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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4514 vote 0 2006.07.04 (14:53:11)


축구, 월드컵, 한국인

한국의 문제는 무엇일까? 자부심의 결핍이다. 한국인들은 선조들로부터 식민지와 분단과 내전의 역사를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자산에 비해 채무가 많았다. 이것이 한국병이다.

한국병은 치료되어야 한다. 분단은 극복해야 하고 식민지의 상처는 치유되어야 한다. 내전의 찌꺼기인 주한미군은 철수되어야 한다. 비로소 한국인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국가 자부심 순위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사대상인 세계의 민주국가 34개국 중에서 한국이 31위였다고 한다. 미국은 1위, 일본은 18위, 대만은 29위, 옛 동독34위다. 동독을 빼면 끝에서 세째다.

한국인은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 한다. 이러한 부끄러움이 친일, 친미, 친서구, 친북, 외세의존, 외래사상의존, 주체성 결여로 나타난다. 한국인은 자기네끼리 서로 미워하게 되었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팀의 선전은 손상된 자부심을 상당부분 회복시켜 주었다. 2006년의 선전을 기원하는 마음도 같다. 자부심을 회복할 때 한국인은 강해질 것이며 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다.

축구광의 소란이 심한 나라 중의 하나가 방글라데시다. 그들은 집집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국기를 내걸고 그 나라 팀을 응원하다가 다른 나라를 응원하는 이웃을 발견하면 격분한 나머지 총격전을 벌여 몇 명이 죽거나 다친다고 한다. 98년과 2002년의 이야기다. 2006년에는 아직 이런 보도를 접한 적이 없다.

새롭게 떠오르는 축구광의 나라는 치우미의 중국이다. 이탈리아를 숭배하는 중국의 방송해설자는 호주팀을 비난하고 이탈리아를 찬양하다가 시청자의 항의를 받고 방송에서 짤렸다고 한다. 이 중국 아저씨는 지난 2002년에 한국이 이탈리아를 이긴 사실에 격분한 나머지 히딩크의 호주를 비난했던 것이다.

방글라데시인은 왜 자기나라가 아닌 남의 나라 깃발을 대문간에 내걸었을까? 이는 지난해 서울시청 앞 광장에 운집하여 태극기가 아닌 미국의 국기를 흔들어댄 일부 수구꼴통 한국인들의 망동을 연상시킨다.

중국인은 왜 뜬금없이 이탈리아를 응원했을까? 방글라데시인과 마찬가지로 또 수구꼴통들과 마찬가지로 자기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모자란 인간들이 사는 나라들은 쉬운 길을 놔두고 먼 길을 힘들게 돌아가야 한다.

한국의 일부 축구광들과 좌파 찌질이들도 한국팀의 선전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였다. 특히 일부 축구광들은 한국인들의 지나친 응원열기가 순수한 축구게임 자체의 재미를 떨어뜨리고 있는 점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열광적으로 응원하다 보면 축구시합의 재미를 즐기지 못한다. 김남일의 태클은 눈에 들어오는데 지단의 묘기는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기량이 모자라는 나라가 월드컵에 참여한다는 사실 자체에 짜증을 내고 있다.

그들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을 잃어버리는 대신 열광적인 축구팬으로서 서구의 축구강국 축구팬들과 취미와 기호를 일치하는 면에서 그들과 대등해졌다는 사실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한국인 혹은 아시아인의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을 골수 축구팬으로서의 자부심과 교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가치전도 현상은 좌파 지식인들 및 수구꼴통들의 한국에 대한 자조와 경멸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구한말 조선의 귀족들이 외국에 진출한다면 그는 조선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귀족의 자부심으로 대체한다. 즉 그는 자기를 규정하되 조선인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귀족들 중 하나로 규정하는 것이다.

일부 열광적인 축구팬들도 그러한 심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순수한 축구를 원한다. 그것은 기량이 출중한 스타들의 멋진 게임을 관전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질문할 수 있다. 축구는 왜 존재하는가?

지단이나 호나우지뉴의 묘기대행진을 보기 위해서? 그것이 축구의 유일한 목적인가? 만약 그렇다면 축구는 골수팬들의 집안잔치로 끝나고 말 것이다.

골수 팬들은 축구를 잘 아는 동아리 안에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소속감을 느낄 수 있지만, 축구를 잘 모르는 이웃들에게 축구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데서 더 큰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골수팬들의 동아리에 소속되는 데서의 자부심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축구를 잘 모르는 친구들에게 축구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데서 자부심을 느낄 것인가? 나약한 군중은 전자를 택하고 강한 개인은 후자를 택한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없고 그에 따른 자부심이 없는 자는 축구를 잘 아는 높은 클래스의 골수팬 동아리에 소속되는 데서 자부심을 느끼고 그것으로 자기 정체성에 대한 규정을 대신하려 한다. 그런 인간이 문제다.

자기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있고 그에 따른 자부심이 있는 사람은 동아리에 소속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지 않는다. 그는 자기 스스로를 리더로 여기기 때문에 어디에서 리더를 찾아내서 그를 추종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이들 강한 개인들은 축구를 잘 모르는 친구들에게 축구에 대해 설명해주는 데서 축구팬으로서의 보람을 찾는다.  

일부 골수 팬들은 4년 만에 한번씩 축구팬이 되는 거리의 급조된 붉은악마들에게 짜증을 내고 있다. 급조된 붉은악마들이 축구 이외의 다른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애국심을 추구하기도 하고 흥겨운 축제의 분위기를 추구하기도 한다.

그러한 순수로부터의 이탈은 나쁜 것인가? 축구를 통하여 축구가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한다면 잘못인가? 그것은 순수를 잃은 타락인가? 축구에서의 선전을 통하여 국가자부심의 회복을 꾀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모든 잘못은 지나침으로 하여 발생한다. 무엇이든 그것이 지나칠 때 잘못인 것이다. 급조된 축구애국자들의 지나친 소란은 분명 잘못이지만 자기통제가 가능한 범위 안에서 일정한 정도의 본래목적 외 부가가치 창출은 정당하다.

한국인들은 축구를 통하여 새롭게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얻고 또 이를 통하여 자부심을 얻을 수 있다. 지나치지 않는 선 안에서 이러한 방향으로의 전개는 정당하다. 또 일부 지나침이 있다 해서 그것이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사회가 지나치게 모범과 균형과 평형을 유지하려 하면 오히려 어떤 위기상황에서는 모범을 잃고 균형을 잃고 평형을 잃고 허둥되게 된다. 때로는 약간의 지나침도 있어야 하고 그 이후의 충분한 설거지와 뒷정리와 추스르기도 있어야 한다.

거리로 몰려나온 2002년과 2006년의 한국의 급조된 축구팬들 중 일부가 일탈된 행동을 보여주기는 했으나 오히려 미지근했다. 언론이 엘프녀니 시청녀니 하며 뭔가 꾸지람거리, 자아비판거리를 만들어 보려 했으나 오히려 화끈하지 않았다. 그 정도면 충분히 싱거웠다.

어쨌든 2002년과 2006년의 한국팀의 선전으로 한국인들은 많은 것을 얻었다. 얻은 것을 극대화하고 거기서 성공의 모델을 발견하고 또 이를 전파하는 일을 게을리 할 필요는 없다. 그 또한 정당하다.

2006년 한국축구는 브라질을 이긴 프랑스와 비겼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브라질과 시합을 한다해도 지레 겁먹고 주눅들 필요는 없다는 거다. 다른 어떤 팀과의 경기라도 마찬가지다.

일본이 대패한 것은 확실히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진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들은 쓸데없는 태클로 존경하는 브라질 축구영웅의 묘기쇼를 방해함으로써 골수 축구팬들의 볼거리를 차단해서는 안된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런 식이라면 축구할 자격없다. 지나치게 승부에 집착하는 경기를 해서 안되지만 지나친 묘기대행진도 좋지 않다. 스포츠는 전쟁욕구의 대리배설이다. 전장에서의 강한 긴장감을 불어넣지 못하면 그 또한 싱거운 것이다.

한국팀의 경기는 확실히 전장에서의 긴장감을 맛보게 하고 있다. 한국팀의 경기에는 스포츠가 전쟁욕구의 대리배설이라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본질적 요소가 스포츠의 가치를 극대화 하는 것이다. 걸출한 스타들의 아크로바틱한 묘기는 스포츠의 일부일 뿐이다.

골수팬들은 잘 아는 스타들의 아크로바틱한 묘기에 관심이 있겠지만 급조된 팬들은 전쟁을 연상시키는 긴장된 분위기를 원하는 법이다. 지나치지 않은 한도 안에서 광적인 응원도 필요하고 또 훌리건들의 난동도 하나의 양념이 된다. 전쟁에는 원래 벼라별 이상한 것들이 다 끼어들기 때문이다.

물론 무엇이든 지나치면 좋지 않다. 그런데 미식가들은 입속이 얼얼해져서 나중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키게 되더라도 지나치게 맵고 독한 음식을 찾는 법이다. 그들은 임진강 황복을 먹을 때 복어의 독이 약간 남아서 입술이 마비되는 느낌을 얻어야 만족해 한다.

그런 점에서 축구에 숨어 있는 전쟁의 요소, 축제의 요소 또한 충분히 즐길만 하다. 물론 어떤 경우에도 자기통제는 가능해야 한다.

그렇다. 축구는 전쟁이다. 그러면서 정치다. 그러면서 축제다. 그러면서 치유다. 소란으로 빚어지는 손실도 분명 있지만 치유로 얻어지는 긍정적인 효과가 더 크다. 손실은 줄이고 긍정적 효과들을 극대화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한국축구 승산은 있는가?

첫째 - 체격과 체력을 키워야 한다.
둘째 - 유능한 감독과 코치진을 가져야 한다.
셋째 - 충분한 합숙훈련과 더불어 수준높은 평가전을 치러야 한다.
넷째 - 동기부여가 충분해야 한다.

이상의 조건만 갖춰진다면 적어도 일본처럼 망신을 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한국팀이 2002년에 비해 부진했던 첫 번째 이유는 체격이 작아졌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골을 넣어줄 공격수에 치중했기 때문이다.

2002년 이후 아시아팀들과의 경기에서 한국은 늘 미드필더를 지배했다. 게임을 지배하고도 득점을 올리지 못했다. 그 결과 골을 넣어줄 수 있는 기술이 뛰어난 공격수에 관심이 모아졌다. 자연히 수비는 소홀해졌다.

아르헨티나는 워낙 기술이 있으므로 단신 선수로도 된다. 그러나 한국처럼 기술도 없는 주제에 장신도 없다면 확실히 구멍이 보인다. 상대팀은 그 구멍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기만 하면 된다. 이건 정말이지 날 잡아잡수 하는 격이다.

이번 월드컵에서 확실히 증명된 것은 역시 감독의 역량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이다. 감독의 임무 중 하나는 구조론의 원리를 활용하여 최적화 된 형태로 팀을 운용하는 것이다.

구조론의 원리는 팀 간의 궁합에서 드러난다. 영국이 스웨던을 이기지 못한다거나 하는 식의 징크스는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팀의 경기스타일에 따른 궁합이 본래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본이 한국에 지는 것도 그렇고 한국이 사우디에 지는 것도 궁합 때문이다. 구조론은 궁합의 평형원리를 이용하여 약팀이 강팀을 잡는 것이다. 이는 기술의 열세를 체력과 체격으로 만회하여 게임을 교착상태에 빠뜨려 상대팀의 체력을 소진시킨 후 일제히 반격하여 무승부 혹은 승리를 얻어내는 것이다.

구조론의 평형원리를 활용하면 강팀과의 경기에서 비기거나 이길 수 있다. 그러나 팀간의 궁합이 아주 나쁜 경우는 이길 수 없다. 구조론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이를 활용하는 것이 감독의 역량이지만 감독의 역량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팀 간의 궁합은 경기스타일이 비슷할 경우 그 팀의 특징 중 하나를 발전시킨 팀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영국이 스웨덴에 약한 것은 같은 바이킹의 후예들 간에 경기스타일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브라질이 흑인 위주로 구성된 프랑스에 약한 것도 둘 다 개인기가 뛰어난 팀이기 때문이다.

브라질은 개인기 대결을 포기하고 체력이 좋은 젊은 선수 위주로 스피드 대결을 벌였어야 했다. 호나우두의 헤딩슛은 돌고래의 점프를 연상시켰지만 2센티가 부족했다. 그가 2센티만 더 높이 솟구쳤다면 골인이었다. 역시 체력이다.  

한국의 승산은 있다. 예의 네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체격과 체력이다. 왜 체격과 체력이 중요한가? 기술이 안되는 팀이 강팀과 대결할 경우 팀간의 궁합의 원리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일단 체격과 체력이 받쳐줘야 하기 때문이다.

체격과 체력이 받쳐주면 골은 못넣는다 해도 일단 실점을 방지할 수 있다. 우선적으로 실점을 방지하고서야 작전을 세울 수 있다. 이게 안되면 그냥 무너진다. 아무리 작전을 세워도 소용이 없다.

둘째 코칭스태프의 능력을 본다면 아드보카트는 확실히 히딩크를 넘지 못했다. 그는 히딩크와 달리 지도자의 천재적인 영감을 사용하는 대신 토론을 통하여 문제를 풀어가려 했다. 토론은 최악을 방지할 뿐 최선을 얻어내지 못한다. 한국은 최악을 피해갔으나 최선을 얻어내지도 못했다.

셋째 합숙훈련과 평가전은 확실히 부족했다. 한국팀은 막판까지 베스트 일레븐을 확정하지 못했다. 안정환의 후반출장은 경기 전날 4시간 마라톤회의로 결정되었다. 이는 충분한 훈련과 수준높은 평가전이 없었기 때문에 코칭스태프가 선수의 컨디션 파악에 실패한 때문이다.

넷째 동기부여가 약했다. 병역면제 해당선수 9명은 대부분 경기에 출전하지도 못했다.  

이렇게 원인이 분명히 드러났기 때문에 2010년에 대비할 수 있다. 우려되는 부분은 예선에서 아시아팀과 반복하여 대결하면서 체격과 체력문제 그리고 수비문제를 소홀히 하고 골을 넣어줄 공격수에만 치중하다가 전체적인 밸런스가 깨지는 문제다. 일본이 특히 그렇다.

예선에서 승승장구하는 팀이 본선에서 졸전을 벌이는 이유는 예선용팀으로 굳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본선 토너먼트에서 프랑스의 선전을 좋게 보는 이유는 프랑스가 조별예선에서 고전했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지역예선 및 조별예선에서 승승장구 하는 팀이 본선에서 고전하는 경우는 많았다. 반대로 천신만고 끝에 올라간 팀이 본선에서 강한 경우도 많았다. 펠레의 예언이 늘 빗나가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펠레는 예선을 보고 본선을 예상하는데 이 경우 당연히 예상이 빗나가게 되어 있다.

한국팀 역시 일정부분 예선용 팀이 되어 있었다. 차두리를 빼고 박주영을 넣은 것이 그 예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박주영, 이호, 김동진 등이 과연 세계무대에서 통하는가는 미리 검증되지 않았다.

본선에서는 선수비 후공격이다. 수비의 중요성은 스포츠 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기술이 딸리면 작전으로 이겨야 하는데 수비가 안되면 작전을 써볼 여지가 없는 것이다.

기술이 없어서 득점은 못하지만 몸으로라도 막아줄 선수가 있는가 하면 기술이 있어서 곧잘 득점하지만 미드필더를 장악한다는 전제조건을 필요로 하는 선수가 있다. 이 부분을 잘 대비하려면 수준높은 평가전을 많이 치러야 한다. 박주영의 한계는 가나와의 평가전에서 뒤늦게 드러났는데 좀 더 일찍 드러났어야 했다. 강팀과의 더 많은 평가전이 필요했다.

결산한다면 2006년 한국팀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의미있는 성적을 냈다고 볼 수 있다. 다수의 한국인들이 승리의 방법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성과다.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극대화한다면 승리할 수 있다. 승리의 가능성을 발견한 사실에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한국인은 자부심의 결여가 문제다. 자부심의 결여가 지나친 자기비하 혹은 지나친 외국비하로 나타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외국인과 대등한 친구가 되지 못하고 내가 숙이거나 아니면 네가 숙이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려 한다. 반드시 위아래 서열을 결정해야만 안심한다. 일본과 미국을 상전으로 받들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수구꼴통이 있는가 하면 서구를 상전으로 받들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좌파 찌질이도 있다.

동남아인과 아프리카인 혹은 중국, 일본인을 자신의 아래로 깔보아야지만 마음이 편해지는 못난이들도 있다. 어떻게든 위아래를 정하고 서열을 정하고 그것으로 편견과 고정관념을 삼아야 자기인식이 가능한 못난이들이 있다.

친일, 친미, 친서구, 친북, 친외세, 친외래사상 버려야 한다. 중국이나 일본을 깔보는 태도도 버려야 한다. 남의 것을 배우고 모방하는 단계를 이제는 졸업하고 자기 내부에서의 창조력에 발동을 거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언제쯤 세계와 대등한 눈높이에서 사물을 바라보게 될까?

정상에서 본 풍경을 알지 못하면 결코 정상에 설 수 없다. 정상에 오르기 전에 정상에 대한 이미지를 얻어놓아야 한다. 정상의 모습에 대한 이미지 트레이닝이 필요하다.

정상에서는 전모가 보인다. 전모를 발견하고 전부를 욕망하지 않으면 안 된다.  

2등의 목표는 언제라도 1등을 추월하는 것이다. 1등의 목표는 전과목 만점 받는 것이다. 두 사람이 바라보는 지점은 다르다. 시야가 다르다. 둘은 다른 차원의 지평에 서 있다.

2등은 비교한다. 비교하여 앞서려고 한다. 비교대상이 있다. 열등감을 버리고 우월감을 취하려 한다. 1등은 다만 자연스럽고자 한다. 다른 과목이 다 100점인데 한 과목이 96점이면 대문니 하나가 빠져서 앞니가 가지런하지 않은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어떤 위치에서든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우월감과 열등감의 나침반을 버리고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자부심의 결핍에 따른 소모적인 내부갈등의 한국병을 극복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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