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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1918 vote 0 2005.12.21 (14:57:34)

어느 분이 미국 대사관에 가서 간단한 서류를 떼는데 무려 네 시간이나 걸렸다고 한다. 한국사람이라 차별하는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그 분은 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네 시간을 그저 기다릴 수 없어서 대사관 직원에게 물었다. 잠시 밖에 나갔다 다시 들어와도 되느냐고. 그 직원은 말했다.


“그런거 나한테 묻지 마라.”


자기 일이 아니므로 대답해 줄 수 없다는 거다. 다른 직원에게 물었더니 역시 대답해주지 않았다. 누구에게 물어보면 되느냐고 물었더니 역시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거 나한테 묻지 마라.’


왜 포기하는가?

미국 본토에서도 공무원들의 태도가 이런 식이냐고 물었더니 역시 그렇다는 대답이었다. 이것이 미국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공무원 특유의 관료주의가 아니고 미국이라는 나라의 작동방식이라면 문제가 있다.


매뉴얼 대로 가는 거다. 회사라 해도 그렇다. 자리가 지정되어 있고 정해진 업무가 매뉴얼로 안내되어 있다. 거기에 씌어진 대로 일하면 된다. 가게에서 물건을 사도 그렇다. 물어봐도 직원이 물건을 찾아주지 않는다. 매장 위치만 일러주고 가서 찾아보라는 식이다. 매뉴얼을 꼼꼼히 읽어보고 스스로 방법을 알아내는 수 밖에 없다. 물론 다 그런건 아니겠지만 내가 듣기로는 그랬다.


그들은 불친절하다. 남을 도와주지 않는다. 도와주려고 다가가면 총기를 소지하지나 않았는지 의심하고 경계한다. 그들은 기계처럼 행동한다. 정해진 규정과 절차를 강조할 뿐이다. 지만원이 꿈 꾼다는 시스템 공화국이 이런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우리의 미래가 될 수는 없다고 단언하고자 한다.


나는 인간이 그립다. 시스템도 필요하지만 시스템이 만능이 되어서는 안 좋다. 매뉴얼 대로 하는 걸로는 한계가 있다. 어쩌면 미국은 이상한 방식의 전체주의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망가진 거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다인종 다문화 사회에서 그럴 수 밖에 없을 터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고 문화가 충돌하면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서 골치아프게 토론하지 말고 걍 매뉴얼대로 가자는 합의를 이끌어 내는 거다.


유럽도 아마 비슷할 거다. 스위스라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에 스위스 토착어까지 네 언어가 공존한다. 이런 사회에서 매뉴얼 대로 가지 않으면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다.


그러한 선진국의 방식이 바람직한가이다. 우리가 꿈 꾸는 미래가 이런 것이어야 하는가이다. 암울하다. 시스템도 좋고 매뉴얼도 좋지만 만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다른 꿈을 꾸어야 한다.


사실은 그것이 다 궁여지책이다. 다인종, 다민족, 다갈등 사회에서 갈등을 줄이기 위해 고안해낸 차악일 뿐이다. 결코 그것은 최선이 아니다. 나는 묻고 싶다.


“왜 포기하는가?”


그들은 걍 포기한 거다. 앞서가는 그들이 포기했다 해서 뒤따라가는 우리도 포기하라는 법은 없다. 후발주자의 잇점은 선행주자의 시행착오를 답습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 영리해져야 한다. 우리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언제라도 차악을 버리고 최선(最善)을 구해야 한다.


악법은 법이 아니어야 한다

악법도 법이라는 말이 있었다. 근간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실제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준법정신을 강조한 말로 알려져 있는데 현대의 법논리와도 맞지 않는 잘못된 주장이라 한다.


진시황은 법(法)으로 통치하려 했다. 왜? 진시황은 오리지날 중국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진(秦)나라는 오랑캐의 피가 섞인 북방 이민족의 나라였다. 중국이 청동기를 전쟁무기로 쓰고 있을 때 그들은 유목민의 발달된 야금기술과 유목민 특유의 집단주의로 중국을 정복했다.


중국은 크다. 언어도 다르고 문자도 다른 중국 전역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매뉴얼 대로 갈 수 밖에 없다고 그는 판단했던 것이다.


무엇인가? 진시황의 법가주의는 민족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거대 중국을 통치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차악이지 최선이 아니라는 말이다.


악법도 법이라는 식의 엉터리 법치주의가 왜 나왔을까? 박정희 시대는 향촌 중심의 봉건사회에서 도시 중심의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시골과 도시 사이에 문화가 달랐다. 그러므로 말로 해서 안 통하고 매뉴얼 대로 가는 수 밖에 없다고 박독재는 판단한 것이다.


진시황 - 언어와 문자와 전통이 다른 거대 중국을 통합하기 위해 매뉴얼 대로 가야한다고 생각했다.(진나라와 초나라는 글자도 달랐다.)


박독재 - 전통 향촌사회가 붕괴되고 도시가 건설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가치기준을 아우르기 위해 법치주의를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넘 - 인종이 다르고 문화가 다른 거대미국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매뉴얼 대로 가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방식은 최선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울며 겨자먹기’로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다. 궁여지책에 다름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지향할 가치는 아니다.


좌파들의 진실타령도 그렇다. 나는 그것이 진시황의 법치주의 발상, 미국식 매뉴얼 만능주의 발상과 통한다고 본다. 거기에는 인간(人間)이 결여되어 있다.


무엇이 진실인가? 인간이 진실이다. 희망이 진실이다. 진실은 수학책에 있지 않다. 진실은 혼(魂)에 있고 영(靈)에 있고 체험의 공유에 있고 이심전심의 소통(疏通)에 있다.


기계냐 생명이냐

생명도 어찌 보면 하나의 정교한 기계라 할 수 있다. 기계와 생명의 차이라면 영혼의 존재여부인데 식물은 일단 영혼이 없고 동물은? 종교는 논외로 하고 과학으로 논한다면 영혼 따위는 없을 터이다. 검증되지 않았으므로.


그렇다면 아무런 차이도 없는가? 기계와 생명의 차이는 정녕 없는가?


기계는 동력원이 외부에 있다. 기계의 구성소들은 부품 역할을 할 뿐이다. 그들은 바깥에서의 힘에 지배되고 복종한다. 시계가 태엽의 힘에 의존하듯이 기계는 늘 바깥에서 주어지는 힘에 의존한다. 


생명은? 부분을 이루는 세포 하나하나가 독립해 있다. 바깥의 무언가에 의존해 있지 않다. 네티즌들이 각각의 PC를 가지고 독립한 채로 네트워크를 이루듯이.


본질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완전성에 대한 비전이다. 기계는 동력원이 바깥에 있으므로 불완전하고 생명은 동력원이 그 내부에 있으므로 에너지 순환 1사이클이 완전하다.


세계관으로 보자. 기계의 세계관을 말할 수 있다. 세상은 기계와도 같은 정교한 시스템이며 개인은 그 시스템의 한 부품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거다. 만약 그렇다면 개별적인 완전성은 필요하지 않을 터이다.


부품들은 정교하게 맞물려 있다. 부품들은 완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단지 투입된 외력에 의해 기계적으로 작동할 뿐이다. 그러나 생명은 다르다. 낱낱의 세포가 각각 살아있어야 한다. 자기 내부에 미토콘트리아라는 이름의 동력원을 가지고 각자가 스스로 역할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 역시 기계의 톱니바퀴와 같은 정교한 맞물림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완성된 것 끼리의 이심전심 소통(疏通)에 의해 더불어 함께 공명(共鳴)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비전을 가지고 어떤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인가이다. 세상은 기계가 아니므로 인간은 부품이 아니어야 한다. 세상은 커다란 생명이며 인간은 스스로 자기 내부에 비전이라는 이름의 동력원을 가지고, 희망이라는 이름의 동기부여를 가지고 개인이 스스로 완성될 때 기어이 세상과 소통한다. 


기계는 동력원이 외부에 있고 생명은 동력원이 내부에 있다. 기계는 맞물려 있고 생명은 적당히 거리두고 있다. 기계는 작동하고 생명은 소통한다. 생명은 비전이라는 이름의 동기부여가 있고 기계는 그것이 없다.


생명의 세계관, 생명의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서로 톱니처럼 맞물려 있지 않아야 한다. 명령과 지배와 통제를 버리고 독립한 개인이 각개약진하면서도 이심전심 소통하여 짜고 칠 수 있어야 하다.


우리는 집단과 조직을 위해 희생하는 부품이 아니어야 한다. 다만 혼자여야 한다. 스스로 완성되어야 한다. 개인이 강해져야 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사람이어야 한다.


세상 속의 나, 사회 속의 나, 집단 속의 나, 가족 속의 나, 조직 속의 부품으로 존재하는 나로 우리는 존재해 왔을 터이다. 타인에 의해 평가되고 비교된다. 그러한 나는 거짓된 나다. 버려야 한다.


누구에 의해서도 평가되지 않는,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는, 가족에도, 조직에도, 집단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나, 개인의 나, 강한 나를 완성해야 한다.


인간이 대세다

우리의 비전을 이야기 하자. 우리의 희망을 이야기 하자. 미국의 눈치를 보고 일본의 성공사례를 본받고 서구의 가치를 숭상하고.. 그런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그래서는 독립적인 나, 개인의 나, 강한 나가 될 수 없다.


이제는 인간이 대세다. 바깥에서의 힘에 의존하려는 원리주의는 버려야 한다. 기독교 원리주의, 법치 원리주의, 매뉴얼 만능주의, 시스템 만능주의, 진실 만능주의.. 그런 따위는 다인종 다문화의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 마찰을 최소화 하려는 서구인들의 궁여지책에 불과하다.


우리는 차악을 버리고 언제라도 최선을 추구했으면 좋겠다.


시계는 태엽에서 초침까지 전부 맞물려 있다. 부품을 전부 해체해서 일직선 상에 늘어 놓으면 하나의 긴 선분(線分)이 된다. 거기서 단 하나의 톱니가 빠져도 기계는 작동을 정지하고 만다. 그래서 진실이 중요한 것이다.


진실이라는 이름의 톱니바퀴가 한 개라도 빠져버리면 과학은, 그리고 과학의 시스템은 붕괴하고 만다. 그래서 그들은 진실을 숭상한다.


천만에! 이제는 유비쿼터스의 시대다. 무선 네트워크는 톱니처럼 맞물려 있지 않다. 서로는 각자의 입장을 존중하면서 양팔간격으로 떨어져 있다. 인터넷은 생물과 같아서 하나의 라인이 끊어져도 금방 새로운 루트를 찾아내게 되어 있다.


과연 영혼이 있을까? 영혼이 없다 해도 생명현상은 있다. 소통은 있다. 공명(共鳴)은 있다. 울림이 있고 떨림이 있다. 동조화 현상도 있다. 일찍이 이를 직관한 사람들이 그러한 생명현상에 영혼이라는 이름을 붙인 거 뿐이다.


인간만이 완전하다

기계는 불완전하다. 동력원이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조직도 불완전하고 집단도 불완전하고 시스템 역시 불완전 하다. 생명만이 완전하다. 미토콘트리아가 세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완전하다. 비전이 있기 때문이다.


사대주의는 불완전 하다. 동력원이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조중동의 친미, 친일은 불완전 하다. 동력원이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좌파들의 서구숭배도 불완전하다. 동력원이 서쪽에 있기 때문이다.  


완전성에 대한 비전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인류보편의 가치를 우리 안에서 재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세포 안의 미토콘트리아가 되고 우리 안에 내재한 근원의 동력원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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