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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4036 vote 0 2007.09.30 (20:13:32)

[개인적인 글입니다]

학문의 역사에서 설명이 부족했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보충합니다.

 

가치의 밀도

가치판단의 5 단계가 있다. 표면의 가치와 이면의 가치가 있다. 진, 선, 미, 주, 성으로 갈수록 깊숙히 침투해 들어가 존재의 본질과 맞물리게 된다. 현대성에 대한 수준높은 이해가 된다. 그것이 더 가치가 높다.

● 초등생의 진(眞) - 무엇을 그렸나?
● 중학생의 선(善) - 모델과 닮았나?
● 고교생의 미(美) - 보기에 좋은가?
● 작가주의 주(主) - 한줄에 꿰었나?
● 스타일의 성(聖) - 어디에 놓을까?

초등생은 자신이 무엇을 그렸는지 알리려 애쓴다. 그림은 점점 기호가 된다. 중학생은 제법 실력이 늘어서 모델과 닮게 그릴 수 있다. 고교생은 구도와 밸런스에 신경을 써서 보기좋게 그린다.

화가의 그림이 되려면 테마가 있어야 한다. 그림 속 요소들에 통일성을 부여하여 전체를 한 줄에 꿰는 것이다. 일관성과 내적 정합성을 부여하기다. 주제가 있어야 한다. 메시지를 실어야 한다.

왜 그것을 그렸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작가의 의도가 드러나야 한다. 이 수준에 도달했다면 그림 안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단계이다. 문제는 그림 바깥의 세계다. 이러한 통일성은 그림 바깥에도 있어야 한다.  

진정한 대가는 그 그림을 어디에 걸어둘 것인지를 고민한다. 누구에게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한다. 진정 누구를 위한 그림인가? 그림 안에는 답이 없다. 그림 바깥으로 성큼 걸어나와야 한다.

원래 그림은 귀족이 사는 저택의 거실에 걸렸다. 그 건물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위압감과 경외감을 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 신화를 배경으로 한 그림이거나 아니면 잔뜩 폼을 잡은 귀족의 초상화여야 한다.

인상주의 그림은 지식인의 응접실에도 걸 수 있다. 내 서재의 작은 벽에 커다란 사실주의 화풍의 그림을 걸 수는 없다. 단 한 사람의 진정한 친구를 위한 그림이라면 서양화 보다는 동양화에서 찾을 일이다.

스타일은 모델과 그림과 작가와 관객과 미술관을 통일한다. 그림 밖으로 나와 세상 전체를 한 줄에 꿴다. 그림 속 요소들을 통일할 것이 아니라 그림 밖의 시대배경과 통일해야 한다. 시대정신을 담아내야 한다.

현대회화는 어디에 걸어야 할까? 전람회에? 박물관에? 재벌회장의 집무실에? 청와대 영빈관에? 아니다. 진정한 그림은 저 도시를 메운 사람들의 옷에다 걸어야 한다. 그것이 디자인이다. 누구인가? 몬드리안이다.

몬드리안은 그림을 캔버스에서 해방시켰다. 이제 그림이 어두컴컴한 미술관 안에 갇혀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팝 아트를 비롯한 현대회화의 본질은 그림을 거는 장소를 공간적으로 넓혔다는 데 의의가 있다.

물랭루주의 툴루즈 로트렉이 그렇다. 지평이 넓혀진 거다. 뒤이어 온갖 그림이 탄생하였다. 포스터 그림도 있고 광고판 그림도 의상 디자인도 있고 소설책의 삽화도 있다. 만화도 당당하게 포함이 되어야 한다.

이제 모든 것이 캔버스가 된다. 도시 자체가 캔버스다. 저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싱글벙글한 표정 위에도 그려보여야 한다. 지구 위에도 그려보여야 하고 마음 위에도 그려보여야 한다.

아직 한국인들은 백남준의 퍼포먼스를 이해하지 못한다. 한국인들은 백남준이 무슨 신기한 쇼를 보여줄까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초대받은 자신이 이미 백남준의 그림 속으로 성큼 걸어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당신이 왜 거기에 갔는지를 생각하라. 마음이라는 캔버스 위에 그린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왜 작품과 관객이 분리되어 마주보고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가? 왜 그림이 눈에 보여지는 것이라고만 믿는가?

평론가들의 문제는 아직도 미(美)와 주(主)의 단계에 갇혀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주제의식을 중요시 한다. 그림 속에 무수한 복선과 암호들을 감춰놓고 찾아보라는 식이다. 그걸 찾아놓고 의기양양이다.

프랑스 요리라면 무슨 고급한 재료를 썼는지 알아맞춰 보라는 식이다. 냄새만 맡고도 재료의 이름을 알아맞춰야 미식가다. 요즘 유행하는 와인붐과 같다. 몇년 산 와인인지 혹은 누구네 포도밭의 와인인지 맞춰보라는 식이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에는 온갖 암호와 복선이 숨어있다. 얼뜨기 평론가들의 구미에 딱 들어맞는 영화다. ‘이 영화에는 복선이 서른개나 깔려 있는데 난 알아. 넌 모르지?’ 하는 식이다. 이런 게임은 사실이지 유치한 거다.

평론가들은 부끄러운줄 알아야 한다. 그들은 그림 속에 그리스 신화의 온갖 이야기들을 숨겨 놓고 그것을 관객들에게 설명해 주려 한다. 저 인물이 저런 동작을 취한 것은 무슨 사연이 있기 때문이네 하는 식이다.

쓸데없는 지식자랑이다. 그러다가 인상주의나 표현주의를 만나면 벙찌게 된다. 그림 속에 숨은그림찾기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런 메시지도 숨어 있지 않으므로 도무지 설명하고 해설할 것이 없다.

평론가들은 인상주의를 싫어한다. 아직도 예술을 숨은그림찾기로 여기는 3류 평론가들 좀 치워졌으면 좋겠다. 설명하는 그림은 가짜다. 통하는 그림이 진짜다. 현대회화는 설명되지 않는데 의의가 있다.

완성되면 통한다. 완성된 작가의 완성된 작품이 완성된 관객과 온전하게 통한다. 그림 속에 결이 있고 심이 있고 날이 있으므로 통한다. 이심전심으로 통하지 않으면 그 관객의 수준이 아직 멀었다는 증거다.

 

가치관이란 무엇인가?

철학의 목적은 가치관의 정립에 있으며 이는 ‘내가 세상과 맞서 각을 세우는 지점’을 찾는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나오면 나는 이렇게 맞선다’는 식의 세상을 상대하는 나만의 게임의 룰을 정하는 것이다.

자기류의 룰이 있어야 한다. 룰이 있어야 룰이 같은 사람과 통할 수 있다. 비로소 어깨동무하고 함께 갈 수 있다. 묻노니 세상을 상대해주는 당신만의 룰은 어떤 것인가? 당신의 이상주의는 무엇인가?

세계관과 인생관은 그 가치관을 형성하는 전 단계들이다. 세계관은 과학의 지식에서 얻어진다. 세계는 원래 그 모습이 정해져 있고 인간이 이해하기 나름이다. 인생관은 출신성분에 따라 결정된다. 물론 자신이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 세계관 - 신은 있는가 없는가? 세계의 질서는 일원인가 이원인가? 결정론이 옳은가 상대론이 옳은가? 지구가 도는가 태양이 도는가? 따위들이다.

● 인생관 - 나는 고아인가 아닌가? 나는 부자인가 가난뱅이인가? 미남인가 아닌가? 주류인가 비주류인가? 진정 나는 누구편인가? 따위들이다.

● 가치관 - 그러므로 이제부터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적당히 시류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묻어갈 것인가 아니면 세상과 맞서 내 흔적을 남길 것인가?

인생관이 자기 정체성을 결정한다. 만약 당신이 장애인이라면, 부자라면, 못생겼다면, 외국인이라면, 여성이거나 남성이라면, 키가 크거나 작다면, 당신의 인생관은 바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높이가 달라진다.

●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 세계관
● 나는 누구인가? - 인생관
●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 가치관

세계관은 같을 수 있다. 세계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단지 인간이 그 세계를 이해하는 정도가 다를 뿐이다. 더 많이 이해한 사람이 더 멀리보고 더 높이 난다. 또 과학의 발전에 따라 세계관은 달라질 수 있다.

인생관은 같을 수 없다. 사람마다 환경이 다르고 성장배경이 다르고 출신성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가치관 역시 같을 수 없다. 60억 명에게는 60억 가지 가치관이 있어야 한다. 60억 가지 이상주의가 있어야 한다.

 

돈오점수와 돈오돈수

깨달음은 돈오돈수다. 깨달음의 본의는 소통과 그 소통의 양식에 있기 때문이다. 지식 따위는 안 쳐주는 것이다. 소통의 양식이 진짜다. 원효가 해골바가지 물을 마시고 얻은 것은 초발심이다. 소요자재를 깨달았을 때가 진짜다.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사실 정도는 초등생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러므로 이제부터 어떻게 살것인가다. 파계하고 요석공주와 살림을 차릴 것인가 아니면 계를 잘 지켜 큰 절의 주지를 맡을 것인가이다.

원효의 돈오는 해골바가지 물을 마셨을 때 얻어진 것이 아니라 민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다. 금강경의 이치를 알았을 때가 아니라 대중과의 소통하는 방법을 얻었을 때다.

돈오점수 혹은 점오점수는 스님들이 과학지식이 부족하여 사회에 적응을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고민이다. 산사에서 깨달은 스님이 사회생활에 적응을 못한다. 성철스님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탈이 나고 만다.

과학의 발달이 충분하지 않은 것도 원인이다. 미래에 과학이 더 발달한다면 점수의 문제는 사라질 수 있다. 과학과 깨달음의 불일치는 과학에도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과학이 깨달음에 도달하려면 아직 멀었다.

과학이 없었던 고대에는 점수의 문제가 없었다. 석가의 제자 오백비구는 모두 깨달았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당나라 때도 그랬다. 깨달은 이가 도처에서 속출했다. 불교의 지식이 세속의 지식보다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점수의 문제는 깨달음과 세속적 삶의 불일치 문제로 이는 일정부분 사회의 문제일 수 있다. 스님이 대중과 소통하는 소통방식의 문제다. 절반은 스님이 답을 내야 하고 절반은 사회가 답을 내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회에서 충분히 공부하여 일정한 수준의 과학적 지식을 얻은 후에 깨달음을 구하든가 아니면 사회가 과학을 발달시켜 양자간의 불일치 문제를 해소할 수준에 도달하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지금은 깨달은 사람이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날 스님들은 돈오한 다음에도 점수하고 있다. 사회가 스님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로 나아가지 못하고 대기상태다. 깨달은 스님의 기여가 필요없다는데 어쩔 것인가?

점수는 깨달음 그 자체의 본질과 관련이 없다. 점수는 소통의 양식을 만드는 문제이며 그것은 대개 훌륭한 큰스님이 출현하여 혼자서 다 만드는 거다. 점수의 문제가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제대로 된 큰스님이 없다는 의미다.

저 깨달은 사람과 이 깨달은 사람이 마찰한다.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룰을 정해야 한다. 이는 개인이 수행으로 답을 낼 문제가 아니라 승단이 깨달음의 권위로 해결할 문제이다.

그 권위를 위해 한 명의 제대로 깨달은 사람이 필요하다. 그가 룰을 정하고 다수가 룰을 따르면 문제가 해소되고 점수는 필요없다. 지금 조계종에는 성철같고 원효같고 경허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그들은 룰을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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