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아다리님의 글을 읽고 느낀점 입니다.)

공포의 반복, 연장상영, 혹은 시리즈화를 고통이라고 부를 수 있지않을까?
그런 점에서 에이리언 시리즈는 정말 고통스럽다.
이 공포는 결코 대항할 수 없는 절대우위적 파워를 지닌 자(에이리언)의 침략에서 상정되며,
절망과 희망의 극단을 오르내리면서 우리의 생존력을 시험한다.

그냥 이대로 뛰어내릴까..
요란한 겉포장과는 달리 유달리 생존력이 약한 우리의 미해병대들은 공포에 질린 나머지 자진해서 절망의 신에게 자신을 헌납해버린다.
물론 이 대목은 공포의 가공할 파워를 홍보하기 위한 장치일테이지만..

에이리언은 우리에게 마지막, 궁극의 한가지 질문을 던진다.
너, 이래도 계속 까불거니?
봉쇄된 절망과 지칠줄 모르는 고통의 변주를 듣고서도, 나름의 희망을 동원한 정돈된 삶을 동경하니? 하고 되뇌인다.
영화는 우리의 삶에 대한 조잡스러움과 죽음앞에서의 비겁함을 마음껏, 끊임없이 조롱한다.
값비싼 댓가를 치르며 2시간동안 스크린의 볼모로 앉아있을 수 밖에 없는 우리가 마침내 더없이 초라해질때, 영화는 본래의 의도된 목적을 달성한다.

너희의 그 고상한 권리 따위는, 기껏 죽음하나 어쩌지 못하는 비루한 생명알갱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무자비한 공포채널로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고통은 결코 소통되지 않는다.
고통은 우리의 모든 감각과 사고를 기능정지시키며 무의미의 세계로 내팽개쳐버리기 때문이다.
이 절망적인 순간에 우리의 취할바가 무엇인가?의 질문을, 한편의 영화도 부족해서 시리즈로 던지고 있다.

결국 이 영화에서 내가 찾은 소통의 방법은, 고통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고통 자체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거다.
고통을 옹호하고 고통을 자기속에 함유하며, 마지막 안전지대마저 내놓는 것..
이것만이 고통으로부터 나를 지킬수 있다는 메시지다.
그래서 마침내 그녀는 마지막 작품에서 고통의 신으로 부활했다.

고통을 적대하건 광신하건,
그것과 대립하여 안전을 구하는 순간 절망의 골짜기로 굴러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런점에서 에이리언은 고통(또는 미지)를 끌어안기 위해 모색하는 영화다.
List of Articles
No.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sort
1336 MBC가 사과했다고? 김동렬 2005-12-05 14239
1335 수직구조와 수평구조 image 2 김동렬 2013-02-01 14242
1334 DJ신경망과 노무현 호르몬의 찰떡궁합보고서 image 김동렬 2003-07-09 14243
1333 조선일보가 조용해 졌다? 김동렬 2005-04-18 14248
1332 박근혜는 바보였나? 김동렬 2005-10-24 14248
1331 노무현 지지와 지지자 사이 김동렬 2003-05-20 14249
1330 자연과 인공이 조화할수 있을까요? 꿈꾸는 자유인 2002-10-07 14251
1329 노후보의 점을 보다 무림거사 2002-10-25 14255
1328 과연 지구는 멸망할 것인가? 10 김동렬 2012-12-23 14255
1327 막가는 헌재 김동렬 2004-10-21 14256
1326 검사들이 반발하는 이유..! 김동렬 2005-10-15 14258
1325 토론후기? 심리학도 2002-12-10 14259
1324 국무총리는 MBC 뉴스만 보고 있읍니다 김동렬 2003-07-01 14260
1323 선관위의 투표연령 조정 김동렬 2003-07-21 14261
1322 토론의 백미는 상대방의 실수를 유도하는 것 김동렬 2002-11-22 14262
1321 하품을 하는 이유? 김동렬 2007-07-10 14264
1320 개혁+호남은 옳은가? 김동렬 2007-09-29 14265
1319 당신의 과거를 참을 수 없는 애인 image 4 김동렬 2017-04-27 14266
1318 딴나라로 간 한국의 자발적 노예들 김동렬 2005-10-31 14267
1317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image 김동렬 2004-09-11 14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