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226 vote 0 2016.02.07 (18:52:02)

     

    ### 15,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는 미묘하고 현통하여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알 수는 없으나 억지로 말해본다. 조심함은 겨울에 찬 개울을 건너는 듯 하고, 망설임은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 하다. 몸가짐은 손님과 같고, 풀어지면 얼음이 녹듯하고, 우직하기로는 통나무와 같고, 마음을 비우니 큰 계곡과 같고, 섞일 때는 흙탕물과 같다. 누가 이 탁한 것을 가라앉혀 맑게 할 수 있는가? 누가 이를 안정시켜 되살아나게 하겠는가? 이 도를 깨달은 사람은 채우지 않으니 절대 채우지 않는다. 덮어둘 뿐 새로 이루지 않는다.


    공자는 이르기를 “군자는 쿨하고坦蕩蕩 소인은 찌질하다長戚戚.”고 했다. 이건 뭐 찌질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다만 그 시대가 워낙 절망적인 시대였기 때문에 뜻있는 선비가 이 지경에까지 몰렸다고 볼 수 있다. 공자도 무수히 모함을 당하고 견제를 받아 여러번 죽을 뻔 했다. 위나라에서는 귀족들이 공자를 암살하겠다고 위협해서 임금이 공자를 등용하지 못했다고 한다. 임금은 대개 허수아비이고 세력있는 귀족들이 임금을 갖고 놀던 시대였다. 그러나 절망 속에도 작은 희망은 있는 법, 중국어는 항상 이중적인 메시지가 있으므로 부정하고 또 부정하며 그 부정의 단호함 속에 역설적인 희망이 암시되어 있다. 두 번 부정하면 긍정이니까.


    ### 16,


    지극한 비움에 이르고, 두터운 고요함을 지킨다. 만물은 서로 어울려 지어지니, 나는 그 순환을 본다. 일제히 일어나지만 다시 근본으로 되돌아간다. 근본으로 돌아감이 정靜이라, 그것은 천명을 회복함이라. 복명은 상常이라, 상常을 아는 것을 명明이라 한다. 상常을 모르면 망한다. 상常을 알면 용容이니, 용容은 공公이며, 공公은 왕王이다. 왕王은 하늘天이니 하늘이 도道다. 도道는 굳건하니 이 도리를 알면 죽을때까지 위태롭지 않다.


    위로는 하늘처럼 비워라. 아래로는 땅처럼 두터워라. 천지간의 만물은 서로 어울려서 일어나도다. 나는 그 영원한 순환을 보노라. 만물은 일제히 일어나지만 다시 근본으로 돌아간다. 근본으로 돌아가면 깨끗해지니 비로소 천명을 회복한다. 천명은 불변의 진리다. 불변의 진리를 알면 밝고, 진리를 알면 천하의 대표성을 얻으니, 이는 일원화 되는 것이고, 그것은 왕이다. 왕은 하늘이니 도道다. 대충 기분나는대로 에너지의 순환과 불변성을 써놓은 것이다. 마지막에는 일원론으로 끝맺고 있다. 왕은 절대자이니 진리는 상대적이지 않고 일원적이라는 의미다. 이는 상대성을 강조한 도덕경의 앞부분과 모순된다. 시詩로 받아들이는게 맞다. 중국어는 항상 이중적인 의미가 있으며 의미가 고착되는 것을 싫어한다. 특정한 의미로 고착시키는 것은 노자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필요한대로 맞춰서 받아들이면 된다.


    ### 17,


    최상은 존재조차 잊혀지는 자이며, 그 다음은 친밀하여 칭찬받는 자이고, 그 다음은 무서운 자이며, 그 다음은 무시되는 자다. 믿음이 부족하면, 믿음을 얻지 못한다. 넉넉하구나. 그 말을 아낌이여. 일이 성공하면 백성들은 모두 저절로 된 것이라고 말한다.


    앞에서 도道는 왕이라고 했으니, 왕의 통치술에 비유하여 진리를 설명한 말로 보는게 좋다. 최상의 진리는 존재하나 인간이 알려고 하지도 않는 경지이며, 그 다음은 인간이 알아내고 칭찬하는 좋은 지식이고, 그 다음은 무서운 전쟁기술이고, 다음은 쓸데없는 지식이다. 진리가 구태여 겉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니, 사람들은 모두 자연에 의해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고 여긴다.


    ### 18,


    “큰 도가 무너지니, 인의가 이를 대체하고, 지혜가 나타나니 곧 거짓이 생겨났다. 육친이 불화하면 효와 자비가 나타나고, 나라가 혼란하면 충신이 나타난다.


    위가 무너지면 아래가 바쁜 법이다. 상부구조가 끝나면 하부구조가 작동하는 법이다. 사건의 원인측이 다하면 결과측이 작동하는 법이다. 머리가 게으르면 손발이 고생하는 법이다. 이는 원인에서 결과까지 다이렉트로 치고나가는 연역적 사유다. 노자 특유의 상대론이나 순환론과 모순된다. 오히려 도가 행해지면 벼슬하고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물러나라는 공자의 사유에 가깝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는 하나의 일 안에 공존한다. 밝음이 다해서 어둠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밝음은 잠시 가려졌을 뿐 다하지 않는다. 진리는 망라하므로 불변한다는 노자 자신의 가르침과 상충된다. 진리의 상대성과 절대성 사이에서 혼란해 하고 있다. 노자는 일관되지 않다. 진리의 여러 측면을 장님코끼리 만지기 식으로 열거하고 있다. 체계가 없다.


    ###


    19, 


    성聖을 끊고 지智를 버리면 백성의 이익이 백배다. 인仁을 끊고 의義를 버리면 백성은 효孝와 사랑慈으로 돌아온다. 기술을巧 끊고 이익利을 버리면 도적이 없어진다. 그런데 이 세가지는 만들어낸 인간의 문화이므로 부족하다. 그러므로 근본을 드러내어, 바탕을 보고 소박함을 끌어안아서 개인의 작은 욕심을 줄여야 한다.


    성지聖智와 인의仁義와 교리巧利는 유가적 가치다. 유가를 부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자연의 근본을 드러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주장을 반격한다면 그것은 선제대응이 아니다. 노자는 유가를 공격하고 있다. 이것은 선수를 잡는 것이 아니라 후수를 잡는 것이다. 연역이 아니라 귀납이다.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상대적 대응이다. 군자의 가르침이 아니라 소인배의 임기응변이다. 진리의 가르침이라고 하기에는 쪽팔리는 수준이다. 그래서 유가의 주장을 받아치는 소인배 짓을 하지 말고 자연의 본래에서 연역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철회하고 있다.


    ### 20,


    학문을 끊으면 걱정이 없다. 공손한 대답 ‘유唯’와 불손한 대답 ‘아阿’는 무엇이 다른가? 선善과 악惡은 얼마나 다른가? 사람들이 겁내는 것이 나라고 어찌 겁나지 않겠는가?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라고 가르쳤는데 노자는 모르는 것을 억지로 아는척 하려고 하니 언어가 혼란스럽다. 사람들이 노자의 허튼소리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니 더 꼴이 우습게 되었다. 군자는 사건의 원인측에 서므로 세밀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소인배는 결과측에 서므로 낱난이 구분한다. 군자는 불을 지르는 사람이므로 성냥불이든 라이터불이든 장작불이든 따지지 않는다. 어떻게든 불이 옮겨붙으면 그만인 것이다. 소인배는 불을 끄는 사람이므로 불을 많이 껐는지 적게 껐는지에 따라 받아가는 일당이 다르다. 소인배는 세세하게 구분한다. 소인배의 학문은 걱정을 낳지만 군자의 학문은 걱정이 없다. 노자는 군자와 소인배를 구분하지 못하므로 언어가 촌스럽다.


    황망하여 중심잡지 못하겠다. 사람들은 즐거워하고, 소 잡아서 잔치를 열고, 봄날을 맘껏 즐기나 나는 버려진 아이와 같고, 웃지도 못하는 갓난아이 같다. 돌아갈 곳 모르니 고달프다. 세상사람이 다 여유로운데, 나만 홀로 이렇게 있다. 나는 어리석어서 마음이 혼란하다. 사람들이 다 잘 살지만 나는 멍청하다. 세상사람들 다 잘 사는데 나는 번민한다. 사람들은 살아가는 이유가 있으나 나는 쓸모가 없다. 다만 다른 점은 나는 만물의 근본을 찾는 것이다.


    후반부는 나중 추가된 왕필본이라고 하는데 언어가 유치하다. 구조론에서 하지 말라는 자기소개다. 머저리의 헛소리다. 노자의 저술은 절대로 아니다. 누가 여백에 신세한탄을 써놨는데 필사하는 사람이 모르고 집어넣은 듯 하다.


    ### 21,


    큰 덕德의 모습은 오직 도道를 따른다. 도道가 물질을 내니 미묘하고 황홀하다. 황홀하고 미묘한 가운데 우뚝한 모습이 있다. 그윽하고 어두운 가운데 정밀함이 있다. 정밀함은 참된 가운데 믿음이 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을 떠나서는 헤아릴 수가 없다. 우리가 온갖 크기와 수량과 형상을 가늠하는 것은 이래서다.


    도는 에너지다. 에너지의 작용은 우리의 눈에 잘 보이지 않으니 미묘하고 황홀하다. 황홀한 가운데 우뚝한 형상이 있다. 그윽하고 깜깜하나 정밀하게 돌아간다. 정밀하므로 우리가 믿을 수 있다. 이래서 우리는 진리를 알 수 있다. 노자가 모르는 것을 억지로 아는 척 하니 언어가 조잡하다. 전체적으로는 에너지 작용이 눈으로 봐서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결과만은 확실하다고 말하고 있다. energy라는 말의 어원은 ‘안에서 일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밖에서는 안 보인다. 그러나 확실한 결과를 도출하므로 믿을 수 있다.


    ### 22,


    휘어지면 온전하고, 구부리면 곧아진다. 패인 것은 채워지고, 낡으면 새롭게 된다. 작은 것은 얻게 되고, 많은 것은 희망하게 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나의 이치로 천하를 꾸린다. 내보이지 않아도 분명하고, 긍정하지 않아도 밝혀지고, 쳐부수지 않아도 공적이 있고, 자랑하지 않아도 우뚝하다. 다투지 않으므로 천하도 이와 다투지 않는다. 옛말에 굽은 것이 바르다는 말이 어찌 농담이겠는가. 다치지 말고 온전히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리라.


    대나무는 휘어지니 부러지지 않고 그 몸이 온전할 수 있으며, 철사는 구부려야 오히려 곧게 펼 수가 있다. 비어진 부동산이 있으면 언젠가는 건물로 채워질 것이며, 작은 것은 쉽게 챙겨서 좋은 것이고, 큰 것은 미래의 희망을 줘서 또한 좋은 것이다. 차기 대통령자리가 누구 자리인지는 증명하지 않아도 문재인이고, 새누리가 이를 인정하지 않아도 내년 연말이 되면 밝혀진다. 구태여 내가 새누리에 쳐들어가지 않아도 선거에 기여할 수 있다. 자랑하지 않아도 돋보일 수 있다. 찌질한 애들과는 말을 섞지 않으니 천하도 나와는 다투지 않는다.
    깨달음은 직관이다. 그것이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노자는 직관적으로 뭔가를 느끼기는 느꼈지만 그것이 일의 기승전결을 모른다. 공자는 아는데 노자는 모른다. 이것이 ‘일’이라는 것을 모르므로 현장에서 이 원리를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노자는 모른다. 모르면 닥치고 있어야 한다. 닥치고 있으면 내 몸 하나야 온전히 보전할 수 있지 않겠는가? 뭐 이런 뻘소리다.


    ### 23,


    자연은 말로 하지 않는다. 다만 종일 불어대는 회오리바람이 없고, 종일 내리는 비도 없다. 누가 이렇게 하는가? 천지다. 이렇듯 천지도 오래 움직이지는 않는데 하물며 사람이 변덕을 부린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그러므로 도를 따라 일한다면, 도가 있는 자는 도에 묶이고, 덕이 있는 자는 덕에 묶이고, 잘못된 자는 잘못에 묶인다. 도에 묶이면 도를 얻어서 즐기고, 덕에 묶이면 덕을 얻어서 즐겁고, 잘못된 자는 잘못을 저질러놓고 즐거워하니, 믿음에 묶임이 없으면 신뢰도 없다.


    자연에 돌발현상이 있어도 그게 오래가지는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명박이 갑자기 선행을 한다거나, 박근혜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는 수가 있지만 그게 가면 얼마나 가겠는가? 도둑놈은 결국 도둑질을 하고, 사기꾼은 결국 사기를 친다. 가끔 조중동이 괜찮은 기사를 써서 ‘어? 혹시 정신차렸나?’ 하고 다음 페이지를 보면 다시 본래의 꼴통으로 되돌아가 있다. 다음 포탈에 가끔 뜨는 조중동의 낚시성 착한 기사에 낚이지 말라. 이렇듯 사람은 가끔 본성에서 벗어나지만 멀리 안 가므로 믿을 사람을 믿을 수 있다. 믿는 사람은 믿음을 얻는다.


    ### 24,


    발 끝으로는 서 있을 수 없고, 가랑이를 벌리고는 가지 못한다. 제자랑 하는 자는 빛나지 않고, 자기 생각에 붙잡힌 자는 멍청하다. 상대방이 가만있는데 이유없이 쳐들어가는 자는 공적이 없다. 스스로 잘난 자는 우뚝하지 않다. 이는 도에 의한 것이니 찬밥이나 뻘짓이라. 다들 싫어하기에 깨달은 사람은 그러지 않는다.


    소인배의 튀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꾸지람인데, 이런 식으로 소인배를 열심히 단속하는 사람이 바로 소인배다. 말을 때리는 사람은 말치기다. 쇠를 때리는 사람은 대장장이다. 개를 때리는 사람은 개자식이다. 소인배와 상종하는 자가 바로 소인배다. 초딩 바른생활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내용이나 소인배를 제압하는 데는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다.



aDSC01523.JPG


    공자는 군자를 가르치고 노자는 소인을 가르칩니다. 소인배의 가르침이 와닿는다면 소인배인 거죠. 그러므로 공자보다 노자가 인기가 있습니다. 물론 예수를 당할 수는 없죠. 공자와 노자의 차이는 매우 큽니다. 노자는 일단 문장력이 떨어집니다. 좋은 표현과 조잡한 표현이 공존합니다. 후대의 가필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래 문제가 있습니다. 논어 안에서도 공자의 말과 제자들의 말은 수준차이가 큽니다. 

List of Articles
No. 제목 글쓴이 날짜sort 조회
3447 공자와 니체 image 1 김동렬 2016-03-21 5370
3446 사랑 78, 구조를 쓰면 쉽다 image 1 김동렬 2016-03-21 5079
3445 언어도를 잇는다 image 2 김동렬 2016-03-20 4899
3444 구조론의 개요 image 김동렬 2016-03-19 5056
3443 사랑 77, 인류의 프로젝트 image 2 김동렬 2016-03-18 4997
3442 논어는 일높이 교육이다 image 3 김동렬 2016-03-17 5342
3441 사랑 76, 스티브 잡스의 방법 image 1 김동렬 2016-03-17 5026
3440 사랑 75, 네오보다는 모피어스 image 1 김동렬 2016-03-16 5140
3439 깨달음 시험문제 image 2 김동렬 2016-03-16 28564
3438 사랑 74, 새로운 세계로 image 1 김동렬 2016-03-15 4684
3437 깨달음의 알파고 image 김동렬 2016-03-14 5123
3436 사랑 73, 아름다움을 안는다 image 1 김동렬 2016-03-14 4597
3435 사랑 72, 혼돈에서 질서로 image 1 김동렬 2016-03-11 5069
3434 사랑 71, 빽이 있어야 한다. image 1 김동렬 2016-03-10 5124
3433 깨달음의 시험문제 image 김동렬 2016-03-09 5076
3432 사랑 70, 깨달음은 감성이다. image 1 김동렬 2016-03-09 5010
3431 사랑 69, 반응에서 호응으로 image 1 김동렬 2016-03-08 4971
3430 망둥이와 꼴뚜기 image 4 김동렬 2016-03-07 6327
3429 사랑 68, 사는 방향으로 가라 image 1 김동렬 2016-03-07 5009
3428 깨달음 시험문제 image 1 김동렬 2016-03-05 59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