


    무거움에서 가벼움이 나온다. 그러므로 먼저 무겁게 하고 나중 가볍게 해야 한다. 이것이 일의 수순이다. 임금은 무겁게 하고 백성은 가볍게 한다. 아침은 무겁게 밥을 챙겨먹고 저녁은 가볍게 죽을 먹는다. 저녁을 무겁게 먹으면 자다가 깨서 화장실 가야 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살찐다. 무거움에서 가벼움을 연역하는 것은 좋으나 일의 수순으로 풀지 못한 점은 공자와 다르다. 노자는 일의 관점이 없다.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희미하게 짐작할 뿐 확실하게 알아채지는 못했다.


    ### 27,


    잘 가는 수레는 도로에 바퀴자국을 남기지 않고, 말을 잘하면 흠이 없다. 잘 헤아리는 사람은 계산기를 쓰지 않고, 문을 잘 닫으면 잠그지 않아도 도둑이 열지 못하며, 짐을 잘 묶으면 밧줄을 쓰지 않아도 풀지 못한다. 성인은 이렇게 사람을 구하니 쓰는 사람을 버리지 않고, 성인은 이렇게 물건을 구하니 쓰는 물건을 버리지 않아, 이는 밝은 지혜이리라. 따라서 잘 하는 자는 못하는 자의 스승이며, 못하는 자는 잘하는 자의 밑천이 된다. 좋은 스승은 귀하고 못하는 사람도 아낄 밑천이 된다. 잘 알아도 미혹될 것이니 그래서 묘함을 구한다.


    공자는 깨달은 사람이고 노자는 깨달음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이다. 잘 가는 수레는 왜 도로에 바퀴자국을 남기지 않는지 노자는 설명하지 못한다. 잘 헤아리는 사람은 왜 계산기를 쓰지 않는지 노자는 설명하지 못한다. 잘 하는 사람은 일의 시작부분에만 개입하므로 바퀴자국이 남지 않는다. 국회에서 10억짜리 예산은 계산기를 두드리지만 10조짜리 예산은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는 것과 같다. 10조짜리는 적어도 몇 년이 걸리는 일이므로 필수적으로 추가예산이 들어가니 계산할 필요가 없다. 10억짜리는 1개월 안에 집행되므로 어디에 썼는지 알아놓지 않으면 반대파에게 빌미를 잡혀 공격당한다. 일의 초기 단계에 개입하면 자물쇠 없이 잠글 수 있고, 밧줄 없이 묶을 수 있다. 국회는 일의 시작 단계이므로 밧줄 없이 법으로 도둑을 묶고, 경찰은 일의 결말 단계이므로 포승줄로 도둑을 묶는다. 막연히 감으로 아는 것과 옳게 아는 것은 다르다. 노자는 아는 사람이 아니다. 힐끗 본 사람이다.


    ### 28,


    수컷됨을 알고 암컷됨이 되면 천하의 물이 모여드는 바다가 된다. 천하의 물이 모여드는 바다를 얻으면, 상덕常德은 쪼개지지 않으니, 어린이의 마음으로 돌아간다. 밝음을 알고도 어둠이 되면 천하인이 된다. 천하인이 되면 상덕常德에서 어긋나지 않고 무한의 세계로 되돌아간다. 아름다움을 알고 욕됨에 머무르면, 천하가 모여드는 바다가 된다. 천하의 바다가 되면 상덕常德이 채워져서, 통나무처럼 소박해지리라. 통나무가 쪼개져 그릇이 되듯이, 성인이 이를 쓰면 높은 관리가 된다. 그러므로 진리는 둘로 쪼개질 수 없다.


    산처럼 우뚝한 수컷을 알고도 바다같이 포용하는 암컷에 머무르라. 밝은 지혜를 알고도 고요한 어둠에 머무르라. 그러면 천하인이 되어 영원한 덕을 얻고 무한의 세계에 이를 것이다. 아름다움을 알고도 일부러 욕먹는 곳에 가 있어라. 천하가 다 네게로 모여들 것이다. 천하의 바다를 이루니 덕을 얻어 쓸모있는 자원이 된다. 쓸모있는 자원이 되면 높은 관리로 출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진리는 수컷과 암컷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쪼개질 수 없다.
    이랬다 저랬다 하다가 일원론으로 정리하고 있다. 진리는 일원론이다. 구조론은 마이너스다. 여자가 남자보다 위다. 남자가 위고 여자가 아래로 보이지만 원래 무거운 것이 아래로 간다. 아래에서 고요하게 있으면 천하가 저절로 모여드는게 아니다. 중력이 지구 밑바닥에서 흔들어대고 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언론을 통해 계속 흔들어댄다. 시위를 하고, 집회를 열어, 권력을 비판한다. 우리는 막연히 무거운 것이 아래에 있다고 믿지만 지구는 둥그니까 중심에 있다. 여자가 남자를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옆구리를 찔러대며 남자를 긴장시킨다. 여자는 남자를 흔든다. 바다는 산을 흔든다. 무거움은 가벼움을 흔든다. 국민은 정부를 흔든다. 부단히 세상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 군자의 소임이다. 흔들어야 한다.


    ### 29,


    장차 천하를 얻고자 무언가 하려고 한다면 나는 얻을 수 없다고 본다. 천하는 신의 그릇이므로 어떻게 할 수 없다. 덤비면 실패하고, 붙잡으려 하면 잃는다. 고로 만물은 앞서기도 하고 따르기도 하며, 혹은 살살 휘파람불고 혹은 세게 부추긴다. 강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하며 쌓이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한다. 이에 성인은 심한 것을 버리고 사치한 것을 버리고, 대단한 것을 버린다.


    조심해서 살살 하라는 말이다. 이런 말은 시골 선비도 할 수 있다. 공자가 싫어하는 향원鄕原이 이런 식으로 뒤에서 잔소리 하는 사람이다. 공자는 ‘향원鄕原은 덕을 해치는 적이다.’ 라고 말했다. 군자는 선제대응한다. 빈 땅에 와서 불을 지른다. 화전민이 숲을 불태워서 씨앗을 파종하는 것과 같다. 불은 세게 지르든 약하게 지르든 장작이 알아서 타는 것이다. 부채질 할 이유도 없고 풀무질 할 이유도 없다. 일의 시초에 서는 사람은 거리낌이 없다. 일의 결말에 서는 사람은 이런 걱정꾼이 된다. 노자는 일의 결말에 서므로 초읽기에 몰란 비둑기사와 같아서 혼자 중얼중얼대는게 걱정이 많은 거다.


    ### 30,


    도로 임금을 돕는 사람은, 강한 군사로 천하를 평정하지 않는다. 결과는 항상 반대로 되기 때문이다. 군대가 머물러 있었던 자리에는 가시덤불만이 무성하고, 큰 전쟁이 끝난 뒤에는 큰 흉년이 든다. 선善한 자는 이루면 곧 거기서 그치며, 강함을 취하지 않고, 결과를 내세우지 않고, 성과를 내세우지 않고, 우쭐대지도 않고, 부득이하게 챙길 뿐, 강强으로 하지 않는다. 만물은 성하면 낡으므로 이는 도가 아니라 도에서 벗어나면 금방 망한다.


    잘못이 잘못인줄은 알지만 이를 대체할 옳음은 모른다는게 노자의 맹점이다. 공자는 예악禮樂으로 군대를 대신하고자 했다. 예禮는 외교관의 매너이고 악樂은 문화예술이다. 예禮는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개인을 평가하는 준거다. 악樂은 개인이 자기 재능을 과시할 수 있는 개인주의다. 개인이 의사결정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남이 보는 영화를 본다고 우르르 몰려가서 천만관객을 채우지만 개인이 주체가 아니다. 남이 패딩을 입는다고 나도 패딩을 입는다면 개인주의가 아니다. 예禮로 개인을 평가하고 악樂으로 개인에게 기회를 준다. 예禮는 장기자랑대회에서 침착하게 순서를 지키는지 평가하는 것이며 악樂은 제대로 할줄 아는게 있는지 보는 것이다. 예악禮樂으로 개인을 평가하니 각자가 자기 관심분야에 힘써서 천하는 평정된다. 자기 챙기기에 바빠서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으니 다툼은 일어나지 않는다.


    ### 31


    좋은 군대는 더 재수가 없으니, 만물이 이를 싫어하여, 도가 있는 자는 피한다. 군자가 머무를 때는 왼쪽을 찾고, 군대가 진을 칠 때는 오른쪽을 쓴다. 군대는 재수가 없으니 군자는 군대를 쓰지 않는다. 부득이 할 때는 조용하고 담담하게 쓴다. 이기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 이기는 것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자는 살인을 즐기는 자다. 살인을 즐기는 자는 천하에 뜻을 펼 수 없다. 좋은 일은 왼쪽에서 하고, 궂은 일은 오른쪽에서 한다. 계급이 낮은 편장군은 좌측에 서고 계급이 높은 상장군은 우측에 서니, 이는 장례식의 예법이다. 사람을 많이 죽였으면 적이라도 슬퍼해야 하고, 전쟁에서 이겨도 장례식의 예법으로 한다.


    ‘오른손’이라는 말에은 ‘올리는 손’이라는 뜻이 있다. 올바르다는 뜻도 있다. 이는 영어도 마찬가지다. right는 오른쪽과 바르다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병사는 오른손에 무기를 들기 때문이다. 왼손잡이 병사가 대오에 끼어 있으면 실수로 자기편을 찌르게 된다. 그러므로 왼손잡이는 입대할 수 없으니 ‘왼’이라는 말에는 ‘남는다, 내리다’라는 뜻이 있다. 현대의 군대도 수류탄 투척 훈련때 문제가 생긴다. 왼손잡이용 수류탄을 따로 만들어야 할 판이다. 군대가 포진할 때도 항상 우익에 베테랑을 두었다. 그리스 중갑병이 특히 이 원칙을 잘 따른다. 앉는 자리는 반대로 입구에서 볼 때 좌측이 상석이니 위삿람이 앉는 자리고, 오른편이 아랫사람이 앉는 자리다. 임금과 마주보고 앉을 때는 임금과 대각선으로 앉아야 한다. 그래서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높다. 오른쪽은 문이 있어서 사람이 드나들기에 상석이 될 수 없다. 운동장을 돌아도 시계반대방향으로 돈다. 오른손에 무거운 무기를 들었으므로 자연히 대각선방향으로 보고 약간 왼쪽으로 치우쳐 가게 된다. 글씨를 써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게 맞다. 노자의 이야기는 상당히 엉뚱한 거다. 본질에서 벗어났다.


    ### 32,


    도는 늘 이름이 없으니, 작고 투박하지만, 천하도 신하로 부릴 수 없다. 왕과 제후가 도를 지킨다면 만물이 스스로 찾아올 것이다. 하늘과 땅이 화합하여 감로같은 비를 내리듯, 백성은 다스리지 않아도 스스로 고르게 된다. 처음 무엇을 만들면 이름이 생기니, 이름이 있으면 멈춤을 알아야 하고, 멈출줄 알면 위험하지 않다, 도가 천하에 있는 것은 강물이 바다를 찾아가는 것과 같다.


    앞에 다 나온 내용의 반복이니 달리 해설할 것이 없다. 문장력은 형편없다.


    ### 33, 


    아는 자는 똑똑하고, 자신을 아는 자는 더욱 밝다. 이기는 자는 힘이 있고, 자신을 이기는 자는 더욱 강하다. 만족을 알면 부자이고, 해내는 자는 뜻이 있고, 겸허히 제 자리를 지키는 자는 오래가고, 죽어도 잊혀지지 않으면 오래 산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이 말은 델피의 신전 벽에 새겨져 있던 말이라고 한다. 헛똑똑이들이 항상 하는 소리다.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의사결정권’이다. 나를 안다는 것은 나의 의사결정영역을 안다는 말이다. 의사결정에 있어서의 주체성을 아는 것, 곧 자기 권리를 챙길줄 아는 것이 나를 아는 것이다. 그러나 소인배들은 이를 반대로 해석하여 ‘네 분수를 알아라.’ ‘주제파악을 해라.’ ‘주제넘게 까불지 마라’는 뜻으로 쓴다. 권력자가 반대파를 제압할 때 쓰는 말이 ‘너 자신을 알라.’다.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추한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자는 일단 소인배 인증이다.



   aDSC01523.JPG


   '도는 암컷이다.'라거나 '도는 덜어내는 것이다.' 라는 표현은 도덕경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이를 일관되게 밀어붙이지 못하고, 이에 반대되는 내용을 뒤섞어서 헷갈리게 해놨습니다. 결국 횡설수설이 되었습니다. 암컷은 낳는 것이며 낳음은 무위가 아니라 인위입니다. 낳음은 만남에 의해 이루어지며, 만남은 손으로 잡기 전에 눈으로 보고 만나는 것이며, 손으로 잡아야 행위인 것이 아니라, 백미터 밖에서 눈으로 봐도 이미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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