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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김동렬*
read 8490 vote 0 2012.10.21 (18:38:41)

 

    깨달음은 미학이다.
    미학은 스타일의 창의다.
    깨달음은 서술이 아닌 묘사다.
    깨달음은 장편소설이 아닌 단편소설이다.
    깨달음은 극화가 아닌 한 컷 만평이다.

 

    서술은 시간의 인과관계를 따르고 묘사는 공간의 구조를 파헤친다. 봄에 뿌린 씨앗이 원인이면 가을의 수확은 결과다. 이는 시간의 인과관계다. 봄에서 가을까지 가다보면 장편소설이 된다. 묘사는 공간의 상부구조 대 하부구조로 본다. 상부구조에서 하부구조로 넘어갈때 반전이 일어나면 그것이 단편소설이다. 그것은 장편극화를 압축하여 한 컷의 만평에 담아내는 것과 같다.

 

    깨달음은 연속극이 아니라 시트콤이다. 
    깨달음은 A나 B가 아니라 둘 사이의 관계다.
    깨달음은 아카데미즘이 아니라 인상주의다.

 

    깨달음은 묘사다. 묘사는 공간의 구조를 복제한다. 그 구조는 상부구조다. 상부구조는 낳음의 공간이다. 그 공간은 김기덕의 섬과 같고, 이상의 33번지와 같고, 헤밍웨이의 바다와 같고, 생떽쥐뻬리의 사막과 같다. 서로 모순되는 둘을 하나의 농밀한 공간 안에 집어넣고 거기서 벌어지는 기묘한 광경을 지켜보며 낄낄댄다. 그것은 시트콤과도 같다. 시트콤(situation comedy)은 어떤 상황을 연출해놓고 그 상황에 연동되어 나타나는 인물들간의 관계를 보여준다. ‘A가 이렇게 하면 B는 이렇게 한다’는 식의 상호작용을 따라가기다. 계 전체가 하나의 소실점에 물려 서로 연동되고 있음을 보는 것, 하나가 변하면 전체가 변함을 보이는 것, 바로 그것이 인상주의다.

 

    깨달음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차리는 것이다.
    깨달음은 대상이 아니라 그것이 놓여있는 환경을 보는 것이다.
    깨달음은 사건의 기승전결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기에 서는 것이다.
    깨달음은 이야기 줄거리가 아닌 완전성의 모형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귀납이 아닌 연역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것이 아니요 가리켜지는 달을 보는 것도 아니요 둘 사이의 관계를 보는 것이다. 깨달음은 어떤 대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러한 관계의 그물 안에 잡혀있음을 보고 정신차리는 것이다. 깨달음은 마술사가 주머니에서 꺼내는 비둘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마술사의 감추어진 의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관객과 마술사는 서로 마주보고 있다. 그러한 공간의 구조를 포착하기다. 그 구조는 상부구조다. 상부구조는 계 전체의 긴장이 모여 있는 하나의 지점이다. 그림의 소실점과도 같다. 건드리면 소리가 나는 지점이 있다. 예민하게 반응하는 지점이 있다. 급소가 있고 타이밍이 있다. 그러한 구조가 하나의 그물코가 된다. 이러한 그물코의 구조를 무한전개하여 널리 망라하면 세상 모두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모으지 않고 만난다. 
    깨달음은 비우지 않고 통한다.
    깨달음은 행복이 아닌 존엄을 추구한다.
    깨달음은 목적지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판단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자기 자신의 조형적 질서를 창의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위하여가 아니라 의하여이다.

 

    위빠사나는 마음을 집중하여 한 곳에 모은다. 간화선은 마음을 비운다. 깨달음은 더 높은 세계와 짝짓고 그 세계와 만난다. 깨달음은 관계다. 더 높은 세계를 만나 더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위빠사나는 작은 하나의 씨앗 안에 세상을 통째로 집어넣는다. 간화선은 씨앗의 눈이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온다. 깨달음은 씨앗이 물과 빛과 거름을 만난다. 그럴 때 급소를 때린다. 깊은 신음을 토해낸다. 그곳에 위대한 낳음이 있다. 선사의 선문답은 그러한 예민한 반응을 보여준다. 임제의 할과 같고 덕산의 방과 같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곧바로 반응하기다.

 

    깨달음은 시간의 인과를 공간의 상부구조-하부구조 관계로 되돌린다.

 

    세상을 설명하는 근본은 인과법칙이다. 그런데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시간이 흐른다. 봄에 심은 씨앗이 가을에 수확된다면 그 과정에 얼마든지 속임수가 들어간다. 씨앗은 뿌리지도 않고 가을에 수확하면 몫을 나누어 주겠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공간에는 동시성이 작동하므로 속일 수 없다. 길을 가다가 모르는 사람에게 뽀뽀를 하면 바로 싸대기를 맡는다. 임제의 할처럼, 덕산의 방처럼 그것은 한 순간에 완성된다. 그것은 관계다. 관계는 클릭 한 번으로 연결된다. 이쪽에서 전화기를 들면 저쪽에서도 전화기를 든다. 서로 모르는 관계이면 싸대기를 맞지만 부부관계이면 깨소금이 넘친다. 깨달음은 고도의 긴장이 걸려 있으면서 바로 반응하는 상부구조의 동시성을 본다. 계 전체에 긴장이 걸렸을 때 싸이의 강남스타일처럼 살짝 쳐주어도 세계가 반응한다. 울컥한다. 그럴때 전체가 팽팽하게 긴장되어 한 점의 소실점에 걸린다. 세상 전체가 한 줄에 꿰어진다. 그 순간에 낳는다. 그럴 때 완전하다. 그 완전성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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