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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7630 vote 1 2014.12.21 (18:15:59)

     

    왜 이중의 역설이어야 하는가?


    깨달음을 시험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불교에서는 스스로 깨달았다고 선언하고 스승으로부터 인가를 받으면 깨달은 걸로 친다. 그런데 인가권을 가지고 있는 스승은 깨달았을까? 허무한 수작일 뿐이다. 깨달음을 태권도 단증따듯 하는 사이비 집단도 더러 있다. 무술 유단자라는 개념이야말로 없어져야 할 사이비다. 프로바둑기사들의 단도 없어져야 한다.


    아마추어라면 몰라도 프로에 단은 있을 수 없다. 9단이 1단에게 깨지는게 프로의 세계다. 왜냐하면 깨달음은 바로 그 단을 없애는 것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에는 단이 없지만, 깨닫지 못한 데는 단이 있다. 그 문턱을 넘어가야 한다.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자빠지는게 보통이지만, 한 번 문턱을 넘으면 그 뿐이며 프로의 세계에는 단段이 없다. 걸림이 없다.


    이중의 역설은 직접 테스트할 수 있다. 딱 걸리는 거다. 독자 여러분이 이중의 역설을 배운다면 바로 써먹을 수 있다. 다른 사람과의 수준차를 드러낼 수 있다. 이는 신분상승과 같다. 아담과 이브 때만 해도 인간은 짐승이었다. 언어를 깨쳐 동물과 차별화 하니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 더 나아가야 한다. 사람으로 만족하지 말고 지성인으로 올라서야 한다.


    이중의 역설이 사람을 차별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 그런데 어차피 현실사회에서도 지식인과 일반인은 구분된다. 돈으로도 차별되고, 외모로도 차별되고, 갑을관계로도 차별된다. 그러므로 사회의 약자에게는 깨달음이 차별을 극복하는 전복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어차피 차별을 없애지 못하는 세상이라면 깨달음의 역차별로 물타기해야 하는 거다.


    어원으로 보면 ‘패러독스’는 ‘참을 담고 있는 거짓된 표현’이다. 잘 생긴 사람을 ‘밉상’이라고 한다. 너무 잘 생겨서 타인의 질투를 유발하므로 얄밉다. 얄미우니 밉상이 맞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액면으로는 틀렸다. 곧이 곧대로 들으면 안 된다. 맥락을 보고 다시 해석하도록 하는 어법이 역설이다. 이 방법으로 시적 긴장을 유발한다. 그것이 예술이다.


    구조론의 역설은 단순한 자연법칙이다. 거울의 좌우가 바뀌듯이 데이터가 바뀌어 있다. 어릴 때는 골목길이 커보였는데 나중에 다시 가보니 비좁은 골목이다. 골목길이 작아진 것이 아니고 내 몸집이 커진 것이다. 이렇듯 관측자의 시공간적 위치에 따라서 데이터가 바뀐다. 시적 긴장을 유발하는 언어적 표현이 아니라 착시현상처럼 실제로 바뀌는 거다.


    오른쪽 궁둥이를 맞았는데 왼쪽 궁둥이가 아프다면? 실제로 그렇게 되는 때가 있다. 보통의 역설은 ‘사랑하므로 이별한다’는 말처럼 시인이 문장의 기교를 부린 것이다.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맥락을 들여다보면 말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문장 안에서는 거짓이나 둘의 대화 속에서는 참이다. 구조론의 역설은 자연현상이다. 원리는 같다.


    ◎ 소통의 역설 – 한 문장에서 거짓이나 대화의 맥락은 참이다.
    ◎ 구조론 역설 – 데이터는 거짓이나 둘의 상호작용에서 참이다.


    역설은 혼자 인식하는게 아니라 두 사람이 대화하는 상태라는 전제를 상정해야 한다. 역설은 의사소통의 현장에서만 적용된다. 본인은 예쁘면 예쁘다고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남에게 말할 때는 ‘밉상이다’ 하고 거꾸로 말해야 한다. 그러한 비틀기가 긴장을 유발하여 의도를 명확히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냥 예쁘다고 말하면 상대방이 흘려듣는다.


    인간의 의사소통에 역설이 작동하듯이 자연에서도 소통의 현장에서 역설이 작용한다. 어떤 둘이 만나서 정보를 전달하는 지점에는 반드시 역설이 있다. 대표적인 자연의 역설현상이 빛의 3원색과 색의 3원색을 헷갈리는 것이다. 우리는 막연히 빛과 색을 같은 것으로 여긴다. ‘붉은 빛’ = ‘붉은 색’이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다 보면 그게 아님을 알게 된다.


    무엇인가? ‘에너지의 역설’이다. 빛은 자체 에너지가 있고, 물감은 자체 에너지가 없다. 어떤 대상에 자체 에너지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상반되는 효과가 난다. 이렇듯 데이터가 뒤집어지는 역설현상은 하나의 사건 안에 두 번 일어난다. ‘관측자의 역설’과 ‘에너지의 역설’이다. 먼저 관측자의 위치를 판단하고 다음 에너지의 위치를 잘 판단해야 한다.


    ◎ 역설 1 – 관측자의 위치 - 지구가 도는가? 해가 도는가?
    ◎ 역설 2 – 에너지의 출처 – 빛이 빛나는가? 색이 빛나는가?


    에너지의 출처를 헷갈리면 호가호위 현상이 일어난다. 박근혜의 명령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정윤회의 지시였다든가 하는 식이다. 조현아가 아버지 믿고 함부로 나대다가 국민에게 되치기 당하는 식이다. 조현아는 자신의 힘이 아버지에게서 나온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국민과 고객의 지지에서 나온 것이며, 국민이 지지를 철회하면 한 순간에 새 된다.


    41.jpg


    도처에 역설이 숨어 있다. 아니 역설이 없는 곳이 없다. 무엇이든 먼저 관측자의 위치를 찾고, 다음 에너지의 출처를 찾아야 바르다. 일본어를 배우려고 일본인과 전화로 대화하는 친구가 있다. 그동안 일본인은 한국인 친구에게 말해왔다. ‘우리 일본이 문제야. 일본은 이제 희망이 없어.’ 최근에 엔화가 폭락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혐한 등장이다.


    ‘도대체 당신네 한국인들은 왜 그래?’ 한국인은 바뀐게 없는데, 일본인의 태도가 바뀐 것이다. 무엇인가? ‘우리 일본이 문제야’ 하고 자책할 때는 그게 사실은 자신감의 표시였다. 가난한 한국을 동정해서 과자 따위를 보내주기도 했다. 연평도 폭격 때는 비상식량도 부쳐왔다. 한국인에게 보낼 식량을 포장하면서 그 일본인은 속으로 무슨 생각했을까?


    ‘우리 일본은 문제가 있어. 우리 일본은 안돼!’ 할 때 그게 사실은 일본자랑이었던 거다. 그러다 엔화가 폭락하자 기어이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이렇듯 거꾸로 봐야 한다. 자신에게 에너지가 있을 때는 자신에게로 책임을 돌리면서 사실은 자신의 지배를 꾀한다. ‘다 내탓이야.’ 하는 말이, ‘지금부터 내가 너를 팰거다’ 하는 선전포고로 될 수가 있다.


    반대로 ‘이게 다 미국 때문이다.’ 하는 북한의 으름장은 사실은 응석이다. 미국을 향한 구애신호인데 부시와 오바마가 둔감해서 깨닫지 못했다.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는 역설이 작용한 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의사소통 현장에서, 혹은 자연의 상호작용 현장에서 역설은 기본이므로 항상 관측자의 위치와 에너지의 출처를 체크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사형수에게 만찬이 제공되면 ‘가는 날인가?’ 하고 생각해봐야 한다. 여자친구가 선물을 보내오면 ‘명품백을 사달라는 신호인가?’ 하고 탐색해봐야 한다. 인간사회가 그렇듯이 자연에서도 그러하다. 역설은 두 번 일어난다. 두 번 뒤집으면 원위치가 되므로 모르고 그냥 넘어간다. 역설을 몰라도 겉으로는 큰 문제가 없다. 그러다가 조현아처럼 한 방에 간다.


    돌이켜보면 필자가 유년기에 구조론을 사유하게 된 첫 번째 단서가 언어의 역설에서 나왔다. 언어와 의미 그리고 맥락에 대한 관심이었다. 단어 안에는 의미가 있고 대화 안에는 맥락이 있다. 어떤 하나의 존재는 그 자체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호작용 안에 위태롭게 있다. 그 부분은 민감하며 잘 되면 좋은 화음이 되고 잘못되면 불협화음이 된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지식에서 가져오고 지식은 진리에 근거한다. 인간이 진리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존엄을 얻는다. 그런데 회의론이 있다. 과연 진리는 있는가다. 있다해도 알 수 있느냐다. 안다 해도 전달하고 널리 공유할 수 있느냐다. 이러한 회의주의에 대한 답은 언어에 있다. 언어는 타자와 소통하게 한다.


    ◎ 진리는 없다.
    ◎ 진리는 있어도 인간이 알아낼 수 없다.
    ◎ 진리는 안다해도 남에게 전하거나 공유할 수 없다.


    언어는 불완전하나 이와 상관없이 인간은 소통에 실패하거나 성공하는 것이며, 성공한다면 그 성공의 크기만큼 우리는 진리에 도달한 것이다. 소통한다는 것은 복제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극중의 주인공이 화가 났다. 그러자 관객도 덩달아 화가 났다. 그렇다면? 극중 인물의 감정이 복제되어 관객들에게 대량으로 살포된 것이다. 그만큼 진리가 통한 거다.


    그러나 노자 선생의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에서 말하듯이 심오한 진리는 전달할 수 없다. 배우가 관객에게 전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예수의 진의가 오늘날의 기독교도에게 전해졌는지는 의문이다. 조용기의 행각을 보면 오히려 반대로 전달된 것은 아닌가? 내가 생각이 있어도 그것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때로는 그림으로 그려서 설명해야 한다.


    그림설명도 부족하고 동영상으로 보여줘야 한다. 동영상으로도 부족하다. 중력을 동영상으로 나타내기가 참 힘들다. 전혀 나타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연 몇이나 알아먹을까? 중력은 공간의 흐름이다. 지구가 사과를 잡아당긴다는 표현은 틀렸다. 공간의 흐름을 보여주려면 투명한 공간을 컬러로 염색해줘야 하는데 그 진공염색작업이 실로 어렵다.


    공간의 밀도를 나타내기 어렵다. 지구 중심의 한 점에 걸려 있는 힘의 크기를 나타내기 어렵다. 무슨 색으로 칠한다고 그것이 표현되겠는가? 그러나 역설을 안다면 전달이 가능하다. A 아니면 B로 세팅한 다음 A의 부재를 보여주면 B의 존재가 인식되는 것이 역설의 방법이다. B는 투명해서 타인에게 직접 보여줄 수 없다. 반면 A는 불투명하므로 보인다.


    A의 부재를 확인시키면 B의 존재를 납득해야 한다. 그렇게 해도 납득을 못한다면? 예컨대 진화론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일본인은 일본에서 발생했느냐’고 물어보면 어떨까? 일본인은 한반도를 거쳐 대륙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이건 납득하면서 진화는 납득을 못한다고? 같은 말인데 말이다. 세상은 모두 긴밀하게 연결되어 하나로 연동된다.


    ‘일본인 본토발생설’이 부정되는 순간 창조론은 부정된 것이다. 짜장면은 중국집에서 발생했나? 아니면 밀가루가 밭에서 식당으로 운반되었나? 모든 존재는 자리를 바꿔 합성되고 연출된 존재이며 예외는 없다. 영화는 스크린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영사기에서 쏘아졌다. 촛불은 양초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공간에서 증폭된다. 파도가 멀리서 밀려오듯이.


    공간이 없으면 빛도 없고 중력도 없고 지구는 태양을 돌 수 없다. 그 공간이 밀도를 가져서 우주가 연출된다. 이는 스크린이 없으면 영화가 없는 것과 같다. 영화는 영화대로, 스크린은 스크린대로 각자 따로 있는게 아니라 필름과, 불빛과, 스크린의 3자대면 속에 영화가 도출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나 소나 돼지라도 어떤 종은 없다. 개라는 종이 없다.


    소라는 종도 없다. 오직 3자대면에 의한 도출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스크린이나 필름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나머지도 없다.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도 없으므로 하나를 보고 나머지를 안다. A를 통해 B를 안다. 수도관이 없으면 수돗물도 없다. 전선이 없으면 전구도 없다. 로미오가 없으면 줄리엣도 없다. 이렇듯 세상은 온통 역설 위에 구축되어 있다.


    역설이 있으므로 세계가 있고 진리가 있고 나와 그대가 있는 거다. 창조론은 소도 있고 개도 있고 말도 있고 염소도 있고 별도로 있다는 건데 이 중에서 하나가 빠져도 나머지는 있는 거다. 그러나 역설은 소가 없으면 개도 없다는 거다. 하나라도 빠지면 와르르 무너져서 초토화 된다. 싸그리 없어진다. 건물의 기둥과 서까래처럼 서로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는 주어가 없으면 술어가 없다. 명사가 없으면 동사가 없다. 명사 바람과 동사 불다는 어원이 같다. 불다≫불음≫바람이 된 것이다. 입으로 바람을 부니까 ‘부르르’ 하는 소리가 난다. 부르르≫불어≫불음≫바람이 된다. 불어blow≫분다wind도 마찬가지다. 대개 동사가 먼저 나고 살짝 틀어서 명사화 한다. 언어의 완전성 안에 깨달음이 숨어 있다.


    아기는 불완전하게 말한다. 좋으면 ‘좋다.’고 말한다. 왜? 그 말을 들어줄 엄마가 곁에 있기 때문이다. 베이비토크에서 주어는 생략된다. 왜? 주어는 엄마가 대신 챙겨줄테니까 생략해도 무방하다. 책가방을 놓고 가면 엄마가 택시타고 학교까지 가져다 주겠지 이런 거다. 그러나 일곱 살까지다. 여덟살만 되어도 엄마가 책가방들고 학교까지 오지 않는다.


    어른은 주어와 술어를 연동시켜 말한다. 스스로 문장을 책임져야 한다. 말은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있다. 듣는 사람 입장까지 배려해야 한다. 그런데 그 어른들도 대충 문장을 이루면 말을 뱉어버린다. 다들 그렇게 한다. 다들 하는 수준으로는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예수는 다르게 말한다. 자신의 말이 아니라 인류의 말을 자기 입으로 대변인 한다.


    진리의 말, 역사의 말, 자연의 말, 진보의 말을 대리하여 전한다. 내 생각을 말하는게 아니다. 내 생각은 유치한 자기소개로 된다. 서로가 공유하는 토대를 보고 말해야 한다. 작가처럼 말하고, 시인처럼 말하고, 예술가처럼 말해야 한다.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해서 말해야 한다. 좋으면 그냥 좋다고 말하면 상대방이 ‘왜 좋지?’ 하고 묻는 번거로움을 당한다.


    ‘날씨가 따뜻해서 좋아.’ 하고 이유를 대서 말하면 상대방이 한 방에 알아듣는다. 이는 작게 배려하는 것이다. 서로가 공유하는 것은? 에너지다. 에너지의 원천은 봄이다. 이때 상대방은 호응할 거리를 얻는다. 내가 ‘봄이 온 거다.’ 하고 말하면 상대방은 ‘새싹이 돋겠네.’ 하고 응수할 수 있다. 상대방의 말대꾸를 배려해서 말해야 좋은 시인의 말이 된다.


    그러려면? 이중의 역설을 터득해야 한다. 시인은 시적 긴장을 조성하기 위해 화자와 독자 사이에서 역설을 구사하지만 세상은 원래 작용과 반작용 사이에서 긴장되어 있다. 어떤 존재는 그냥 있는게 아니라 현악기의 활과 현처럼 긴장된 만남으로 성립하기 때문이다. 만남이 끊어질 때 존재는 증발한다. TV화면이 꺼지듯이 존재는 한 순간에 작동을 멈춘다.



   199.JPG


    어떤 사람이 맞는 말을 했다면, 그 말은 맞는 말일까요? 천만에. 틀렸습니다. 맞는 말은 당연히 맞는 말이 아닙니다. 듣는 사람이 그 말을 알아들어야, 비로소 맞는 말입니다. 물론 알아들을 리가 없죠. 개나 소가 알아듣겠어요? 쥐와 닭이 알아듣겠어요? 그러므로 한 사람에게 하는 말도 인류에게 하는 말이라야 합니다. 인류가 알아듣는 거죠. 예수의 말이든, 공자의 말이든 인류에게 하는, 인류 자신의 말입니다. 예수가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고, 공자가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죠. 인류가 그렇게 알아듣고 그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인류가 에너지의 원천이므로 인류의 입으로 말해야 바른 언어가 됩니다. 


[레벨:11]큰바위

2014.12.25 (17:25:49)

어떤 엄마가 아들에게 그따위 짓을 하려면 가서 나가 죽어라 했더니, 

아들이 들판에 나가서 농약먹고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네가 엄마의 아들이라면 행동 똑바로 하라고 한 말을 곧이 곧대로 가서 실행한 정말 못난 아들의 행각이었습니다. 한번도 뒤집지 못하는데, 어떻게 두번 뒤집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은 씨잘때기 없는 고민이라고 봐야합니다. 


지금 기독교는 조용기 보고 알수도 없고, 오정현이나 일부 대형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는 알수 없습니다. 

개나 소도 알아듣는 것을 사람이 몬알아먹는 수준.......


나귀도 소도 주인 목소리 알아듣는 판인데, 

사람이 주인 목소리를 못알아먹는 형국. 

그러니가 개, 소만도 못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거죠. 


기독교는 귀납법 성경연구가 망치고 있는데, 아직도 귀납, 귀납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 말을 과학으로 검증하려 든다는 게 현실입니다. 


사진 - 명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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